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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봉
2019.05.26 조회수 : 92

  김원봉

 

 

 


1898.9.28. 경남 밀양 출생


1919.2.     신흥무관학교

1919.11.    의열단
1920.6.      의열단 단장

1926.1.      황포 군관학교 4기생

 

 


1927.8.  김원봉 , 주은래 주도 난창 폭동 참가.


  *

난창 폭동


나무  위키


1. 개요


1927년 8월 1일, 4.12 상하이 쿠데타와 국공결렬로 중국 국민당에서 축출된 중국 공산당이 장시성 난창에서 중국 혁명을 위해 일으킨 봉기를 말한다. 난창 기의(南昌起義), 난창 봉기라고도 한다. 현재 중화인민공화국 인민해방군은 난창 봉기일을 건군 기념일로 삼고 있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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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부 국방군사연구소(현재의 군사편찬연구소)에서 편찬한 중국인민해방군사(1998년작)는 난창 폭동에 대해 군사적으로 혹평하고 있다.


남창폭동은 정치 군사적으로 엄청난 실패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정치적으로는 일반대중이 폭동에 가담하지 않았고 오히려 외면하였으며, 쫓기는 공산군에 저항하고 급식지원을 거부하였다. 군사적으로는 병력과 장비 면에서 국민혁명군과 비교도 되지 않아 전투와 이동 간에 막대한 전투력 손실만 입었다. 즉 남창폭동의 결정적인 패인은 민중의 지지가 없었다는 것이다.
중국인민해방군사, 16페이지.


허나 중국인민해방군사는 정치적 의의 역시 같이 평가하고 있다.


그러나 남창폭동의 진정한 의미는 중국공산주의운동에 있어서 군사력이 한 요소로 등장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중국 공산당이 비로소 그들 스스로의 군대를 가졌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중략) 또한 남창폭동에서 군의 등장은 혁명전략에 새로운 전환을 가져왔다. 즉, 그것은 지금까지는 무력이 동원되지 않은 노동자, 농민의 봉기에 의한 혁명전략이었으나, 남창폭동 이후부터는 군사력을 이용한 인민무력혁명을 기도한 것이다. (중략) 남창폭동에서 3만명의 공산군이 쫓겨 정강산에 도착하였을 때는 6,000명도 못 되는 병력만이 남았는데도 핵심 간부는 건재하여 공산군을 재건할 불씨가 되었다.
중국인민해방군사, 16~17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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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9


[ ...... 조선공산당재건동맹에서 활동 ......

  ...... 레닌주의정치학교를 세워 ......

  ...... 의열단을 무산자전위동맹으로 개편 .......  ]

 

[ ...... 임정폐지운동을 가장 극렬하게 벌인 사람이 김두봉과 김원봉이었다. .......    ]

 

김원봉


나무 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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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봉은 이후 황포군관학교를 4기로 졸업하고, 국민혁명군 장교로 임관하여 군관학교의 교관으로 근무했다.


1927년 8월에는 저우언라이, 주더 등이 지도한 중국 공산당의 출범을 이루어낸 난창 봉기에 참여했다. 그가 이끌던 의열단원들도 중국 국민혁명에 가담하였다.

 

한편 김원봉은 1929년 봄 상해를 떠나 북경으로 활동무대를 옮겼다. 북경으로 간 김원봉은 조선공산당재건동맹에서 활동했는데, 조선공산당재건동맹은 1929년 10월에 북경에서 안광천의 주도로 만들어진 조선공산당의 재건을 위한 조직이며, 여기에서 김원봉은 중앙부 의원으로 활동하였다.

 

1930년 4월 김원봉은 레닌주의정치학교[7]를 세워 교육생을 대상으로 6개월 기한으로 '공산주의 이론', '조직 및 투쟁', '조선혁명사' 등의 교육을 실시하였다. 그리고 1930년 8월 의열단을 무산자전위동맹으로 개편하고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을 계속하였다.


이후 레닌주의정치학교 졸업생을 국내로 들여보내어 노동자, 농민, 학생과 대중운동을 벌이게 하였다.

 


 1931년 9월에 만주사변이 일어나자, 김원봉은 의열단을 부활시켰다. 장제스와 합작을 추진하였으나 장제스의 소극적 항일 노선으로 인하여 좌절된 다음, 1932년 남경으로 가서 조선혁명간부학교를 세우고 요원을 모집, 양성하였다.[8] 다음은 김원봉이 조선혁명간부학교를 설립한 목적이다.


① 일본 제국·만주국 요인 암살, 중요 기관 파괴
② 장래의 혁명조직 준비 공작
③ 만주국 내 반일단체와 제휴, 일본 제국 타도
④ 위조지폐 남발, 만주국 경제 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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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결과, 1935년 7월 4일 김원봉은 독립운동 단체 9개를 묶어 출현한 민족혁명당의 총서기가 됐다. 김원봉을 중심으로 민족혁명당이 결성되자, 거기에서 조소앙은 정강, 정책 기초 위원으로 참가하여 삼균주의를 민족혁명당의 지도 이념으로 채택하도록 하였다. 김원봉이 조소앙의 삼균주의에 공감했던 것과는 별개로, 김원봉 본인이 삼균주의자였다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왜냐하면 조소앙은 3개월 뒤 김원봉이 이끄는 의열단계가 민족혁명당의 중심이 된 데 불만을 품고 당을 탈당하여 다시 한국독립당으로 입당했으며,[10] 삼균주의가 공산주의나 무정부주의와는 다르다는 점을 강조해왔기 때문이다.

 

또한, 조선민족혁명당 결성을 구실로 이 무렵 임정폐지운동을 가장 극렬하게 벌인 사람이 김두봉과 김원봉이었다. 임정은 또다시 존폐의 위기에 처하게 되었고, 임정폐지를 둘러 싼 논전은 임정 여당 역할을 자임해 온 한국독립당 내부의 분열을 야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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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광천 = 1926.12 - 1927.9  조선공산당 책임비서

 

 

 

       1933   김원봉


[ ...... 최후의 혁명 완성시 무산계급이 정권을 획득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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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간부학교 운영과정에서 표방되고 있던 김원봉의 혁명관에 근접할 수 있는 자료로는 〈朝鮮情勢와 本團의 任務〉162)라는 주제로 행한 2기생에 대한 강연내용을 꼽을 수 있다.


그는 1930년대 국내정세를 일제에 의한 정치적. 경제적 예속상황으로 인한 파멸상태로 규정하였다. 그리고 이같은 예속상황을 타파하는 길은 혁명적 방법 뿐임을 강조하는 한편, 혁명적 방법은 대중역량에 의해 뒷받침 될 수 있다고 전제하고 대중역량의 주체로서 노동자·농민을 지적하였다.163)


다음으로 이러한 대중투쟁을 선도할 의열단의 활동방향과 임무로는 국내의 강대한 중심조직 결성과 무장투쟁 전개 방침을 강조하면서 실천적 투쟁을 중시하였다. “이론적 조직은 혁명운동의 수단이고, 직접혁명은 무장수단에 의해서만 전취될 수 있을 뿐이므로 조직적인 무장준비를 이룩하여 혁명세력을 민중의 토대 위에 설정하고, 전민중을 반일투쟁에 동원하여야 한다”는 요지였다.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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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3) 이 훈시 주제에서 표방되고 있는 김원봉의 ‘혁명주체’론을 살펴보면 첫째, 노동계급은 식민지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 가장 심각한 모순에 처해 있는 전투적 집단이므로 이들을 혁명주체 세력으로 삼아야 한다. 둘째, 빈농 처지의 대다수 농민은 노동계급의 계급모순과는 일정한 차이가 있지만 동맹군으로서의 잠재력을 보유하고 있으므로 이들은 계급혁명의 선봉대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셋째, 대지주를 제외한 중·소지주와 자작농은 일제타파와 민족해방을 위한 농민계급의 연대대상이 될 수 있다. 넷째, 어느 정도 낭만적·분산적 성향을 띠는 소시민이나 애국주의적·영웅주의적 입장에서 민족해방을 요구하면서도 세계정세와 국내 제정세에 어두운 민족주의자를 일제타도와 민족해방 성취 단계까지의 동맹세력으로 포괄할 수 있다.


164) 이러한 논리를 뒷받침하기 위해 金元鳳은 당시 한국사회의 특수성으로 식민지·농업국·봉건제의 잔존을 지적하고, 1930년대 전반기 항일 민족운동을 ‘부르죠아 민주주의 운동’ 단계로 규정하였 다. 따라서 반일 식민지 해방을 선결과제로 설정하고 최후의 혁명 완성시 무산계급이 정권을 획득한다는 전술적 입장에 있었다. 그리하여 과거 공산주의 운동은 파벌투쟁에 의한 ‘自家的闘爭’ 으로 인해 과오를 범하였다고 비판하였다. 또한 3·1운동의 실패원인을 지도적 중심조직의 결여와 계획적인 준비 미비에서 구하고, 新幹會運動 또한 민족주의자와의 타협이 불철저하고 현명치 못함에서 기인했다고 규정하여, 그의 지론인 대중투쟁론과 민족협동전선론을 뒷받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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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元鳳의 生涯와 抗日歷程
韓 相 禱*

 

 

 

[글로벌 아이]  김원봉과 장제스의 애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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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년 만주사변이 발발했다. 장제스는 일본에 맞서 한국 독립 세력을 두 채널로 지원했다. 첫째 국민당 중앙조직부 천궈푸(陳果夫·진과부) 채널이다. 김구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총리를 도왔다. 일본 군사정보를 넘겼고 자금을 지원했다. 중앙군관학교 뤄양(洛陽) 분교에서 한국인 장교를 양성했다. 대한민국은 1966년 천궈푸에게 건국훈장을 추서했다.
  


둘째 채널은 특무 조직 군사위원회였다. 만주사변 직후 김원봉이 모교인 황포군관학교 교장 장제스를 찾았다. ‘한·중 협력 반일(反日)’ 건의서를 내밀었다. 과격했다. 국제 여론과 일본 반발을 고려한 장제스는 비밀 조직에 맡겼다. 심복 허잉친(何應欽·하응흠)을 시켜 난징(南京) 근교 탕산(湯山)에 ‘조선 혁명 간부 훈련대’를 조직해 요원을 길렀다. 1937년 중·일 전쟁이 터지자 김원봉은 장시(江西) 중앙군교에서 간부를 양성했다. 1938년 ‘조선의용대’로 발전했다. 장제스는 천청(陳誠·진성) 군사위 정치부장 직속에 배치했다.


  
 1940년 김원봉의 조선의용대는 300여 명으로 성장했다. 김구의 충칭 임정은 한국광복군을 조직했다. 둘의 갈등은 치열했다. 장제스가 나섰다. 김원봉을 압박해 의용대를 광복군에 복속시켰다. ‘광복군 행동준칙 9조’을 만들었다. 참모장은 중국인이, 한국인은 부관만 맡도록 했다. 김원봉은 군권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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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news.joins.com/article/23432372

 

 


1931.9.    만주사변

1932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1932.11.   대일전선통일동맹 참여


1935.7.     民族革命黨  결성

 

 


        1935

 

[ ...... 명패만 남은 임시정부를 존재케 할 필요가 없으니 취소하여 버리자 ........    ]

 

[ ....... 통일이란 미명 아래 공산주의자인 김원봉 일파의 권모가 내포되어 있으므로, 공산주의자들과 통일 운운하는 것은 결국 그들에게 기만 이용만 당하는 것 ........

 ...... 반대파들은 신당참여파들과 결별을 선언하고 임시정부를 사수하기로 결의 ........

 ....... 임시정부를 눈엣가시로 보는 의열단원 김두봉, 김약산[金若山: 김원봉] 등의 임시정부 취소운동이 극렬 ........     ]

 


[孫世一의 비교 評傳]

한국민족주의의 두 類型-李承晩과 金九
 

56. 臨時政府에 복귀하고 韓國國民黨 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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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同床異夢의 統一運動에는 참가 안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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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일신당 조직에 가장 열성적이었던 것은 의열단의 김원봉派였다. 김원봉은 통일동맹에 가입하고 있지 않은 단체까지를 망라하여 단일신당을 조직함으로써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에 입각한 신당의 지도권을 장악할 수 있고, 그렇게 함으로써 중국 국민정부와의 관계에서 자기보다 우위에 있는 金九 그룹의 세력을 누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었다.11) 이러한 사정은 金九의 다음과 같은 술회로도 짐작할 수 있다.
 


  〈이때에 우리 사회에서는 또다시 통일바람이 일어나 대일전선통일동맹의 발동으로 의논이 분분하였다. 하루는 의열단장 김원봉군이 특별면회를 청하기로 남경 秦淮(진회) 강가에서 밀회하였다. 김군이 나에게 물었다.
 

  『현재 발동되는 통일운동에 부득불 참가하겠으니 선생도 동참하시는 것이 어떻습니까?』
 
  『내 소견에는 통일의 대체는 동일하나, 동상이몽(同床異夢)으로 간파되니, 군의 소견은 어떠하오?』
 
  『제가 통일운동에 참가하는 주요 목적은 중국인들에게 공산당이란 혐의를 면하고자 함이올시다』
 
  『나는 그런 목적이 각기 다른 통일운동에는 참가하기를 원하지 않소』
 
  나는 이렇게 말하면서 거절했다.〉12)


 
  1927년 7월에 上海에서 의열단을 정비한 김원봉은 1929년 초에 北京으로 가서 安光泉과 함께 朝鮮共産黨再建同盟을 조직하고, 부설 교양기관으로 레닌주의정치학교를 설립했다. 그리고 동맹의 기관지로 「레닌주의」를 발간하여 청년들의 공산주의 이념 교육에 힘썼다.


1931년에 만주사변[9·18 전쟁]이 터지자 그는 본거지를 남경으로 옮겨 중국 국민정부와 접촉하는 한편 대일전선통일동맹의 결성을 주도했다.13) 이러한 김원봉을 金九는 공산주의자로 단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安恭根은 중국인들에게 『의열단은 코민테른(국제공산당)으로부터 원조를 얻어 한국 혁명운동의 통일을 획책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었다고 한다.14)
 

  金九가 신당에 참여하지 않기로 하자, 金九로부터 격려 연설을 듣고 만년필을 선물받기도 했던 의열단 청년들은 金九를 「민족운동의 적」이라면서 비난했다고 한다.15)
 


  김원봉을 공산주의자라고 생각한 것은 金九만이 아니었다. 신당결성 운동에 참여하고 있던 민족주의자들도 대체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당시 조선혁명당대표로 신당결성에 참여했던 金學奎는 김원봉이 통일을 주장한 것은 〈자기네 공산주의가 중국국민당에 나타나는 것이 불리한 까닭에 그것을 카무플라주하자는 것이었다〉고 적고 있다. 김학규는 金九가 신당결성에 참여하지 않은 이유도 〈통일이란 미명하에 공산주의인 김원봉 일파의 권모가 내포해 있으니 그렇게 불순한 공산주의자들과 통일운동하는 것은 결국 그들에게 기만, 이용만 당할 것이라는 것을 간파하였기 때문이라 한다〉고 했다.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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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國務委員 7명 중 5명이 사직해
 

  金九의 이러한 경고성 편지에도 불구하고 한국독립당은 5월25일부터 사흘 동안 항주에서 임시대표대회를 열어 석 달 전의 제7차 대표대회의 결의를 번복하고 각 혁명단체대표회에 참석하기로 결의했다. 그것은 그동안 김두봉 등 신당 참여파들이 중립파들과 조소앙 등 반대파들을 집요하게 설득한 결과였다.43)


그러나 송병조, 차이석, 조완구, 이동녕, 李始榮, 김붕준 등은 극력 반대했다. 통일이란 미명 아래 공산주의자인 김원봉 일파의 권모가 내포되어 있으므로, 공산주의자들과 통일 운운하는 것은 결국 그들에게 기만 이용만 당하는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44) 그러나 반대파였던 조소앙·박창세 등도 찬성 쪽으로 바뀌어 한국독립당을 해체하고 신당결성에 참여하기로 결정되고, 당원 70여 명이 신당에 합류했다.45) 그리고 이사장 송병조를 비롯한 반대파들은 신당참여파들과 결별을 선언하고 임시정부를 사수하기로 결의했다.46)

 
  이렇게 하여 1년 넘어 우여곡절을 겪은 신당조직 운동은 마침내 1935년 7월5일에 民族革命黨의 결성을 보게 되었다. 이때의 일을 金九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그로부터 소위 5당 통일회의가 개최되니 의열단, 신한독립당, 조선혁명당, 한국독립당, 미주 대한인독립당이 통합하여 조선민족혁명당이 탄생하였다. 5당 통일 속에는 임시정부를 눈엣가시로 보는 의열단원 김두봉, 김약산[金若山: 김원봉] 등의 임시정부 취소운동이 극렬하였다.


당시 국무위원 김규식, 조소앙, 최동오, 송병조, 차이석, 양기탁, 柳東說(유동열) 일곱 사람 가운데 김규식, 조소앙, 최동오, 양기탁, 유동열 다섯 사람은 통일에 심취하여 임시정부 파괴에 무관심하였다. 이것을 본 김두봉은 임시 소재지인 항주에 가서 송병조, 차이석 양인을 보고, 『5당 통일이 되는 차제에 명패만 남은 임시정부를 존재케 할 필요가 없으니 취소하여 버리자』고 강경하게 주장하였으나, 송병조와 차이석 두 사람은 강경히 반대하였다. 국무위원 일곱 사람 가운데 다섯 사람이 직책을 내놓으니, 국무회의를 진행시킬 수가 없었다.〉47)


 
  金九가 김두봉을 의열단원이라고 한 것은 착오이다. 김두봉은 한국독립당의 대표로 통일동맹의 신당결성 작업에 참가하고 있었다. 국무위원 다섯 사람은 따로따로 임시의정원에 사표를 제출하고 민족혁명당 결성작업에 참여했다. 조소앙은 사직을 하게 된 경위를 가장 자세하게 적었는데, 그는 이번의 신당 운동은 종래의 임시정부 방침이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도 의정원 의원직은 사임하지 않았다. 그는 김규식과 김두봉과 함께 신당의 규약제정위원으로 선임되었다.48) 양기탁은 4월27일에, 김규식은 5월25일에, 조소앙은 6월19일에, 최동오는 각 혁명단체대표대회가 열리고 있던 6월26일에 각각 사표를 제출했다. 유동열의 사표제출 날짜는 확실하지 않다.49) 조소앙과 함께 한국독립당 대표로 참석한 양기탁은 신당 위원장에 내정되었고, 대일전선통일동맹 결성 때부터 주동적 역할을 했던 김규식은 미주 한인독립당 대표자격으로 참여했다. 최동오와 유동열은 만주에서 결성된 조선혁명당 대표였다.

 
 
  「韓國民族革命黨」이냐 「朝鮮民族革命黨」이냐
 

  6월 초순 들어 통일동맹 중앙 간부 등이 중국 국민정부 군정부 당국에 대하여 〈새로 조직되는 재중 한국인 독립운동단체의 행동은 종래와 같은 지리멸렬한 것이 아니라 하나의 통제 아래 원대한 이상을 향하여 매진하는 것으로서, 비단 한민족의 이익뿐만 아니라 나아가서는 중국 전체의 민중을 행복으로 이끌 것은 명백하다. 따라서 중국 정부에서는 상당한 원조를 해줄 것을 바란다〉는 청원서를 제출했다.50) 그것은 신당운동의 직접적인 동기가 임박한 대일 전면전을 앞두고 金九파에 맞서서 중국 국민정부의 지원을 기대한 데서 나온 것임을 말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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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5


[ ......  서기장 김원봉과 조직부장 김두봉이 당무의 주도권을 행사 .......

   ...... 석 달 만에 조소앙·박창세·문일민 등 한국독립당계 인사 6명은 탈당 .......


   ...... 조소앙 등은 민족혁명당을 유물론에 입각하여 무산계급의 독재적 정치를 유일수단으로 하는 공산주의 정당으로 규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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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趙素昻 등 6명의 民族革命黨 탈당
 


  민족혁명당은 당의 주도권 문제를 둘러싸고 출범하자마자 분열되었다. 중앙집행위원장도 선출하지 않고 서기장 김원봉과 조직부장 김두봉이 당무의 주도권을 행사했다. 김두봉은 한국독립당 소속이면서도 정치적으로는 의열단과 같은 입장을 취해 왔었다. 이러한 사실은 통상적인 당무에서뿐만 아니라 당의 앞으로의 진로 전반에 관해서도 의열단의 뜻이 강력하게 반영될 것임을 예고하는 것이었다.73)


  민족혁명당이 결성된 지 석 달 만에 조소앙·박창세·문일민 등 한국독립당계 인사 6명은 탈당을 선언했다. 조소앙의 직접적인 탈당 동기는 인사문제에서 소외되었기 때문일 것이나, 그가 내세운 가장 근본적인 결별 이유는 이념의 차이였다. 조소앙 등 6명은 9월25일에 「한국독립당 재건선언」을 발표한 데 이어, 10월5일에는 한국독립당 임시 당무위원회의 명의로 「黨員同志에게 告함」이라는 장문의 성명서를 발표했다. 이 글에서 조소앙 등은 민족혁명당을 유물론에 입각하여 무산계급의 독재적 정치를 유일수단으로 하는 공산주의 정당으로 규정하고, 자신들이 탈당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민족주의의 독립운동은 원칙상 사회주의자의 국제관과는 판연히 다른 감정과 이론을 가지는 것이다. 민족의 경제문제만을 중심으로 하여 국가의 말살과 주권의 포기와 자기 민족의 과정을 무시하는 공산주의자와는 한층 氷炭不相容(빙탄불상용)의 혈분적 상반성을 가지는 것이다. 만일 원칙상 상치되는 것을 서로 양해해서 일시적으로 敵對戰線을 확대 과장하려는 공동정책에서, 또는 자기중심의 진로를 획득하기 위해 동상이몽적 상호 이용의 천박한 소견만으로는 백발백불중의 결과에 爾詐我虞[이사아우: 너를 속이고 나는 즐김]의 幻劇(환극)을 산출할 뿐이니, 국내의 신간회와 국외의 촉성회의 합동이 곧 그러한 환극이었다.…〉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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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孫世一의 비교 評傳]

한국민족주의의 두 類型-李承晩과 金九
56. 臨時政府에 복귀하고 韓國國民黨 결성

 

 


         1937


[ ......  임시정부를 사실상 인정하지 않고 있는 민족혁명당 ........    ]

 

[ ...... 의열단 분자만이 민족혁명당을 지지 ......

  ...... 겉으로는 민족운동을 표방하고 이면으로는 공산주의를 실행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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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中_日전쟁의 발발을 계기로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한 독립운동단체의 합동문제가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민족혁명당 결성에 참여했던 李靑天 등 조선혁명당계열의 인사들은 김원봉의 독주에 불만을 품고 1937년 4월에 민족혁명당을 탈퇴하고 조선혁명당을 다시 조직함으로써 민족혁명당에 대립하는 右派민족주의 단체는 金九를 이사장으로 하는 한국국민당과 趙素昻 등의 한국독립당과 함께 모두 세 단체가 되었다. 그러나 한국독립당과 조선혁명당은 심각한 재정난에다 사람도 부족하여 운영난을 겪고 있었고, 한편 임시정부의 지주정당인 한국국민당으로서는 임시정부를 사실상 인정하지 않고 있는 민족혁명당에 대항하기 위해 한국독립당 및 조선혁명당과의 제휴가 필요했다. 3당이 합동을 함으로써 국민정부와 각계 중국인들의 집중적인 지원도 기대할 수 있을 것이었다. 金九는 이때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노구교 사건으로 중국은 일본에 대한 항전을 개시하였다. 한인의 인심도 불안케 되었는데, 5당통일로 된 민족혁명당은 족족 분열되어 조선혁명당이 또 한 개 생기고, 미주대한인독립단은 탈퇴하고, 의열단 분자만이 민족혁명당을 지지하게 되었다. 그같이 분열되는 내용은 겉으로는 민족운동을 표방하고 이면으로는 공산주의를 실행한다는 것이었다.

시국은 점점 급박해져서 우리 한국국민당과 조선혁명당, 한국독립당과 미주와 하와이의 각 단체를 연결하여 민족진선을 결성하고, 임시정부를 옹호 지지하여, 정부는 점점 발전하게 되었다.〉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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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 楠木廳사건과 韓人기독교회의 新築

[孫世一의 비교 評傳]
한국민족주의의 두 類型-李承晩과 金九

 

 

 

1936.12.   시안 사건 . 제2차 국공합작.

1937.7.7 - 중일 전쟁

 

1937.12.     남경에서 조선민족전선연맹 (약칭 민족전선) 창설

1938.10.10.  漢口에서 조선의용대 창설

 

1938.10.   장개석, 공산당견제 시작

1940.12.   신사군 사건. 장개석, 중공군 포위공격

1941.      연합군, 일본에 선전포고

 

 

        *  인터넷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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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공산당의 창의에 따라 1938년 7월 조선 ‘민족전선’ 리사인 조선민족혁명당총서기는 장개석에게 조선의용대를 성립할데 대한 방안을 교부했다. 이 방안은 당시 국민정부군사위원회 정치부 부부장인 주은래와 정치부제3청 청장인 곽말약의 대폭적인 지지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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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1.6.

 

     조선민족혁명당 임시정부 참가 결의

    '조선의용대'도 광복군 제1지대로의 편입에 동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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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1940년, 3개 지대 중 2개 지대가 중국 공산군이 집결하고 있는 중국 화북지역으로 이동하여, 의용대 사령관 김원봉의 지휘하에서 이탈하자 김원봉의 힘은 급속도로 약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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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1941년 6월 조선민족혁명당은 제6회 전당대표대회에서 임시정부 참가를 결의했고 '조선의용대'도 광복군 제1지대로의 편입에 동의하였다. 여기에 반발한 남아있던 일부 사회주의계열은 조선의용대에서 이탈, 화북의 김두봉·김무정이 이끄는 조선독립동맹을 찾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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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2 


조선독립동맹(독립동맹) 결성,  주석 김두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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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두봉은 연안에서 최창익,무정,한빈 등과 더불어 1942년 조선독립동맹(독립동맹)을 결성하여 주석에 취임했다.


독립동맹은 자체적으로 간부를 양성하기 위해 조선혁명군정학교를 설치했는데,이는 의용군들에게 군사지식을 가르치고 정치학습을 시키기 위한 것으로 군정학교 교장은 김두봉이 겸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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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두봉(金枓奉)


[ ..... 1920년에 이동휘(李東輝)를 중심으로 한 공산주의자 모임에 가담하여 공산당에 입당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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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임시정부 초창기에는 대한민국임시의정원 의원을 지내는 등 민족주의적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1920년에 이동휘(李東輝)를 중심으로 한 공산주의자 모임에 가담하여 공산당에 입당하였다.


한편 한문에 깊은 소양을 쌓고 한글연구에 있어서도 선구자적 위치에 있던 그는 1922년 상해의 새글집사에서 30여 만의 우리말 단어를 수록한 『깁더조선말본(精解朝鮮語文典)』을 출판하기도 하였다. 1923년에는 고려국(일명 고려공산당 총무국)의 간부로 활동하였고, 1924년에는 상해 교민단의 학무위원장에 선출되어 교민자녀교육기관인 인성학교(仁成學校)에 관계하는 한편, 국어와 역사를 가르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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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09023

 

 

  *****    김두봉


1946.2.8.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 부위원장
       2.22. 인민회의 상임위원회의 의장

1946.3.     독립동맹을 조선신민당으로, 조선신민당 위원장
1946.8.     조선신민당,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과 합당

1948.4.     남북협상 북측 대표

1948.9.     인민위원회 상임위원회 위원장,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가수반

1952        신년사를 발표

 

 

 


    *     장준하의  김원봉 평가


   [ .....  이미 판에 박힌 공산분자의 한 사람 .......

     .....  계략을 써서 .... 임시정부와 광복군에 대한 불신임을 조장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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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사람씩 따로 불러다가 술을 사 먹인다든가 혹은 금품으로 매수하는가 하면 조선민족혁명당의 김원봉 계열에서는 심지어 미인계를 쓰기도 하였다."

- 장준하, 『민족주의자의 길』(박경수, 돌베개, 2003년 8월 5일)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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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김구의 측근이었던 임시정부 내 보수 인사 민필호는 '김원봉은 사사건건 김구에게 대들었다'며 그를 "교활한 공산주의자"라고 비난했다.


장준하 역시 '비록 그가 김규식 박사를 당수로 업고 이끌고 있는 조선민족혁명당의 부당수로 있기는 했으나 이미 판에 박힌 공산분자의 한 사람이었다'며 김원봉을 공산주의자로 지목, 비난했다.


장준하는 김원봉의 영입 노력 역시 비판했다. 일본군을 처음 탈출한 장준하 일행이 김원봉과의 연대를 거절하자 김원봉은 이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노력했는데, 이때 장준하는 김원봉이 동지들을 이간질하려고 했다는 의혹을 제기한 것이다. 그러나 김원봉은 계속 사람을 보내 이들을 설득하려 했는데, 여기에서 장준하는 또다시 김원봉이 일본군 탈영병, 학도병 무리 사이에 이간질을 획책했다고 증언했다. 장준하는 '김약산의 부하로 파견된 분견대장의 설득 공작이 실패한 것을 알아차린 그들은 곧 우리에게 이간 공작을 시작했다'고 그의 저서 돌베개에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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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봉은 자원입대 또는 강제징집으로 일본군으로 입대, 일본군에서 탈출한 한인을 적극 영입하려 하였는데, 장준하는 그의 책 돌베개에서 '김원봉이 일본군 출신 한인들에게 임시정부와 광복군에 대한 불신을 조장하고 이소민 등을 파견하여 인척인 일본군 소위 출신 황용주 등을 끌어들이려 한다'고 보았다. 장준하는 그가 계략을 써서 일본군 출신 한인에게 임시정부와 광복군에 대한 불신임을 조장한다 하여 이소민 등에 대한 자료를 지청천에게 보고했다.[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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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봉  나무 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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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7.7.    장준하, 일군 탈출
1945.1.31.  장준하, 중경 임시정부 도착

 

 

       1945.8.13.


[ .... 임시의정원의 권한을 장차 성립될 전국 통일적 임시의회에 봉환하기로 하고 의정원의 직권을 정지하는 것이 정당하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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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원봉은 일제 패망이 확실해진 무렵부터는 임정 해체를 요구하기 시작했다. 일본이 항복 의사를 표시한 후인 1945년 8월 13일 김원봉은 20여 명의 비한독당 의원들과 연서(連書)로, “대한민국의 주권을 27년 이래 임시정부 소재지에 거주하는 독립운동자만 행사해온 것은 부당한 일이었다…. 임시의정원의 권한을 장차 성립될 전국 통일적 임시의회에 봉환하기로 하고 의정원의 직권을 정지하는 것이 정당하다”는 제안서를 임시의정원 의장에게 제출했다. 3년 넘게 몸담고 있던 자신의 피란처를 해체하라고 요구한 것이다.
 


  일본의 항복 이후 김원봉 등의 임정 해체 공세는 더 격해졌다. 8월 23일 김원봉 등 의원 19명은 내각 총사직 및 ‘간수(看守)내각’ 조직을 제안했다. 간수내각이란 임정의 잔무를 처리하는 기구를 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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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monthly.chosun.com/client/news/viw.asp?ctcd=F&nNewsNumb=201906100027

김원봉 독립운동의 실체
1930년대부터 공산주의 운동, 臨政 파괴 획책

글 : 주익종  이승만학당 교사

 

 

 

       1945.12.2.  김원봉 환국

 


       1946.1. 비상정치회의 탈퇴,  민전참가

 

[ ...... 김원봉은 ... 1월 23일 성주식·김성숙과 함께 .... 탈퇴성명을 발표하고  비상정치회의를 떠난다. .......    ]

 

[ ..... 2월 15일 .... 민전 전국결성대회에 참석한다. 김원봉과 장건상·김성숙·성주식 4인은 사회 李如星에 의해 낭독된 민전참가 성명 ......

 ...... 吕運亨·朴憲永·許憲·白南雲과 함께 5인 공동의 장으로 선출 .......    ]

 


金元鳳의 生涯와 抗日歷程


韓 相 禱

國史館論叢 第18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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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정은 1월 19일 비상국무회의를 거쳐 1월 20일 非常政治會議籌備會를 소집하였다. 우파 18개 단체만이 참가한 이 회의는 임정의 우파노선 지향을 반증하는 동시에 민족협동전선운동의 포기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우려는 1월 22일 李承晚이 이끄는 獨立促成中央協議會의 비상정치회의 참여로 더욱 고착화되었고, 김원봉은 이튿날인 1월 23일 성주식·김성숙과 함께 1,800여 자에 이르는 탈퇴성명을 발표하고 비상정치회의를 떠난다. 이로써 1942년 중경에서 성립되었던 민족주의 우파와 중간파의 민족협동전선은 붕괴되었고, 김구
와 김원봉 간에 형성되었던 연대관계도 종말을 고하였다. 비록 국내기반이 취약한 이승만으로 부터의 제휴 제의가 있었다372)고 하지만, 이는 김구와의 합작보다도 더욱 성사되기 어려운 제안이었다. 일제하 항일투쟁 과정에서 중간노선을 견지해 왔던 세 사람은 비상정치회의 탈퇴성명을 통해 임정의 우편향과 좌파배제를 비판하는 동시에, 우파와의 타협을 거치지 않은 좌파진영의 민주주의민족전선(이하 ‘민전’)결성 움직임 또한 민족분열을 재촉하는 구실에 불과한 것으로 지적하여 중간노선의 견지를 분명히 하였다.373) 또한 이들은 1


 373) 〈朝鮮日報〉 1946년 1월 24일, 《資料大韓民國史》1, pp. 897∼898. 이 성명에서 표방된 이들의 민족협동전선론 요지는 첫째, 비상정치회의주비회와 민전의 통일을 통한 명실상부한 민족협동전선의 결성. 둘째, 친미·친소의 대외 평형정책 견지. 셋째, 좌우대립 으로 야기되는 테러행위 배격. 넷째, 민족반역자와 부일배의 배제이었다.

 

월 25일 공동성명서를 통해 비상정치회의 탈퇴와 민전 불참여 입장을 확인하였다.374)


김원봉은 비상정치회의를 탈퇴한 후 즉시 중간노선을 표방하는 각 종교단체 대표 및 李克魯 등과 함께 좌우편향의 극복을 통한·명실상부한’ 민족협동전선의 결성을 시도하였다.375) 그러나 해방정국의 정세는 김원봉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흘러갔고 좌우진영은 각기 독자적인 발걸음을 재촉할 따름이었다.

결국 비상정치회의주비회는 2월 1일 非常國民會議로 개조되었고, 비상국민회의는 2월 14일 미군정 사령관의 자문기관인 南朝鮮大韓國民代表民主議院으로 개편되었다. 이와 함께 민전도 2월 15일 결성대회를 개최함에 따라 좌우파의 결별은 정치적 현실로 다가왔고, 그것은 김원봉에게 있어서도 선택의 순간이 임박했음을 알리는 것이었다.

 

김원봉은 2월 15일 종로 기독교청년회관에서 개최된 민전 전국결성대회에 참석한다. 김원봉과 장건상·김성숙·성주식 4인은 사회 李如星에 의해 낭독된 민전참가 성명을 통해, 비상국민회의의 남조선 대한국민대표 민주의원 개편 사실을 민전과의 합작 거부로 규정하고, 그들의 민전참가 목적이 좌우 양파의 통일단결을 통한 독립·자주·통일·단결 정권수립에 있음을 천명하였다.376)

이들 4인이 회의장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崔益翰이 강령을 낭독 중이던 오후 2시 경이었다. 의장 李泰俊의 소개로 등단한 김원봉은, 민족의 자유와 행복은 민주주의 국가 건설에 달려 있으며 새로운 조국의 건설은 미·소를 비롯한 연합국과 ‘혁명전사’·‘민중’에게 부과된 의무라고 주장하였다. 계속하여 그는 민전의 성격을 ‘민주주의 정권을 수립하는 과도적 임시의회’로 규정하고, 좌우합작을 통한 통일정부 수립을 지향하는 자신의 정치적 주장을 다음과 같이 피력하였다.


민주주의는 독선적이 아닙니다. 언제든지 엄격한 자기비판을 하여 과오를 범치 말고 남북일체를 규합하여 속히 임시국회를 열어 강력한 우리의 통일정부를 수립하도록 하여야 할 것입니다.377)


회의 둘째날인 2월 16일 소집된 민전 중앙위원회 1차 회의에서378) 그는 吕運亨·朴憲永·許憲·白南雲과 함께 5인 공동의 장으로 선출되었다. 이로써 민전의 정치적 위상은 한층 강화되는 셈인데, 임정 군무부장이었던 김원봉과 임정 내 중간파 인물들의 민전참여는 좌파진영이 표방하고 있던 일제잔재 세력과 민족반역자에 대한 공동투쟁이라는 정치적 명분을 강화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곧 이어 민전은 하부조직 결성에 착수하였고, 3월 10일 경부터 각지에 순회강연대를 파견하였다.379) 김원봉은 경상도 지역을 순방하며 하부조직 결성에 영향력을 행사하였고, 이 때 고향인 밀양을 방문하였다. 30년 만에 이루어진 ‘將軍’의 귀향이었다.380) 현재 밀양에 거주하고 있는 사촌동생 泰槿씨의 기억에 의하면, “밀양 읍내에서 개최된 환영대회에는 당시 이 지방 군정 책임자인 미군 대위가 환영사를 하였고, 그의 이름을 동경해 오던 주민들의 환영은 대단하였다” 한다.381)


이후 김원봉은 민전의장 자격으로 ‘6·10만세운동 20주년기념 및 미소공동위원회 속개촉진 시민대회’를 주도하는382) 등 민전의 공개행사에 적극 참여해 나아갔다. 또한 이 해 10월 이른바 ‘10월 폭동’이 발생하자 김원봉은 민전조사단 단장 자격으로 대구·부산 등 경상남북도 일원을 방문하였으며,383) 이로 인해 10월 21일 성주식과 함께 성북경찰서에 연행 구금되기도 하였다.3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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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6.2.   김원봉 --- 민전  공동의장

 

 [ ...... 임시정부를 탈퇴한 후 1946년 2월 14일에 결성된 민주주의민족전선 중앙위원 ...  공동의장 ........
 
  ...... 조선민족혁명당은 6월 말 ... 인민공화당으로 개칭 .... 신탁통치 지지, 각지 인민위원회 조직을 통한 임시정부 수립, 토지의 무상몰수·무상분배, ...민전에 대한 지지 표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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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익 단체인 민주주의민족전선(약칭 민전)에서 활동한 김원봉은 신탁을 반대하는 행위를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에 비유하여 비판했다.


임시정부를 탈퇴한 후 1946년 2월 14일에 결성된 민주주의민족전선 중앙위원에 선출되었고  공동의장 5인 중의 한 사람으로 추대되었다. 이때 조선민족혁명당은 6월 말 김원봉을 위원장, 성주식을 부위원장으로 하는 인민공화당으로 개칭하였고, 신탁통치 지지, 각지 인민위원회 조직을 통한 임시정부 수립, 토지의 무상몰수·무상분배, 노동자·농민에 대한 선전활동 강화, 민전에 대한 지지 표명을 정치노선으로 삼았다. 그리고 김원봉은 좌우합작을 위해 활동하는 조선인민당 당수였던 여운형을 도와 나섰다.[16]


그래서 1946년 6월 27일에는 김규식과 좌우합작 문제로 회담하였으며, 7월 중순 인민공화당에서 '좌우합작에 관한 4원칙'을 제시하기도 했다.


 그러던 중에 대구 10.1 사건이 발발하자, 민전 조사단 단장 자격으로 대구, 부산 등 경상남북도 일원을 방문했다. 이로 인해 사건의 배후로 몰려 10월 21일 성주식과 함께 성북경찰서에 연행 구금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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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경찰에 따귀 맞고 월북? 北 눌러앉은 김원봉의 행로


 [중앙일보]  2019.04.14

  유성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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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갈등은 1942년 10월 김원봉이 이끄는 민족혁명당이 전격적으로 임시정부에 참여하면서 임시 봉합됩니다. 김원봉은 김구(주석)보다 아래인 한국광복군 제1 지대장을 맡았습니다. 결국 김원봉이 고개를 숙인 셈이었는데 여기엔 현실적 고민이 작용했습니다.
  

첫째, 중국 국민당에서 임시정부의 정식 승인을 시사하면서 양측의 통일을 제안했다는 점입니다. 즉, 김구의 손을 들어준 셈이 됐습니다. 김원봉으로서는 실망스러웠지만 거절하기도 어려웠습니다. 향후 국민당의 원조가 임시정부로 일원화되면 김원봉으로서는 조직을 꾸리기도 어려운 상황이었기 때문이죠.


둘째, 김원봉이 양성했던 조선의용대 일부가 화북 지역의 중국 공산당으로 넘어가면서 조직이 위축됐다는 점입니다. 김원봉 세력으로선 더는 독자 노선을 고수하긴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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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2월 김구가 이승만과 손잡고 비상국민회의를 만들면서 임시정부 계승을 공식 천명하자 김원봉은 임정 탈퇴를 선언했습니다.
  

임시정부의 법통을 내세운 비상국민회의가 조직되면 대통령과 주석을 지낸 이승만-김구의 우파 투톱 체제가 확고해지는 것은 뻔했습니다. 1940년대 제1 지대장으로 임정에 뒤늦게 승차한 김원봉으로선 설 공간이 별로 없었습니다.

 

그 대신 김원봉은 남조선노동당을 주축으로 한 좌파 5개 단체 연합체 ‘민족주의민주전선(민전)’에 합류했습니다. 일찌기 좌파 계열 노선을 걸었던 김원봉으로서는 당연한 수순이었을지도 모릅니다. 민전은 김원봉을 비롯해 여운형, 박헌영, 백남운, 허헌 등 굵직한 좌익 계열 인사들이 공동 대표를 맡았습니다. 훗날 여운형을 제외하곤 모두 북한의 초대 내각에서 고위직을 맡게 됩니다.


민전은 토지개혁(무상몰수·무상분여), 중요 산업 국유화, 정권을 미군정에서 인민위원회로 즉시 이양, 친일파 민족반역자 친파쇼 반동 거두 배제 등을 내세웠는데 북한의 김일성 세력이 진행한 정책과 매우 유사했습니다. 미군정이나 남한 내 우파 세력을 자극할 수밖에 없었지요.

  
이런 환경에다가 정판사 화폐 위조 사건 등이 겹치면서 미군정은 1947년 8월부터 민전과 좌파 단체에 대한 대대적인 소탕에 나섭니다. 이미 박헌영 등 굵직한 좌익계 거물들은 하나둘씩 월북을 선택했고, 김원봉의 정치적 위치는 위축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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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news.joins.com/article/23440159

 

 

 

       1946.3.9.  민전


[ ...... 南朝鮮에서 民主主義를 대표하는 것은 民戰이다. ........     ]

 

조선일보 1946년 03월 09일   


민전 의장단, 외국인 기자단과 회견

 

民主主義民族戰線 議長團은 9일 오전 11시부터 시내 仁寺町 民戰事務局에서 外國人記者團과 만나 다음과 같은 일문 일답을 하였는데 議長團側에서는 許憲, 朴憲永, 金若山, 洪南杓, 李康國, 張建相, 李如星과 外國人記者는 AP의 탈스바크, UP의 호잇트, 뉴욕타임즈의 존스톤이 출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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問) 北朝鮮臨時人民委員會와 民主議院이 합작하여 政府를 수립하는 경우에 협력하겠는가?


(答) 반대이다. 南朝鮮에서 民主主義를 대표하는 것은 民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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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 수립에 참여 .......

 ....... 삼팔선 이남 지역을 대표하는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360명을 선출하는 작업을 주도 ........    ]

 

[ ..... 3상회의 결정을 전면적으로 지지 .......

  ..... 토지개혁(무상몰수.무상분여), 중요 산업 국유화 ........

  ...... 친일파 민족반역자 친파쇼 반동 거두들을 완전히 배제 .......

  ....... 정권을 군정으로부터 인민의 자주기관인 인민위원회에 즉시 이양할 것. ........     ]

 

 

민주주의민족전선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민주주의민족전선(民主主義民族戰線)은 미군정 시기에 서울에서 결성된 좌파 계열의 연합 단체이다. 약칭은 민전이다.

 

결성


1945년 12월의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을 놓고 한민족이 좌파와 우파로 갈라져 대결하는 이념분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1946년 2월에 미군정 지역의 좌파 계열 정당 및 사회단체가 집결하여 결성되었다.


조선공산당, 조선인민당, 남조선신민당, 조선민족혁명당 등과  전평, 전농, 청년총동맹, 부녀총동맹, 각종 문화단체 등이 가입하였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으로 활동했던 김원봉, 장건상, 성주식, 김성숙과 중도우파에서 활동하였던 이극로, 천도교 간부 오지영 등이 가담했다. 공동의장단은 여운형, 박헌영, 허헌, 김원봉, 백남운의 다섯 명으로 구성되었다.[1]

 

우파 계열이 김구 중심의 비상국민회의를 출범시키고 미군정 자문기관으로 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이 설치되자, 이에 대응하여 좌파 정치 세력의 결집을 시도한 성격이 짙다. 주도 단체는 박헌영의 조선공산당이었다.


이 단체 결성을 계기로 좌파 계열의 진용 정비가 이루어지면서 신탁통치 문제를 불씨로 삼은 좌·우파의 대립은 더욱 격화되었다.

 

강령 및 활동


민주주의민족전선의 강령은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 지지, 5당연합체 탈퇴, 비상국민회 반대, 미소공동위원회 지지, 친일파 처단, 토지 개혁, 8시간 노동제 실시 등이었다. 이 단체는 친일파의 범위를 구체적으로 규정하고, 산하에 친일파·민족반역자 심사위원회를 구성하기도 했다.[2]


제1공화국 정부가 수립되어 분단이 확정된 뒤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 수립에 참여하였다. 민주주의민족전선의 조직은 각 마을과 직장 단위로 비밀 투표를 받아 황해도 해주에서 열린 인민대표자회의에 참석하였고, 삼팔선 이남 지역을 대표하는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360명을 선출하는 작업을 주도했다.


강령 5원칙 전문


*조선의 민주 독립을 보장하는 3상회의 결정을 전면적으로 지지함으로써 미소공의 속개촉진 운동을 전개하여 남북통일의 민주주의 임시정부 수립에 매진하여 북조선 민주주의민족전선과 직접 회담하여 전국적 행동통일을 기함.

##토지개혁(무상몰수.무상분여), 중요 산업 국유화, 민주주의 노동법령 및 정치적 자유를 위시한 민주주의 기본과업에 매진할 것.

##친일파 민족반역자 친파쇼 반동 거두들을 완전히 배제하고 테러를 철저히 박멸하며 검거.투옥된 민주주의 애국지사의 즉시석방을 실현하여 민주주의적 정치운동을 활발히 전개할 것.

##남조선에 있어서도 정권을 군정으로부터 인민의 자주기관인 인민위원회에 즉시 이양할 것.

##군정 고문기관 혹은 입법기관 창설에 반대할 것.

 

해체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이후 남조선로동당이 불법화되면서 주요 참여자들이 미군정의 탄압을 피해 월북하거나 피신하거나 체포되었다. 이에 따라 민주주의민족전선도 지하 활동에 들어가게 되었다.


1949년 9월에 평양에서 민주주의민족전선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이 통합하여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을 결성하면서 발전적으로 해체되었다.

 

 

        1947.3. 민전

 

[ ...... 국내외의 반동세력 및 정책을 물리치고 한반도의 자주독립과 민주개혁이 실천될 수 있는 ‘인민정권’을 수립 .......


  ...... 투쟁을 민전의 목표인 ‘인민민주주의적 정권’수립에 집중시켜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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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전에서는 미소공위가 속개되기 전 ‘극우반탁진영’에 의한 ‘미소공위속개반대운동’에 대항하여 보다 강력한 ‘미소공위속개추진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민전 산하 정당․사회단체에게 당면과제를 제시한 바 있다. 그 당면과제란 우선 삼상결정안의 충실한 실천을 위해 좀 더 과감한 투쟁을 전개해야 한다는 것이며, 다음 ‘정권을 인민위원회에 넘기라’는 것을 관철하는데 매진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곧 일제잔존세력인 친일파․민족반역자․파쇼세
력에 의한 ‘반동정부’의 수립을 저지하고, 이들 세력을 청산하여 한반도의 민주개혁을 단행할 수 있는 정부를 수립한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민전에서는 “우리들의 가장 중요한 목표는 두 말할 것도 없이 정권의 장악에 있다”고 하면서 한반도를 외래의 독점자본 앞에 상품시장으로 예속화시키려는 국내외의 반동세력 및 정책을 물리치고 한반도의 자주독립과 민주개혁이 실천될 수 있는 ‘인민정권’을 수립하려는 데 최대의 목표가 있는 것이라고 표명했다. 그리고 민전은 바로 이러한 목표의 달성을 위해서 생겨난 것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민전 산하의 모든 정당 및 사회단체는 그 투쟁을 민전의 목표인 ‘인민민주주의적 정권’수립에 집중시켜야 하며 그저 막연하게 미소공위의 속개를 촉진시키는 것이 아니라 미소공위가 친일파․민족반역자, 반동지주와 대자본가, 매판계급 등이 수립하려는 ‘반동정부’를 탄생시키지 않도록 하여 민주주의적 발전을 위해서 필요한 방책을 수립할 수 있는 ‘인민의 정부’를 수립할 수 있는 성능을 가지면서 속개되도록 촉진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고 했다.8)


이러한 민전의 건국노선은 민전의 산하단체로서 그 노선을 지지하는 민애청의 강령을

 8) 金午星, 민전의 당면과업 , 인민평론 5호, 1947.3, pp.12~13.


설명해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즉 민애청을 비롯한 민전에서는 삼상결정안을 지지하면서 그 실천단계로서의 미소공위 속개와 그 성공을 통해 친일파와 민족반역자, 반동지주와 대자본가, 매판계급을 제외하고 ‘인민민주주의’를 지향하는 ‘인민정권’을 수립하려 했던 것이다.9)

 

그리하여 민애청을 비롯한 좌익진영에서는 속개된 미소공위 성공을 위한 투쟁원칙, 다시 말해서 민족통일전선의 원칙을 다음과 같이 제시했다.


첫째, 일체의 반탁음모를 철저히 격파하여 삼상결정안의 정확한 실천에 의해 장구한 기간 한반도를 지배했던 일제통치의 악독한 결과를 철저히 숙청하고, 한반도의 산업경제와 민족문화를 부흥 발전시키기 위해 남북한 통일임시민주주의정부를 수립해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 미소공위의 협의대상은 삼상결정안을 총체적으로 지지하고 실천하며 그 목적과 방법에 있어서 진실로 민주주의적인 정당과 사회단체들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좌익진영에서는 지난 제1차 미소공위가 무기휴회 된 근본적인 원인은 바로 친일파․민족반역자들을 비롯한 한국민주당(이하 한민당), 李承晩의 대한독립촉성국민회(이하 독촉) 등 ‘극우반탁진영’의 방해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에 만약 이들을 또 다시 협의대상에 참여시킨다면 미소공위는 그들의 ‘반탁반동론’의 토론장으로 화하여 미소공위 사업의 원만한 진전이 이루어지지 못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셋째, 좌익진영에서는 속개된 미소공위에서 수립될 정권형태는 반드시 ‘인민위원회’의 형태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인민위원회’야 말로 한민족의 진정한 자치기관이라고 인식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실례는 이미 북한에서 인민위원회를 중심으로 삼상결정안을 실천하여 제 민주개혁을 수행하고 있는 데서도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넷째, 속개된 미소공위에서 수립되는 임시민주정부는 모든 진보적 민주개혁을 실행할 수 있는 진실한 민주주의 정부라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좌익진영은 “우리는 이름만의 정부, 이름만의 독립을 요구하지 않는다. 진정한 인민의 요구의 지향을 대표하는 정부와 독립을 요구한다”고 하면서, 앞으로 수립될 임시민주정부는 민주주의 토지개혁법령, 진보적 노동법령, 남녀평등권법령, 중요 산업국유화법령, 민전의 지방선거행동강령, 기타 언론․출판․집회․결사․파업․시위의 자유 등 민주주의 기본권리를 꼭 실시할 수 있는 진실한 민주
주의 정부라야 한다고 표명했다.10)

 

이러한 좌익진영의 민족통일전선론은 당시 역사적 과제를 실천에 옮기는 정당한 노선이었다 해도 반혁명노선을 지향하는 우익진영과의 민족통일전선을 실천에 옮길 가능성이 희박했다. 따라서 좌익과 우익세력은 임시정부수립을 목표로 구성되는 미소공위의 실천단계에 있어서 어느 세력이 정권을 장악하느냐 하는 정치권력의 문제에 당면하여 치열한 정치투쟁을 전개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미군정은 이러한 좌익진영의 노선으로 말미암아 좌익진영이 비록 삼상결정안을 지지하고 있었지만 후술하는 바와 같이 탄압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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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행선

조선민주애국청년동맹의 노선과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 추진운동
國史館論叢 第103輯

 

 

 


        1946.8.3.   김원봉, 합당에 대해

 

[ ...... 북조선의 2대정당합당 .... 가장 정당한 것으로 찬성한다. ......

  ...... 다른 3당과 ... 원칙에 있어서는 물론 일치한다. ........    ]

 

        1946.8.3.


조선민족혁명당 김원봉, 3당합당 지지   

 

서울신문 1946년 08월 04일   


조선민족혁명당 김원봉, 3당합당 지지


朝鮮民族革命黨黨首 金元鳳은 3일 오후 1시 往訪한 기자와 다음과 같은 문답을 하였다.


(問) 북조선의 2대정당합당을 어떻게 보는가?

(答) 가장 정당한 것으로 찬성한다.

(問) 남조선에 있어서도 좌익3당이 합동한다는데?

(答) 그도 역시 찬성한다.


(問) 그러면 民革은 합동에 참가하지 않는가

(答) 신문지상에서 보면 인민당으로부터 발의해서 합동문제가 논의되고 있는 것 같은데 우리당에 대해서는 아직 교섭을 받지 못하고 있다.


(問) 人民黨에서 교섭이 있을때는 참가하려는가?

(答) 합당문제란 것은 현단계에 있어서 조선이 당면하는 민족적 과업과 각당의 性格異同 내지 그의 정치적 주장 등에 의할 것이다. 그러므로 합당에 있어서 이상 말한 몇가지 점에 다소의 차이점이 있다 할지라도 현순간에 있어서 일치성을 볼 수 있다면 할 수 있는 것이다.


(問) 그러면 귀당에 있어서는 다른 3당과 일치점을 볼 수 없는가?


(答) 원칙에 있어서는 물론 일치한다. 그러나 본당은 반일적 중소지주와 진보적 자본가를 기초로 하는 통일전선의 당이므로 이번에 합동한다는 3당과는 다소 성질상 차이가 있지 않을까 한다. 그러므로 民革은 여전히 민전산하에서 함께 투쟁할 것이며 지금에 있어서 독립적 발전을 하더라도 모순은 없을 것이다.

 

 

 

        1946.8.8.


[ ...... 노동자 농민 소자산계층에 튼튼한 기초를 두며 또한 반일적 지주와 민족자본가라도 신민주주의를 찬동하고 실천하는 분자에 한하여는 이를 포용 .......


  ...... 공산 인민 신민의 좌익3당의 성격과 원칙적으로는 일치되는 바이지마는 광범한 인민 대중을 포섭하는 점에서 약간의 차이 .......    ]

 


조선민족혁명당 김원봉, 좌익3당합당과는 별도로 발전해갈 것 언급   


서울신문 1946년 08월 09일   

 


조선민족혁명당대표 金元鳳은 동당의 진로에 대하여 8일 기자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즈음 진전되고 있는 좌익3당합동문제로 우리 민혁이 어떠한 태도를 취할 것인가에 대하여 항간의 관측이 구구한 모양이나 우리 당은 민족의 대다수를 점하고 있는 노동자 농민 소자산계층에 튼튼한 기초를 두며 또한 반일적 지주와 민족자본가라도 신민주주의를 찬동하고 실천하는 분자에 한하여는 이를 포용할 수 있다는 것은 우리들이 중국에 있을 때부터 주장하여 오던 강령이다. 그러므로 공산 인민 신민의 좌익3당의 성격과 원칙적으로는 일치되는 바이지마는 광범한 인민 대중을 포섭하는 점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다 할 수 있는 바 우리 당은 전기 3당과는 별개로 민전 산하에서 독자적으로 발전하여 나갈 것을 재언해 둔다.”

 

 

 

여운형, 민전의장단에 사표 제출   


동아일보 1946년 11월 16일   

 

민전에서는 과반 대체로 社勞黨系統 인물은 중위에서 제거하고 南勞黨系統 인물로써 보선강화하였는데 민전의장단 수석의장 呂運亨은 지난 12일 金元鳳 許憲 副議長과 회견하고 의장의 직책을 다하지 못하겠다고 사표를 수교하였던 바 양부의장은 사표철회를 强行하였으나 사임을 고집하였다 한다.

 

 


      1946.12.  조선민주청년동맹

 

[ ..... 朴憲永 金元鳳 金日成 ... 명예의장으로 추대.....

 ...... 김원봉 기타 제씨의 축사 .......

 ....... 사로당해체요구 경고문 발송 ........    ]

 

조선민주청년동맹의 임시전국대회 개최   


조선일보  1946년 12월 28일   

 

조선민주청년동맹 (民靑) 임시전국대회는 27일 오전 11시 내빈과 전국대의원 약 2천명이 참석한 가운데 서울 경운동 천도교강당에서 金容旭 사회로 성대히 개최되었다.


식순에 따라 개회 묵상 盟旗입장 개회사 대의원자격심사가 끝난 후 임시집행부 선거에 들어가 許憲 朴憲永 金元鳳 金日成 부왓손 등 5씨를 명예의장으로 추대하고 규약개정 임원선거를 위한 7명의 전형위원 선출 정세보고 허헌 김원봉 기타 제씨의 축사를 끝마치자 긴급동의로 사로당해체요구 경고문 발송을 의장에게 일임하고 다시 계속하여 오후 3시 현재 사업보고를 끝마치고 토의사항에 들어갔다.

 

 


       1947.3.1. 민전주최  3·1절기념시민대회   

 

[ ...... 우리의 민주정부 수립에 일로 매진하자 .......


  ...... 許憲 朴憲永 金元鳳 呂運亨 .... 명예의장으로 선출 ........

  ...... 기념사에는 김원봉과 민전산하 각단체를 대표하여 具在洙가 ........     ]

 


민전주최 3·1절기념시민대회   


경향신문, 조선일보  1947년 03월 02일   

 

民戰주최 3·1운동 28주년기념 시민대회는 1일 오전 11시30분부터 봄빛어린 남산광장에서 수만 시민 참가리에 성대히 거행되었다.


식은 金光洙의 사회로 열리어 애국가합창 묵상에 이어 3·1운동의 정당한 의의를 계승하여 우리의 민주정부 수립에 일로 매진하자는 요지의 개회사를 李基錫이 낭독하고 임시집행부선거에 들어가 許憲 朴憲永 金元鳳 呂運亨 金昌俊 金起田 劉英俊 車愛利士등 8씨를 명예의장으로 선출하고 洪南杓외 23명을 위원으로 선출한 다음 독립선언서를 당시 33인 중의 한 사람인 김창준이 낭독하였다.


기념사에는 김원봉과 민전산하 각단체를 대표하여 具在洙가 낭독하고 병구를 무릅쓰고 참가한 허헌의 인사에 이어 각계 결의표명에는 노동자 농민 학생 문화인 부녀 등 각 대표가 피력하였다.


계속하여 감옥에서 시민대회에 보내온 서한을 김광수가 대독하고 긴급동의가 속속 터져나와 박헌영 체포령취소 전평간부 즉시석방 테러박멸 국대안철폐 토지개혁실시 등의 주장을 채택 가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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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7.5.1.  남로당 전평  메이데이 기념식

 

[ ...... 민주건국운동 희생자에 대한 묵상 .......

  ...... 의장으로 許憲 朴憲永 金元鳳 ... 선임 ........    ]

 


서울신문  1947년 05월 03일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 메이데이 기념식 거행

朝鮮勞動組合全國評議會 行事

 

남로당 민혁당 전평 공동주최의 미·소공위속개 축하 메이데이 기념대회는 남산공원 광장에서 오전11시부터 맑게 개인 창공에 각색 프랑카드를 날리며 몰려든 수많은 군중가운데 文殷鍾 개회선언으로 시작되어 애국가제창, 국기게양, 메이데이 기념가와 전평의 노래를 합창, 민주건국운동 희생자에 대한 묵상이 있은 다음 李仁同이 등단하여 개회사가 있고 임시집행부 선거에 들어가 의장으로 許憲 朴憲永 金元鳳 李仁同 4氏를 선임한 후 許憲의 기념사를 金桂林이 대독하였다.


이어 지난 9월 총파업의 희생자 유족에 대하여 의장으로부터 위문품과 위문장 증정이 있은 후 유가족 대표로 李英順의 답사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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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8.4.9.  남북연석회의 -- 민전 김원봉

 

[ ..... 민전 산하 ...각 단체 대표는 9일까지 平壤으로 전부 출발하였다. ........    

   ..... 南勞黨 許憲 朴憲永 .... 人共黨 金元鳳 ......   ]

 

민전 산하 각 단체대표 80명이 남북협상참석차 평양출발 발표   


서울신문 1948년 04월 14일   

 


民戰 12일 발표에 의하면 남북회담에 민전 산하 각 단체는 이에 참가하기로 결정하였는데 다음과 같은 각 단체 대표는 9일까지 平壤으로 전부 출발하였다.


南勞黨 許憲 朴憲永 양씨외 18명

人共黨 金元鳳 외 7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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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8.4.23.  전조선정당사회단체대표자회의 사회 김원봉

 

[ ...... 金元鳳사회로  조선정치정세에 대한 결정서 .... 가결 ... 서명 .......

 ..... 남조선선거를 반대하는 결정서를 통과 .......    ]

 

조선일보 평양특파원 이동수, 연석회의 경과 보고
 
 

조선일보
 
1948년 04월 29일
 
 


민족자결주의원칙에 의거한 남북통일정권을 확립하기 위한 전조선정당사회단체대표자회의는 지난 19일 오전 10시부터 평양 牡丹峰극장에서 개회되어 23일에 폐회되었는데 그간의 종합적인 회의 경과를 회고하여 보면 다음과 같다.


旣 회의 초일인 19일에는 46개 정당사회단체와 545명의 대표들이 참석한 가운데 金月松의 개회선언 애국가주악이 있은 후 金日成·金枓奉·許憲·朴憲永·崔鏞健·金元鳳·白南雲·金達鉉 제씨를 비롯하여 28명의 주석단을 선거하고 이어 金日成의 사회로 회의는 진행되었다. 위선 각 9명의 대표 심사위원 및 서기부와 7명의 편찬위원을 선출하였다. 익일인 20일에는 휴회하고 제2차 회의는 21일부터 재개되었으나 시종 토론으로 끝마치고

제3일째인 22일 12시 28분경에는 韓獨黨 金九를 비롯하여 趙素昻·趙琬九 양씨와 民獨黨 洪命憙가 우뢰같은 환호리에 입장하자 곧 4씨를 주석단에 보선하고 이어 金九·趙素昻 양씨의 축사로써 오전의 회의를 끝마치었는데 기후는 洪命憙 이외의 전기 3씨는 최종 회의일인 23일에는 참석치 않았으며 22일에 평양에 도착한 金奎植도 23일 회의에 참석지 않았다.


그리하여 제4일째인 최종회의일(23일)에는 金元鳳사회로 조선정치정세에 대한 결정서에 이어 동회의의 명의로 3천만 동포에게 호소하는 격문 급 미소 양국에 보내는 요청서를 만장일치로 가결하고 뒤늦게 참가한 단체 급 대표를 합하여 16개 정당 40개단체 대표에 의하여 서명되었으며 끝으로 남조선선거를 반대하는 결정서를 통과시킨 후 이어 투쟁위원을 선출 발표하였다. 이리하여 연4일간에 걸친 남북연석회의는 金枓奉의 폐회사로 원만 종막을 고하였다.

한편 측문한 바에 의하면 북조선의 유일한 우익지도자인 曺晩植은 金枓奉으로부터 양차에 걸쳐 동 회의에 참석하기를 간청하였으나 이에 불응하였다 한다.


지난 19일부터 평양에서 개최되었던 전조선정당사회단체대표자회의는 그동안 평양방송으로써 남북협상으로만 보도되었으나 그 실은 전조선정당사회단체대표자회의로 定名된 것으로 23일의 최총회의로써 일단 종막을 고하였는데 남북협상에 대한 구체적인 토의는 금후 남북요인회담이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1948.4.23.  결정문

 

[ ......  조선 문제를 비법적으로 유엔 총회에 상정 .......

 ...... 조선 인민 ... 유엔 조선위원단 자체를 단호 거부 .....  미국 정부는 유엔 소총회를 이용하여 남조선에 단독 선거를 ..... 남조선을 영원히 분리하여 미국 식민지로 변화시키려는 기도 ........


 ...... 우리 민족과 조국을 팔아먹는  이승만, 김성수 등 매국노들이 발호 ........


 ...... 소련군이 북조선 인민들에게 광범한 창발적 자유를 준 결과 북조선에서는 인민들이 자기가 수립한 인민위원회를 확고히 하여 민주 개혁을 실시 .......

 ...... 단선 분쇄 운동을 전국적으로 ..... 소련의 제안을 반드시 실현시키기 위하여 강력히 투쟁 .......      ]

 


홍명희는 왜 이북의 들러리로 나섰을까?

[해방일기] 1948년 4월 24일


김기협 역사학자  2013.0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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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파 주도 하 남북 협상 개회"

 

남북 협상에 참석할 남조선 요인들의 북행은 21일까지 끝마쳤는데 21일의 평양방송이 전하는 바에 의하면 김구, 김규식 양 씨를 비롯한 남조선 측의 한독, 민독, 민련 등 중간파 요인들이 참석치 않은 채 19일 모란봉 회장에서 김일성 장군의 사회로 제1차 남북 요인 연석회의를 개최하였다 한다. 그런데 이 회의에 참석한 인사들은 북조선 측 요인들과 남조선 민전 계열이 주로 참석하였다 한다.


즉 동 회의에 참석한 정당 사회단체는 회의장 왼편에 남로당, 인민공화당, 노동인민당, 민주한독당, 신진당, 사회민주당, 민중동맹, 전국노동조합평의회, 전국농민총연맹, 민주애국청년동맹, 민주여성동맹, 문화단체총연맹, 건민회, 건국청년회, 기독교민주동맹, 민주총연맹 등 남조선 제 정당 사회단체 대표자들이 자리를 잡고 회의장 오른편에는 북조선노동당, 민주당, 청우당, 전평, 농맹, 여맹, 민청, 민애청, 공업기술연맹 등 북조선 제 정당 사회단체 대표들이 자리를 잡았다 한다.


그리고 연단에는 김일성 장군을 선두로 북로당 김두봉, 남로당 허헌 박헌영, 북조선민주당 최용건, 북조선청우당 김달현, 인민공화당 김원훈, 남조선노동인민당 백남운 등이 참석하여 있었다 한다. 김일성 장군의 개회 선언이 있은 다음 이상 연단에 앉은 제 씨의 축사가 있었다 한다. 그런데 김구 김규식 양 씨가 평양에 도착치 않은 채 19일 회의를 개막한 것은 일반의 이목거리가 되어 있다. (<동아일보> 1948년 4월 23일)


이북 측에서는 이 연석회의를 남북 협상의 본 무대로 만들려 했다. 많은 정당-단체들이 참석한다는 점에서 '밀실 회의'의 느낌을 주는 소수 지도자의 회담보다 넓은 대표성과 큰 공식성을 가질 수 있는 회의이기는 하다. 그러나 참가자들의 합의가 준비되어 있지 않은 상황에서는 군중 대회 비슷한 이런 회의는 효율적 운영이 불가능하다. 21일의 참석자 자격심사 보고에 따르면 460개 정당-단체의 대표 545명이 참석했다고 한다. 회의가 끝날 때는 참가 대표가 695명까지 늘어나 있었다. 김규식의 비서 송남헌은 회의 분위기를 이렇게 전했다.

김 박사는 몸이 불편하다는 핑계로 초대소에서 쉬며 연석회의에 참석하지 않았다. 협상을 하러 온 것이지 연석회의를 하러 온 것은 아니라는 판단에서였다. 뒤늦기는 했지만 나는 회의가 어떻게 진행되는지 궁금하여 참석해보았다. 회의는 참석자가 많아 진행상의 필요에 의해 사전에 발언 내용이나 순서를 정하고 이에 따라 각 당별로 발언자를 신청하도록 했다. 그리하여 발언을 할 사람은 미리 원고지에 10장 정도로 발언 요지를 써서 읽는 형식을 취했다. 발언이 끝나면 박수를 쳤는데, 이렇게 발언한 내용들을 종합하여 결정서 기초위원들이 최종적으로 결정서 문안을 작성했다. (<송남헌 회고록>(심지연 지음, 한울 펴냄), 10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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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북 측은 이남의 '가능 지역 총선거' 반대 세력을 자기네가 추진해 온 건국 노선에 끌어들이기 위해 연석회의를 준비했다. 이남의 총선거 반대 세력을 좌익과 우익으로 갈라 볼 수 있다. 물론 대단히 엉성한 구분인데, 민전 계열을 좌익, 한독당과 민련 계열을 우익으로 보는 것이다. 좌익은 이북의 건국 노선을 받아들이는 입장이고, 따라서 연석회의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반면 김구와 김규식을 대표로 하는 우익은 연석회의를 회피했다.

 

21일의 2일차 회의 경과를 보도한 4월 24일자 <조선일보> 기사를 보면 545명의 대표가 "모든 점으로 봐서 남북조선의 각계각층을 망라한 진정한 애국자들로 구성되었다는" 자격 심사 보고에 이어 오전에 김일성의 보고가 있었다. 오후에는 백남운과 박헌영의 보고에 이어 토의가 있었는데, "북조선의 현실과 남조선의 현실을 대조하고 전 조선 전체가 민주적 건설로 통일한 자주 독립을 세워야겠다"는 주장과 "단독 선거 단독 정부를 파탄시키며 외국군대 동시 철퇴하자는 소련군의 제안을 실현"시키기 위한 공동적 투쟁의 제안이 중요한 토의 내용이었다고 한다.

 

22일의 3일차 회의 경과를 보도한 4월 25일자 <조선일보> 기사에 따르면 오전과 오후에 모두 토의가 진행되었고 홍명희와 엄항섭을 결정서 기초위원으로 보선했다고 한다. 토의 내용으로는 유엔위원단의 철퇴, 단정 반대와 양군 철퇴 등이 소개되었다. 그리고 오후 7시 10분에 토의 종결을 거수가결하였다고 한다. 결정문은 이튿날(23일) 회의에서 만장일치로 채택되었고, 이어 '3000만 동포에게 호소하는 격문'이 채택되었다. 결정문 내용은 <우사 김규식 생애와 사상 2 : 남북 협상>(서중석 지음, 한울 펴냄) 208~209쪽에 이렇게 인용되어 있다.

 

남조선 반동분자들의 협조 하에서 미국 대표가 쏘미공동위원회 사업을 결렬시키고 조선 통일을 파탄시킨 이후 미국 정부는 조선 인민의 대표도 참가시킴이 없이 또는 조선 인민의 의사에도 배치되게 조선 문제를 비법적으로 유엔 총회에 상정하였던 것이다.


조선 인민의 절대다수가 소위 유엔 조선위원단 자체를 단호 거부하고 그 활동을 절대 배격함에도 불구하고, 미국 정부는 유엔 소총회를 이용하여 남조선에 단독 선거를 실시하고 괴뢰적인 소위 '전민족정부'를 수립할 것을 결정하였다. 이 결정은 우리 조국에서 남조선을 영원히 분리하여 미국 식민지로 변화시키려는 기도의 구현이다.


우리 조국에 가장 엄중한 위기가 임박한 이 시기에 남조선에서는 우리 조국을 분열하여 예속화하려는 미국의 반동정책을 지지하여 우리 민족과 조국을 팔아먹는 이승만, 김성수 등 매국노들이 발호하고 있다.


우리는 그들을 배족적(背族的) 망국노로 낙인함은 물론 그들에게 투항하여 그들과 타협하는 분자들도 단호히 단죄하며 배격한다. 그들의 배족적 망국적 책동으로써 남조선인민들은 초보적인 민주주의 자유까지도 박탈당하였으며, 생활을 향상시킬 아무런 희망과 조건도 갖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북조선에 주둔한 소련군이 북조선 인민들에게 광범한 창발적 자유를 준 결과 북조선에서는 인민들이 자기가 수립한 인민위원회를 확고히 하여 민주 개혁을 실시하며 민족 자립 경제 노선을 구축하며 문화를 부활시키며 우리 조국의 민족주의적 독립 자유 국가로 발전될 모든 토대를 공고히 함에 거대한 성과를 거두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인정한다. 우리는 미제국주의자들의 식민지 예속화 정책과 그들과 야합한 민족 반역자 친일파의 매국적 기도에 반대하며 소위 유엔 조선 위원단의 기만적 선거를 반대하여 궐기한 남북조선 인민의 반항을 조국의 완전 자주 독립을 위한 가장 정당한 애국적 구국 투쟁이라고 인정한다.


우리 조국의 절반인 남조선을 미제국주의자에게 예속시키려는 것을 용허치 않기 위하여 우리 남북조선 제정당 사회단체는 자기의 역량을 총집결하여 단선 분쇄 운동을 전국적으로 전개함으로써 남조선 단선 기도를 파탄시키고 조선인민의 손으로 통일적 민주주의 자주 독립 국가를 수립할 권리를 부여하자는 소련의 제안을 반드시 실현시키기 위하여 강력히 투쟁하여야 할 것이라고 인정한다.

 


'협상'의 분위기를 조금도 풍기지 않는 단호한 내용이다. 맨 끝 문단에서 "소련의 제안"이라고 명기한 데서 분명히 드러난다. "조선 인민의 손으로 통일적 민주주의 자주 독립 국가를 수립"하자는 얘기에 왜 꼭 소련이 나와야 하나? 이 결정문을 준비한 사람들에게는 소련 찬양이 자주 독립 국가 수립 못지않게 중요한 일이었던 것이다.

 


김구와 김규식은 연석회의에 참석하지 않았지만 한독당과 민련은 참가했고, 그 단체명은 결정문의 서명에 들어가 있었다. 왜 그들이 찬성하지 않는 결정문에 한독당과 민련이 서명했을까? 서중석은 <우사 김규식 생애와 사상 2 : 남북 협상> 209~210쪽에서 연석회의 결정문을 둘러싼 상황을 이렇게 서술했다.

 

결정서 초안 작성 위원회는 북조선로동당의 주영하 김책 고혁 기석복, 남로당의 허헌 박헌영 조일명 박승원, 근민당의 백남운, 사민당의 여운홍, 민련의 권태양, 민독당의 홍명희, 한독당의 엄항섭 등 15명으로 구성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초안 작성을 주도한 사람은 김일성 백남운 박헌영 등 보고자와 고혁, 기석복 등이었다. 여운홍 등은 미국을 일방적으로 공격하는 것에 부당하다고 이의를 제기하고 항의하였고 한독당 대표와 민련 대표 등도 반대 의사를 표명하였으나, 같은 기초위원인 박헌영이 이를 무시한 채 일방적으로 통과시켰다고 한다. (…) 김구는 왜 제 결정서가 통과되던 연석회의에 나오지 않았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당 대표가 서명한 만큼 결정서의 근본 취지엔 나도 찬동한다"라고 답변하였다. 백범이 말한 근본 취지란 남-북 단선-단정 반대, 외군 철수, 자주 독립 국가의 실현으로 해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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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석회의건 작성위원회건 남로당-민전의 지지를 받는 주최 측 의지가 관철되었고, 그에 대한 강경한 반대는 잡음에 지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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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조선 단선 단정의 방해운동에 대한 결의가 있었을 뿐 ......

 ..... 한독, 민련이 날인한 것은 사실 .......

 

 ..... 스탈린 사진과 김일성장군 사진을 높이 들고 나오는 데는 불안을 느꼈다. ........     ]

 

해방일기


1948. 4. 29 / 목소리마저 빼앗긴 민족주의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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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는 5월 1일자에 여운홍 인터뷰를 바탕으로 한 기사를 1면 머리기사로 실었다. 여운홍은 연석회의로부터 미국 측에 보내는 요청서의 전달 책임을 맡아 다른 요인들보다 먼저 돌아와서 남북협상의 진행 상황을 언론에 알렸다.
 


“ 보라! 협상의 정체, 이래도 자주(自主)인가?

- 남선 측 발언 봉쇄, 통일 위한 협상이 아니라 총선거 방해가 목적”
 

 

유엔위원단의 결의로써 5월 10일 실시될 총선거를 반대하고 남북자주통일이라는 명목 하에 남북정치요인회담을 제안한 김구 김규식 양 씨를 위시한 일부 불평정객은 과거 3개년간 전 조선을 적화하려는 공산주의자들의 의도를 목격하여 왔음에도 불구하고 적도(赤都) 평양으로 행하였던 것이다. 그들이 서울을 떠날 때에는 단시일에 대성공이라도 할 듯이 민심을 자극시키면서 2백여 명이라는 다수가 북행한 지 불과 2주일에 지나지 않은 지난 29, 30 양일간에 김구, 김규식, 최동오, 홍명희, 이극로, 조소앙, 조완구, 엄항섭 씨 등을 제외하고는 전부 남하하였다.


 
남북연석회담에서 가결한 미소 양국에 보내는 요청서를 미측에 전달하기 위하여 지난 29일 서울에 선착한 여운홍, 정운영, 김성규 3씨의 말을 종합하여 보면 이번 회의는 하등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다만 남북 요인이 일석(一席)에 회합하였을 뿐이며 회의에 있어서 중간파 요인들은 무조건 거수가결하였을 뿐 하등 발언한 일이 없다 한다. 그리고 한독당 계열에서는 동 회의에서 가결된 결정서 중에 3상결정 추진에 대한 조목에 대하여 과거 반탁투쟁을 하여 오던 남조선 측의 주요정당임에도 불구하고 동의 날인하였다 한다.


 
그리고 평양에 잔류하고 있는 김구 김규식 양 씨 외 6명은 북조선 측의 김일성 김두봉 양 씨 외 5명 합 15명으로 구성된 남북요인회담을 작 30일부터 개최하였다 하는데 5월 4, 5일경에 남하할 예정이라고 한다. 그러나 남북정당사회단체대표자연석회의에서 결정서를 일방적으로 채택하여 기성사실을 확립한 후 이 원칙에 의하여 협상하는 이상 4김회담이든 수석단회의든 간에 하등 기대할 것이 없다고 보고 있으며 남북통일을 위한 협상이 아니라 국련총선거 반대를 위한 협상에 지나지 않았다고 한다.
 

지난 29일 서울에 선착한 여운홍, 정운영, 김성규 3씨는 작30일 기자와 회견하고 다음과 같은 문답을 하였다.
 


“조(曺)씨와에 면회 거부, 귀경한 인사와의 문답 내용”


 
문: 금번 회의의 성과는 무엇인가?

답: 이번 회의는 남조선 단선 단정의 방해운동에 대한 결의가 있었을 뿐이고 현재로 보아 성공하였다고는 볼 수 없으나 남북 요인이 일당에 모였다는 것뿐이다.
 

문: 회의에 통과된 결정서에 김구 김규식 양 씨가 직접 날인하였는가?

답: 양김 씨 자신이 직접 날인하지는 않았으나 한독, 민련이 날인한 것은 사실이다.
 
문: 조만식 씨를 만나보았는가?

답: 면회를 요청했으나 북조선인민위원회 측에서 지금 어디 갔다고 하여 면회치 못하였다.
 

문: 회의에서 불만한 점에 대하여 발언한 일이 있는가?

답: 무조건 거수찬성하였으며 발언한 일은 한 번도 없다.
 

문: 평양방송에 의하면 김규식 박사가 대표초대연에서 남조선청년단체를 테러단이라고 말한 일이 있다는데 사실인가?

답: 그런 말은 일체 한 일이 없다. 그 방송이 모략이다.
 

문: 기초위원회는 어떠한 인사들로 구성되었는가?

답: 북조선 측 대표 11명과 남조선 측은 여운홍, 엄항섭, 홍명희, 이극로 씨 등 4인만이 참가하였을 뿐이다.
 

문: 김구, 김규식 양 씨가 잔류한 이유는 무엇인가?

답: 평양에 잔류한 김구, 김규식, 조소앙, 홍명희, 최동오, 엄항섭, 조완구, 이극로 씨 등 남조선 측 요인과 북조선 측 요인 7씨는 금일(30일)부터 남북요인회담을 개최하고 남조선 측의 5원칙 제안과 북조선 측 제안을 토의할 것인데 이 회의는 약 3, 4일간 계속할 것이므로 5월 4, 5일경에는 남하하게 될 것이다.
 

문: 남북협상축하대회의 광경은 어떠하였는가?

답: 질서 있게는 보였으나 어느 단체든지 앞에 스탈린 사진과 김일성장군 사진을 높이 들고 나오는 데는 불안을 느꼈다.
 

문: 북조선을 보고 그 시정(施政)에 대한 감상은 어떠하였는가?

답: 너무 지나친 정책을 시행하지 않았는가 하는 감상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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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상파는 사면초가의 형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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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김회담과 15인 남북지도자협의회를 거쳐 4월 30일에 발표된 전조선정당사회단체지도자협의회 공동성명은 민족주의자들이 얻어낼 수 있었던 최대의 성과였지만 이 성명 내용은 이남의 언론에 제대로 소개되지도 못했다.


 
남조선 단독선거를 반대하는 조선정당사회단체대표자연석회의를 뒤이어 평양시에서 4월 30일에 남북조선제정당사회단체지도자들의 협의가 진행되었다. 이 협의회에서는 전조선정당사회단체대표자연석회의의 남조선 단독선거를 파탄시키는 문제와 함께 채택된 양국 군대 철퇴문제와 그 철퇴 실시 후에 당면하는 제 문제에 관하여 토의하였다. 이 협의회에서는 상정된 제 문제를 충분히 토의한 결과 지도자들 사이에는 다음과 같은 제 문제에 대하여 협의가 성립되었다.
 


1. 소련이 제의한 바와 같이 우리 강토로부터 외국군대를 즉시 동시에 철거하는 것은 우리 조국에 조성된 현하 정세 하에서 조선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정당하고 유일한 방법이다. 미국은 이 정당한 제의를 수락하여 자기 군대를 남조선으로부터 철퇴시킴으로써 조선 독립을 실제로 허여하여야 할 것이다. 민주조선의 통일을 원하는 일체 애국인사들은 반드시 양군 철병안을 지지하여야 할 것이다. 일제가 우리 조국 강토에서 구축된 이후 우리 조선인민들은 자력으로 외국의 간섭이 없이 우리 문제를 능히 해결할 수 있도록 장성되었으며, 우리 조국에는 이를 해결할 수 있는 준비된 간부들이 다수히 있다.
 

2. 남북 제 정당 사회단체 지도자들은 우리 강토에서 외국군대가 철거한 이후에 내전이 발생할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하며, 또한 그들은 통일에 대한 조선인민의 지망에 배치되는 어떠한 무질서의 발생도 용허하지 않을 것이다. 민족통일을 조성하려는 인민들의 불요불굴한 지망과 남-북조선의 제 정당 사회단체들 간에 성취된 약속은 우리 조국의 완전한 질서를 수립하는 튼튼한 담보이다.
 

3. 외국군대가 철거한 이후에 하기 제 정당들의 공동명의로 전조선정치회의를 소집하여 조선인민의 각계각층을 대표하는 민주주의 임시정부가 즉시 수립될 것이며, 국가의 일체 정권과 정치 경제 문화생활의 일체 책임을 가지게 될 것이다. 이 정부는 그 첫 과업으로서 일반적 직접적 평등적 비밀투표에 의하여 통일적 조선입법기관 선거를 실시할 것이며, 선거된 입법기관은 조선헌법을 제정하여 통일적 민주정부를 수립할 것이다.
 

4. 천만여 명 이상을 망라한 남북조선 제 정당 사회단체들이 남조선 단독선거를 반대하느니만큼 유권자 수의 절대다수가 반대하는 남조선 단독선거는 설사 실시된다 하여도 절대로 우리 민족의 의사를 표현하지 못할 것이며, 다만 기만에 불과한 선거로 될 뿐이다. 현하 남조선 단독선거가 극히 가혹한 탄압과 테러의 환경 하에서 준비되고 있는 것은 우연한 사실이 아니다.

 
상기 사실에 의거하여 본 성명서에 서명한 정당 사회단체들은 남조선 단독선거의 결과를 결코 승인하지 않을 것이며, 또 이러한 선거로 수립하려는 단독정부를 결코 인정하지 않을 것이며 지지하지 않을 것이다. (<우사 김규식 생애와 사상 2: 남북협상> 219-2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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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북지도자협의회 --- 인민공화당의 김원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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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남북지도자협의회 제1차 회의는 4월 27일 오후 2시 평양시 인민위원회 회의실에서 15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그 역사적인 회의에 참가한 남측 지도자 12인은 한국독립당의 김구,조소앙(1887-1958), 조완구(1881-1952), 엄항섭, 민족자주연맹의 김규식, 김붕준(1888-1950), 민주독립당의 홍명희, 건민회의 이극로(1897-1982), 남조선로동당의 허헌(1885-1951), 박헌영(1900-1955), 근로인민당의 백남운, 인민공화당의 김원봉이었고, 북측 지도자 3인은 북조선로동당의 김일성(1912-1994), 김두봉(1890-?), 조선민주당의 최용건(1900-1976)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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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8.8.20. '남조선인민대표자대회'


[ ...... 조선 최고인민회의 남조선대의원을 선거할 남조선인민대표자대회 .......

  ...... 민전 及 남로당...성명 .... 동 대회의 절대 지지 .......     ]

 

民主主義民族戰線·南朝鮮勞動黨 등, 남조선인민대표자대회의 개최를 지지하는 성명을 발표


국제신문 1948년 08월 21일   

 

남로당 발표에 의하면 조선 최고인민회의 남조선대의원을 선거할 남조선인민대표자대회는 20일 평양에서 개막하였다는데, 이 날에 際하여 민전 及 남로당에서는 20일 성명을 발표하여 동 대회의 절대 지지를 표명하였다. (국제신문 1948. 8.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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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9.5.  인민공화당 --- 조국전선

 

[ ...... 단일한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을 결성하고 미군철퇴와 조국의 통일을 위한 투쟁에 .......

  ...... 이승만을 ‘인민의 원수요 매국노 친일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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南民戰의 제의를 北民戰이 동의하는 형식으로

 

조국전선의 결성을 제안한 남한의 정당 사회단체는 남조선로동당(남로당), 민주독립당, 조선인민공화당, 근로인민당, 남조선청우당, 사회민주당, 남조선민주여성동맹,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의 8개 단체였다. 이들은 5월 14일에 북조선민족전선 중앙위원회 앞으로 “단일한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을 결성하고 미군철퇴와 조국의 통일을 위한 투쟁에 더욱 조직적으로 일체 협력할 것”을 제안하는 편지를 보냈다.

 

이처럼 이 제안은 남북한의 민족전선을 통합하는 형식으로 제안한 것이었으나, 실제로는 남로당과 북로당을 통합하여 조선로동당을 결성하기 위한 절차였다. 그것은 북조선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이 결성되고 나서 북조선공산당과 신민당이 통합될 때와 같은 절차였다.8)


남한 정당 사회단체들의 편지는 이승만을 ‘인민의 원수요 매국노 친일파’라고 규정하고, “토의중에 있는 소위 한미군사협정은 민족상잔의 내란을 일으키고 조선인민들을 더욱 포악하게 살육하는 데 목적이 있으며, 농지개혁법은 지주와 고리대금업자들의 이익을 옹호하고 인민을 기만할 목적으로 제정했다”고 주장했다.9)


북한은 이틀 뒤에 회답을 보내 왔다. 북조선민족전선 중앙위원회는 5월 16일에 남한단체들의 제의에 동의하는 편지를 보내면서, 준비위원회 제1차 회의를 5월 25일에 평양에서 소집할 것을 제의했다. 그리고 5월 18일에는 남한의 민족전선 중앙위원회가 조국전선의 결성을 지지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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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孫世一의 비교 評傳]
한국 민족주의의 두 類型-李承晩과 金九-경교장의 총성

110. 京橋莊의 총성

 

 

 

 


       1949.6.25.


   [   祖國統一戰線  議長團   金元鳳    ]

 

[ ...... 米軍을 즉시 撤去케 하며 所謂 「유엔委員團」을 물러가게 .......

   ...... 祖國의 反逆者들을 반대하며, 祖國의 統一을 급속히 달성하기 위한 투쟁에 人民들의 總力量을 動員 .......

    ...... 美帝國主義者들과 朝鮮反動分子들에게 의하여 强壓당한 人民들의 자치기관인 人民委員會를 復活시키며 그 合法化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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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祖國統一民主主義戰線

 

앞의 北民戰은 1949년 6월 25일 平壤에서 政見과 信仰이 相異한 71개 政黨·社會團體 704명이 參加해 南北韓 左翼政黨 社會團體 連席會議를 개최하고 許憲의 ‘國內外情勢와 우리의 當面任務’의 보고를 청취한 후 南北韓民主主義戰線을 통합하여 祖國統一民主主義戰線으로 개편 강화했다.


이 祖國統一戰線은 議長團인 金元鳳·李英·李克魯·金昌俊·洪琪璜·金達鉉·金天海·劉英俊·鄭魯湜·李萬鍾 등과 書記局長 洪增植 등이 영도하다가 후에 金枓奉·許憲·金達鉉·李英·劉英俊·鄭魯湜·李克魯 등으로 議長團을 개편했다.


이 祖統戰은 다음과 같은 綱領을 제시했다.

 

〈綱領〉


1. 南朝鮮으로부터 米軍을 즉시 撤去케 하며 所謂 「유엔委員團」을 물러가게 하고 祖國의 完全 獨立을 위하여 투쟁한다.

2. 統一을 방해하는 祖國의 反逆者들을 반대하며, 祖國의 統一을 급속히 달성하기 위한 투쟁에 人民들의 總力量을 動員한다.

3. 우리 祖國의 北半部에서 이미 실시된 民主改革들을 일층 공고 발전시키기 위하여 투쟁한다.

4. 1948년 8월 25일 總選擧의 결과 수립된 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國政府를 支持하며 朝鮮人民의 權利를 향상시키기 위한 共和國政府의 활동을 협조한다.

5. 全朝鮮的으로 광범한 民主改革을 실시하며 전체 朝鮮人民에게 公民의 同等權과 言論 출판 집회 시위 結社의 自由와 신앙의 자유 등 민주주의적 權利와 自由를 보장하기 위하여 투쟁한다.


6. 南朝鮮에서 美帝國主義者들과 朝鮮反動分子들에게 의하여 强壓당한 人民들의 자치기관인 人民委員會를 復活시키며 그 合法化를 위하여 투쟁한다.


7. 日本國家 日本人個人 法人 및 朝鮮人民의 叛逆者에게 所有되었던 土地를 無償沒收하여 農民에게 無償分配하는 原則에 의하여 南朝鮮에서 土地改革을 실시하기 위하여 투쟁한다.


8. 日本國家 일본인 個人, 法人 또는 朝鮮人叛逆者들에게 所有되었든 產業 기타 企業所들의 國有化를 南朝鮮에서 실시하기 위하여 투쟁한다.


9. 南朝鮮에서 民主運動에 대한 彈歷과 테로를 반대하여 南朝鮮 監獄 등에 투옥된 애국자들의 석방을 위하여 투쟁한다.

10. 蘇聯과 민주주의 中國과 人民民主主義諸國들 및 기타 自由愛護國家들과의 親善관계를 발전, 강화시키기 위하여 노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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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祖統의 宜言書〉


 前項省略

 親愛하는 同胞兄弟姉妹들!


祖國統一民主主義戰線은 祖國의 平和統一을 실천할 것을 南北朝鮮의 전체 民主政黨 및 社會團體들과 전체 朝鮮人民에게 呼訴하여 下記의 平和的 統一方案을 提議한다.


1. 祖國의 平和的 統一事業을 朝鮮人民이 自己의 手中에 틀어쥐고 우리 人民自體로 반드시 실천하자.

2. 우리는 祖國의 平和的 統一에 방해를 주는 米軍이 우리 朝鮮에서 卽時 撤退할 것을 요구한다.

3. 우리는 非法的 機關인 所謂「유엔朝鮮委員團」이 우리 强土로부터 즉시 물러갈 것을 요구한다.

4. 우리는 南北朝鮮을 통하여 統一的 立法機關 선거를 동시에 실시할 것을 제의한다.


5. 祖國의 平和統一을 원하는 民主主義 諸政黨 社會團體 代表들로 구성된 委員會의 지도하에서 選擧를 실시하자.


6. 祖國의 平和統一計劃을 討議하기 위하여 南北朝鮮 諸政黨·社會團體 代表들의 協議會를 소집하고 협의회에서 選擧指導委員會를 구성하자.


7. 立法機關 선거는 1949년 9월에 실시하며 選擧는 일반적 平等的 비밀투표의 원칙에서 실시하자. 日本통치시대에 日帝와 열성적으로 協力한 자들은 選擧權을 박탈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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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選擧指導委員會의 구성과 함께 南北朝鮮에 現存하여 있는 警察保安기관들은 선거지도위원회의 직접 管轄下에로 넘어온다. 선거지도위원회는 警察隊로부터 親日派 日本警察과 憲兵隊에 복무하던 자들을 제외시키며 濟州道人民抗爭과 南朝鮮遊擊運動彈壓에 참가한 警察隊들을 解散시킨다.


11. 總選擧 결과에 수립된 最高立法機關은 朝鮮共和國의 憲法을 採擇하며 그 헌법에 기초하여 政府를 구성하며 정부는 南北朝鮮에 지금 現存하고 있는 政府로부터 政權을 접수하며 그 政府들은 解散된다.

12. 南北朝鮮에 現存하여 있는 軍隊들은 民主主義 기초 위에서 朝鮮共和國政府가 聯合시킨다. 濟州道와 기타 地帶들에서 人民抗爭과 빨치산運動 탄압에 참가하였던 南朝鮮「國防軍」部隊들은 解散시킨다.

人民抗爭과 빨지산運動 진압에 참가하였던 자들에게는 軍隊에 服務하는 것을 금지하며 이 탄압을 추진한 자들과 조직한 자들은 處罰을 당한다.

(以下 省略함)


統一的民主主義獨立朝鮮萬歲!
永遠히 統一된 朝鮮人民萬歲!


祖國統一民主主義戰線結成大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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國史館論叢 第11輯   >   政府樹立 前後 重要政黨의 政綱政策 硏究(李起夏) 


 

 

 

동아일보   1949년 12월 05일   


鄭栢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남한 총책임자,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체포되어 송청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의 총책임자로 파견되어 11월 4일 평양으로부터 서울에 잠입하여 맹활동을 전개해 오던 정치위원회 파견수습원 정백(52)은 11월 16일 서울시 경찰국 사찰과에 피검되어 그동안 준열한 문초를 받아 오던 바, 드디어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일건서류와 함께 서울지방검찰청으로 구속 송청되었다고 한다.


강원도 철원 출생인 그는 서울 양정고보를 졸업한 20세 때부터 공산주의운동에 참가하여 이래 30년 공산주의로 뼈와 살이 굳어진 좌익투사로서 일찍이 서울청년회 등의 간부를 역임, 1924년 제1차 조선공산당사건에 연좌되어 7년 간 복역한 후 출옥하여서도 각종사건에 관련되어 수차 투옥되었으며, 해방후 건국준비위원회(建準) 조직에 참가하였고 민주주의민족전선(民戰)의 중앙위원 등을 역임하며 좌익의 중진으로 활약해 온 바 있다.


呂運亨과 함께 근로인민당(勤民黨)을 조직하여 활약중 월북하여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산하에 들어가 괴뢰 인민공화국에 가담하였는데 ‘9월폭동’ 실패에서 오는 남한 좌익조직의 붕괴를 수습하기 위해서 조통 총책임자로 파견되었던 것이라고 한다.

 

 

 

 

 

 

 [ ....... 6·25 기습남침 직전에 이 단체를 내세워 남북간 통일된 최고입법기관 설립을 위한 총선거 실시 및 남북 제정당 사회단체 연석회의 소집을 제의 ........     ]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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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단체는 북한 노동당의 통일노선과 정책을 옹호 · 관철하는 대표적인 전위기구로서 통일을 이룩하기 위해 적극 투쟁하는 것을 기본 임무로 하고 있다.


북한 정치사전에는 이 단체의 성격을 노동계급이 영도하는 노농동맹에 기초하여 조국통일을 지향하는 우리나라의 모든 애국적 민주주의 역량을 묶어 세운 강력한 정치적 조직체로 규정하고 있다.

그리고 임무에 대해서는 북반부의 사회주의 역량과 남반부의 애국역량을 단합시킴으로써 조국통일과 조선혁명의 전국적 승리를 위한 투쟁에 적극적으로 이바지하고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 단체가 노동당의 전위기구로 대남 선전선동에 활용되고 있음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북한은 6·25 기습남침 직전에 이 단체를 내세워 남북간 통일된 최고입법기관 설립을 위한 총선거 실시 및 남북 제정당 사회단체 연석회의 소집을 제의해 전면 무력남침 계획을 위장한 바 있다. 이외에도 한국내에 주요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중앙위원회 비상확대회의를 개최하여 성명 · 담화 · 기자회견 등으로 모략선전하거나 위장 평화공세를 전개해 왔다.


이 단체는 노동당을 포함하여 북한의 24개 정당 · 사회단체로 구성되어 있다. 이들 대표로 조직된 중앙위원회를 중심으로 의장단과 상무위원회 및 서기국이 있으며, 조직부 · 선전부 · 국제부 · 재정경리부 · 기요실 등의 하부조직을 두고 있다. 산하에 각종 직능단체 · 종교단체 · 정치단체 · 지역친선단체 등 20여개의 단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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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8.15.  문재인

 

[ ...... 약산 김원봉 선생에게 마음속으로나마 최고급의 독립유공자 훈장을 달아 드리고 술 한 잔을 바치고 싶다 ........     ]

 

문재인, "약산 김원봉 선생에게 독립유공자 훈장 달아드리고 싶다"
 


연합뉴스 
 
 2015년 08월 16일
 


새정치민주연합 문재인 대표는 15일 광복 70주년을 맞아 그동안 독립유공자 서훈에서 제외된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들을 재평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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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영화 '암살'을 본 문 대표는 "김구 현상금 5만엔, 김원봉 현상금 8만엔"이라는 대사를 언급한 뒤 "김구 선생보다 더 높은 현상금을 내걸 정도로 항일 투쟁의 치열함에서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분이지만 정작 해방된 조국에서는 남에서도 북에서도 불우했던 독립투사"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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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대표는 "일제시대 독립운동은 독립운동대로 평가하고, 해방 후의 사회주의 활동은 별도로 평가하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우리의 독립운동사를 더 풍부하게 만드는 길이고 항일의 역사를 바로 세우는 길이기도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광복 70주년을 맞아 약산 김원봉 선생에게 마음속으로나마 최고급의 독립유공자 훈장을 달아 드리고 술 한 잔을 바치고 싶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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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huffingtonpost.kr/2015/08/16/story_n_7993410.html

 

 

 

 


        *
       2012.09.17


[ ..... 이승만·박정희 전 대통령 묘역은 들르지 않았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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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민주통합당 대선 후보는 17일 국립 서울현충원을 방문해 김대중 전(前) 대통령 묘역과 일반 사병 묘역을 참배했다. 문 후보는 이승만·박정희 전 대통령 묘역은 들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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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rchdb1.chosun.com/pdf/i_service/pdf_ReadBody.jsp?Y=2012&M=09&D=18&ID=2012091800072

 

 


       2017.7.


[ ..... 박정희 탄생 100주년 기념우표 발행을 재심의해 뒤집어버렸다. .......     ]

 

 2017.7.31.


‘대중독재’의 그림자
   
 
오승훈 경제산업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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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2017년 7월, 대통령 탄핵과 재판 국면에서 문재인 정부가 출범한 지 두 달 만에 우정사업본부는 ‘우상화 반대’를 외치는 진보 시민단체들의 압박에 지난해 결정했던 박정희 탄생 100주년 기념우표 발행을 재심의해 뒤집어버렸다. 기념사업들도 취소되고 있다.


반면 노무현재단은 2020년까지 서울 창덕궁 인근에 노무현센터를 건립하기로 했고, 경남 김해 봉하마을의 노무현기념관도 조만간 착공에 들어간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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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17073101033011000001

 

 

 

 

 

       2017.12.15.  문재인

 

[ ...... 광주시엔 중국 인민해방군가를 작곡한 한국의 음악가 정율성을 기념하는 ‘정율성로’가 있다 ........     ]

 


[ ..... 북한의 전쟁범죄에 앞장선 죄까지 면책해 줄 순 없다. ........

  ..... 중국의 위대함을 칭송하느라 그들이 과거 한국을 없애려 한 적국이었다는 역사인식이 흔적조차 없다. ........     ]

 

[전영기의 시시각각] 한국은 작은 나라? 누가 연설문 썼나

 

 [중앙일보]  2017.12.18
 
  전영기 기자

 

문 대통령의 국격비하 ‘베이징대 연설’
북한 군가 작곡한 정율성 추앙 발언도

 

. 대한민국 헌법 66조는 ‘대통령은 국가의 원수이며, 외국에 대하여 국가를 대표한다’고 돼 있다. 헌법은 전문(前文)과 4조 두 군데에서 한국이 ‘자유민주적 기본 질서’의 나라라고 천명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중국을 국빈 방문한 것은 그가 한국의 국가원수, 국민의 대표이기 때문이다. 어디서 누구를 만나든 자유와 민주가 숨 쉬는 대한민국의 정체성, 즉 이념과 역사성을 유지해야 한다. 이는 한국 대통령으로서 헌법적 의무에 해당한다.

  

그런데 지난 15일 베이징대에서 문 대통령의 연설은 중국에 대한 자기 비하와 사대(事大)가 흘러넘쳤다. 이게 한국 대통령의 공식 발언인가 싶을 정도로 헌법정신이 망가지기도 했다. 문 대통령의 연설에서 가장 이해할 수 없었던 건 “한국도 작은 나라이지만 책임 있는 중견 국가로서 그 꿈에 함께할 것”이라는 대목이다. 한국이 왜 중국의 꿈에 함께해야 하는지도 수긍할 수 없지만 ‘작은 나라’라는 표현은 치명상에 가깝다. 이 말은 “저는 시진핑 주석에게서 중국의 통 큰 꿈을 보았다” “법과 덕을 앞세우고 포용하는 것은 중국을 대국답게 하는 기초”라는 ‘중국 대국론’을 편 뒤 나왔다.

  

여기서 ‘작은 나라’는 인구나 면적이 아니다. 맥락상 ‘한국 소국론’이다. 국가의 꿈과 가치, 지도력에서 한국이 중국에 비해 작다는 얘기다. 하지만 1인당 GDP와 경제 실력, 과학기술력, 국민 개개인의 삶의 질이나 정신·문화·종교적으로 누리는 가치, 인권·법치·3권분립과 표현·양심의 자유 같은 민주주의 수준에서 한국은 중국보다 큰 나라다.
  


중국인들은 대국의 꿈에 한국 대통령이 책임 있는 자세로 동참하겠다는 다짐을 들으면서 가상하다고 여겼을 것이다. 대한민국 탄생 70년간 이번처럼 대통령이 소국이라 스스로 낮춰 부르고 상대를 대국으로 우러른 적은 없다. 조선시대도 아니고 무슨 이런 사대가 있나. 자유민주의 나라 한국을 대표하는 문 대통령한테 무슨 근거로 공산주의 중국에 가서 조국을 ‘작은 나라’라고 비하해 5000만 국민에게 수치심을 안겼는지 헌법적 책무를 묻지 않을 수 없다.
  


그렇지 않아도 노영민 중국대사가 시 주석한테 신임장을 제정하면서 방명록에 “만절필동(萬折必東)”이라고 쓴 게 논란이 되고 있다. 만절필동은 황허의 강물이 수없이 꺾여도 결국 동쪽으로 흐르듯 천자를 향한 제후의 깊은 충성심을 나타낸다. 선조가 명나라에 숭배와 감사를 표현할 때 썼다고 한다.
  


다시 문 대통령의 연설로 가 보자. 그는 “한국에는 중국의 영웅들을 기리는 기념비와 사당들이 있다. 광주시엔 중국 인민해방군가를 작곡한 한국의 음악가 정율성을 기념하는 ‘정율성로’가 있다”고 말했다. 대통령 연설문의 작성자는 정율성이 북한 군가인 조선인민군행진곡의 작곡자라는 사실을 알았을까. 정율성은 1950년 북한의 6·25 남침 때 중국 팔로군에 섞여 항미원조(抗美援朝·미국과 싸우고 조선을 지원함) 전쟁에 참여했다. 그는 ‘공화국 깃발이 바람에 휘날리네’ 같은 숱한 전쟁 노래를 만들어 김일성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았다.

  

정율성이 사회주의자로서 일제 강점기 독립을 위해 노력했다는 점은 인정할 수 있다. 그렇다 해도 자유민주주의 한국을 공산화하기 위해 북한의 전쟁범죄에 앞장선 죄까지 면책해 줄 순 없다. 대통령의 연설문엔 중국의 위대함을 칭송하느라 그들이 과거 한국을 없애려 한 적국이었다는 역사인식이 흔적조차 없다. 대신 대한민국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적화(赤化)해 자유민주의 씨를 말리려 했던 김일성 측근을 영웅으로 드높였다. 이 끔찍한 국격의 추락과 정체성의 파괴, 누가 책임질 것인가.
  

 

 


        **


       2003.3.1.  노무현


[ ..... 정의는 패배했고 기회주의가 득세했습니다.

  ..... 이제 비로소 역사적 전환점이 마련되었습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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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정부의 출범으로 이제 아픔의 근, 현대사는 막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지난날은 선열들의 고귀한 희생에도 불구하고 좌절과 굴절을 겪어야 했습니다. 정의는 패배했고 기회주의가 득세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비로소 역사적 전환점이 마련되었습니다. 국민이 진정 주인으로 대접받는 시대가 열린 것입니다.


참여정부에서는 권력에 아부하는 사람들이 더 이상 설 땅이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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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pa.go.kr/research/contents/speech/index.jsp?spMode=view&artid=1309352

제84주년 3·1절 기념사

연설일자 2003.03.01

 

 

 

 

      *   2005.7. 노무현


[ ..... 역사의 고비마다 ... 분열 세력이 승리 .......  

  ..... 무엇보다 남북 간 분열을 극복해야 .....   ]

 

[ ..... 이승만 대통령의 남한 단독정권 수립, 이후 지역주의 조장 세력의 장기집권 등을 지칭 ........     ]

 

“역사 고비마다 분열세력이 승리”노대통령 언급

입력  20050701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은 1일 청와대에서 열린 ‘민주평통 12기 전체회의’ 대회사를 통해 “우리를 더욱 우울하게 하는 것은 지난날 역사의 고비마다 통합을 주장한 사람들은 항상 좌절하고 분열 세력이 승리해왔다는 사실”이라고 말했다.


노 대통령은 “나라가 외세에 무릎을 꿇고 국민이 고통을 받았던 국난의 시기마다 내부에는 분열이 있었고 그렇게 겪은 치욕의 역사는 우리에게 분열을 강요해왔다”고 말했다. 노 대통령은 이어 “무엇보다 남북 간 분열을 극복해야 하고, 우리 내부의 지역주의와 남남갈등도 극복할 때가 됐다”면서 “이제 배제와 타도가 아니라 공존하는 문화, 대결이 아니라 협력하는 문화, 투쟁과 타협이 조화를 이루는 문화, 독선이 아니라 상대를 존중하고 다른 주장과도 합의를 이뤄내는 관용의 문화를 키워가야 한다”고 말했다.

 

청와대 관계자는 ‘분열세력 승리’ 언급의 의미와 관련, “이승만 대통령의 남한 단독정권 수립, 이후 지역주의 조장 세력의 장기집권 등을 지칭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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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ews.chosun.com/svc/content_view/content_view.html?contid=2005070170367

 

 


[ ..... 350여 명의 청와대 직원 중 80여 명 가까이가 전대협 출신이라고 ......


 ...... 전대협 출신들은  북한을 가장 호감이 가는 나라(39.1%)로 꼽았고  그 뒤로 중국(20.85), 미국(6.9%), ......     ]


[ .... 金日成원전을 읽으며, 북한 주도 통일 실현을 목표로 활동했다 ......     ]


추적) 盧정권 내 主思派 출신들

http://www.chogabje.com/board/view.asp?cpage=0&C_IDX=14992&C_CC=BJ

 

 

       2003.3.


[ ..... 김근태 의원은 “정통성을 가진 운동권 세력이 정책결정 과정에 참여함으로써 .......     ]

 

[권력이동] <3> 정치권 진입 운동권
 
 2003-03-04
 
 
 
참여정부의 파워 엘리트는 70,80년대 민주화 운동을 주도했던 운동권 출신이 상당수다. 이들은 여당내 주류를 형성하고 청와대 비서실도 사실상 장악한 집권세력으로 성장했다. 이제 이들은 현재 전체 의원의 25%에 달할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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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 의원은 “정통성을 가진 운동권 세력이 정책결정 과정에 참여함으로써 국가적 역량을 확대하는 계기가 됐다”고 평가한 뒤 “집권세력으로 정착하기 위해서는 경험부족을 겸허히 수용하고 뼈를 깎는 자기반성과 사심없는 노력이 전제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38&aid=0000172824

 

 

 

[ ...... 1952년 ... 노력 훈장 ... 5월 노동상(장관) .......

   ...... 6·25 전후로 남파 간첩 훈련을 지휘했다는 얘기도 .......    ]

 

[안용현] 김원봉, 北서 '6·25 南侵 훈장' 받았는데… 대한민국 건국훈장 주나


조선   2019.04.04  

 

'이념 갈등' 최전선 된 보훈처
 

안용현 논설위원 안용현 논설위원

 

지난 1일 보훈처가 '김원봉 독립운동 업적'을 주제로 연 세미나에서 한 발표 제목이 "국가 정체성 재정립을 위한 시론"이었다. 정부가 김원봉 서훈 문제를 대한민국 정체성과 결부하려 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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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김원봉인가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3·1절 100주년 기념사에서 "'빨갱이'라는 표현과 '색깔론'은 우리가 하루빨리 청산해야 할 대표적 친일(親日) 잔재"라고 했다. 친일과 '빨갱이'론이 핵심 키워드였다. 김원봉은 여기에 꼭 들어맞는다. 의열단과 조선의용대를 조직한 김원봉의 무장 항일 업적은 모두가 인정한다. 특히 그는 해방 후 미 군정 치하에서 친일 경찰 노덕술에게 모욕당한 뒤 통곡하다 월북한 것으로 돼 있다. 김일성 정권에서 장관만 두 차례 지냈지만 숙청당했기 때문에 진짜 '빨갱이'는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친일파 득세와 '빨갱이' 딱지의 최대 피해자가 김원봉이라는 것이다. 문 대통령은 2015년 김원봉 소재 영화를 보고 페이스북에 "광복 70주년을 맞아 약산 김원봉 선생에게 마음속으로나마 최고급의 독립 유공자 훈장을 달아드리고 술 한잔 바치고 싶다"고 썼다.

 

◇6·25 북 훈장 받은 김원봉

 

그러나 문 대통령 말대로 '대한민국 훈장'을 달아주기에는 김원봉의 월북 행적은 문제가 많다. 북 공식 기록만 봐도 1948년 8월 최고인민회의 대의원(국회의원 격)으로 뽑힌 데 이어 9월 김일성 정권 초대 내각에서 국가검열상(장관)을 지냈다. 같은 해 11월 미군 주둔에 반대하는 성명도 발표했다. 1952년 3월에는 "미제 약탈자들과 그 주구들에 반대하는 조국 해방 전쟁(6·25)에서 공훈을 세웠다"며 김일성에게 노력 훈장까지 받았다. 그해 5월 노동상(장관)이 됐고 1957년 9월에는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국회 부의장 격)에 선출됐다. '김원봉 세미나'에 참석한 지상욱 바른미래당 의원은 "북의 6·25 남침 공훈자에게 우리 훈장을 주자는 것은 공산주의와 싸워온 대한민국 정체성을 너덜너덜하게 만드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했다. 6·25 국군 사상자만 수십만이다.

 

정부가 김원봉에게 주려는 '독립 유공자 훈장'은 건국(建國) 훈장을 의미한다. 독립운동을 건국 과정으로 보기 때문이다. 독립 훈장은 별도로 없다. '간첩 활동 전력' 논란이 불거진 손혜원 의원의 부친도 건국 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상훈법 11조는 건국 훈장에 대해 "대한민국 건국에 공로가 뚜렷하거나 국가 기초를 공고히 하는 데 공적이 뚜렷한 사람에게 수여한다"고 명시해놨다. 그런데 김원봉은 대한민국이 아니라 북 정권 수립에 공로가 뚜렷한 사람이다. 일부에선 임시정부 수립을 건국으로 보고 김원봉의 항일 공적을 강조하지만 대한민국을 없애려는 6·25전쟁에서 공을 세운 인물이 김원봉이다. 6·25 전후로 남파 간첩 훈련을 지휘했다는 얘기도 있다. 그가 훗날 김일성에게 숙청된 것은 '반(反)국가 단체' 내부에서 일어난 권력 투쟁의 결과일 뿐 반(反)대한민국 행적의 면책 사유가 될 수는 없다.

 

◇김원봉은 '마지막 허들'

 

정권은 '김원봉 서훈 프로젝트'를 착착 진행하고 있다. 친(親)정부 인사들로 구성된 보훈처 자문 기구가 '김원봉 재평가'를 권고하더니 보훈처장은 국회에서 '서훈 가능성'을 공개 언급했다. 민주당 의원들은 돌아가며 "김원봉 서훈 추진 비판은 색깔론"이라고 하고 있다. '적대 지역으로 도피한 사람은 서훈을 취소할 수 있다'는 상훈법 8조는 안중에도 없다. 친정부 공중파 방송은 다음 달 김원봉 소재 20부작 드라마를 시작할 예정이다. 김원봉 띄우기에 총력을 쏟는 양상이다. 그러나 전직 보훈처 관계자는 "김원봉이 뚫리면 남로당 당수였던 박헌영을 비롯해 김일성 정권 핵심들이 대한민국 훈장을 요구할 때 거부할 명분이 없는 황당한 상황이 벌어진다"고 했다.

 

◇보훈 곳곳에서 이념 갈등


보훈처는 독립 유공자 전반에 대해 친일과 빨갱이 잣대를 다시 갖다 댈 계획이다. 독립 유공자 1만5180명을 전수조사해 친일 행위자를 가려낸 뒤 서훈을 취소하고, 좌익 활동 경력자 298명을 재심사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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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9/04/03/2019040303608.html

 

 

 

[강천석 칼럼] 누가 대한민국 역사를 훼손하는가

 

조선일보    강천석 논설고문
 
2019.04.13

 

이승만 빼고 대한민국 역사 쓰는 그들, 김일성 빼고 북한 역사 쓸까

대통령 취임사 '통합' '공존' '동반자' 사라지고 '증오' '복수' '적개심' 판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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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발언 사흘 전 대통령 직속 3·1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사업추진위는 정부 청사가 있는 세종로 네거리 빌딩들에 독립운동가 10명의 대형 초상화를 내걸었다. 그러면서 상하이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이자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李承晩)만 쏙 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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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아랫사람만 이런게 아니다. 대통령은 해군사관학교 졸업식에 참석해 '일본군 출신이 아닌 사람들이 만든 해군의 역사가 대한민국 국군의 역사'라고 했다. 6·25 전쟁 때 가장 많이 목숨을 바친 육군 그리고 공군을 대한민국 울타리 밖으로 내친 것이다.


국가보훈처는 6·25전쟁 당시 북한 장관을 지내고 '조국해방전쟁 훈장'을 받은 김원봉에게 대한민국 훈장을 수여하는 작업을 본격화하고 있다. 그가 등장하는 영화를 본 대통령이 '독립유공자 훈장을 달아드리고 싶다'는 댓글을 올린 것이 계기다. 대통령 속뜻은 귀신처럼 헤아리는 MBC는 200억원 예산으로 김원봉 드라마를 만들어 다음 달 4일부터 방영을 시작하고 KBS도 올 광복절 그를 주역으로 하는 대하드라마를 내보낸다고 한다. 머지않아 국립묘지에 김원봉의 가묘(假墓)가 생길지도 모를 일이다.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통합' '공존' '동반자(同伴者)'를 말했다. 딱 2년이 흐른 지금 그 말들은 그림자조차 찾을 수 없다. '증오' '복수' '적개심(敵愾心)'이란 단어가 온 나라를 휩쓸어 가고 있다. 증오는 새끼를 빨리 치고, 복수는 자기를 먼저 무너뜨리고, 적개심은 내 안에 독(毒)을 푼다. 이러고도 밀려오는 해일(海溢) 앞에서 나라가 무사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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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9/04/12/2019041203271.html

 

 

 

 

 

 

 

 

 

  노동당 만세 민전투사 신민주주의 김원봉 찬양의 함성이 대한민국을 삼키고 있읍니다.

 
  대한민국의 명운이 바람앞의 촛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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