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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민공동회
2019.05.06 조회수 : 72

     청년  이승만

 

 


1875.3.26  황해도 평산군 마산면 능내동에서 출생. 호는 우남(雩南).


1877 (2세)  서울로 이사하여 남대문밖 염동, 낙동을 거처 도동의 우수현(雩守峴)에서 자람. 그 때문에 그는 지역적으로 서북파 보다는 기호파로 분류되는 것이 보통이다.
 
1879 (4세)  퇴직 대신 이건하가 운영하는 낙동서당에 입학.
 
1885~1894 (10세~19세) 사간원 대사간직을 지낸 이근수(양녕대군 봉사손)의 도동서당에서 수학.
 

 

1895.4.2.(20세)  신긍우(신흥우의 형)의 권유로 아펜셀러의 배재학당(培材學堂) 입학.
 
1896.5. (21세)  배재학당에서 서재필을 만나 서양 학문을 배움.
 
1896.11.30.  배재학당에서 양홍묵 등과 함께 <협성회>를 결성하고 미국식 토론회를 통해 개화-구국운동의 방향을 찾음. 이승만은 서기, 회장을 맡음.

 

 

 


       1896.11.  협성회

 

[ ...... 討論會를 위한 모임을 조직 ..... 민주적인 토론방식을 통하여 자발적으로 開化意識을 함양하도록 ......  協成會 .......  ]


[......  배재학당 학생 뿐만 아니라 일반인의 가입도 권장 ......

  ...... 지방 협성회가 조직되기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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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承晩이 平山에서 상경한 직후에 배재학당에서 徐載弼(서재필) 박사 환영회가 열렸다. 환영회가 열린 날짜나 모임의 성격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다. 이 무렵 서재필은 「독립신문」의 발간준비를 위하여 분주하던 때였는데, 그가 귀국한 뒤에 청중들 앞에서 강연을 하기는 이때가 처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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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承晩도 이 환영회에 참석했다. 이것이 承晩이 서재필을 처음 만나는 자리였는데, 서재필과의 만남은 承晩이 개화기의 주역의 한 사람으로 급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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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재필은 귀국하자마자 정부의 보조를 받아 「독립신문」을 발간할 준비를 시작했다. 金弘集 內閣은 독립신문사의 설립자금으로 4,400圓(「徐載弼 博士 自敍傳」에는 5,000圓)을 정부 예산에서 지급하고, 이와는 별도로 서재필이 앞으로 10년 동안 中樞院 고문으로 재직하면서 월봉 300圓의 거액을 받도록 조치함으로써 그의 활동을 보장했던 것인데,63) 새로 구성된 貞洞派 內閣은 「독립신문」 발간에 한결 더 적극적이었다.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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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환영회가 있은 지 석달 뒤인 1896년 5월부터 서재필은 아펜젤러의 요청에 따라 매주 목요일 오후에 배재학당에 나와 世界地理, 歷史, 政治學 등 폭넓은 분야에 걸친 특별 연속강의를 시작했다. 이 특별 연속강의는 1년 동안 계속되었는데, 承晩이 歐美 市民社會와 조선의 정치현실, 그리고 國際社會에서의 조선의 위치 등에 대해 뚜렷한 인식을 갖게 되는 것은 이 연속강의를 통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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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재필은 특강을 시작한 지 반년이 지났을 때에 배재학당 학생들로 하여금 討論會를 위한 모임을 조직하도록 권장했다. 그는 미국에서 고등학교에 다닐 때에 과외활동으로 「리노니아」(Linonia)라는 文學討論會에 참가하여 많은 영향을 받았었는데, 그것을 본떠 배재학당의 학생들로 하여금 민주적인 토론방식을 통하여 자발적으로 開化意識을 함양하도록 하고자 했던 것이다.69) 모임의 이름을 協成會라고 정하고 11월30일에 그 첫 회합을 열었다. 그것을 보도한 「독립신문」의 다음과 같은 기사는 協成會에 대한 서재필의 기대가 어떠했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배재학당 학도들이 학원 중에서 협성회를 모아 일주일에 한 번씩 모여 의회원 규칙을 공부하고 각색 문제를 내어 학원들이 연설공부들을 한다니 우리는 듣기에 너무 즐겁고, 이 사람들이 의회원 규칙과 연설하는 학문을 공부하여 조선 후생들에게 선생들이 되어 만사를 규칙이 있게 의논하며 중의를 좇아 일을 결처하는 학문들을 퍼지게 하기를 바라노라.〉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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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론회는 매주 거르지 않고 열렸다. 주제는 처음에 〈國文과 漢文을 섞어 씀이 가함〉(제1회), 〈學徒들은 洋服을 입음이 가함〉(제2회), 〈學員들은 매일 運動함이 가함〉(제4회) 등의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것으로 시작하여, 〈우리나라 宗敎를 예수교로 함이 가함〉(제7회), 〈노비를 속량함이 가함〉(제8회), 〈國民이 이십 세 된 자는 일제히 兵丁으로 택함이 가함〉(제13회), 〈士農工商 학교를 세워 인민을 교육함이 가함〉(제17회), 〈우리나라에서 上下議院을 설립함이 급선무로 결정함〉(제24회), 〈財政과 軍權을 남에게 맡기는 것은 곧 나라를 남에게 파는 것으로 결정함〉(제42회), 〈각 고을마다 우체를 설치하고 인민의 서신을 종편 왕래케 하는 것이 요무로 결정함〉(제47회), 〈나라를 開明하자면 新聞局을 각처에 설시하는 것이 요무로 결정하는 문제〉(제50회) 등과 같이 사회구습의 타파, 정치제도의 개혁, 실업 교육의 실시, 체신제도의 확충, 언론 창달 등 근대 시민사회의 필수적인 주요 문제들을 망라했다.

 
  이러한 주제에 대해 右議(찬성자)와 左議(반대자)를 두어 토론하게 하고 또 회의도 공개했기 때문에 토론 참가자들 뿐만 아니라 방청객들도 이 토론회에 큰 흥미를 갖게 되었다. 토론회는 1896년 11월30일부터 1898년 7월16일까지 모두 50회가 열렸는데,73) 회를 거듭할수록 학생들의 변론술도 발전했다.
 

  학생들이 박수치는 법을 배운 것도 이때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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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론회가 흥미있게 진행되자 協成會 회원수도 급증했다. 회원은 배재학당 학생 뿐만 아니라 일반인의 가입도 권장하여, 일년 뒤인 1897년 12월에는 200명, 이듬해 3월에는 300명을 헤아리게 되었다.75) 일반인도 회원으로 가입할 수 있게 된 것은 협성회가 학생회의 범위를 벗어나서 개화운동을 위한 社會團體가 되어가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그리하여 협성회의 활동은 지방에까지 알려지게 되고, 그에 따라 지방 협성회가 조직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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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孫世一의 비교 評傳 - 李承晩과 金九 4
한국 민족주의의 두 類型
 
孫世一 논설위원
 

 

 

 

 

         1898.1.1.  주간신문 「협성회회보」   주필  이승만


         1898.3.10.   종로 네거리  萬民共同會   연사 총대   이승만

 


         1898.4.9.  최초의 일간지  「매일신문」   사장 주필   이승만

 

[ ......  「매일신문」.... 이 작은 신문은 새 韓國의 실질적인 誕生이었다.

   ──그것은 곧 이승만의 정치경력의 참된 시작이었다........  ]

 


          1898.8.10.  「제국신문」  주필  이승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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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李承晩은 졸업을 한 뒤에도 계속해서 배재학당에 나와 초등반 영어를 가르치는 한편 協成會 활동에도 열성을 쏟았다. 그는 토론회에서 가장 자주 연설자나 토론자로 선임되었고, 연설 예정자가 다른 일로 불참할 때에는 연설을 대신하기도 했다. 토론의 주제에 따라 결론이 찬성쪽으로 나든 반대쪽으로 나든 이승만이 참가하는 쪽이 연설을 잘한 것으로 평가되는 경우가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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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보」 발행으로 協成會 급성장
 
 
  협성회 회원들은 자신들의 토론회가 회를 거듭할수록 사회적 관심이 높아짐에 따라 토론회의 내용과 결과를 회원들은 말할 것도 없고 一般國民과 政府官僚들에게도 알릴 필요가 있음을 느꼈다. 그리하여 제29회 토론회는 「우리 중에 일주일 간 會報를 발간함이 가함」이라는 주제를 두고 토론한 끝에 회보를 발간하기로 결정했다. 제33회 토론회는 「新聞局을 각처에 배설하여 인민의 이목을 넓힘이 가함」이라는 주제로 新聞의 중요성을 더욱 폭넓게 토론하고 있다.
 

  신문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은 開化派 知識人 사회에서 보편화하고 있었다. 독립협회도 1897년 12월의 토론회에서 「인민이 귀로 듣고 눈으로 보는 것을 열리고 밝게 하려면 본 나라와 다른 나라들의 신문지를 널리 발표하는 것이 제일 긴요함」이라는 주제로 토론을 하고 있다.2) 국내신문뿐만 아니라 외국신문들도 많이 보급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1898년 1월1일을 기하여 주간신문 「협성회회보」(당시의 표기는 「협셩회회보」)가 발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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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협성회회보」는 協成會의 기관지이기는 했으나 편집체제와 내용은 완전히 一般綜合紙였다. 실제로 발간 취지도 일반국민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음은 다음과 같은 「논설」로도 짐작할 수 있다.
 

  〈한 번 발간하기에 십여원씩 밑져 가며 이 회보를 발간하는 것은 전국 동포의 이목을 열어 내외국 형편이 어떻게 될 줄을 대강 알게 하고 우리 이천만 동포가 일심 협력하여 우으로 임금과 나라를 받들고 아래로 우리 동포의 집안들을 보호하여 가자고 발론하여 시작한 것이러니 …〉6)

 
  이러한 발간취지는 「독립신문」의 그것과 흡사한 것이었다. 한글전용을 한 것도 마찬가지였다. 체제도 「독립신문」과 똑같이 1면에는 「논설」, 2면과 3면에는 「내보」와 「외보」를 싣고, 4면에는 협성회 소식인 「회중잡보」를 실었다. 이 「회중잡보」도 협성회의 당시 사회적인 비중으로 보아서 일반에게 뉴스로서의 가치가 충분히 있었다.7) 그런데 「코리언 리포지터리」가 「협성회회보」를 한국인의 손에 의해 만들어지는 최초의 신문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은 「독립신문」의 발행인 徐載弼이 美國市民權을 가진 사람이고 한국정부의 지원을 받아 신문을 발행하고 있다는 것을 시사하는 말일 것이다. 이승만은 「협성회회보」를 발행한 일과 관련하여 자서전 초고에서 다음과 같이 술회하고 있다.
 
 

  守舊派 政權 아래 8년 동안 新聞 없는 時代 겪어
 
 
  〈나는 몇몇 청년들의 도움을 받으면서 신문을 시작했는데, 「협성회회보」는 한국사람들만으로 제작되는 신문으로서는 우리나라에서 최초의 것이었다. 작은 신문이기는 했으나 나는 그 지면을 통하여 自由와 平等이라는 위험한 사상을 나의 힘을 다해서 역설했다. 아펜젤러씨나 그밖의 사람들이 내가 急進的인 行動을 계속하다가는 목을 잘리게 될 것이라고 여러번 충고해 주었으나 그 신문은 친러파 정부와 러시아 公使館의 威脅으로 생겨난 여러 가지 재난과 위험을 겪으면서도 계속 발간되었다〉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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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협성회회보」가 창간될 때에는 서울에서 네 가지 신문이 발간되고 있었다. 일본인들이 1895년 2월17일부터 발행하고 있던 「漢城新報」, 1896년 4월7일에 徐載弼이 창간한 「독립신문」, 그리고 기독교신문으로 1897년 2월2일에 아펜젤러가 창간한 「죠션크리스도인회보(The Christian Advocate)」(12월8일자 제45호부터 「대한크리스도인회보」로 改題)와 두 달 뒤인 4월1일에 언더우드가 창간한 「그리스도신문(The Christian News)」이 그것이었다. 일본 정부의 보조를 받아 발행되던 「漢城新報」는 대판 네 면 가운데에서 세 면은 한글, 한 면은 일본어로 발행하고 있었는데, 이 신문은 한국의 국체를 모독하는 글을 싣는가 하면 러시아 공사관에 머물고 있는 고종을 비웃는 글(동요)을 실어 한국 정부와 국민들을 격분시키기도 했다. 또한 이 「漢城新報」는 明星皇后(閔妃) 弑害를 모의한 일본인들의 비밀 본거지가 되기도 했다.
 


  우리나라 근대적 신문의 효시는 1883년(고종20) 10월1일(양력 10월31일)에 정부기관인 博文局에서 발행한 「漢城旬報」였다. 朴泳孝, 兪吉濬 등 개화당의 노력으로 탄생한 이 신문은 비록 정부가 발행하는 것이기는 했으나 國內外의 時事를 비롯하여 西洋의 新文化를 소개하는 데 큰 구실을 했다. 이듬해에 일어난 甲申政變으로 발행이 중단되었다가 1885년 12월21일(양력 1886년 1월25일)에 속간되면서 열흘에 한 번씩 발행하던 것을 1주일에 한 번씩 발행하게 되어 제호도 「漢城周報」로 고쳤다.


 
  그러나 「漢城周報」도 발간된 지 2년 반 만인 1888년 6월6일(양력 7월7일)에 재정난으로 폐간되고, 그 뒤 수구파의 득세 속에서 8년 동안이나 신문 없는 암흑시대가 계속되었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 창간된 일본인들의 「漢城新報」가 얼마나 왜곡된 영향을 끼치고 있었을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러한 상황에서 「독립신문」이 창간된 것은 획기적인 일이었다.
 

  「독립신문」의 인기와 영향력은 놀라운 것이었다. 서울의 官僚와 知識人들 사이에서는 말할 나위도 없고 시골 장터에서까지 널리 읽혔다. 郡守가 장터에 사람을 모아놓고 글 잘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장꾼들에게 「독립신문」을 읽히어 들려주는 일도 있었다.9) 그리하여 한 부가 최소한 200명에게 읽혔다고 뒷날 徐載弼은 술회했다.10)
 
 
  「회보」 창간에 40전 기부해
 
 
  「협성회회보」는 이러한 「독립신문」을 의식하면서 제작되었다. 그런데 「독립신문」이 정부로부터 4400圓의 보조금을 받아 발간된 것11)과는 대조적으로 「협성회회보」는 순전히 회원들의 출연금과 유지들의 찬조금으로 발간되었다는 것은 특기할만하다. 「협성회회보」 창간호는 제호 바로 밑의 「논설」란 앞에 본문보다 훨씬 큰 2호 활자로 〈이 회보는 매 토요일에 한 번씩 발간하고, 파는 처소는 배재학당 제일방이오 값은 매장에 엽전 너 푼씩이니 사 보시기를 바라오〉라는 「광고」를 내고, 또 「회중잡보」란에는 〈1897년 12월30일까지 협성회에서 의연금 수입한 금액이 138원 11전이며 지출된 금액이 86원 7전으로서 현재 52원 3전 8리가 남았다〉고 보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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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협성회는 「협성회회보」의 발행과 보급에 매우 열성적이었다. 「협성회회보」 1월 15일자(제3호)의 「회중잡보」에는 〈회원은 회보를 친히 찾아다 보고 그외 회보 보는 사람에게는 갖다 주기로 작정되었더라〉는 기사가 눈에 띄는데, 이는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구독자들에게 배달까지 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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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협성회회보」가 사회적으로 큰 호응을 얻자 협성회는 마침내 야심적인 日刊紙 발행을 단행하기에 이르렀다. 그것은 「협성회회보」를 창간하고 석 달도 되지 않은 때였다. 협성회는 3월19일의 토론회에서 「일주일 간에 한 번씩 내는 회보를 매일 한 번씩 발간하자고 작정」 했다.20) 그리하여 「협성회회보」는 4월2일자로 발행된 제14호를 마지막으로 하고, 제15호 발행 날짜인 4월9일부터 우리나라의 첫 일간지인 「매일신문」(당시의 표기는 「일신문」)이 창간된 것이다. 그때까지 「독립신문」은 주 3회 발행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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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면서 이 「논설」은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일간지를 발행하게 된 것을 다음과 같이 자부하고 있다.
 

  〈대범 서양제국서는 국중의 신문 다소를 가지고 그 나라 열리고 열리지 못함을 비교하거늘 돌아보건대 우리나라에 신문이 얼마나 되느뇨. 과연 부끄러운 바라. 만행으로 「독립신문」이 있어 영자로 발간하매 외교상과 나라 권리 명예에 크게 관계되는 영광이라. 그외 「한성신보」와 두세 가지 교중(敎中) 신문이 있으나 실상은 다 외국사람의 주장하는 바요, 실로 우리나라 사람이 자주하여 내는 것은 다만 「경성신문」과 우리 신문 두 가지뿐인데, 특별히 매일신문(일간신문)은 우리가 처음 시작하니 우리나라 사천년 사기(史記)에 처음 경사라, 어찌 신기하지 않으리오. 아무쪼록 우리 신문이 문명 진보에 큰 기초가 되기를 우리는 간절히 바라노라〉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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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어 4월12일자(제3호) 「논설」은 두 면에 걸쳐 신문의 중요성을 특별히 강조하고 있다. 이 「논설」은 〈신문이라 하는 것이 나라에 크게 관계가 되는 것으로 세 가지 목적이 있으니 첫째 학문(學問)이요, 둘째 경계(經界)요, 셋째 합심이라…〉고 전제하고 그 세 가지를 구체적으로 설명했는데, 첫째의 학문이란 신문의 啓導(계도)의 기능을 말하는 것이고, 둘째의 경계는 批評과 告發의 기능, 셋째의 합심은 國民的 統合의 기능을 뜻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주장은 이승만을 비롯한 협성회 간부들이 신문의 기능에 대한 인식이 얼마나 투철했는지를 말해준다.
 
 
  〈새 韓國의 실질적인 탄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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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배재학당에서 다른 학생들과 「협성회회보」를 시작하였고, 그 주필이 되었다. 작은 학생 신문이 정부고관들을 비판하게 되자 곧 세상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그래서 아펜젤러 교장은 우리들에게 논설을 검열받으라고 했다. 그렇지 않으면 학교 신문으로는 발간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독립정신이 강한 柳永錫과 나는 학교를 나와서 한국 최초의 일간지를 내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우리더러 외국의 보호를 받지 않고 그런 신문을 발간하면 위험하다고 했으나 「매일신문」은 아주 호평을 받게 되어, 徐載弼 박사는 우리 신문 때문에 자기의 신문(독립신문)을 팔 수 없다고까지 하게 되었다〉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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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올리버가 「매일신문」의 발행과 관련하여 〈그(이승만)의 주제는 政府와 社會의 改革을 위한 정열적이고 반복적인 요구였다. 이 작은 신문은 새 韓國의 실질적인 誕生이었다. ──그것은 곧 이승만의 정치경력의 참된 시작이었다〉25)고 적고 있는 것으로도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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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랬다가 1주일 뒤인 5월27일자에야 회장인 이승만이 社長과 記載員(記者 내지 主筆)을 겸한다는 기사가 실렸다.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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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와 프랑스의 利權要求 비판
 
 

  이승만이 협성회 회장이 되고 나서 사흘 뒤인 5월16일자 「매일신문」은 1면 전면과 2면에 걸쳐 러시아와 프랑스가 韓國政府에 利權을 요구한 외교문서의 내용을 폭로하여 큰 파문을 일으켰다. 國家機密과 국민의 알 權利의 마찰이라는 언론의 본질적인 논제의 하나가 한국 언론사상 처음으로 등장한 것이었다. 러시아의 요구는 목포와 진남포 조계지에 인접한 사방 10리 안의 땅을 섬들까지 빼지 않고 사겠다는 것이었고,34) 프랑스의 요구는 평양의 석탄광산을 채굴하여 京義線 철도 부설공사에 사용하겠다는 것이었다.35) 프랑스는 이미 경의선 철도 부설권을 획득해 놓고 있었다.
 
  「매일신문」은 이러한 사실을 폭로하면서 기사 끝머리에 다음과 같은 선동적인 말을 덧붙이고 있다.
 

  〈이 말을 들음에 치가 떨리고 기가 막히어 분한 마음을 억제할 수 없는지라. 우선 기재만 하거니와 이는 참 대한 신민의 피가 끓을 소문이라. 대소 인민 간에 대한의 신민된 이들이야 이런 소문을 듣고 잠시인들 어찌 가만히 앉았으리오. 우리 동포들은 일심으로 발분(發憤)하여 속히 조치할 도리를 생각들 하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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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정부와 은밀히 교섭하여 이권을 챙기려 했던 열강에게 「매일신문」은 여간 부담스러운 존재가 아니었다. 그것은 「제국신문」이 이때의 상황을 〈외국 공영사도 이 무세(無勢)한 종이조각을 꺼리기를 군사 몇만 명보다 어렵게 여기고…〉46)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으로도 짐작할 수 있다. 정부와 러시아 및 프랑스는 마침내 당초의 계획을 변경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것은 언론과 독립협회의 외교적 승리였다.
 

 

  한국 최초의 언론법 新聞紙條例 제정
 
 

  이때의 러시아 公使의 항의 조회에는 신문을 규제할 법을 제정하라는 요구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10월에 이르러서는 日本 公使 가토 마스오(加藤增雄)도 주한 외교사절 대표자격으로 外交文書를 신문에 보도하지 못하게 하라는 조회를 外部에 보내왔다. 그리하여 신문관계법의 제정문제는 한국정부 안에서 논의가 계속되다가 독립협회가 해산되고 난 직후인 1899년 초에 한국 최초의 언론법인 新聞紙條例47)가 제정되었다. 말하자면 李承晩이 러시아와 프랑스의 비밀 외교문서를 폭로한 것이 新聞紙條例를 제정하는 계기가 된 것이다. 그러나 이 신문지조례는 시행되지 않은 채 폐기되고, 1907년에 가서야 흔히 「光武新聞紙法」으로 일컬어지는 新聞紙法이 제정되었다.
 


  「매일신문」이 일간으로 발행된 것은 다른 신문에도 큰 자극이 되어 「독립신문」도 7월1일부터 일간으로 발행되었고, 뒤이어 8월10일에는 「제국신문」이, 9월5일에는 「皇城新聞」이 일간 신문으로 창간되어 마침내 한국에도 일간 신문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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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국신문」은 「매일신문」이 속간된 8월 10일에 창간되었다. 「제국신문」을 처음 준비한 사람들은 「매일신문」 창간에도 참여했던 以文社그룹이었는데, 이들 新興商工業者들은 4000~5000원의 자본56)으로 경영을 맡고 독립협회에 참여하고 있던 李鍾一, 李承晩, 柳永錫 세 사람이 편집을 맡는 형태로 출발한 것이었다. 以文社 명의로 신문발간 인가를 받은 다음 사장은 李鍾一이 맡았고, 李承晩은 主筆로서 주로 「논설」을 집필했다.57)
 

  「제국신문」은 창간사격인 「고백」에서 다음과 같이 발간취지를 설명하고 있다.

 
  〈본사에서 몇몇 유지한 친구를 모아 회사를 조직하여 가지고 새로 신문을 발간할 새 이름을 제국신문이라 하여 순국문으로 날마다 출판할 터이니, 사방 첨군자(僉君子)는 많이 주의들 하여 보시오.
 
  대개 제국신문이라 하는 뜻은 곧 이 신문이 우리 대황제 폐하의 당당한 대한국 백성에게 속한 신문이라 함이니 뜻이 또한 중대하도다. 본래 우리나라 대한이 개국한 지 사천여년 동안에 혹 남에게 조공도 하고 자주도 하였으나, 실로 대한국이 되고 대황제 존호를 받으시기는 하늘 같으신 우리 황상(皇上) 폐하께오서 처음으로 창업하신 기초라. 우리 일천이백만 동포가 이같이 경사로운 기회를 즈음하여 나서 당당한 대한제국 백성이 되었으니 동양반도국 사천여년 사기에 처음되는 경사라.…〉


 
  대한제국의 선포를 경축하는 뜻으로 제호를 「제국신문」으로 삼았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지면제작 방향을 다음과 같이 천명했다.
 
  〈그동안 국중에 신문이 여럿이 생겨 혹 날마다 발간도 하며, 혹 간일(間日)하여 내기도 하며, 혹 일주일 동안에 한두 번씩 내기도 하는데, 그중에 영어신문이 하나이오 국한문으로 섞어서 내는 것이 하나이오 일어로 섞어 내는 것도 있으되 그 중에 국문으로 내는 것이 제일 긴요할 줄로 믿는 고로 우리도 또한 순국문으로 박일 터인데, 논설과 관보와 잡보와 외국 통신과 전보와 광고 등 여러 가지를 내어 학문상에 유조할 만한 말이며 시국에 진적(眞的)한 소문을 들어 등재하려는 바, 본사 주의인즉 신문을 아무쪼록 널리 전파하여 국가 개명에 만분지 일이라도 도움이 될까 하여 특별히 값을 간략히 마련하고 날마다 신실히 전하여 보시는 이들에게 극히 편리하도록 주의하오니…〉58)
 
 
  庶民層과 婦女子들 읽게 신문값 싸게 매겨
 
 
  이처럼 「제국신문」의 주된 발행목적도 「독립신문」이나 「매일신문」의 그것과 마찬가지로 국민 계몽에 있었다. 다른 신문들과 마찬가지로 한글전용을 하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특히 신문값을 다른 신문에 비하여 싸게 매긴 것은 庶民層과 婦女子들에게까지 읽히겠다는 의도였던 것이다. 그런데 뒷날 한국이 일본의 보호국이 된 뒤에 「제국신문」이 다음과 같이 특별히 한글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은 한글전용이 오직 널리 읽히기 위한 것만이 아니었음을 말해 준다.
 

  〈제 나라 글을 숭상하지 아니하고 남의 나라 글을 배우되 제 나라에 글이 없는 고로 인민생활상에 제일 필요되는 내 나라 역대 사적이 없어서 중원(中原:곧 中國) 역사부터 가르치고 배운즉 … 그런 고로 자기 나라는 소홀히 알고 남의 나라 위하는 사상이 팽창하여 사람마다 독립사상이 없고 의뢰심만 남아서 남에게 의뢰하기를 좋아하다가 오늘날 이 지경이 된 것은 확실한 사실이로다〉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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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편 「제국신문」은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일본의 침략에 저항하다가 제호의 연원이 된 大韓帝國과 운명을 같이하여 1910년 8월2일에 폐간되었다. 李承晩은 뒤에서 보듯이, 옥중에 있으면서도 2년 3개월 동안이나 비밀히 「제국신문」의 논설을 써서 내보냈는데, 출옥하고 나서도 석달 뒤에 美國으로 떠날 때까지 「제국신문」 제작에 관여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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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처럼 李承晩의 政治經歷은 言論活動으로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 언론활동의 내용은 自由와 民權을 위한 투쟁이었다. 李承晩의 의욕적인 언론활동은 그 자신을 民權運動의 젊은 지도자로 확고한 위치에 올려 놓았을 뿐만 아니라 이 나라에 日刊紙時代를 열었다는 점에서 역사적인 역할을 한 것이었다.
 

  그의 언론활동은 1898년 한 해에 집중되었다. 그러나 이때의 언론활동의 경험은 뒤이은 옥중생활과 독립운동의 전 과정에서 이승만이 무엇보다도 언론을 통한 선전활동에 가장 큰 비중을 두고 열성을 기울이는 바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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孫世一의 비교 評傳 - 이승만과 김구(8)
李承晩, 日刊紙시대를 열다
 
 孫 世 一

 

 

 

       1898.3.10.   종로 네거리  萬民共同會   연사 총대   이승만

 


 [ .... 연사들은 대한이 자주독립국임을 강조하고 러시아의 군사교관과 고문관의 철수를 역설했다 .......

      李承晩, 현공렴, 張鵬(장붕) 세 사람을 총대위원(대표)으로 선출하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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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러시아 정부도 군사교관과 재정고문의 철수를 통보 .......  ]


 [ .... 독립협회의 대중운동의 향도 역할을 ........  ]

 

 

 (1) 첫 萬民共同會의 연사와 총대위원

 

 
  1898년 3월10일 오후 2시에 종로 네거리에서 이 나라 최초의 근대적 大衆集會가 열렸다. 이날짜 「독립신문」은 〈오늘 오후 두 시에 종로에서 유명한 유지각한 이들이 좋은 연설을 한다고 뜻있는 군자들을 청하였다더라〉는 예고기사를 싣고 있다. 이 집회는 徐載弼, 李完用, 尹致昊 등 독립협회 간부들이 은밀히 준비한 것이었는데,1) 미국 생활의 경험이 있는 이들은 미국 대중집회의 격식과 효과를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이날의 집회에 독립협회 간부들은 전면에 나서지 않고 培材學堂과 京城學堂의 젊은 교사와 學員들을 연사로 내세우기로 했다.


 
  李承晩은 玄公廉(현공렴), 洪正厚(홍정후) 등과 함께 이 역사적인 대중집회의 연사로 선정되었다. 李承晩과 홍정후는 배재학당 대표였고, 현공렴은 경성학당 대표였다. 현공렴은 開化派 史學者 玄采(현채)의 아들로서 일본에 유학한 뒤에 경성학당에 다니면서 光武協會를 조직하고 그 회장을 맡고 있었다. 협성회 간부 李承晩이 독립협회와 직접적인 관련을 맺게 된 것은 이때부터였다.

 

  집회에는 주최 쪽이 기대한 것 이상으로 많은 사람들이 운집했다. 「독립신문」과 鄭喬(정교)는 이날 모인 군중이 1만여 명에 이르렀다고 했고,2) 집회를 참관한 외국 사람들도 8000명에 가까운 인파로 추산했다.3) 당시의 상황으로서는 엄청난 규모의 군중이 모인 것이었다.
 
 


  백목전 다락 위에서 연설
 

 
  집회는 먼저 米廛(미전)의 쌀장수 현덕호를 회장으로 선출했는데, 그것은 일반대중의 참여를 과시하기 위한 배려에서였을 것이다. 연사들은 白木廛(백목전) 다락 위에서 연설을 했다. 집회의 목적은 외교 현안인 러시아의 군사교관과 재정고문을 철수시키자는 여론을 조성하고, 이 집회의 이름으로 그러한 주장을 담은 메시지(편지)를 정부에 보내기 위한 것이었다.


연사들은 대한이 자주독립국임을 강조하고 러시아의 군사교관과 고문관의 철수를 역설했다.4) 청중들은 박수로서 『옳소(可)』라고 하면서 〈사람마다 대한이 자주 독립하는 것을 원하는 것〉을 표시했다.5) 이어 대회는 외부대신에게 보내는 회중의 일치된 뜻을 밝힌 편지를 채택하고 李承晩, 현공렴, 張鵬(장붕) 세 사람을 총대위원(대표)으로 선출하여 그들의 이름으로 이 편지를 외부에 전달하도록 했다.

 

  대회는 큰 성공이었다. 독립협회가 이 집회를 계획할 때에는 특별한 이름이 없이 「民會」라고만 했었으나, 모인 사람들이 1만여 명이 되었다고 하여 이날 이후로는 대중집회를 가리켜 「萬民共同會」라고 일컫게 되었다.

 

  이날의 집회는 질서정연했고 연사들의 연설 기조도 침착했다.6) 그리고 외국인들도 많이 참관했는데, 개중에는 러시아 공사 스페이에르(Alexis de Speyer)도 공사관원들과 함께 그 자리에 나와 있었고, 배재학당 교장 아펜젤러(H. G. Appenzeller) 등 미국인들도 와서 지켜보았다. 이날의 집회는 정부와 서울의 외교계에 큰 충격을 주었고, 독립협회의 간부들은 대회가 질서정연하게 진행된 것에 만족했다.7)

 

  외부대신 閔種默(민종묵)은 이튿날 세 총대위원 앞으로 〈공동한 의론을 알았으며 러시아 고문관과 사관을 보낼 일은 탁지부와 군부의 소관이요 또한 정부에서 어떻게 의판하기를 기다릴 것이라〉는 답장을 보냈다.8)


李承晩은 이 답장을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 12일에 종로 네거리에 나가 붙였다.

 
  그런데 이날 이틀 전에 만민공동회가 열렸던 자리에 독립협회와는 관계없는 시민들의 자발적인 만민공동회가 다시 열리고 있었다. 남촌 사는 사람들이 나서서 독립협회의 만민공동회 때와 같은 취지의 연설을 했고, 또 북도 사람 네 명과 시위대 사관 두 명이 반대연설을 하려다가 시민들에게 제지당하기도 했다.9)
 


 
  러시아人 財政顧問과 軍事敎官 철수
 

 
  1898년은 독립협회의 自主民權運動이 절정을 이룬 해였다. 독립협회는 朝鮮이 淸國으로부터 獨立한 것을 기념하여 迎恩門 자리에 獨立門을 세우고 그 주변에 獨立公園을 조성할 것을 사업목적으로 하여 1896년 7월2일에 결성된 사업단체였으나, 실제로는 徐載弼 등 개화파들이 처음부터 이 나라 최초의 근대적 정당을 목표로 하여 결성한 政治結社였다.

 
  독립협회는 서재필의 계몽적인 講演會에 이어 1897년 8월29일부터는 배재학당의 協成會와 같은 토론회를 정례적으로 개최함으로써 정치결사로서의 협회의 역량을 배양할 뿐만 아니라 자주민권운동의 대중적 기반을 급속히 확대해 나갔다.

  그리고 1898년에 접어들어서는 上疏(상소)와 정부 각부에 보내는 편지와 萬民共同會라는 대중집회를 통하여 열강의 이권침탈 저지와 의회설립 요구 등의 運動을 강력히 전개했다.


 
  3월10일의 만민공동회는 놀라운 결과를 가져왔다. 협회의 회원수도 급속히 늘어났고, 公州, 平壤, 大邱, 宣川, 義州, 木浦, 仁川 등 각지에 지회가 설립되었다.10)

정부는 독립협회의 주장대로 3월12일에 러시아에 재정고문과 군사교관의 철수를 요구했고, 17일에는 러시아 정부도 군사교관과 재정고문의 철수를 통보해 왔다.11) 뿐만 아니라 절영도 석탄기지 租借(조차) 요구도 철회하고, 3월1일에 설립한 한러은행도 철폐했다.
 


  독립협회는 승리감에 넘쳤다. 러시아의 이러한 조치는 때마침 러시아의 극동정책이 한국문제보다도 만주문제에 「모험적 진출」을 도모하던 때였기 때문이었는데,12) 이러한 기묘한 사정이 독립협회로 하여금 자신들의 역량을 과대평가하게 만들었다.
 


 
  徐載弼의 재출국 막기 위한 萬民共同會 주도
 
 

  3월10일의 만민공동회 이후로 독립협회의 소장파 활동가로 두각을 나타내게 된 李承晩은 「매일신문」을 펴내는 데 열중하면서도 독립협회의 대중운동의 향도 역할을 하게 되었다. 4월30일에 崇禮門(숭례문: 남대문) 안에서 열린 서재필의 在留(재유)를 요청하는 만민공동회는 독립협회 회장 尹致昊의 동의도 받지 않고 열린 것이었는데, 李承晩은 이 대회에서도 주동적인 역할을 했다.
 


  그 동안 독립협회가 대중적 기반을 확대해 가면서 자주독립을 강조하고 열강의 이권 침탈을 규탄하며 고급관료들의 무능과 부패를 고발하는 운동을 강력히 전개하자, 친러 수구파 정부와 러시아, 일본 등 열강은 서재필을 해고하여 추방함으로써 독립협회의 활동을 저지시키고자 했다. 그리하여 러시아 재정고문과 교련사관이 해고되어 출국하게 되자 정부는 외국인고문 해고를 빙자하여 4월에 서재필을 중추원 고문에서 해고하고 출국을 요청했다.


 
  독립협회는 4월25일에 그러한 조치는 부당한 일이라고 극력 반대하면서 서재필의 再雇騁(재고빙)을 요청하는 편지를 정부에 보냈다. 그러나 정부는 사흘 뒤인 4월28일에 〈서재필은 이미 해고되었으므로 在留 여부는 본인의 의사에 달린 것〉이라고 사실상 거절하는 답장을 보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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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숭례문 안 만민공동회는 이러한 상황 속에서 열린 것이었다. 이날의 만민공동회는 정부에 서재필의 재고빙을 요청하는 편지를 다시 보냄과 동시에 서재필에게도 재유를 요청하는 편지를 보내기로 결의하고, 李承晩과 함께 崔廷植(최정식)과 鄭恒謨(정항모)를 총대위원으로 선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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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monthly.chosun.com/client/news/viw.asp?nNewsNumb=200204100063&ctcd=&cpage=1
 
2002년 4월호
 
연재 孫世一의 비교 評傳 - 李承晩과 金九(9)
한국 민족주의의 두 類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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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8년 3월 10일 종로에서는 한국 최초의 근대적 대중집회인 만민공동회가 열렸다. 이 집회에서는 시전의 쌀장수 현덕호를 의장으로 선출하고, 현공렴·이승만·홍정후·조한우·문경오 등이 연설하였다. 이 시기 연설은 의사전달의 중요한 수단이었다.


이 때 기록에 의하면, “백목전(백목천을 팔던 가게) 다락 위에서 연설하였다”는 표현이 등장하는데(독립신문, 1898년 3월 12일자 잡보), 이것은 당시의 연설형태를 보여준다. 즉, 당시 종로에 있던 시전 가게의 건축 표준양식은 2층이었다. 1층은 가게이고 2층은 1층보다 높이가 낮은데 창고로 사용하면서 ‘다락’이라고 불렀다.


이 다락에서는 독립협회 간부들의 토론회도 열렸으며, 3월 10일에는 연사들이 백목전 2층 다락으로 올라가 집 밖을 내다보며 연설을 했던 것이다. 마이크가 없던 당시에는 이것이 청중들과 교류하는 효과적인 방식이었다. 이는 조선 역사 최초의 의미 깊은 대중연설이었을 것이다.

 


<참고>

1898년 3월 10일 만민공동회 관련 기사

 

경계자는 아라사 공사가 외부에 조회 한 사건에 대하여 일만 백성이 공동회의를 하와 대한에서 아라사에 고빙한 탁지부 고문관과 군부에 교련사관을 일병 해고하여 대한의 자주권을 튼튼케 할 일로 가(可)하다는 의론을 결정하여 이에 앙포하니 조량하옵셔서 만민의 동심앙망하는 것을 맞추게 하심을 바란다고 하였는데, 총대위원은 이승만, 장붕, 현공렴 삼씨더라.

이 회에 잠시 모인 사람은 만 여 명인데, 사람마다 대한이 자주독립하는 것을 원하는 것 같고, 정부에서 이 조회 답장을 민심을 따라 하기들을 바라는 모양이더라. 연설한 이는 현공렴, 홍정후, 이승만, 조한우, 문경오 제씨이더라.


(독립신문 1898년 3월 12일자 잡보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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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culturecontent.com/content/contentView.do?search_div=CP_THE&search_div_id=CP_THE001&cp_code=cp0407&index_id=cp04070032&content_id=cp040700320001&search_left_menu=

독립신문과  만민공동회
문화콘텐츠닷컴

 

 

 

       1898.10.12.

 

[ ..... 나륙법과 연좌법 부활 기도 .... 수구파 7대신(申箕善, 李寅祐, 沈舜澤, 尹容善, 李載純, 沈相薰, 閔泳綺)의 규탄과 전면적 개각요구 .......  ]

[ ..... 7대신을 모두 면직시키고, 독립협회가 신임하는 朴定陽을 署理議政事務(서리의정사무), 閔泳煥을 군부대신 등으로 하는 새 각료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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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高宗과 皇太子에 아편 탄 커피 올려
 
 
  외국인 용병부대 설치문제와 때를 같이하여 발생한 金鴻陸(김홍륙) 毒茶事件(독다사건)은 다시 한번 정국을 뒤흔들었다. 김홍륙은 러시아 공사관 통역으로서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 머물 때에 고종의 측근에서 러시아 세력을 업고 온갖 전횡을 자행했고 환궁한 뒤에도 갖은 농간을 부렸던 사람이데, 독립협회의 국정감시로 정사에 간섭하지 못하게 되었고, 高宗도 8월25일자로 그를 해임하여 海島로 귀양을 보내게 되었다.
 

  이에 앙심을 품은 김홍륙은 그의 심복 孔洪植(공홍식)에게 아편 한 냥쭝을 주어 高宗이 마시는 차에 타게 했고, 공홍식은 하수인을 시켜 9월11일에 고종과 황태자에게 아편을 탄 커피를 올렸다. 고종은 구토를 하고 황태자는 인사불성이 되는 큰 위난을 당했다.


 
  그런데 이 사건을 심문하면서 경무사 閔泳綺(민영기)는 죄인을 잔악하게 고문하고, 9월24일에 열린 中樞院은 의관 34명의 이름으로 신법을 개정하여 이미 폐지된 拏戮法(나륙법: 대역죄와 같은 큰 죄를 지으면 그 자손들도 연좌하여 사형에 처하던 형법)과 連坐法(연좌법)을 부활시킬 것을 정부에 요구하는가 하면, 법부대신 겸 중추원 의장 申箕善(신기선) 등은 이를 주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독립협회는 9월25일의 통상회의에서 반역사건을 규탄하고 사건의 철저한 조사를 촉구하면서도 한편으로 죄인을 악형으로 고문한 사실과 중추원의 나륙법과 연좌법 부활 기도는 국민의 生命과 財産의 自由를 침해하는 것이며 신법을 개악하는 것이라고 결의하고 이에 대한 반대운동을 전개하기로 했다. 그것은 독립협회가 그만큼 정치적으로 성숙해 있었음을 말해 준다.
 

  독립협회는 10월1일에 중추원 문앞에서, 이튿날에는 高等裁判所 문앞에서, 6일에는 다시 고등재판소 문앞에서, 그리고 7일에는 高宗이 거처하는 慶運宮의 仁化門 앞에 나아가 상소를 올려 악법의 부활기도를 강력히 반대했다. 그러나 高宗과 수구파 각료들은 독립협회의 요구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그러자 독립협회는 仁化門 앞에서 대회를 해산하지 않고 시대착오적인 악법의 부활 기도에 찬성하는 수구파 7대신(申箕善, 李寅祐, 沈舜澤, 尹容善, 李載純, 沈相薰, 閔泳綺)의 규탄과 전면적 개각요구로 투쟁을 확대하기로 했다.

 
  독립협회는 8일에 인화문 앞에서 연좌농성을 하면서 7대신의 탐학을 낱낱이 들어 규탄하고 그들의 파면을 요구하는 두번째 상소를 올렸다. 이 철야투쟁은 이내 광범위한 민중의 호응을 얻어, 서울 시내와 전국 각 지방에서 보내 온 의연금이 600여 원에 이르렀다.24) 독립협회는 밤에는 50명의 대표를 남겨 인화문을 떠나지 않게 하고 낮에는 다시 모여 민중대회를 열면서 그들의 요구를 승낙하는 高宗의 批答(비답)을 기다렸다.
 

  高宗이 7대신에게 경고는 하되 교체는 않겠다고 하자 독립협회는 인화문 앞에서 집회를 더욱 확대하면서, 10일에 다시 7대신 파면과 전면개각을 강력히 요구하는 세 번째 상소를 올렸다.25) 인화문 앞 농성에는 각 학교 학원들과 철시를 한 시전 상인들도 참석하여 날이 갈수록 규모가 더욱 커졌다.
 
  경무청에서는 강제로 시전을 열게 하려 했으나 상인들은 지금은 전과 달라 관인의 무례한 압제를 받지 않겠다면서 이를 거부했다.26)
 

 
  改革派 內閣 탄생시킨 「平和的革命」
 

 
  독립협회와 시민들의 강경한 개각요구와 집회의 대규모화 추세를 도저히 막을 수 없음을 안 高宗은 마침내 10일과 12일에 걸쳐 7대신을 모두 면직시키고, 독립협회가 신임하는 朴定陽을 署理議政事務(서리의정사무), 閔泳煥을 군부대신 등으로 하는 새 각료를 임명했다. 그것은 10월1일부터 열이틀 동안 궁궐을 에워싸고 철야시위를 벌인 끝에 쟁취한 승리였다.
 

  그리고 그것은 민중의 힘으로 改革派內閣을 성립시킨 획기적인 일이었다. 독립협회 회원들과 시민들은 12일 저녁에 만세를 부르면서 해산했다.27) 각국의 외교관들도 이러한 사태에 경탄했다. 미국 공사 알렌이 「평화적 혁명(a peaceful revolution)이 이루어졌다」고 본국 정부에 보고하고 있는 것은 그 대표적인 보기일 것이다.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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孫世一의 비교 評傳 - 李承晩과 金九   (9)

 

 

 


[ ...... 中樞院新官制가 공포  ....  근대적인 立法機關이 탄생 ......    ]

[ .....  모함으로 말미암아 이틀 만에 어처구니없이 무산 .....   ]


  1898.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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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官民共同會에서 「獻議六條」 채택
 

 
  이튿날 독립협회는 정부에 다시 대관들의 참석을 요망하는 편지를 보냈고, 정부쪽에서도 독립협회의 주장을 받아들여, 하오 2시에 이윽고 역사상 처음으로 官民共同會가 열렸다. 정부가 태도를 바꾼 것은 윤치호가 입궐하여 高宗을 설득했기 때문이었다. 두세 명을 제외한 모든 대신들을 비롯한 관인들과 황국협회, 順成會(북촌에 거주하는 부인들 모임), 황국중앙총상회 등 각종 사회단체, 각 학교 학도들, 시전 상인들, 승려, 맹인, 宰設軍(재설군: 백정) 등 온갖 계층의 사람들이 초청을 받고 참석했다.
 

  대회는 오후 3시경에 개회했다. 먼저 대회장 윤치호가 경과를 보고했다. 이어 정부대표 박정양이 등단했다.

 
  『어젯밤 이곳에 와서 勅語(칙어)를 전하고 돌아가 상주하자 인민이 노천에서 날을 보내니 오늘이라도 정부 대신들이 일찍 나아가서 참석하여 그 利國便民(이국편민)의 방책을 들으라 하셨소이다. 그러니 협의 후 모두 해산하면 곧 입궐하여 협의내용을 상주하겠소』
 
  만세와 박수소리가 잇따랐다.
 

  회중에서 누구든지 나와서 연설을 할 수 있었다. 모두들 머뭇거리고 있는데 朴成春(박성춘)이라는 백정이 나와서 연설을 했다. 대신들 앞에서 백정이 연설을 한다는 것은 일찍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대한의 가장 천한 사람이고 무지 몰각합니다. 그러나 忠君愛國의 뜻은 대강 알고 있습니다. 이에 이국편민의 길인즉 관민이 합심한 연후에야 가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둘러처져 있는 차일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저 차일에 비유하건대 한 대의 장대로 받친즉 역부족이나 많은 장대로 합한즉 그 힘이 매우 공고합니다. 원컨대 관민합심하여 우리 대황제의 성덕에 보답하고 國祚(국조)로 하여금 만만대를 누리게 합시다』40)
 


  백정은 갑오경장 때에 천민신분에서 해방되었었다. 회중은 이 백정의 연설에 박수갈채를 보냈다. 이어 몇 사람이 의견을 개진한 다음 11개조의 의안이 상정되었고, 먼저 6개조를 만장일치로 의결했다.


이것이 유명한 「獻議六條(헌의육조)」인데, 그 내용은 1) 專制皇權(전제황권)의 공고화, 2) 외국에 대한 이권양여나 조약체결 등은 각부대신과 중추원 의장이 합동으로 날인, 3) 전국의 財政과 租稅는 度支部에서 관장하고 豫算 決算은 人民에게 공개, 4) 모든 중범죄도 公判을 하되 피고의 자백이 있어야 시행, 5) 勅任官(칙임관)은 황제가 정부의 과반수 동의를 얻어서 임명, 6) 章程(장정)의 실천이었다.
 

  6항의 장정 실천의 촉구는 갑오경장 이후로 새로 제정한 法律과 각 부의 章程을 정부가 제대로 실천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참석한 대신들도 모두 이 「헌의6조」에 「可」자를 적어 서명했다.
 

  이어서 중추원 의장 한규설과 박정양이 대회를 치하하는 연설을 했다. 대신들은 「헌의6조」를 『황제에게 상주하여 내일 하오 1시까지 회중에 반포하겠다』고 약속하고 돌아갔다. 회중은 기쁨에 넘쳐 만세를 부르며 해산했고, 50명만 남아 밤을 새웠다.41)
 


  官民共同會 해산 막아 中樞院 신관제 공포케
 
 
  이튿날 독립협회는 사무소에서 회의를 열고 중추원 민선의관 25명을 독립협회에서 내게 된 경과보고를 들은 다음 중추원 관제의 개정이 공포되는 대로 25명 의관의 선거를 실시할 것을 논의했다. 「헌의6조」의 공포 여부를 알려 줄 시한인 하오 1시가 지나자 독립협회는 총대위원을 정부에 보냈다. 그리고 오후 8시에 관민공동회를 종로에서 속개하고 「헌의6조」의 재가를 기다렸다.

 
  정부는 「헌의6조」는 모두 마땅히 실시할 것이고 그밖에 몇 조항을 첨가하여 조칙으로 공포하고 관보에 올릴 터이니 추운 날씨에 밖에 있지 말고 해산하여 기다리라는 뜻을 전해왔다.

 
  회중은 돌아가 기다리기로 하고 50명만 남아 밤을 새웠다. 高宗은 31일 새벽에 30일자로 「헌의6조」의 공포와 함께 「詔勅五條」를 내렸는데, 조칙은 첫조항에 〈(갑오경장으로) 諫官(간관: 사간원과 사헌부의 관원)을 폐지한 뒤로 言路가 막히어 상하가 勸勉警勵(권면경려)의 뜻이 없기로 중추원 장정을 정하여 실시할 것〉을 규정했다. 그것은 중추원 개편을 실질적인 의회개설로 생각하는 독립협회의 견해와는 상당한 간극이 있는 내용이었다.
 


  농상공부 대신 金明圭(김명규)가 나와 「헌의6조」가 재가되고 그것에 더하여 「조칙5조」까지 내린 것을 알리자 회중은 이를 환영하고 만세를 불렀다. 이때에 李承晩은 군중 앞에 나아가 군중을 제지하면서 외쳤다.
 

  『무릇 국사에 매번 조칙이 있어서 정부가 조치하도록 하여도 그 실시를 본 적이 없소이다. 이는 우리가 강력히 諫(간)하지 않았기 때문이오. 그러니 본회는 경솔히 해산할 것이 아니라 대신들이 만일에 이를 실시하지 않으면 爭論(쟁론)하여 그 실시를 보는 것이 옳을 것이외다』42)
 

  회중은 李承晩의 주장에 찬동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해산하지 않고 관민공동회를 더 계속하게 되었다. 이처럼 李承晩은 이제 대중집회의 선동가로 전면에 나서고 있었다.
 

  관민공동회는 이튿날도 속개하여 「헌의6조」의 실시를 위한 정부의 조치를 기다렸다. 그 다음날인 11월2일에 공동회는 총대위원 3명을 선정하여 정부에 「헌의6조」를 조속히 실행할 것을 촉구하는 편지를 보냈고, 정부에서도 고무적인 회답을 보내왔다. 그리하여 관민공동회는 엿새 동안의 집회를 마치고 오후 4시에 해산했다.


 
  드디어 11월4일에 11월2일자로 된 中樞院新官制가 공포되었다. 이날 공포된 신관제에 따르면 中樞院은 〈法律과 勅令의 제정과 폐지 또는 개정에 관한 사항들을 審査議定하는〉 機關이었다. 그것은 이 나라에서 처음으로 國民代表가 참가하는 근대적인 立法機關이 탄생하게 되었음을 뜻하는 것이었다.


이날 정부는 독립협회에서 25명의 의관을 선거하여 그 명단을 보내 달라는 편지를 보내왔고, 독립협회도 이튿날(11월 5일) 독립관에서 중추원 의관 선거를 한다고 공고했다.43)
 
 


  『國體를 共和政으로 바꾸려 한다』
 
 

  그러나 이 역사적인 의회 설립의 기회는 자신들의 입지에 위협을 느낀 수구파들의 악랄한 모함으로 말미암아 이틀 만에 어처구니없이 무산되고 말았다.

 
  중추원 신관제가 공포된 바로 그날(11월4일) 밤에 궁중에 머물던 의정부 찬정 조병식은 군부대신 서리 유기환, 법부협판이자 황국협회 회장인 이기동 등과 밀모하고, 잡배들을 시켜 광화문 밖과 성내 몇몇 요소에 독립협회 쪽에서 작성한 듯이 꾸민 익명서를 몰래 내다 붙이게 했다.44) 尹致昊의 회고에 따르면, 익명서의 내용은 朝鮮王朝는 이미 쇠퇴했으므로 만민공동하여 尹致昊를 大統領으로 선출하면 정부와 시민이 모두 승복하고 국민이 각성하여 開明進步를 이룰 것이라는 것이었다.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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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孫世一의 비교 評傳 - 李承晩과 金九(9)
 

 

 


[ ...... 시민들은 .... 자기들도 체포해 달라고 다투어 요구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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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협회 회장 윤치호는 일기에서 그의 배신감과 러시아․일본의 배후세력 흉계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오늘의 官報는 독립협회의 해산과 헌의 6조에 서명한 대신들을 면관시킨 칙령을 공포하였다. 이것이 국왕이라니! 거짓말을 능사로 하는 배신적인 어떤 비겁자라도 대한의 대황제보다 더 천박한 일을 하지 못할 것이다.


이제는 정부가 친일 노예 兪箕煥과 친러 노비 조병식의 수중에 있다. 러시아 인들과 일본인들의 양자가 이 사건에 개입해서 의심할 여지없이 모종의 살찐 이권을 위하여 그들의 노예들을 지원하고 있다. 저주받을 왜놈들! 그들이 대한의 마지막 희망인 독립협회를 분쇄시키는 데 러시아인들을 돕고 있는 이유를 알게 될 것을 나는 참으로 희망한다 (尹致昊,《尹致昊日記》5, 1898년 11월 5일).

 

실제로 〈주한일본공사관보고〉에서도 일본공사 대리는 대한제국 황제의 독립협회 해산에 사전 동의했다고 본국에 보고하였다.20)


서울 시민들은 이때, 즉 1898년 11월 5일 독립관에서 실시할 동방 개벽이래 최초의 국회의원 선거를 구경하기 위해 아침 식사 후 독립관으로 갈 채비를 차리고 있었다. 또한 투표권을 가진 독립협회 회원들은 모두 새벽에 일찍 일어나서 25명의 새 중추원(상원) 의관 선거를 위해 독립관으로 향할 준비를 하였다. 이 때 청천벽력과 같이 이상재 이하 17명의 독립협회 지도자들이 경무청에 체포되었으며, 독립협회가 강제 해산되었고, 박정양의 개혁정부가 붕괴되었으며, 조병식의 친러수구파정부가 재수립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울분에 북받친 서울 시민들과 독립협회 회원들은 동요하기 시작하였다. 우선 배재학당 학생들이 독립관으로 가려던 발길을 돌려, 경무청 문 앞에 도착해서 항의시위를 시작하였다. 독립협회 회원들과 서울 시민들은 백목전 도매상가에 모여서 萬民共同會를 개최하고 경무청 문 앞으로 달려가기 시작하였다.21) 뒤이어 영어학교와 일어학교 학생들이 밀려왔다.22) 뒤이어 황국중앙총상회 회원들과 한국 최초의 여성단체인 贊襄會 회원들도 경무청 문 앞에 도착하여 합류하였다.23) 이날(11월 5일) 오전 경무청 문 앞에는 삽시간에 수천명의 시민이 운집하여 시위를 하게 되었다.24)


경무청 문 앞에서 서울 시민들은 자연스럽게 만민공동회를 개최하였다. 그리하여 11월 5일 만민공동회가 형성된 것이었다. 경무청 문 앞에서 만민공동회를 형성한 시민들은 林炳吉 등 5명을 총대위원으로 선출하여 경무사 김정근에게 독립협회 지도자 체포를 항의하고 사건 경위의 해명을 요구하였다.25)
경무사는 황제의 칙령에 따른 것이라고 책임을 회피하면서, 경무사와 한성판윤이 황제 칙령을 회중에게 낭독하였다.


시민들은 분개해서 다투어 연설을 한 다음 自願就囚(체포․투옥을 자원)하기로 결의하고, 체포당한 독립협회 지도자들과 함께 자기들도 체포해 달라고 다투어 요구하였다.26) 경무사는 당황하여 시민들은 체포대상자 명단에 없으므로 체포할 수 없으니 해산해 줄 것을 종용하였다.27) 그러나 군중들은 해산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후에는 그 수가 더욱 증가하였다.


이제 새로이 만민공동회가 성립되어 조직적 운동이 시작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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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  국사편찬위, 열강의 이권침탈과 독립협회

         신용하  Ⅴ. 만민공동회의 정치투쟁

 

 

 

[ .... 군인들까지도 독립협회를 지지하고 만민공동회에 동정을 표시 .......

  .... 포위하고 있던 200명의 군인들은 스스로 해산하여 돌아가 ........    ]


[ ....  17명의 독립협회 지도자들을 되찾고 감격에 넘쳐 ........    ]

 


       1898.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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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민공동회 제5일째인 11월 9일 오전 9시경 군부대신서리 유기환은 아직도 군대동원에 의한 만민공동회 탄압의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친위대 제3대대의 2개중대 병력을 대회장에 투입해서 충돌을 유도하며 탄압을 획책했다가 실패하였다.50)


 이날도 아침부터 날이 어둡고 찬비가 소소히 내리어 회민의
옷을 적시었다. 회중들은 찬비를 맞으며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더욱 의기가 분발하였다. 각계 각층의 시민들이 이를 보고 의연금을 계속 보내어 왔다.


예컨대 茶洞에 사는 朴召史는 집 판돈 100원을 내놓아 만민을 감격케 했으며,51) 한 나무장수는 장작 수십 바리를 실어와서 밤을 지새는 땔감으로 쓰도록 했고, 한 과일장수는 단배 3석을 보내어 회원의 목마름을 축이게 했으며,술장수는 새로 빚은 술 수십 통을 보내어 추위를 이기는 데 돕도록 했고, 심지어 걸인 한 사람도 1원을 보조했으며 청국상인까지도 감동하여 4원을 보조하였다.52) 또한 서울의 시전상인들은 이날도 철시를 단행하여 만민공동회를 적극 성원하였다.53)

 

이날 찬비속에서의 만민공동회의 시위와 시민의 호응을 보고 구경나온 외국인까지 감탄을 금치 못했으며,54) 외국공사․영사들도 감동하여 외부를 방문해서 만민공동회에 대한 지지와 동정을 표시하였다.55)


뿐만 아니라 만민공동회에 대처하여 파수를 보던 군인들까지도 독립협회를 지지하고 만민공동회에 동정을 표시했으며,56) 이날 밤 만민공동회를 포위하고 있던 200명의 군인들은 스스로 해산하여 돌아가 버렸다.57) 심지어 만민공동회를 해산시키라는 명령을 받고 나온 한성부 관리들까지도 친러수구파정부의 모략을 개탄하고 만민공동회에 동정을 표시하였다.58)
이날 밤은 찬비가 더욱 세차게 내리고 이튿날 아침까지 짙은 안개가 끼어 지척을 분간하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만민들은 추위와 찬비속에서 여전히 동요하지 않고 철야하였다.59)

 

만민공동회 제6일째인 11월 10일에는 대세는 결정적으로 만민공동회에 유리하게 전개되었다. 황제는 이날 오후 5시경 한성판윤을 시켜 회중의 민원이 무엇인지 알아오게 하였다. 만민공동회 회중은 ①불량배들과 더불어 재판받아 충신과 역적을 밝히고, ②헌의 6조와 조칙 5조를 즉각 실시하며, ③혁파한 독립협회의 복설을 요구한다고 응답하였다.60)


황제 고종은 마침내 민의의 압력에 굴복하여, 이날 조병식․민종묵 등에게 해직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리게 하여 이들을 해임하였다. 황제는 이어서 李金憲永을 의정부 참정으로, 농상공부대신 박제순을 외부대신으로, 학부대신 李道宰를 임시서리 내부대신 사무로 임명했으며, 유기환을 임시서리 군부대신 사무에서 해임하고 군부협판 趙東潤을 그 자리에 임명했고, 경무사 신태휴를 해임하고 그 자리에 閔丙漢을 임명하였다.61) 이로써 만민공동회가 규탄하는 익명서 조작의 장본인들이 대신직에서 해임되었다. 그러나 다른 수구파들이 기용된 것이지, 개혁정부가 수립된 것은 전혀 아니었다.


황제는 이날 오후 7시에 법부대신 한규설을 불러들여 독립협회 17명의 재판이 어떻게 되었는가 묻고, 재심까지 끝났다는 대답을 듣자, 즉시 돌아가 판결해서 마무리 지으라고 명령하였다. 한규설을 재판장으로 한 고등재판소재판부는 ①독립협회 지도자 17명이 칙령을 위반하여 ‘離次開會’ 했으며, ②대신을 위협하고 재판을 강청한 죄가 있으므로 17명 전원을 笞40에 처한다고 선고했으며, 17명 중에서 칙임관․주임관으로서 實職이 있는 사람만 贖錢을 물도록 하고 나머지는 속전도 면제한다고 결정하여 17명 전원을 즉각 석방하였다.62) 이것은 극히 가벼운 벌금형으로서, 거의 무죄선고와 다름없는 것이었다.


만민들은 황제와 수구파의 시위대 및 경무청의 무력 위협과 찬 겨울비속에서도 철야하면서 온갖 고난을 무릅쓰고 만 6일간의 불굴의 투쟁으로 17명의 독립협회 지도자들을 되찾고 감격에 넘쳐 서로 붙들고 울며 서울 장안이 울리도록 만세를 소리쳐 불렀다.63) 석방된 17명 독립협회 지도자를 대표하여 이상재가 조한우를 대리로 시켜 만민의 투쟁에 감사를 드린다는 인사를 하였다.64)


만민공동회는 성립과 동시에 찬 비바람속에서 만 6일간의 철야시위의 간구한 투쟁으로 황제와 수구파에 의해 체포 감금된 독립협회의 17명 지도자들을 석방시킨 대승리를 쟁취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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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  국사편찬위, 열강의 이권침탈과 독립협회

         신용하  Ⅴ. 만민공동회의 정치투쟁

 

 

 

        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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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李承晩의 생애에서 가장 극적인 하루
 
 
  11월21일. 만민공동회의 철야시위가 17일째 되는 날이었다. 漢城府는 민심을 안정시키기 위한 告示를 했다. 드디어 보부상들의 습격이 시작되었다. 이날은 李承晩의 생애에서 가장 극적인 하루였다.
 

  이날 새벽 2시에 만민공동회의 요청에 따라 회장에 나온 의정 서리 金奎弘 등 정부 대신들은 보부상의 혁파와 만민공동회의 피격 방지를 거듭 약속하고 돌아갔다. 그러나 종로의 보부상 패는 아침 일찍 홍종우의 격렬한 선동 연설을 들은 다음 2000여 명이 길영수와 홍종우의 지휘 아래 두 패로 나뉘어 고함을 지르며 인화문 밖의 만민공동회를 습격했다.

 
  李承晩은 회중이 동요하지 않도록 연단에 올라가서 연설을 계속했다.
 
  『우리가 여기 進伏(진복)하여 풍찬노숙하는 것이 옷들을 탐하는 것이오이까 밥을 탐하는 것이오이까! 다만 한다는 일이 모두 나라를 위하고 동포를 사랑함이외다. 지금 들은즉 못된 간세배가 부상패를 불러 우리 만민을 치라고 해서 부상패들이 지금 목전에 당도하였소이다. 우리가 죽더라도 忠愛(「忠君愛國」)하는 의리는 가지고 죽을 터이니, 신민의 직분에 죽어도 또한 천추에 큰 영광이오이다!』63)
 


  이 때에 큰 몽둥이를 든 길영수의 지휘에 따라 보부상들이 공동회장을 둘러쌌다. 경운궁 주변을 지키던 병정과 순검들은 처음에는 보부상들을 제지하는 체했으나 짐짓 밀리고 말았다. 아무 방비 없는 공동회 회중은 보부상 패의 몽둥이에 맞아 이내 부상자가 속출했다. 어떤 사람들은 바로 옆 프랑스 공사관의 담을 넘어 피신하기도 했다. 길영수를 보자 격분한 李承晩은 그를 붙잡고 큰 소리로 외쳤다.
 
  『너도 명색이 국록을 먹는 신하요 너도 소위 대한의 백성이 아니냐! 네 어찌 간세배와 부동하여 부상패를 모집하여 충애하는 우리 만민을 친단 말이냐!』

 

  그러면서 그는 머리로 길영수의 가슴을 들이받으며 『나부터 죽여라!』하고 소리쳤다. 그러나 길영수는 히죽이 웃고는 몸을 빼어 좌충우돌했다. 누군가가 李承晩을 꽉 껴안고 『이승만씨, 진정하고 빨리 달아나시오』하고 말했다. 주위를 살펴보자 李承晩은 보부상들 속에 혼자 남아 있었다. 그는 가졌던 작은 지팡이를 휘두르며 보부상들이 계속 밀려오는 쪽으로 나아가 그들이 길을 막아 놓은 작대기를 발로 차버리고 배재학당 쪽으로 걸어갔다.
 

  배재학당 앞길로 나서며 李承晩은 땅을 치며 울부짖었다. 이때에 이승만의 아버지 敬善이 나타나 아들을 안고 같이 통곡했다. 어떤 사람이 李敬善에게 물었다.
 

  『어찌하여 아들을 그런 위태한 데 다니게 하오?』
 
  그러자 이경선은 이렇게 대답했다.
 
  『내 자식이 만일에 悖戾(패려)한 일을 하게 되면 아비된 도리에 마땅히 엄금하려니와 당당한 충애의 의리로 나라를 위하고 동포를 사랑하여 다니는 것을 어찌 금할 수 있소!』
 

  이 광경을 보도한 「독립신문」의 기사는 〈李承晩씨의 충애에 열심하는 것은 고사하고 그 부친의 당당한 의리는 세계에 더욱 드문 줄로 공론이 있다더라〉하고 덧붙이고 있다.64)
 
 

  『李承晩이가 吉永洙에게 맞아 죽었다』
 
 
  高宗과 수구파는 이것으로 만민공동회가 해산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만민공동회의 기습에 성공한 보부상들이 궁중에서 보내온 백반과 고깃국으로 아침을 먹고 의기양양해 있을 때에, 소문을 듣고 정동 골목길에 모인 군중들이 돌팔매로 반격을 시작했다. 돌팔매에 쫓긴 보부상들이 英國公使館으로 피해 들어가자 공사는 이들을 내쫓았다. 보부상들은 서대문쪽으로 밀렸다. 서대문을 지키던 파수병들은 보부상들만 통과시키고 뒤따르는 군중은 막아서서 뒤쫓지 못하게 했다.
 


  李承晩은 배재학당으로 들어가자 기절하고 말았다.65) 보부상 패에 쫓겼던 사람들이 배재학당으로 몰려왔다. 金瑗根(김원근)이 눈물을 흘리면서 뛰어 들어오더니 『李承晩이가 길영수에게 맞아 죽었다』하고 외치며 통곡을 했다. 李承晩도 자서전 초고에서 〈그날 오후 신문도 내가 길영수에게 덤벼들었다가 그들에게 맞아 죽었다고 보도했다〉고 적고 있으나66) 현존하는 당시의 신문으로는 확인할 수 없다.
 


  몸을 추스린 李承晩은 배재학당에 모인 군중들과 함께 종로 쪽으로 걸어갔다. 종로에서 다시 만민공동회가 열렸다. 이때에 모인 회중의 수는 인화문 앞 집회의 곱절이나 되었다. 李承晩과 양홍묵 등이 등단하여 정부가 보부상을 동원하여 회중을 습격했다고 규탄하는 연설을 했다. 李承晩이 연설하는 것을 보자 사람들은 그가 죽지 않은 것을 알고 놀랐다. 어떤 사람은 그가 얼마나 상했는가 보려고 그에게 다가와서 만져보기까지 했다. 흥분한 회중의 일부는 보부상 패가 몰려 있는 서대문 밖으로 밀려갔으나 병정들이 총포로 위협하여 통과시켜 주지 않았다.
 


  高宗과 수구파는 낭패했다. 고종은 경무사 閔丙漢(민병한)과 한성부 판윤 李根鎔(이근용)을 만민공동회에 보내어 회중을 회유하며 해산을 종용했다. 그러나 격앙된 시민들이 돌팔매로 응수하는 바람에 경무사는 황급히 민가로 피해 숨어야 했다. 이때에 나무를 팔고 돌아가던 나무장수들이 만민공동회가 습격당했다는 말을 듣고 격분하여 이기동의 집을 부셔버렸고, 흥분을 이기지 못한 회중의 일부도 다투어 달려가 조병식 등 보부상 패를 조종하는 대관들의 집을 때려부셨다.
 


  각 학교는 문을 닫았고, 학도들은 모두 공동회로 몰려왔다. 공동회에 참가하지 않은 시민들도 의연금과 음식 등을 보내어 공동회를 격려했다. 군부는 병력을 풀어 高宗이 기거하는 경운궁 앞을 엄중히 경비했고, 정동 큰길은 통행이 통제되었다.
 
 


  18일 동안의 철야투쟁 끝에 獨立協會 부활 얻어내
 
 
  격정의 긴 하루가 지나고 날이 밝자 이른 아침부터 더 많은 시민들이 종로로 모여들었다. 서대문이 열릴 시간이 되자 회중은 보부상을 반격하러 그쪽으로 몰려갔다. 보부상들은 마포로 물러나 있었다. 그러나 거의 빈손인 회중으로서는 몽둥이로 무장한 보부상들을 이길 수 없었다. 신기료 장수 金德九(김덕구)가 사망하고 부상자 10여 명이 생기고 시민들은 패퇴했다.
 


  그러나 서울 시내는 병정들과 순검들마저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를 지지하여 제복을 벗는 등 혁명 전야와 같은 분위기였다.67) 高宗은 각국 공사들을 입궐시켜 궐내에 머물게 하면서 民會에 대한 각국의 대책 사례를 묻고 무력 진압에 대한 자문을 구했다. 그러나 각국 공사들의 의견은 일치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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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부는 보부상들에게 한성부 판윤 李啓弼(이계필) 등을 보내어 보부상이 혁파되었으므로 퇴거하라는 칙유를 전했다. 그러나 보부상들은 종로의 만민회가 퇴거하지 않았다면서 듣지 않았다. 만민공동회는 잠시 먼저 해산하는 것이 현명하다고 판단하고 尹致昊 등이 중심이 되어 무려 다섯 시간 동안이나 토론한 끝에 23일 오후 8시를 기해 이틀 동안 해산하기로 했다. 이날 高宗은 朴定陽, 閔泳煥 등 만민공동회의 지지를 받는 인사들을 주축으로 하여 각료를 개편하고 尹致昊를 한성부 판윤에 임명했다. 그러나 보부상패는 여전히 해산하지 않고 마포에 집결해 있었고, 吉永洙는 가마를 타고 몰래 입궐하기까지 하는 판국이었다.
 


  정부가 약속을 이행할 기미가 보이지 않자 26일 아침부터 군중들이 다시 종로로 모여들었다. 사태가 다시 심각해지자 高宗은 자기가 직접 나서서 사태를 수습해 보려고 시도했다. 高宗은 하오 1시에 경운궁의 敦禮門(돈례문) 軍幕(군막)에 친림했다. 이 자리에는 각국의 외교관들과 그들의 부인들도 초대되었는데, 그들은 모두 예복을 입고 참관했다.
 


  高宗은 먼저 공동회 대표 200명에게 독립협회의 부활 등 공동회의 요구조건을 대체로 허락하면서 해산을 친유했다. 다만 『독립협회는 앞으로 국내의 文明進步에 관한 일만을 토론할 것이며, 정부의 조치에 대한 말참견을 불허한다』고 했다. 공동회 대표들은 만세를 부르고 나와서 해산했다. 高宗은 오후 4시에는 또 보부상 대표 200명을 불러 모호한 약속을 하면서 역시 해산을 권유했다. 보부상들도 만세를 부르고 나와서 해산했다.
 


  이튿날인 27일은 독립협회가 부활되고 나서 처음 맞는 일요일이었다. 감격에 넘치는 통상회의가 열렸다. 이날의 회의에서는 마포에서 보부상 패와 싸우다가 희생된 신기료 장수 김덕구의 장례식을 대대적으로 거행하는 문제 등과 함께 협회의 토론회를 정상화시키기로 결정했다.
 

  그리하여 다음 토론회는 주제를 「信과 義를 튼튼히 지키는 것은 본국을 다스리는 데와 외국들을 사귀는 데 제일 요긴함」으로 정하고, 右議(우의)에 李承晩과 장태환, 좌의에 李商在와 方漢德을 선정했다.70) 부활된 독립협회의 첫 토론회에서 李承晩이 부회장 李商在와 동격의 토론자로 선정되었다는 것은 신진 소장파인 李承晩이 이제 독립협회 안에서도 지도적 위치를 확보했음을 말해 준다.
 
 
 
 
  (5) 中樞院議官에 선임되었다가
 
  제일 먼저 파면돼
 


  高宗과 정부는 11월29일에 기정 방침대로 의관 전원을 관선으로 하여 中樞院을 성립시켰다. 선임된 議官 50명은 독립협회 및 만민공동회 계열이 17명, 황국협회 계열이 16명, 전직 관료와 都約所 등 高宗의 직계가 17명으로서 수구파가 3분의 2 의석이 되도록 배정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들 의관들에게는 연봉 360원을 지급하기로 했다.71)
 

  이 때에 李承晩도 從九品의 의관으로 선임되었는데,72) 독립협회 계열의 17명 가운데에서는 일본에 유학했던 스물두 살의 漢城義塾 교사 卞河進(변하진) 다음으로 가장 젊었다.73) 李承晩은 스물네 살이었다.
 

  그러나 정부의 이러한 일방적인 중추원 의관 선임은 시국을 수습하는 데 전혀 효력을 나타내지 못했다. 17명의 독립협회계 인사 가운데에서 만민공동회 의장 高永根과 尹夏榮, 玄濟昶(현제창) 세 사람은 아예 의관직을 받기를 거부했다. 이들 말고도 李南珪(이남규) 등 전직 관료 네 사람도 授勅(수칙)을 하지 않았다. 일반 국민들의 관심도 끌지 못했다. 신문들도 「관보」나 「잡보」란에 간단히 보도하고 있고, 「皇城新聞」은 중추원이 「옛날의 言官」이라고 해설했다.74)

 
  독립협회는 정부의 일방적인 중추원 의관 선정 발표에 대해 특별히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는데, 그것은 이렇게 설치되는 중추원이 협회가 당초에 주장한 의회와 너무나 거리가 먼 것이어서 특별한 기대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보다는 「헌의6조」 등 정부가 약속한 사항을 빨리 실시하게 하는 것이 주된 운동목표가 되고 있었다.
 
 
  장례형식 빌어 대규모 시위행진
 
 
  12월1일에 거행된 신기료 장수 김덕구의 장례식은 그러한 독립협회의 의지를 나타낸 것이었다. 그것은 장례식의 형식을 빈 대규모의 대중시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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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孫世一의 비교 評傳 - 李承晩과 金九(9)

한국 민족주의의 두 類型

 

 

        *


[ ...... 박사가 홀홀단신으로, 그놈들과 마자싸와, 死生을 직결하던, 그의 극적 활약장면은, 아아 무엇이라 말삼하면 可하오릿가. ........     ]

 

李承晩 博士는 渾身都是熱


金一善

 

이러케 鐘路를 거처서 청년회관을 오면 李박사 생각이 別로 간졀해짐니다.

정말로 公번 띄고 私心업고, 혼신이 도모지 열정 떵어리인 李박사! 그야말로 愛國愛民의 열렬한 志士요 烈士임니다.


일즉이 海州에서 생장하야, 자기 아버지를 쪼차 京城에 드러오기는 아마 16,7세이엿슬 듯함니다. 본래 漢文에 능한 그는 培材學堂에 드러가 영어를 중심으로 신학문을 학습하다가, 丁酉年頃에 徐載弼박사가 독립신문을 發刋할때에는 그 社에 논설기자로 드러가서, 독립이상의 고취에 盡力하얏슴니다.


독립협회라 하며, 만민공동회라 하면 더 말할 것 업시 近世의 조선에서 처음 닐어난 유일한 민간정당으로서, 당시에 宮中府中을 蕭淸하고, 민간사회를 혁신하기에 얼마마한 활약을 하엿는가하는 것은 이제 군더덕이로 말할 것 까지도 업는 바이어니와, 李박사는 그때 겨우 22,3세의 年少로써, 일즉히 독립협회에 관계하고 만민공동회를 지도하야, 소위 황국협회의 褓負商軍으로 더부러 정면격투를 행하얏슴니다. (戊戌己亥年間의 일),


그 당시에 내가 아조 實見한 광경이 잇거이와, 兵丁, 난민을 어울너서 수천으로써 算하는 平凉子軍(褓負商)이 제각각 흉기를 들고, 새문 밧그로부터 貞洞을 넘어, 大漢門쪽 길로 덥허올 때에, 박사가 홀홀단신으로, 그놈들과 마자싸와, 死生을 직결하던, 그의 극적 활약장면은, 아아 무엇이라 말삼하면 可하오릿가. 엇잿던 박사는 그와가티 열렬하엿스며 대담하엿슴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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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벽 제62호   >   밧게 잇는 이 생각, 異域風霜에 氣軆安寧하신가

1925년 08월0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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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적 인간의 탄생

 

 19세기 말, 특히 1898년은 한국 역사상 근대적 인간이 탄생한 첫 해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시기 인민은 더 이상 고립된 개인이 아니라 특정한 조직에 참여하여 자신의 정치적 의사를 표출하고 공동의 의사를 확인하며, 이를 함께 의논하여 그 결정사항을 행동으로 옮기는 단계에까지 이르렀다.

 

이는 첫째, 전통사회의 인습·속박·부조리에 대한 저항의식과 외부세력의 침략에 따른 위기의식에 자극 받아, 비판 및 대항의식을 갖게 됨으로써 촉발되었다.


둘째, 당시 사회경제적 변화가 그 기반이 되었다. 일례로 상민층의 성장은 전통적 상인의 근대적 상인으로의 개편과 조직화, 각종 상회 및 근대주식회사의 등장과도 관련되었다. 한편 농민계층은 동학농민혁명의 영향으로 모든 전근대적 속박과 관습을 폐지해야 한다는 의식을 갖게 되었다. 노동자층도 광산채굴의 진행과 개항장의 무역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천민층 또한 갑오경장이후 법적으로 신분해방을 이루어 사회활동에 참여하는 등 발언권을 갖게 되었다.

 

이들은 풍전등화와 같은 조국의 현실 앞에서 사회의 부조리와 위기에 눈뜨고 있었다. 만민공동회에 참여한 사람들이 이 민회를 주도한 개화파 지도들 이외에 각 학교 학생, 선각적 여성, 시전 상인, 승도·백정·관료 및 신사 등 각계각층의 인민들이었다는 점은 그 좋은 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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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익명의 민중


 
만민공동회를 제안한 인물들은 개화파와 독립협회회원이었지만, 만민공동회를 이끈 사람들은 익명의 민중들이었다. 예를 들어 익명서 사건 이후 17명의 지도자들이 경무청에 체포되자 독립협회가 해산되고 박정양 내각이 붕괴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익명의 민중들은 자발적으로 모닥불을 피우고 밤을 지새웠다.


장작불 시위는 참여자들의 지속적인 확산뿐만 아니라, 의연금과 의연물 지원을 통해 지속될 수 있었다. 이름을 밝히지 않은 어떤 사람은 장국밥 3백 그릇을 보냈고 어떤 상인은 은화를 보내기도 했으며, 외국인들까지도 지지를 보냈다. 심지어 시장의 노파까지도 콩나물 판 대금 2원을 보냈고, 한 영남 유생은 의연금 4원을 먼 곳에서 송금하기도 했다. 익명의 민중들은 황국협회와 순검의 위협은 물론, 찬 겨울비 속의 고난을 무릅쓰고 6일 간의 불굴의 투쟁으로 지도자의 석방을 이루어냈다.


그들은 감격을 이기지 못하여 서로 붙들고 울며 만세를 외쳤다. 익명의 민중들의 투쟁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1898년 11월 21일 황국협회와 맨주먹으로 싸우다 죽은 신기료 장수(구두수선공)인 김덕구 사건을 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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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신문과 만민공동회

문화콘텐츠닷컴

 

 

 

 

1904.8.9 (29세) 이승만, 러일전쟁이 일어나면서 특사로 감옥을 나옴 (민영환, 한규설이 사면을 위해 노력).

 
10.15  남대문의 상동교회 상동청년학원 교장직에 취임했으나 미국으로 가기 위해 곧 사임.
 

11.4  제물포항에서 미국으로 출국 (독립보전에 대한 미국의 지원을 호소하기 위한 고종의 밀사 자격). 일본 고베를 거처 호놀룰루에 도착하여 윤병구 목사와 합류. 

 

 

 

      1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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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帝國新聞」의 「논설」집필
 
 
  李承晩이 출옥하고 나서 시작한 일은 옥중의 부자유스러운 상황에서도 심혈을 기울였던 「帝國新聞」9)의 「논설」을 다시 집필하는 것이었다.「帝國新聞」은 軍部의 代辦砲兵局長이기도 했던 사장 崔岡(최강)이 일본에서 도입한 군함 揚武艦의 가격과 관련된 수뢰사건에 연루되어 구속됨에 따라 사임하고 1903년 6월에 다시 李鍾一이 사장이 되어 있었는데,10) 李鍾一은 1904년 3월에 필화사건으로 투옥되었다가 李承晩과 같이 석방되었다. 이때에 李鍾一이 李承晩에게 「帝國新聞」의 「논설」을 다시 집필해 줄 것을 강력히 요청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무렵에 「帝國新聞」은 논설기자(주필)를 구하지 못하여 고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李承晩이 출옥한 뒤의 「帝國新聞」은 일실된 부분이 너무 많아서11) 그가 다시 「帝國新聞」의 「논설」을 집필한 것이 언제부터였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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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日本軍憲兵司令部에서 「帝國新聞」을 무기정간시켜
 
 
  이처럼 특별히 눈에 띄게 반일적인 논조는 펴고 있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帝國新聞」은 1904년 10월10일에 駐韓日本軍憲兵司令部에 의해 무기정간 처분을 당했다. 정간 이유는 10월7일자 「논설」의 내용이 〈일본 군사상에 방해요, 한일 양국 교제에 방해요, 치안에 방해되는 말〉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16)
 

  문제가 된 「논설」은 공교롭게도 현재 보존되어 있지 않아서 내용을 알 수 없으나 李承晩이 집필했던 것은 틀림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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孫世一의 비교 評傳 - 李承晩과 金九(15)
 
한국 민족주의의 두 類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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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尙洞敎會와 엡워스靑年會
 
 
  독실한 기독교인이 되어 출옥한 李承晩은 尙洞敎會靑年會가 의욕적으로 추진한 靑年學院을 설립하는 일에도 열성적으로 참여했다.
 

  尙洞敎會는 1889년 가을에 감리교 의료선교사인 스크랜턴(William.B.Scranton)이 남대문 안에 세운 교회였다. 상동교회의 처음 이름은 達城敎會였고, 교인들은 거의가 중류층 이하의 가난한 사람들이었다.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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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립협회가 강제해산된 뒤로 상동교회에는 이른바 尙洞派로 불리는 민족운동가들이 모여들어 이 무렵의 개화파 민족운동의 요람지가 되고 있었다. 교회 지하실의 넓은 공간이 그들이 모이는 장소였다. 李承晩이 투옥되기 전에 高宗을 폐위시키고 義和君을 새 황제로 옹립하여 정치개혁을 실시하려는 계획을 같이 추진했던 全德基, 朴容萬, 鄭淳萬 등은 상동교회 청년회의 중심인물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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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敬天愛人하는 참 도로 근본을 삼아…』
 
 
  한동안 해체되기도 했던 상동청년회는 1903년에 전덕기를 중심으로 하여 새로 조직되면서 의욕적인 활동을 전개했다. 천민 출신으로서 스크랜턴 목사집에서 머슴살이를 하면서 기독교인이 된 전덕기는 스크랜턴의 지도로 尙洞敎會의 중심인물로 성장했는데, 이 무렵에는 전도사가 되어 스크랜턴을 대행하고 있었다.


  그는 고향의 양반출신 李東寧과 친구 周時經의 영향으로 독립협회에도 참여하여, 李承晩과 함께 활동하기도 했었다.22) 배재학당 때부터 李承晩과 각별한 친분관계에 있던 周時經은 자신이 속한 貞洞敎會보다도 尙洞敎會의 청년회 사람들과 의기투합해서 어울리고 있었다. 李承晩이 출옥하자 이들은 상동청년회의 역점사업으로 청년들의 교육기관 설립을 추진했다. 尙洞靑年學院의 설립이 그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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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월15일 오후 2시에 청년학원 개교식이 열렸다. 괴로웠던 옥중에서 감옥학교를 운영했던 李承晩에게는 특별히 감개무량한 순간이었을 것이다. 대문 중문과 대청 안에 청송 홍엽으로 아치를 만들어 세우고 국기를 달았다. 내외국 초청인사들과 학도들이 수백 명이나 되어 좁은 자리에 다 앉지 못했다.

 
  교장 李承晩이 먼저 개회사를 했다.『학교의 대지가 모든 학문을 다 하나님 공경하는 참 도로써 근본을 삼아, 청년으로 말하여도 벼슬이나 월급을 위하야 일하는 사람이 되지 말고 세상에 참 유익한 일꾼이 되기를 작정하자는 데 있다』는 요지의 내용이었다.
 

  이어 청년회장 全德基가 청년학원 설립경위를 설명하고, 게일, 헐벗, 스크랜턴이 격려사를 한 다음 부교장 박승규와 교사 周時經, 그리고 학생대표로 유희경이 인사말을 하고 기념촬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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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대교장 李承晩은 상동청년학원이 개교한 지 3주일 만에 美國으로 떠난다. 그러나 이 청년학원은 그가 떠난 뒤에도 全德基가 담당한 성경교육을 비롯하여, 周時經의 국문교육, 張道斌과 崔南善의 국사 교육, 南宮檍-玄楯 등이 담당한 외국어 교육, 군인 출신 이필수가 담당한 체육과 군사 교육, 그밖에도 音樂, 演劇 등의 예술 교육 등을 통하여 기독교 구국론에 입각한 민족신앙 교육의 산실이 되었다.31)

 
  이처럼 상동청년학원은 외국선교사들이 아닌 한국인들의 힘으로 세운 사립학교라는 점에서 특기할 만한 가치가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평양의 大成學校와 같은 다른 사립학교의 설립모델이 되었으며, 1905년의 을사늑약을 계기로 하여 전국의 방방곡곡에서 일어나는 新敎育運動에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많은 영향을 끼쳤을 것이기 때문이다.32) 그런 점에서 李承晩은 한국의 민족교육에도 선구적인 공헌을 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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孫世一의 비교 評傳 - 李承晩과 金九(15)
 
한국 민족주의의 두 類型

 

 

 

         1904.7.13. 보안회

 

[  ...... 보안회의 활동은 종로네거리에서 대중집회를 개최하는 등 ........

   ...... 協同會로 개편되면서는 회장 李相卨, 부회장 李儁 ...  李承晩은 편집부장 .......

   ..... 日本은 8월에 황무지개척권 요구를 철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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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李承晩이 출옥하기 직전부터 서울에서는 日本人의 황무지개척권 요구를 저지하기 위해 1904년 7월13일에 조직된 輔安會(保安會라고도 했다)를 중심으로 활발한 반대운동이 전개되고 있었다. 러-일전쟁의 개전과 동시에 戰時中立을 선포한 韓國 정부를 위협하여 2월23일에 군사동맹을 골자로 한 이른바 韓日議定書를 맺은 일본은 그것을 근거로 하여 새로운 對韓經營方針을 마련하고 그 일환으로 6월 들어 전국의 황무지 개척권을 요구해 온 것이었다.6)
 

  보안회의 활동은 종로네거리에서 대중집회를 개최하는 등으로 독립협회와 萬民共同會의 자주민권운동을 방불케 했다. 이러한 반대운동은 地方에까지 파급되었다. 정부에서는 日本의 항의도 있는데다가 治安문제를 고려하여 해산을 종용했으나 집회는 장소를 典洞의 漢語學校로 옮겨서 계속되었다.
 


  일본은 이러한 상황을 역이용하여 軍事警察을 실시할 것을 일방적으로 한국정부에 통고하고 보안회를 강제로 해산시켰다. 附日團體인 一進會가 발족한 것은 이러한 와중인 1904년 8월20일의 일이었다.
 


  일본군의 군사경찰 실시로 보안회는 해체된 듯했으나, 집회만 하지 않았을 뿐 9월11일에 協同會의 이름으로 새로 조직되었다.7) 보안회는 회장에 전 중추원 의관 宋秀晩, 부회장에 시종 元世性 등을 내세우고 있었는데, 協同會로 개편되면서는 회장 李相卨, 부회장 李儁 등으로 실제 주동자들이 표면에 나섰다. 이들은 정부의 실력자인 閔泳煥의 내밀한 지원을 받고 있었다. 이때에 評議長 李商在, 서무부장 李東輝, 지방부장 梁起鐸, 재무부장 許蔿와 함께 李承晩은 편집부장으로 발표되었는데,8) 실제로 李承晩이 協同會 활동에 얼마나 관여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일본의 황무지개척권 요구에 대한 반대운동이 政府大臣으로부터 일반 민중에 이르기까지 참여하는 救國運動으로 확대하자 日本은 8월에 황무지개척권 요구를 철회했다. 그리고 協同會는 일본군의 무력탄압으로 와해되었으나 그 뿌리는 뒤이은 愛國啓蒙運動의 중심세력으로 발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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孫世一의 비교 評傳 - 李承晩과 金九(15)

한국 민족주의의 두 類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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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9.3.1.

 

[ ........ 잠깐 동안 침묵이 계속되더니 다음에는 그칠 줄 모르는 만세소리가 ........

  ...... 몇 십만의 인파가 서울 거리마다 넘쳐났다. ...........     ]

 

 

2001

국 사 편 찬 위 원 회


한 국 사  47

일제의 무단통치와 3․1운동

 

Ⅲ. 3․1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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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만세시위운동의 시작

 

3월 1일 오후 2시 30분 민족대표를 그때까지 기다리고 있는 학생대표들은 독자적으로 독립선언식을 거행하였다. 그날의 파고다 공원의 광경을 이미륵의 묘사를 통해 볼 수 있다.14)

 

내가 공원에 갔을 때 이미 공원은 경관들로 포위를 당하고 있었다. 담장 내 부는 단 열 발자국도 걷지 못하게 사람이 꽉 차 있었다. …

갑자기 깊은 정적 이 왔고 나는 누군가가 조용한 가운데 연단에서 독립선언서를 읽는 것을 보았다 …

잠깐 동안 침묵이 계속되더니 다음에는 그칠 줄 모르는 만세소리가 하늘을 찔렀다. 좁은 공원에서는 모두 전율하였고, 마치 폭발하려는 것처럼 공중에는 각양각색의 삐라가 휘날렸고 전 군중은 공원에서 나와 시가행진을 하였다. 우뢰와 같은 만세소리와 함께 사방으로 삐라를 날리며 행진하였다 (전혜린,《압록강은 흐른다》 , 여원사, 1959).

 

시민과 학생들이 모인 가운데〈독립선언서〉를 발표한15) 파고다 공원의 군중들은 “독립만세”를 연창하며 시가행진을 했다. 서쪽으로 향한 대열의 제1대는 서울역에서 통의동, 정동, 미국영사관, 이화학당, 광화문 앞, 서대문, 소공동, 충무로로, 다른 1대는 무교동, 대한문으로, 동쪽으로 향한 시위대는 창덕궁, 안국동, 광화문, 서대문, 대한문, 충무로, 동대문 방면으로 행진하였다.
온 서울 장안이 만세소리로 진동하였다.


동쪽으로 향한 다른 시위대는 창덕궁 앞, 안국동, 광화문 앞, 서대문, 프랑스영사관에 이르러 일부는 미국영사관, 대한문 앞, 소공동, 충무로(本町)를 거쳐 종로통, 동아연초회사, 동대문으로 향했다.


그날 대한문 앞 광장에는 광무황제의 돌연한 죽음을 애도하는 각도의 유생들이 엎드려 곡하는 것을 많은 남녀노소들이 운집하여 지켜보고 있었다. 파고다공원의 시위대열에 앞서 검은 제복을 입은 학생들이 2, 3명씩 조를 지어 먼저 달려오더니 군중들 속으로 흩어져 들어가 모자를 벗어 들고 열변을 토했다.

학생들을 에워싸고 있던 군중들이 독립만세를 높이 외치자 금방 군중 전체에 전파되어 만세소리가 대한문 광장을 뒤흔들었다.16) 상인들은 점포를 철시하고 뛰쳐 나오고, 因山을 구경하러 시골에서 상경한 유생들, 평안도 수건을 쓴 부녀자들, 백립을 쓴 노인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가담하여 몇 십만의 인파가 서울 거리마다 넘쳐났다. 대열은 동서남북으로 나누어 각국 영사관, 일제 주요기관 등을 누비며 나갔다. 행렬은 꼬리를 물었고, 대열마다 한번씩은 덕수궁 정문 앞에 당도하여 대한문 안으로 몇 걸음 들어가서 황제의 빈전을 향하여 절하고 물러갔다. 해가 질 때까지 목이 터져라 만세를 부르며 행진하였다.17)


《조선독립신문》을 비롯한 여러 종류의 지하신문과 격문들이 시가에 배포되었다. 이날 전주에서 상경하여 서울 시가지 시위광경을 목격한 한 사람은 당시의 시위광경을 이렇게 기록으로 남겼다.

 

그때 인심은 극도로 동요되고 학생은 교복을 벗고 白衣에 흰 헌팅을 쓰고 서로 만나는 대로 인사 뿐이요, 말은 하나도 건네지 않고 이처럼 학생들의 鬪意는 불타고 있었다. 거리의 긴장은 무서웠고, 독립신문을 비롯한 비밀신문이 무려 수십 종이 발행되어 돌며, 거리마다 만세성이 물끓듯 적이 컸는지라. 일경은 말을 타고 3尺 가량이나 되는 철망치를 휘두르며, 소방부는 몽둥이를 들고 발광하듯이 우리 동포를 사상케 하였고, 거리며 동리 어구마다 변장한 倭警이 서서 加害를 하니 그 수 不知其數라. 그럴수록 민심의 타는 애국의 至情은 더욱 더 고양의 일로를 달릴 뿐이었다 (유병민,〈내 삼일운동의 기록〉 ,《신천지》1 -2, 1946, 112~113쪽).

 

시위대가 지나가는 길목마다 시민들이 합세하여 함께 만세를 불렀다.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이었던 崔恩喜 여사는 그 광경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독일 영사관에서 회정하여 의주통을 지나갈 적에는 길가에 냉수동이가 즐비하게 놓이고, 평양수건을 쓴 할머니들이 지켜서서 바가지로 물을 떠 주다가 바가지째 두 손을 번쩍 들고 만세를 부르던 것이 퍽 인상적이었다. … 우리 일대는 거기서 숭례문까지 내려갔다가 다시 돌아 진고개 골목으로 들어섰다. … 샐 틈이 없는 좁은 골목이라 본정 2정목에 이르러서부터는 몽땅 체포하기 시작하였다. 일제 상가가 모두 떨쳐 나와 협력하였다. … 수갑이나 포승을 사용할 겨를이 없었다. 헌병들은 양편 손에 한 사람씩 손목을 잡고 남산 밑에 있는 경무총감부로 연행해 갔다. 군중들은 끌려가는 길에서도 힘차게 만세를 불렀고, 총감부 마당에 꿇어앉은 사람들도 새 사람이 잡혀 들어올 적마다 마주 들 바라보며 만세를 불렀다 (최은희,《조국을 찾기까지》中, 탐구당, 1973, 100 ~101쪽).

 

3월은 해가 짧아 일찍 어두워졌다. 저녁 7시까지 서울 중심가에서는 시위운동이 일단 끝났으나 밤 8시 경 마포전차 종점에서 전차에서 내린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하여 약 1,000명의 사람들이 모여 만세시위를 하였고, 밤11시 경에는 신촌 연희전문학교 부근에서 학생 약 200명이 집결하여 시위를 하였다.18)


일제 총독부는 서울 중심가의 군경을 총동원하는 한편, 용산의 일본군 보병 3개 중대와 기마병 1개 소대를 시위해산에 투입하였다. 일제는 평화적인 학생, 시민들의 시위에 손을 쓸 방법을 몰라하다가 해가 저물고 난 뒤부터 경찰․헌병․군인들이 일본 진고개 상점가 점원들의 도움을 받아가며 그곳을 통과하는 시위대원들을 모조리 검거했다. 이 날 134명이 검속되었다.

서울에서 독립만세 시위운동이 시작된 같은 날에 평양․진남포․안주․의주․선천․원산에서도 시위운동이 일어났다. 이들 지역에 사전에 천도교측과 기독교측에 의해〈독립선언서〉가 배포되었고, 사전 조직화 작업이 진행되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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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종의 격문들이 시중에 살포되는 가운데, 상인들은 철시하고, 공장의 노동자․고용인․행상인․일반 서민들이 시위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상인들은 3월 1일부터 대부분 철시에 들어가 8일에는 완전철시, 시위운동에 참여를 결의하여 3월말까지 완전철시에 들어갔다. 당황한 일제는 상인 대표 60명을 초청하여 수 차례 개점을 설득하였으나 거부되자 4월 1일부터 경찰을 동원하여 강제 개점을 시켰으나, 큰 효과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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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위의 전국확산

 

3월 1일 서울․평양․진남포․안주․의주․선천․원산 등 4개 道 7개 도시에서 독립선언과 시위운동은 서북지방과 경기․충남지방을 시작으로 전국에 파급되어 갔다. 강원도에서는 3월 10일 철원에서 최초의 만세시위가 일어 났으며, 전북에서는 3월 3일 전주․군산․이리에서〈독립선언서〉가 배포되고 4일 옥구에서 최초의 시위가 일어났다. 전남은 3월 3일 목포․광양․구례․순천․여수 등지에서〈독립선언서〉가 배포되고, 10일 최초의 시위가 광주에서 학생들에 의해 일어났다. 경남은 3월 3일 부산과 마산에서〈독립선언서〉가 배포되고, 11일 부산진에서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경북 대구에서는 3월 8일, 함북 성진에서는 3월 10일, 충북 괴산에서는 3월 19일 각각 최초의 시위가 일어나 도내 다른 지역으로 퍼져나갔다. 3월 중순경에 들어서서는 마치
요원의 불길처럼 전국 방방곡곡에서 시위운동이 일어났다.


집중적인 시위운동은 최소한 4월 말까지 두 달간 계속되었다. 3월 1일부터 4월 11일까지는 매일 10회 이상 시위가 일어났으며, 시위운동의 정점을 이룬 4월 1일은 하루 동안 67회의 시위가 일어났다. 3월 27일, 4월 2일․3일은 50회 이상 일어났으며, 적어도 30회 이상 일어난 날만 15일이었다.


참여인원으로 보면, 수십만이 참여한 서울을 제외하고서도, 의주 3만 명, 강화읍 약 2만 명, 합천․삼가 1만 명, 선천 8,000명, 삭주군 대관 8,000명,선천읍 6,000명, 순천읍 5,000명, 명천군 화대 5,000명 등 대규모의 시위도 많았다.


시위운동은 다양한 형태로 전개되었다. 시가지 대로상의 만세시위, 시골장터에서 행한 장터 만세시위, 야간 산상의 봉화시위, 한 장소에서의 1회성 만세시위, 같은 장소에서 몇 차례 거듭된 시위운동, 인근 지역을 찾아다니며 행한 만세꾼들의 시위운동, 지역과 지역이 태극기를 이어 받으며 행한 릴레이 시위운동, 일제의 총칼에 목숨을 잃은 사람의 시신을 떠메고 행한 상여시위, 상점 문을 걸어 잠근 상인들의 철시시위, 학생들의 동맹휴학시위, 노동자들의 파업, 광부들의 순사주재소 습격시위, 어린이 시위, 거지들의 시위, 기생들의 시위 등 남녀노소와 빈부귀천을 가리지 않고 전계층이 다양한 형태로 참여하였다. 이렇게 행한 총 시위 회수는 2,000회 이상, 연인원 200만 이상으로 추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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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9.

 

[...... 예닐곱 개의 臨時政府에서 실질적인 정상의 지도자로 추대되었다 .........


.... 〈당시 형세는 내외지를 막론하고 인심의 추이가 오직 李承晩에게 폭주하였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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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1 운동은 40대 중반에 이른 李承晩과 金九의 인생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李承晩은 3·1 운동 이후에 국내외에서 선포되거나 논의되던 예닐곱 개의 臨時政府에서 실질적인 정상의 지도자로 추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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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內外地의 인심이 李承晩에게 瀑注해』

 
  그러나 〈당시 형세는 내외지를 막론하고 인심의 추이가 오직 李承晩에게 폭주하였었다〉는 현순의 표현대로 이때는 이미 李承晩은 어느 누구도 견줄 수 없는 존재가 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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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孫世一의 비교 評傳 한국민족주의의 두 類型-李承晩과 金九

  31. 임시정부 국무총리 李承晩

 

 

 


       1945.12.17.

 

[ .....  러시아를 저의 조국이라 부른다니 ........

   ..... 한국에서 떠나서 저의 조국에 들어가서 저의 나라를 충성스럽게 섬기라 ........     ]

 

이승만, ‘공산당에 대한 나의 입장’ 방송
 
 
게재지명 서울신문
 
 게재일자 1945년 12월 21일

 

李承晩은 17일 7시반 ‘共産黨에 대한 나의 입장’이라는 제목하에 그 대변인으로 하여금 서울중앙방송국을 통하여 다음과 같은 방송을 하였다.

 

“共産黨에 대한 나의 입장

 

한국은 지금 우리 형편으로 공산당을 원치 않는 것을 우리는 세계 각국에 대하여 선언합니다. 기왕에도 재삼 말한 바와 같이 우리가 공산주의를 排斥하는 것이 아니오 공산당 극렬파들의 파괴주의를 원치않는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비록 4천여년의 오랜 역사를 가졌으나 우리가 다 잘못한 죄로 거의 죽게 되었다가 지금 艱幸히 살아나서 다시 발을 땅에 디디고 일어나려고 애쓰는 중이니 까딱 잘못하면 밖에서 들어 오는 병과 안에서 생기는 병세로 생명이 다시 위태할 터이니 먹는 음식과 행하는 동작을 다 극히 조심해서 어린애기처럼 간호해야 할 것이고 건강한 사람처럼 대우할 수 없는 것입니다.


공산당 극렬분자들의 행동을 보시고 우선 동서 각국에서 遂要되는 것만 볼지라도 폴란드 극렬분자는 폴란드 독립을 위하여 나라를 건설하자는 사람이 아니오 폴란드獨立을 파괴하는 자들입니다. 이번 전쟁에 독일이 그 나라를 점령한 후에 애국자들이 임시정부를 세워서 영국의 수도인 런던에 의탁하고 있어 백방으로 지하공작을 하며 英·美의 승인까지 받고 있다고 급기야 러시아가 독일軍을 몰아내고 그 땅을 점령한 후에 폴란드 공산분자가 외국의 세력을 藉托하고 공산정부를 세워서 각국의 승인을 얻고 또 타국의 軍機를 빌려다가 국민을 위협해서 민주주의자가 머리를 들지 못하게 만들어 놓아 지금도 정돈이 못되고 충돌이 쉬지않는 중이며 이외에도 歐羅巴의 해방된 모든 나라들을 보면 각각 그 나라 공산분자들이 들어가서 제나라를 파괴시키고 타국의 권리범위내에 두어서 독립권을 영영 말살시키기로 위주하는 고로 전국 백성이 처음으로 그자들의 선동에 끌려서 뭣인지 모르고 따라가다가 차차 각오가 생겨서 죽기로써 투거하는 고로 구라파의 각 해방국은 하나도 공산분자의 파괴운동으로 인연하여 분열 분쟁이 아니된 나라가 없는 터입니다.

 

동양의 중국으로 보아도 蔣介石總統의 애국심과 용감한 軍略으로 전국 민중을 합동해서 왜적에 항전하여 실낱 같이 위태한 중국운명을 보호하여 놓았더니 연합 각국은 다 그 공적을 찬양하며 극력 후원하는 바이어늘 중국의 공산분자는 백방으로 파괴운동을 쉬지 아니하고 공산정부를 따로 세워 중국을 두 조각으로 나누어 놓고 무장한 군병을 양성하여 중앙정부와 蔣總統을 악선전하여 그 세력을 뺐기로 극력하다가 필경은 내란을 일으켜 관병과 접전하여 동족상쟁으로 피를 흘리게 쉬지 아니하는 고로 타국들은 이것을 이용하여 이권을 도모하기에 기탄치 않기에 이르나니 만일 중국의 공산분자가 만분지일이라도 중국을 위하여 독립을 보존하려는 생각이 있으면 어찌 차마 이같은 파괴적 행동을 취하리오.

 

우리 대한으로 말하면 원래에 공산주의를 아는 동포가 내지에는 불과 몇명이 못되었다니 공산문제는 도무지 없는 것입니다. 그중에 공산당으로 지목받는 동포들은 실로 독립을 위하는 애국자들이요 공산주의를 위하여 나라를 파괴하자는 사람들은 아닙니다. 따라서 시베리아에 있는 우리 동포들도 다대수가 우리와 같은 목적으로 생명까지 희생하려는 애국자들인줄 우리는 의심없이 믿는 바입니다.

 

 불행히 양의 무리에 이리가 섞여서 공산명목을 憑藉하고 국경을 없이하여 나라와 동족을 팔아다가 이익과 광영을 위하여 浮言僞說로 인민을 속이며 도당을 지어 동족을 위협하며 軍機를 사용하여 재산을 약탈하며 소위 공화국이라는 명사를 조작하여 국민전체에 분열상태를 세인에게 선전하기에 이르다가 지금은 민중이 차차 깨어나서 공산에 대한 반동이 일어나매 간계를 써서 각처에 선전하기를 저이들이 공산주의자가 아니요 민주주의자라 하여 민심을 현혹시키니 이 극렬분자들의 목적은 우리 독립국을 없이해서 남의 노예로 만들고 저의 사욕을 채우려는 것을 누구나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분자들이 러시아를 저의 조국이라 부른다니 과연 이것이 사실이라면 우리의 요구하는 바는 이 사람들이 한국에서 떠나서 저의 조국에 들어가서 저의 나라를 충성스럽게 섬기라고 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우리나라를 찾아서 완전히 우리의 것을 만들어 가지고 잘하나 못하나 우리의 원하는대로 만들어 가지고 살려는 것을 이 사람들이 왜 조선사람의 形容을 쓰고 와서 우리 것을 빼앗아다가 저의 조국에 붙이려는 것은 우리가 결코 허락치 않는 것이니 우리 3천만 남녀가 다 목숨을 내 놓고 싸울 입니다. 우리의 친애하는 남녀들은 어디서든지 각기 소재지에서 합동해서 무슨 명사로든지 애국주의를 조직하고 분열을 일삼는 자들과 싸워야 됩니다. 우리가 우리나라와 우리 민족과 우리 가족을 팔아 먹으려는 자들을 방임하여 두고 우리나라와 우리 민족과 우리가족을 보전할 수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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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이 사람들을 회유시켜서 이 위급한 시기에 합동공작을 형성시키자는 주의로 많은 시일을 허비하고 많은 노력을 써서 시험하여 보았으나 종시 각성이 못되는 모양이니 지금은 중앙협의회의 조직을 더 지체할 수 없이 협동하는 단체와 합하여 착착 진행중이니 지금이라도 그중 극렬분자도 각성만 생긴다면 구태어 거절하지 않을 것입니다. 다만 파괴운동을 정지하는 자로만 협동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에 이 문제를 우리손으로 해결치 못하면 종시는 우리나라도 다른 해방국들과 같이 나라가 두 切分으로 나누어져서 동족상쟁의 화를 면치 못하고 따라서 결국은 다시 남의 노예노릇을 면키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경향각처에서 모든 애국 애족하는 동포의 합심합력으로 단순한 民主政體下에서 국가를 건설하여 만년무궁한 자유복락의 기초를 세우기로 결심합시다.”

 

 

 


巨惡 스탈린과 공산당을 조롱한 李承晩의 대연설
 
 
 트루먼 독트린을 2년 앞선 이 연설은 建國 지도자에 의하여 이뤄진, 2차 대전 이후 소련과 공산당에 대한 세계 최초의 정면 대결 선언이다. 


趙甲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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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연설은 70세 老鬪士(노투사)의 위대한 先制공격이었다. 급소를 얻어맞은 조선공산당 박헌영은 중앙위원회 대표 명의로 ‘세계민주주의전선의 분열을 책동하는 파시스트 이승만 박사의 성명을 반박함’이라는 長文의 성명을 발표하였다. 표현은 극렬했지만 守勢的(수세적)일 수밖에 없었다. 박헌영 등 공산세력이 주도한 좌익의 통일전선체인 조선인민공화국은 李承晩이 귀국하기 전에 그를 主席으로 추대하였던 적이 있었다. 그래 놓고 그를 파시스트라고 공격하니 국민들에겐 잘 먹히지 않았다. 대중의 李承晩에 대한 신뢰는 공산당의 선전 선동이 무너뜨릴 수 없을 정도로 깊은 뿌리를 박고 있었다.
 


  李承晩이 공산당을 賣國세력으로 규정한 지 1주일이 지난 12월26일 모스크바에서 열린 美, 英, 蘇 3國 外相 회담은 남북한에 대한 5년 기한의 신탁 통치안을 발표하였다. 金九, 李承晩이 주도한 反託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났다. 朴憲永의 조선공산당은 熱火(열화)와 같은 민심에 동요하여 贊反(찬반)을 정하지 못했다. 지령이 내려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박헌영은 서울 주재 소련영사관을 찾아가 지침을 받으려 했으나 영사관측은 본국으로부터 훈령을 받지 못하였다고 했다. 박헌영은 12월28일 밤 비밀리에 38선을 넘어 평양으로 갔다. 그는 김일성 등 조선공산당 북조선 분국 간부들에게 신탁통치에 대한 남한의 민심이 반대쪽이라고 설명하였다. 김일성도 어쩔 줄 몰라 하였다. 모스크바에 갔던 북한주둔 소련군 民政사령관 로마넨코가 평양으로 돌아온 다음날 朴憲永에게 지침을 하달하였다. 신탁통치를 결의한 모스크바 협정을 지지하라는 것이었다.
 

  朴憲永은 1946년 1월1일 밤 평양을 출발, 2일 새벽 서울에 도착, 김일성과 보조를 맞추어 조선공산당 이름으로 모스크바 협정, 즉 신탁통치 지지 성명을 발표하였다. 李承晩의 1주일 전 예언대로 극렬공산주의자들은 民心을 거스르고, 소련의 지령에 충직하게 복무함으로써 민족반역자로서의 면모를 드러내었다. 그들은 회복이 불가능한 敗着(패착)을 두었다. 좌익은 賣國세력, 우익은 民族진영이 된 것이다. 右翼(우익) 주도의 反託, 좌익 주도의 贊託(찬탁) 政局은 김구의 臨政(임정)세력을 오른쪽으로 몰았다. 그 뒤 한 동안 李承晩-金九 연합전선이 형성되면서 좌익은 더욱 고립된다.
 


  李承晩은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先制공격으로 역사의 주도권을 잡았다. 그가 2010년 한국 대통령이었다면 연평도 도발 직후 평양의 금수산 기념궁전을 폭격하도록 명령하여 김일성의 屍身(시신)을 날려버리고 김정일-김정은을 昏絶(혼절) 시켰을 것이다.
 

  李承晩의 공산주의자 배격 연설은 한반도 정세를 賣國者와 愛國者, 파괴자와 건설자, 敵과 동지, 善과 惡으로 가른 역사의 分水嶺(분수령)이었다. 오늘의 한반도 정세는 그 연설의 결과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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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7.

 

 

 

        1945.12.31.

 

[ ...... 서울 시내 상점은 거의 문을 닫고, 동대문 뒷산이 하얗게 덮일 정도로 사람들이 몰렸어요. ........

  ...... 좌도 없고 우도 없고 완전히 자연발생적이었습니다 ........    ]

 

[광복 5년사 쟁점 재조명]<1부>(17)삼상회의 보도

 2004-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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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찬탁을 반동으로 몰던 그들인데…


“12월 31일 서울운동장에서 반탁궐기대회가 열렸을 때 서울 시내 상점은 거의 문을 닫고, 동대문 뒷산이 하얗게 덮일 정도로 사람들이 몰렸어요. 반탁운동은 누가 계획하고 주도해서 일어난 게 결코 아닙니다. 좌도 없고 우도 없고 완전히 자연발생적이었습니다.”


경교장 모임에도 참석했던 강원용 목사는 올해 초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회고했다.


12월 29일 경교장에서 신탁통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가 결성됐다. 각계 인사로 구성된 중앙위원 76명 중엔 박헌영 홍남표 이극로 김세용 같은 좌익 지도자들도 다수 포함됐다. 그와 동시에 좌익단체와 좌익인사들의 반탁 담화와 성명이 줄을 이었다. 12월 30일엔 40여 개의 좌익단체가 모여 ‘반파쇼공동투쟁위원회’ 결성대회를 갖고 신탁통치안철폐요구성명서를 채택했다.


● 찬탁을 반동으로 몰던 그들인데…


이 성명서에 흥미로운 대목이 있다. ‘반동분자들이 갈망하는 신탁통치는 결코 실현되고야 말았다’는 것이다. 그 시점엔 좌익에게 있어서도 신탁통치에 찬성하는 사람은 ‘반동분자’임이 분명했다. 조선공산당 서울시위원회는 12월 31일까지도 반탁 전단을 살포했다. 이쯤에서 확실히 가릴 것이 있다. 그것은 신탁통치를 제의한 쪽이 소련이었다고 해서 신탁통치에 대한 반대가 더 커졌다고 해석하는 논리는 정확하지 않다는 점이다.


좌익도 초기엔 신탁통치 자체를 반대했지 그것을 어느 쪽이 제의했느냐는 중시하지 않았다. 그러던 좌익의 태도가 해를 넘기면서 돌변했다. 1946년 1월 3일 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가 돌연 3국 외무장관회의 결정에 대한 지지담화문을 발표했다. 1월 4일 인공 중앙인민위원회도 뒤를 따랐다. 이어 조선공산당 책임비서 박헌영은 1월 5일 기자회견에서 “김구 씨의 반탁데모는 큰 과오를 범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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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ews.donga.com/Series/List_70070000000600/3/all/20041212/8138197/1

 

 


[ ...... 시민들이 총동원을 하고 군정관리들이 그 뭐 거의 다 사표를 내버리고 서울 시에 있는 경찰서장들이 시외 경찰들이 사표를 .........   ]

 

이철승 편

제7회 신탁통치의 급보와 영도자들의 동향


1965.04.09 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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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인제 우리는 서울 운동장에서 전 시가 철수를 하고 12월30일 날 반탁 총궐기대회를 하지않았습니까? 그 당시에 뭐 시민들이 총동원을 하고 군정관리들이 그 뭐 거의 다 사표를 내버리고 서울 시에 있는 경찰서장들이 시외 경찰들이 사표를 냈으니깐요.


네 그리고 나니까 조병욱박사가 참 여기서 한가지 얘기하고 싶은것은 조박사는 당시 경무부장이란 말이죠. 그 경무부장의 입장이 고약하단 말이야. 그래서 가운데서 샌드위치에요. 우익에서는 우익대로 반탁을 하고 하치중장은 사령관으로서 미국과 소련이 국제회의에서 결정한 신탁을 말에요 우리가 반대하니까 그사람 그 중무장관을 통해서 질서를 위계해라. 또 반대를 못하게 해라. 이런 입장이 있고 그러니깐 그 양반이 가운데서 입장이 곤란한 입장이였단 말이지


특히 임시정부의 신이치가 포고 내무부장이었던 그때 내무부장 포고 1호 2호를 내가지고 적 쏜다고 포고를 해버렸는데요 바로 우리정부 행세를 한다고 그러니깐 하치가 조박사를 불러가지고 임정을 갔다가 그냥 추방시키겠다. 이 조박사가 하치한테 삶아가지고 결국 임정을 추방하더니 더 직설을 혼란할 작정이요 난 감당 못하겠소 우리 조국 광복을 위했던 이런분을 추방하다니 이런 반탁은 민중의 자유의사 아니요 이게 민주주의의 씨 프링스프런이 아니요 이렇게 하치한테 따지니깐 그 하치는 그걸 조박사 말씀을 들었다는 거에요 심지어 조박사한테 나중에 들었습니다만은 하치 사령관이 …도망갔기 때문에 군정관리 밥을 못먹었다는 그런 그 애피소드를 들은바 있습니다.

 

-하여튼 한국인 종업원 일체가 전부 파워를 했…


-네 그렇습니다. 그래서요 그러다가 그 1월3일날 그 민족 통일 자주 독립 촉성 서울 시민대회든가요? 그런 이름으로서 그 자익계통에서 서울 운동장에서 궐기 대회를 한다그랬어요. 그러니깐 전부 시민들이 1월 3일날 전부 거기 가지 않았겠습니까?

그 대대동호에서 근 십만명이 왔다. 서울 운동장에 그러다 보니깐 별안간 그 사람들이 우리는 자중해야 하고 우리는 그 감정적으로 하면 안되고 이 신탁통치를 반대한다. 이러는 그 연설을 하기 때문에 거기에서도 난리가 나버렸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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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인 모두는 신탁통치라는 단어가 내포하고 있는 뜻이 日帝의 지배와 너무 유사하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에 이를 격렬히 비난하였다 .........    ]

 

美軍政의 政策과 國內政治狀況

金 雲 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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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信託統治問題와 美·蘇 共委에 대한 美軍政의 對應

 

한국인이 解放의 實體를 올바로 파악하기 시작한 것은 신탁통치 소식에 접하면서부터이다. 한국에 5년 동안 신탁통치가 실시될 것이라는 모스크바 三相會議 決定書 내용이 처음으로 국내에 보도되자, 한국인은 이때부터 해방이 반드시 즉시 독립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완전한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투쟁이 강력하게 전개되어야 한다고 확신했다.37) 당시 좌·우익을 포함한 한국인 모두는 신탁통치라는 단어가 내포하고 있는 뜻이 日帝의 지배와 너무 유사하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에 이를 격렬히 비난하였다.38)


그렇지만 좌익측이 1946년 1월 2일 蘇聯의 指令에 의해 신탁통치에 대한 그들의 태도를 갑 작스럽게 바꾸자,39) 새로운 혼란이 야기되었다. 이후 좌·우익은 각기 신탁통치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옹호하는 논리40)를 전개하면서 격렬하게 대립하였고, 마침내 이들의 대립은 감정의 싸움으로까지 深化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해방 정국이 信託統治 論爭으로 인해 昏迷를 거듭하자, 누구보다도 가장 곤혹스러운 입장에 놓이게 된 것은 바로 美軍政이었다. 왜냐하면 본국 정부의 國務長官이 참석한 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 한국인이 이토록 격렬하게 반대하는 신탁통치 결정이 내려졌으므로 미군정은 본국 정부의 對韓政策과 한국인의 民族主義的인 感情 사이에서 뚜렷한 묘안을 찾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미군정은 자신과 정치적인 이념을 같이 하는 우익 세력이 신탁통치에 반대하고, 오히려 자신이 견제해야 될 세력인 좌익이 신탁통치에 찬성하였기 때문에 매우 난처한 입장에 처하게 되었던 것이다. 또한 統治權을 행사해야 될 미군정의 입장에서 볼 때, 좌·우익이 신탁통치 문제로 인해 극도로 분열·대립되어 政局의 緊張을 초래하는 것 자체가 결코 바람직스럽지 못했다.

 

신탁통치 문제에 대한 미군정의 이와 같은 우려는 金九가 이끄는 臨政 세력에 의해 現實化되기 시작했다. 反託 運動을 가장 먼저 주도한 김구는 이 운동에 대해 국민들이 절대적으로 호응하자, 이 기회를 이용해 臨時政府의 名義로 정부의 기능을 수행하려고 기도하
였다. 이러한 기도는 ‘臨時政府 布告第 1號’를 발표함으로써 비롯되었는데, 이 포고의 제1항은 “현재 전국 軍政廳 소속의 警察 機構 及 韓人 職員은 전부 본 임시정부 지휘하에 예속케 함”이라는 내용으로 되어 있었다.41) 이것은 바로 미군정에 대한 정면 도전으로서, 미군정은 이를 ‘쿠데타’로 간주할 수밖에 없었다.42)


때문에 미군정으로서는 이러한 金九의 企圖를 분쇄할 필요가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미군정이 이에 물리적인 힘을 동원하여 대처하는 것은 바람직스럽지 못했다. 바로 이와같은 상황에서 발표된 것이 번즈(James F. Byrnes) 美 國務長官의 성명이었다. 번즈는
‘임시정부 포고 제 1호’가 발표된 바로 그 날(1945년 12월 30일) 신탁통치 문제를 둘러싼 한국 내의 사정이 심상치 않음을 깨닫고 “한국의 臨時 民主 政府와 함께 일할 美·蘇 共 同委員會가 신탁통치의 폐지 가능성을 발견할지도 모른다”고 言明하였던 것이다.43) 이 성
명은 김구 세력의 反託 熱氣는 물론 쿠데타 기도까지도 어느 정도 누그러뜨리는 데에 효과가 있었다. 이것은 그 이튿날 臨政의 宣傳部長인 嚴恒燮이 “앞으로 반탁 운동은 평화적 인 방법으로 수행할 것”이라고 발표44)한 데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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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7.11.


[ ...... 유엔의 南北韓同時選擧를 통한 統一案이 발표되자

       共產黨은 선거에 승산이 없기 때문에 소련과 국내의 共產勢力이 맹렬하게 반대 ........   ]

 

美軍政의 韓國政治指導者에 對한 政策硏究 (1945〜1948)

李 仁 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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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美國務省은 10월 9일, 점령군의 철수문제는 統韓 獨立政府樹立問題 解決의 필수적 부분으로 알고 있으며 소련제의에 대해 유엔총회의 주의를 환기시켰다고 回信하였다.139) 그리고 유엔의 미국대표는 10월 17일, 臨時委員團의 감시아래 남북한에서 선거를 실시하여 人口比例로 대표를 선출하고 국회와 정부를 수립해서 이 정부로 하여금 防衛軍을 조직하게 한 다음 占領軍을 철수하게 한다는 決議案을 제출하였으며 총회는 11월 14일 이 안을 採擇하였다.140) 그동안 소련에 대한 美側의 宥和政策으로 인해 북한을 共產化하고 남한마저 赤化하려는 소련의 팽창정책에 守勢만을 지키던 미국은 이제야 유엔을 통한 外交로 信託統治가 아닌 民族自決主義 原則에 입각한 한국의 통일독립을 추진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북한에 16萬의 赤軍을 투입하여 이미 共產政權을 수립해 놓고 있는 소련이 비록 유엔의 決議라 하여도 共產化를 막게 할 自由選擧를 북한에서 거부할것은 國際間 權力政治를 아는 사람이면 추측이 가능하였고, 그것은 통일을 갈망하는 한국민의 마음을 어둡게 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유엔의 南北韓同時選擧를 통한 統一案이 발표되자 共產黨은 선거에 승산이 없기 때문에 소련과 국내의 共產勢力이 맹렬하게 반대한 것은 물론이다. 그동안 信託統治를 반대하며 즉시 독립을 주장해 온 민족진영에서는 이 유엔의 결의를 크게 환영하였으나 韓國獨立黨을 중심으로 하는 各 政黨協議會는 美蘇兩軍의 철퇴를 요구하며 南北政黨의 대표회의를 구성하여 統一政府를 세우라고 주장하였다.141) 이와 같이 金九를 추종하는 韓國獨立黨系列에서는 계속해서 선거를 기피하며 共產黨의 주장과 같이 兩軍撤收와
南北韓政黨代表들의 卓上會議로 정부를 수립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11월 21일, 民族陣營 70개단체들이 이러한 주장은 共產黨의 대변자로 볼 수밖에 없다고 규탄하자 金九는 이 주장을 보류하게 하였다.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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歸國後 李承晚과 政治路線을 같이 하면서도 그의 追從者들과 獨自的 路線을 취하기도 하였던 金九는 유엔選擧案을 반대하는 주장이 규탄을 받게되자 12월 1일 대체로 유엔의 안을 찬성하면서 이승만의 선거를 통한 政府樹立案을 支持하는 談話를 발표하였다.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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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李承晩 1,024표 .... △朴憲永 62표, △金日成 33표 .........    ]

 

동아일보 1948년 06월 27일   

조선여론협회, 초대대통령 선출 가두여론조사

 

조선 여론협회에서는 23일 서울시내 5개소에서 초대 대통령은 누구를 원하오하는 설문으로 통행인 1천5백명의 여론을 조사한 바 다음과 같은 결과를 얻었다.


△李承晩 1,024표, △金九 568표, △徐載弼 118표, △金奎植 89표, △朴憲永 62표, △金日成 33표, △許憲 30표, △李靑天 26표, △曺奉岩 18표, △申翼熙 12표, △이외 23명 45표, △무효 475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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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주의자들은 그들의 상전인 소련의 지령으로 선거를 반대하고 있다. 그들은 절대적인 공산당의 형식과 지배 이외에는 여하한 형식의 비밀투표에 의한 선거를 원하지 않는다. 왜그러냐 하면 그들은 선거를 행하면 자기의 국가를 공산주의의 일위성국가로 팔아 먹고자 하는 조선인의 수효가 극소수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판명될 것을 잘 알고 있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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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중대한 사실은 공산당과 밑走狗들의 선거에 대한 모든 선전 및 위반 또는 선거를 배척하고 반대하는 자들의 온갖 수단에도 불구하고  남조선내의 전유권자의 90% 이상이 등록을 하였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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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인민공화국’ .... 이승만을 주석으로 발표 ........

  ......  공산당의 朴憲永도 이승만의 귀국 후 그를 찾아가 당수가 되어 줄 것을 요청 ...........      ]

 

[ ...... 국회의장으로 .... 재석 198명 중에서 188표를 .....대통령선거에서도 180표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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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3·1 운동 직후 수립된 漢城임시정부에서 執權官總裁, 統合임시정부 임시대통령, 상해임시정부 국무총리, 블라디보스톡임시정부 국무총리 등으로 선출된 정통성을 가지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李王家의 후예, 미국과 중국에서의 독립운동, 한국인 최초의 미국 프린스턴대학 정치학박사 등의 화려한 배경을 가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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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5일 일본천황의 항복방송과 동시에 건국준비위원회를 발족시키고 9월 5일에 전국인민대표회의를 열어 ‘조선인민공화국’이라는 정부수립을 선포했던 呂運亨이 9월 14일 발표한 조각에서 김구·허헌·김규식·여운형 등 국내외의 지도적 정치가들을 모두 망라한 중에서도 이승만을 주석으로 발표한 것은, 이승만이 귀국하기 이전에도 그는 국내 정치인들 로부터 가장 높은 위치의 정치인으로 인정받고 있었음을 나타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3)


또한 공산당의 朴憲永도 이승만의 귀국 후 그를 찾아가 당수가 되어 줄 것을 요청한 바 있으며,4) 우익세력의 최대정당이었던 韓民黨도 1945년 9월 16일의 창당대회에서 이승만을 서재필·김구·이시영·문창범·권동진·오세창 등과 함께 당의 영수로 추대하였다. 이외에도 1945년 11월 2일에 좌우익의 모든 정당 및 단체들이 모여 결성한 獨立促成中央協議會 에서도 이승만은 회장으로 선출되었다.5)


1946년 2 월 미 군정하에서 공산당을 제외한 임시정부요인, 한민당, 신한민족당, 국민당, 인민당, 무소속, 기독교, 천주교, 불교 등 모든 정치세력들이 참가한 비상국민회의 최고위원회가 성립되었다. 비상국민회의의 최고정무위원으로 구성된 민주의원은 처음에는 하지중장의 자문기관으로 발족하였으나 곧 정부수립을 준비하는 과도정부적 성격을 띠게 되었다. 이 비상국민회의 최고위원회에서도 이승만 은 민주의원의 의장으로, 김규식은 부의장으로, 그리고 김구는 총무에 선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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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5·10선거로 수립된 제헌국회에서 이승만이 국회의장으로 선출될 때에도 재석 198명 중에서 188표를 얻어 당선된 점이라던가 대통령선거에서도 180표를 얻어 압도적으로 당선된 것들은 당시의 정치인들이 이승만이 대통령이 되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할 정도로 이승만의 집권은 이변이 아니라 정상적인 절차였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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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5.8.24.

 

"경원선 철도 끊기며 분단 시작 너무 어이없고 황당하지 않나"


 입력 : 2009.06.29 03:23 / 수정 : 2009.06.30 10:03


신작 '별들 너머 저쪽과 이쪽' 낸 소설가 이호철

 

"남북 분단은 소련군이 1945년 8월 24일 서울~원산 간의 경원선(京元線) 철도를 차단하면서 시작됐다."


'분단시대'의 실향민 작가 이호철씨(78)는 함경남도 원산이 고향이다. 1945년 광복 당시 10대 소년이었던 이씨는 "지난 60여년간 우리를 고통스럽게 한 남북 분단이 이렇게 '철도 차단'에서 시작됐다는 것은, 당사자인 우리로서는 너무 어이없고 황당하지 않은가"라고 회상했다.


"소련군은 이어 8월 25일 서울~의주 간의 경의선(京義線) 운행도 막았고, 미군이 서울에 진주한 9월 6일에는 전화·전보 등 통신과 우편물 교환을 완전 차단했다. 소련은 처음부터 동구권을 먹었듯이 북한을 자국의 패권주의 틀 속에 편입하려고 했다. 미국은 소련과의 전후(戰後) 처리 합의에 따라 그저 먼 산 쳐다보듯 할 수밖에 없었다."

 
이호철씨는 얼마 전 "분단과 6·25전쟁의 원흉은 스탈린"이라고 강조하면서 허구와 역사의 결합을 통해 남북 분단을 새롭게 조명한 신작 장편소설 《별들 너머 저쪽과 이쪽》을 펴냈다. 이씨는 "문학성보다는 내 경험을 바탕으로 젊은 세대에게 6·25와 남북 관계의 실체를 알려주기 위해 현대사 참고서로 사용할 수 있는 책을 썼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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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소련군은 북한지역을 점령하자마자 38선을 경계로 하여 남한지역과의 교통·통신을 단절하여 남북 주민 간의 자유로운 교통·통신을 금지시켰다 .......  ]


 [ ..... 미군은 ... 교통·통신을 회복하고 ...자유로운 왕래와 상거래를 회복할 것을... 제의했으나 소련군은 일절 응하지 않았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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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이 소련군과 분할 점령을 위해 군사분계선으로 38선을 책정한 것은 이론의 여지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미국이 38선을 책정한 사실이 곧 한반도 분단에 대한 미국의 책임으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이는 제2차 세계대전 終戰(종전) 직후의 서독과 오스트리아에서 확인된다. 서독에는 美·英·佛 군대 간의 군사분계선이 있었고, 오스트리아에는 美·英·佛·蘇 군대 간의 군사분계선이 있었으나 그것이 곧바로 국토분단을 초래하지는 않았다.
 


  광복 직후 남한을 점령한 미국은 38선을 순수한 군사분계선으로 유지하려고 했던 데 반하여, 북한을 점령한 소련은 38선을 통치분계선으로 변질시켰다. 소련군은 북한지역을 점령하자마자 38선을 경계로 하여 남한지역과의 교통·통신을 단절하여 남북 주민 간의 자유로운 교통·통신을 금지시켰다.

 

  스탈린은 1945년 9월20일 비밀지령에서 북한에 독자적인 공산정권의 수립을 지시했다. 이에 따라 소련 점령군 사령부는 10월8일부터 10일까지 평양에서 북조선5도인민위원회 대표자대회를 소집하고, 이어 이북5도행정위원회를 수립한 뒤 산하에 10개 행정국을 두었다. 이는 북한에 이미 별개의 정부가 들어선 것이다.

 
  소련은 金日成을 내세워 북한지역에서 1946년 2월에 토지개혁과 중요산업의 국유화를 골자로 하는 이른바 「민주개혁」을 단행했다. 뿐만이 아니다. 미군은 美·蘇공동위원회를 비롯하여 몇 차례 단절된 남북 간의 교통·통신을 회복하고 남북한 자유로운 왕래와 상거래를 회복할 것을 소련군에 제의했으나 소련군은 일절 응하지 않았다.

 

  미국이 남한지역을 식민지化·군사기지化하려 했고, 처음부터 남한지역에 분단정권을 수립하려 했다는 주장도 사실과 다르다. 미국은 처음부터 남한의 전략적 가치를 낮게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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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좌익진영은 ... 통일만 주장했을 뿐  .... 남북한간 교통 통신 단절의 해제를 주장해본 일이 단 한번도 없다 .......   ]

 

 1945.10.


 무조건 단결과 38선 철폐를 주장

 


해방정국에서의 우익진영의 초기 열세는 45년 10월 중순 이승만이 귀국하면서부터 다소 만회되기 시작했다.


이승만은 귀국과 동시에 민족의 무조건 단결과 38선 철폐를 주장했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을 역임했고 장기간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해옴으로써 독립운동의 최고지도자로 알려진 이승만이 귀국과 함께 천명한 2가지 사항은 대중에게 큰 호소력을 발휘했다.

 

그동안 공산당과 좌익으로부터 친일파라는 비판을 받아온 한민당은 독립운동의 최고지도자인 이승만의 “먼저 단결하여 완전독립을 달성하고 그 다음에 친일파 문제를 정당한 절차에 따라 처리해야 한다”는 주장에 의해 구원받게 되었다.


또한 이승만이 38선 철폐를 공공연하게 주장해줌으로써 소련의 행동은 무엇이나 옳다고 옹호하고 따라서 38선을 경계로 남북한간 교통 통신을 일방적으로 단절시킨 소련의 조치도 옹호해온 공산당의 입장을 수세로 몰아넣을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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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의 귀국 이후 우익진영은 기회 있을 때마다 38선의 철폐를 주장하고, 38선을 경계로 소련에 의해 강요되고 있는 남북한 주민간 교통 통신 단절을 해제할 것을 반복하여 주장했다.


 그에 반해 좌익진영은 48년 남북한에 2개의 정부가 수립될 때까지 통일만 주장했을 뿐 38선을 경계로 남북한간 교통 통신 단절의 해제를 주장해본 일이 단 한번도 없다.

좌익진영은 단지 남한에서도 북한에서와 같이 인민위원회에 정권을 넘겨주고 친일파 숙청과 토지개혁이 이루어지면, 다시 말해서 남한사회가 북한사회처럼 되면 38선은 자연히 해소될 것이라고만 주장했다.
 

이 하나의 사실만으로도 해방정국의 좌·우익 중 어느 쪽이 보다 자주적이며 통일지향적이었던가를 쉽게 판단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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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5.10.14.

 

 김일성을 고발한다

 김일성 직속 기자의 수기 8


  한재덕

 고당의 명연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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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날 대회에서도 '로마넹코' 소장이 '다와리시치'(동무) 김일성을 소개하고 그가 마치 일제와 가장 영웅적으로 싸운 최고의 애국자인 듯이 장황하게 늘어 놓고 "이러한 애국영웅을 지도자로 맞이하는 조선 민족을 축복한다"는 환영사인지 축사인지 모를 독단적 연설을 내리 읽었다. 후일 입증된 바와 같이 그실 이것은 이 김일성을 자기들의 공산위성국=북한의 영주로 임명하는 '사령장'의 낭독인 셈이었던 것이다.

 

이 날 조만식 선생도 '평안남도 인민정치위원회' 위원장으로서 어차피 연설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조선생은 전날 밤과 같이 김일성에 대해서는 마지 못해서 그를 환영한다고 간단히 언급한 다음 자기가 일상 생각하고 있던 바를 이 기회에 한마디 하련다고 전제하고 일장의 연설을 베풀었다.사람들은 오래 간만에 대망의 조만식 선생의 열변을 들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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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하여간 지금도 기억나는 고당의 연설의 한 항목에 이런 것이 있었다.

 

" 일제시대 일본사람들은 우리나라 사람 보고 하도 못살게 굴다 못해 나중에는 정오 싸이렌이 나면 어디서든지 엄숙히 서서 일본군의 무운장구를 비는 묵도를 하라고 하였다. 우리는 할 수 없이 이에 따를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우리가 매일 정오 싸이렌 때마다 엄숙히 서서 하나님께 빈것은 일제의 무운장구가 아니라 일제가 하루 빨리 망하게 해주십사 하는 것이었다.


하나님은 불의하고 무리한 일제의 뱃심 좋은 소원을 들어 주신것이 아니라 우리들 약소민족의 지당하고도 절실한 염원을 들어 주셨다. 그 어떤 자라도 사람의 마음까지를 정복할 수는 없는 것이며 정당한 염원은 하나님의 은덕으로 반드시 이루어지는 것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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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아일보   1962.5.10.목요일.

 

 


    1945.11.23.  신의주 의거

 

전국학련 ―나의 학생운동 이철승<제47화>


 [중앙일보]  1975.08.27 

 

< 신의주 학생사건 >

 

남한에서의 학생운동이 「반탁」의 기치를 들고 확대되기 이전 북녘땅 신의주에서는 소련점령군의 만행에 항거하는 학생의거가 전개됐다.

 

소련점령군에 항거…「자치대」결성 |11월23일 의거에 24명 죽고 3백50명 중상 | 일부학생들 월남…반탁투쟁에 활력소

 

그러니까 1945년 11월23일. 이날 의거에 나섰던 신의주학생들중 일부는 뒤에 사선을 넘어와 월남학생을 거점으로해서 반공대열에 나섰고 이것은 반공·반탁투쟁에 활력소를 불어 넣었다.

신의주학생의거의 배경은 말할 것도 없이 소련 점령군의 만행과 약탈.


1945년8윌20일 성진, 21일 원산과 함흥, 23일 개성, 24일 평양, 30일 신의주등으로 진주해온 소련군은 선진강대국의 해방군이 아니라 점령군으로서의 행패를 부렸다.


살인 폭행 강간 강도 약탈 무전취식이 백주의 노상에서 자행됐고 이와같은 만행은 함흥 신의주 평양등 소군이 진주하고 있는 곳에서는 어디서나 「새로운 질서」인냥 횡행했다.


이런 상황속에서 신성해야 할 학원도 소련군의 병영이나 공산당의 정치훈련소로 징발됐다. 여기서 오랫동안 기독교적 저항정신과 강인한 서북기질로 다져진 학생들의 울분이 폭발했다. 11월3일의 광주학생의거일을 맞아 신의주학생들은 기념식을 갖고 학생대표들이 제일공업학교 강당에 모여 「평북학생자치대」를 결성했다.


날로 불안해져가는 정정속에서 학원·학생들의 자유와 권리를 지켜 보자는 뜻에 자치대가 결성됐다.

 

이 자치대의 한 대표가 11월21일 상오10시 「용암포 주둔 소련군 위로환영대회」에 참석하게 됐다.
대회는 각본에 따라 몇 사람의 아부발언이 진행됐다.

그러나 막상 학생계를 대표하여 학생자치대대표가 연단에 나서자 상황은 크게 달라졌다.


『여러분, 해방이란 도대체 무엇입니까. 피땀 흘려 거두어 들인 곡식을 약탈해가는 자들이 해방군입니까. 공공건물과 심지어 학생들의 배움의 터전인 학교건물까지 징발하여 자기들의 노략질 창고로 쓰는 자들이 해방군인입니까. 그 해방군들은 짐승처럼 이 겨례의 순박한 처녀를 짓밟았습니다. 우리의 쌀뒤주를 뒤졌습니다.』


이 선동연설은 학생들의 가슴에 불을 붙였다.

 

사태는 순식간에 악화됐다. 좌우학생이 격돌했고 공산당원들이 이에 가세했다. 12명이나 되는 학생들이 괭이와 몽둥이질에 중상을 입었고 이를 말리던 제일교회 홍석황장로가 그자리에서 타살됐다.


이 비보는 삽시간에 신의주시내로 번졌다.


학생대표들은 윤순호군(당시제일공업대표)집에 모여 긴급회의를 열고 사후대책을 논의, 22일에 항의「데모」를 갖기로 했다. 노송동 동중강당에서 박선봉(평안중대표·재미) 윤순호 이도명(제일공업·교육계) 조병건·이신일(제이공업대표)등 학생대표들이 당시 도학무국장 함석헌씨를 만나 이 거사를 귀띔했다. 그러자 함선생은 『의로운 일은 그 누구의 힘으로도 막지 못한다』고 격려를 해주어 대표들의 사기를 북돋워 주었다.

 

거사일은 23일, 그리고 H「아워」는 하오2시로 굳혔다.전시내의 6개학교가 행동목표도 분담했다.
동중과 제일공업은 인민위원회 보안부를, 사범과 제이공업은 공산당본부를, 신의주보안서는 평안중과 상업학교를 각기 맡기로 했다.

 

압록강넘어 대륙에서 몰아쳐오는 강바람이 유난히 매서웠던 그날 하오2시. 동중과 제일 공업은 『학원의 자유를 침범말라』『피난민 구제기금 착복자 나오라』는 등의 구호를 외치며 도보안부를 겹겹이 에워쌌다.

그리고는 동중은 정문을, 제일공업은 후문을 타고 넘기 시작했다.

 

이에 맞서 보안부대에서의 무차별사격이 이루어졌다. 동중 이정직군이 쓰러졌다. 같이 담을 넘은 지남선 임춘주 양군은 피투성이가 된 이군을 끌어안고 강안역까지 도망을 쳤다. 「탱크」포가 터지고 상공에는 소군 「야크」전투기가 낮게 떠서 기총소사를 시작했다. 이 습격에서 이정식 백광진 조도우등 13명의 학생들이 죽고 80여명이 중상을 입었다.


한편 공산당본부로 갔던 제이공업과 사범학생들도 김의준 장원봉등 11명의 학생들이 생명을 앗기고 당시 제이공업기계과 2년 김장흥군은 악착같이 추격해오는 소련군을 피해 압록강철교를 줄달음 치다가 그만 푸른 강심으로 뛰어들고 말았다.
희생은 평안중학과 상업학교에서도 났다.


당일 피살자는 모두 21명, 중상자 3백50명…공산당과 소련군사령부에서는 혈안이 되어 학생들을 잡아 가두었으며 체포구금된자 1천여명중에서 2백여명은 「시베리아」로 유형을 보냈다.


뒷날 내가 반탁학생연맹을 이끌며 반탁운동을 벌였을때 나의 좌우에서 고락을 같이한 동지중에는 신의주를 중심한 서북지역출신이 많았다. 장익삼·박선봉·김득신·최찬영·김기석·이범석·김호영·이미수·윤영환·차장준·차순학군등은 서북학생의 대표적 인물이었다.

 

 

 

       194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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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신교인 중심의 조선민주당을 창당하여 반탁 운동을 벌이던 조만식은 뜻을 바꾸지 않았고, 신탁통치 협정문 안건에 관한 사회를 거부함으로써 북조선에서 정권을 잡은 김일성 세력에 의해 곧바로 인민정치위원회 위원장에서 축출된 뒤 조만식은 결국 1월 5일부터 연금상태에 처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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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5.11.18. 재경서북인, 38선 철폐촉진대회 개최

 

[ ...... 북위 38도 이북의 소련점령지역에서 특히 언론 출판 집회 결사 신앙의 자유를 확보케 하며 ........


 ..... 일당일파의 專管을 불허하며 ..... 인민위원회에 구속된 조선인정치운동자를 즉시 석방하며 .........      ]


재경서북인, 38선 철폐촉진대회 개최


게재지명 중앙신문
게재일자 1945년 11월 19일
날짜 1945년 11월 18일

 


方應謨 외 여러 재경 서북인유지의 발기로 그 간 준비하여 온 북위 38도 철폐 촉진대회는 18일 오후 1시부터 시내 천도교당에서 서북출신 5백여명이 참집한 가운데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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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군수뇌부에 발송할 결의문은 다음과 같다.

 

◊ 決議文


我朝鮮의 해방을 위하여 일본을 타도한 연합제국에 대하여 감사의 의를 표함. 그러나 북위 38도를 남북으로 미·소 양군이 분단점령한 것은 조선의 자주민족통일국가 완수상 절대지장이 되어 있을 뿐 아니라 생활상 불안 불편이 막대하므로 빨리 장벽을 철폐하여 행정상, 경제상, 교통상 통일을 촉구한다.


一. 북위 38도 이북의 소련점령지역에서 특히 언론 출판 집회 결사 신앙의 자유를 확보케 하며 일본정부로부터 행정 사법기관 등을 접수함에 있어서 일당일파의 專管을 불허하며 8월 15일 이후 현존한 인민위원회에 구속된 조선인정치운동자를 즉시 석방하며 소군의 불합리한 양곡, 의류, 기계 등 물자를 조선 외로 수출하는 것을 소련당국에 탄원함

附帶決議 右決議를 연합국 수뇌자에게 타전함


1945년 11월 18일
在京西北人大會

 

 


       1945.11. 평양

 

[ ..... "철의 장막"이나  "참대의 장막"은 .... 지방과 지방 사이,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늘 ........   ]

 

[ .... 평양민보에는 ... 검열과 지도를 위하여 쏘모프라는 젊은 군인 ........

  .... 쏘모프가 ... "신의주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다는 말을 못들었느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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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의 11월 23일" 신의주학생반공의거사건 당시 나는 아직 평남인민정치위원회의 기관지라고 하지만 그실은 소련사령부와 공산당의 지시하에 움직이는 "평양민보"의 실질적인 책임자로 있었다.......


평양에 하나밖에 없는 신문사 책임자임에도 불구하고 내가 신의주 사건을 어설프게나마 비로소 알게 된 것은 11월 25일경이었다고 기억한다. 당시는 철도도 소련사람들이  장악하고 제멋대로 운영하고 특히 약탈물자반출운전이 위주였기 때문에 각지간의 교통의 불편이란 이루 헤아릴 수가 없었다. 그래서 지방의 뉴스가 평양에  전해지는 것도 아주 느리었던 것이다.


그런데다 이 사건이  폭발하자 소련군정당국과 공산괴뢰들은 그것이 딴지방에 파급될까  당황하고 질겁을 하여 이 뉴스가 퍼져 나가는 것을 백방으로 저지하기에 애를 썼기 때문에  일반인에게는 이 소식이 알려지는 것이 훨씬 늦었거나 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것이다.아니 그 당시에는 이것을  전연 모르고  지낸 사람도 허다 하였으며 모름지기 오늘도 북한동포 가운데는 아직도 이것을 일체 모르고 있는 사람이 적지 않을 것이다. 공산 통치자들의 뉴스 통제책이란 그렇게도 철저한 것이다. "철의 장막"이나 "참대의 장막"은 공산세계와 자유세계 사이에만 쳐지는 것이 아니라  공산사회내부의 지방과 지방 사이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늘 이뤄지는 것이다.

 

그런데 흥미있는 일은 내가 이 사건을 비로소 주워 듣게 된 것은 이 뉴스를 막으려는 소련 사람들의 통제조치 때문에 도리어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당시 평양민보에는 소련사령부로부터 우리신문의 검열과 지도를 위하여 쏘모프라는 젊은 군인 한사람이 배치되어 거의 신문사에 나와 살다시피 하였다. .... 이 쏘모프라는 소련군인은  아직 나이 젊고 계급도 높지 못하였으나... 우리나라말을 전공하였기 때문에 서투른대로 신문검열의 중책을 맡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소련사령부에는 그보다 군계급도 높고 아는 점도 그 보다는 많은 한국인2세 군인들과 통역관들도 많았지만 소련장군들은  새로 나오기 시작하는 이곳 신문검열과 지도를 위한 자리같은 중책에는 그들을 내보내지 않고 비록 젊고 낮고 서투른대로 쏘모프 같은 소련인을 내보내는 것이었다. 소련사람들이란 그렇듯 곰같이  끈끈하고 의심 많고 남의 나라 사람이란 비록  "공산주의 동무"라 해도 잘 믿으려 하지 않는 자들이었다.

 

쏘모프가 하루는 내방에 들어와서 "신의주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다는 말을 못들었느냐?"고 묻는 것이었다.나는 아무것도 듣지 못하였다고 솔직히 말하고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되물었다. 그랬더니 그도 고개를 기웃거리며 자기도 자세히 모르겠는데(정말 모르는 모양이었다) 좌우간 신의주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서는 무슨 기사이던 들어와도 취급하지 말라는 상부(사령부)의 지시라고 전하고 다짐하는 것이었다.

나는 무슨일일인지 의아스럽게 여겨 사내 간부들에게도 이리저리알아 보았으나 아무도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이었다.그런데 몇시간 있다가 사령부에서 들어 오란다는 연락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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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1962.7.1.

김일성을 고발한다
김일성 직속기자의 수기

한재덕

 

 

 

       1945   신의주

 

[ ...... 연회가 끝나갈 무렵 보안부장 한웅이란 자가 피스톨을 꺼내어 쐈다 .... 항의를 한 사람이 없었다 .........


 ...... 그날부터 일은 자꾸 기울어지기 시작 .... 하룻밤 새 생긴 공산당원의 횡포뿐이다. 정체 알 수 없는 특무대란 것이 생겼다 .........   ]

 

 


내가 겪은 신의주 학생 사건 - 함석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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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군이 들어오자마자 시내는 공포 분위기에 싸이게 됐다. 첫째로 한 것이 상점 약탈이었다. 시계, 만년필은 닥치는 대로 "다와이"(내라)다. 그 담은 여자다. 어디서 여자가 끌려갔다, 어디서 무슨 일이 있었다 하는 소리가 날마다 들려왔다.

 

위원회로서 소련군 장교 환영 모임을 위해 의논을 하는데 부위원장이라는 사람의 첫번 소리가 미인계를 써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몹쓸 데를 왔구나 후회하는 생각이 났지만 이제 갑자기 빠져나갈 수도 없었다. 한 손에 무슨 알코올 병을 들고 한 손에는 냉수컵을 들고 마셔대는 소련군, 인간으론 보이지 않고 짐승으로만 보이는 공산당 위원들, 나라가 뭔지 아냐 모르냐 물어보고 싶은 재재거리는 기생들을 번갈아 보며 그 자리엘 앉아있자니 살아 있는 것 같지를 않았다.

 

연회가 끝나갈 무렵 보안부장 한웅이란 자가 피스톨을 꺼내어 쐈다. 일동이 놀랐으나 뛰어 일어선 사람은 없었고 천장을 향해 쐈으니 사람이 상하지는 않았다. 위협하는 것이었다. 옆의 소련 장교가 빙그레 웃고 빼앗아버렸으나 인간의 짓이라 할 수 없는 일이고, 누가 봐도 그들 사이에는 뒷면에 무슨 오고감이 있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나부터도 못했지만, 누구도 그 자리에서도 그 후에도 거기 대해 항의를 한 사람이 없었다.

 


 이튿날 일본 사람을 모두 한 수용소로 모으고 여자를 순번으로 징발해내어 소련 군인에게로 보내기로 했다. 일본 여자들도 승락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니 삶이란 뭐냐 또 한번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일이 다 말할 수도 없지만 그날부터 일은 자꾸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들려오는 것은 그저 하룻밤 새 생긴 공산당원의 횡포뿐이다. 정체 알 수 없는 특무대란 것이 생겼다. 그저 횡행천하다. 그러니 해방으로 인해 왔던 그 감격, 그 바다같이 넓어졌던 민중의 마음, 서로 믿고 서로 협력하고 서로 일하려던 그 열심을 다 달아나버리고, 있는 것은 공포, 불안, 분개, 낙심뿐이었다.

 

소련군 사령관이 오자마자 환영식을 했는데 그 자리에서 그는 분명히 말하기를 "우리는 당신들에게 아무것도 강요하지 않고, 당신들이 원하는 대로 어떤 형태의 정부를 세워도 자유입니다." 했다. 그러나 그것은 말뿐이고 사실은 소련 일생으로 기울어지는 것이었다. 벌써 거리마다 레닌, 스탈린 초상이 나붙지, 거리 이름을 레닌가 스탈린 광장으로 고치지, 학교에서 소련말을 가르치기 시작하지, 그러더니 평양에서 5도연합회의가 열린다고 통지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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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6.3.6.  38선 철폐요구 국민대회

 


 [ .... 生地獄 38以北의 同胞를 살리자 ...... ]

 [ .... 38以北의 言論·集會·結社의 자유를 다오 ...... ]


 [ ... ‘건국의 장애물인 38선을 철폐하라’...... ]

 

 

  38선철폐요구 국민대회 개최
 
 
게재지명 동아일보
 
게재일자 1946년 03월 06일
 

 

 
38線撤廢要求國民大會가 5일 오전 11시 반 서울운동장에서 개최되었다.

이날 38선철폐요구국민대회에 군중이 들고 나선 기치와 표어는 다음과 같다.

 

38絞首線 撤廢

38以北의 農民의 食糧을 약탈 말라

生地獄 38以北의 同胞를 살리자

自主獨立의 전제조건이다

38以北의 機械없는 공장의 노동자를 살리자

38以北의 言論·集會·結社의 자유를 다오

言論機關은 반성하라 38以北의 진상을 정확히 報道하라

民族의 總意로 38線 撤廢를 요구하자

 


이날 오전 11시 반 대회장에는 남북 각지에서 모인 수천명이 ‘건국의 장애물인 38선을 철폐하라’ 38絞首線을 철폐하라라고 쓴 깃발을 휘날리고 국민의 총의를 무시한 38선의 철폐에 돌진하려는 결의가 움직이는 가운데 대회의 막이 열리었다.


개회사와 국기게양이 끝난 다음 애국가 합창이 성동중학교의 취주악대와 함께 있은 후 대회위원장 李允榮(平壤朝鮮民主黨副黨首)으로부터 “38선의 문제를 해결하기 전 우리의 완전독립은 가망없다. 우리는 이 대회를 기점으로 38선철폐 국민운동을 전국적으로 전개하려 한다”라는 개회사가 있었다.

그 다음 임시정부 외교부장 趙素昻으로부터 李承晩, 金九의 축사를 대독한 후 서북선의 실정보고에 들어가 宋義淳, 崔奎恒, 白凡石 3인의 보고연설에 이어 다음과 같은 決議文 낭독이 있은 후 독립만세 삼창으로서 의의깊은 대회의 막을 닫고 동 오후 2시에 폐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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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決議文

 

1) 朝鮮의 38도선은 外敵이 항복하기 전 聯合軍參謀總長會議에서 작전상의 필요로 획정하였다는 사실에 비추어 보건대 금일의 朝鮮에 있어서는 이미 그 필요성을 인정치 아니한다.

 이 후도 美蘇兩軍이 38선을 경계로 분할 주둔하여 현재와 같은 3천만 민족의 統一團結과 自主國家 건설에 지장이 클 뿐 아니라 국가경제의 파멸을 초래하여 國民生活을 도탄에 빠지게 하며 政治·經濟 文化·交通·通信·居住의 자유를 拘?하는 바 큼으로 우리는 3천만 민족의 이름으로써 聯合軍과 聯合軍總司令官 及 美蘇共同委員會에 대하여 38선의 즉시 철폐를 요구하여 其 목적의 관철을 기하기를 결의함.


1) 우리 동포중에는 □□을 기화로 선량한 동포들을 기만 □□하여 政權의 획득을 꾀하는 賣國奴가 있어서 심지어 光輝있는 祖國을 外夷에게 팔아 먹으려는 □□□ 이땅에서 횡행 활보하니 어찌 통탄치 아니하랴.


 38以北을 바라보건대 진정한 民意를 무시하고 소수인원의 恣意로 된 臨時人民委員會가 있어 입으로 民主主義를 표방하면서 민중을 억압 기만하여 후일 政權의 횡탈을 꾀하려 하니 우리 어찌 만연 방관할 수 있으랴.


이제 우리 3천만 동포는 理論과 표방에 속지 말고 사리와 감정을 떠나서 현실을 엄정 냉정히 관찰하여 정사를 가르고 □□을 판단하여 우리의 추앙 신앙하는 民族의 領導者를 선택치 아니치 못하게 되었으니 여기서 우리는 朝鮮의 血統과 民族的 良心을 가진 3천만 동포의 이름으로 大韓國民代表民主議院을 절대 지지하는 것을 천하에 선명하여 써 內로는 民心의 歸一을 策하며 外로는 이를 萬邦으로 하여금 大韓國民의 完全統一政權으로 승인케 하기를 결의함.

 

 
大韓民國 28년 3월 5일

38線撤廢要求國民大會

 

동아일보 1946년 03월 06일 

 

 

 

 

[ .... 協定된 것도 蘇聯軍司令官의 거부로 성립되지 아니하였으니 蘇聯軍의 心腸은 과연 어디에 있는가.

  .... 38도 以北의 우리 동포는 무한한 모욕과 각종의 학대를 받아 파멸상태에 빠졌다는 보도를 눈물을 흘리면서 ........ ]

 


민주의원 김준연, 38선문제 등 소군정당국 반성 촉구 방송


게재지명 동아일보
게재일자 1946년 03월 16일
날짜 1946년 03월 13일

 

民主議院 金俊淵은 現下의 最緊急한 38선과 농촌문제에 관하여 13일 오후 7시 15분 中央放送局에서 방송하였는데 그 요지는 다음과 같고, 지면관계로 농촌문제는 割愛하고 38선문제만 揭載하여, 美蘇共同委員會를 앞두고 특히 蘇聯軍當局에 반성을 촉구하였다.

 

“去年 8월 15일 이후 우리 3천만 민중은 37년이란 세월을 고통으로 비참한 死線에서 방황하던 日本의 虐政을 벗어나서 하루바삐 자유독립의 완성을 기하였을 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상상도 아니하던 38도선이 가로 막아 누구나 그 理由와 原因如何를 물론하고 놀라지 아니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 민족이 南北으로 갈리어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생활 전면에 차단을 당하여 왕래의 자유가 없음은 물론 通信의 왕복도 전연 不能한 상태에 있어 벌써 반년을 경과하였으니 이와 같은 우리 民族 相互間의 고통과 비애는 과거 屢千年 역사상에 보지 못하였던 일이 아닙니까.

 

우리는 이러한 고난을 받으면서도 美蘇兩軍이 우리의 自主獨立에 협력하기 위하여 우리 땅에 進駐한 것으로 믿고 그들에게 무한한 감사를 드리며 큰 기대를 가졌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과거 京城에서 열린 美蘇共同委員會는 우리 自主獨立의 過渡政權을 수립하는데 협력하는 전제로 38도선 문제를 해결할 것이라고 하는데 대하여 그 회답의 내용과 경과의 발표가 있기를 날로 기다리던 바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略) 協定된 것도 蘇聯軍司令官의 거부로 성립되지 아니하였으니 蘇聯軍의 心腸은 과연 어디에 있는가. 우리는 그 제반행동에 관하여 38도 以北의 우리 동포는 무한한 모욕과 각종의 학대를 받아 파멸상태에 빠졌다는 보도를 눈물을 흘리면서 믿지 아니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蘇聯軍의 과오인가 소수 民族反逆者의 죄악인가.


 우리는 民衆의 총력을 집결하여 蘇聯軍當局의 반성을 요구하는 동시에 民族反逆者를 배격하여야 하겠습니다. 여러분 우리 다 같이 마음과 힘을 모아 死滅에 빠진 38도 以北의 동포를 구해냅시다.

 

美蘇共同委員會가 또다시 금명중에 회담을 개시하는 모양이니 여기에 대하여서도 우리는 그 경과를 주시하여 우리의 自主獨立完成에 협력하는 것이면 마땅히 滿腔의 성의를 드리고 우리도 심혈을 다하여 목적완성에 奮迅 勇往함은 물론이나 만일 38도선의 철폐를 거부하여 우리 민족의 통일을 저해하거나 소위 信託問題 等을 제의하여 우리 民族의 독립을 거부하는 자 있다면 그야말로 우리 3천만 민족의 사활문제이니 우리가 일심협력하여 끝가지 이것을 반대하지 아니하면 안될 결심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우리는 비통한 마음으로 蘇聯軍當局에 대하여 반성을 요구하는 所爲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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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6.3.

 

 [ ..... 신문은 잇스나 38이남의 소식을 전혀 드를 길이 업는 이북 사람들의 ....... ]

 

   1946.3.18.월요일. 동아일보.

 " 라듸오"로 듯는 이남의 소식


평양에서 발행되는 신문은 잇스나 38이남의 소식을 전혀 드를 길이 업는 이북 사람들의 심정은 오즉 답답할 뿐이다. 그러나 지난번 , 미소회담에서 방송파장이 협정되면서부터 라듸오만은 잘들리어 , 서울중앙방송국으로부터 보내는 뉴스로서 자위한다고 한다.

 

 

 


[ ...... 해설한 기사뿐 .... 지면에는 민중의 여론이 조금도 반영되어 잇지안타 ......   ]

 


국경 아닌 국경『삼팔선』이북답파기【2】

동아일보 1946년 4월 7일자 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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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황해신문

 

역 매점에서 1원을 내고 신문 두 장을 삿다 자유황해신문(自由黃海新聞)의 14, 15 량일부이였는데 두 면의 소형신문이다 김무정 장군이 토지게혁령 실시에 관하야 지방순회차로 해주에 간 것을 머릿기사로 뽑고 정치사회 량면의 구별 없이 모다 토지개혁령(土地改革令)을 해설한 기사뿐이다. 이날 신문만 그러한지 몰으되 지면에는 민중의 여론이 조금도 반영되어 잇지안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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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dongne.donga.com/2013/04/30/d-story%e2%85%a1-%ec%9d%b4%eb%b6%81%eb%8b%b5%ed%8c%8c%ea%b8%b01/

 

 

 

[ ....... 평양의 민심은 ... 불안에 눌리워 질식해 죽겟다는 것 ... 총소리도 .....

  ....... 십오륙세의 소년들을 모아 무□소년단을 조직하야 밤이면 이집저집에 보내여 탐정을 시켜 .........  ]

 


 국경 아닌 국경『삼팔선』이북답파기 (3)


 동아일보 1946년 4월 8일자 2면.

 

평안반 본사특파원 KK생, 제비처럼 남국이 “그립다”, 컴은 거리에 총성이 은은


평양역에 나렷다 평양、여기가 북조선의 수도인가하는 생각이 화살같이 머릿 속을 스치고 지나간다 개찰구를 나서니 붉은 깃발 붉은 포스타 스타린 수상의 초상 토지개혁의 해설 등이 거리마다 부터있을뿐만아니라 소련부인과 소련어린이들까지 길거리에서 만나게 되였다. 기자는 여기가 제2의 적도(赤都)나 아닌가하고 조선의 지도를 펴보고 싶은 충동을 바덧다.


남북이 갈린지 일년도 못되어 평양의 자태는 너무나 엄청나게 소련식으로 변하고 말앗다 검으침침하고 기름끼 하나 돌지안는 평양 쓸쓸한 거리 정포를 벌리고 안저 잇는 상인들의 얼골에는 회색비치 지텃다. 거리에 다니는 사람들의 발거름은 무거웟고 얼굴은 한없이 우울해보였다


거리를 지나다니면 소련군완장과 군모를 파는 조고마한 점포가 눈에 띠인다 장총을 질머진 채 두 소련군이 그 가개 아페서 완장을 골르고 가격을 흥정하고 있다. 새로 설립된 북조선중앙은행(北朝鮮中央銀行) 아플지나 대동교(大同橋)쪽으로 발거름을 옴겻다 여기도 보안서원이 오고가는 시민을 감시하고 있다

 

3월도 중순이 훨신 넘었건만 날세는 그대로 추웟다.『북쪽손님이 오시드니만 날세까지 돌변 햇는 걸』하고 슬쩍 우서버리는 담화가 기자의 귀청을 울렷다 기후까지 소련식이냐 하고 기자는 혼자 우섯다. 강물도 흐렷다 모란봉 을밀대도 바람 속에 맴도는 것 같앗다 이 강을 오르나리든 검은 석탄배 네댓척이 강 건너 사장에 올라안진 채 동민(冬眠)을 게속하고 있다.


저녁을 먹고 나서 영화구경이라도 가보자고 하니 친구가 반색을 하며 말린다。바로 그때였다 아조 가까운 곳에서 총소리가 낫다 방안에 안잣든 사람들의 얼굴에는 긴장한 비처 돌앗다 잠깐 침묵이 게속되였다. 부억에서 설거질하든 친구의 부인도 놀랫는지 한참동안 그릇소리가 나지 안앗다『헛방 같은데.』하고 등무의 입에서 판결이 나린 다음에야 안심들하였다.등무는『이러케 마음을 조리고서야 어디 살 수가 있어야지』하고 허두를 내노코 자기 집도  삼팔이남으로 이사가겠다는 것이였다。


이곳에서는 여섯시 반만 되면 상점문은 불이나케 다다버리고 시민은 일곱시가 되면 거리에 나다니기를 꺼린다고 한다. 친구의 부인은『살아야 사는 것 같어야지요』하고『이웃집 순자네도 며칠 전에 서울로 이사갓다고』기자 보고 들으라는 것보다 자기 남편의 의견을 슬적 떠보는 것이였다. 친구는 비단 자기네뿐 만아니라 적어도 평양사람의 대부분이 떠날 수 있으면 삼팔 이남으로 가겟다는 사람들뿐이라고 들려주었다 부인은『벌서 간 사람은 얼만데요』라고 이 사□울 증명한다.


 평양의 민심은 말할 수 없는 불안을 품고 이대로 있다가는 이 불안에 눌리워 질식해 죽겟다는 것이 그 친구의 말의 전부였다。기자는 이 불안의 원인이 어데있는가를 물었드니『기자자격이 없구만 그래 육감으로 알지 못해 이제 총소리도 들엇겟지』라고 말문을 내노코는  보안 행정이 너머나 탄압적이라는 것을 비롯하야 이것저것 들려주었다. 그 중에는 십오륙세의 소년들을 모아 무□소년단을 조직하야 밤이면 이집저집에 보내여 탐정을 시켜온다고 한다。그 말을 듯고 기자는 온몸에 소름이 쪽 끼첫다。(게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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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언론의 자유를 봉쇄 .... 유구무언이 되고 ........  ]

 

삼팔선 이북답파기 함경도반 ①


동아일보 1946년 4월 14일자 2면.

 

HH본사 특파원, 누대(累代)살든 땅 버리고, 남으로 이동하는 주민군, 부안의 거리에 압살된 언론의 자유


『삼팔선 답파기의 제2대는 함흥을 기점으로 남으로 오는 피난민 속에 한사람이 되어 그들의 눈물나는 호소와 참상을 보며 들으며 함께 눈물지으며 이 답파기를 쓴다』


해방의 가을도 지낫고 진통의 겨울도 가고 해산의 봄도 왓것만 □다운 소식을 무궁화동산에  전하지 못하는 답답한 심정에 못내 서러워하는 기자는 오래간만에 함경선열차에 □을 실코 해방이후 처음 함경남북과 강원 등 3도의 실정을 듯고 보고 이 암행(暗行)의 답파기를 독자에게 전하려는 것이다


만주방면과 함경북도로부터 밀려오는 전재피난민과 인민위원회의 탄압적 행정에 실증을 느낀 백성들의 남부녀대한 이사보따리는 날이 따스하여옴을 따라 성진(城津)을 기점으로 하로  단한번식 운전되는 이 남행열차를 타려고 몃칠식 각지 정거장 대합실에서 굶주려 떨고 잇는 정경은 참으로 눈물겨운 현실이 아닐 수 없다.

 

소련(蘇聯)군이 기게를 또더갓기 때문에 요지음에야 겨우 조업(操業)을 시작하여 일부의 기게를 돌리고 잇다고 전하는 고주파공장을 뒤로하고 성진을 떠난 함흥행 여객열차는 수 천 명의 고단한 천만가지의 시□을 실고 무연탄 연기를 토하며 힌 갈메기 푸른 물결을 히롱하는 동해를 끼고 남으로 남으로 작정된 시간도 없이 천천히 달리는 동안 좌우의 산천을 도라보매 옛 얼골 새롭거늘 이 강산의 주인으로 여러대 조상의 뼈를 뭇고 한식(寒食) 추석(秋夕)에 성묘하든 자손의 정성도 집어치우고 주택과 가재도구도 버리고 잔뼈 굴거진 정든 고향을 도무지 살 수 없다고 하야 떠나는 사람이 늘어감은 이 어이된 일인가?
또한 이들의 안주의 락토는 과연 어대서 구하게 될 것이며 어떠게 건설되어 갈 것인가?

 

만주에서의 전재피난민은 과거 일본제국주의의 식민정책으로 수농(水農)개척에 무던히 힘써온 보람도 없이 만주인에게 재물을 빼앗기고 가족을 일코 쫏겨서 또는 도망처 그래도 고국이 그리워서라고 할가? 초라한 나그네로 3남에 돌아가거니와 이 고장에 뿌리박켜 살든 사람들조차 무수히 삼십팔도선을 넘으려하니 이 백성들의 안탁가운 사정은 무엇이며 사회의 실정은 과연 어떠한 것인가?

 

이 열차에 편승한 이동사찰대(과거 이동경찰)의 눈을 피하여가며 여러 사람의 입을 통하여 그곳 실정을 들어보건대 작년 8월 15일 일본이 황북하고 그달 하순 소련군이 진주한 이래 과거 좌익(左翼)운동에 관게하였던 실적 잇는 사람들이 소련군을 배경으로 인민위원회를 구성하고 보안대(保安隊)를 편성하여 행정 사법、치안의 모든 권한을 잡고 공산당과 표리일체가 되어 소련 그대로의 공산국가체제의 확입을 위하야 그 세포(細胞)단체인 노동조합과 농민조합 공산청년동맹 여성동맹 등 가지가지의 새로운 방게조직으로 대중을 파악하기에 힘썻으나 소련군이 진주하면서부터 시게 만연필『트렁크』현금이 가두에서 약탈당하고 밤 통행금지시간 중에는 주택 상점 사무소에 침입하야 70여 탄을 발사한다고 자랑하는『따발총』으로 위협하며 재물을 강탈한 우에 부녀자를 □욕하는 범행이 속출함에 이르러 일반의 불안과 비난은 날로 증대하고 원성과 분노는 날로 놉파감에도 불구하고 인민의 리익을 옹호하는 대표기관으로 자처하면서도 인민위원회와 보안대는 폭행을 저지할 방책을 마련하기는 고사하고 오히려 그러한 사실을 엄페하고 붉은 군대는 우리조선을 해방시켜준 은인이므로 무한의 감사를 들여야할 것이라고 피해가측을 꾸짓지를 일수로 하고 18세 이상의 청년으로만 구성된 보안대원의 횡포 또한 자심하여 민심의 리반 되는 거리는 천리라만리라 형용할 수 없게 머러저 가고만 잇는 형편이다.


언론의 자유를 봉쇄당한 현재의 실정으론 정당한 의론도 주장도 불평도 불만도 호소도 애원도 투쟁도 반박도 입을 열어 말할 수 없고 귀를 기우려 드를 수 없게 되였으니 이른바 유구무언이 되고 만세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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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dongne.donga.com/2013/04/30/d-story%e2%85%a1-%ec%9d%b4%eb%b6%81%eb%8b%b5%ed%8c%8c%ea%b8%b02-%ed%95%a8%ea%b2%bd%eb%8f%84/

 

 

 

 


  *  [ .... 절대한 언론자유가 있는 것이다 ........

       .... 출판에 대하여 검열같은 것을 하려 하지도 않는다 ....... ]

 

  1945.9.12.  매일신보 .


 하지, 기자회견에서 미군 施政方針을 발표

 


11日 오후 2시 40분 존R.하지중장은 아놀드소장과 헤이워드중좌를 대동하고 시내 각 대표신문기자들과의 회견석상에서 제1성을 발하였는데 (略)사령관과의 회담은 2시간 40분에 亘하였으며 (略) 이날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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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이 진주해 온 후인 현재 조선에는 문자 그대로의 절대한 언론자유가 있는 것이다. 미군은 조선사람의 사상과 의사발표에 간섭도 안하고 방해도 안할 것이며 출판에 대하여 검열같은 것을 하려 하지도 않는다. 언론과 신문의 자유는 여러분들을 위하여서 대중의 論을 제기하고 또한 여론을 소소하게 알리는데 그 직능을 다 해야 할 것이다.


이와같이 미군은 언론자유에 대하여 취재를 방해하고 검열을 하려하지는 않으나 그것의 정당한 의미의 치안을 방해하는 것이라면 이런 경우는 별도로 강구하려 한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필요까지는 없으리라고 믿는다. 나는 조선에 온 뒤로 조선의 역사와 조선의 신문사를 통해서 조선이 어떠한 지경에 처해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그런만큼 나는 바라노니 부디 여러분은 이 기회를 조선신문사상의 일대 혁신전환단계로 삼아 주기를 바란다.


미국의 제 신문과 같이 신문의 역할을 다 하는데 있어서는 대중을 지도하고 여론을 일으키는 지대한 역할을 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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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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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양방송 이외의 방송을 청취하는데 대한 처벌은 재산몰수 급 6개월 징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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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8.1.1.

 

[ ...... 우리에게 一條의 서광이 있으니 이는 UN 위원단의 내한이다 ............    ]

 

제목 이승만, 김구 등 정계요인 연두사 발표


게재지명 조선일보, 동아일보
게재일자 1948년 01월 01일
날짜 1948년 01월 0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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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九


“우리에게 一條의 서광이 있으니 이는 UN 위원단의 내한이다. 우리는 잠시라도 모든 비애를 잊고 새해에 새손님을 기쁘게 맞이하는 동시 최선을 다하여 그들과 공동 노력할 것이며 수시로 우리의 정당한 주장을 발표하므로서 기어히 우리의 염원을 관철하도록 하자. 따라서 우리가 기대하는 자주독립의 통일정부 수립을 위한 總選擧가 실시된다면 우리는 귀중한 一票를 유효하게 던져야 한다. 우리는 마땅히 新年劈頭에 있어서 과오를 청산하고 먼저 우리 민족이 단결하여 정치·경제·교육의 균등사회를 건설하기 위하여 노력하여야 할 것이며 단결된 역량으로써 UN 위원단도 맞이하고 그들의 도움도 청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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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中將


“1948년 조선국민의 자유의사 발표에 의하여 민주주의적 통일국가 재건을 볼 수 있는 해가 되기를 본관은 진심으로 염원합니다. 위대한 국가를 유지하는데 필수조건인 전국민의 완전한 통일 및 경제와 교육의 발전이 있기를 기원하는 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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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蘇側의 거부가 있었다면 이는 최대의 불행이다 .........    ]

 

소련의 (UN委員團) 북조선 입경거부에 대한 각계 견해
 
 
게재지명 경향신문
 
게재일자 1948년 01월 25일
 
 
날짜 1948년 01월 25일
 
 
▷金九 談:우리 3천만의 염원은 南北統一 총선거이다. 그러나 蘇側의 거부가 있었다면 이는 최대의 불행이다. 차후문제에 대해서는 지금 言及하기를 삼가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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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의 1천만의 동포가 우리와 민국건설에 같이 진행하기를 원하였으나 유엔대표단을 소련군이 막아 못하게 된 것이니 우리는 장차 소련 사람들에게 정당한 조치를 요구할 것이요….”(건국 기념식 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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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북에서 일체 보도도 없고 언론자유가 보장되지 못한 관계상 자세한 내용을 모르고 ........  ]

 

월남한 북로당원 유재민, 이북실정 폭로
 
 

게재지명 동아일보
 
게재일자 1948년 04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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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問) 귀하가 월남한 이유는 무엇인가


(答) 나는 북로당원의 일원이며 북조선인민위원회의 일인이다. 그러나 그들의 목표는 조선을 적화하려는 소련의 의도를 그대로 계승하여 인민의 생활문제를 도외시하고 있어 인민들은 의식주 안정을 찾기 위하여 남하하는 것이다.

나도 유엔조위의 來朝에 많은 기대를 가지고 북조선의 유엔위원단에 대한 북협조에 불만을 품고 그리운 고향을 뒤로 남하하였다.

 

(問) 이북동포들은 남북협상을 어떻게 보는가


(答) 이북동포들은 남북협상에 하등 기대를 가지지 않고 있는데 도리어 남조선 동포들이 기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기괴한 일이다. 하여간 이북동포들은 여러번이나 북조선인민위원회의 모략 선전에 속아왔기 때문에 이번 남북협상도 기대하지 않고 솔직히 말하면 총선거의 반대 공작이라는 것은 이북동포들도 잘 알고 있다.

 


(問) 金九씨는 현재까지 공산주의자들과 적대시하여 왔으며 북조선인민위원회에서는 金九타도라는 구호를 부르짖어왔던 것인데 최근의 金九씨 태도를 이북동포는 어떻게 보는가


(答) 남조선동포들은 북쪽 동포를 전부 공산주의자들이라고 보는 듯하나 이북동포의 90%가 李박사 노선을 지지하는 우익이고 나머지 10%가 공산주의자들이다. 그리하여 이 90퍼센트에 달하는 우익적 동포들은 李承晩·金九 양씨에 많은 기대를 가지고 숭배하여 왔다.

金九타도라는 구호에 우리 우익에서는 반감을 가지고 왔던 것인데 이제와서 공산주의자들과 손을 잡고 전조선에 공산주의정책을 감행하려는 金日成파의 책동에 추종한다면 3천만을 지도할 영도자의 자격을 상실한 것이라고 비난하고 있다.

 


(問) 이북동포들은 5월 10일 실시될 총선거를 어떻게 보는가

(答) 이에 대하여서는 이북에서 일체 보도도 없고 언론자유가 보장되지 못한 관계상 자세한 내용을 모르고 있으나 유엔위원단 입경을 거절한 소련군에 대해서 반감을 가지고 있으며 하루바삐 국제무대에서의 우리 독립국가가 실현될 방법을 갈망하느니만치 이번 선거에 많은 기대를 가지고 있는 것만은 사실이다.

 

 


      1947.10.


[ ..... 평양방송 이외의 방송을 청취하는데 대한 처벌은 재산몰수 급 6개월 징역이다 ........  ]

 

조선일보, 동아일보 1947년 10월 26일   


駐서울UP특파원 스탠리 리취, 북조선의 무력행동 계획 발표

 

先月 남조선으로 도망하여 온 한 前北朝鮮관리는 소련에 의하여 훈련 장비된 북조선 군대는 미소 양 점령군의 철퇴와 동시에 조선을 원조코자 행동을 일으키고 조선을 제18소련공화국으로 할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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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 군대는 일본병기로 무장된 것이며 목하 소련은 이들을 위하여 다수의 輕兵器를 齎來중이다. 과거에 있어 소련인은 직접 북조선인을 훈련하고 있는데 그들은 조선은 결국은 제18소련공화국이 될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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余는 ‘미국의 소리’ 방송 외의 조선에 대한 방송을 청취한 까닭으로 남조선 상태가 양호함을 알았다. 이 미국방송은 余가 요직에 있었으므로 청취할 수 있었다. 평양방송 이외의 방송을 청취하는데 대한 처벌은 재산몰수 급 6개월 징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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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휴전반대 국민총궐기대회 개최   


동아일보 1951년 12월 13일   

 

통일 없는 휴전반대 국민총궐기대회는 12일 상오 10시부터 충무로 광장에서 10시부터 愛協주최로 성대히 거행되었다. 먼저 金一休씨의 개회사가 있은 다음 유엔총회(毛允淑 여사), 릿지웨이 사령관(崔仁順여사), 트루만 대통령(김철수씨)에 보내는 메시지를 낭독하고 대회 결의문을 金賢大씨가 낭독하여 통과하였다. 이어 尹致暎, 白南薰 양씨로부터 휴전회담은 한국분할을 재판시키는 것이므로 전국민이 거족적으로 반대하자는 요지의 궐기사가 있은 다음 대회를 끝마쳤는데, 동 대회에서 결의한 결의문은 다음과 같다.


1. 우리는 한국의 통일과 평화 없는 유엔군의 철수를 반대한다. 중공군을 우리 강토에서 몰아내고 북한괴뢰군의 무장을 완전히 해제함으로써 한국의 평화가 수립될 것이며 세계의 평화도 보장할 수 있다는 것을 강력히 주장한다.


2. 우리는 38선의 재판인 휴전선을 용인할 수 없다. 백두聖峰에 태극기가 휘날릴 때까지 침략자를 격퇴하고야 말 것을 다시금 맹서한다.


3. 우리는 국토분할과 재침략의 위험성 있는 모든 결정과 우리의 주권과 통일을 침해하는 어떠한 결정에도 결사반대한다.


4. 우리는 약탈과 학살의 대상으로 되어 있는 재이북 700만 동포를 구출하기 위하여 조속한 대책이 있기를 전 자유세계에 호소한다.


5. 우리는 자유통일 신민주주의적 한국을 건설한다는 유엔의 결의를 하루속히 관철하도록 촉진한다.

 

 


      1953.4.26.  북진통일 국민총궐기대회

 

[ ..... 북진통일을 절규하는 시민들의 힘찬 행렬이 거리를 .......
 
 ...... 전시민이 한뭉치가 되어 국민들의 결의를 피력한 것은 저 신탁통치반대대회 이후 처음 .......


 ...... 백만 시민이 참집 ........    ]

 


1953.4.27.  경향신문

 

장! 휴전반대의 의기충천

휴전결사반대 서울시민궐기대회

 

공산괴뢰들의 6.25남침으로 조국의 강토가 전화속에 휩쓸려  수백만 인민이 죽고 상하였으며 수천만동포가 재산을 잃은 채 거리에서 방황한지 이미 4년이  되었으나 한가지 국토통일 조국독립이라는 희망을 가졌기 때문에 참고 견디며 싸워왔는데 다시 공산침략군과 타협함으로써 휴전회담이라는 일방적인 결정으로  조국은 다시 두동강에 짤리울 위기에 놓이게 되었다. 휴전을 반대하고 통일 없는 타협을 규탄하는 국민적인 감정은 임시수도 부산을 비롯한 전국방방곡곡에서 폭발되고 있는데 서울에서도 각정당사회단체 주도 아래 26일 오전 10시 반부터 중앙청광장에서 북진통일국민총궐기대회가 열려 휴전반대의 기치를 높이 들었다.

 

용소슴 치는 북진의 맥박

침략자를 축출 북진통일을 결의

 

이날 일요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꽃철을 맞아 시민을 불으던 창경원 덕수궁도 문을 굳게 닫고 시내 상가는 자진 철시를 단행 일체의 가무음곡이 정지된 가운데 북진통일을 절규하는 시민들의 힘찬 행렬이 거리를 메웠는데 이같이 전시민이 한뭉치가 되어 국민들의 결의를 피력한 것은 저 신탁통치반대대회 이후 처음 보는 대회이었다. 백만 시민이 참집한 가운데 대회는 김(김일)씨의 사회로 장중한 주악리에 개막되어 국민의례가 끝난 다음 강(강창희)씨의 사회사에 이어 조(조광섭)씨가 국제정세보고를 하였고 유(유??)씨가 별항과 같은 결의문을 낭독하여 팽배하게 일어나는 북진통일의 국민적 기개를 다시 한번 고창하였다.


이어 윤(윤재욱)씨와 남(남송학)씨가 열렬한 궐기사를 하여 대회회중을 격려하자 회중은 우뢰같은 박수와 환호로 이에 호응하였다.

 

이어 이대통령과 미국대통령 아이젠하워 장군 그리고 유엔총회의장 피어슨씨 및 크라-크 유엔군 총사령관에게 보내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멧세-지 낭독이 있었고 '속지 말자 침략자 크레므린 평화공세를!'  '통일 아니면 죽음을 달라!'  '내몰자 공산오랑캐 압록강 넘어로!' 등 열렬한 구호를 부르짖은 다음 국회 국방위원장 임(임흥순)의원 선창으로 대한민국 만세 북진통일 만세로 대회는 일단 끝을 막고 참집하였던 회중은 '휴전반대'  '북진통일'  프라카-드를 높이 들고 일대 데모로 들어 갔다.

 


           선언서

 

8년전 일본제국의 쇠사슬에서 해방되자 3천만 민족의 의사를 무시하고 우리 강토는 양단되어 드디어 역사상 일찌기 보지 못한 민족의 수란과 희유의 참화를 당하고 있으며 1951년 소련대표 마리크의 휴전회담 제안은 침략자로 하여금 재침략의 기회를 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자유세계의 고귀한 젊은 피들을 헛되게 하고 있다. 최근 적색제국주의자들은 세계정복의 독아를 닦으면서 가장한 평화공세를 전개하여 국제정국을 현혹케 하고  있으며 이에 수반하여 자유와 평화를 상징하는 유엔 총회를 비롯하여 우방제국지도자가 또 다시 혼미에 빠지게 됨은 심히 유감된 사실이다. 오늘 소위 판문점회담이 재개되는 이 마당에 있어 우리는 언제 까지나 외세의 농락에 유린될 수 없고 외세의 과오로 기인한 비극적 대상이 될 수 없다. 민족과 국가의 운명 정히 중대 간두에 선 이 순간 우리는 오직 우리의 힘으로 북진통일하는데 총궐기할 것을 신명 앞에 엄숙히 맹세할 뿐이다. 우리 천손 만대의 경복과 조국의 영예와 자유를 위하여 한사코 북진통일을 이룩할 것이며 우리 대한민국주권을 무시하는 여하한 국제협상도 절대반대하며 UN제국은 우리 민족의 절호에 귀를 기우려 정의를 살리기를 정중히 선언한다.

 

4286년 4월 26일

북진통일 서울시민궐기대회

 

    구호


1 속지말자 침략자 크레므린 평화공세를

2 내몰자 공산오랑캐 압록강 넘어로

3 청년들아 북으로 총을 잡고 진격하자

4 멸공으로 통일하자 3천리강산

5 통일 아니면 죽음을 다오

 

 

 

         1953.4.30


[ ....... 궐기대회 참가 총인원은  500여만 명 .......

   ...... 통일 없는 휴전을 반대한다는 결의문은 약 1만 통 .......    ]

 

경찰, 휴전반대 궐기대회 참가 연인원 통계 발표   

평화신문 1953년 5월 4일   


[부산] 통일 없는 휴전은 우리겨레에 주검을 갖다 주는 것이라고 절규하여 방금 전국적으로 북진 통일궐기대회가 개회되고 있거니와 30일 현재 치안국 집계에 의하면 동 궐기대회 참가 총인원은 500여만 명으로 각사회 단체 및 각지구의 대회에서의 통일 없는 휴전을 반대한다는 결의문은 약 1만 통에 달하고 있다.

 

 


1953.5.29. 경향신문


북진통일에 접대부들 궐기

 

긴급 국무회의로 북진의 소리도 드높은 27일 파고다공원에서는 종로구 요식업자 접대부 들의 통일 없는 휴전반대 대회가 벌어졌다.


통일이 아니면 죽엄을 달라! 통일 없는 휴전은 6.25의 재판이다! 고 외치는 구호도 씩씩하게 대회끝에 시가행진에 들어가 이마에 수건을 힘있게 싸맨 1천여 접대부들


종로로부터 세종로등 시내 중심가로를 일주하였는데 이날만은 이들도 이나라 여성의  ?된 가치를 시민들 앞에 남김없이 발휘하였다.(사진은 시가행진하는 접대부들)

 

 


       1953.6.9.  진명여중고

 

[ ...... 학생들이 눈물로 아우성치면서 생사를 가리지 않고 떠밀고 들어가려고 .......

   ..... 울분이 터지는 데는 어찌할 도리가 없었습니다. ........     ]

 

휴전반대 시위중 미군의 진압으로 여중고생 다수 부상   


서울신문 1953년 6월 11일   

 

9일 擧市的인 휴전반대 데모에 참가한 진명여중고 학생 25명이 해산을 명령하는 미군헌병들에 의해서 부상을 당한 불상사가 발생하였다.


즉 이날 시위에 참가한 시내 각 중고등학교 학생들은 정오경 미 제8군사령부와 미 제5공군사령부 앞에 쇄도하여 ‘통일 없는 휴전반대’와 ‘반공포로의 즉시 석방’등 구호를 드높이 부르면서 열렬한 시위를 전개하였는데 때마침 미 제5공군사령부 후문을 경비 중이던 미군헌병이 쇄도하는 진명여중고 학생들을 제지하려고 이들을 구타한 나머지 동 여중고생 25명을 부상시켰다.


부상당한 학생들은 대부분이 타박상을 입었는데 팔목에 열상 입은 자도 없지 않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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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 정보에 접한 시경 사찰과에서는 10일 상오 전기 학교 현장에 출동하여 이에 대한 진상을 조사한바 있었다.


그리고 이날 학생들을 인솔하였던 담임선생과 동교 학생 및 학부형측의 말을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책임 인솔선생 李根永씨:불상사가 발생할까 해서 혹시나 학생들의 데모를 제지해 봤으나 500명에 가까운 학생들이 눈물로 아우성치면서 생사를 가리지 않고 떠밀고 들어가려고 하는데는 어찌할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교장 이세□씨:이날 내가 있었더라면 그렇게까지는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휴전을 반대하는 마음에서 그 같이 시위하는 학생들의 행동을 제지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학생일솔 책임 洪妊順□:울분이 터지는 데는 어찌할 도리가 없었습니다.


△학부형 □□창씨:내 딸이 미군에게 맞아 죽었다 하더라도 민족의 굳은 의사를 표시해 주었으니 만족하게 생각한다. 미군들이 어린 소녀들의 눈물로 호소하는 애끓는 정신을 이해 못하고 폭행을 가하였음은 실로 유감이다. 이래서 과연 자유세계의 진실한 민주평화가 확립되겠는가. 미군 당국자들의 신중한 검토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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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6.12. 동아일보


우리의 갈 길은 오직 통일완수


정부안만을 지지
철시코  60만 시민궐기

 

굴욕적인 휴전조인을 한사 반대하고 북진통일을 희구하는 3천만 겨레의 절규는 바야흐로 최고절정에 달하고 있다. 임시수도 부산에서는 어제 11일 국제시장을 비롯하여 신창동 대신동 등 전시내의 시장이 철시하는 한편 일반 상가점포 및 다방 등의 문은 굳게 닫혀지고 시민대중의 발인 시내 '버스'는 그 운행을 총정지하였다.


한편 이와 아울러 시내 충무로 광장에서는 상오 11시 40분부터 부산시 애국단체연합회 주최의 '정부대안 절대지지 국민총궐기대회'가 개최되었는 데 이날 대회장에는 각동민 상인조합 직장근로자 등 자발적으로 밀려든 수만여명이 참집하였다.


그리하여 동대회는 한청 이달우씨의 사회로 시작되어 양우정 김우정 양씨의 개회사 및 궐기사가 있은 다음 이대통령을 비롯하여 미대통령 유엔 사무총장 및 유엔군총사령관에게 보내는 '멧세-지'를 채택하고 이어 다음과 같은 결의문낭독이 있은 다음 만세3창으로서 하오 영시 15분 대회를 마치고 이어 보수동 파출소 미국대사관 앞을 통하여 시가행진에 드러갔다.


이날 시위에 있어 팔과 다리를 국가와 민족에 바친 수천 상이군인들은 역시 싸우다 쓰러진 앞 못보는 상이전우를 부축하여 가면서 '북진통일을 위하여 나머지 목숨을 바치겠다'는 피눈물의 구호와 '푸란카-드'를 내흔들고 시민의 앞장에 나섰다. 

 

 

[ ..... 남녀학도 10여 만명 ......

  ..... 통일 없는 휴전반대 대회 .... 데모행진 ......

  ..... 이들의 부르짖음은 온 시내를 진동하였다. .......   ]

 

1953.6.12.  동아일보

 

10만 학생도 일대시위

상이병은 도청에서 대좌

 

또한 이날 전시내의 67개교 고등학교 학생과 10여 대학교의 남녀학도 10여 만명은 하오 1시 대신동을 비롯하여 영도 초량 충무로 서면 동래 등 6개 지구로 나누어 각기 통일 없는 휴전반대 대회를 개최하고 동 1시 40분경 부터는 '통일 아니면 죽음을 달라'는 등등의 구호를 절규하면서 데모행진을 감행하였다. 전기 10만명 이상의 데모 행진은 민족과 국가를 사랑하는 젊은이의 순정한 기개를 여지없이 발휘하여 남음이 있었고 이들의 부르짖음은 온 시내를 진동하였다.


한편 수천명의 상이군인들은 행진끝에 임시 중앙청내에 몰려들어 정부 및 입법부의 책임자를 만나 재기봉공의 각오를 표명하는 멧세-지 전달과 명확한 정부의 태도의 천명을 듣고저 하오 2시반 현재까지 광장에 주저 앉고 있다.

 

 


       1953.6.11.  홍성군  이재명

 

[ ..... '통일 없는 휴전은 죽음이다' .....

   ..... 미제 수류탄에 자폭자살 .......    ]

 

1953.6.20. 경향신문


휴전반대의 불꽃

홍성 이씨는 통분 끝에 자결

 

우리의 주권을 무시한 휴전은 결사반대한다고 부르짖는 민족의 함성은 방방곡곡에서 들려오고 있다.


<이리> 지난 13일 이리 시민들은 역전광장에 시민총궐기 대회를 개최한 후 시가행진을 성대히 거행하는 한편 야간에 횃불 행진도 하였다.


(안중) 당지 평태군내 현덕 포승 청북의 3개면에서는 지난 11일 휴전결사반대 북진통일 총궐기대회를 군청광장에서 성대히 거행하였다.


(남양) 남양면민들은 지난 13일 남양국민학교 교정에 모여 휴전문제 한국제안관철 총궐기대회를성대히 거행하고 시위 행진을 행하였다.


(춘천) 춘천시 춘성군민들은 지난 13일 춘천여자고등학교 운동장에 모여 휴전문제 한국제안관철 총궐기대회를 성대히 거행하고 이대통령을 비롯한 각요로 보내는 멧세-지를 결의하였다.


(예산) 당지 시민들은 지난 13일 덕산에 주둔한 유엔군 통신부대 근방에 모여 휴전반대 북진통일을 부르짖으며 시위행진을 하였다.


(홍성) 당지군내 11개면에서는 지난 11일 북진통일 총궐기대회를 성대히 거행하였는데  통일없는 휴전과 포로강제송환에 울분한 홍성군 장곡면(홍성군 장곡면 산성리53)에 거주하는 이(이재명=27)씨는 궐기대회 선두에서 '통일 없는 휴전은 죽음이다'라고 통탄한 나머지 집에 돌아와 미제 수류탄에 자폭자살하여 통일을 애원하는 선구자가 되었다. 그런데 전기 이씨는 청양 경찰서에 근무 당시 보?한 미제 수류탄으로 자폭한 것이다.

 

 

 

         1953.6.18.

 

  [ ...... 국민의 절대적인 호응에 힘입은 이승만 대통령은 6월 18일 반공 포로 2만 7000명을 석방 ........

    ...... 미국은 7월 12일 한미상호방위조약의 체결과 경제원조 등 5개 항을 보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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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3월 하순 그 동안 정체되었던 휴전회담이 재개되어 협상이 순조롭게 진행되어 갔으며, 이에 비례하여 휴전반대국민대회 또한 열기를 더해 갔다.


이러한 국민의 절대적인 호응에 힘입은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은 6월 18일 반공 포로 2만 7000명을 석방하기에 이르렀다. 이때서야 비로소 한국 국민의 동의 없이는 휴전의 실효성을 거둘 수 없음을 알게 된 미국은 7월 12일 한미상호방위조약의 체결과 경제원조 등 5개 항을 보장했으며, 한국 정부는 유엔군측의 휴전협상 조건에 동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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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3.6.18.


   반공포로 석방

 

   발생원인


  〈휴전회담〉이 진행 중이던 1953년 6월 18일 이승만 대통령이 원용덕 헌병 총사령관에게 북한으로 송환을 거부하는 반공포로를 석방하도록 지시함으로써 일어난 사건이다.


한국전쟁을 종결하기 위한 휴전협상에서 가장 논란이 되었던 의제의 하나는 포로송환 문제였다. 군사분계선에 관한 협상은 「휴정협정」 조인시 접촉선으로 하기로 일찍 합의에 도달했다. 그러나 1951년 12월 11일부터 시작된 포로 송환에 관한 협상은 1953년 6월 8일에 가서야 비로소 합의에 도달했다.


이 과정에서 논란이 되었던 것은 포로 송환원칙을 두고 유엔군측과 공산측이 첨예하게 대립했기 때문이다. 유엔군측은 포로가 돌아갈 국가를 스스로 선택할 수 있도록 하자는 ‘자발적 송환원칙’을 주장했다. 이 원칙에 따르면 인민군과 중공군 포로들 중 북한이나 중국으로 돌아가기를 원치 않을 경우 자신들이 원하는 곳으로 갈 수 있었다. 이와 반대로 공산측은 포로들의 의사와 상관없이 본국으로 반드시 돌려보내야 한다는 ‘강제적 송환원칙’을 내세웠다.


이러한 원칙의 대립 때문에 장기화되던 포로송환 문제는 귀한을 거부하는 포로는 중립국 송환위원회의 심사를 거쳐 송환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이렇게 될 경우 상당수의 반공포로들이 자유의 품에 안기지 못할 것을 우려하여 이승만대통령은 미국과 유엔참전국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반공포로의 일방적 석방을 결정했다.

 

내용

 

  휴전협상이 진행되고 있었을 때 남한에서는 「휴전협정」에 반대하는 운동이 격렬하게 일어났다. 이승만대통령은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휴전협정」이 체결되면 한반도에 또 다시 전쟁이 일어날 것을 매우 우려했다. 미국은 「휴전협정」이 체결되고 나면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을 위한 회담이 곧 바로 개시될 것이라고 약속하고 이승만대통령을 설득했다. 사실 미국은 「휴전협정」 체결 이전에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할 경우 공산측이 휴전협상을 중단할지 모른다는 우려를 갖고 있었다.


이승만대통령의 반공포로 석방은 반공포로들에게 자유를 되찾게 해주려는 목적 뿐만 아니라 방위조약과 관련하여 미국을 외교적으로 압박하려는 목적도 갖고 있었다. 1953년 6월 18일 자정을 전후하여 유엔군이 관리하고 있던 부산, 마산, 대구, 영천, 논산, 광주, 부평 등의 반공포로 수용소에서 2만7천여명의 포로들을 석방시켰다. 부평수용소에서는 400명이 탈출하면서 30명이 사망했다. 6월 21일까지 계속된 반공포로들의 탈출과정에서 모두 61명의 포로가 희생되었고 100여명이 부상을 입었다.


  휴전협상이 마무리 단계에 접어든 상태에서 일어난 반공포로 석방 사건은 미국과 유엔 참전국들을 경악시켰다. 공산측은 탈출한 반공포로들을 전원 재수용할 것을 요구하면서 「휴전협정」에 참여하지 않았다. 이러한 유엔군측과 공산측의 반응은 반공포로 석방 이전에도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승만대통령은 휴전협상이 한국 정부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깊은 불만을 갖고 있었다. 반공포로 석방을 통해서 이승만대통령은 한국 정부의 동의 없이는 휴전은 현실적 의미를 가질 수 없다는 사실을 유엔군측과 공산측 모두에게 분명히 하고 휴전협상 과정 및 체결 이후에도 한국 정부의 입지를 강화하려고 했다.


미국 내에서도 반공포로 석방을 지지하는 여론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소련군 포로들을 본국으로 돌려보냈을 때 소련 정부는 이들 중 많은 사람들을 사상이 오염되었을지 모른다는 이유를 들어 처형시켰다. 이러한 역사적 경험 때문에 미국은 휴전협상에서 ‘강제적 송환원칙’에 반대했던 것이다. 반공포로 석방은 그들을 자유의 품으로 데려오기 위해 유엔 참전국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취해진 조치로서 이승만대통령의 가장 훌륭한 외교 업적의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http://contents.archives.go.kr/next/content/listSubjectDescription.do?id=002717

 

 

 

      1953.6.19.


[ ..... 중학생 1만여명은 ......

  ..... '통일 없는 휴전반대와  애국포로석방 만세' ......
  ..... 열광적인 시위를 ........    ]
 


1953.6.21.  동아일보

 

반공포로석방 지지

서울서 수만 남녀중학생 시위

 

[ 서울분실발 ] 19일도 반공포로의 석방을 지지하는 일대 시위행렬이 수만명의 서울시민과 학생들에 의하여 전개되었다.


이날 상오 9시 서대문 일대 중학생 1만여명은 동지구 배재중학에서 시위를 시작하여 시청앞을 비롯한 시내 중심지 일대에 '통일 없는 휴전반대와 애국포로석방 만세' 등의 프라카-드를 높이 들고 열광적인 시위를 전개하였다.


한편 성신 숙명 수도 창덕 계성 동성 보성 등 7개 남녀중학생들이 궐기하여 애국포로석방지지의 구호를 절규하면서 5시간에 걸쳐 시내일대에 열렬한 시위를 전개하였다.

 

 


1953.7.8.  경향신문


비장한 우중시위

6일 2만여 학생, 시민들 단행

 

전국적으로 홍수사태를 일으키고 있는 폭우 속에도 불구하고 6일 2만5천여 명의 서울 시민 학생들은  시내 수개처에서 봉기하여  통일 없는 휴전반대 데모의 비장한 행진을 전개하였다.


이날 상오 9시부터 성북구민 8천7백명 마포구민 1만명과 용산구민 3천명  성동 10개동회 5천5백여명이 궐기하여 비장한 우중시위를  단행하였다.


한편 시내 경서 선린 용산 상명 계성 보성 동성 성동 덕수상업 한영 수도여중  등 12개교 남녀학생들도 비바다로 화한 장안 거리에 북진통일을 절규하는 시위를 단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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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2.8. 정,부통령선거

 

[  ....... 유효표 74.6% ... 압도적 지지로 쉽게 대통령에 재선 .......


    ...... 민국당은 ... 정치자금의 낭비에 불과하다고 생각하여 아예 후보를 내지 않았고 ......

    ...... 조봉암 ... 이시영이 무소속으로 .... 10% 내외 ........     ]

 


        1954.5.  3대 민의원선거


[ ...... 자유당이 재석 203석 중 과반수가 넘는 114석 ........

   ..... 민국당은 .... 불과 15명만 당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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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년 4.5월에 실시된 지방의회선거는 정당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약한 기초의회(시,읍,면의회)의 경우 17,559석 중 무소속이 42.5%인 7,469석을 차지하여 자유당의 4,444석이나 야당세력인 대한청년단 2,843석, 국민회 2,621석 보다 다수였다. 그러나 광역의회(특별시,도의회)의 경우 선거 직전에 족청의 이범석이 내무장관에 임명됨으로써 전국적인 조직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관료, 경찰의 지원까지 받았던 자유당이 306석 중 147석을 차지하여 무소속 85석이나 한청 34석, 국민회 32석 보다 월등히 많은 당선자를 냈다. 기초든 광역이든 정당조직으로는 자유당세력이 지방의회를 거의 장악하게 되었고 그렇게 구성된 지방의회는 지방주민을 동원하여 직선개헌에 앞장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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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경찰과 계엄군을 동원한 가택수색이 시작되고 심지어 구속중인 의원들도 보석출감하여 국회에 호송되었다. 이리하여 7월 4일 경찰과 청년단에 의해 포위된 의사당에서 기립투표 끝에 마침내 찬성 163, 반대 0, 기권 3으로 발췌개헌안이 통과 되었다.

 

직선제 개헌을 위해 이와 같은 무리수를 동원하였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은 52년 8월 5일의 정,부통령선거에서 유효표 74.6%에 해당되는 5,238,769만 표를 얻어 압도적 지지로 쉽게 대통령에 재선되었다. 경찰,관료,그리고 자유당 조직이 총동원된 선거였기도 했지만 전쟁 중의 국민들로서는 이승만 외에 마땅한 대안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민국당은 이승만에 대항하여 후보를 내세운다는 것은 정치자금의 낭비에 불과하다고 생각하여 아예 후보를 내지 않았고 초대 농림장관을 지낸 조봉암과 초대 부통령이었던 이시영이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각각 797,504표,764,715표를 얻어 10% 내외의 득표율을 보였다. 한편 부통령에는 자유당내 족청계의 지지로 후보에 나섰던 이범석을 제치고 이승만이 지지한 무소속의 함태영이 유효표의 41.3%인 2,943,813표를 얻어 당선되었다.

 

원래 발췌개헌안이 통과되자 족청계가 장악하고 있었던 자유당은 52년 7월 전당 대회를 개최하고 정,부통령후보에 이승만,이범석을 각각 공천하였다. 그러나 개헌성공 후 자신의 권위에 도전할 정도로 강력했던 이범석과 족청계를 숙청함으로써 자유당을 확실한 친정체제로 전환시키고 싶었던 이승만은 전당대회의 결정을 무시하고 부통령에 무소속의 함태영을 지지하고 정,부당수제를 총재제로 바꿀 것을 요구하여 잠재적 경쟁자인 부당수 이범석을 제거하려 하였다. 이에 이범석과 경쟁관계에 있던 장택상총리는 전국의 지방행정조직 및 경찰조직을 동원하여 함태영을 당선시켰는데 이것은 족청의 조직력이라 하더라도 경찰,관료의 뒷받침 없이는 선거를 치를 수 없는 당시 정치의 한계를 잘 보여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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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정치파동과 발췌개헌 등의 무리수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은 2대 직선대통령 선거와 그 뒤를 이은 휴전반대운동 및 반공포로 석방 등에서 국민들의 동원이나 지지를 끌어 낼 수 있었다. 그것은 선거사상 처음으로 정당공천 후보제를 실시했던 1954년 5월 20일 3대 민의원선거에서 자유당이 압승을 거둠으로써 다시 한번 증명되었다. 물론 관료와 경찰의 선거개입은 여전히 중요한 변수였으나 이승만의 권위에 도전했던 이범석과 족청계를 숙청하고 이기붕을 중심으로 확실한 이승만의 친정체제를 확립한 자유당이 재석 203석 중 과반수가 넘는 114석을 차지하였다.

 

반면 민국당은 개헌파동 후 현저한 세력 약화 속에서 자유당의 족칭계 제거기를 이용하여 1953년 11월 혁신강화 전국대의원대회를 개최하고 종래의 집단지도체제를 신익희를 중심으로 한 단일지도체제로 개편하는 한편 소장파를 책임부서에 등용하는 등 당세 만회에 노력하였으나 3대 총선에서 불과 15명만 당선됨으로써 원내교섭단체도 구성치 못하게 되었다. 또한 1,2대 국회선거에서 압도적 다수가 당선되었던 무소속 제도의 변화와 자유당의 압승에 따라 67명의 당선자를 내는데 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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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3.7.27.  휴전협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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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이 강력한 통치력을 행사하는 것은 2대 국회 후기에 들어서다. 그러니까 1953년 휴전 협정을 맺을 무렵 거세게 일어나는 북진 통일 운동 때부터 이승만의 의회 장악력이 점점 커지고 1954년 5.20선거에 의해 그야말로 이제는 자유당을 완벽하게 좌지우지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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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에 감금된 의원들, 화장실 가려다 뺨 맞은 총리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98> 조봉암과 진보당, 여섯 번째 마당

 김덕련 기자  2015.05.16

 

 

 

"이승만, 전쟁중에도 언론 검열, 간섭 안해"
 
 鄭晉錫 한국외대 교수, "그는 끝까지 언론자유의 신념을 지켰다" 

 

 뉴데일리   
 

 “이승만, 끝까지 자유민주언론 신념 지켰다”
 鄭晉錫 한국외대 교수 “韓末엔 국제잠각 뛰어난 기자로 활약”
 6.25동란 등 국가 위기에서도 검열이나 논조 간섭 전혀 안해


 온종림 기자
 

 
 
 “이승만 建國대통령은 끝까지 언론은 자유민주주의의 근간(根幹)이라는 신념을 고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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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교수는 6.25 전쟁 기간 기사 검열을 실시한다는 공고가 잠시 잇었지만 검열기구를 두거나 제도적으로 운영하지 않았다고 밝히고 “국가가 어렵고 혼란할 때 다양한 주장이 난무하고 야당지가 여론을 주도하는 형국에서도 이 대통령은 신문의 논조에 간여하지 않았다”고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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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chogabje.com/board/view.asp?cpage=0&C_IDX=30016&C_CC=A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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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욱이 전쟁의 와중에서도 선거가 중단된 일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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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집권 12년은 국내외적으로 혹독한 시련의 시기로서, 자유주의 정책을 제대로 펴기 어려웠다.

그러나 이승만은 6·25전쟁 중에도 언론에 대한 검열·통제를 하지 않았고, 지방선거를 실시하는 등 자유주의 원칙을 지켰다. 국회를 해산하거나 헌법을 정지시키지도 않았던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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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박사 재임시 한국 신문들의 지면에는 반정부적인 기사들로 가득차  .......  ]

 

이승만의 대한민국 만들기

왜 한국인은 자기나라 위대한 지도자를 모를까

 

 2010-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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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박사는 과연 독재자였는가.


이 박사 재임시 한국 신문들의 지면에는 반정부적인 기사들로 가득차 있다. 비판자들은 이런 것을 근거로 이 박사는 재임시 평판이 좋지 않았다고 지적하지만, 이는 이 박사가 언론자유를 폭넓게 허용했다는 뜻으로 해석해야 옳을 것이다. 비판자들은 당시 AP 통신이 한국의 언론자유를 세계 네번째, 다섯번째 수준으로 평가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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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교육제도의 확립 역시 빠뜨릴 수 없는 이 박사의 업적이다. 그의 재임 중 국민확교에서부터 대학원까지의 수많은 학교가 생겨났고 여기에서 배출된 인력이 그후 급속한 경제성장의 밑거름이 되었다. 북한에서의 교육이 '위대한 지도자'의 전기와 사상에 집중하는 동안, 대한민국 헌법은 이데올로기에 물들지 않는 교육을 강조했다. 그 결과 한국 학생들이 열령한 이 박사 추종자가 아니라 가장 치열한 비판자가 되었다는 점은 아이러니컬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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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www.newdaily.co.kr/mobile/mnewdaily/newsview.php?id=54082
 
 

 


[ ......  거의 제한을 받지 않고 자유당 정부를 비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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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에게 불리한 경우에도 어김없이 선거를 치렀다.


또한 국회를 해산하거나 인위적으로 정당을 개편한 적도 없었다. 야당을 탄압하기는 했지만 존속하지 못할 정도의 가혹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1955년부터는 민주당이 출현함으로써 자유당과 함께 양당제도의 틀이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한민당계의 <동아일보>, 흥사단계의 <사상계>, 카톨릭 계의 <경향신문>이 거의 제한을 받지 않고 자유당 정부를 비판할 수 있을 정도로 언론의 자유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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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0.4.

 

[ ...... 내가 받아야 할 총탄을 너희들이 받았구나,

        청년이 불의에 항거하지 않으면 그 나라에는 희망이 없는 거야! ........    ]

 

 [편집자에게] '건국 대통령'을 다시 역사 속으로

 

  김일주 건국대통령이승만박사기념사업회 사무총장

  2010.04.26

 

4·19 학생시위에 의해 정국이 요동치고 있을 때 우남(雩南) 이승만 대통령은 시위 학생들이 입원하고 있었던 서울대학병원을 찾았다. 내가 받아야 할 총탄을 너희들이 받았구나, 청년이 불의에 항거하지 않으면 그 나라에는 희망이 없는 거야! 부상한 학생들을 위로하면서 우남은 그들과 함께 울었다.


임기 후반의 과오 때문에 우남은 마치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적(敵)인 양 비난받고 있으나, 그는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공산침략으로부터 목숨을 다해 지켜낸 주역이다. 그리고 자신이 생명을 걸고 지켰던 그 체제의 제도에 의해 하야함으로써 역설적으로 국민들에게 민주주의의 위대성을 학습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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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부정을 보고 궐기하는 백성들이 나라를 지키니
        이런 날을 평생 기다렸기 때문이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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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정적인 대목이 그의 대선 당시 야당 후보 조병옥이 유세 도중 급서(急逝) 했고, 때문에 우남이 무리해서 부정선거를 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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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4월 22일, 시위 중 부상당한 학생들이 입원해 있는 서울대병원을 방문하여 “부정을 왜 해 부정을 보고 일어서지 않은 백성은 죽은 백성이다. 젊은 학생들이 참으로 장하다”고 말했다. 이후 그는 “국민이 원한다면 대통령도 물러나야 한다. 그게 민주주의다”라는 말을 남기고 하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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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남의 이런 고귀한 뜻은 퇴임 후 각국 수반의 위로 편지에 대해 쓴 답장을 통해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나를 위로하는 편지는 안 받겠소. 나는 지금 가장 행복하다오. 부정을 보고 궐기하는 백성들이 나라를 지키니 이런 날을 평생 기다렸기 때문이오”.


이야말로 그가 20대 시절에 썼던 『독립정신』에서 “무식하고 천하며 약한 형제자매들이 스스로 각성하여 국민정신이 바뀌기를 원하고 또 원하는 바이다.”라고도 말했던 것의 실현이라는 점에서 새삼 돋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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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남 이승만 하야 결정, 민주주의 초석되다
독립정신의 실현…‘착한 권위주의 통치자’의 위대한 결단

조우석   2015.09.27

 

 

 

          1960.4.29.  하야

 

[ .......  "평안하시라 여생"  "할아버지 만세" .......

   ......  "위대한 이승만 박사를 다시 대통령으로 모십시다" ........    ]

 

1960.4.29.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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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박사가 들어간 이화장 대문 옆담엔 "평안하시라 여생"  "할아버지 만세"라고 쓰여진 백지가 붙어 있었다. 이화장 정문앞엔 50명 이상의 보도원들과 다수의 노인 부녀자들이 경비헌병의 제지를 무릅쓰고 모여 들어 있었다.


하오 3시 20분 경 돌연 모대학생이라고 자칭하는 23세의 한 청년은 찦 위에 올라가  "위대한 이승만 박사를 다시 대통령으로 모십시다"라고 외쳤을 때 군중 가운데서 박수 소리가 났다.


이를 본 고대의 일 학생이 그 찦 위에 올라가서  "우리는 깨끗이 하야 한 이박사의 정치적 양심을 받아 들입시다. 우리는 값싼 동정심에서 벗어납시다. "라고 외치자 군중은 다시 박수를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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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박사의 모습이 보이자 그때마다 군중들은 박수를 치며 그를 맞았고 이박사는 이들에게 손을 흔들며 대답 ........     ]

 

 1960.4.29.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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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박사를 다시 대통령으로 모셔야 한다"고 선동하다 다른 학생들에게 끌려 내린 한군은 기자에게  "나도 지난번 데모를 한 사람입니다. 이기붕 정권이 부패한 것도 잘 압니다.그러나 할아버지만은 건실한 애국자입니다"라고 말 하였는데 한편 이를 말린 학생들은  "이제야 데모가 겨우 가라 앉아서 지금부터는 수습을 해야만 나라가 바로 서겠는 데 저런 자가 나타나서 민심을 동요시키고 가뜩이나 흥분된 국민의 마음을 자극하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지금은 냉각이 필요합니다. 흥분만 해서는 나라가 망합니다"라고 기자에게 강력히 주장하였다.


이러한 약간의 혼잡이 있은 후 이박사가 허장관과 박찬일 비서를 대동하고 이화정 정원을 산책하며  화초를 가꾸는 모습이 담 너머 넘겨다 보였다.


몇번인가 이박사의 모습이 보이자 그때마다 군중들은 박수를 치며 그를 맞았고 이박사는 이들에게 손을 흔들며 대답하였는 데 이제는 10여년간 에 걸친 파란 많던 정부 수반의 자리에서 완전히 손을 떼고 한가로운 여생의 보금자리를 찾은 안도된 평민으로서의 이박사 모습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차라리 욕된 자리에 모시는 것보다 얼마나 노박사를 위해 좋은 것인가"하고 가슴속 깊이 느끼게 하는 것이었다.


역시 모든 권력을 떠난 인간 이승만은 멋있는 사람이었고 독재를 씻고 돌아가는 그에게 박수로 환송하는 동포들도 훌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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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인 송건호는 ‘4.19’학생들이 기존 체제를 뒤엎는 혁명의 주역이 되지 못한 점을 다음과 같이 안타까워 했다. 그러나 송건호의 안타까움과 반대로, 바로 이러한 점이 바로 4.19가 자유민주 헌법 수호의 저항권으로서 충족 요건의 충족이 된 것이다.

 


4,19의 결과에 대해서는 ‘소기의 목적이 달성되었다’고 보는 학생이 32%였고, 데모 당시의 소망에 비해 엄청난 결과를 가져왔다고 답한 학생이 39.7%였으며, 전혀 우발적으로 생긴 결과라고 보는 견해 7.3%까지를 합한다면 이승만의 하야, 자유당정권의 붕괴 등 거창한 정변을 학생들의 반 이상이 전혀 예기치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4.19 데모가 과격한 점이 없지 않았다고 본 학생이 40.9%, 무리였다고 보는 학생도 7.3%나 되며, 앞으로 학생들의 사회참여는 적극적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한 학생이 겨우 9.5%에 불과한데, 이념적인 뒷받침만 해야 한다고 답한 학생이 70.2%에 달하고 있다.


다 아는 바와 같이 4.19 당시의 학생들의 의식상황이 이러했으므로 그들은 자기들이 타도한 이승만의 계승정권이 들어앉았음에도 불구하고 거기에 조금도 모순을 느끼지 못했을 뿐 아니라 “이제 우리의 목적은 달성되었다”고 하며 “질서유지”를 외치고 다녔다. (송건호, 2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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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 이박사의 장례행렬을 보러 나온 서울 시민의 수를  1백만명이 넘는 것으로 추산,  해방 이후 최대의 인파 ...........   ]

 

1965.7.27.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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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 정오 무렵 정동 교회에서 나와 동작동으로 향해 떠난 영구차는 시청앞에 모인 약 35만명(경찰 추산)의 인파로 막혀 한동안 나아가지 못하다가 낮 12시 25분경 길이 트여남대문쪽으로 빠져 나갔다. 시청앞에서 있을 예정이던 이 박사의 녹음 방송 등 일반 시민과의 고별절차는 취소됐다.


연도


ㅇ 이화동 입구에서부터 광목줄로 영구차를 매어 앞뒤로 사방에 남녀 90명씩 7백 20명의 남녀가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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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 종로 5가 로타리에는 수천 시민이운집햇서 교통은 완전두절, 종로에 접어들자 영구행렬은 제대로 틀이 잡히기 시작 , 호상 변영태 씨가 선두에 섰으며 그뒤에 태극기 초상화 행장 만장을 든 배재중학생들 해군조악대에 이어 영구차가 따라 영구차량쪽에는 2대의 경찰 백차와 기마대가 호위했다.


국립묘지


ㅇ 삼각지에서부터 차로 운구하려던 예정을 바꿍어 영구행려렬은 계속 도보로 오후 2시 40분 한강 인도교를 통과 , 3시반경 동작동 국립묘지에 도착하여 용사문 앞에서 정부 주관으로 영결식을 가졌다.이 식전에서 박치순 목사의 기도와 박대통령의 조사(정총리 대독)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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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후 최대인파


연도의 만송시민
경찰은 백만추계


서울시경은 27일 고 이박사의 장례행렬을 보러 나온 서울 시민의 수를  1백만명이 넘는 것으로 추산, 해방 이후 최대의 인파라고 밝히고 이날 연도 경비를 위해 관하 3천명의 경관을  동원했다고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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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와는 달리  이박사 장례식행렬이 세종로 그 자리를 지나갈 때의 연도광경은 그의 영구가 하와이로부터 돌아 오던 그날의 성관보다 한층 장관을 이루었다. 이박사의 사면초상화를 앞세운 그뒤로 5백여개를 헤는 만장과 4백여개의 조화대열 그리고 소복에 상장을 두른 수천백명의 남녀수상객과 악대들이 호위하는 가운데 황국 꽃으로 뒤덮힌 영구차  그만하면 고 우남에게 영광의 극치라고 할 수 있다.


국장은  그 보다 더 성할 것이며 국민장인들 그 이상 장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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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65072700209207001&edtNo=2&printCount=1&publishDate=1965-07-27&officeId=00020&pageNo=7&printNo=13465&publishType=00020

 


  *  1965년의 서울인구는 3백80만

 

 

  [ ....... 이화장 담이 무너지기도 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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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仁秀 박사는 李承晩 대통령이 국민에게 남긴 유언을 소개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는 신약성경 갈라디아서 5장 1절 말씀을 자주 하시면서 국민들께 남기는 유언이라고 하셨어요.


다시 나라를 잃고 침략을 당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경제적, 문화적 침략에 대비해 정체성을 해칠 노예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유해가 운구되고 이화장에 빈소가 마련되자 전국에서 추모객이 몰려들었다.

장례식 때 엄청난 인파가 몰려와 참배를 하는 바람에 이화장 담이 무너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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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youtube.com/watch?v=-eziWR5fkqE


이승만 박사 장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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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


[ ..... "북한에서는 남한에 대해 전혀 배우지 않는다" ........   ]

 


탈북청소년, "북한서 南드라마 보냐"는 질문에…

남북청소년 우정 예능 '별친구'서 "시청시 총살" 답해

 

 문은주 인턴기자(동국대 북한학과 2년)   |  2014-0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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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북한에 대해 궁금한 점을 묻는 시간에는 "북한에서도 한국 드라마 보냐"는 낸시의 질문에 탈북 청소년 최순미는 "그러면 총살당한다"고 답해 모두를 놀라게 했다.

 이어 "북한에서는 남한에 대해 전혀 배우지 않는다"는 탈북 청소년의 말에 낸시는 "같은 나라였는데 어떻게 안 배우지"라고 말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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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www.dailynk.com/korean/read.php?cataId=nk04503&num=102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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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 사람들은 탈북자들로부터 북한의 많은 것들에 대해 궁금해하죠. 북한에서는 어디에 살았는지에 따라 자기 지역 소식밖에 몰라요. 철저하게 통제된 사회예요.

남한에 오니까 북한이 어느 정도인지 오히려 더 많이 알게 되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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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0

 

[ ...... 남조선인민들은 헐벗고 굶주리며 7백만명의 실업자가 득실거리는 .........   ]

 

[ ...... 북한 인민들이 인간 아닌 짐승 같은 생활을 .......

   .... 상상도 못했다. 여기가 바로 지상의 낙원 ........    ]

 

경향신문 1980.7.12.

 

귀순한 북한주민 이영우씨 회견

당추방경고에 자유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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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순 직전까지 개성시 판문군 일용품수매사업소에서 당세포비서 겸 공급지도원으로 일해 왔다는 이씨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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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순한후에는 북의 선전이 모두 전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군초소에 도착해서부터 지금까지 모든게 북에서 듣던 것과는 정반대라는 것을 깨달았다.

 

북한주민들의 최근 생활 실태 = 내가 남한에 와서 가장 먼저 느낀것은 북한 인민들이 인간 아닌 짐승 같은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먼저 식량 사정을 보면 1일 배급량이 노무자와 사무원에 대해 7백g씩인데 그나마 전쟁비축미라는 구실로 1백g씩을 떼고 6백g씩을 주고 있으며 노동력이 없는 노인이나 어린이들에 대해서는 3백g밖에 주지 않는다.


그나마도 강냉이등 잡곡7에 쌀3의 비율로 주고 있어 강냉이를 삶아 먹고 사는데 그것도 비축미를 떼기 때문에 하루 한두끼는 죽으로 끼니를 때우고 있다.

 

간장 된장이 모자라 소금으로 음식의 간을 맞추어 먹으며 육류는 돼지고기를 김일성 생일인 4월 15일과 김정일의 생일인 2월 16일 , 그리고 1월 1일에 한해 가구당 5백g씩 배급하고 있어 평소에는 고기 구경도 할 수없는 실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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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북괴의 전쟁준비실태 = 내가 이곳에 와서 제일 먼저 느낀것은 남북한이 상호내왕을 한다면 북한은 당장 패하고 말것이라고 느꼈다.


김일성은 전쟁으로 조국통일한다고 갖은 노력을 다하고 있다. 그실례로 모든 주요공장이나 기업소는 이미 오래전에 갱속으로 들어 갔고 인민으로부터 하루 1백g씩 빼앗은 식량을 각군별로 식량창고를 만들어 비축하고 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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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들의 대남인식 및 전쟁관 = 김일성의 선전대로 남조선인민들은 헐벗고 굶주리며 7백만명의 실업자가 득실거리는 것으로 믿고 있다.

모든 기술이 뒤떨어져 자체 생산품은 하나도 없고 모두 미국에만 의존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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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순소감 및 하고 싶은 말 = 남한이 이렇게 발전되고 행복한 세상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여기가 바로 지상의 낙원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북한보다는 반세기는 앞서 있다고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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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7.14.경향신문

김광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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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 따르면 북한주민들은 식구가 많든 적든 간에 가구당 방한칸을 쓰기 때문에 식구가 많은 가정은 큰 고통을 겪고 있으며 의복도 연간 한벌 정도밖에 배급을 받지 못하는 실정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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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5.8.


[ ......  옥수수밭이 펼쳐져 .... 안내원은 "저것이 모두 고기"라고 .........    ]


  경향신문  1985.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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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도연변에는 옥수수밭이 펼쳐져 있었는데 북한측 안내원은 "저것이 모두 고기"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 저 옥수수는 사료로 쓰기 때문에 결국 고기나 마찬가지"라고  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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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7  김만철  일행

 

[ ..... 『북한에서는 이밥(쌀밥)을 실컷 먹어보는 것이 소원이었다』 .......  ]

[ ...... "남조선에서는 간장 된장을 마음대로 만들어 먹을 수 있다니 지금까지 헛살아 왔다" ........  ]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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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88년에 보위부 경비대원으로 입대했다.

 나는 북한이 제일 행복한 나라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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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6.11. 서해 표류중 구조 송환된 북한군 정광선 (19·상등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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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광선은 조사에서 『북한군은 김정일을 옹호하는 5백만개의 총·폭탄이므로 그 어떠한 핵미사일 보다도 무서운 군대다. 우리는 김정일을 보위하고 죽으면 되기 때문에 남한 군대가 전쟁을 위해 무엇을 준비하고 어떤 무장을 해도 상관없다』고 큰소리쳤다.


그는 지난 22일 오후 1시쯤 서해 연평도 서남방 해상에서 표류하던 거룻배에 우리 해경 함정이 접근하자 『나는 위대한 김정일 장군님의 군인이기 때문에 남조선 배에 오르지 않겠다』며 『김정일 장군님의 배를 사수하겠다』며 손도끼를 들고 자해 위협을 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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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붓대로 수령결사옹위' 촉구
 
 2001.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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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당기관지 노동신문 최근호(11.1)는 `붓대는 우리 당의 위력한 사상적 무기'라는 제목의 논설을 통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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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은 이어 선군시대에는 모든 기자, 언론인들이 `혁명적 군인정신'으로 무장한 시대정신을 발휘해야 된다면서 '붓대를 총대를 틀어쥔 인민군대처럼 수령결사옹위정신의 체현자가 되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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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k.chosun.com/news/articleView.html?idxno=12228

 

 


[ ..... 혁명적인 사상공세의 기수, 나팔수가 되자 .........

  ..... 김정은시대의 항일유격대 나팔수가 되어야 한다 ..........     ]


      2014-0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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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은 이날 '기자, 언론인들은 혁명적인 사상공세의 기수, 나팔수가 되자'는 사설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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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출판보도부문의 기자, 언론인들은 당의 위업에 무한히 충실하고 인민의 사랑을 받는 김정은시대의 항일유격대 나팔수가 되어야 한다"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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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dailynk.com/korean/read.php?cataId=nk00700&num=103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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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김일성·김정일을 비난하는 삐라 내용을 보면서 수령도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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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에서는 후보자에 대해 감히 비난할 생각을 하지 못한다. 어련히 당에서 정해준 사람이 나왔겠거니 생각하고  찬성투표를 던지는 것이 북한주민의 의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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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외교관은 북한에 돌아가서 파키스탄에서 개가 쌀밥을 먹는다는 이야기를 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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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왜 많은 개발도상국들이 독립을 쟁취하고도, 정치·경제적 발전과 안정을 달성할 수 없었는가.

 

李光耀 선임장관은 『1960~1980년대까지 많은 개발도상국 지도자들을 실패로 몰아간 것은 사회주의 경제체제』라고 결론지었다.


 국가개입 경제정책은 자원분배의 효율성을 저해하고 부패를 심화시킴으로써, 開途國(개도국) 경제성장의 발목을 잡았던 것이다. 제3세계의 많은 지도자들은 그들의 뛰어난 능력에도 불구하고, 사회주의 경제모델의 환상에 사로잡혀 경제성장의 결정적인 기회를 놓치는 중대한 실수를 저질렀다 ...........   ]

 

월간조선
2000.12.

하버드에 온 李光耀의 특별 강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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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대전 후 수많은 신생 독립국가들이 예외 없이 사회주의의 노선을 따라 시행 착오를 거듭할 때, 이 전 대통령은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확고한 신념으로 대한민국을 건국하였고, 또 공산주의의 허구성을 꿰뚫어본 선견지명의 지도자였다.


이 전 대통령은 조국의 독립을 위한 헌신과 자유민주국가를 건국한 공로만으로도 전국민에 게 귀감이 되는 것이며, 민족의 지도자로서 추앙받을 충분한 자격 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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