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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기관을 새로 창설함으로써 다수를 획득하기로
2020.06.26 조회수 : 7

 

 

 

 


 
[ ..... 국민아, 우리 임시대통령 李承晩 각하가 上海에 오시도다.  ........


  ..... 그의 명령에 복종하자 .......

  ..... 우리의 생명을 그의 호령 밑에 바치자. ........     ]

 


[ ..... 집행위원회를 중심으로 하는 혁명정부를 조직해야 ......

 ......〈친미 우익그룹에 지도적 역할을 계속 맡겨 두는 것은 무의미한 행위〉 .... 임시정부에서 탈퇴 ........    ]

 

 

孫世一의 비교 評傳 (37) 한국 민족주의의 두 類型 - 李承晩과 金九
 
 
 
『임시대통령 각하, 上海에 오시도다』
  
 孫世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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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0년 12월13일에 각료들과 임시정부 직원들을 인견한 李承晩은 12월24일에 육군무관학교 졸업식에 참가한 것을 시작으로 공식 활동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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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臨時政府 制度改革을 둘러싼 論爭
 
 
  1921년 1월1일자 「獨立新聞」이 李承晩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말로 최대의 경의를 표하고 있는 것은 그의 지도력에 대한 임시정부 인사들의 관심과 기대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국민아, 우리 임시대통령 李承晩 각하가 上海에 오시도다. 우리는 무슨 말로 우리의 元首를 환영하랴. 우리 民國의 첫 원수를 우리 故疆(고강)의 서울에서 맞지 못하는 비애를 무슨 말로 표하랴.
 

  국민아, 통곡을 말고 희망으로 이 결심을 하자.

우리의 원수, 우리의 지도자, 우리의 대통령을 따라 광복의 대업을 완성하기에 일신하자. 합력하자. 그는 우리의 大元帥(대원수)시니 獨立軍人되는 국민아, 우리는 그의 지도에 순종하자. 그의 명령에 복종하자. 죽든지 살든지, 괴롭거나 즐겁거나, 우리는 우리의 생명을 그의 호령 밑에 바치자.


진실로 우리 대통령을 환영할 때에 우리가 그에게 바칠 것은 화관도 아니오 頌歌(송가)도 아니라 오직 우리의 생명이니, 우리의 생명이 가진 존경과 지식과 기능과 심성을 다 그에게 드리고, 마침내 그가 「나오너라」하고 戰場으로 부르실 때에 일제히 「네」 하고 나서자. 민국 3년 원단에 국민아, 일심으로 「우리 대통령 李承晩각하 만세」를 높이 부르자.〉32)
 

  그것은 어떻게 보면 당면한 위기 국면에 대한 불안감에서 기인하는 자기최면적인 환호의 발로였는지도 모른다.
 
 
 
 
  國務會議에서 李承晩과 李東輝가 격론 벌여


 
  1월1일 오전에 임시정부 및 임시의정원의 신년축하식을 마치고 기념촬영을 한 李承晩은 참석자들을 오찬에 초대했다. 이때의 기념사진에는 李承晩, 安昌浩, 李東輝의 세 거두와 金九를 포함하여 모두 59명의 얼굴이 보이는데, 임시정부와 임시의정원을 통틀어 그 정도의 인원이 직접 참여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李承晩은 1월 초부터 본격적인 집무를 시작했다. 임시정부는 재무부가 쓰던 건물에 그의 집무실을 마련했다. 먼저 국무위원을 비롯하여 내무부·외무부·재무부·군무부의 업무보고가 있었고,33) 5일부터 국무회의가 열렸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때에 국무회의의 회의록은 작성되지 않았던 것 같다. 李承晩을 임시정부에서 축출하기로 방침을 정해놓고 있던 이동휘 등 한인공산당으로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李承晩의 위임통치 청원문제를 들고 나왔을 것은 짐작하기에 어렵지 않다.34) 대논쟁이 벌어졌을 것이다. 그런데 李承晩은 이때의 국무회의와 관련하여 좀 다르게 서술하고 있다.


 
  〈李총리가 내부결속을 唱하는 동시에 反省悔悟(반성회오)를 표명하며 앞으로는 協同一致하겠다는 주지로 각료들을 면려하였고, 기왕에 퇴거를 선언한 安총판도 출석 시무하매, 國事의 원만히 商議決行됨을 切望하고 豫喜(예희: 미리 기뻐함)하였노라.
 
  불의에 李총리가 현 정부 제도를 폐지하고 委員制로 개정하자는 안을 돌연히 제의한 바 연석회의에서 여차한 대변경은 이해관계가 어떻든지 의정할 權利와 실행할 道理가 없으므로 의안이 성립치 못한지라.…〉35)
 


  이동휘가 「반성회오」를 어떻게 표명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임시정부의 제도개혁 문제는 이 무렵 상해인사들 사이에서 가장 열띤 논란거리가 되고 있었다. 그 논의를 주도한 사람은 한형권으로부터 모스크바 자금을 건네 받아 가지고 온 金立이었다. 그는 날마다 큰 음식점에 사람들을 불러 모아 집행위원회를 중심으로 하는 혁명정부를 조직해야 한다는 여론을 유도했다. 이동녕, 이시형, 신익희 등 기호파인사들은 이러한 모임에 나타나지 않았으나 안창호는 참석했다고 한다.36) 이동휘가 제의한 위원제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었는지는 명시되지 않았으나, 그것은 소비에트 러시아의 인민위원회 제도와 같은 것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때의 李承晩과 이동휘의 논쟁과 관련하여 金九는 뒷날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 임시정부 직원 중에서도 공산주의니 민족주의니 하는 분파적 충돌이 격렬해졌다. 심지어 정부의 국무원 중에도 대통령과 각부 총장들 간에 민주주의냐 공산주의냐로 각기 옳다는 주장을 좇아 갈라졌다. 그 대강을 거론하면, 국무총리 이동휘는 공산혁명을 부르짖고, 대통령 이승만은 민주주의를 주창하였다. 이로 인해 국무회의 석상에서도 의견 불일치로 때때로 논쟁이 일어나 國是(국시)가 서지 못하고, 정부 내부에 괴이한 현상이 거듭 일어났다.〉37)
 

  임시정부의 보위를 책임지고 있는 金九의 고충이 어떠했는지가 느껴지는 술회이다.
 
 


  委員會制와 臨政幹部들의 分散活動 주장도


 
  또한 이동휘 그룹은 임시정부의 효율성을 제고하기 위하여 주요 간부들이 각기 적당한 지역에 배치되어 실질적인 활동을 추진할 것을 주장했다고 한다. 김규식은 모스크바에서, 이동휘는 시베리아에서, 이동녕과 이시영은 만주에서, 안창호는 미주에서, 이승만은 하와이에서, 신규식은 광동에서, 신채호와 남형우는 북경에서 활동하고 노백린은 사관 양성에 주력하며, 상해에는 김립을 총책으로 한 연락부만 두고, 각처에 있는 사람들은 1년에 한 번씩 만나서 회의를 하면 된다는 것이었다.38) 이와 비슷한 임시정부 간부들의 분산 활동 방안은 안창호도 주장하고 있어서 흥미롭다.39)


 
  임시정부 간부들의 분산 활동은 사실상 임시정부의 해산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위원회제로 바꾸자는 주장과도 모순되는 것이 아닐 수 없다. 또한 일본경찰의 정보보고는 이동휘는 이때의 국무회의에서 임시정부를 시베리아로 옮길 것을 제의했으나, 이 역시 李承晩 등의 반대에 부닥쳤다고 기술하고 있다.40)

 

 
  대통령제를 위원회제로 바꾸자는 이동휘의 제안에 대해서는 李承晩은 물론 안창호도 반대했다. 그러자 이동휘는 사임을 청원했다. 李承晩과 각원들이 극력 만류하였으나 이동휘는 1월24일에 〈나의 쇄신의안을 정무회의에 제출하였으나, 한마디 심의도 없이 구겨 없앴기 때문에 나의 실력으로서는 이 난관을 타개하기 어렵다〉41)는 요지의 선포문을 발표하고 광동으로 가버렸다. 내무총장 이동녕이 그를 대신하여 1월25일에 국무총리 대리 겸임으로 임명되었다.


 
  이동휘의 사임은 곧 한인공산당의 임시정부 탈퇴를 뜻하는 것이었다. 이동휘는 러시아 외무인민위원회에 제출한 보고서에서 〈친미 우익그룹에 지도적 역할을 계속 맡겨 두는 것은 무의미한 행위〉라고 판단하여 임시정부에서 탈퇴했다고 적고 있다.42) 그리고 한인공산당의 이러한 결정은 「대중의 전적인 신뢰를 받는 최고혁명기관」을 다시 조직하는 계획과 관련되어 있었다.43) 그것은 국민대표회 소집운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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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무경 이동휘씨가 위원제를 제창하니, 곧 러시아 정부 제도를 채용하자 함이라 ........

 ......  그 의견이 서지 못함에 이동휘씨는 곧 사직하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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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李東輝의 委員制는 러시아制度라서 反對

 
  이날의 李承晩의 연설 내용에서 가장 주목되는 것의 하나는 국무총리 이동휘가 사퇴하게 된 경위에 대한 설명이었다.

 
  『그때에 국무경 이동휘씨가 위원제를 제창하니, 곧 러시아 정부 제도를 채용하자 함이라. 다른 나라 사람들은 무엇이라 하든지 우리의 좋을 대로 위원제를 쓰자 하였으나, 필경 결론은 그 의견이 서지 못함에 이동휘씨는 곧 사직하고 밖으로 나아갔소이다』
 

  이동휘의 위원제 주장을 국무회의가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은 그것이 소비에트 러시아의 정치제도이기 때문이었다는 것을 분명히 밝힌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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孫世一의 비교 評傳 (38) 한국 민족주의의 두 類型 - 李承晩과 金九
 
李承晩, 워싱턴 군축회의에 한국 대표단장으로 가다
 
 

 

 

 

        1921.1.  이동휘  상해파 공산당

 

[ ......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기관을 새로 창설함으로써 다수를 획득하기로 결정” .......

  ...... 상해파 공산당의 사업기조 ....  “민족혁명운동의 각 단체를 후원하고 그 혁명사업을 촉진” ........    ]

 

[ ..... 군사통일회 ... 모험단 등이  그 제휴대상 ........     ]

 

[ ....... 상해파 공산당은 민족통일전선 내에서 헤게모니를 장악하는 일을 중요시 ..... 민족통일전선을 유지시켜나가는 전제조건으로서 ‘다수획득’을 염두에 두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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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휘의 국무총리직 사임은 한인사회당이 상해임시정부에서 탈퇴했음을 의미한다. 왜 탈퇴했는가? 이동휘와 박진순이 상해파 공산당대표단 자격으로 러시아 외무인민위원부 앞에 제출한 문서가 있다. 거기에는 상해파가 왜 임시정부에서 탈퇴했는지 상세히 설명되어 있다.


그것에 따르면, 1921년 1월의 임시정부 탈퇴는 민족통일전선정책의 취소를 뜻하는 것이 결코 아니었다. 상해파 공산당은 “친미 우익 그룹에게 앞으로도 지도적 역할을 계속 맡겨두는 것은 무의미한 행위”라고 판단했다. 왜냐하면 친미일변도의 임시정부 정책이 계속됨으로써 임시정부에 대한 대중의 신뢰가 점점 실추되었기 때문이다. 그를 저지할 필요가 있었다. 상해파 공산당의 임시정부 탈퇴는 민족주의 내의 반공파·대미의존파와의 결별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임시정부 내의 대미의존파란 누구를 가리키는가? 상해파의 기록을 보면, 거기에는 두 개 그룹이 있다. 안창호 그룹과 이승만 그룹이 그들이다. 안창호 그룹의 정책은 좀더 실용적이다. 그들은 “대중의 압력에 밀려 소비에트러시아에 대한 접근정책을 실행하고자” 노력했다고 한다. 그들은 두 개의 전선을 유지하기를 기대했다. 하나는 미국이고, 다른 하나는 소비에트러시아였다. 註78)

 

그에 반해 이승만 그룹은 소비에트러시아와 어떤 공통점도 갖기를 바라지 않는다고 한다. 이 그룹은 한국 혁명운동계에서 가장 우익적인 그룹이라고 지목받았다. 이들은 소비에트러시아의 군사적·재정적 지원을 받아서 미국의 이익을 증진하는 일에 관심을 갖고 있다고 한다. 이들은 소비에트러시아와 일본의 전쟁을 기대한다. 왜냐하면 둘 다 약화되기를 기대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들은 소비에트러시아의 지원으로 인해 상해파 공산당의 영향력이 강화되는 일을 두려워한다. 그들은 상해파 공산당을 무엇보다 가장 증오하며, “심지어 지금은 일본 못지않게 증오한다”고 썼다. 註79)

 

결국 상해파 공산당이 1921년 1월에 단행한 임시정부 탈퇴는 곧 “대중의 전적인 신뢰를 받는 최고혁명기관”을 다시 조직하는 계획과 맞물려있었다. 그것은 곧 국민대표회 소집운동이었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기관을 새로 창설함으로써 다수를 획득하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註80)

 

상해파 공산당은 민족통일전선 내에서 헤게모니를 장악하는 일을 중요시했다. 그들은 다수를 점하는 방법으로써 그를 보장받고자 했다. 민족통일전선을 유지시켜나가는 전제조건으로서 ‘다수획득’을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임정 탈퇴는 통일전선정책의 철회가 결코 아니었다. 그것은 상해임시정부가 민족통일전선 기관으로서 더 이상 적합하지 않다는 판단에서 비롯된 행동이었다.


상해파는 자신이 통일전선기관 내에서 헤게모니를 요구할 권리가 있다고 자부했다. 왜냐하면 “한국 내에서 활동하는 혁명세력의 실제 상호관계로 보아 우리가 한국혁명 지도기관에서 다수파를 요구할 권리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註81)

 

상해파의 주장은 허장성세가 아니었다. 그들이 임시정부와 결렬한 직후인 1921년 3월부터 다음해 4월까지의 활동상을 기록한 한 문서가 이것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이 문서에 의하면, 당시 상해파 공산당의 사업기조 가운데 하나는 “민족혁명운동의 각 단체를 후원하고 그 혁명사업을 촉진”하는데 있었다. 이 사업기조에 의거하여 상해파 공산당은 각지의 민족혁명단체들과 긴밀한 관련을 맺으며 활동했다.


예를 들면, 중국 관내에서는 “북경에서 신숙申肅 및 박용만朴容萬 등의 손으로 조직된” 군사통일회, “상해·북경에서 김원상金元象, 金元鳳의 오식인 듯 및 이호반李鎬班 등의 손으로 조직된 결사단체”인 모험단 등이 그 제휴대상이었다. 註82) 특히 군사통일회는 당시 이승만의 위임통치 청원 행위를 문제삼아 이승만을 성토하고, 임시정부 불신임을 결의했으며, 또한 임시정부 불신임에 따른 제반 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국민대표회의 소집을 주장하고 있었다. 註83)


한편 만주에서는 “간도의 다수 주민으로 조직된” 북간도 국민회가 상해파 공산당과 제휴하여 활동했다. 또한 국내에서는 “그 표면상의 목적은 청년의 덕德·지智·체體 3육育을 발전시키는데 있다고 하지만, 그 실은 혁명청년의 집회”라고 간주한 조선청년회연합회를 비롯하여 조선노동공제회·흥농회 등의 단체가 상해파의 활동기반이 되었다. 註84)


일본에서는 “동경에 거주하는 조선 고학생 및 일본 각지에 산재한 조선 노동자 등의 발기에 의해 1920년 3월 성립된 노동자적 단체”인 동우회同友會, “조선유학생의 단체로서 그 목적은 상호의 신의를 두텁게 하는데 있다고 하지만 사실은 조선에서 가장 오래된 청년혁명가들의 단결”인 유학생학우회 등이 상해파의 활동기반이었다. 註85)

 

결국 상해파 공산당이 상해임시정부와 결별한 것은 그것이 민족통일전선기관으로는 부적당하다고 판단한 때문이었다. 상해파 공산당은 임시정부와 결별한 뒤 한국·중국·만주·일본 등지에 소재하는 더욱 대중적이며 투쟁적인 민족단체들과 정치적 제휴에 착수했으며, 나아가 국민대표회운동을 통해 더욱 확대된 규모의 새로운 민족통일전선기관을 수립하고자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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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2권 초기 사회주의운동 / 제5장 두 공산주의그룹의 혁명이론과 정책 / 1. 정세인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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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혁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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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革命이란, 네가 살아있으면 내가 죽는다, 네가 이기면 내가 진다고 하는 무자비한...물리적 대결전을 요구 한다」고 로동신문(2000년 12월 22일자「正論 白頭의 銃(총)의 혈통」는 썼다. 죽일 것인가 죽임을 당할 것인가, 어느 쪽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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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8.2.


 [ ..... 나는 이미 자연인이 아니라 공산당원이 되어 있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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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黨조직으로부터 나와 李, 金 셋에게 「대동청년단 대송면 단장을 제거하라」는 지령이 떨어졌다.


우리는 黨命을 수행하기 위해 남성동에 있는 단장 집의 담을 넘었다. 나는 마당에서 망을 보고 둘은 내실에 침입하여 일을 저질렀다.


셋이 함께 도주하여 송정동의 가톨릭수녀원 천장 속에 숨어 있다가 경찰에 체포되었다. 나는 징역 8년을 선고받고 김천형무소에서 복역 중 6·25 전쟁을 맞았다』

 

2·7 투쟁은 4·3 제주도 폭동으로 어어졌고, 5월14일 북한은 남한으로의 송전을 중단했다. 그리고 10월19일 국군 제14연대에 의한 여수·순천반란이 일어났다.


―조직의 규칙이 뭐기에 살인명령을 무조건 받는단 말인가.


『나는 이미 자연인이 아니라 공산당원이 되어 있었다. 당 이외의 세계는 일단 파괴해 놓고 프롤레타리아가 권력을 잡은 다음에 다시 건설하면 된다는 신념을 가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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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3.9.   신영복

 

[ ...... 민주주의는 계급 내부의 것 .......

   ..... 부르조아 민주주의가 있고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가 .... 훨씬 더 비판적으로 .......

  ...... 주민들과의 지근거리에  진지를 ........     ]

 


[ ...... 조직적 성격(형태)를 띠고 있느냐 .....

   ..... 어떤 형태로 결합하고 있느냐 ......

   ..... 중앙이 있는 파티 ........

  .....  시기상조론에 너무 쉽게 합의 ........     ]

 

NGO대학원 특강 (신영복 교수 편)

 2003-09-15
 
 
NGO대학원 특강

■ 장소 : 새천년관 4층 교수회의실
■ 일시 : 2003년 9월 2일
■ 강연자 : 신영복 교수
■ 사회 : 조효제 교수

 

◀관계론과 연대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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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년의 거대한 집합에 대한 추억이 있지만 이러한 양적 측면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질적 측면인데 그것은 운동역량이 조직적 성격(형태)를 띠고 있느냐의 문제다. 최근 형태는 그렇다고 할 수 있다.

질적 역량의 두 번째 관점은 이러한 부분역량들이 어떤 형태로 결합하고 있느냐가 중요하다. 저급한 연합 수준인지 연맹수준인지 중앙이 있는 파티인지 하는 것은 굉장히 중요하다. 바로 그 점에서 우리는 취약하다. 관계성이 총화되지 않고 있다는 측면에서 상당히 기회주의적인 면이 있다. 여기에는 87년 이후 우리 운동이 중앙 중심의 기회주의적 사업작풍이 존재했고 각 부문운동의 총화 수렴과정이 없었다. 그건 그럴 수 있으나 실패 후 평가가 치열하지 못하고 시기상조론에 너무 쉽게 합의하고 있다. 투쟁의 성과가 도둑맞았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역량의 결합수준이 낮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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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한가지 지적할 것은 운동하는 사람들의 사상성이 매우 열악하다는 것이다. 계급의식에서 밀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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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는 계급 내부의 것이다. 목표가 공유되고 있는 조건에서 그 목표를 이루는 과정에서의 차이를 합의하는 것이 민주주의다. 부르조아 민주주의가 있고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가 있을 수 있는 것이다. 문제는 우리의 인식을 훨씬 더 비판적으로 갖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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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살아가면서 느끼는 기쁨과 아픔은 관계에서 나온다. 관계의 총화가 바로 나다. 우리사회의 지배구조는 완고하다. 내가 못하면 내 다음의 사람이 할 수도 있다. 싸움에서 이기는 방법은, 방식에 있어서 적들이 세울 수 없는 목표를 세울 수 있어야 한다. 


주민들과의 지근거리에 진지를 세우는 것이 중요하다. 그람시의 헤게모니이론이 말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http://ngo.skhu.ac.kr/zboard/zboard.php?id=bodo&page=3&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41

 

 

 

 


 [ ..... 북경에서 모험단원 10여 명이 상해로 ........

  ...... 이승만을 비롯한 임시정부 각원의 총사직을 강요 ... 비상수단을 취하려고까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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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과 국무총리 사이의 불화와 반목도 임시정부 혼란의 원인이 되었다. 이승만과 이동휘는 정치적 이념과 독립운동 노선에 적지 않은 차이가 있었다. 1918년 노령에서 한국 최초의 사회주의 정당인 한인사회당을 결성하여 활동하던 이동휘는 임시정부 국무총리로 취임한 이후에도 상해의 인사들에게 공산주의를 선전하면서 세력을 규합하였고, 만주와 연해주의 독립군들을 기반으로 무장투쟁을 전개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승만은 소련과의 협력은 조국을 공산주의 국가의 노예로 만들자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면서 미국을 배경으로 한 외교독립노선을 주장하였다. 더욱이 이승만이 상해에 부임하지 않고 미국에서 대통령직을 수행함으로써 상호간에 오해와 불신도 싹텄다.

 

1920년 12월 이승만이 상해로 건너와 임시정부 대통령으로 부임하면서 대통령과 국무총리 사이의 불화는 오히려 더욱 심화되었다. 대통령과 국무총리가 한 자리에 모였지만 의견충돌은 다반사였다. 이 과정에서 대립과 불신은 깊어갔고 결국 이동휘는 대통령이 국무총리인 자신을 묵살한다면서 국무총리직을 사직했다. 군무총장 노백린을 비롯한 각원들의 사직도 줄을 이었고 마침내 대통령도 사직한다며 남경으로 떠나가 버렸다. 註63)


이승만은 다시 사직을 번복하고 임시정부 조직의 정비에 착수했다. 그는 몇몇 각원들의 압력으로 대통령직을 사직할 수 없었다면서 사직한 국무총리와 각원들을 면직시켰다. 이어 법무총장 신규식으로 하여금 국무총리를 겸임하게 하고 기호출신 인사들을 중심으로 각부 총장들을 새로 임명했다.


그러나 독단적인 수습책은 혼란을 심화시킬 뿐이었다. 그동안 임시정부 밖에서 대통령 이승만을 비판하던 인사들이 그 화살을 임시정부로 돌리고 이를 부정하면서 임시정부는 더 큰 혼란에 빠져들었다. 1921년 2월 박은식朴殷植·원세훈 등이 임시정부의 무능과 분열을 비판하는 성명서를 발표한데 이어 4월에는 신채호 등 54명이 공동명의로, 그리고 박용만·신숙 등이 국내외 16개 독립운동단체 명의로 이승만에 대한 성토문을 발표하였다. 註64)


특히 박용만과 신숙·신채호 등 북경세력의 존재는 위협적이었다. 이들은 1920년 9월 군사통일촉성회를 발족시키고 이듬해 4월 17일 북경에서 군사통일주비회를 결성했다. 노령 연해주와 북만주에 산재한 무장단체들의 통합을 표방한 이들의 당면 목표는 상해임시정부의 타도였다. 주비회는 4월 19일에 회의 명칭을 ‘군사통일회의’로 확정했다. 하와이 국민군과 하와이독립단·북간도국민회·서간도군정서·대한국민의회, 국내의 통일당 등 10개 단체 대표 17명이 참가했다. 군사통일회의는 상해임시정부와 의정원을 부인하고 국내에서 조직된 ‘대조선공화국 임시정부’한성정부를 계승한다는 명분하에 임시정부를 새로 조직하기로 했다.


이처럼 북경을 중심으로 한 반대세력의 압력은 더욱 강화되어 북경에서 모험단원 10여 명이 상해로 왔고, 이들은 이승만을 비롯한 임시정부 각원의 총사직을 강요하면서 비상수단을 취하려고까지 했다. 이에 이승만은 1921년 5월 17일 “외교상의 긴급과 재정상의 절박”으로 인해 상해를 떠난다는 교서를 남기고 잠적했다가 5월 29일 비밀리에 미국으로 돌아갔다. 註65) 이로써 통합 결정 1년여 만에 임시정부는 무정부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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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47권 1920년대 재중항일세력의 통일운동 / 제2장 임시정부의 침체와 통일운동의 태동 / 1. 임시정부 수립운동과 통합정부의 분열

 

 

 

        1921.5.

 

[ ..... 북경 방면으로부터 테러리스트들이 속속 상해로 .......

 ...... 임시정부 지도자들의 암살을 호언하면서, 현상금까지 걸었다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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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李承晩이 모스크바로 파견하기로 마음먹고 있는 이희경과 안공근을 외무총장 대리와 차장으로 지명하고, 연두교서와 「임시대통령 유고」에서 그 기능의 확충을 강조한 교통부의 업무를 맡길 인물로 의정원 의장 손정도와 함께 경무국장 金九를 지명하고 있는 점도 흥미롭다. 李承晩과 金九가 직접 만나기는 이때가 처음이었다. 金九는 李承晩에 대해 경무국장의 임무를 충실히 수행했고, 그러한 金九에 대해 李承晩은 신뢰감을 느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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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월 들어 북경 방면으로부터 테러리스트들이 속속 상해로 몰려오고 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그들은 임시정부 지도자들의 암살을 호언하면서, 현상금까지 걸었다고 했는데, 李承晩과 안창호를 죽이면 1,000원, 손정도·이희경·김만겸 등을 죽이면 500원을 준다고 했다는 것이다. 암살 대상자 명단에 김만겸이 포함되었다는 것이 특히 주목된다. 그리하여 李承晩을 비롯한 임시정부 간부들에게는 계속 경호원이 배치되었다고 한다.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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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많은 사람들이 독립운동에 회의를 느끼고 국내로 들어가거나 미국으로 떠나거나 활동을 포기하고 생활방도를 찾아서 임시정부를 떠났다. 1919년 4월11일 밤의 상해임시정부 수립을 주도했던 독립신문사 사장 李光洙가 국내로 들어간 것도 이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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孫世一의 비교 評傳 (37) 한국 민족주의의 두 類型 - 李承晩과 金九
 
『임시대통령 각하, 上海에 오시도다』
 

 

 

 


        *    김구

 

[ ..... 이동휘가 ... 독립운동은 민주주의 혁명에 불과하니 ....  나와 같이 공산혁명을 하는 것이 어떤가........


 .....  ´제3국제공산당´의 지휘와 명령을 안 받고도 할 수 있습니까?" .... "안 되지요" ........     ]

 

[ ..... 기미년, 즉 대한민국 원년에는 국내나 국외를 막론하고 정신이 일치하여 민족 독립운동으로만 진전 ......


   ..... 점차로 봉건이니, 무산혁명이니 하는 말을 하는 자가 생겨서 단순하던 우리 운동선에도 사상의 분열, 대립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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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백범은 ´임시정부´를 이끄는 과정에서 공산주의자들에게 너무나도 괴로움을 당한 나머지 "공산주의자들과는 아무 것도 더불어 함께 할 수 없다"는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이 같은 백범의 생각은 <백범일지>(서울; 범우사, 2002.8.5, 3판3쇄)의 관련 대목들을 보면 알 수 있다. 다음은 그 인용이다.

 

『기미년, 즉 대한민국 원년에는 국내나 국외를 막론하고 정신이 일치하여 민족 독립운동으로만 진전되었으나 당시 세계 사조의 영향을 따라서 우리 중에도 점차로 봉건이니, 무산혁명이니 하는 말을 하는 자가 생겨서 단순하던 우리 운동선에도 사상의 분열, 대립이 생기게 되었다.


임시정부 직원 중에도 민족주의니, 공산주의니 하여 음으로 양으로 투쟁이 개시되었다. 심지어 국무총리 이동휘(李東輝)가 공산혁명을 부르짖고 이에 반하여 대통령 이승만(李承晩)은 데모크라시를 주장하여 국무회의 석상에서도 의견이 일치하지 못하고 대립과 충돌을 보는 기괴한 현상이 중생첩출하였다.


예하면, 국무회의에서는 러시아에 보내는 대표로 여운형(呂運亨), 안공근(安恭根), 한형권(韓亨權) 세 사람을 임명하였건마는, 정작 여비가 손에 들어오매 이동휘는 제 심복인 한형권 한 사람만을 몰래 떠나 보내고 한이 시베리아를 떠났을 때쯤 하여 이 것을 발표하였다. 이동휘는 본래 강화진 위대참령으로서 군대 해산 후에 해삼위(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가 이름을 대자유(大自由)라고 행세한 일도 있다.

 

하루는 이동휘가 내게 공원에 산보하기를 청하기로 따라갔더니, 조용한 말로 자기를 도와달라 하기로 나는 좀 불쾌하여서 내가 경무국장으로 국무총리를 호위하는 데 내 직책에 무슨 불찰이 있느냐고 물었다.


이 씨는 손을 흔들며, "그런 것이 아니라, 대저 혁명이라는 것은 피를 흘리는 사업인 데,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독립운동은 민주주의 혁명에 불과하니 이대로 독립을 하더라도 다시 공산주의 혁명을 하여야 하겠은 즉 두 번 피를 흘림이 우리 민족의 대불행이 아닌가, 그러니 적은이(아우님이라는 뜻이니 이동휘가 수하동지들에게 즐겨 쓰는 말)도 나와 같이 공산혁명을 하는 것이 어떤가" 하고 내 의향을 묻는 것이었다.

 

이에 대하여 나는 이 씨에게, "우리가 공산혁명을 하는 데는 ´제3국제공산당´의 지휘와 명령을 안 받고도 할 수 있습니까?" 하고 반문하였다. 이 씨는 고개를 흔들며, "안 되지요" 한다. 나는 강경한 어조로, "우리 독립운동은 우리 대한민족 독자의 운동이요, 어느 제3자의 지도나 명령에 지배되는 것은 남에게 의존하는 것이니 우리 임시정부 헌장에 위반되오. 총리가 이런 말씀을 하심은 대불가(大不可)니 나는 선생의 지도를 받을 수가 없고, 또 선생께 자중하시기를 권고하오" 하였더니 이동휘는 불만한 낯으로 돌아갔다.

 

이 총리가 몰래 보낸 한형권이 러시아 국경 안에 들어서서 우리 정부의 대표로 온 사명을 국경 관리에게 말하였더니 이 것이 모스크바 정부에 보고되어, 그 명령으로 각 철도 정거장에는 재류 한인 동포들이 태극기를 두르고 크게 환영하였다.


모스크바에 도착하여서는 러시아 최고 수령 레닌이 친히 한형권을 만났다. 레닌이 독립운동 자금은 얼마나 필요하냐 하고 묻는 말에 한은 입에서 나오는 대로 200만 루블이라 대답한 즉 레닌이 웃으며, "일본을 대항하는 데 200만 루블로 족하겠는가?" 하고 반문하므로 한은 너무 적게 부른 것을 후회하면서 본국과 미국에 있는 동포들이 자금을 마련하니 당장 그 만큼이면 된다고 변명하였다. 레닌은, "제 민족의 일은 제가 하는 것이 당연하다" 하고 곧 외교부에 명하여 200만 루블을 한국 임시정부에 지불하게 하니 한형권은 그 중에서 1차분으로 40만 루블을 가지고 모스크바를 떠났다.

 

이동휘는 한형권이 돈을 가지고 떠났다는 기별을 받자 국무원에는 알리지 아니하고 또 몰래 비서장이요, 자기의 심복인 김립(金立)을 시베리아로 마중 보내어 그 돈을 임시정부에 내놓지 않고 직접 자기 손에 받으려 하였으나, 김립은 또 제 속이 따로 있어서 그 돈으로 우선 자기 가족을 위하여 북간도에 토지를 매수하고 상해에 돌아와서도 비밀히 숨어서 광동 여자를 첩으로 들이고 호화롭게 향락 생활을 시작하였다. 임시정부에서 이동휘에게 그 죄를 물으니 그는 국무총리를 사임하고 러시아로 도망하여 버렸다.

 

한형권은 다시 모스크바로 가서 통일운동의 자금이라 칭하고 20만 루블을 더 얻어 가지고 몰래 상해에 돌아와 공산당 무리들에게는 돈을 뿌려서 소위 국민대표대회라는 것을 소집하였다. 그러나 공산당도 하나가 못 되고 세 파로 갈렸으니 하나는 이동휘를 수령으로 하는 상해파요, 다음은 안병찬(安秉贊)·여운형을 두목으로 하는 일쿠츠크파요, 그리고 셋째는 일본에 유학하는 학생으로 조직되어 일인 복본화부(福本和夫)의 지도를 받은 김준연(金俊淵) 등의 엠엘(ML)당파였다. 엠엘당은 상해에서는 미미하였으나 만주에서는 가장 맹렬히 활동하였다.

 

있을 것은 다 있어서 공산당 외에 무정부당까지 생겼으니 이을규(李乙奎)·이정규(李丁奎) 두 형제와 유자명(柳子明) 등은 상해, 천진 등지에서 활동하던 아나키스트(무정부주의자)의 맹장들이었다.

 

한형권의 붉은 돈 20만 원으로 상해에 개최된 국민대회라는 것은 참으로 잡동사니회라는 것이 옳을 것이었다. 일본, 조선, 중국, 아령 각처에서 무슨 단체 대표, 무슨 단체 대표 하는 형형색색의 명칭으로 200여 대표가 모여 들었는 데. 그 중에서 일쿠츠크파, 상해파 두 공산당이 민족주의자인 다른 대표들을 서로 경쟁적으로 끌고 쫓고 하여 일쿠츠크파는 창조론, 상해파는 개조론을 주장하였다.


창조론이란 것은 지금 있는 정부를 해소하고 새로 정부를 조직하자는 것이요, 개조론이라는 것은 현재의 정부를 그냥 두고 개조만 하는 것이었다. 이 두 파는 암만 싸워도 귀일이 못 되어서 소위 국민대표회는 필경 분열되고 말았고, 이에 창조파에서는 제 주장대로 ´한국정부´라는 것을 ´창조´하여 본래 정부의 외무총장인 김규식(金奎植)이 그 수반이 되어서 이 ´한국정부´를 끌고 해삼위로 가서 러시아에 출품하였으나, 모스크바가 돌아보지도 아니하므로 계불입량(計不入量)하여 흐지부지 쓰러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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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코민테른 =  제3 인터내셔날(1919∼1943)

 

[ ......  '부르조아 민주주의를 대치하는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와 소비에트 권력의 인정'을 '제3 인터내셔날의 기본적인 원리'로 ........   ]

[ ...... '국제 소비에트 공화국의 건립이 추진되고 있다.' .......  ]


[ ...... 제2차 총회 ....  '철의 원칙'과 '가능한 한 최대한의 중앙집권화'를 요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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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 인터내셔날(1919∼1943). 1차대전이 발발하여 제2 인터내셔날이 해체되면서 레닌은 1914년 11월에 다음과 같이 썼다. '제2 인터내셔날은 죽었다. 기회주의자들에 의해서 쓰러졌다. … 제3 인터내셔날이여! 영원하라. …' ('사회주의 인터내셔날의 위치와 임무', CW 28, p. 40) 이러한 제3 인터내셔날-일명 공산주의 인터내셔날 또는 코민테른[Commintern]이라고도 불린다.-은 1917년 러시아에서 10월 혁명이 성공하고 중부 유럽에 혁명적 열기가 고양되던 시기에 볼세비키의 제창으로 1919년 3월 모스크바에 세워졌다.

 

1차 총회에서 레닌은 '국제 소비에트 공화국의 건립이 추진되고 있다.'(앞의 책, 28권 p. 477)고 선언함으로써 당시 유럽을 지배하고 있던 분위기와 기대를 표현했다. 그 후에 모든 '부르조아 민주주의를 대치하는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와 소비에트 권력의 인정'을 '제3 인터내셔날의 기본적인 원리'로 선언했다.(앞의 책, 31권 pp. 197∼8) '사회주의 소비에트 공화국 세계 연합(Degras 1971, 2권, p. 465)'은 비록 그것이 1935년 이후에 쇠퇴했다고 할지라도 그의 존재를 통하여 공식적인 목적을 유지시키고 있었다.

 


 모스크바에서 1920년 7월∼8월 사이에 열린 제2차 총회에는 41개국의 당과 조직으로부터 대표들이 참석했고 프랑스 사회당과 독일 USPD에서도 참관인이 참석했는데, 이들 프랑스와 독일 사회당의 참석자 대부분은 그 해가 가기 전에 코민테른에 가입할 것을 제안하였다. 새로운 인터내셔날이 불안정한 사회민주적 요인들에 의해 해이해질 우려가 있다는 데 유의하여 총회는 엄격한 21개항의 가입 조건을 규정하였다. 가입을 원하는 모든 당들은 개량주의자와 온건 중도파들을 노동운동의 책임 있는 위치에서 모두 축출해야 하며, 군대 내에서의 체계적인 선전을 포함하여 합법적인 운동과 비합법적인 운동을 펴나가야 한다. 그 시대를 '첨예화된 시민전쟁' 시기의 하나로서 규정하면서 당을 중심으로 한 '철의 원칙'과 '가능한 한 최대한의 중앙집권화'를 요구했다. 즉 국제적으로나 국내적으로 코민테른의 집행권 아래서 모든 내용이 결정되기를 요구했다.(Degras, 1권 pp. 166∼172)

 

코민테른은 그의 법령에 '백색인만을 위해서 존재했던 제2 인터내셔날의 전통과 완전히 단절한다.'고 천명했다. 코민테른의 임무는 모든 유색인 노동자들을 포용하고 해방시키는 것이었다. 제2차 총회는 레닌이 기초한 민족과 식민지 문제에 대한 테제를 채택했는데, 이 테제는 민족 및 식민지 해방운동이 자본주의에 대항하여 싸우는 노동계급 운동과 소비에트 러시아와 반제국주의적 동맹을 맺을 필요성을 강조하였다.(Degras, 1권 pp. 138∼44)


1920년에 쓰여진 레닌의 팜플렛 '좌익 공산주의-소아병적 혼란'에서 그는 코민테른에 있어서의 '극좌익적인' 경향과 대립했으며, 코민테른의 반동적인 노동조합 내에서의 작업과 의회 선거에 공산주의의 원칙적인 참여를 주장하였다. 그것은 그가 1921년 제3차 코민테른 회의에서 목도했던 조류였다. 그때 그는 혁명의 파고가 퇴보하고 러시아 외부의 공산당들이 노동계급의 소수만을 대표하며, 근본적으로 러시아적 경험에 근거한 이전까지의 공세적 혁명 저술이 더 이상 서구에는 적합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회의는 노동계급의 즉각적인 요구를 위해 투쟁할 국내외 노동계급 정당들의 통일전선을 요구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코민테른의 집행위원회와 제2 인터내셔날, 그리고 비엔나 동맹이 1922년 베를린에서 회의를 열었으나 의견의 일치를 보는 데에는 실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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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laborsbook.org/dic/view.php?dic_part=dic01&idx=101

[인터내셔날 ] (Internationals, th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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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민테른 창설대회는 1919년 3월에 열렸는데 21개국 35조직 52명의 대표가 참석했다. 각국 공산당은 코민테른 밑에 평등하게 존재한다는 명분이 내세워졌다.


그런데 다음해인 1920년 7, 8월의 제2차 대회에서 정체를 드러낸 레닌의 각국 공산당에 대한 ‘21개조’ 요구에 의해 러시아 공산당에 의한 지도, ‘민주집중제’라고 칭하는 공산당독재나 공산당 내의 상의하달제도, 비합법수단도 포함한 계급투쟁의 의무화 등이 강요됐다. 온건 좌파도 과격파로 변신당한 것이다.


각국 공산당은 명목상 코민테른의 그러나 실질적으로는 러시아공산당의 각국 지부로서의 활동을 계속해야 했고, 중국공산당(1921년)이나 일본공산당(1921년 또는 1922년)처럼 신설되게 됐던 것이다.


1923년 정월 초하루 공산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벨로루시를 합쳐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소련)을 발족시켰는데 실권은 이미 병든 레닌(1924년 1월 사망)으로부터 스탈린에게 옮아가 있었다. 그 후에도 얼마 동안 코민테른은 소련의 다른 관료조직과는 일단 별개 조직이었다. 그러나 코민테른의 첩보부문은 1934년 11월 5일의 특무기관 대개조 때 내무인민위원부(NKVD) 내에 설립된 국가보안국(GBGU)에 흡수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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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6.27.


자유시 참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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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시 참변은 1921년 6월 27일에 러시아 연해주 자유시(이만시, 알렉세예프스크, 스보보드니)에서 일어난 사건이었다. 자유시 사변, 흑하사변(黑河事變)으로도 불린다.


 레닌의 적군(Red Army)이 대한독립군단 소속의 조선 독립군들을 포위, 대부분이 사상당하고 나머지는 모두 강제노역소로 끌려간 사건이다. 조선의 분산된 독립군들이 모두 집결하였었기 때문에, 사실상 조선의 독립군 세력이 모두 괴멸된 사건이다.

독립운동 역사상 최대의 비극이자 불상사라고 일컬어지고 있다.

 

스보보드니(러시아어: Свобо?дный)는 한국어로 자유라는 뜻이다. 러시아 혁명 이전에는 알렉세예프스크였다가, 이후에 스보보드니로 바뀌었고, 한국인들은 의역을 하여 자유시로 불렀다.[1]


[편집] 배경


1920년 봉오동 전투 ·청산리 전투에서 참패를 당한 일본군은 독립군을 토벌한다는 명분하에 간도 참변을 일으켰다. 따라서 한국독립군들은 이동 중에 미산에서 독립군을 재편성하여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하였으며, 독립군은 연해주의 이만(달네레첸스크)에 집결하였다.

 

[편집] 자유시의 독립군들


대한국민의회의 문창범과 자유대대의 오하묵등은 자유시에 군대주둔지를 마련하였다. 그러나 지휘권을 둘러싸고 이르쿠츠크파와 상하이파가 대립했다. 이사건으로 독립군은 대부분이 상하이파 공산당으로 들어갔다.


1921년 6월 27일 갈란다라시윌린은 사할린의용대의 무장해제를 단행하기로 했다. 28일 자유시수비대 제29연대에서 파견된 군대가 사할린 의용대에 접근했고, 이후 제29연대 대장은 사할린의용대 본부에 들어가 복종할 것을 권유했다. 그러나 사할린의용대가 불응하자 공격명령을 내려 무장해제를 단행했다. 자유시사변은 사할린의용군이 볼셰비키군의 포위와 집중공격에 쓰러진 참변이었지만,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 대 상하이파 고려공산당 간의 대립투쟁이 불러일으킨 사건이었다. 이 전투 끝에 전사자 ·도망자를 제외한 864명 전원이 포로가 되었다.

 

[편집] 고등학교 국사교과서


적색군의 감언이설에 속아 자유시로 이동하였고, 적색군을 도와 내전에 참전하였다. 그러나 적색군은 내전에 승리한 후 독립군의 무장을 강제로 해제하려 하였고, 이에 저항하는 독립군을 공격함으로써 무수한 사상자를 낸 이른바 자유시 참변을 야기하였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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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만주의 독립군이 삼둔자전투(三屯子戰鬪), 봉오동(鳳梧洞)전투, 청산리(靑山里)전투 등지에서 일본군의 대부대를 섬멸하자 일본군은 만주에 있는 한국독립군을 완전히 소탕하기 위하여 대병력을 투입, 토벌작전에 나섰다. 이에 독립군들은 전략상 만주를 떠나 러시아령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이동중 중소국경지대인 밀산(密山)에 집결한 독립군 10개부대(즉 북로군정서, 대한독립단, 간도국민회, 대한신민회, 의군부, 혈성단, 광복단, 도독부, 야단, 대한정의군정사)가 이 해 12월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으로 통합하여 총재에 서일(徐一), 부총재에 김좌진(金佐鎭), 홍범도(洪範圖), 조성환(曺成煥), 총사령에 김규식(金奎植), 참모총장에 이장녕(李章寧), 여단장에 지청천(池靑天)이 취임하여 총병력 3,500여명을 지휘하게 되었다.


그러나 밀산에 집결한 독립군은 좀더 활동하기에 유리하고 일본군의 위협이 적은 곳인 흑룡강을 건너 노령 이만(Iman)으로 1921년 1월 들어갔다. 이는 당시 연해주에 거류하고 있던 대한국민의회의 문창범(文昌範), 한창해(韓滄海)와 자유대대 오하묵(吳夏默) 등이 1920년 12월 하바로브스크의 적군(赤軍) 제2군단본부에 교섭하여 자유시에 군사주둔지를 마련하는 한편 독립군을 안내하여 자유시로 집결하도록 하였다.


1921년 3월 중순까지 자유시에 집결한 독립군은 최진동, 허재욱의 통군부, 안무, 정일무의 국민회군, 홍범도, 이청천의 독립군, 서일의 군정서군과 시베리아의 각지에서 무장활동을 하여오던 감뾰똘의 이만군, 최니콜라이의 다만군, 박그레고리의 독립군단, 임호, 고명수의 이항(尼港)군, 오하묵, 최고려 등의 자유대대 등이었고 총병력수 1,900명이었다.


이와같이 수개의 무장군이 자유시에 집결함으로써 대군단의 결성과 군비확장의 기회는 도래하였으나 각기 사정이 다른 여러 부대의 집결은 군권장악의 분쟁을 초래케 했다. 즉 자유대대와 이항군간의 정면대결을 야기시켰으니 자유대대는 대한국민의회를 봉대(奉戴)했고 이항군대는 상해임시정부를 봉대했다.


1921년 1월 상해파의 이용, 채영 등은 한인군사위원회(韓人軍事委員會)를 결성하고 당시 흑룡주(黑龍州)를 관할하는 극동공화국정부(치타정부)와 교섭, 한인무장세력을 관할할 권한을 갖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항군을 사할린 의용대라 개칭하고 자유대대와 대립하였던 것이다. 한편 오하묵의 자유대대는 이르쿠츠크에 있는 국제공산당 동양비서부에 교섭하여 고려혁명군정의회(高麗革命軍政議會)를 조직, 상해파와 대립하였다.


이 시기 레닌정부와 일본은 북경에서 캄차카반도 연안의 어업권에 관한 협정을 체결하였는 바 이때 일본측은 소련영토내에서 한인혁명단체를 육성하는 것은 양국의 우호관계에 지장이 있으므로 이의 취소를 주장하였다. 소련도 혁명후 쇠약해진 국력을 가지고 일본과 불화하는 것은 이롭지 못하다고 판단하고 한인독립군의 무장해제의 약속을 했다. 이리하여 1921년 6월 22일 한인무장독립군에 대하여 무조건 무장해제의 통지를 내렸다.


이에 대하여 사할린 의용대산하의 독립군은 반대 항의하였으나 군정의회는 강제로 무장해제를 단행할 것을 결정하고 동년 6월 28일 2대의 장갑차와 30여문의 기관총을 앞세우고 독립군부대를 공격하였다. 이날의 참변으로 독립군의 피해상황이 자료마다 다르게 기록되어 있는바, ‘재로고려혁명군연혁(在露高麗革命軍沿革)’에는 의용대측 사망 36, 포로 864, 병자로 불참한 자 15, 도망자 34, 행방불명 59명이며, 군정의회측은 사망 2명이라 하였다. 간도방면 11개단체 성토문에는 의용대측 전사 72, 익사 37, 산중에서 힘이 다하여 사망한 자 250, 포로 917명, 군정의회측은 적군 1명만이 사망하였다고 하였고, ‘조선민족운동연감’에는 사망 272, 익사 31, 행방불명 250, 포로 970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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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민테른 제3차 대회 1921. 6. 22~7. 12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 대표단이 참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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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민테른 제3차 대회1921. 6. 22~7. 12에는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 대표단이 참석했다. 대회가 열린 첫날 한국대표단이 작성한 보고서 말미에는 이르쿠츠크 당대회에서 선출된 5명의 대표자들이 서명을 남겼다. 남만춘·한명세·장건상·서초·안병찬이 그들이다. 註1) 이 가운데 두 사람이 의결권을 갖는 정식 대의원으로 인정되었다. 남만춘과 한명세이다. 다른 세 사람은 심의권이나 방청권만 인정된 듯하다.


코민테른 제3차 대회에서 주도적 역할을 수행한 이는 남만춘이었다. 그는 대회석상에서 한국대표단을 대신하여 연설을 했다. 1921년 7월 14일 대회가 종료된 지 이틀이 지난 날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멤버가 확정되었다. 의결권을 갖는 34명의 위원, 심의권을 갖는 16명의 위원이 선출되었는데, 그중에는 한국을 대표한 사람도 있었다. 바로 남만춘이다. 그는 심의권을 갖는 16명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註2)

 

코민테른 제3차 대회와 거의 같은 시기에 국제공산청년회 제2차 대회1921. 7. 9~7. 24도 열렸다. 이 대회에는 이르쿠츠크당 대표자로 조훈과 ‘배달모Пя Дармо’가 파견되었다. 이 중에서 조훈이 주된 역할을 했다. ‘배달모’가 이 회의에 참석했는지 여부는 기록상 확인되지 않는다.

코민테른 대회에서 남만춘이 수행한 역할을 국제공청대회에서는 조훈이 담당했다. 그는 한국문제에 관해 보고하는 한편, 대회 마지막 날에 국제공청 집행위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선임되었다. 국제공청 제2차 대회는 고려공산청년회 중앙기관을 조직할 것을 결의했다. 이 결의를 수행할 전권은 조훈에게 부여되었다.


같은 기간에 노동조합인터내셔널 제1차 대회1921. 7. 3~7. 19가 열렸다. 프로핀테른이라는 러시아어 이니셜로 잘 알려진 이 기관의 창립대회에는 이르쿠츠크파 공산당에서 서초와 이형근李亨根이 파견되었다. 이중에서 이형근의 역할이 어떠했는지는 전혀 알려져 있지 않다. 서초는 조선노동공제회에서 파견한 대표자 자격으로 이 대회에 참석했다. 그는 대회 조직위원회에 신상조사서를 제출했다. 거기에는 노동공제회 회원이 1921년 2월 현재 35,000명이며, 지금까지 국제 노동조합기관과 아무런 연계도 갖지 못했다고 썼다. 註3)


이처럼 이르쿠츠크 공산당 대표단은 1921년 여름 모스크바에서 열린 각종 국제대회에서 눈부신 활약상을 보였다. 국제공산당·국제공청·노동조합인터내셔널 대회에서 의결권을 갖는 정식 대의원으로 활동했다. 뿐만 아니라 대회가 종료된 이후에는 국제기관의 집행부 멤버에 선임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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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2.1.


[ ......  極東人民代表大會 .... 獨立問題에 대하여는 별다른 言及이 없었고

        共產勢力확장에 대하여서만 결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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對쏘外交에서 또 하나 특기할 일은 1922年1月21日부터 2月2日까지 「모스코바」와 「레닌그라드」(당시의 페트로그라드)에서 개최된 極東人民代表大會의 參加였다. 同大會는 極東아시아에서의 共產主義革命을 遂行하기 위한 課題를 토의하는 大會였는데 韓國中國日本蒙古쟈바 러시아 등의 지역에서 144名의 代表가 參加하였다.


韓國은 23個團體에서 선발된 52名이 參加하였는데 이중 重要人物은 李東輝·朴鎭淳·呂運亨·金奎植·羅容均·金始顯·張建相·朴憲永·林元根·金奉淵·金元慶·權愛羅등이었다. 144名의 參加者중 52名이 韓國代表였다는 것은 이 大會가 얼마만큼 韓國問題에 대하여 큰 관심을 가졌던가를 잘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大會에서 채택된 韓國問題의 결의안은 다음에서 볼 수 있듯이 獨立問題에 대하여는 별다른 言及이 없었고 共產勢力확장에 대하여서만 결의하고 있다.

 

一. 韓國에는 工業發展이 미약하여 階級意識이 형성되어 있지 않아 階級運動은 시기가 빠르다.

二. 韓國의 대다수 住民이 低水準의 農民이니 이들이 공명하는 民族獨立運動을 전개하고 階級運動者(共產主義者)는 이 운동을 지도하여야 한다.

三. 上海臨時政府는 名稱만 과대하고 實力이 이에 동반하지 못하여 지금까지 유감이 허다함으로 改革할 필요가 있다.

 

以上의 對쏘外交活動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처음부터 韓·쏘關係는 共產革命을 전제로 한 특수한 접촉이었으며 그 중간에 共產主義者들이 개재되어 많은 물의를 자아냈다. 따라서 共產主義團體의 분열 뿐만 아니라 臨時政府의 운영도 크게 위태롭게 하였다. 쏘련은 1922年共產黨의 再建과 1924年國民代表大會를 통한 共產勢力挽回에 어느 정도 힘을 기울였으나 끝내 실패하였다. 따라서 以後의 對쏘外交關係는 거의 단절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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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韓民國臨時政府와 歐美와의 關係

申載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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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극동민족대회의 소집은 상해의 독립운동가들 사이에 큰 분란을 야기시켰다. 그 대표적인 것이 상해 한인사회에서 3·1 운동 이전부터 가장 활발한 활동을 벌여 온 新韓靑年黨의 분열과 해체였다. 신한청년당에는 경무국장 金九를 포함하여 교통총장 孫貞道, 학무총장 대리 金仁全, 재무차장 李裕弼, 임시의정원 부의장을 역임한 趙尙燮, 상해민단장을 지냈고 李承晩의 상해 통신원인 임시의정원 의원 張鵬 등 임시정부 관계자들이 많이 가입되어 있었다. 신한청년당은 태평양회의 후원회 활동에 열성적이었고, 워싱턴회의가 열리기 직전인 1921년 11월7일에는 美 국무장관 휴즈(Charles E. Hughes)에게 편지를 보내어 회의 참가국들이 한국의 독립을 지원해 줄 것을 촉구하기도 했었다(「月刊朝鮮」 2005년 5월호, 「李承晩, 워싱턴군축회의에 한국대표단장으로 가다」 참조).


 
  이러한 상황에서 당의 핵심인물인 김규식과 여운형이 신한청년당과 공산당 대표 자격으로 극동민족대회에 참가하는 것은 큰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파리강화회의 대표로 파견되었고, 미국에서 구미위원부 위원장으로 활동했던 김규식이 코민테른이 소집한 공산주의자들의 대회에 참가한다는 것은 상해 정국에 큰 충격이었을 것이다. 파리강화회의와 구미위원부 활동에서 느낀 실망이 그로 하여금 러시아행을 결심하게 했을 것으로 짐작되나,13) 그의 이러한 결심은 미국과 서유럽제국을 상대로 한 외교독립론에 실망한 독립운동자들이 소비에트 러시아에 대해서 크게 기대하게 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다.
 


  김규식과 여운형의 모스크바행에 반대하여 이유필·조상섭·김병조·손정도는 신한청년당을 탈당했다.14) 金九도 극동민족대회에 대해서 반대 입장이었다. 일찍이 李東輝의 공산당 입당 권유를 거부하며 그를 질책했던 金九는 김규식과 여운형이 공산주의 활동에 참여하자 金仁全·張鵬·都寅權·安定根·崔明植 등과 함께 탈당했고, 뒤이어 李奎瑞·金偉宅·申昌熙 등도 탈당했다.15) 그리하여 신한청년당은 사실상 해체된 것이나 다름없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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孫世一의 비교 評傳 (39) 한국 민족주의의 두 類型 - 李承晩과 金九
모스크바 極東民族大會와 임시정부의 衰退
 
 

 


         1922.2.13.

 

[ .... 공산당의 세력과 재력을 빌어서 정부제도를 변경하려는 운동이 .......

 ....  우리 국민이 이것을 옳다고 따라 갈 것인가. .......

 ..... 열국이 우리 독립을 더 속히 승인하겠는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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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시의정원은 민국 원년에 본 통령이 미주에 있을 때에 상해에서 당국한 이들의 주동으로 조직하고 헌법을 제정하여 입법기관으로 인정하여 오던 바라. 어찌하여 자기들이 정부에 있을 때에는 남들이 그 의정원을 복종치 않는다고 시비하더니 자기들이 나가서는 그 기관을 무시하고 국민대표회를 소집한다 하느뇨. 이는 계통을 문란케 하며 전후를 모순케 함이니, 자기들이 만든 헌법을 이처럼 멸시하고 어찌 공화사회의 질서가 서기를 바라리오.

만일 그 의정원의 대표자 수효가 부족하든지 혹 대표원의 자격이 불안정하면 헌법을 의지하여 대표를 뽑아 그 의정원을 상당히 만들어서 이를 원만히 조처할 수 있겠거늘, 될 수 없는 딴 단체를 만들어 전체를 문란케 하느뇨.


설령 이와 같이 하여 자기들의 마음대로 일이 잘 된다 하기로 다른 분자도 일어나서 따로 국민대표회라든지 혹 다른 단체를 모아서 이것을 번복하려 하면 무엇으로 방비하겠느뇨. 이는 난국의 길만 열어 놓아 정돈할 도리가 없게 함이니, 조그마한 민회나 민단의 인도자들도 이렇듯 아니하는 바이어늘 어찌 민국의 책임을 맡은 이들이 이와같이 하느뇨.〉
 

  이러한 공박은 안창호를 겨냥한 것이었다. 그는 이어 공산당의 세력과 자금력을 빌어 국민대표회에서 정부제도를 바꾸려하는 기도가 있다고 경고했다.
 

  〈또 한편에서는 공산당의 세력과 재력을 빌어서 정부제도를 변경하려는 운동이 기왕에도 심하였거니와 지금에 더욱 창궐하니, 이는 대세를 헤아리지 못함이 심하도다. 오늘 우리 정부가 어떠한 처지에 있으며 세계 형편이 어떠하건데 이러한 운동으로 현국을 유지할 수 있으리오.

국민대회를 소집하여 공산당의 세력을 빌어 정부제도를 변경하자 하면 우리 국민이 이것을 옳다고 따라 갈 것인가.

이와 같이 정부를 변경하면 열국이 우리 독립을 더 속히 승인하겠는가.

이런 위태한 것을 다 알지 못하고 대사를 방해하려 하니 우리 국민은 더욱 주의할 바로다.〉69)
 


  이러한 주장은 국민대표회의를 지지하는 공산주의 그룹의 내심을 정확히 지적한 것이었다. 그것은 이동휘의 사위 吳永善이 4월10일의 의정원 회의에서 국민대표회의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는 것으로도 짐작할 수 있다.

 
  『의정원이 있는데 또 다른 대표회를 모임은 불가하다 하나, 양원제의 예에 의하여서라도 다시 대표회를 모이지 못할 리가 없고, 또 다른 나라의 예로 보더라도 프랑스는 기성한 국가로 의회가 있는데도 1789년에 다시 국민대표회가 모였었고, 러시아도 케렌스키 내각시대에 모스크바에 국민대표회가 모였으니, 설혹 다른 나라에 이런 예가 없더라도 우리가 독창적으로 새로운 예를 못 낼 것이 없으며…』70)

 
  오영선은 국민대표회의가 프랑스혁명 때의 헌법제정 국민의회나 볼셰비키 혁명 때의 모스크바 소비에트와 같은 것이라고 설명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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孫世一의 비교 評傳 (39) 한국 민족주의의 두 類型 - 李承晩과 金九
 
모스크바 極東民族大會와 임시정부의 衰退
 
 
 
 

 

 

[ ...... 개조파그룹의 일련의 조치가 공산주의자들의 주동으로 추진 ........

 ...... 金九는, 탄핵정국을 공산주의자들의 임시정부 장악 공작으로 인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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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조파그룹의 일련의 조치에 대한 金九의 비판적 인식은 자신이 내무총장직에서 물러난 데 따른 반감 때문만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개조파그룹의 일련의 조치가 공산주의자들의 주동으로 추진되고 있다는 인식에 따른 것이었다.


1923년의 국민대표회의가 상해파 고려공산당과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의 주도권 쟁탈전에 〈순진한 독립운동자들까지도 양파 공산당으로 나뉘어져 혹은 창조, 혹은 개조를 주장하여 전체가 요란하게 되었다〉3)고 했던 金九는, 탄핵정국을 공산주의자들의 임시정부 장악 공작으로 인식했던 것 같다.


그는 국민대표회의가 결렬된 뒤의 상해 정국에 대하여 〈통일이란 미명하에 공산당운동이 끊이지 않고 민족운동자들을 종용하였다〉4)라고도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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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孫世一의 비교 評傳 (44) 한국 민족주의의 두 類型 - 李承晩과 金九 
 
 

 

 


         1923


[ ..... 새 국호와 연호와 헌법 등을 작정하고 새 기관을 조직하야 .......

  ..... 두 개의 국가를 형성하야 영구히 피흘려 싸울 단서를 열었으니, 이것이 누구의 죄인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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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달 동안이나 논란을 거듭하면서 상해 동포사회를 들썽거리게 했던 국민대표회의가 끝내 결렬되자 독립운동자들은 격분했다. 「獨立新聞」의 「일대 화근」이라는 논설이 그러한 분위기를 말해 준다.
 
 
     國民代表會議의 決裂에 격분
 

  〈 우리는 통일을 위하야 대표를 환영하고 축복하였으며, 일반은 대표 그들이 통일을 가져오리라고 기대하고, 대표 그들도 통일을 이룩한다고 揚言(양언)하였도다. 대개 오늘 우리에게 통일이 있으면 삶이 있고 통일이 없으면 죽음이 있음이라. 통일을 이루기 위하야 모였던 국민대표회의는 열린 지 다섯 달이 넘도록 통일을 흑암 중에 매장하고 우리 민족 장래에 한 가지 가공할 큰 화근을 심었도다.


 그것은 국민대표회의에서 창조를 부르짖던 대표들이 … 새 국호와 연호와 헌법 등을 작정하고 새 기관을 조직하야 한 민족 ―― 더구나 국토를 못 찾고 표류하는 민족으로서 두 개의 국가를 형성하야 영구히 피흘려 싸울 단서를 열었으니, 이것이 누구의 죄인가. 이를 감행한 자의 죄인가, 이를 좌시한 자의 죄인가 ..… 〉1)

 
  그러면서 이 논설은 북경정부와 광동정부가 내전을 벌이는 중국의 상황을 보기로 들면서 민족분열의 위험을 경고했다.


 
  또 같은 날짜 「獨立新聞」에는 국민대표회의의 의장과 부의장을 맡았다가 창조파들의 일방적인 회의진행에 반대하고 사퇴한 金東三과 安昌浩의 인터뷰 기사가 실렸다. 두 사람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번에 모였던 국민대표회의가 마침내 파열된 데 대하야는 痛哀(통애)함이 어떻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대회가 파열된 이후에 일부의 집회로 결의한 모든 일에 대하야 일절 책임을 지지 아니하고, 따라서 그 집회에서 산출된 소위 국민위원회와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번 모임이 실패됨에 대하야 우리 자신의 不善無能(불선무능)함을 책하고, 우리의 책임을 이행하지 못한 것을 동포 앞에 사과할 뿐이오. 다른 쪽에 대하야는 시비를 말하고저 아니합니다』


 
  그러면서 두 사람은 또 尹海와 申肅 등 창조파들을 격렬하게 매도한 6월3일자 성명서에 자신들의 이름이 있는 것도 본의가 아니라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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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李承晩과 하와이에 있는 그의 지지자들은 이러한 기사를 보고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태평양잡지」는 먼저 「獨立新聞」의 논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비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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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安昌浩를 신랄하게 비꼬아
 

  그러나 「태평양잡지」의 공격의 표적은 「獨立新聞」이나 창조파들이 아니었다. 표적은 안창호였다. 「태평양잡지」는 안창호를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獨立新聞」과의 인터뷰에서 국민대표회의의 실패를 통석하다고 말한 것은 진정이겠으나, 회의가 결렬된 뒤에 일부의 집회에서 결정된 사항에 대하여 일절 책임을 지지 아니한다고 말한 것은 오늘날의 공화주의 사회에서 용납되지 않는 일이라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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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평양잡지」는 또 안창호가 국민에게 사과한다고 한 말을 들어 그의 「실수」를 강조하면서, 다음과 같이 임시정부에 복종하라고 권고했다.

 
  〈안창호씨는 지금에 와서 국민대표회의 실패를 인연하야 국민에게 사과한다 한지라. 세상에 실수 없는 사람이 없나니, 안씨를 용서하기는 심히 용이하거니와 국사에 모든 손해 끼친 것은 일반국민이 생각지 않을 수 없다.
 

  지금부터는 모든 인도자들이 국사에 대하야 모든 농락권변(籠絡權變)의 수단을 버리고 현 정부 명의하에서 진심으로 광복대업에 종사할진대, 이번에 실패한 것이 도리어 이익이 되리라 하노라.〉5)
 


  이러한 「태평양잡지」의 주장은 창조파들과는 말할 것도 없고, 안창호 그룹과의 타협이나 협력도 단념한 李承晩의 단호한 입장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국민대표회의 이후에 재외동포들 사이에서 임시정부에 대한 인식이 분열되고 있는 것과 관련하여 「태평양잡지」가 한성정부의 정통성을 정면으로 강조하고 나온 것도 그 때문이었다.
 

  〈저 모든 파괴자들은 정부가 없는 줄로 인증하거나 둘 셋이나 혹 열 스물로 인증하고 싶거던 다 원대로 해도 말릴 사람이 없을지며, 다만 나라를 사랑하는 일반국민은 저 야심자들의 선전으로 인연하야 조금도 흔들릴 이치가 없으며, 대한민국 원년에 한성에서 선포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하나밖에 다른 것은 없나니, 이 문제에 대하야 저 파괴자들과 어디까지든지 다투어 가면서라도 그 결국을 보고 말기를 작정이로다.〉6)

 
  그것은 안창호 그룹과 그들에 동조하여 하와이에서 李承晩 반대운동을 벌이고 있는 朴容萬 추종자들에 대한 반격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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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孫世一의 비교 評傳 (41) 한국 민족주의의 두 類型 - 李承晩과 金九 
 

 

 


       1923.8


[ ...... 8월 한정부는 노령으로 옮겨갔으나 레닌 정부의 승인을 얻지 못했다 ........  ]

 

1923년 1월 3일 국민대표회의가 시작되었지만 이 회의는 예비회의의 성격을 지닌 것이었다. 1월 3일까지도 각지의 대표가 모두 참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2월 2일에 이르러 본회의에 들어가게 되었다. 의장인 김동삼이 개회선언을 하였다.


그러나 회의는 임시정부를 해체하고 새로운 정부를 조직해야 된다는 창조파의 주장과, 임시정부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실정에 맞게 효과적으로 개편·보완해야 한다는 개조파와의 주장이 팽팽히 맞서 어려움을 거듭하였다. 3월 13일 임시정부개조안이 상정되면서 양측의 대립은 더욱 격화되었으며, 결국 3월 20일부터 휴회로 들어가 정식회의가 열리지 못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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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상황에서 중도파계 사람들이 창조파로 넘어갔고, 5월 15일 '불통일'의 이유로 서로군정서와 한족회가 대표소환을 명함으로써, 만주대표로서 많은 활동을 한 김동삼·김형식·배천택·이진산 등은 국민대표회에서 탈퇴했다. 그후 윤해가 의장, 신숙이 부의장, 오창환이 비서장에 각각 보선되었으나, 5월 16일 개조파의 조상섭(趙尙燮)·조상벽(趙尙壁) 등 42명이 불참을 선언함으로써 회의는 창조파만의 대회가 되었다.

 

6월 3일 창조파만으로 진행된 회의에서는 국호를 '한'(韓)으로 결정하고 6월 7일 헌법을 통과시켰다. 이에 대해 개조파 위원 57명이 반대성명을 냈으며 임정은 6월 6일 국무령 포고 제3호로 이에 반대했다. 특히 임정 내무총장인 김구는 내무령 제1호로서 국민대표회의의 해산을 명령했다.

 

이에 창조파는 노령으로 돌아가서 새로운 정부를 건설하고자 하였다. 그해 8월 한정부는 노령으로 옮겨갔으나 레닌 정부의 승인을 얻지 못했다. 그결과 한정부를 따라갔던 창조파 인사들은 1924년 2월말을 전후하여 중국지역의 각 단체에 복귀해 개별운동을 전개했다. 창조파와 개조파 이외에 중도파로서 통일적 대단합을 주장하던 인사가 있었으나, 그 수가 극히 적었고, 회의는 6개월간 개최되었으나 본격적인 안건을 처리하지 못한 채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역사적 의의


국민대표회의는 독립운동 단체들의 대표들이 한자리에 모여 독립운동 방략, 나아가서 독립운동의 나아갈 방향 등에 대해 심도있게 토의를 가졌다는 데 그 역사적 의의가 있다. 그러나 결국 국민대표회의는 파벌과 이념 간의 대립으로 폐회되고 말았다. 그후 임정은 임정대로 다시 재건되었고, 중국 동북지역의 독립운동계도 일정 기간 진통을 겪다가 1920년대 중반에 3부(三府:신민부, 정의부, 참의부)로 정리, 재통일되었다. → 대한민국임시정부, 3부통합운동

 

 


       1923.8.


[ ..... 소련 정부는 일본과의 외교관계를 고려하여 자국 영토내에서의 한국인의 임시정부 활동을 인정하지 않았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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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년 1월 3일부터 상해에서 70여 독립단체의 대표 123명이 모여 역사적인 '국민대표회의'를 개최하였다. 이 회의에서는, 지금까지 존속했던 임시정부를 완전 부정하고 노령 간도 등지에 새로운 임시정부를 '창조'할 것인가, 임시정부를 원칙적으로 인정하고 이를 '개조'할 것인가의 문제를 두고 첨예하게 대립하였다. 안창호 등 초기에 임시정부를 수립한 인사들과 여운형 등 신한청년당과 상해교민회의 인사들, 고려공산당의 이르쿠츠크파와 상해파의 일부(김동삼 등)가 개조파로서 활동하였다. 여기에 비해 창조파에는 고려공산당 상해파의 일부와 북경의 독립운동가들, 그리고 신채호 박용만 등 북경 군사통일회와 김규식 등 상해 임시정부의 일부 인사들이 가담하였다. 신채호는 '창조파의 맹장'으로 활약하였다.


 1923년 6월 7일 새 헌법을 제정한 창조파는 이해 8월 노령의 블라디보스톡으로 창조파의 임시정부를 옮겼다. 그러나 소련 정부는 일본과의 외교관계를 고려하여 자국 영토내에서의 한국인의 임시정부 활동을 인정하지 않았다. 따라서 창조파의 임시정부는 활동이 중지될 수 밖에 없었고, 독립운동자들은 흩어지게 되었다. 이것은 신채호 노선의 실패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미 1921년에 대한독립군단이 겪은 '자유시 참변'(흑하 사변)을 알고 있는 신채호는 이때 창조파 임시정부를 인정하지 않는 공산주의에 대해서 더욱 실망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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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8

 

[....  〈제군의 조국 소비에트 러시아〉 .......


  .... 조국 조선을 버리고 .....새 조국으로서 적로의 忠奴가 될 것을 自言自誓하고 ........   ]

 


  〈제군의 조국 소비에트 러시아〉 聲明이 論難 불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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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일독립당 촉성운동이 결렬된 데에는 1928년 12월에 코민테른(국제공산당)이 발표한 이른바 「12월테제」(조선의 농민 및 노동자의 임무에 관한 테제)의 영향도 컸다.

「12월테제」는 코민테른 제6차 대회에서 결정된 조선공산당에 대한 승인을 취소하면서, 한국공산주의자들이 분파주의를 극복하고 노동자 농민의 대중적 기반 위에서 조선공산당을 재건할 것을 지시한 것인데,23) 이 「12월테제」에 입각한 공산주의자들의 국제주의 원칙이 민족주의자들과의 타협을 거부하는 요인으로 작용한 것이다.


 
  1928년 7월에 이르러 유일독립당 촉성운동을 결렬시키는 결정적인 사태가 발생했다. 中東鐵道사건이 그것이었다.

중동철도란 만주지역의 옛 東淸鐵道 가운데에서 일본에 양여한 남만주철도를 제외한 부분을 말하는데, 이 철도노선은 1924년의 중·소협정에 따라서 중국과 소련이 공동으로 관리하고 있었다. 그러나 국민당 정부가 1929년 7월10일에 일방적으로 그 회수를 선언하고 만주의 張學良으로 하여금 이를 강제로 집행하게 했다.

소련은 국민당 정부에 강력히 항의하고 중국대표의 철수를 요구하는 한편, 8월에는 극동군을 편성하여 중·소국경에 집결시키고, 11월 들어서 본격적인 교전이 벌어졌다.24)

 

재중한청 제1지구 상해지부에서는 7월23일에 「檄함. 전조선 피압박대중 제군에게」라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소련을 지원할 것을 촉구했는데,25) 성명서 가운데 있는 〈제군의 조국 소비에트 러시아〉라는 말이 민족주의자들의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민족주의자들은 당장 「청년동맹원 賣母換祖[어미를 팔고 조상을 바꿈]사건비판회」를 열고 이들을 맹렬히 비난하는 「赤鬼忠奴 청년동맹원의 매모환조사건 公布狀」을 발표했다.


 
  〈반만년의 역사를 가진 그들의 조국 조선을 버리고 그들이 귀화한 赤露를 그들의 새 조국으로서 적로의 忠奴가 될 것을 自言自誓하고 있다.


당신들과 같이 살려고만 하고 일하기를 싫어하는 무리들은 餓鬼國(아귀국)에라도 가서 공산주의를 실행하라.


며칠 전 동지 여운형이 검거된 밤에 이른바 공산동지들이 위문한다는 구실로 呂의 집에 들어가서 집기를 절도한 것과 같은 행위가 공산운동이냐?

또는 하숙비를 잘라 먹고서 그 주인 여자를 구타한 것과 같은 행위가 계급투쟁의 하나이냐?〉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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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구

 

[ ..... 민족운동이란 미명하에 민족주의자들을 끌어넣고는 그들의 헤게모니(주도권)로 이를 옭아매려 .......

 ..... 그리고 생긴 것이 ´한국독립당´ .... 이로부터 민족운동자와 공산주의자가 다른 조직을 ........    ]

 


[ ..... 스며들어가 능란한 모략으로 내부로부터 분해시키고 상극을 시켜 .....

  ..... 백광운·김좌진·김규식 등 .... 이 통에 아까운 희생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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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공산주의자들은 입으로 하는 말만 고쳤을 뿐이요, 속은 그대로 있어서 민족운동이란 미명하에 민족주의자들을 끌어넣고는 그들의 헤게모니(주도권)로 이를 옭아매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민족주의자들도 그들의 모략이나 전술을 다 알아서 그들의 손에 쥐어지지 아니하므로 자기네가 설도하여 만들어 놓은 ´유일독립당 촉성회´를 자기네 음모로 깨뜨려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생긴 것이 ´한국독립당´이니 이 것은 순전한 민족주의자의 단체여서 이동녕(李東寧)·안창호(安昌浩)·조완구(趙琬九)·이유필(李裕弼)·차이석(車利錫)·김붕준(金朋濬)·송병조(宋秉祚) 및 내가 수뇌가 되어 조직한 것이었다. 이로부터 민족운동자와 공산주의자가 다른 조직을 가지게 되었다. 이렇게 민족주의자가 단결하게 되매 공산주의자들은 상해에서 할 일을 잃고 남북 만주로 달아났다. 거기에는 아직 동포들의 민족주의적 단결이 분산, 박약하고 또 공산주의의 정체에 대한 인식이 없었으므로, 그들은 상해에서보다 더 맹렬하게 날뛸 수가 있었다.

 

예를 들면 이상룡(李尙龍)의 자손은 공산주의에 충실한 나머지 ´살부회(殺父會: 아비를 죽이는 회)´까지 조직하였다. 그러나 제 아비를 제 손으로 죽이지 않고 회원끼리 서로 아비를 바꾸어 죽이는 것이라 하니 아직도 사람의 마음이 조금은 남은 것이었다.


 이 붉은 무리는 만주의 독립운동 단체인 ´정의부´·´신민부´·´참의부´·´남군정서´·´북군정서´ 등에 스며들어가 능란한 모략으로 내부로부터 분해시키고 상극을 시켜 이 모든 기관을 혹은 붕괴하게 하고 혹은 서로 싸워서 여지없이 파괴하여 버리고 동포끼리 많은 피를 흘리게 하니, 백광운(白狂雲)·김좌진(金佐鎭)·김규식(나중에 박사가 된 김규식은 아니다) 등 우리 운동에 없어서는 안 될 큰 일꾼들이 이 통에 아까운 희생이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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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일지>의 결론 부분은 김 구 선생이 1945년 귀국한 뒤
좌우의 대결이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던 이른바 해방공간에서
“나의 정치이념”이라는 소제목으로 완성한 것입니다.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대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인용하면 이렇습니다.


“자유 있는 나라의 법은 국민의 자유로운 의사에서 오고, 자유 없는 나라의 법은 국민 중의 어떤 한 개인 또는 한 계급에서 온다. 한 개인에게서 오는 것을 ‘전제’ 또는 ‘독재’라 하고 한 계급에서 오는 것을 ‘계급독재’라고 한다.
나는 우리나라가 ‘독재’의 나라가 되기를 원치 않는다. ‘독재’의 나라에서는 정권에 참여하는 계급 하나를 제외하고는 다른 국민은 노예가 되고 마는 것이다.


“모든 ‘계급독재’ 중에도 가장 무서운 것은 철학을 기초로 한 ‘계급독재’다. 지금 공산당이 주장하는 소련식 민주주의란 것은
이러한 독재정치 중에도 가장 철저한 것이어서 독재정치의 모든 특징을 극단으로 발휘하고 있다.
만일 이러한 정치가 세계에 퍼진다면 전 인류의 사상을 마르크스주의 하나로 통일될 법도 하거니와 설사 그렇게 통일이 된다 하더라도 그 것이 불행히 잘못된 이론일진대, 그런 큰 인류의 불행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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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년 여름 젊은 엠엘파 ‘몽치단’이라는 테러조직을 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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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선생의 사상변화에 큰 영향을 끼친 사건이 일어났다. 이른바 ‘몽치단 사건’이 바로 그것이다.

 1929년 여름 중국 길림성 반석현에서 젊은 엠엘파 공산주의자들이 ‘몽치단’이라는 테러조직을 결성하였다. 이후 그들은 유하현 삼원포 일대에서 중국 현지 경찰에 민족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들이 반란을 기도한다는 허위 신고를 하여 정의부 및 국민부 계열의 민족운동가들이 큰 타격을 받은 적이 있었다.


이를 목도한 선생은 점차 사회주의 사상과 그 운동계열의 폐해를 깨닫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확고한 민족주의 사상과 이론을 고수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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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서상파는 <적기단>을, 화요파는 <모험총대>를 조직하여 룡정, 길돈연선, 봉천, 할빈 등지에서 폭동을 계획했으며, 엠엘파는 룡정에서 <맹호단>, <철혈단>을 조직하고 폭동계획을 짰으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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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3개파가 제마끔 만주총국을 세우고 활동하는 국면이 초래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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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이렇게 각 파가 분립되여 령도권을 놓고 파쟁을 벌리기는 했지만 호상 불가상용하지는 않았다”고 하면서 박창욱 선생은 이렇게 피력했다.


“반일민족협동전선문제에 있어서 각파는 민족유일당조직을 창립하기 위하여 힘썼습니다. 또 반일투쟁에서 그들은 함께 일제의 침략죄악을 폭로, 친일조직과 밀정을 타격하였습니다.


혁명조직을 보위하기 위하여 서상파는 <적기단>을, 화요파는 <모험총대>를 조직하여 룡정, 길돈연선, 봉천, 할빈 등지에서 폭동을 계획했으며, 엠엘파는 룡정에서 <맹호단>, <철혈단>을 조직하고 폭동계획을 짰으며 군사인재를 양성하기 위하여 훈련소를 밀산지구에 설립하려고 의연금을 모금하거나 친일대지주의 장원을 습격하는 투쟁을 벌렸습니다. 반봉건투쟁에서도 그들은 호흡을 같이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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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8년부터

 

    [    “합창이 더 민주적이오.”    ]

    [ ..... 피살자가 없는 밤이 이상할 지경이었다 ....... ]

 

    [  ..... 밤마다 16, 17세 정도의 젊은 애들이 공산당 빨치산처럼 돌아다니며 테러를 하고 굉장했어요 .......   ]


    [ ...... 김좌진 장군이 피살되었다. 암살자는 공산당활동 .......    ]

 

 
 김형수의 문익환 평전 11  
[문익환 평전] 사회주의 바람에 해체된 명동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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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혁명 이후 남하해온 사회주의 열풍은 북간도에 닿자 곧 명동 까지 들이닥쳤다. 점령군처럼 진주해온 사회주의 바람에 북간도 한인들도 적지 않게 참여하여 스스로를 일컬어 공산당이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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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이념, 모든 믿음은 자신을 위해 쓰이는 폭력을 어느 정도까지는 신성시한다. 양극에서 형성된 이질적인 경향들이 맞부딪치자 명동은 일대 혼란에 빠지고 말았다. 분쟁은 특히 명동학교의 소유권을 둘러 싸고 심화되었다. 1928년부터 이듬해까지 용정 지역의 사회주의자들은 명동학교를 교회로부터 분리시켜 ‘인민학교’로 만들려고 공작 했다. 처음에는 달콤한 말로 유혹하다가 선전선동이 통하지 않자 점점 거칠어졌다. 학예회 때 독창만 하려 해도 반대하는 소리가 터져나왔다.

 

“합창이 더 민주적이오.”


그들은 하는 일마다 이렇게 나왔다. 학교는 심각한 내분에 휩싸이고 주민들의 발밑에도 이념의 지도가 그려졌다. 학교에서 조선어와 양잠을 가르치는 송창희 선생(송몽규 아버지)은 사회주의에 경도되었고, 면학 분위기를 주도하는 한준명 선생은 교회 편에 섰다. 각 가정에서도 양상은 비슷해서 윤동주의 아버지는 사회주의를 선호하고 윤동주는 빠짐없이 교회에 나오는 것으로 민족주의를 지지했다.

 

더욱 경악스러운 것은 사상의 가열이 부른 폭력인데, 공산당이 밤마다 복면을 하고 들어와 흉기를 들고 위협을 했다. 나중에는 적색 테러 때문에 중국 관헌들이 경비를 섰지만 피살자가 없는 밤이 이상할 지경이었다. 문익환은 그러한 현실에 참담하게 좌절했다.


교회측은 갈수록 열세인데 윤동주랑 셋이서 삼총사처럼 어울리던 소꼽동무마저 사회주의의 편에 서버렸다. 겨우 12세에 소학교 5학년생인 송몽규가 서슴없이 어른들 앞에 나서서 연설을 하고 다녔다. 한때 북간도의 대통령으로 권위를 떨쳤던 김약연 교장도 그 앞에서는 무력했다. 어떻게든 마을을 단합시키려 애썼지만 수습은커녕 세월 유수만 통렬하게 깨달았다. 어느덧 환갑을 넘긴 나이, 중국인의 땅에 와서 마을을 일궈낸 망명자들은 모두 죽거나 늙어 있었다. 그들의 뜻을 이어줄 지 혜와 열정을 갖춘 젊은이가 있어야 하는데 간절한 시기에 문재린이 하필 캐나다에 있었다. 김약연 선생은 뼈아프게 무너졌다.

 

“문재린만 있어도 한 번 싸워보겠는데, 이겨보았자 학교를 맡길 젊은이가 없어서….”

 

일제가 그토록 개명시키려 했던 이름 명동(조선을 밝힌다는 뜻)만이라도 살리기 위해 학교 경영권을 넘겨줬다. 그리고 충격을 받아 노구의 몸으로 목사가 되겠다고 멀리 평양까지 가서 장로교 신학교에 입학해버렸다.


이윽고 명동학교는 인민학교로 바뀌었다. 아침마다 예배를 보던 시간도 없어졌다. 사회주의 청년들에게 미움을 받던 한준명 선생님도 쫓겨났다. 단순한 자연부락이 아니라 하나의 ‘항일애국단체’라고 칭송되던 명동공동체도 해체의 길을 밟아갔다. 이것이 문익환이 체험한 최초의 분단이었다.

 

 

 김형수의 문익환 평전 12  

[문익환 평전] 원산에서 객사한 삼촌 문병린

 

명동학교는 인민학교로 바뀐지 6개월도 지나지 않아서 문을 닫았다. 1929년 9월, 중국의 감독을 받는 현립(縣立) 학교로 강제 편입된 것이다. 그리고 이듬해 1월, 북만주 산지(山之) 역전에서 김좌진 장군이 피살되었다. 암살자는 공산당활동을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민족주의자들은 일제히 경악했다. 문익환도 사회주의가 무엇인지 알기도 전에 질려버렸다. 그때의 분위기를 한준명 선생은 이렇게 회고한다.


"점점 살벌해져갔습니다. 밤마다 16, 17세 정도의 젊은 애들이 공산당 빨치산처럼 돌아다니며 테러를 하고 굉장했어요. 그 애들이 헌 찝차 같은 걸 타고-그때 벌써 그런 게 있었어요-지나간 뒤엔 일껏 추수해 서 쌓아놓은 곡식 낟가리에서 불이 일어나 모두 타버리는 거예요. 지 나가면서 낟가리에다 불씨를 던져놓은 거지요. 경찰력이 그걸 막지 못했어요. 그걸 잡으려고 중국수비대가 뒤늦게 쫓아가며 또 한바탕 북새를 쳤지요.


나는 결국 1930년 12월 30일에 명동 마을을 아주 떴습니다. 이미 공산당 사형선고 명단에 올라 있었고, 더 이상 있다가는 정말 일을 당하겠다고 부모님이 성화를 하셨지요.(...)그 후 다신 간도 에 돌아가지 못했습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민족주의자들은 하나둘 치안이 유지되는 곳으로 빠져 나갔다. 처음에는 임시로 거처들을 옮겼다가 얼마 안 있어 집을 팔고 나중에는 송두리째 마을을 떴다. 문익환네는 1931년 초에 용정으로 이사했고, 윤동주네는 같은 해 늦가을에 용정으로 나갔다. 그와 함께 교회도 주인을 잃었다. 돈도 명망도 없는, 아무것도 갖지 못해서 잃을 것도 없는 사람들만이 예배당을 지켰다.

 

"명동은 그때 혼 빠진 시체와 같았어."(문동환)

 

낙원을 잃은 명동의 어린 지사들은 허탈했다. 송몽규는 자신의 연설이 결과적으로 명동학교를 세운 분들의 입지에 누를 입히고 한준명 선생을 축출하는 데 일조한 것에 대해 이루 말할 수 없이 슬퍼했다 (그 후 송몽규는 죽을 때까지 다시는 사회주의 근처에 얼씬거리지 않 았다).


 아이들끼리 모이면 떠들곤 하던 독립운동 이야기도 절반의 영역에 대해서 침묵하게 되었다. 말을 타고 달릴 때 등에도 붙고 배에도 붙는다는 김일성 장군 이야기도 시들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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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북한 김일성 1912년 4월15일 출생. 별개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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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청년절(8.28)은 조선공산주의청년동맹 결성(1927년)을 기념하는 날이다.

북한은 김일성 주석이 이 청년동맹을 결성했다며 지난 91년 2월1일 중앙인민위원회(1998.9 폐지) `정령'을 통해 8월28일을 청년절로 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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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쓰는 독립운동列傳]Ⅲ러시아편-5. 시베리아 항일영웅 김경천


입력: 2005년 09월 0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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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년 연해주 지역에서 300여명의 통합 빨치산 부대가 조직되고 김경천은 지도자로 선출됐다. 그는 러시아 홍군과 연합해 백군들과 전투를 벌이는 한편 연해주 지역의 무장항일 투쟁을 이끌었다. 일본 육사에서 기병술을 익힌 김경천은 당시 흰 말을 타고 다니며 빨치산부대를 지도, 한인들은 물론 러시아 사람들에게도 ‘백마 탄 김장군’으로 불렸다.


김경천의 명성은 서울에까지 알려져 당시 나혜석의 오빠 나경민은 김경천의 항일활동을 현지 취재, ‘노령견문기’라는 이름으로 동아일보에 연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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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509051742381&code=210000

 

 

 

        1933  모스크바

 

[ .....  미국으로 가게 하여 달라 .......

  ...... 길가에서 기진하여서 쓰러져 죽은 사람을 보았는데 이렇게 굶어 죽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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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의 정치이념이 온축된 《일민주의》의 내용은 4월 20일 저녁에 ‘일민주의 정신과 민족운동’이라는 제목으로 서울중앙방송국의 방송을 통하여 발표되었다. 다음과 같은 서두는 이승만의 일민주의가 절박한 공산주의 비판 이론으로 구상되었음을 말해 준다.

 

“세계 모든 나라의 대소강약을 물론하고 민주주의를 지키려는 자는 현재 생존의 위기를 당하지 않은 나라나 민족이 없는 터이니, 이 이유는 즉 공산당 문제입니다. 공산주의는 본래 빈천한 사람들을 부귀한 사람들과 동등으로 살게 만들자는 주의라 할 것인데, 이 주의가 러시아에서 크게 발전된 이유는 러시아 제정(帝政)시대에 전제정치가 세계에서 가장 심하였던 것이므로 맑스주의를 흡수한 레닌(Vladimir I. Lenin)의 대혁명이 성공되어 러시아 황실을 다 전멸시켜 세계에 참혹한 공산혁명의 역사를 이루게 된 것입니다. …”

 

이승만은 자신이 모스크바에서 경험했던 일을 보기로 들면서 소련의 실상을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1933년에 국제연맹 회의가 열리는 제네바에 갔던 이승만이 시베리아의 한인지도자들을 만날 목적으로 모스크바까지 갔다가 입국을 거부당했던 것은 앞에서 본 바와 같다(《月刊朝鮮》2006년 8월호, <레만湖에서 만난 프란체스카> 참조).


모스크바 방문경험 보기로 蘇聯의 실상 설명

 

“빈민들은 부민(富民)을 타도해야 산다, 무식자는 유식계급을 몰락시켜야 산다, 상놈은 양반을 없애야 산다, 노동자는 재벌가를 정복해야 산다, 농민은 지주를 박멸하여야 산다, 이러한 것으로 언론과 서류를 세계에 전파하고 세포조직을 아니 둔 곳이 없게 되었으니, 영미 등 부강한 나라나 폴란드와 헝가리 같은 빈약한 나라에까지 그 세력이 뿌리를 박게 되어, 사람마다 생각하기를 러시아공산혁명으로 나라도 부강하고 백성들은 풍족하게 자유로 살 수 있는 극락세계로 알 만큼 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 내용을 보면 러시아의 민중 같이 빈곤하고 압박받는 인민은 더 없을 것이니, 내가 13년 전 모스크바에 있을 때에 여관 사무원인 독일인이 나의 방에 들어와서 비밀히 말하기를 매달 미화 8원씩 받아 가지고 일을 보라 하니 살 수 없는 것을 간신히 지낸다 하며 자기의 길을 열어서 미국으로 가게 하여 달라고 간청하는 것을 들었으며,


기차에서 미국인 몇 사람이 처음에는 아무 말도 없이 서로 얼굴만 바라보고 있다가 기차가 러시아 국경을 넘어온 뒤에는 이 사람들이 비로소 숨을 쉬고 그중 한 사람이 말하기를 러시아 내지에 있던 곳을 몰래 들어갔다가 길가에서 기진하여서 쓰러져 죽은 사람을 보았는데 이렇게 굶어 죽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하니, 이것이 오늘 공산당 사람들이 자랑하는 러시아 극락지의 실정입니다. …


거짓 선전에 빠져서 남의 부속품인 노예가 되거나 공산당과 싸워서 민주국의 자유 복락을 누리게 되거나 이 두가지 중 한 가지를 택해야만 될 것이니, 이외에 다른 것은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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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孫世一의 비교 評傳]
한국 민족주의의 두 類型-李承晩과 金九

109.주한미군의 철수와 국회 프락치 사건

 

 

 


        1931   만보산 사건 -- 滿洲事變

 

[ ...... 〈제국주의의 주구 중국 국민당과 군벌을 타도하자〉 .......


 ...... 金九는 한인공산주의자들의 집중적인 공격의 대상이 되었다........

  .....  제국주의와 결탁하는 민단을 타도하고 민단세를 절대로 납부하지 말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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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柳條溝에서 鐵道 폭파하여 滿洲事變 일으켜
 


  만보산 사건이 발생한 지 두 달 뒤인 9월18일 밤에 관동군의 奉天(瀋陽)수비대는 柳條溝에서 일본의 滿鐵(남만주철도회사) 선로를 폭파했다. 유조구는 蔣介石(장개석)과 제휴하고 있던 張學良의 근거지인 北大營 남쪽에 위치해 있었다. 그것은 미리 계획된 관동군의 모략에 따른 것이었다. 관동군은 그 폭파가 현지 중국군의 공격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그것을 구실삼아 전쟁을 도발했다. 이른바 滿洲事變〔9·18戰爭〕이었다.
 

  국민당 정부는 9월21일에 국제연맹에 이를 제소하고, 이튿날에는 상해에서 反日대회를 열어 抗日구국회를 결성했다. 미국 정부는 11월29일에 일본 정부에 강력히 항의했고, 국제연맹은 12월에 영국의 리튼(Victor Robert Lytton)을 단장으로 하는 조사위원회를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이무렵에는 관동군은 이미 만주의 중앙부를 점령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관동군은 전쟁을 도발한 지 다섯 달밖에 되지 않아서 만주의 거의 대부분을 장악했다.
 

  金九는 이때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1년 전부터 우리 임시정부에서는 운동이 매우 침체한즉, 군사공작을 못 한다면 테러공작이라도 하는 것이 절대필요하게 되었다. 그런데 왜놈이 중국과 한국 두 민족의 감정을 악화시키기 위해 이른바 萬寶山事件을 날조하여 조선과 중국에서 대학살사건이 일어나게 되었다. 인천·평양·경성·원산 등 각지에서 조선인 무뢰배들이 일본인의 사주를 받아가지고 중국인을 닥치는 대로 타살하였다.


또한 만주에서 1931년에 9·18전쟁[만주사변]이 일어나 중국이 굴욕적으로 강화했다. 이 전쟁 중에 한인 부랑자들이 왜의 권세를 빌려 중국인에게 극단의 악행을 저질렀기 때문에, 중국인의 무식계급은 물론이고 유식계급 인사들까지도 이따금 민족감정을 말하는 자를 보게 되었다. 사태가 이에 이르니 우리 정부에서는 지극히 우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27)


 
  만보산 사건과 만주사변으로 상해 동포사회는 아연 긴장했다. 만보산 사건이 발생하자 이동녕을 비롯한 임시정부 국무위원들과 흥사단장 安昌浩 등이 임시정부 사무실에서 회의를 열고 대책을 강구했다. 국민정부에 대해 국내 사태가 오로지 일본의 사주와 선동에 의한 것임을 이해시키고, 외무장 趙素昻(조소앙)의 이름으로 중국신문에 성명서를 발표했다. 임시정부는 7월9일자로 상해한인각단체연합회 명의로 국민정부와 중국의 중요단체 앞으로 「通電」을 발송하여 만주의 한인들을 차별 없이 보호하여 일본인들이 농간을 부릴 기회를 주지 말 것을 촉구했다.28)
 


  國民政府와 中國 중요기관에 「通電」 보내
 


  뒤이어 만주사변이 발발하자 임시정부는 9월20일에 긴급회의를 열고 우선 중국의 각 기관과 신문사에 한인단체연합회 명의로 일본을 비판하는 「통전」을 보내고 다음날 상해에 있는 각 단체 대표회의를 소집하기로 결의했다. 이튿날 오후 3시에 임시정부 사무실에서 열린 대표회의에는 임시정부를 비롯하여 僑民團, 丙寅義勇隊, 韓國勞兵會, 興士團, 愛國婦人會 등 9개 단체 대표들이 모였다.

 
  金九는 교민단 대표로 회의에 참석했다. 회의에서는 중국을 지원하고 제국주의 일본을 타도하기 위하여 상해한인각단체연합회를 조직하기로 합의하고, 교민단과 연합회의 공동명의로 上海韓僑전체대회를 소집하기로 했다. 또한 회의 결의에 따라 연합회는 국민정부, 국민당 중앙당부, 중국의 각 신문사에 대하여 국제연맹에 의존하지만 말고 對日전쟁을 결행할 것을 촉구하는 「통전」을 발송했다.29)
 

  병인의용대는 만주사변이 발발하자 극비리에 대원들을 소집하여 그들로 하여금 중국인으로 변장하고 일본총영사관 등 일본 관계 중요기관을 폭파하여 中·日 간의 분규를 확대시킬 것과 각 요소에 비밀 수사반을 잠복시켜 일본탐정을 암살하기로 결의했다.30)
 

  9월25일에 열린 상해한교전체대회에는 300여 명의 동포들이 모였다. 金九의 개회사에 이어 이동녕이 의장이 되어 회의를 진행했다. 일본 만주침략의 배경에 대한 외무장 조소앙의 자세한 보고에 이어 安昌浩, 車利錫, 趙琬九 등의 비분강개한 연설이 있은 다음 6개항의 결의안을 채택했다.


 
  1) 중국 동삼성을 침략하는 일본을 대항할 일, 2) 국내외 동포는 당연히 선언서를 발표하여 한·중 양 민족의 연합전선을 구체적으로 실현케 할 일, 3) 동삼성에 있는 2백만 교포로 하여금 중국 민중과 생사영욕을 같이하여 걸음을 일치케 할 일, 4) 적의 세력하에 있어서 그 침략의 도구와 사냥개가 되는 무리를 소탕할 일, 5) 중국이 일본에 대하여 속히 무력행동을 취하는데 노력할 일, 6) 한·중 양 민족의 국토 광복과 주권 회복에 공동분투하기 위하여 급히 동맹군 조직을 도모할 일.31)
 

  한·중 양 민족의 연합전선 구축의 필요성을 강조함과 아울러 일본의 대륙침략의 앞잡이가 되고 있는 한인들의 척결을 강조하고 있는 점이 주목된다.
 


  韓人共産主義者들의 金九 비판
 


  임시정부도 10월1일자로 「국내외 동포에게 고하노라」는 성명서를 발표하여 〈민족적 혁명역량을 최단기에 집중하여 중원의 호걸과 세계우방의 혁명동지로 더불어 완실한 연합전선을 체결하여 적의 심장을 직도할진저〉라고 호소했다.32)
 


  그러나 이러한 상황에서도 상해에 있는 한국독립운동자들의 태도는 일치하지 않았다. 한인공산주의운동 단체들은 별도로 행동했다. 그들은 등사한 인쇄물을 시내 각처에 살포하여 제국주의 일본이 세계혁명의 총본영인 소비에트연방을 공격하기 위해 제2차 세계대전의 전초전을 개시했다고 말하고, 〈제국주의의 주구 중국 국민당과 군벌을 타도하자〉고 주장했다.33)


金九는 한인공산주의자들의 집중적인 공격의 대상이 되었다. 그들은 上海大韓僑民團稅不納同盟을 결성하고 교민단세 납부거부운동을 벌이고 있었다. 12월28일에는 교민단세 불납동맹 명의로 「재상해 소위 대한교민단의 민단세 강제징수에 대하여 전 상해 한인동포 제군에 檄함」이라는 성명서와 함께, 제국주의와 결탁하는 민단을 타도하고 민단세를 절대로 납부하지 말라는 「선언서」를 발표했다.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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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孫世一의 비교 評傳 (50) 한국 민족주의의 두 類型 - 李承晩과 金九 
 『왜 日本天皇을 안 죽이오』
 

 

 

 

 

 


           1945.8.24.   소련   경원선 차단

           1945.8.25.   소련   경의선 차단

           1945.9.6.     소련   통신 우편 차단


           1945.9.6.     미군   진주

 

 

"경원선 철도 끊기며 분단 시작 너무 어이없고 황당하지 않나"


 2009.06.29


신작 '별들 너머 저쪽과 이쪽' 낸 소설가 이호철

 

"남북 분단은 소련군이 1945년 8월 24일 서울~원산 간의 경원선(京元線) 철도를 차단하면서 시작됐다."


'분단시대'의 실향민 작가 이호철씨(78)는 함경남도 원산이 고향이다. 1945년 광복 당시 10대 소년이었던 이씨는 "지난 60여년간 우리를 고통스럽게 한 남북 분단이 이렇게 '철도 차단'에서 시작됐다는 것은, 당사자인 우리로서는 너무 어이없고 황당하지 않은가"라고 회상했다.


"소련군은 이어 8월 25일 서울~의주 간의 경의선(京義線) 운행도 막았고, 미군이 서울에 진주한 9월 6일에는 전화·전보 등 통신과 우편물 교환을 완전 차단했다. 소련은 처음부터 동구권을 먹었듯이 북한을 자국의 패권주의 틀 속에 편입하려고 했다. 미국은 소련과의 전후(戰後) 처리 합의에 따라 그저 먼 산 쳐다보듯 할 수밖에 없었다."

 
이호철씨는 얼마 전 "분단과 6·25전쟁의 원흉은 스탈린"이라고 강조하면서 허구와 역사의 결합을 통해 남북 분단을 새롭게 조명한 신작 장편소설 《별들 너머 저쪽과 이쪽》을 펴냈다. 이씨는 "문학성보다는 내 경험을 바탕으로 젊은 세대에게 6·25와 남북 관계의 실체를 알려주기 위해 현대사 참고서로 사용할 수 있는 책을 썼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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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09/06/28/2009062800858.html

 

 

        *    당연히 이런 사실은 전국민 공지의 사실이었읍니다.

              또한 전국민이 수시로 얘기하고  성토하던 사실이었읍니다.

 

      

 

 

[ .... 9월 8일 ... 미국 제24군단은 배편으로 인천에 상륙 ....

  .... 9월 9일 경성에 도착 .......    ]

 


재조선미육군사령부군정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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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주둔 초기​


1945년 9월 2일 더글러스 맥아더 유엔군 사령관은 쇼와 천황의 항복 성명을 수용, 일반명령 제1호로 점령지역 연합군의 분할진주를 발표했다. 이어 바로 한반도 남부에 미군을 보내고 일본의 항복문서를 정식으로 받아냈다. 더글러스 맥아더 사령관은 미국 육군 제24군단을 조선 지역 관할 부대로 정한다. 이때의 남한은 점령지의 성격이었다. 다만 더글러스 맥아더는 일본인과 조선인들은 별개로 취급할 것을 특별 지시한다.


9월 8일 존 리드 하지 미육군 중장 휘하의 미국 제24군단은 배편으로 인천에 상륙하였다. 조선인민공화국에서 파견한 여운홍 등은 교섭을 시도하였지만 하지는 이를 거절하고 정식 정부로 승인하지 않았다. 9월 9일 경성에 도착한 하지 사령장관은 포고령 제1호로 "38°선 이남의 조선과 조선민에 대하여 미군이 군정을 펼 것"이라고 정식 포고하고, 9월 12일 아치볼드 V. 아널드 미육군 소장을 미군정장관에 임명하여 군정을 선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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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에 반드시 친소적인 정권을 세워야 한다 .......

  ..... 8월 24일 경원선을 끊은 데 이어 25일 경의선을 끊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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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군이 웅기와 나진을 점령한 직후이며 일제가 항복을 선언한 8월 15일 출간된 소련의 국제문제전문지 ‘노보예 브레미야(새로운 시대)’는 이승만을 비롯한 임정 지도자들을 비난하면서 조선은 소련의 원조를 받아야 독립국가를 세울 수 있다고 주장했다. 북한만은 결코 반소친미의 길로 나아가서는 안 된다는 뜻을 강하게 내비치기도 했다.

 

●더욱 구체화되는 친소정권 수립 의도

 

소련군이 청진 원산 함흥을 점령하고 평양으로 향하던 8월 23일 작성된 소련 외무부 극동제2국의 보고서 역시 같은 논지였다. 조선에서 반소적인 정치인들이 영향력을 가져서는 절대 안 되며, 조선에 반드시 친소적인 정권을 세워야 한다는 것이었다.


비슷한 시기에 소련군은 38선을 공식 봉쇄했다. 8월 24일 경원선을 끊은 데 이어 25일 경의선을 끊어 남북간에 사람과 물자의 왕래를 막았다. 9월 6일엔 남북간의 전화와 통신마저 끊었다. 소련군사령부는 “분단이 빚어낸 심각한 경제문제들에 관해 협의하자”는 미군사령부의 제의를 묵살했다. 미군사령부는 거듭 “석탄의 수송과 전기의 공급 및 통화의 조정 등에 관한 문제들을 협의하자”고 제의했지만 허사였다. 이는 비록 초보적인 수준이지만 분단 상황을 개선하려는 미국의 시도에 소련이 비협조적이었다는 해석을 가능하게 한다.


9월 12일 런던에서 열린 미국 소련 영국의 외무장관 회담을 계기로 소련의 의도는 한층 노골화됐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처음 열린 연합국 외무장관회담의 소련대표단을 위해 소련 외무부 극동제2국이 작성한 ‘조선에 관한 제안’이라는 정책건의서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제주도와 대마도까지 넘본 소련의 야심


이 건의서는 약 2년 후 미소(美蘇)의 한반도 분할점령이 끝난 뒤 부산-진해, 제주도, 인천 등 세 지역을 소련군의 관할 아래 둘 것과 대마도를 조선에 넘겨줄 것을 미국에 요구하라고 제안했다. 만약 첫 번째 제안이 받아들여진 상태에서 대마도가 조선에 넘어온다면 대마도까지 자연스럽게 소련군의 영향권에 들어가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소련은 동해만 아니라 서해도 지배하게 된다. 나아가 제주도는 동해와 서해의 중간지점에 놓여 있으므로 그곳을 소련 극동해군의 핵심기지로 만들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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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ews.donga.com/List/Series_70070000000600/3/70070000000600/20040905/8103336/1

[광복 5년사 쟁점 재조명]<1부>④소련은 야심이 없었을까

기사입력 2004-09-05

 

 

 

 

       1945.12.17.  김일성  민주기지 노선

 

[ ..... 民主基地(민주기지)의 강화는 조국통일의 결정적 담보이다 .......    ]

 

[時論]  南北聯合에 共産化의 함정 있다.

북한 民主化와 남북 자유총선거가 유일한 統一 방안
 

 
 
金正剛 사회批評家
 

 
고려민주연방 통일안은 민주기지 노선의 上層 통일전선테제


 
 1945년 12월17일 朝鮮共産黨北朝鮮分局(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중앙 제3차 확대집행위원회는 「북조선을 통일적 민주·독립국가 건설을 위한 강력한 정치·경제·문화적 민주기지로 變轉(변전)시킬 것」을 결의했고, 同 대회에서 金日成(김일성)은 『民主基地(민주기지)의 강화는 조국통일의 결정적 담보이다』라는 연설을 하여, 이른바 民主基地路線(노선)을 공산당의 한반도 공산화 혁명 전략으로 채택하였다.

 
 민주기지 노선이란 소련 점령지구에 빨치산式 해방구 국가를 만든 후, 이를 거점으로 평화적, 非평화적 무한투쟁을 전개하여, 남한을 병탄함으로써 마지막에는 한반도 전체를 공산화한다는 혁명전략이다. 즉 민주기지 노선은 러시아 공산혁명 과정에서 빨치산 해방구의 경험을 가진 스탈린이, 한반도를 미국과 더불어 분할점령하게 되자, 이 조건을 이용하여 全한반도를 공산화할 목적으로 안출해 낸 교활한 혁명전략이었다.
 


 그후 조선공산당 북조선 분국이 北朝鮮共産黨으로 변하고 공산당이 朝鮮勞動黨으로 변하면서 민주기지 노선은 한반도 공산화 전략의 기본으로 정립되어 오늘에 이른다.
 


 共産黨과 그 연속인 勞動黨은 이 민주기지 노선에 따라, 북한에서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주권기관을 꾸리는 한편, 남한의 해방공간에서 합법 정치투쟁, 신탁통치 지지운동, 2·7 폭력파업, 10·1 폭동, 4·3 폭동, 여순 14연대 반란 등 갖가지의 평화적, 非평화적 방법으로 대한민국을 전복하여 남한마저 공산화하려고 하였고, 여의치 않자 급기야는 인민군으로 남침하여 6·25 사변을 일으켰다.
 

 6·25 사변을 정점으로 하는 모든 폭력혁명의 방법이 실패하자, 노동계급 중심의 지하당 구축, 폭력혁명 등의 下層 통일전선 전술에다 上層 통일전선 전술을 배합하고, 上層 통일전선 전술에 더욱 큰 중점을 두게 되는데, 이 上層 통일전선 전술의 핵심고리에 해당하는 테제가 바로 高麗民主聯邦共和國(고려민주연방공화국) 통일방안이다.

 


 4·19 직후인 1960년 8월14일, 金日成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위원장 겸 내각 수상은 8·15 해방 15주년 경축대회 석상에서 다음과 같이 연설하였다.
 

 『어떠한 외국의 간섭도 없는 민주주의적 기초 위에서 자유로운 남북 총선거를 실시하자.… 아직 남조선 당국이 자유로운 남북 총선을 받아들일 수 없다면 과도적 조치로서 남북조선의 연방제를 제의한다. 즉 남북 조선에 현존하는 정치제도를 그대로 두고 兩 정부의 독자적인 활동을 보장하는 동시에 양 정부 대표로 구성되는 최고민족위원회를 조직하여 주로 남북 조선의 경제·문화 발전을 통일적으로 조절한다.… 남조선에서 미군의 즉시 철퇴를 요구하며, 남북 조선 군대를 각각 10만 또는 그 이하로 축소할 것을 제안한다…』


 
 金日成은 그때 한반도 통일방안으로서 聯邦制(연방제)를 제안하였다.

 
 4·19 이후에 남한에서 좌파가 급팽창하자, 연방제와 군축(=남한의 무장해제)를 지렛대로 하여, 北에는 공산체제를 굳히고 남한에서는 좌파 혁명을 추진하여 병합하는 민주기지 노선을 추진하고자 한 것이다.

 
 1980년 10월10일 노동당 제6차 대회에서 金日成은 다음과 같이 연설했다.

 
 『첫째, 北과 南이 현재 존재하는 사상과 제도를 그대로 인정하고 동등하게 참가하는 민족 통일정부를 수립하고, 그 밑에서 北과 南이 같은 권한과 의무를 지니고 각각 지역 자치제를 실시한다.

둘째, 北과 南이 같은 수의 대표들과 적당한 수의 해외동포 대표들로 최고민족연방회의를 구성하고 거기에서 연방상설위원회를 조직한다.

셋째, 北과 南의 지역정부들은 연방정부의 지도 밑에 둔다.

넷째, 연방국가의 국호는 고려민주연방공화국으로 한다.

다섯째, 고려민주연방공화국은 어떠한 정치·군사적 동맹이나 블럭에도 가담치 않는 중립국이어야 한다.… 北과 南 사이의 군사적 대치 해소와 민족연합군을 조직한다…』
 


 이 고려민주연방제를 한국이 수용하면, 미국을 한반도에서 내쫓고 국군을 민족군에 편입한 후, 현존사상과 제도를 그대로 인정한다는 명분 아래서 수령 독재를 통하여 북한은 金日成·金正日이 완전히 배타적으로 장악하고, 남한에서는 金 일파의 지원을 받는 좌파로 하여금 우파를 누르고 정권을 탈취케 하여, 한반도 전체를 金日成·金正日의 의도대로 요리해 나가겠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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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monthly.chosun.com/
 
김정강  (2000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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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6.3.23.  김일성


[..... 반동분자와 반민주주의적 분자들과의 무자비한 투쟁을 전개하며

     파쇼적, 반민주주의적 정당, 단체 및 개인들의 활동을 절대 금지 ......   ]

 

 

  김일성의 20개조 정강  


     
  김일성이 1946년 3월 23일 발표한 정강. 북한에 설립될 정부의 성격과 기본과업을 명백히 밝힐 필요가 있는 상황에서 김일성은 당의 정치노선을 구체화하여 인민정권의 임무를 밝힌 11개조 당면과업과 20개조 정강을 발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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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조선의 정치경제생활에서 과거 일제통치의 온갖 잔재를 철저히 숙청할 것

2)국내에 있는 반동분자와 반민주주의적 분자들과의 무자비한 투쟁을 전개하며 파쇼적, 반민주주의적 정당, 단체 및 개인들의 활동을 절대 금지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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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대기업소, 운수기관, 은행, 광산, 산림을 국유로 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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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일본인, 일본국가, 매국노 및 계속적으로 소작을 주는 지주들의 토지를 몰수할 것이며 소작을 주는 지주들의 토지를 몰수할 것이며 소작제를 철폐하고 몰수한 일체토지를 농민들에게 무상으로 분배하여 그들의 소유로 만들 것, 관개업에 속한 일체 시설을 무상으로 몰수하여 국가가 관리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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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은 20개조 정강이 김일성이 항일무장투쟁시기 작성한 조국광복회 10대강령을 더욱 구체화하여 발전시킨 철저한 반제반봉건적 민주주의혁명의 강령으로서 조국의 통일독립과 나라의 민주화를 위한 남북조선 전체 인민들의 투쟁의 기치가 되었다고 주장한다.  
 

http://kplibrary.com/nkterm/read.aspx?num=282    
 
 

 


*  1946년 3월 31일  토지개혁 완료 선언

 

 


      1946.1.5.


[ .... 중앙인민위원회는 친일파 민족반역자를 파시스트에 대한 무자비한 투쟁을 더욱 더 강렬하게 전개하는 .......  ]


인공 중앙인민위원회,  모스크바3상회의결의  지지 결정서 발표   


조선일보   1946년 01월 0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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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해방이 우리 민족의 분열로 인하여 자력으로서 그 길이 열리지 못하고 연합국의 원조밑에서 국제문제의 해결과 관련하여 진행되는 때문에 우리는 완전독립의 획득에 있어서 수다한 국제적 제약을 받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금반 모스크바회담이 조선민족해방에 대하여 가지는 의의를 지극히 크게 평가하여 그 규정과 이에 대한 태도를 다음과 같이 결정한다.


첫째로, 그것은 카이로·포츠담양회담의 구체화라는 점에 역사적 의의가 있다. 조선의 독립은 이 회담에서 약속되었으나 그것은 시기도 방법도 결정되지 않은 것 추상적이오 막연한 것이었다. 其後의 국제문제해결과 조선민족의 노력에 의하여 금반 모스크바회담에서 건립의 범위와 방법이 처음으로 구체적 결정을 보게 된 것이다. 즉 적당한 시기가 최고 5년으로 되었고 적당한 순서가 신탁제도를 거치게 된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소위 배신 행위나 기만도 아니오 하등의 국제법 위반이 아니다.


둘째로, 공동위원회는 그 존재가 일본제국주의의 잔재를 소탕하고 조선의 자유독립국가건설을 원조 촉진하는데 사명이 있는 한 완전히 진보적 의사를 갖는다. 또 신탁제도 역시 그 내용이 조선독립을 달성하는 순서, 과도적 방도인 한 충분히 진보적 역할을 하는 것이며 8월 15일 해방으로부터의 위대한 일보전진이다. 그것은 을사조약이나 위임통치와는 전연 다른 것일 뿐 아니라 우리가 통상 이해하는 신탁과도 아주 판이할 것이다.


세째로, 금반 신탁제도는 그 책임이 3國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실로 우리 민족자신속에 있다는 점에서 불가피적 필연이라고 본다. 우리는 아직도 일본제국주의의 잔재를 소탕치 못하여 친일파 민족반역자가 跳梁하고 민족은 분열되어 파시스트 데마고그가 민중의 일부를 현혹하고 반역적 자본가의 태업, 모리배의 준동으로 경제부흥은 곤경에 빠져 있다. 이러한 현상이 3國으로 하여금 우리의 갈망하는 완전독립을 천연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은 깊이 깨달아야 한다.

 

우리는 모든 정세의 판단 역량의 測定밑에서 이상과 같은 규정과 자기비판을 세우고 금반 모스크바회담의 진보적 역할과 현단계에 있어서의 그 필연성, 정당성을 인정하는 동시에 우리 임무를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신탁통치를 규정하고 문제를 해소하고 완전독립을 하루라도 속히 달성하는 유일최선의 방도는 무모한 반탁운동이나 연합국배척이나 독선전제나 내지 테러 폭행이 아니다. 그것은 국제정세의 몽매에서 기인하는 민족자멸책이다. 우리는 도리어 모스크바회담의 결정을 전적으로 지지하고 공동위원회 기타 제기관에 호의적으로 협력하고 임시적 민주주의정부수립에 적극적으로 참가하는 것이야말로 독립을 촉진하는 유일최선의 방법이라고 본다.


이러한 견지에서 중앙인민위원회는 친일파 민족반역자를 파시스트에 대한 무자비한 투쟁을 더욱 더 강렬하게 전개하는 동시에 정보부족으로 인하여 前日에 범한 오류, 반신탁의 태도를 솔직히 극복하고서 신탁반대위원회를 해산하고 세계민주주의의 원칙과 합치되는 강력한 민족전선에 총역량을 집중하는 한편 모스크바회담의 결정에 의한 모든 국제적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가할 것을 천하에 명시한다.”


朝鮮人民共和國中央人民委員會

 

 

 

       1946.1.5.  박헌영


[ ...... 삼국외상회담에서 결정한 것을 옳은 것이라고 믿는다 ......

   ..... 인공 .... 임정도 참가할 수 있으나 개인의 자격으로서만 참가할 수 있다. ..........     ]

 

조공 朴憲永, 당면문제에 대해 내외기자단회견
 
 
게재지명 서울신문
게재일자 1946년 01월 06일
 
 
5일 오전 11시부터 조선공산당 朴憲永은 내부기자단과 회견하고 조선의 탁치문제, 정당통일문제, 군정의 경향등에 대하여 두시간동안 다음과 같은 문답을 하였다.


(問) 공산당은 모스크바會談에 대하여 어떠한 태도를 가졌는가

(答) 삼국외상회담에서 결정한 것을 옳은 것이라고 믿는다. 왜그러냐 하면 첫째 조선문제의 결정은 민주주의원칙에 의하여 독립국가로 발전시키기 위한 결의이기 때문이다. 둘째 신탁문제는 제국주의 침략과정의 식민지화의 의도가 없고 세째는 오늘의 세계문제는 美 英 蘇 3국연합의 민주주의적 지도를 받게 되었다. 그것은 인류의 발전이 높은 과정에 이르러 각국이 다 협력하여 파시즘을 박멸하고 평화를 유지하는 민주주의로서 국제협조정신하에 국제문제가 해결되고 있다. 따라서 조선도 국제관계의 일환으로서 이러한 국제적 노선에 순응해야 비로소 조선독립이 가능한 것이요 또 그 독립이 조선을 위한 독립이요 세계를 위한 독립이 된다.


(問) 조선은 쏘비에트화하지 않는가

(答) 조선은 그런 단계에 이르지 않았다. 조선은 현재 민주주의 변혁과정에서 봉건잔재를 청소하는 과정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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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問) 임정과 인공의 합작은 가능한가

(答) 현재 정당합작으로만 가능하며 임정으로는 불가능하다. 물론 임정도 참가할 수 있으나 개인의 자격으로서만 참가할 수 있다. 현재 조선의 통일은 위로 국제적 압력과 밑으로부터의 하부압력 즉 민중의 압력에 의하여 모스크바원칙으로 통일될 것이다. 우리도 그러나 방향으로 노력하고 있다.


(問) 임정을 主로 한 전번 탁치반대데모에 대한 견해여하

(答) 金九氏의 반탁데모는 큰 과오를 범하고 있다. 왜그러냐 하면 탁치의 본질적 설명을 하지 않고 고의로 일본제국주의의 위임통치제와 혼동시켜 민족을 의혹케 하고 반연합국적 조직을 양성하여 민중을 나쁜 의미에서 혼란케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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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신문은 잇스나 38이남의 소식을 전혀 드를 길이 업는 이북 사람들의 .....]


   1946.3.18.월요일. 동아일보.

 " 라듸오"로 듯는 이남의 소식


평양에서 발행되는 신문은 잇스나 38이남의 소식을 전혀 드를 길이 업는 이북 사람들의 심정은 오즉 답답할 뿐이다. 그러나 지난번 , 미소회담에서 방송파장이 협정되면서부터 라듸오만은 잘들리어 , 서울중앙방송국으로부터 보내는 뉴스로서 자위한다고 한다.

 

 

 


        1946.4.  평양

 


[ ..... 그때였다 아조 가까운 곳에서 총소리가 낫다 ..... 평양의 민심은 말할 수 없는 불안을 품고 이대로 있다가는 이 불안에 눌리워 질식해 죽겟다는 것 .......

 ..... 십오륙세의 소년들을 모아 무□소년단을 조직하야 밤이면 이집저집에 보내여 탐정을 시켜 .........   ]

 

[ ..... 제7인민병원(人民病院)이라는 간판이 .... 작년 10월 10일부터 ....『모-든 것을 인민의 손에 인민의 손으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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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국경 아닌 국경『삼팔선』이북답파기 (3), 1946년 4월 8일자 2면.

 

평안반 본사특파원 KK생, 제비처럼 남국이 “그립다”, 컴은 거리에 총성이 은은

 

평양역에 나렷다 평양、여기가 북조선의 수도인가하는 생각이 화살같이 머릿 속을 스치고 지나간다 개찰구를 나서니 붉은 깃발 붉은 포스타 스타린 수상의 초상 토지개혁의 해설 등이 거리마다 부터있을 뿐만 아니라 소련부인과 소련어린이들까지 길거리에서 만나게 되였다. 기자는 여기가 제2의 적도(赤都)나 아닌가하고 조선의 지도를 펴보고 싶은 충동을 바덧다.


남북이 갈린지 일년도 못되어 평양의 자태는 너무나 엄청나게 소련식으로 변하고 말앗다 검으침침하고 기름끼 하나 돌지안는 평양 쓸쓸한 거리 정포를 벌리고 안저 잇는 상인들의 얼골에는 회색비치 지텃다. 거리에 다니는 사람들의 발거름은 무거웟고 얼굴은 한없이 우울해보였다


거리를 지나다니면 소련군완장과 군모를 파는 조고마한 점포가 눈에 띠인다 장총을 질머진 채 두 소련군이 그 가개 아페서 완장을 골르고 가격을 흥정하고 있다. 새로 설립된 북조선중앙은행(北朝鮮中央銀行) 아플지나 대동교(大同橋)쪽으로 발거름을 옴겻다 여기도 보안서원이 오고가는 시민을 감시하고 있다

 

3월도 중순이 훨신 넘었건만 날세는 그대로 추웟다.『북쪽손님이 오시드니만 날세까지 돌변 햇는 걸』하고 슬쩍 우서버리는 담화가 기자의 귀청을 울렷다 기후까지 소련식이냐 하고 기자는 혼자 우섯다. 강물도 흐렷다 모란봉 을밀대도 바람 속에 맴도는 것 같앗다 이 강을 오르나리든 검은 석탄배 네댓척이 강 건너 사장에 올라안진 채 동민(冬眠)을 게속하고 있다.

 

저녁을 먹고 나서 영화구경이라도 가보자고 하니 친구가 반색을 하며 말린다。바로 그때였다 아조 가까운 곳에서 총소리가 낫다 방안에 안잣든 사람들의 얼굴에는 긴장한 비처 돌앗다 잠깐 침묵이 게속되였다. 부억에서 설거질하든 친구의 부인도 놀랫는지 한참동안 그릇소리가 나지 안앗다『헛방 같은데.』하고 등무의 입에서 판결이 나린 다음에야 안심들하였다.등무는『이러케 마음을 조리고서야 어디 살 수가 있어야지』하고 허두를 내노코 자기 집도  삼팔이남으로 이사가겠다는 것이였다。


이곳에서는 여섯시 반만 되면 상점문은 불이나케 다다버리고 시민은 일곱시가 되면 거리에 나다니기를 꺼린다고 한다. 친구의 부인은『살아야 사는 것 같어야지요』하고『이웃집 순자네도 며칠 전에 서울로 이사갓다고』기자 보고 들으라는 것보다 자기 남편의 의견을 슬적 떠보는 것이였다. 친구는 비단 자기네뿐 만아니라 적어도 평양사람의 대부분이 떠날 수 있으면 삼팔 이남으로 가겟다는 사람들뿐이라고 들려주었다 부인은『벌서 간 사람은 얼만데요』라고 이 사□울 증명한다.


 평양의 민심은 말할 수 없는 불안을 품고 이대로 있다가는 이 불안에 눌리워 질식해 죽겟다는 것이 그 친구의 말의 전부였다。기자는 이 불안의 원인이 어데있는가를 물었드니『기자자격이 없구만 그래 육감으로 알지 못해 이제 총소리도 들엇겟지』라고 말문을 내노코는  보안 행정이 너머나 탄압적이라는 것을 비롯하야 이것저것 들려주었다. 그 중에는 십오륙세의 소년들을 모아 무□소년단을 조직하야 밤이면 이집저집에 보내여 탐정을 시켜온다고 한다。그 말을 듯고 기자는 온몸에 소름이 쪽 끼첫다。(게속)

 


4.국경 아닌 국경『삼팔선』이북답파기【4】,1946년 4월 9일자 2면.

 

평안반 본사특파원 KK생, 지하실 속에서 “애국가”, 민중의 지도자는 어디 갓나?, 전기관(全機關)은 인위(人委)서 운영

 

선교리(船橋里)환차정류소 채 못가서 제7인민병원(人民病院)이라는 간판이 눈에 띠웟다 제7이 있으니 제1도 있겟고 혹은 제10도 있으리라고 생각하였다

가치가든 친구는『이북에 약품이 적어서 통제하는 뜻으로 제7호니 멧호니 부친 줄 아나 그런 것이 아니고 공산주의사회제도를 만들기 위한 준비공작이야 이제 탁아소(托兒所)만 되면  볼장은 다본걸 멀 그래』


기자는 친구의 해설이 억측이기를 바랫다. 그러나 행정기관은 물론 초등교육기관에도 인민학교라고 간판을 내건 것을 보면 삼팔이북의 정치의 지향이 어되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인민! 이 두 글자가 삼팔이북에 류행되기는 8·15도 훨신 지난 10월 중순경이라 한다 작년 10월 10일부터인가 평양에서 개최된 제1차 5도 임시정치위원회(그때는 인민이라는 글자는 석겨 있지 아니하였다) 이후부터 인민이라는 두 글자는 세도하기 시작하였다한다『모-든 것을 인민의 손에 인민의 손으로』라는 구호밋테 나날이 달라가는 평양의 자태를 발견할 수 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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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dongne.donga.com/2013/04/30/d-story%e2%85%a1-%ec%9d%b4%eb%b6%81%eb%8b%b5%ed%8c%8c%ea%b8%b01/

 

 

 

       1946.6.

 

[ ...... 左右가 분열된 것은 獨立促成中央協議에서 共産黨이 탈퇴하고 ..........


  ..... 독립대신에 信託을 받고  某聯邦이 되기를 희망한 때문 .........  ]

 


조선일보 1946년 06월 08일   


한민당, 좌익계열의 남조선단독정부수립설 비난에 대해 반박성명

 


韓國民主黨宣傳部長 咸尙勳은 7일 오전 11시 同黨宣傳部에서 기자단과 회견하고 다음과 같이 담화를 발표하였다.

“李承晩博士의 民族統一機關設置 云云의 연설을 일부에서는 무슨 역적질이나 한 것 같일 선전하니 그 이유를 이해할 수 없다.


첫째, 民族을 분열시킨다고 하나 南北이 분단된 것은 美蘇兩軍의 분할점령 때문이오, 38선의 撤廢를 반대한 것은 누구나 잘 알 것이다. 左右가 분열된 것은 獨立促成中央協議에서 共産黨이 탈퇴하고 그 후 共産黨方面에서 독립대신에 信託을 받고 某聯邦이 되기를 희망한 때문이다.


둘째, 政黨慾에서 나왔다하나, 누구나 自主政權樹立을 희망하는 것은 사실이 아닌가? 왜 共産黨에서는 미리부터 이 統一機關에 참여할 생각을 가지지 않고 있는가?


1) 人民黨中 일부인사가 共産黨에 추종하여 오던 종래의 관계를 끊고 新黨을 조직중에 있다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1) 北朝鮮에서 피난해 온 사람이 65만 지금도 매월 수천 인씩 南下한다. 이 避難民을 親日派·民族反逆者라고 낙인을 찍는 사람이 있으니, 그네들은 이것이 양심적인 朝鮮人의 말인가 자문해 보라.”

 

 

 

 

        1945.10.23  독립촉성중앙협의회 결성 결의

 

[ ...... 마침내 독립촉성중앙협의회라는 강력한 기관을 설치 .....

  ...... 국민당, 건국동맹, 한국민주당, 조선공산당 등 각 정당과 문화단체 ........  


 ......  소집권은 이승만에게 일임 .........     ]

 

매일신보 1945년 10월 25일   


독립촉성중앙협의회 결성 결의

 

이승만은 23일 오후 2시부터 각 정당과 단체의 대표자 두 명씩을 정식으로 인견하고 독립을 위한 기탄없는 의견을 들어 마침내 독립촉성중앙협의회라는 강력한 기관을 설치하고 만장일치 가결하였다. 이 날에 참석한 정당은 국민당, 건국동맹, 한국민주당, 조선공산당 등 각 정당과 문화단체 200여명이 참가하였는데 그들이 부르짖는 것은 주의 주장을 초월하여 힘을 합치자는데 귀일되었고 그러기 위해서 만장일치로 이승만을 회장으로 한 독립촉성중앙협의회 탄생을 보게 된 것인데 이 회에서는 각 당, 각 단체의 대표 1명씩을 선출하여 불원한 후일에 다시 회합할 것을 약속하는 동시에 그 소집권은 이승만에게 일임하고 이 회의 선언을 세계에 공포하여 조선의 진정한 요구를 선전함으로써 세계의 여론을 일으키기로 되었다. 이로써 파란많은 각 당 통일문제도 하나의 방향을 향하여 강력한 키(舵)를 잡게 되었으므로 우리들의 기대하는 바는 진실로 크다고 할 것이다.

 

우리 염원은 하나뿐 힘도 하나로 소리도 하나로 뭉치자.

 

이 날 이승만은 개회벽두 다음과 같은 요지의 희망을 토로하여 참석자 일동에게 다대한 감명을 주었다.

 

“지금 이 자리는 역사를 만드는 모임이다. 내가 만리타국에서 고국으로 돌아올 때 다만 유일한 목적은 여러분과 모여 간담을 헤치고 손을 맞잡고 서로 앞날의 일을 어떻게 해 나갈까를 논하겠다는 그 것이다. 그 순서를 결정하자는 것이 이 모임이다. 나의 이 모임에 바라는 바는 진실로 크다. 여러분도 클 것이다. 이 방안의 공기는 조용하나 세계 각국이 이 한곳을 지금 주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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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는 소리가 너무 많은 탓으로 세계에서 조선이 무엇을 요구하는지 모르고 있다. 그리고 조선의 장래를 걱정하고 있다. 오늘은 그 소리를 하나로 하여 세계에 표명하자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자리에서는 모든 상호간의 감정이나 관계를 청산해 버리고 지금의 조선사람 형편만을 깊이 생각하여야 한다. 이 판에 잘못하면 40년이고 50년이고 또 남의 노예 노릇이나 할 수 밖에 없는 노릇이다.

 

무엇이든지 하나로 만들자! 한 덩어리로 애국정신을 뭉쳐 우리의 원하는 바를 세계에 보여야 한다. 그 기관을 만들자 이 모임은 실로 조선독립을 위하여 우리의 역사에 길이 남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여러분에게 억지로 뭉치라고 강요하지도 않고 또 뭉쳐 만들려 하지도 않는다 당신들이 뭉쳐서 조선사람에게 실감을 가르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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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의 열렬한 열변이 끝나자 각 당대표, 각 단체대표가 속속 일어나서 그 가슴깊이 품고 있는 통일에 대한 경륜과 의견을 토로하였는데 그 중에서 중요한 것을 대략 추려 보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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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朝鮮共産黨 李鉉相, 누구나 조선사람이면 통일을 반대할 사람은 없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통일이란 추상적인 이론보다 국제적 현실과 국내정세를 정확히 또 철저하게 파악하여 조선민중이 다 같이 행복하고 한 깃발 아래 자유독립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통일에는 공산당도 두 손을 들어 찬성한다.

그러나 무조건 하고 통일할 수는 없는 것이다. 50여 정당이 통일을 부르짖으면서도 통일되지 못한다는 것은 행동과 이상이 제가끔 다르기 때문이다. 세계를 통털어 혁명적 단계에 들어간 이 때 조선의 현실적 사정을 무시할 수는 없다.

문제는 둘 중에 하나다. 대한 임시정부를 모셔다가 개조하느냐 그대로 두느냐와 조선인민공화국을 더욱 강화시켜 국내 해외를 망라하여 재조직하느냐에 있다. 인민의 소리가 즉 정치이다. 정치란 편협된 이익만 대표할 수는 없다. 민족의 공통된 생각을 발견하기 위하여 전 민족의 대표가 모여서 좀더 신중히 의논할 필요가 있다.

 


◊ 韓國民主黨 元世勳, 여러말 하지 않겠다. 통일에는 기본조건이 있다. 우리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국가의 최고기관으로 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 기관 아래서 민족적 반역자나 매국노도 처단하여야 하고 북위 38도 문제도 해결하여야 한다. 공산주의든지 민주주의든지 서로 서로 악수할 점이 있으면 지금은 무조건하고 악수하고 나아가자! 그러므로 우리가 시급히 할 일은 민주주의에로 한덩어리가 되고 공산주의도 하나로 힘을 뭉쳐서 조선독립을 위하여 민족적으로 나아가자, 먼저 내부적으로 합치자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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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서 民衆黨과 女子國民黨대표가 무조건으로 모든 것을 이박사께 일임하여 그 지도하에 움직이자는 동의가 있어 만장일치의 박수로 응락을 표하자 이박사께서 그러면 각 당에서 대표 한 사람씩 자당에서 추천하여 그들로 합동위원회를 조직해서 수일내로 모여 모든 구체적 방법을 강구하자는 발언이 계신 데 대하여

 

◊ 國民黨 安在鴻, 오늘의 회합은 각 정당이 통일 운동을 일으키어 독립운동을 촉진시키자는데 의견이 일치되었다. 그러므로 이박사의 말씀대로 각 당에서 자유로 지정한 각당 대표 한사람으로 구성될 회를 獨立促進中央協議會라고 하고 회장에는 이박사를 추대하는 동시에 소집에 대하여는 회장에게 일임하자.

이에 만장일치의 박수로 이를 가결하고 산회하였다.


매일신보 1945년 10월 25일

 

 

 

       1945.9.14.


[ ...... 朝鮮人民共和國 ..... 主席 李承晩 .......    ]

 

매일신보 1945년 09월 15일   


인공의 정부부서 발표


朝鮮人民共和國에서는 지난 6日 全國人民代表會議에서 선출된 인민대표들이 그동안 연일 정부조각에 주력한 결과 다음과 같은 부서를 결정 14日 政府로부터 발표하다.


◊ 朝鮮人民共和國政府 部署


主席 李承晩


副主席 呂運亨

國務總理 許憲

內部部長 金九

(臨時代理 許憲)

外交部長 金奎植

(臨時代理 呂運亨)

軍事部長 金元鳳

(臨時代理 金世鎔)

財政部長 曹晩植

保安部長 崔容達

司法部長 金炳魯

(臨時代理 許憲)

文敎部長 金性洙

(臨時代理 李萬珪)

宣傳部長 李觀述

經濟部長 河弼源

農林部長 康基德

保健部長 李萬珪

遞信部長 申翼熙

(臨時代理 李康國)

交通部長 洪南杓

勞動部長 李胃相

書記長 申康玉

法制局長 崔益翰

企劃局長 鄭栢

 

 

 

       1945.10.17.

 

[ ...... 조선인민공화국 주석 이승만박사는 드디어 귀국하였다.

       3천만 민중의 경앙대망 .... 전국은 환호에 넘치고 .......

  ...... 위대한 지도자에게 충심의 감사와 만강의 환영을 ..........      ]

 

인공 중앙인민위원회, 이승만 귀국환영 담화 발표
 
 
게재지명 매일신보
 
게재일자 1945년 10월 18일
 
 
 
조선인민공화국 중앙인민위원회에서는 제1차 인민대표자대회에서 주석으로 추대된 이승만의 귀국을 환영하여 다음과 같은 담화를 발표하는 동시에 환영준비위원을 선출하고 환영회 준비에 착수하였다고 한다.


“조선인민공화국 주석 이승만박사는 드디어 귀국하였다. 3천만 민중의 경앙대망이었던 만큼 전국은 환호에 넘치고 있다. 우리 해방운동에 있어서의 박사의 위공은 다시 말할 필요조차 없는 것이다. 조선인민공화국 주석으로의 추대는 조선인민 총의이며 이러한 의미에 있어서 해방 조선은 독립조선으로의 위대한 지도자에게 충심의 감사와 만강의 환영을 바치는 것이다.”

 
조선인민공화국 중앙인민위원회에서는 17일 오후 2시 부주석 呂運亨, 국무총리 許憲 양씨가 崔容達, 李康國 양씨를 대동하고 조선호텔로 이박사를 방문하여 환영의 인사를 드린 다음 8월 15일 이후 경과에 대한 보고로 문서와 참고자료를 수교하였다. 원로여정에 피로하실 터이므로 후일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고 일행은 돌아왔다.

중앙인민위원회에서는 주석 이승만박사환영회를 곧 개최하기로 결정하고 다음과 같이 준비위원을 선출하여 그 준비에 착수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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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5.12.30.  조선공산당, 전평, 전농 등 반파쇼공동투쟁위원회

 

[ ..... 이 반동분자들의 갈망하는 신탁통치는 결국 실현되고야 말았다 ......

 ...... 정당정파를 초월하여 전민족의 통일전선을 결성해야 .......

 

 ...... 우리는 신탁통치를 절대 반대한다 .........     ]

 


반파쇼공동투쟁위원회결성총회, 신탁안 철폐요구 성명서 발표   


서울신문, 조선일보 1946년 01월 01일   


반파쇼공동투쟁위원회결성총회, 신탁안 철폐요구 성명서 발표


12월 30일 오전 11시에 서울시 安國洞 서울시 인민위원회 회의실에서 科學者同盟, 京畿道人民委員會, 朝鮮共産黨, 社會科學硏究所, 靑總서울市聯盟, 協同組合全國聯盟, 新聞記者會, 學兵同盟, 全農, 同隣會朝鮮與論社, 全評, 朝鮮敎育革新同盟, 朝鮮革命者救援會, 産業勞動調査所 音樂同盟, 서울시人民委員會, 共靑婦總, 人民黨, 文學盟同 協同組合서울시聯合會, 朝共서울市委員會, 朝鮮勞動黨 등 40餘 단체대표 1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反팟쇼共同鬪爭委員會 결성대회가 성대히 개최되었다.


즉 이날 총회는 金台俊의 개회사에 이어 朝共黨 李鉉相으로부터 동회의 취지설명과 결성에 이르기까지의 경과보고가 있은 후 현하 가장 급선무인 반탁문제와 1월 10일에 소집하기로된 국민대표대회에 관한 것을 중심으로 진지한 토의를 한 결과 신탁통치설 철폐를 요구할 것과 국민대표대회 반대할 것을 가결하고 오후 5시반에 폐회하였다.


그리하여 31일에도 정오부터 서울시 인민위원회 회의실에서 부위원장 洪南杓 사회하에 위원회를 열고 다음과 같은 신탁통치안철폐요구성명과 국민대표대회반대성명을 가결 발표하였다.

그리고 동위원회의 부서는 위원장에 洪命憙, 부위원장에는 洪南杓 金台俊이다.

 

◊ 신탁통치안철폐요구성명서

 

일본 팟쇼가 타도되었다 하더라도 그 잔존세력이 아직도 조선국내의 반동세력과 결탁하여 깊게 뿌리박고 있기 때문에 우리민족의 통일은 방해되고 우리의 당면의 목표인 완전독립도 수행되지 못하고 있다.

그러므로 일찍 미국 극동부 책임자 빈센트같은 사람은 공공연하게 조선을 신탁관리할 것이라 말하였고 국내의 소수 매국매족적 반동분자들은 여기에 영합하여 혹은 당분간 군정기가 필요하다고 하고 혹은 3년후가 아니면 독립되지 못한다고 하였다. 이 반동분자들의 갈망하는 신탁통치는 결국 실현되고야 말았다. 국내에 있어서 진보적인 인사와 정당정파들은 열렬하게 민족통일전선의 旗를 내걸고 노력하여 왔음에도 불구하고 일제의 잔존세력인 친일파 반역분자, 독재정치주의자의 민족분열 선동으로 인하여 통일은 저해되고 따라서 신탁통치를 받는 결과에까지 빠지게 된 것이다.

 

우리는 이런 때를 당면하여 좀더 현실을 正視하고 냉정히 자기를 비판하여서 사리사욕을 버리고 정당정파를 초월하여 전민족의 통일전선을 결성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반동분자들은 또 이 기회를 기화로 하여 반미 반소 반공을 모략하므로써 다시 민족을 분열하고 통일을 부수는 구렁텅으로 민중을 몰아 넣으려고 한다. 여기서 우리는 신탁통치를 절대 반대한다. 이 신탁의 철폐를 위하여는 이 민족통일전선을 좀더 공고하게 결성하여야 할 것을 또 다시 제창한다.(서울신문 1946. 1. 1)

 

 

 


        1946.1.5.


[ .... 중앙인민위원회는 친일파 민족반역자를 파시스트에 대한 무자비한 투쟁을 더욱 더 강렬하게 전개하는 .......  ]


인공 중앙인민위원회,  모스크바3상회의결의  지지 결정서 발표   


조선일보   1946년 01월 0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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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해방이 우리 민족의 분열로 인하여 자력으로서 그 길이 열리지 못하고 연합국의 원조밑에서 국제문제의 해결과 관련하여 진행되는 때문에 우리는 완전독립의 획득에 있어서 수다한 국제적 제약을 받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금반 모스크바회담이 조선민족해방에 대하여 가지는 의의를 지극히 크게 평가하여 그 규정과 이에 대한 태도를 다음과 같이 결정한다.


첫째로, 그것은 카이로·포츠담양회담의 구체화라는 점에 역사적 의의가 있다. 조선의 독립은 이 회담에서 약속되었으나 그것은 시기도 방법도 결정되지 않은 것 추상적이오 막연한 것이었다. 其後의 국제문제해결과 조선민족의 노력에 의하여 금반 모스크바회담에서 건립의 범위와 방법이 처음으로 구체적 결정을 보게 된 것이다. 즉 적당한 시기가 최고 5년으로 되었고 적당한 순서가 신탁제도를 거치게 된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소위 배신 행위나 기만도 아니오 하등의 국제법 위반이 아니다.


둘째로, 공동위원회는 그 존재가 일본제국주의의 잔재를 소탕하고 조선의 자유독립국가건설을 원조 촉진하는데 사명이 있는 한 완전히 진보적 의사를 갖는다. 또 신탁제도 역시 그 내용이 조선독립을 달성하는 순서, 과도적 방도인 한 충분히 진보적 역할을 하는 것이며 8월 15일 해방으로부터의 위대한 일보전진이다. 그것은 을사조약이나 위임통치와는 전연 다른 것일 뿐 아니라 우리가 통상 이해하는 신탁과도 아주 판이할 것이다.


세째로, 금반 신탁제도는 그 책임이 3國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실로 우리 민족자신속에 있다는 점에서 불가피적 필연이라고 본다. 우리는 아직도 일본제국주의의 잔재를 소탕치 못하여 친일파 민족반역자가 跳梁하고 민족은 분열되어 파시스트 데마고그가 민중의 일부를 현혹하고 반역적 자본가의 태업, 모리배의 준동으로 경제부흥은 곤경에 빠져 있다. 이러한 현상이 3國으로 하여금 우리의 갈망하는 완전독립을 천연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은 깊이 깨달아야 한다.

 

우리는 모든 정세의 판단 역량의 測定밑에서 이상과 같은 규정과 자기비판을 세우고 금반 모스크바회담의 진보적 역할과 현단계에 있어서의 그 필연성, 정당성을 인정하는 동시에 우리 임무를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신탁통치를 규정하고 문제를 해소하고 완전독립을 하루라도 속히 달성하는 유일최선의 방도는 무모한 반탁운동이나 연합국배척이나 독선전제나 내지 테러 폭행이 아니다. 그것은 국제정세의 몽매에서 기인하는 민족자멸책이다. 우리는 도리어 모스크바회담의 결정을 전적으로 지지하고 공동위원회 기타 제기관에 호의적으로 협력하고 임시적 민주주의정부수립에 적극적으로 참가하는 것이야말로 독립을 촉진하는 유일최선의 방법이라고 본다.


이러한 견지에서 중앙인민위원회는 친일파 민족반역자를 파시스트에 대한 무자비한 투쟁을 더욱 더 강렬하게 전개하는 동시에 정보부족으로 인하여 前日에 범한 오류, 반신탁의 태도를 솔직히 극복하고서 신탁반대위원회를 해산하고 세계민주주의의 원칙과 합치되는 강력한 민족전선에 총역량을 집중하는 한편 모스크바회담의 결정에 의한 모든 국제적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가할 것을 천하에 명시한다.”


朝鮮人民共和國中央人民委員會

 

 

 

       1946.1.5.  박헌영


[ ...... 삼국외상회담에서 결정한 것을 옳은 것이라고 믿는다 ......

   ..... 인공 .... 임정도 참가할 수 있으나 개인의 자격으로서만 참가할 수 있다. ..........     ]

 

조공 朴憲永, 당면문제에 대해 내외기자단회견
 
 
게재지명 서울신문
게재일자 1946년 01월 06일
 
 
5일 오전 11시부터 조선공산당 朴憲永은 내부기자단과 회견하고 조선의 탁치문제, 정당통일문제, 군정의 경향등에 대하여 두시간동안 다음과 같은 문답을 하였다.


(問) 공산당은 모스크바會談에 대하여 어떠한 태도를 가졌는가

(答) 삼국외상회담에서 결정한 것을 옳은 것이라고 믿는다. 왜그러냐 하면 첫째 조선문제의 결정은 민주주의원칙에 의하여 독립국가로 발전시키기 위한 결의이기 때문이다. 둘째 신탁문제는 제국주의 침략과정의 식민지화의 의도가 없고 세째는 오늘의 세계문제는 美 英 蘇 3국연합의 민주주의적 지도를 받게 되었다. 그것은 인류의 발전이 높은 과정에 이르러 각국이 다 협력하여 파시즘을 박멸하고 평화를 유지하는 민주주의로서 국제협조정신하에 국제문제가 해결되고 있다. 따라서 조선도 국제관계의 일환으로서 이러한 국제적 노선에 순응해야 비로소 조선독립이 가능한 것이요 또 그 독립이 조선을 위한 독립이요 세계를 위한 독립이 된다.


(問) 조선은 쏘비에트화하지 않는가

(答) 조선은 그런 단계에 이르지 않았다. 조선은 현재 민주주의 변혁과정에서 봉건잔재를 청소하는 과정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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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問) 임정과 인공의 합작은 가능한가

(答) 현재 정당합작으로만 가능하며 임정으로는 불가능하다. 물론 임정도 참가할 수 있으나 개인의 자격으로서만 참가할 수 있다. 현재 조선의 통일은 위로 국제적 압력과 밑으로부터의 하부압력 즉 민중의 압력에 의하여 모스크바원칙으로 통일될 것이다. 우리도 그러나 방향으로 노력하고 있다.


(問) 임정을 主로 한 전번 탁치반대데모에 대한 견해여하

(答) 金九氏의 반탁데모는 큰 과오를 범하고 있다. 왜그러냐 하면 탁치의 본질적 설명을 하지 않고 고의로 일본제국주의의 위임통치제와 혼동시켜 민족을 의혹케 하고 반연합국적 조직을 양성하여 민중을 나쁜 의미에서 혼란케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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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6.1.5.

 

[ ...... 결국 가까운 장래에 조선을 소련방의 일연방국으로 하고저 조선을 소련화하게 되는 것이 아닌가?

      대답  그러타고 볼 수 있다 .........    ]

 

1946.2.19. 동아일보


미국기자와 박헌영씨의 문답

정확한 사실임이 조사로 판명

 

군정청 공보국 발표


미국인 기자에 대한 비난을 풀기 위하야 다음의 기사를 발표하는 바이다.

지난 1월 26일 박헌영 씨는 뉴욕 타임스기자 존스톤 씨를 조선으로부터 방축하기를 요구한다는 공문서를 서명날인하야 미군사령관에게 제출하얏고 동시에 조선인기자 수명도 존스톤씨에게 대한 비난서에 각각 서명하였다.


즉 박씨는 1월 5일 기자단회견석상 자기가 발표한 성명서 중에 존스톤 씨는 완전히 공산당 당수의 성명을 오해하야 인용하얏다는 사실을 특별히 비난하얏다.미군사령관은 이 비난을 대단히 중대한 사건이라고 생각하고 백반 조사를 시켯다.조사한 결과의 사실은 다음과 같다.

 

조선공산당 정식대변자로 박씨는 1월 5일 기자단 회견에 미국인 기자를 초청하였다.

3명의 미지특파원 존스톤 씨 마속크씨 콘월 군조는 미군사령부 피알오 장교 턱카 대위와 동반하야 정식으로 기자단회견에 출석하였다.

미국인기자회견석상에서는 모다 영어를 사용하였다.당시 기록한 턱카 대위와 존스톤씨의 수기중에는 질문한 것과 대답한 것이 있는 데 그 내용은 정확한 것으로 콘월 군조도 기후에 그 정확성을 인정하였다.즉 박씨와 조선인기자의 비난중에 인용된 내용은 다음과 같은 데 이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질문 (존스톤) 조선을 소련 일국의 신탁통치로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어떠케 생각하는가?

대답 (박씨 영어로) 나는 그 문제에 대해서는 아무 이의(?)가 없다. 즉 우리는 소련 일국 신탁통치에 이의(?)가 업다.

 

질문 장래 조선의 정치적 발전과정에 대한 의견여하

대답 우리는 소련화한 사회주의적 노선에 따라 10년 내지 20년 안에 자주독립민주주의국가로 발전되기를 바란다.

 

질문 이것은 결국 가까운 장래에 조선을 소련방의 일연방국으로 하고저 조선을 소련화하게 되는 것이 아닌가?

대답 그러타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지금 불가능하다

 

질문  왜 지금은 불가능하냐?

대답  현재 조선인은 이것을 조와하지 않는다. 그리고 또 지리적으로 보아서 지금 소련방에 포함되는 것은 불가능할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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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1.5.  조만식 고려호텔에 연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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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12월 27일 모스크바 결정이 알려진 직후, 조만식은 평안남도 인민위원회 확대회의에서 신탁문제를 둘러싸고 소련과 공개적으로 충돌했다.[50] 소련 측은 1946년 1월 2일, 4일, 5일의 세차례에 걸쳐 조만식에게 새로 수립될 정부의 대통령 자리까지 제시하면서 모스크바 협정을 지지할 것을 요청했다.[51][52]김일성도 1945년 12월 말 이후 빈번하게 조만식을 방문하였으며, 조만식의 오랜 제자인 최용건은 조만식을 19번을 찾아가 설득하였지만 조만식은 끝내 모스크바 의정서에 대한 지지를 거부하였다.[52][51]


1946년 1월 5일 이후에도 개신교인 중심의 조선민주당을 창당하여 반탁 운동을 벌이던 조만식은 뜻을 바꾸지 않았고, 신탁통치 협정문 안건에 관한 사회를 거부함으로써 북조선에서 정권을 잡은 김일성 세력에 의해 곧바로 인민정치위원회 위원장에서 축출된 뒤 조만식은 결국 1월 5일부터 연금상태에 처하게 되었다.


북한은 내외 방문객들에게 조만식이 고급호텔에서 좋은 대접을 받고 있다고 선전했지만, 이는 명백한 연금이었다. 조만식이 물러난 조선민주당 위원장에는 빨치산파 최용건이, 부위원장에는 홍기주가 선출되었다. 이렇게 공산주의자들이 주도권을 쥠으로써 반탁운동의 중심이던 조선민주당은 찬탁의 거점으로 돌아서게 되었다.[53]


[편집] 정계 축출 이후
[편집] 연금생활

 
46년 1월 5일 고려호텔에 연금된 것을 시작으로 한국 전쟁 때까지 투옥되어 있었다. 1월 23일 김일성은 조만식을 반동으로 규탄하고 조선민주당을 접수, 2월 24일 최용건을 북조선민주당 당수로 임명하였다.[43]


한편 조만식이 조선민주당에서 강제 축출되자 최용건은 '조만식이 일본인의 신민이 되는 것을 칭찬하고, 격려한 사이비 민족주의자라고 격렬하게 성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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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6.1.22.  타스통신

 


[ ...... 미군정당국은 .... 조선신탁통치제를 반대하려고  반동분자에게 선동중 ........


 ...... 僞政府 金九, 李承晩은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을 방해 .......     ]

 

 타스통신, 미국이 배후조종하는 남한의 반탁운동을 비난
 
 
게재지명 동아일보
게재일자 1946년 01월 25일
 
 

[모스크바22日發AP合同] 평양발 타스통신 來電에 의하면 남조선을 점령하고 있는 미군정당국은 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 결정된 조선신탁통치제를 반대하려고 반동분자에게 선동중이라고 비난하였다. 그리고 남조선에 있는 반동신문은 반소적 선전을 계속하고 있고 또 美·蘇·英이 결정한 5개년간 신탁통치안에 대하여 대대적으로 반대하고 있다. 이 반동적 세력을 암암리에 원조하고 있는 미국의 그 정부가 삼상회의에서 스스로 결정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반대한다는 것은 가소로울 일이다.

또 僞政府 金九, 李承晩은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을 방해하라는 행동을 취하고 조선의 내란을 야기하려고 노력하고 있으며 소련에 대하여 열렬한 적의심을 표시하고 있다.

 
그리고 1월 12일 조선의 반동적 세력단체는 시위행렬을 거행하였는데 이때에 정직하고 진실한 애국자를 중상하고 또 공공연히 공산당수를 살해할 것을 주장하고 또 소련을 조선민중의 적이라고 부르짖고 소련에 대한 적개심을 선동키 위하여 소련을 중상하였다. 또 남조선에 있는 반동적 신문은 이와 같은 선전을 매일 게재하나 군정당국은 이를 신칙치 아니 한다고 하였다.

 

 

 

 

[ ...... 1946년 봄부터 북한의 방방곡곡에는

      ‘殺人强盜團의 두목 金九·李承晚을 타도하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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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봄부터 북한의 방방곡곡에는 ‘殺人强盜團의 두목 金九·李承晚을 타도하라!’는 구호가 나붙었다. 이러한 선동구호는 이들이야말로 3·1운동 이전부터 독립운동에 투신해 온 민족주의진영의 지도자들이었으며 反託운동의 중심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소련군 사령부와 김일성은 이들을 장차 한반도를 共產主義化하는데 있어서 최강의 적으로 보고 그 명성과 권위를 추락시켜야 할 필요에서 이들에 대한 가장 격렬한 욕설을 퍼붓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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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구

 

 

[ ..... 모든 ‘계급독재’ 중에도 가장 무서운 것은 철학을 기초로 한 ‘계급독재’다........


  ..... 공산당이 주장하는 소련식 민주주의란 것은 이러한 독재정치 중에도 가장 철저한 것 .......       ]

 

 

백범 김구와 공산주의, "‘가장 무서운 ‘독재’는 어떤 ‘주의,’를 기초로 하는 ‘계급독재’"
 

 


글      이동복 前 국회의원


2018-0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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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공산주의에 대한 백범의 생각을 알아보는 것은 사실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백범이 스스로 저술한 그의 자서전 <백범일지>에 그의 생각이 소상하게, 진솔하게 기술되어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백범은 ‘임시정부’를 이끄는 과정에서 공산주의자들에게 너무나도 괴로움을 당한 나머지 “공산주의자들과는 아무 것도 더불어 함께 할 수 없다”는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이같은 백범의 생각은 <백범일지>(서울; 범우사, 2002.8.5, 3판3쇄)의 관련 대목들을 보면 알 수 있다. 다음은 그 인용이다.

 


 
  『기미년, 즉 대한민국 원년에는 국내나 국외를 막론하고 정신이 일치하여 민족 독립운동으로만 진전되었으나 당시 세계 사조의 영향을 따라서 우리 중에도 점차로 봉건이니, 무산혁명이니 하는 말을 하는 자가 생겨서 단순하던 우리 운동선에도 사상의 분열, 대립이 생기게 되었다. 임시정부 직원 중에도 민족주의니, 공산주의니 하여 음으로 양으로 투쟁이 개시되었다. 심지어 국무총리 이동휘(李東輝)가 공산혁명을 부르짖고 이에 반하여 대통령 이승만(李承晩)은 데모크라시를 주장하여 국무회의 석상에서도 의견이 일치하지 못하고 대립과 충돌을 보는 기괴한 현상이 중생첩출하였다. 예하면, 국무회의에서는 러시아에 보내는 대표로 여운형(呂運亨), 안공근(安恭根), 한형권(韓亨權) 세 사람을 임명하였건마는, 정작 여비가 손에 들어오매 이동휘는 제 심복인 한형권 한 사람만을 몰래 떠나보내고 한이 시베리아를 떠났을 때쯤 하여 이것을 발표하였다. 이동휘는 본래 강화진 위대참령으로서 군대 해산 후에 해삼위(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가 이름을 대자유(大自由)라고 행세한 일도 있다.

 

 
  하루는 이동휘가 내게 공원에 산보하기를 청하기로 따라갔더니, 조용한 말로 자기를 도와 달라 하기로 나는 좀 불쾌하여서 내가 경무국장으로 국무총리를 호위하는 데 내 직책에 무슨 불찰이 있느냐고 물었다. 이 씨는 손을 흔들며, “그런 것이 아니라, 대저 혁명이라는 것은 피를 흘리는 사업인데,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독립운동은 민주주의 혁명에 불과하니 이대로 독립을 하더라도 다시 공산주의 혁명을 하여야 하겠은즉 두 번 피를 흘림이 우리 민족의 대불행이 아닌가, 그러니 적은이(아우님이라는 뜻이니 이동휘가 수하 동지들에게 즐겨 쓰는 말)도 나와 같이 공산혁명을 하는 것이 어떤가” 하고 내 의향을 묻는 것이었다.
 


  이에 대하여 나는 이 씨에게, “우리가 공산혁명을 하는 데는 ‘제3국제공산당’의 지휘와 명령을 안 받고도 할 수 있습니까?” 하고 반문하였다. 이 씨는 고개를 흔들며, “안 되지요” 한다. 나는 강경한 어조로, “우리 독립운동은 우리 대한민족 독자의 운동이요, 어느 제3자의 지도나 명령에 지배되는 것은 남에게 의존하는 것이니 우리 임시정부 헌장에 위반되오. 총리가 이런 말씀을 하심은 대불가(大不可)니 나는 선생의 지도를 받을 수가 없고, 또 선생께 자중하시기를 권고하오” 하였더니 이동휘는 불만한 낯으로 돌아갔다.
 


  이 총리가 몰래 보낸 한형권이 러시아 국경 안에 들어서서 우리 정부의 대표로 온 사명을 국경 관리에게 말하였더니 이것이 모스크바 정부에 보고되어, 그 명령으로 각 철도 정거장에는 재류 한인 동포들이 태극기를 두르고 크게 환영하였다. 모스크바에 도착하여서는 러시아 최고 수령 레닌이 친히 한형권을 만났다. 레닌이 독립운동 자금은 얼마나 필요하냐 하고 묻는 말에 한은 입에서 나오는 대로 200만 루블이라 대답한 즉 레닌이 웃으며, “일본을 대항하는 데 200만 루블로 족하겠는가?” 하고 반문하므로 한은 너무 적게 부른 것을 후회하면서 본국과 미국에 있는 동포들이 자금을 마련하니 당장 그만큼이면 된다고 변명하였다. 레닌은, “제 민족의 일은 제가 하는 것이 당연하다” 하고 곧 외교부에 명하여 200만 루블을 한국 임시정부에 지불하게 하니 한형권은 그 중에서 1차분으로 40만 루블을 가지고 모스크바를 떠났다.
 


  이동휘는 한형권이 돈을 가지고 떠났다는 기별을 받자 국무원에는 알리지 아니하고 또 몰래 비서장이요, 자기의 심복인 김립(金立)을 시베리아로 마중 보내어 그 돈을 임시정부에 내놓지 않고 직접 자기 손에 받으려 하였으나, 김립은 또 제 속이 따로 있어서 그 돈으로 우선 자기 가족을 위하여 북간도에 토지를 매수하고 상해에 돌아와서도 비밀히 숨어서 광동 여자를 첩으로 들이고 호화롭게 향락 생활을 시작하였다. 임시정부에서 이동휘에게 그 죄를 물으니 그는 국무총리를 사임하고 러시아로 도망하여 버렸다.
 


  한형권은 다시 모스크바로 가서 통일운동의 자금이라 칭하고 20만 루블을 더 얻어 가지고 몰래 상해에 돌아와 공산당 무리들에게는 돈을 뿌려서 소위 국민대표대회라는 것을 소집하였다. 그러나 공산당도 하나가 못 되고 세 파로 갈렸으니 하나는 이동휘를 수령으로 하는 상해파요, 다음은 안병찬(安秉贊)·여운형을 두목으로 하는 일쿠츠크파요, 그리고 셋째는 일본에 유학하는 학생으로 조직되어 일인 복본화부(福本和夫)의 지도를 받은 김준연(金俊淵) 등의 엠엘(ML)당파였다. 엠엘당은 상해에서는 미미하였으나 만주에서는 가장 맹렬히 활동하였다.
 

 

  있을 것은 다 있어서 공산당 외에 무정부당까지 생겼으니 이을규(李乙奎)·이정규(李丁奎) 두 형제와 유자명(柳子明) 등은 상해, 천진 등지에서 활동하던 아나키스트(무정부주의자)의 맹장들이었다. 한형권의 붉은 돈 20만 원으로 상해에 개최된 국민대회라는 것은 참으로 잡동사니회라는 것이 옳을 것이었다. 일본·조선·중국, 아령 각처에서 무슨 단체 대표, 무슨 단체 대표 하는 형형색색의 명칭으로 200여 대표가 모여 들었는데. 그 중에서 일쿠츠크파, 상해파 두 공산당이 민족주의자인 다른 대표들을 서로 경쟁적으로 끌고 쫓고 하여 일쿠츠크파는 창조론, 상해파는 개조론을 주장하였다. 창조론이란 것은 지금 있는 정부를 해소하고 새로 정부를 조직하자는 것이요, 개조론이라는 것은 현재의 정부를 그냥 두고 개조만 하는 것이었다. 이 두 파는 암만 싸워도 귀일이 못 되어서 소위 국민대표회는 필경 분열되고 말았고, 이에 창조파에서는 제 주장대로 ‘한국정부’라는 것을 ‘창조’하여 본래 정부의 외무총장인 김규식(金奎植)이 그 수반이 되어서 이 ‘한국정부’를 끌고 해삼위로 가서 러시아에 출품하였으나, 모스크바가 돌아보지도 아니하므로 계불입량(計不入量)하여 흐지부지 쓰러지고 말았다.
 


  이 공산당 두 파의 싸움 통에 순진한 독립운동자들까지도 창조니 개조니 하는 공산당 양파의 언어 모략에 현혹하여 시국이 요란하므로 당시 내무총장이던 나는 국민대표회에 대하여 해산을 명하였다. 이것으로 붉은 돈이 일으킨 한 막의 희비극이 끝을 맺고 시국은 안정되었다. 이와 전후하여 임시정부 공금 횡령범 김립은 오면직(吳冕稙)․노종균(盧宗均) 두 청년에게 총살을 당하니 인심이 쾌하다 하였다. 임시정부에서는 한형권의 러시아에 대한 대표권을 파면하고 안공근을 대신 보내었으나 효과가 없어서 임시정부와 러시아와의 외교 관계는 이내 끊어지고 말았다.


 
  상해에 남아 있는 공산당원들은 국민대표대회가 실패한 뒤에도 좌우 통일이라는 미명으로 민족운동자들을 달래어 지금까지 하여 오던 민족적 독립운동을 공산주의 운동으로 방향을 전환하자고 떠들었다. ‘재중국 청년동맹,’ ‘주중국 청년동맹’이라는 두 파 공산당의 별동대로 상해에 있는 우리 청년들을 쟁탈하면서 같은 소리를 하였다. 민족주의자가 통일하여서 공산혁명 운동을 하자는 것이었다. 그런데 또 한 희극이 생겼다. “식민지에서는 사회운동보다 민족독립운동을 먼저 하여라” 하는 레닌의 새로운 지령이었다. 이에 어제까지 공산주의자였던 사람들이 민족독립운동자로 졸변하여 민족독립이 공산당의 당시(黨是)라고 부르짖었다. 공산당이 이렇게 되면 민족주의자도 그들을 배척한 이유가 없어졌으므로 ‘유일독립당 촉성회’라는 것을 만들었다.
 

 

  그러나, 공산주의자들은 입으로 하는 말만 고쳤을 뿐이요, 속은 그대로 있어서 민족운동이란 미명하에 민족주의자들을 끌어넣고는 그들의 헤게모니(주도권)로 이를 옭아매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민족주의자들도 그들의 모략이나 전술을 다 알아서 그들의 손에 쥐어지지 아니하므로 자기네가 설도하여 만들어 놓은 ‘유일독립당 촉성회’를 자기네 음모로 깨뜨려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생긴 것이 ‘한국독립당’이니 이 것은 순전한 민족주의자의 단체여서 이동녕(李東寧)·안창호(安昌浩)·조완구(趙琬九)·이유필(李裕弼)·차이석(車利錫)·김붕준(金朋濬)·송병조(宋秉祚) 및 내가 수뇌가 되어 조직한 것이었다. 이로부터 민족운동자와 공산주의자가 다른 조직을 가지게 되었다. 이렇게 민족주의자가 단결하게 되매 공산주의자들은 상해에서 할 일을 잃고 남북 만주로 달아났다. 거기에는 아직 동포들의 민족주의적 단결이 분산, 박약하고 또 공산주의의 정체에 대한 인식이 없었으므로, 그들은 상해에서보다 더 맹렬하게 날뛸 수가 있었다.
 

 

  예를 들면 이상룡(李尙龍)의 자손은 공산주의에 충실한 나머지 ‘살부회(殺父會:아비를 죽이는 회)’까지 조직하였다. 그러나 제 아비를 제 손으로 죽이지 않고 회원끼리 서로 아비를 바꾸어 죽이는 것이라 하니 아직도 사람의 마음이 조금은 남은 것이었다. 이 붉은 무리는 만주의 독립운동 단체인 ‘정의부’․‘신민부’․‘참의부’․‘남군정서’․‘북군정서’ 등에 스며들어가 능란한 모략으로 내부로부터 분해시키고 상극을 시켜 이 모든 기관을 혹은 붕괴하게 하고 혹은 서로 싸워서 여지없이 파괴하여 버리고 동포끼리 많은 피를 흘리게 하니, 백광운(白狂雲)․김좌진(金佐鎭)․김규식(나중에 박사가 된 김규식은 아니다) 등 우리 운동에 없어서는 안 될 큰 일꾼들이 이 통에 아까운 희생이 되고 말았다.
 

 

  국제정세의 우리에 대한 냉담, 일본의 압박 등으로 민족의 독립사상이 날로 감쇄하던 중에 공산주의자의 교란으로 민족전선은 분열에서 혼란으로, 혼란에서 궤멸로 굴러 떨어져 갈 뿐이었는데, 엎친 데 덮치기로 만주의 주인이라 할 장작림(張作霖)이 일본의 꾀에 넘어가서 그의 치하에 있는 독립운동자들을 닥치는 대로 잡아 일본에 넘기고, 심지어는 중국 백성들이 한인의 머리를 베어 가지고 가서 왜 영사관에서 1개에 많으면 10원, 적으면 3, 4원의 상금을 받게 되고, 나중에는 우리 동포 중에도 독립군의 소재를 밀고하는 일까지 생겼으니, 여기는 독립운동자들이 통일이 없이 셋, 다섯으로 갈라져서 재물, 기타로 동포에게 귀찮음을 준 책임도 없지 아니하다. 이러하던 끝에 왜가 만주를 점령하여, 소위 만주국이란 것을 만드니 우리 운동의 최대 근거지라 할 만주에 있어서의 위 운동은 거의 불가능하게 되어버렸다.
 

 

  애초에 만주에 있던 독립운동단체는 다 임시정부를 추대하였으나 차차로 군웅활거의 폐풍이 생겨, ‘정의부’와 ‘신민부’가 우선 임시정부의 절제를 안 받게 되었다. 그러나 ‘참의부’만은 끝까지 임시정부에 대한 의리를 지키더니 이 셋이 합하여 새로 ‘정의부’가 된 뒤에는 아주 임시정부와는 관계를 끊고 자기들끼리도 사분오열하여 서로 제 살을 깎고 있다가 마침내 공산당으로 하여 서로 제 목숨을 끊는 비극을 연출하고 막을 내리고 말았으니 진실로 슬픈 일이다.』[229-236쪽]

 

 
  『이 때에 ‘대일전전 통일동맹’이란 것이 발동하여 또 통일론이 일어났다. 김원봉(金元鳳)이 내게 특별히 만나기를 청하기로 어느 날 진회에서 만났더니 그는 자기도 통일운동에 참가하겠은 즉 나더러도 참가하라는 것이었다. 그가 이 운동에 참가하는 동기는 통일이 목적인 것보다도 중국인에게 김원봉은 공산당이라는 혐의를 면하기 위함이라 하기로 나는 통일은 좋으나 그런 한 이불 속에서 딴 꿈을 꾸려는(同床異夢) 통일운동에 참가할 수 없다고 거절하였다.』 [264쪽]
 

 

  『노구교 사건이 일어나자 중국은 일본에 대하여 항전을 개시하였다. 이에 재류한인의 인심도 매우 불안하게 되어서 5당통일로 되었던 민족혁명당이 쪽쪽이 분열되어 조선혁명당이 새로 생기고, 미주대한독립단은 탈퇴하고 근본 의열단 분자만이 민족혁명당의 이름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렇게 분열된 원인은 의열단 분자가 민족운동의 가면으로 쓰고 속으로는 공산주의를 실행하기 때문이었다.』 [266-267쪽]
 

 

  『그러나 여기 의외의 고장이 생겼으니 그 것은 국민당 간부들이 연합으로 하는 통일은 좋으나 있던 당을 해산하고 공산주의자들을 합한 단일당을 조직하는 데는 반대한다는 것이었다. 주의가 서로 다른 자는 도저히 한 조직체를 유지할 수 없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회의가 진행됨에 따라 민족운동 편으로 대세가 기울어지는 것을 보고 해방동맹과 전위동맹은 민족운동을 위하여 공산주의 조직을 해체할 수 없다고 말하고 퇴석하였다… 이에 좌우 5당의 통일이 성공하였으므로 며칠을 쉬고 있던 차에 이미 해산하였을 민족혁명당 대표 김약산(金若山)이 돌연히 탈퇴를 선언하였으니, 그 이유는 당의 간부들과 그가 거느리는 청년의용대가 아무리 하여도 공산주의를 버릴 수 없으니 만일 8개조의 협정을 수정하지 아니하면 그들이 다 달아나겠다는 것이었다.』 [279-280쪽]
 

 

  혹자는 위에 인용된 대목들에 담겨진 백범의 생각은 중국에서 ‘임시정부’를 이끌던 때의 일이고 1945년 해방과 더불어 귀국한 뒤에는 바뀌었다고 주장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다음에 인용하는 <백범일지>의 다른 대목을 읽어볼 필요가 있다. 위에 인용된 대목은 <백범일 지>의 ‘하권’에서 인용한 것으로 이 ‘하권’은 백범이 아직 중경에 있을 때 기술한 것이 맞다. 그러나 다음에 인용하는 대목이 포함된 ‘나의 소원’은 백범이 중국으로부터 귀국한 뒤에 기술하여 1947년 11월에 발표한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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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이 나라 젊은 세대가 현혹되어서는 아니 되겠다는 생각에서 다음의 대목들을 인용한다. 범우사판 <백범일지>의 ‘(나의) 정치이념’ 가운데 몇 토막이다. 특히 젊은이들이 읽기를 권한다.

 

 
  『자유 있는 나라의 법은 국민의 자유로운 의사에서 오고, 자유 없는 나라의 법은 국민 중의 어떤 한 개인 또는 한 계급에서 온다. 한 개인에게서 오는 것을 ‘전체’ 또는 ‘독재’라 하고 한 계급에서 오는 것을 ‘계급독재’라 하며 통칭 ‘파쇼’라고 한다. 나는 우리나라가 ‘독재’의 나라가 되기를 원치 않는다. ‘독재’의 나라에서는 정권에 참여하는 계급 하나를 제외하고는 다른 국민은 노예가 되고 마는 것이다.
 


  ‘독재’ 중에서 가장 무서운 ‘독재’는 어떤 ‘주의,’ 즉 철학을 기초로 하는 ‘계급독재’다. 군주나 기타 개인독재자의 ‘독재’는 그 개인만 제거되면 그만이거니와 다수의 개인으로 조직된 한 ‘계급’이 ‘독재’의 주체일 때에는 이것을 제거하기는 심히 어려운 것이다. 이러한 ‘독재’는 그보다도 큰 조직의 힘이거나 국제적 압력이 아니고는 깨뜨리기 어려운 것이다. 우리나라의 양반정치도 일종의 ‘계급독재’이거니와 이것은 수백 년 계속되었다. 이탈리아의 ‘파시스트,’ 독일의 ‘나치스’의 일은 누구나 다 아는 일이다.
 


  그러나 모든 ‘계급독재’ 중에도 가장 무서운 것은 철학을 기초로 한 ‘계급독재’다. 수백 년 동안 이조 조선에 행하여 온 ‘계급독재’는 유교, 그 중에도 주자학파의 철학을 기초로 한 것이어서 다만 정치에 있어서만 ‘독재’가 아니라 사상·학문·사회생활·가정생활·개인생활까지도 규정하는 ‘독재’였다. 이 독재정치 밑에서 우리 민족의 문화는 소멸되고 원기는 마멸된 것이었다. 주자학 이외의 학문은 발달하지 못하니 이 영향은 예술·경제·산업에까지 미쳤다.
 


  우리나라가 망하고 민력이 쇠잔하게 된 가장 큰 원인이 실로 여기 있었다. 왜 그런고 하면 국민의 머리 속에 아무리 좋은 사상과 경륜이 생기더라도 그가 집권 계급의 사람이 아닌 이상, 또 그 것이 사문난적(斯文亂賊)이라는 범주밖에 나지 않는 이상, 세상에 발표되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이 때문에 싹이 트려다가 눌려죽은 세 사상, 싹도 트지 못하고 밟혀버린 경륜이 얼마나 많았을까. 언론의 자유가 어떻게나 중요한 것임을 통감하지 아니할 수 없다. 오직 언론의 자유가 있는 나라에만 진보가 있는 것이다.
 


  지금 공산당이 주장하는 소련식 민주주의란 것은 이러한 독재정치 중에도 가장 철저한 것이어서 독재정치의 모든 특징을 극단으로 발휘하고 있다. 즉 헤겔에게서 받은 변증법, 포이에르바하의 유물론, 이 두 가지와 스미스의 노동가치론을 가미한 마르크스의 학설을 최후의 것으로 믿어, 공산당과 소련의 법률과 군대와 경찰의 힘을 한데 모아서 마르크스의 학설에 일점일획이라도 반대는 고사하고 비판만 하는 것도 엄금하여 이에 위반하는 자는 죽음의 숙청으로써 대하니 이는 옛날의 조선의 사문난적에 대한 것 이상이다.
 


  만일 이러한 정치가 세계에 퍼진다면 전 인류의 사상을 마르크스주의 하나로 통일될 법도 하거니와 설사 그렇게 통일이 된다 하더라도 그것이 불행히 잘못된 이론일진대, 그런 큰 인류의 불행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마르크스의 학설의 기초인 헤겔의 변증법의 이론이란 것이 이미 여러 학자의 비판으로 말미암아 전면적 진리가 아닌 것이 알려지지 아니하였는가. 자연계의 변천이 변증법에 의하지 아니 함은 뉴턴, 아인슈타인 등 모든 과학자들의 학설을 보아서 분명하다.』[306-308쪽]


 
http://pub.chosun.com/client/news/viw.asp?cate=C03&nNewsNumb=20180328387&nidx=28388
 
   

      

 

 

 

 


           1948.3.

 

[ ...... 월남동포가 약 150만 명이고 그후도 계속적으로 매달 2, 3만 명이 월남중 .......   ]

 


월남자 140만 명, 귀환동포 200만 명 등 이재민 실태


 대한일보  1948년 09월 11일

 

해방 이후 해외 각지로부터 귀환한 해외동포, 38이북으로부터 남하한 월남동포 또는 그 동안 마비상태에 빠진 각 생산공장에서 수없이 밀려나온 실업자군, 기타 친족·가족 등을 잃어버리고 거리를 방황하는 어린이·노인 등 300여만 명이 지금 남조선 각지에서 조국애도 동포애도 인정도 모르는 채 정처없이 헤매이고 있다.


즉 그 동안 보건후생부·외무처·노동부 등에서 지난 3월말까지 조사한 숫자로만 보더라도 월남동포가 약 150만 명이고 그후도 계속적으로 매달 2, 3만 명이 월남중에 있다고 하며 해외귀환동포는 모두 212만 7,503명, 세궁민이 약 1백만 명, 실업자가 약 103만 명 그밖에 孤子·불구자 등의 구호를 요하는 자 약 21만이라고 하는데, 그 중에서 구호를 요하는 자 수는 실로 남조선 총인구의 약 15%에 해당하는 300만 정도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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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더욱 치열하게 더욱 광범위로 파괴·방화·살육 등 소위 무자비한 투쟁을 할 것은 틀림없는 ........   ]

 

[ ..... 모국의 지령을 받아서.... 북한의 인민위원회에서는 남한의 공산주의자들에게 대해서 총선거를 결사적으로 반대하라는 지령을 내리고 平壤에서는 거의 매일 이것을 방송 .......   ]

 


한민당, 선거문제에 관해 임위에 메시지 전달   


동아일보 1948년 04월 11일, 1948년 04월 13일, 1948년 04월 15일   

 


한민당, 선거문제에 관해 임위에 메시지 전달

 

우리나라의 독립을 원조하기 위하여 유엔총회에서 결의한 총선거를 온전히 수행하도록 할려는 귀 위원단의 가지 가지의 고심과 노력에 대해서 충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귀 위원단이 늘 고조하시는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선거를 시행해야 한다는 것은 극히 당연한 일로 생각합니다. 특히 본당은 이에 대하여 더욱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본당은 과거에 있어서 당수 宋鎭禹씨와 정치부장 張德秀氏를 살해당한 쓰라린 경험을 가지고 있으며 금번 선거에 있어서도 입후보자를 암살할 계획을 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있습니다. 우리의 절대적 요망은 안심하고 입부호도 하고 선거운동도 하고 투표도 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귀 위원단이 특히 이 점에 유의하시는 것은 크게 다행한 일입니다.


 그러나 금번 귀 위원단이 자유로운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서 취한 방침은 결과에 있어서 자유로운 분위기를 파괴하게 될 우려가 많음을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을 크게 유감으로 생각합니다. 자유로운 분위기를 조성할려는 목적과 대상은 말할 것도 없이 선거를 잘하기 위해서 선거에 협력하는 사람들에게 마음대로 입후보도 하고 마음대로 투표도 할 수 있도록 하자는 데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만일 민중으로 하여금 강제로 선거에 보이코트시킬 목적으로 폭동·파괴·방화·살육 등 수단을 不擇하는 사람들에게 그 행동을 마음대로 하도록 자유로운 분위기를 조성해서 제공한다면 그 결과는 무엇이 되겠습니까?

 

유엔의 결의에 보이코트하는 모국의 지령을 받아서 이번 총선거를 방해할려는 북한의 인민위원회에서는 남한의 공산주의자들에게 대해서 총선거를 결사적으로 반대하라는 지령을 내리고 平壤에서는 거의 매일 이것을 방송하고 있는 것을 우리들 자신의 귀로 직접 듣고 있습니다.

이 지령을 실행하기 위해서 2월 7일 이후 그들이 범한 폭동·파괴·살인·방화 등 건수(3월 23일 현재)는 다음과 같이 전율을 금할 수 없을 만큼 많습니다.

 

경찰관서 108개소

테러 102건

경관피살 24인

동 부상 75인

경찰가족 피살 1인

동 부상 9인

관공리 피살 3인

동 부상 16인

양민 피살 12인

동 부상 131인

총기 피탈 79건

탄환 피탈 1,305발

기관차 파괴 61량

객차화차 파괴 11량

기차노선 파괴 13건

전화선 절단 214건

통신기구 파괴 9건

전주 절달 72본

동력선 절단 5건

경찰관서 방화 5건

관공서 방화 3건

양민가옥 방화 28건

관공서 파괴 13건

양민가옥 파괴 15건

도로교량파괴 29건

 


그리고 최근 북한에서 온 사람의 말에 의하면 선거 때는 북한의 공산군이 38이남으로 쳐내려 온다는 것을 선전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 말은 신경전을 위한 일종의 모략적 풍설이라고 하더라도 선거일 임박해서는 지금보다 더욱 치열하게 더욱 광범위로 파괴·방화·살육 등 소위 무자비한 투쟁을 할 것은 틀림없는 일입니다. 연백지방에서는 음료수 우물에 독약을 투입하는 등 행동도 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불안 공포속에서 어떻게 안심하고 입후보를 할 수 있으며 안심하고 선거운동을 할 수 있으며 안심하고 투표장소로 나갈 수 있겠습니까? 더욱이 입후보하는 사람은 전쟁에 출전하는 병사처럼 비장한 결의를 가지지 않고는 입후보를 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선거운동자중에도 많은 희생자가 날 것을 미리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유권자중에는 위협을 느껴서 본의 아닌 기권을 할 사람이 무수히 있을 것도 틀림없는 일입니다. 투표소의 파괴·방화·유권자등록명부의 파기·소실·투표함의 운반도중 피탈 등으로 선거를 몇 번이고 반복하지 않을 수 없는 위험성이 도시를 제한 전선거구에 있다는 것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거울 드려다보듯이 명확히 알면서도 거기 대응할 방안을 강구할 자유를 가지지 못한 것을 슬프게 생각합니다. 나라 없는 약소민족의 억울한 심정이 이런데서 일어나는 것을 깨달을 자유만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직 한가지 방도가 있다면 그것은 여러분의 이에 대한 적당한 조치를 기대하는 것 뿐입니다. 그런데 귀 위원단은 이러한 사태를 몰각하고 그 시선과 고려를 전연 딴 방면에 집중하고 있는 사실을 발견할 때 실망과 우려를 금할 수 없습니다. 선거를 방행하기 위해서 파괴·방화·폭행·살인을 마음대로 하는 방면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언급치 않고 그 폭동과 방해를 방지할 책임을 가진 경찰의 수족을 결박하고 선거를 수행하기 위하여 노력하는 청년의 단체행동을 구속하기에만 주력한다면 그 결과는 선거일을 기하여 남북일대를 수라장화하고 생지옥화하는 것 밖에는 없을 것입니다. 지금 이 말을 여러분이 시인하실지 안 하실지 그것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5월 10일까지 이것이 사실로 증명될 것은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다만 그것이 사실로 증명되는 때는 우리의 희생이 너무나 크다는 것을 고려하시기 바랍니다.

 

금번에 改變된 형사소송법은 그 주안이 귀 위원단의 요청에 응하는 데 있는 모양인데 그것이 이상적 법이론으로는 훌륭하나 오늘날 한국의 현실에는 도리어 부적당한 법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준전시상태 半계엄상상태에 있는 것이 사실인데 재판소에서 원거리에 있어서 심판관의 영장을 가져오는데 3일이나 걸리는 경찰관서에서는 도피하는 범죄자를 보고도 손을 댈 도리가 없을 것입니다. 임시조치의 방법이 있다하나 그런 짓을 하다가는 피의자의 교묘한 법정 진술에 의해서 체포한 경찰관은 억울하게 1일 80원 미만의 봉급을 받아가지고 피의자에게 1일 1천원의 보상금을 물어주게 될 터이니 어떤 경관이 그런 모험을 하겠습니까?

 

더욱이 1일 80원을 받는 경관은 어느 나라 국민이며 1일 천원 보상금을 받을 범죄피의자는 어느 나라 국민이겠습니까? 범죄피의자는 언제든지 경관에 비해서 13배 이상의 수입이 있는 사람이요 그만큼 고등한 생활을 하는 사람이란 이론이 어디서 나오는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이러한 법률을 초안해낸 사업당국자가 벌써 경찰에 대해서 편견 내지 모멸감을 가지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으니 여기에 경찰은 사법관을 신뢰하고 범인을 취급할 용기가 나지 않을 것입니다.

이러한 조치는 결국 경찰의 활동을 극도로 견제하고 공산당원들에게 파괴·방화·살인 등 행위를 마음대로 하도록 무경찰상태를 만들어 주는 것밖에 아무 것도 없을 것입니다.


귀 위원단 여러분 우리의 말을 냉정히 친절히 들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주위에서 여러분과 가장 친절히 가장 빈번히 접근하는 사람들 가운데는 복면한 공산주의자(당원)와 그 공산당의 충실한 앞잡이 노릇을 하는 사람(우리는 그 인물들을 지적할 수도 있습니다)이 많이 있다는 것을 주의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들의 교묘하고 적극적인 끊임없는 중상적 소개에 의하여 여러분이 韓國民主黨에 대해서 많은 오해를 가지고 있는 것도 우리는 짐작합니다.

 

유엔보고서에 본당을 극우라고 규정한데서 그것을 알았습니다. 또 여러분의 주위에 공산당계열 분자들이 싸고 돌고 있기 때문에 한국의 실정을 바로 보지 못하신다는 것은 금번의 자유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한 조치로서 분명히 나타났습니다. 정말 자유분위기를 파괴하는 것은 공산당인데 그 공산당의 자유분위기 파괴공작을 방지하는 경찰과 청년단체를 자유분위파괴자로 오인한 것이 곧 그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런 말은 여러분에게 불쾌감을 줄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것을 알면서도 우리는 이런 말을 솔직히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을 이해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끝으로 다시 한 말씀드릴 것은 선거법 제12조와 제44조에 특히 유의해서 고려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개정 형사소송법과 선거법 제12조 제44조를 연락해서 생각할 때 극렬파괴분자들의 원하는대로 된 감이 있습니다.

 

2천명 미만을 한 區로 한 투표구 총수가 1만2천 이상이 되고 경찰서 지서 출장소 파출소 수가 2천4백 이상이요 군청 읍 면 동회사무소가 2천4백 이상이니 합계 1만4천8백이나 됩니다. 여기에 세무서 등기소 등을 합하면 요경계 장소가 도시를 제하고도 1만5천에 달할 것입니다. 그런데 남한의 경관총수는 4월에 증원이 되어가지고도 3만5천5백명밖에 안 된다고 하니 그렇다면 1만5천개소에 평균 2명의 경관배치도 곤란하며 그들은 행동을 극도로 제약을 받고 있기 때문에 5월 10일에는 총선거를 방해하는 자들이 활동을 마음대로 할 것은 틀림없는 일입니다. 벽지에 있는 투표소가 등록완료후 투표일까지 25일간에 한 번만 습격을 당해도 그 기일에 선거는 불가능할 것인데 습격한 의사를 가진 분자가 있기만 한다면 이것을 피하는 것도 거의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런데 맹렬히 습격을 기도하는 분자가 있는 것도 또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여러분께서 기어히 그대로 한다고 하면 우리는 오직 독립을 위해서 깊은 한숨을 쉬고 뜨거운 눈물을 흘려가면서라도 이 무방비의 희생을 각오하고 선거에 최선을 다할 결심은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께서 한국의 현실사태를 좀더 이해하실 수 있다면 다음 세가지를 특히 재고려하여 주시기를 요청하고 싶습니다.

 

1) 형사소송법의 變改를 연기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2) 선거법 제44조의 투표구인원수(2천명)을 늘려서 투표구수를 줄이고 경비를 좀더 안전하게 했으면 좋겠습니다.

3) 선거법 제44조 제2항의 사건이 발생할 때는 그 선거구 전체를 무효로 하지 말고 그 투표구만 다시 선거하도록 하기를 청합니다.

 

 

 

 


조병옥, 제주소요사건과 관련 공산계열의 만행 폭로   


경향신문 1948년 06월 09일   

 


조병옥, 제주소요사건과 관련 공산계열의 만행 폭로

조경무부장은 공산계열이 감행한 만행의 진상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발표하였다.

 

“남조선의 질서를 교란하고 치안을 파괴하여 북조선과 같이 소련에 예속시키려는 공산계열의 목적달성을 위하여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무차별 무자비한 폭동만행은 총선거실시에 따라 민중에 대한 공포심 주입과 단말마의 최후 발악으로 더 한층 포학과 잔인성을 나타내었으니 그 일예를 제주도 폭동에서 들면 다음과 같다.

 

폭동이 일어나자 1읍 12면의 경찰지서가 빠짐없이 습격을 받었고 저지리 청수리 등의 전 부락이 폭도의 방화로 전부 타버렸을 뿐만아니라
그 살상방법에 있어 잔인무비하여 4월 18일 신촌서는 6순이 넘은 경찰관의 늙은 부모를 목을 짤러 죽인후 수족을 절단하였으며

 대동청년단 지부장의 임신 6개월된 형수를 참혹히 타살하였고 4월 20일에는 임심중인 경찰관의 부인을 베를 갈러 죽이였고

 4월 22일 모슬포에서는 경찰관의 노부친을 총살한 후 수족을 절단하였으며 임신 7개월된 경찰관의 누이를 산채로 매장하였고

 5월 19일 제주읍 도두리서는 대동청년단간부로써 피살된 김용조의 처 김성히와 3세된 장남을 30여명의 폭도가 같은 동리 김승옥의 노모 김씨(60)와 누이 옥분(19) 김중삼의 처 이씨(50) 16세된 부녀 김수년 36세된 김순애의 딸 정방옥의 처와 장남 20세된 허연선의 딸 그의 5세 3세의 어린이등 11명을 역시 고히숙집에 납치 감금하고 무수 난타한 후 눈노름이라는 산림지대에 끌고가서 늙은이 젊은이를 불문하고 50여명이 강제로 윤간을 하고 그리고도 부족하여 총장과 죽창·일본도 등으로 부녀의 젖·배·음부·볼기등을 함부로 찔러 미처 절명되기전에 땅에 생매장하였는데 그중 김성히만이 구사일생으로 살어왔다.


그리고 폭도들은 식량을 얻기 위하여 부락민의 식량 가축을 강탈함은 물론 심지어 부녀에게 매음을 강요하여 자금을 조달하는 등 천인이 공노할 그 비인도적 만행은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정도이다.”

 

 

 

 

[ ..... 북한인민공화국은 민족의 절대한 自由를 부인하고 외세에 아부하는 도배들이 某國의 지령을 盲從하여 교묘한 선전과 무자비한 강압으로 수립된 것은 천하 주지의 사실이다 .......  ]

 

 

勤勞大衆黨, 새 출발을 성명   


국민신문 1948년 09월 26일   

 

勤勞大衆黨에서는 작25일 그 간의 노선을 버리고 민족적 이익에 입각하여 새 출발한다는 다음과 같은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북한인민공화국은 민족의 절대한 自由를 부인하고 외세에 아부하는 도배들이 某國의 지령을 盲從하여 교묘한 선전과 무자비한 강압으로 수립된 것은 천하 주지의 사실이다.


본당은 發黨 이래 기회주의·추수주의로 방황하다가 금번 重要部들이 북한정권에 가담하였으나, 본당 소장 간부를 선두로 튼튼히 집결된 전 당원은 과오를 범한 간부들과 단호 결렬함과 동시에 과거의 기만적 정치노선을 飜然히 버리고 오직 민족적 이익에 입각하여 신출발할 것을 엄숙히 성명한다.”

 

 

 

          2003

 

  [ .... 자비를 몰라야 하며 유사시 무자비하게 격멸 소탕해 .......   ]

  [ .... 남조선 괴뢰도당은 마지막 한 놈까지 철저히 소멸해야 할 우리의 원수이며 적이다 .......   ]

 

 

[.... 2003년판 북한군의 정신교육 자료인 소위 ‘학습제강’(강령을 제시한 교육 자료)에 따르면 “남조선 괴뢰도당은 마지막 한 놈까지 철저히 소멸해야 할 우리의 원수이며 적이다. 원수를 겨눈 우리의 총대는 자비를 몰라야 하며 유사시 무자비하게 격멸 소탕해 김정일 동지를 통일의 광장에 높이 모셔야 한다”라며 대한민국과 국군에 대한 적개심을 고취하고 있다.


즉 북한은 우리 대한민국을 ‘적(敵)’으로 인식하고 전쟁 준비의 끈을 놓지 않으면서 노동당 규약에도 명시하고 있듯이 한반도를 공산화하겠다는 기도를 조금도 변화시키지 않고 있다 ......  ]

 

http://www.chosun.com/magazine/news/200602/200602050087.html


2006.1.30~2.6. 1890호

홈 > 매거진 > 주간조선

육·해·공 117만명 전진배치, 항시 전쟁 태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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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革命이란, 네가 살아있으면 내가 죽는다, 네가 이기면 내가 진다고 하는 무자비한...물리적 대결전을 요구 한다」고 로동신문(2000년 12월 22일자「正論  白頭의 銃(총)의 혈통」는 썼다.

죽일 것인가 죽임을 당할 것인가, 어느 쪽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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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한에서 헌법, 당규약 보다 상위의 절대최고규범 = 전쟁광살인마 노예교 10 계명  ]

 

   당의 유일 사상 체계 확립의 10대 원칙 중에서

 

 

  [..... 주체 사상의 위대한 혁명적 기치를 높이 들고 조국 통일과 혁명의 전국적 승리를 위하여 ... 모든 것을 다 바쳐 투쟁하여야 한다 .........

   ..... 전 세계에서의 주체 사상의 승리를 위하여 끝까지 싸워 나가야 한다 ........    ]

 

 

 

 

        2006.

 

[ ..... 특히 소년단원들은 `김정일 장군님을 위하여 항상 준비하자`라는 일념으로 김 총비서를 목숨으로 옹위하는 `소년근위대`, `충성동이`가 돼야하며 `제국주의와 지주·자본가 등 계급적 원수를 끝없이 미워하는 애국투사가 돼야 한다`고 신문은  말했다 .........    ]

 

 

[..... 이 신문은 '선군의 기치를 높이 들고 위대한 전승업적을 빛내어 나가자' 제목의 사설에서 "모든 인민과 군장병들은 언제나 긴장되고 동원된 태세를 견지하고 조국의 안전과 민족의 존엄을 지켜나가야 한다"며 "온 나라 전체 인민이 우리 당의 총대 중시, 군사 중시 노선을 빛나게 구현하여 나라의 자위적 전쟁억제력을 백방으로 다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노동신문은 "첨예한 반제 대결전의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 인민에게 있어서 조건과 환경은 달라질 수 있어도 투쟁정신에서 변화란 있을 수 없다"며 "모든 당원과 근로자들이 투철한 대적관념을 지니고 계급적 원수들과 비타협적으로 투쟁하고 언제나 긴장되고 동원된 태세를 갖추고 있도록 해야 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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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은 "모든 부문, 모든 단위에서 군사를 국사 중의 제일 국사로 내세우고 국방력 강화에 필요한 모든 것을 최우선적으로 보장해 주어야 한다"며 "누구나 총대를 사랑하고 군사를 성실히 배워 원수들의 그 어떤 불의적인 침공에도 대처할 수 있도록 철저히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  ]

 

http://www.tongi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66744


北노동신문, 주민들에 긴장된 동원태세 촉구 
자위적 억제력 강화.불의의 침공 대응 강조

 
 2006년 07월 27일 연합뉴스  tongil@tongilnews.com 

 

 

 

   [ .... 남한은 미제국주의 식민지이고 남한정권은 괴뢰정권이며 남한 사람은 모두 지주, 자본가들과 그들의 후손이기에 계급적 원수라고 설교한다 .......  ]


   [.... 이런 관점에서 김일성은 6.25전쟁때 남한의 계급적 원수를 소탕한다는 깃발을 내걸고 무자비한 동족상잔을 감행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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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과 김정일은 남한 인민까지 지배하는 조건을 염두에 둘 때만 남북을 하나의 민족으로 생각하고 말하지만 남북이 대립되어 있고 남한을 정복해야 한다는 입장에서는 언제나 남한을 "적"이라고 말하다. 남한은 미제국주의 식민지이고 남한정권은 괴뢰정권이며 남한 사람은 모두 지주, 자본가들과 그들의 후손이기에 계급적 원수라고 설교한다. 이런 관점에서 김일성은 6.25전쟁때 남한의 계급적 원수를 소탕한다는 깃발을 내걸고 무자비한 동족상잔을 감행하였다.


그리고 오늘날 김정일은 남한을 약화시키고 남한을 지배하기 위하여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그는 남한의 경제성장에 대하여 극도로 질투하고 있으며 남한 사람들이 아무리 평화적 공존을 요구하여도 남한이 혼자서 평화롭게 잘 사는 것을 절대로 허용하지 않는다는 입장에 서 있다. 그는 남한에게 불리한 것은 자연재해까지 포함하여 다 좋아하고 오직 남한을 망하게 하는 방법만을 생각하고 있다.

 

남한에 대한 김정일의 적대감이 얼마나 강한가 하는 것은 남한 사람들이 즐겨 쓰는 말은 못쓰게 지시하고 해외에 출장나갔다가 모르고 남한제 상품을 사오면 몰수하여 불사를 뿐 아니라 남한 물건을 사온 사람을 계급성이 없다고 하여 엄벌에 처한다. 특히 군대에는 오직 남한에 대한 적개심, 복수심으로만 교양하여 명령만 내리면 남한을 언제나 불바다로 만들고 남한 인민들을 몰살하고서라도 남한을 점령하여 김정일을 승리의 광장에 모셔야 한다는 단 한가지 사상만 가지게 하고 있다.


김정일이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미얀마에서 아웅산폭파사건을 일으켰으며 대한항공기폭파를 지시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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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일은 자기 민족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은 자기가 직접 지배하고 있는 북한 인민들에게 한 태도에서도 뚜렷히 나타나고 있다. 북한의 수백만 인민들이 굶어죽고 있는데 자기 아버지 시신궁전(금수산기념궁전)을 꾸리는데 만 막대한 자금과 자재를 낭비하는 사람이 과연 북한 인민을 동정하고 사랑한다고 볼 수 있겠는가.

수백만 인민들이 굶어죽고 있는데 계속 전쟁준비에만 몰두하고 인공지구위성을 쏴 올리고 <강성대국>을 건설한다고 떠드는 사람이 민족을 사랑한다고 볼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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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조선 괴뢰도당은 마지막 한 놈까지 철저히 소멸해야 할 우리의 원수이며 적이다 .........]

 

 

[....2003년판 북한군의 정신교육 자료인 소위 ‘학습제강’(강령을 제시한 교육 자료)에 따르면 “남조선 괴뢰도당은 마지막 한 놈까지 철저히 소멸해야 할 우리의 원수이며 적이다. 원수를 겨눈 우리의 총대는 자비를 몰라야 하며 유사시 무자비하게 격멸 소탕해 김정일 동지를 통일의 광장에 높이 모셔야 한다”라며 대한민국과 국군에 대한 적개심을 고취하고 있다.


즉 북한은 우리 대한민국을 ‘적(敵)’으로 인식하고 전쟁 준비의 끈을 놓지 않으면서 노동당 규약에도 명시하고 있듯이 한반도를 공산화하겠다는 기도를 조금도 변화시키지 않고 있다...... ]

 

http://www.chosun.com/magazine/news/200602/200602050087.html


2006.1.30~2.6. 1890호

홈 > 매거진 > 주간조선

육·해·공 117만명 전진배치, 항시 전쟁 태세

 

 

 


「.... 남한 주민중 30%는 같은 민족이 아니다」고 정해 놓았습니다 ......]

 

....통일 후, 2단계 사회주의혁명 단계에서는 프롤레타리아 계급만이 유일한 민족으로 남게 되고 다시 40%를 숙정하는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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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총련 학생들은 남한 민족과 북한 민족이 하나가 되는 것을 통일이라 생각하는데 北에서는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북한은 金日成의 지침으로 「남한 주민중 30%는 같은 민족이 아니다」고 정해 놓았습니다. 군인, 경찰, 고급 공무원, 재벌 등 북한에서 소위 말하는 反動 관료, 매판자본가, 악덕 지주 계급입니다. 對南 전략 내부 文件에 기록돼 있습니다. 통일은 남한 주민 30%를 제거한 상태에서 이뤄지는 것입니다.


통일 후, 2단계 사회주의혁명 단계에서는 프롤레타리아 계급만이 유일한 민족으로 남게 되고 다시 40%를 숙정하는데 한총련 대학생들은 중산층이므로 역시 숙청 대상입니다. 본인이야 괜찮을지 몰라도 그들의 부모는 숙청대상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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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 해방전 경력에 대한 북한의 주장-김일성의 해방전 경력에 대한 북한의 공식적인 견해를 요약해보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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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은 1927년 1월 혁명활동의 중심지를 길림으로 옮겨, 길림육문중학교에 다니면서 비밀리에 공산당 선언, 자본론을 비롯한 혁명적 문학작품들을 열심히 탐독했다.

1927년 봄에는 「조선인길림소년회」를 조직했고 민족주의자들의 영향  밑에 있던 조선인 려길학우회를 조선인 류길학우회로 개편?지도하면서, 청소년들의 민족적 계급적 의식을 높이고 그들이 공산주의를 지향하도록 교양하도록 교양 훈련했다.

또 1927년 여름에는 타도 제국주의동맹의 명칭을 「반제청년동맹」으로 고치고 각지에서 모여온 선진적 청년과학생들을 그 조직에 망라시켰다. 그와 거의 동시에 반제청년동맹의 핵심들을 골간으로하여 「조선공산주의 청년동맹」(공청)을 결성했다. 김일성은 혁명활동의 범위를 청년들과 학생들 속에서 뿐만 아니라 도시와 농촌의 광범한 지역군중들 속으로 넓혀나갔다.


1928년부터 길동지구와 길장지구(길림?장춘)연선의 도시와 농촌들에 공청 및 반제 청년동맹의 핵심들을 파견하여 활동하는 한편, 농촌들에 학교를 세워 청소년들을 교육 교양하고 이 학교들을 거점으로 대중 정치사업을 광범위 조직 진행했다. 또한 각종 출판물들을 발간하여 광범한 군중을 혁명조직에 결속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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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규식 (북로군정서)

 


김규식(金圭植, 1880년 8월 27일~1931년 4월 10일)은 한국의 독립운동가이다.

대한제국의 해산 군인 출신으로 북로군정서에서 ‘독립군의 호장군(虎將軍)’이라는 별명으로 활동했으며, 아호는 노은(蘆隱).[1]

 대한민국 임시정부 계열의 우사 김규식(金奎植), 생년과 한자명이 같은 서로군정서의 김규식(金圭植)과는 동명이인이다.

 

[편집] 생애


1880년 8월 27일 경기도 양주 출신으로 대한제국 육군의 참위를 지냈다. 1907년 일제에 의한 대한제국 군대 해산 이후 의병으로 전환, 강원도 철원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다.


이후 1912년 만주로 만 명, 1919년 서일, 김좌진 등과 함께 북로군정서를 조직해 사단장을 맡았다. 북로군정서는 이 시기 무장 항일 투쟁의 핵심 근거지 중 하나였으며, 산하에 사관연성소를 세우고 김규식은 교관을 맡아 무력을 양성했다.


청산리 전투에서는 제2연대장인 김좌진 수하의 제1대대장으로서 전투에 참가했다.


청산리 전투 승리 이후 북로군정서가 다른 무장 투쟁 단체들과 통합하여 대한독립군단을 편성했을 때 총사령에 취임했다. 그러나 대한독립군단의 참모총장 이장녕, 여단장 이청천과 함께 군병력 3천5백여 명을 이끌고 러시아령으로 들어갔다가 자유시 참변을 겪게 되어 다시 옛 근거지인 옌지 지역으로 돌아와야 했다.

 대한독립군단 총재 서일이 이 사건의 책임을 지고 자결하고 남은 조직은 재정난에 시달리는 어려움을 겪었으나, 김규식은 상하이 임시정부의 도움으로 위기를 넘기고 이범석을 영입해 1923년 이번에는 고려혁명군을 창립하여 총사령에 취임했다.


1925년 신민부에, 1926년에는 고려혁명당에 가담해 활동하였고, 장기적인 항일 투쟁을 위해 교육에 뜻을 두고 옌지에 학교를 설립하기도 하였으나, 1931년 암살되었다. 김규식을 유인해 암살한 사람은 옛 동지였다가 공산주의 계열로 전향한 최악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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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공산당의  청년동맹규약 .......

  ..... " 사회주의조국  쏘베-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에  무한의 충성을  다하도록  교육한다. "  ..........   ]

 


1946.5.28.동아일보


사회주의조국에 충성하라

조공청년동맹의 지도강령

 


한때 조선을 소련의 일연방 되기를 희망한다고 외국기자단에서 말한 조공책임비서 박헌영에 대한 사실이 미국 뉴욕타임쓰지로부터 세간에 보도되자 세인의 공노를 사게 되엇슬대 변명이 구구하엿는데 요지음 조선공산당의 청년동맹규약을 들추어보면 막쓰 레닌의 리렴과 모순되는  다음과 같은  일절이 있다.

"사회주의조국 쏘베-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에 무한의 충성을 다하도록 교육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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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우리 사회에서 증오가 중요한 정치적 요소로 처음 등장한 것은 러시아의 공산당 혁명이 성공해서 공산주의가 널리 퍼진 1920년대 이후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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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회에서 증오가 중요한 정치적 요소로 처음 등장한 것은 러시아의 공산당 혁명이 성공해서 공산주의가 널리 퍼진 1920년대 이후였다. 공산주의가 反제국주의적이고 反식민주의적 이념으로 인식되었으므로, 다른 식민지들에서와 마찬가지로, 일본의 식민지였던 조선에서도 공산주의는 인기가 높을 수밖에 없었고 많은 지식인들이 공산주의자들이 되었다.


그리고 공산주의의 전투적 신조에 따라, 공산주의자들은 다른 이념을 가진 사람들에 대해 드러내놓고 적대적이었다. 그래서 공산주의의 세력이 커질수록, 좌우 대립은 심해졌다. 김좌진 장군의 암살과 金九 선생의 암살 기도는 1930년대에 이미 좌우 대립이 화해할 수 없는 정도로 치달았고 두 세력들이 서로 극심한 증오를 품었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광복으로 권력 투쟁이 시작되자, 좌우 대립은 당연히 더욱 격렬해졌고, 두 세력들 사이의 증오도 커졌다. 그리고 그런 대립과 증오는 한반도의 분단을 확고하게 만드는 데 한몫을 했다. 좌우익 사이의 대립이 그렇게 격화되지 않았고 두 세력들이 서로 품은 증오와 불신이 그리 크지 않았더라도, 이미 세계 정치에서 냉전 구도가 굳어진 상태였으므로, 분단은 필연적이었을 터이다.


그래도 좌우익이 서로 품었던 증오와 불신이 분단 구도를 좀더 확고하게 만든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남한과 북한에서 세력을 잃은 소수에 대한 박해가 나왔다. 북한 정권에 의한 地主 계급에 대한 혹심한 박해는 많은 북한 주민들의 南下를 불렀다. 그리고 남한 지역에서 일어나 좌익 세력의 반란들은 혹심한 진압을 불렀고, 그 과정에서 양민들이 큰 피해를 입었다.


6·25 전쟁은 좌우익의 대립으로 생긴 증오가 거침없이 분출될 곳을 제공했다. 북한의 공산주의 세력은 그들이 점령한 곳에서 그들이 적이라고 인식한 사람들에 대해서 지금까지 우리 역사에서 볼 수 없었던 종류의 증오를 드러냈다. 그들은 주민들 사이의 증오를 의도적으로 키웠고 그것을 통치에 효과적으로 이용했다.


그들의 그런 非인간적 정책은 북한군이 물러간 지역에서 우익 세력의 처절한 보복을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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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리의 윤리는 프롤레타리아트 계급투쟁의 이익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레닌 ........


  ...... 계급투쟁으로 자본주의를 타도하고 정권을 잡는다고 하는 이 목적에 도움이 되는 이론을 眞理라고 ...........    아름다운 것 또는 예술적인 것이라고 .........    ]

 

[ ...... 혁명을 위한 거짓말은 불가피한 게 아니라 적극적인 의무이고 善이 된다 ..........    ]

 

 
왜 좌익형 인간은 수치심이 없는가?

 
 2014.09.26 조갑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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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런 문제를 가장 깊게 파고든 한국인은 아마도 明知대학교 전 교수 尹元求(윤원구) 씨일 것이다. 그는 공산주의가 가진 이론과 실천의 2중성 원리를 밝혀낸 이다. ‘共産主義의 七大秘密’(명지대학교 출판부. 1986)이라는 책에서 尹 교수는 좌익적 인간이 凶器化(흉기화)되는 비밀을 ‘공산주의자의 가치관’에서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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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다면 공산주의자의 가치관은 무엇인가?

   레닌이 정확하게 규정하였다.

   “우리는 말한다. 우리의 윤리는 전적으로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투쟁의 이익에 從屬(종속)하는 것이라고. 우리의 윤리는 프롤레타리아트 계급투쟁의 이익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레닌, ‘청년동맹의 임무’)

   “그러면, 이 계급투쟁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차르를 타도함으로써 자본가 계급을 타도하여 자본가 계급을 絶滅(절멸)하는 것이다.”

  

   윤원구 교수는 그들의 가치관은 계급투쟁론에서 출발한다고 본다. 즉 자본가 계급을 폭력혁명으로 타도하고 공산당이 정권을 잡는 데 도움이 되는가, 안 되는가, 이것이 가장 중요하고 유일한 가치판단 기준이다.

  

   <그런데, 공산주의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이 階級鬪爭(계급투쟁)이란 것은 윤리의 기준일 뿐만 아니라 眞理(진리)의 기준으로도 된다는 것인데, 여기에 대하여 ‘철학과정’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마르크스주의의 과학적 사회주의 이론은 노동자 계급을 계몽하여 자기의 계급적 利害(이해)관계, 임무, 목적을 자각하도록 돕는 일에 봉사하고 있다.”

   “사회생활의 긴요한 문제를 설명하려고 하는 모든 철학, 사회학, 경제학상의 이론은, 무엇이건 간에 계급의 이익을 표현하고 있어서, 이런 뜻에서 黨派的(당파적)인 것이다.”>

  

   사회과학에서 무엇이 가장 중요한 문제이냐 하면, 그 이론이 계급투쟁에 도움이 되느냐 害(해)가 되느냐는 것이고 이것이 무엇이 진리이고 무엇이 虛僞(허위)인가를 판단하는 기준이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객관적 진리를 인정하지 않는다. 사회가 利害(이해)관계를 달리하는 계급으로 분열되어 있는 한 <사회과학의 진리는 언제나 계급의 진리로서, 계급에 따라 각각 성립하는 것이다. 이른바 진리의 계급성 또는 당파성이다.>

  

   윤원구 교수는 공산주의자들은 <이와 같은 진리관 위에서, 저들이 계급투쟁으로 자본주의를 타도하고 정권을 잡는다고 하는 이 목적에 도움이 되는 이론을 眞理라고 판단하며, 저들의 계급투쟁에 해롭고 도움이 안 되는 이론을 가리켜 非진리라고 공산주의자들은 판단하는 것이다.>

  

   예컨대 빨갱이들에겐 천안함 폭침을 누가 저질렀는지가 眞僞(진위) 판단의 기준이 아니다. 천안함 폭침을 북한이 자행하였다는 사실이, 한국에서 일으키려고 하는 사회주의 혁명에 도움이 되면 그게 진리이고 도움이 되지 않으면 허위가 된다.

  

   계급투쟁론에 종속되는 빨갱이들의 이런 가치관은 善惡(선악), 眞僞 판단의 절대 기준일 뿐 아니라 美的(미적)판단에서도 그렇다. 무엇이 아름답고 무엇이 아름답지 못하냐 하는 것도 계급투쟁(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나 폭력혁명 등)에 도움이 되느냐의 與否(여부)로 가린다. 도움이 되면 아름답고 안 되면 추한 것이다.

  

   <자본주의에 대한 敵愾心(적개심)을 끓어오르게 하고, 그리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혁명투쟁을 위해서 기꺼이 목숨을 바치도록 만드는 데 도움이 되는 작품을 아름다운 것 또는 예술적인 것이라고 판단하며, 이 목적에 해로운 것을 가리켜서는 아름답지 않은 것, 예술적 가치가 없는 것이라고 판단하는 것이다. ‘춘향전’에 대해서는 아무런 가치도 인정하지 않는 반면, ‘피바다’를 가리켜서는 최고의 예술적 작품이라고 평가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진리와 美와 윤리의 기준을 언제나 계급투쟁이라는 한 가지 사실에 두고 어떤 문제를 대할 때에도 이 가치관 위에서 생각하고 판단하며 실천해야만 하는 것으로 되어 있는 바, 저들은 이것을 ‘黨性(당성)’이라는 말로써 부르고 있다.>

  

   계급투쟁적 가치관을 가지면 혁명을 위한 거짓말은 불가피한 게 아니라 적극적인 의무이고 善이 된다. 레닌은 “공산주의자는 법률위반, 거짓말, 속임수, 사실은폐 따위를 예사로 해치우지 않으면 안 된다”고 했다. “어떤 행위도, 예컨대 살인이나 兩親(양친)의 密告(밀고)라도 공산주의의 목적에 도움이 되면 정당화된다.”(‘공산주의의 신조’ 제10항)

   언론의 자유, 종교의 자유를 보장한다는 소련이나 북한의 헌법 자체가 거짓말이다. 미국 언론인 존 건서는 ‘소련 지도자들은 거짓말을 할 때야말로 정말로 성실해 보인다’고 했다.

  

   공산주의자들을 향해서 ‘목적을 위하여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고 비판하는 것은 우리가 지어 낸 말이 아니다. 저들이 그렇게 주장하고 그렇게 행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공산주의자들이 범죄적 행동을 하고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 것은 그렇게 태어났기 때문이 아니라 그렇게 교육받고 훈련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양심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들의 양심은 인간중심 사상을 가진 우리와 다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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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s://www.newdaily.co.kr/news/article_print.html?no=217597
 

 

 

 


  

[ ..... 학생들은 남조선과 미국, 일본 놈들은 무조건 죽이고 없애 버려야 우리가 잘 살수 있다는 생각  즉 <적개심>이 가득 차 ..........   ]


[ ...... 세종이라는 왕이 있었는지 조차도 모르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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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한의 교육은 철저히 공산주의 독재체제유지를 위한 반민족적이며 반인륜적인 교육입니다.  북한은 계급 교양을 매우 중요시 하며 또 많이 합니다.

그러한 교육의 내용을 보면 ...


. 6.25 전쟁은 미제와 남조선 괴뢰들이 15개 추종국가 들을 끌어들여 먼저    일으킨 침략전쟁이었다는 것과

. 무조건 한번은 성스러운 전쟁을 하여 남조선 괴뢰도당들을 쓸어버리고

  남조선을 해방해야 한다는 것과...

. 미제와 일본제국주의자들을 지구상에서 영영 쓸어버리고 “온 사회의 김일성 주의화” 를 실현해야 한다고 사상교육을 끊임없이  합니다.


어린이들의 체육교육시간에도 운동장에 드럼통 두개를 세워 놓고는 거기에다가 남한군대와 미군을 각각 그려 붙이고 편을 갈라서 어느 편이 먼저 뛰어 가서 그 그림들을 총창으로 찌르든가, 아니면 몽둥이로 먼저 때려  눕히는가 하는 운동을 합니다.

뿐만 아니라 어린애들의 노래와 무용에서도 군복을 입고 총을 들고 남한의 군대와 미군을 쏘아 죽이는 내용을 노래와 무용의 주제로 삼는 경우가 많습니다.

 


  각종 글쓰기 대회나 웅변 모임에서도 항상 “남조선 괴뢰도당과 미일 제국주의자들을 이 지구상에서 영원히 쓸어버리자” 라는 내용이 기본 주제로 됩니다.

캠프를 가도 신천박물관을 비롯한 6.25전쟁당시 남한 군과 미군이 강점하고 북한 사람들을 죽였다는 곳으로 가도록 합니다.

( 신천박물관은 전국의 학생들이 무조건 견학해야 할 필수 참관코스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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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급교양이라는 명목 하에 계속 끊임없는  공산독재체제 유지를 위한 교육을 시키니까 북한의 청소년 학생들은 남조선과 미국, 일본 놈들은 무조건 죽이고 없애 버려야 우리가 잘 살수 있다는 생각 즉 <적개심>이 가득 차 있습니다.

 


- 다음으로 북한의 교육은 절대적인 복종과 아첨을 부르는 <우상화교육>입니다. 후대교육은 철저히 자기 나라와 민족의 근원 즉 뿌리를 잊지 말고 그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민족의 전통과 슬기로움을 더욱 빛내어 나가도록 하는데서 부터 시작이 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그러나 북한에서는 한반도 민족의 역사와 전통 같은 것은 안중에도 없이 철저히 김일성의 가문에 대한 그 무슨 혁명전통과 우상화 교육이 기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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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한에서 대학을 졸업한 선배님들도 한반도 역사에 세종이라는 왕이 있었는지 조차도 모르며 오직 훈민정음, 첨성대 등 은 슬기로운 선조들이 만들었다는 식으로 교육을 받았습니다.

  또한 이성계는 왕을 반대하여 정변을 일으킨 나쁜 사람이며 김유신은 매국노라는 식으로 자기들의 정권을 반대하여 들고 일어나지 못하도록  방패 식 역사교육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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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한에서는 김정일을 하느님보다 더 무섭고 위대한 존재로 <절대화>, <신격화> 하고 있으며 김정일에 대한 절대적인 복종을, 당과 수령에 대한<충실성> 이라는 보자기로 감싼 우상화 교육을 시킵니다.

 


  북한은 철저히 국가의 역사와 전통과 뿌리는 “민족의 자유와 독립”을 위한 김일성의 항일혁명 투쟁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교육하고 있으며 김일성에게 무한히 충직한 혁명투사들인 김정숙과 김정일의 혁명역사도 같은 뿌리라고 규정짓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혁명전통의 뿌리를 마련하기위해 한생을 바친 김일성과 그 전통의 대를 이어가는 김정일에게 무조건 충성하여야 한다고 강압식 교육을 시킵니다.

 


  실레로써 북한 전 지역의 유치원들에도 김일성, 김정일 따라 배우기 연구실을 꾸려 놓고 5-6살 나는 어린애들에게 충성교육을 매일 시키고 있으며 점심시간이나 새참시간에도 어린이들이 줄지어 서서 밥공기들을 앞에 놓고 <김정일 장군님 감사합니다, 맛나게 먹겠습니다.>라는 인사를 올리고 밥을 먹도록 하군 합니다.

 


 4년제 소학교들에는 7개 학과목 중에 김일성, 김정일 따라 배우기 과목이 기본 과목으로 되어 있습니다. 


6년제 중학교 전 과정에는 15-16개의 과목을 배우는데 여기에는 김일성, 김정일, 김정숙 3김의 혁명역사 과목이 기본과목으로  자리 잡고 있으며 중학교 졸업시험 9개 과목 중에 3김의 혁명역사 과목이 무조건 포함되어 역시 30%의 비중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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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학교육 기간에는 이런 정치교육이 더욱 강도 높이 진행이 되고 있습니다.

대학에서는 3김의 혁명역사와 김일성의 노작, 김정일의 문헌, 김일성주의 기본, 노동당정책, 주체철학, 등 정치과목이 전 과목의 35% 이상을 넘어서며 이 정치과목들은 다른 과목들과 달리 대학 전 기간 마지막까지 끊이지 않고 꾸준히 진행됩니다. 

 


  그런데다가 정치과목을 담당한 학부와 교수들의 정치사상성이 담긴 강한 요구와 통제는 대학생들이 자기의 전공과목을 무시하고 정치과목에만 치중하도록 만듭니다. 정치과목의 성적이 낮으면 무서운 비판과 출학 처분까지도 각오  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매달 연구 과제로 쏟아져 내리는 2김의 노작과 문헌 연구,  빨치산 참가자들의 <회상기> 연구, 김일성의 <인민들 속에서>와 김정일의 <덕성실기> 연구, 김일성의 <회고록> 연구 과제들은  대학생들이 대학 전 기간 허리를 펴지 못할 정도로 압박을 하고 있습니다.

 


1960년대에 김일성이 평양의 어느 대학을 찾아서 다음과 같은 <명제>를 남겼습니다. “ 대학생들은 대학기간에 당의 유일사상으로 무장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기술과목에서 3점을 맞았다 해도 정치 과목에서 5점을 맞았다면 5점을 주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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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9.7.18  가톨릭 대학교 간호학 1학년 (09학번)  김은심

 

 

 

 

[ ..... 특히 혁명의 원수들을 미워하도록 교양하는것이 중요하다 .........   ]

 

      사회주의교육에 관한 테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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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주의사상에서 핵을 이루는것은 로동계급의 계급의식이며 공산주의교양에서 기본은 계급교양이다.

계급교양을 강화하여 모든 학생들이 확고한 로동계급적관점을 가지고 로동계급의 입장에 튼튼히 서서 로동계급의 이익을 위하여 몸바쳐투쟁하도록 하여야 한다.


특히 혁명의 원수들을 미워하도록 교양하는것이 중요하다.

혁명의 원수를 미워하지 않는 사람은 적을 반대하여 견결히 싸울수 없으며 참다운 혁명가로 될수 없다.
학생들을 제국주의와 지주, 자본가 계급을 미워하는 사상으로 무장시켜 그들이 계급적원수들과 착취제도를 반대하여 견결히 투쟁하도록 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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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k.joins.com/dic/view.asp?idx=20001224161957

사회주의교육에 관한 테제[사회] 

 

 

 

 

   *    [   혁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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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革命이란, 네가 살아있으면 내가 죽는다, 네가 이기면 내가 진다고 하는 무자비한...물리적 대결전을 요구 한다」고 로동신문(2000년 12월 22일자「正論 白頭의 銃(총)의 혈통」는 썼다. 죽일 것인가 죽임을 당할 것인가, 어느 쪽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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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원쑤에 대한 증오와 적개심이 서리발같이 솟구치게 하여야 한다 .........   ]

 


<北신년사> 공동사설 全文
 

연합뉴스 | 기사입력 2007-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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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군을 혁명의 수뇌부를 한목숨 바쳐 결사옹위하는 불사신의 총폭탄대오, 무적필승의 강군으로 억세게 준비시켜야 한다. 최고사령관의 혁명사상으로 전군을 일색화하고 혁명적 령군체계와 군풍을 확고히 세우며 혁명화를 적극 다그쳐 수령의 군대, 당의 군대로서의 풍모를 끝없이 빛내여나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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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인민군장병들의 가슴 마다에 조국과 인민에 대한 사랑이 용암처럼 끓어번지고 원쑤에 대한 증오와 적개심이 서리발같이 솟구치게 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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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주의교육에 관한 테제 [ 社會主義敎育――these ]

 

〔개 요〕


〔전개 및 내용〕

주체사상에 기초한 북한의 공식적 교육강령.

 

〔개 요〕

1977년 9월 5일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제5기 14차 전원회의에서 발표된 ‘사회주의교육에 관한 테제’는 그 동안 사회주의 건설과 혁명발전의 매개 단계에 따라 그 내용을 고쳐왔던 교육정책을 종합적으로 정리한 공식적 교육강령이다. 북한에서는 이를 두고 ‘주체의 교육사상·이론·방법을 전면적으로 집대성한 불멸의 교육총서’로 평가하고 있다.


교육테제에 따르면 교육은 ‘공산주의적 인간을 양성하는 사상·문화교양의 무기’이며, 교원은 ‘후대들을 혁명의 계승자·공산주의자로 키우는 직업혁명가’로 규정되고 있다. 북한에서 교육은 사상교양의 핵심적 방법이며 내용이다. 사상혁명이란 바로 낡은 사상을 뿌리뽑는 인간개조사업으로서 공산주의의 완전승리에 이를 때까지 진행되는 계급투쟁의 형식으로 설명된다. 따라서 사상·기술·문화의 3대 혁명 가운데 사상혁명의 중요성이 특별히 강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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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테제는 5개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사회주의 교육의 원리·내용·방법·제도, 그리고 교육기관의 임무와 역할 및 교육사업에 대한 지도와 방조 등이 그것이다. 교육테제에서 제시한 교육목표는 모든 인민을 ‘혁명화·노동계급화·공산주의화하여 공산주의적 새인간을 만든다는 것’이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 견지해야 할 원칙과 정책노선은 교육에서의 당성과 노동계급성의 구현, 교육에서의 주체의 확립, 교육과 혁명 실천의 결합, 국가의 교육사업에 대한 조직·진행의 책임 등이다.


북한은 교육테제 발표일인 9월 5일을 ‘교육절’로 정하여 매년 기념행사를 개최하고 교육강령에 따른 ‘주체형’의 공산주의 혁명인재 양성을 거듭 강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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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배떼기를 찌르다’, ‘까부시다’, ‘피바다’, ‘원쑤’ .......

   ..... 부모형제의 피자국은 우릴 보고 외친다. 아, 나 어린 어깨에 복수의 총을 메고 나섰다” ...........   ]

 

 

        북한의 교육

 

 

Ⅰ. 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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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교육이념이나 목표는 북한의 정치지도이념과 무관하게 이루어질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북한의 노동당규약 전문은 “조선 노동당의 당면 목적은 공화국 북반부에서 사회주의의 완전한 승리를 이룩하며, 전국적 범위에서 민족해방과 인민민주주의의 혁명과업을 완수하는 데 있으며, 최종 목적은 온 사회의 주체사상화와 공산주의사회를 건설하는 데 있다”라고 그들의 정치노선을 밝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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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 본론

 

 


1. 북한 교육의 이념과 목표

 

북한은 교육에 대한 이념과 목표를「사회주의 헌법」과「어린이 보육양법」등에 각각 명시하고 있다. 1992년에 개정된 북한의 사회주의 헌법 제43조에는 “국가는 사회주의 교육학의 원리를 구현하여 후대들을 사회와 인민을 위하여 투쟁하는 견결한 혁명가로, 지?덕?체를 갖춘 ‘공산주의적 새 인간’으로 키운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그리고 '76년에 채택한「어린이 교육보양법」에서는 “어린이들은 조국의 미래이며 공산주의 건설의 후비대이며 대를 이어 혁명할 우리 혁명위업의 계승자들이다라고 명시하여 교육목표가 어린이들을 ‘지?덕?체를 갖춘 공산주의적 새 인간’, ‘공산주의 건설의 후비대’, ‘혁명위업의 계승자’로 육성 하는데 두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이러한 교육의 이념과 목표에 따른 구체적 지침으로는 김일성이 교육문제와 관련하여 한 연설, 교시와 명령을 일정한 체계에 맞추어 77년 공포한「사회주의 교육에 관한 테제」를 들 수 있다. 여기에는 ‘모든 학생들이 개인주의, 이기주의를 없애고, 집단주의 원칙에 따라 사회와 인민의 이익, 당과 혁명의 과업을 위하여 몸 바쳐 투쟁하도록 교양해야한다.’고 제시하고 있다. 이는 교육을 공산주의적 인간을 양성하는 사상, 문화교양의 거점'으로 정의한 것이며, 교원을 ‘후대들을 혁명의 계승자, 공산주의자로 키우는 직업적인 혁명가’로 명시한 것이다.

 

북한의 교육은 이러한 이념과 목표에 따라 당과 수령의 영도 밑에 하나의 사상, 하나의 조직으로 결속하여 노동계급 의식을 교양시키며, 자본가 계급에 대한 노동자 계급의 계급투쟁의식을 고취시키고 있다. 또한 집단주의 원칙에 따라 일하고 생활하며, 사회와 인민의 이익 그리고 당과 혁명의 이익을 위하여 몸 바칠 것을 교양함으로써, 집단에 대한 헌신과 봉사정신을 주입시키고 있다. 또한 교육과 실천의 결합, 교육과 노동의 결합의 이름 하에 노동 및 생산실습과 연관되는 학습활동을 통해 사회주의 혁명 실천에 필요한 지식과 실천능력을 키우고 혁명성을 단련시키고 있는 것이다.

 

교육은 북한헌법 제43조 규정대로 '공산주의적 새 인간', '혁명전사'를 양성하는데 목표를 두고 있어 김일성 부자 신격화와 대남?대미?대일 적개심고취, 공산주의 도덕교양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2. 북한의 교육내용 및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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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정치사상교육 강화

 

북한은「사회주의 교육에 관한 테제」에 정치사상교육의 중요성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정리해 놓았다. 즉“모든 교육조건과 수단은 사람의 사상을 개조하는 데 복종하여야 한다”혹은“정치사상교육을 잘하는 기초 우에서만 과학기술교육과 체육교육도 성과적으로 진행할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교육내용에 정치 사상성을 띨 것을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정치사상성은 최근 입수된 북한 교과서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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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 대남 적개심 고취

 

정치사상교육 내용상 주목되는 특징은 자유민주주의적 정치, 경제, 사회 등 ‘착취사회’와‘착취계급’, ‘제국주의’등으로 비난하면서 이에 대한 증오심을 고취하였다. 그리고 이를 모두 대남 증오심과 적개심으로 비약시키는 것이다.


혁명투쟁심의 고취 내용을 유형화해 보면 대남 비방·모략, 지주·자본가의 탐욕과 무자비성, 미·일의 만행 등으로 분류할 수 있다. 교과서의 문장은 미사여구가 아니면 호전적 용어가 사용되고 있다. 일부 문구들은 극단적으로 자극적이며 비속하다. 예컨대 ‘배떼기를 찌르다’, ‘까부시다’, ‘피바다’, ‘원쑤’들과 같은 호전적 용어나‘ 혁명의 전취물’, ‘타승’(승리), ‘고지점령’(목표달성) 등과 같은 군사용어가 학교의 교육용어로 사용되고 있다. 이는 언어를 혁명과 건설의 무기로 간주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음악교과서에도 대남 증오심을 고취하는 노랫말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예컨대 “남녁땅을 짓밟는 원쑤미제와 일제를 쳐부수러 나간다. 피에 주린 침략자 모조리 쳐부시자. 부모형제의 피자국은 우릴 보고 외친다. 아, 나 어린 어깨에 복수의 총을 메고 나섰다”와 같은 것이다. 이와 비슷한 가사의 노래는 ‘소년근위대원의 노래’, ‘나는야 꼬마 명사수’, ‘꼬마 땅크 나간다’등 상당히 많이 있다.

 

수학교과서에는 남한 어린이의 비참함을 부각시키고 미·일에 대한 투쟁심을 고취하는 연습문제가 적지 않게 포함되어 있다. “남조선에서 학교에 못가는 아동의 숫자, 이중에서 구두 닦기는 몇 명이고 빌어먹는 아이는 몇 명인가”와 같은 문제를 반복해서 수록하고 있다. 자연계와 수학교과서의 연습문제 가운데는 군사지식을 전수하거나 전쟁 시에 실제로 적용할 수 있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다. 예컨대 “군사 놀이를 하면서 암호를 정했습니다. 보초가 부르는 수와 합하여 600이 되는 수를 불러야 우리편입니다. 보초가 239를 불렀습니다. 몇을 불러야 우리 편입니까” 등과 같은 문제가 수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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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8.12.9.

 

[ ....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 ......

   .... 공비들은 .... 입을 벌린 후 대검으로 입을 찢어 살해 .........    ]

 


이승복 동상 철거하고, 교과서에서 빼고… 17년간 활개친 광기(狂氣)들

 

손진석 기자 aura@chosun.com

입력 : 2009.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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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승복 사건은

 

1968년 강원도 무장공비… 일가족 4명 무참히 살해


1968년 12월 9일 저녁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노동리 계방산 중턱의 이석우(당시 35세)씨 집에 무장공비 5명이 침입했다. 이들은 그해 10월 말 울진·삼척지역에 침투했다가 우리 군의 추격을 받고 도주하던 공비 120명 중 일부였다.


당시 집주인 이씨는 집을 비웠고, 부인 주대하(당시 33세)씨와 승권(호적명 이학관·15세), 승복(9세)·승수(7세)·승자(여·4세) 등 4남매가 집을 지키고 있었다.

 

공비들은 당시 초등학교 2학년이던 승복군에게 "너는 북한이 좋으냐, 남한이 좋으냐"고 물었고, 승복군은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대답했다. 이에 공비들은 승복군의 멱살을 잡아 입을 벌린 후 대검으로 입을 찢어 살해했다.


공비들은 승수와 승자도 벽에 내동댕이쳐 살해했고, 주씨는 대검에 수차례 찔려 숨졌다. 유일한 생존자인 장남 승권씨는 공비들에게 가슴을 관통당하는 등 36군데를 찔렸으나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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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9/02/12/2009021201703.html?Dep0=chosunnews&Dep1=related&Dep2=related_all

 

 

 

 

 

[ .....  “공산주의는 콜레라와 같다. 인간은 콜레라와 함께 살 수는 없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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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승만 박사는 한국 지식인들이 공산주의의 속삭임에 넘어가던 1920년대부터 벌써 공산주의의 악마성을 간파하였습니다.

그는 “공산주의는 콜레라와 같다. 인간은 콜레라와 함께 살 수는 없다”고 말하곤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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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로 지킨 낙동강전선, 기도로 이루어낼 통일한국

 


“제 늙은 목숨 조국통일의 제단에 바치겠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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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대통령의 기도 뒤에는 프란체스카 여사와 오스트리아 빈의 그의 어머니 언니 베티까지 전쟁이후 근심하며 밤을 새워 금식하며 한국의 자유와 평화를 위해서 기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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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대통령은 매일밤 우리 민족이 통일을 이룩할 수 있는 용기와 힘을 갖게 해주시고 이 민족을 올바로 이끌어갈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를 하나님께 기도하며 간구했다고 전한다.


“일본의 압제에서 우리민족을 해방시켜주신 하나님 아버지 저의 늙은 목숨을 조국통일의 제단에 바치겠나이다. 불쌍한 우리민족을 굽어살피사 통일과 재회의 기쁨을 안겨주시고 영세자유와 평강복락을 누릴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저의 보잘 것 없는 영혼을 조국의 통일 제단에 바칠테니 원하실 때에 아버지 곁으로 거두어 주옵소서”(중앙일보 1984/3/1, 6·25와 이승만 대통령중)라는 기도는 당시 대통령이 전쟁속에서도 남북의 통일을 생각하며 시대를 초월해 하나님께 간구하고 있음을 잘 나타내고 있다. 전란중 대통령이 했던 많은 일중에 가장 간절히 했던 일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었다.


오진석기자 2002-07-22

 

 

 

 


http://www.youtube.com/watch?v=DLh6LYNuG0U

 

  ○ 6.25의 노래 ○


6.25노래 / 박두진 작사 / 임동진 작곡 

 


1.


아~ 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날을 조국을 원수들이 짖밟아 오던 날을
맨 주먹 붉은 피로 원수를 막아내어 발을 굴러 땅을 치며 울분에 떤 날을


이제야 갚으리 그 날의 원수를 쫓기는 적에 무리 쫓고 또 쫓아
원수의 하나 까지 쳐서 무찔러 이제야 빛내리 이 나라 이 겨레

 

2.


아~ 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 날을 불의의 역도들을 멧 도적 오랑케를
하늘의 힘을 빌어 모조리 쳐부수어 흘려온 값진 피의 원한을 씻으리


이제야 갚으리 그 날의 원수를 쫓기는 적에 무리 쫓고 또 쫓아
원수의 하나 까지 쳐서 무찔러 이제야 빛내리 이 나라 이 겨레

 

3.


아~ 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 날을 정의는 이기는 것 이기고야 마는 것
자유의 그날 까지 싸우고 또 싸워서 다시는 이런 날을 오지 않게 하리


이제야 갚으리 그 날의 원수를 쫓기는 적에 무리 쫓고 또 쫓아
최후의 순간 까지 쳐서 무찔러 이제야 빛내리 이 나라 이 겨레

 

 

 

 


     <우리의 맹세>

 

 
 하나: 우리는 대한민국의 아들딸, 죽음으로써 나라를 지킨다.

 둘: 우리는 강철같이 단결하여 공산침략자를 쳐부수자.

 셋: 우리는 백두산 영봉에 태극기 휘날리고 남북통일 완수하자.
 

 

 '우리의 맹세'는 1949년 7월 당시 문교부가 제정하였다.

 이 맹세문은 각급학교 교과서에는 물론이고, 모든 서적의 맨 뒷면에 어김없이 인쇄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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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仁秀 박사는 李承晩 대통령이 국민에게 남긴 유언을 소개했다.『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는 신약성경 갈라디아서 5장 1절 말씀을 자주 하시면서 국민들께 남기는 유언이라고 하셨어요. 다시 나라를 잃고 침략을 당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경제적, 문화적 침략에 대비해 정체성을 해칠 노예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하셨습니다』유해가 운구되고 이화장에 빈소가 마련되자 전국에서 추모객이 몰려들었다.

장례식 때 엄청난 인파가 몰려와 참배를 하는 바람에 이화장 담이 무너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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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5.4.30.

 

 [  ...... 지키지 못하는 날에는 다 죽어야 한다 ........  ]

 

 

 [ 박정희 대통령 일기 중에서 ]

 


1975년 4월 30일 : 월남 패망 후..

 

월남공화국이 공산군에게 무조건 항복했다.

비통함을 금할 수 없다.


한때 우리의 젊은 이들이 파견되어 월남 국민들의 자유수호를 위하여 8년간이나 싸워서 그들을 도왔다. 연 파병수 삼십만명. 이제 그 나라는 멸망하고 이제 월남공화국이라는 이름은 지구상에서 지워지 고 말았다.


참으로 비통하기 짝이 없다.

자기 나라를 자기들의 힘으로 지키겠다는 결의와 힘이 없는 나라는 생존하지 못한다는 당연하고도 냉혹한 현실과 진리를 우리는 보왔다.

남이 도와준다고 그것만을 믿고 나라를 지키겠다는 결심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가 망국의 비애를 겪는 역사의 교훈을 우리눈으로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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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강산은 조상들이 수천 년 동안 고진감래를 다 겪으면서 지켜오며 이룩한 조상의 나라이다. 조국이다.

우리가 살다가 이 땅에 묻혀야 하고 길이길이 우리의 후손들에게 물려주어서 이어가도록 해야 할 땅이다.

영원히 영원히 목숨이 끝나는 그날까지 지켜가야 한다.
저 무지막지한 붉은 오랑캐 들에게 더럽혀서는 결코 안된다.


지키지 못하는 날에는 다 죽어야 한다.


죽음을 각오한다면 켤코 못 지킬 리 없으리라.

 

 

 


박정희 日記

 

만고역적에게 민족의 원한을 풀어야 한다


1976년 6월 25일 (금) 흐림

 


6.25 26주년이다. 大逆 김일성 도당들이 동족상잔의 전쟁을 도발한 지 26주년이 된다. 조국강산을 피로 물들이고 국토를 초토화시키고 수십만의 동포가 고귀한 생명을 잃었다.

대한민국을 공산화하기 위해서 소위 남조선 해방이라는 구호를 내걸고 이처럼 엄청난 죄악을 저질렀다. 반만년 역사상 동족끼리 이처럼 처참한 살육전은 없었다.

이 대역무도한 놈들의 이 죄과를 어떻게 다스려야 하나. 千秋에 씻을 수 없는 이런 엄청난 죄를 범하고도 지금도 또 다시 남침의 야욕을 버리지 않고 호시탐탐 남침의 기회를 노리고 있으니 이 만고역적들을 여하히 治罪해야 하나.

 

길은 하나뿐이다. 전력을 경주하여 우리의 국력을 배양하는 길이다. 역적도당들에게 천벌을 가할 수 있는 막강한 국력을 길러서 민족의 원한을 풀어야 한다. 애국선열, 전몰군경, 반공애국투사들의 천추의 한을 풀어줄 수 있는 길은 오직 이 길 하나뿐이다. 나의 모든 생명을 바쳐서 이 민족적 사명을 기필코 완수하리라.

 

천지신명이시여! 나에게 大業을 완성할 수 있는 지혜와 용기와 힘을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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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

 

[ ...... 사랑채 .... 남쪽 벽면에는 고(故) 신영복 선생이 쓴 ‘사람 사는 세상’이라 적힌 액자가 .........


  ....... 거실 벽면에는 신영복 선생이 ‘우공이산(愚公移山)’이라 쓴 액자 .........      ]

 


[르포] 일반인에게 처음 공개된 故 노무현 전 대통령 사저 가보니

[중앙일보]  2016.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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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7주기를 맞아 이날 처음으로 사저가 일반인에게 공개됐다. 2008년 준공 이후 8년 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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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 전 대통령 사저는 외관상 하나의 건물로 돼 있지만 노 전 대통령이 생활했던 개인소유 사저동(안채·서재·사랑채)과 경호원들이 근무하는 국가소유의 경호동으로 구분된다. 부지 4257㎡ 건물면적 594㎡다. 건축가 고 정기용이 설계한 것이다. 모두 채광과 통풍이 잘 되는 한옥 구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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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중 사랑채는 노 전 대통령이 평소 손님을 맞이하고 가족이나 보좌진들과 함께 식사를 하던 곳이다. 서재만큼이나 애정을 갖고 자주 머물렀던 곳이다.


사랑채는 동쪽이 높고 서쪽이 낮은 형태다. 채광효과를 높이고 풍광을 더욱 잘 볼 수 있게 디자인돼 있다. 동쪽에는 4폭 병풍같이 생긴 유리창문 4개가 연결돼 있어 봉화산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사계절 변화에 따라 다른 모습의 자연병풍이 펼쳐지는 효과가 있는 것이다.

 

남쪽 벽면에는 고(故) 신영복 선생이 쓴 ‘사람 사는 세상’이라 적힌 액자가 걸려 있다. 그 옆에 정사각형과 직사각형 모양의 유리창문이 있는데 그 너머로 보이는 산이 노 전 대통령의 부모가 일을 하던 과수원과 자신이 고시공부할 때 생활했던 토굴이 있던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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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채는 대통령 부부가 생활하던 개인공간으로 거실과 침실로 구분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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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실 벽면에는 신영복 선생이 ‘우공이산(愚公移山)’이라 쓴 액자와 달마도가 걸려 있다. 거실과 연결된 침실에는 침대만 놓여 있다. 침실 앞에는 나무 벤치가 놓여 있었는데 노 전 대통령이 생전에 식사 후나 글쓰기 작업 중간 중간에 휴식을 했던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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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저 내에는 유일하게 표지석이 있는 나무가 있다. 바로 4·3 유족회가 보낸 산딸나무이다. 대통령 재임시절 4·3 제주민중항쟁이 재조명됐고, 유족회가 고마움의 표시로 이 나무를 보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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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중앙일보] [르포] 일반인에게 처음 공개된 故 노무현 전 대통령 사저 가보니

http://news.joins.com/article/19967058?cloc=joongang|article|comment

 

 


  *   [   20년 복역  통혁당 무기수   신영복   ]

 


1968년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구속 무기징역형 선고, 20년 복역

".... 나는 군법회의 1·2심에서 사형선고 받고 대법원에서 파기환송되어 고법에서 무기징역으로 확정되었습니다 ......"


1988년 8월 15일 특별가석방으로 출소.  20년간 복역.

 


1996년  [ 신영복은   " 근본적인 원칙을 폐기하는 성급한 청산주의적 오류를 범해서는 안된다" 고   말합니다.   ]


월간‘말’1996년 8월호(글/김경환 기자, 사진/박진희 기자)
*1995 월간말지 기획위원   이광재

 

2000년  [ 송두율교수 귀국추진 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였읍니다. ]

 

2001-03-28  [  신영복은  자본주의는  실패했다고   주장합니다.    ]

http://www.ohmynews.com/articleview/article_view.asp?at_code=37151

 

 


 
   [ ..... 민족해방전선이라는 조직의 명칭은 ... 베트남을 보면서 그런 성격의 조직이어야 한다는 논의는 있었다고 .......   ]

 

신영복의 60년을 사색한다

민족주의자 교사 아들로 태어나 4·19의 충격을 맛보고 무기수가 되기까지…올해 교수 정년을 맞는 그에게 한국 현대사와 통혁당사건의 내막을 듣는다


▣ 한홍구/ 성공회대 교양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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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민족해방전선이라는 조직의 명칭은 명시적으로 합의한 적은 없지만, 분단된 베트남을 보면서 그런 성격의 조직이어야 한다는 논의는 있었다고 회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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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hani.co.kr/section-021075000/2006/05/021075000200605110609056.html

2006년05월11일 제609호

 

 


[  ..... 남민전 .... 베트남 전선 방식으로 통일전선을 형성, 궁극적으로는 정부를 전복시키고 사회주의국가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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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헌영(가명 한민성 상황 출판사 대표)과의 일문일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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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민전의 성격은?

답= 사회주의 이념을 가진 인사들로 조직된 단체로 알제리 베트남 전선 방식으로 통일전선을 형성, 궁극적으로는 정부를 전복시키고 사회주의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조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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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선기 땅에 묻고 꽃불 작전

 경향신문 1979.11.13.

 

 

 


[ ..... 통일혁명당은 김종태가 월북해 ... 지령·자금을 받고 결성 .....
  .... 주범 김종태·김질락·이문규는 월북해 조선로동당에 입당 .........     ]


[  .....  암호를 해독하여, 이문규를 구출하러 북이 파견한 공작선을 격침시키면서 2명을 생포 ........    ]


[ .....  전향서는 썼지만, 사상을 바꾼다거나 동지를 배신하는 일은 하지 않았으며 .........     ]

 

통일혁명당 사건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통일혁명당 사건은 박정희 정부 시절인 1968년 8월 24일 중앙정보부가 발표한 지하당조직사건이다. 158명이 검거되어 50명의 구속자를 낸 1960년대 최대의 공안 사건으로 김종태를 비롯한 주범들은 사형을 당했다.[1]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은 "김종태가 전후 4차례에 걸쳐 북괴 김일성과 면담하고 '통일혁명당'을 결성하여 혁신정당으로 위장, 합법화하여 반정부·반미데모를 전개하는 등 대정부공격과 반정부적 소요를 유발시키려는 데 주력했다"라고 발표했다.[1]


개요[편집]


통일혁명당은 김종태가 월북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지령·자금을 받고 결성된 혁명 조직이었다. 통혁당은 중앙당인 조선로동당의 지시를 받는 지하당이었다. 주범 김종태·김질락·이문규는 월북해 조선로동당에 입당했고, 당원 이진영·오병헌은 1968년 4월 22일 월북해 교육을 받던 중 1968년 6월 말 통혁당 사건이 터지자 북한에 머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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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건으로 김종태, 이문규, 김질락이 사형을 선고 받았다.[2] 서울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한 후 육군사관학교에서 교관을 하다가, 구속되었던 신영복은 1심과 2심에서 사형, 대법원에서 무기징역을 선고 받았다.[3] 중앙정보부는 암호를 해독하여, 이문규를 구출하러 북이 파견한 공작선을 격침시키면서 2명을 생포하였고,[4] 이들도 통혁당 관련자로 사형을 언도하였다. 박성준은 자신의 처 한명숙을 포섭하는 등의 혐의로 체포되어 15년 형을 선고받았다. 류낙진은 무기징역을 선고 받았으나 이후 20년 형으로 감형되었다.


이 사건과 관련되어 검거된 자는 모두 158명이었으며, 이들 중 73명이 송치되었고, 23명은 불구속되었다. 무장공작선 1척, 고무보트 1척, 무전기 7대, 기관단총 12정, 수류탄 7개, 무반동총 1정과 권총 7정 및 실탄 140발, 12.7mm 고사총 1정, 중기관총 1정, 레이더 1대와 라디오 수신기 6대, 미화 3만여 달러와 한화 73만여 원 등이 압수되었다.[5]


김종태가 사형을 당하자 김일성은 그에게 영웅 칭호를 수여하고, 해주사범학교를 김종태사범학교로 개칭하였다. 신영복은 사상 전향을 하여 1988년 출소하였다. 그러나 월간 '말'지와의 인터뷰에서 신영복은 전향서는 썼지만, 사상을 바꾼다거나 동지를 배신하는 일은 하지 않았으며, 통혁당에 가담한 것은 양심의 명령 때문이었고 향후로도 양심에 따라 통혁당 가담 때와 비슷한 생각으로 활동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6]

 

 

 

 


       *  더불어 숲

 


[ ....... 저의 숲은 안토니오 그람시의 ‘진지론’과 같은 의미입니다 .........

  ...... 진지를 만들어서 버티자는 얘기에는 도처에 숲을 만들어서 힘도 기르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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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에게 숲이란 단어는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신영복‥개인이 반성해야 할 부분은 머리입니다. 기존 지배 이데올로기를 학습하고 포섭해서 수용하는 형식으로 자기 의식이 결정됩니다. 그 의식을 성찰해서 자기 주체 의식으로 만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쿨 헤드’(차가운 머리)를 ‘웜 하트’(따뜻한 가슴)로, 즉 인간적으로 완성해내는 게 필요합니다. 머리에서 가슴까지는 ‘롱기스트 저니(longest journey·장거리 여행)’입니다.

이성과 감성이 조화된 개인은 나무입니다. 전 삶의 현장으로서의 숲 개념을 갖고 있습니다. 숲은 다양성입니다. 화폐적 가치라는 단일한 가치 중심으로 모든 것을 질적으로 동질화하는 근대성에 대한 성찰의 화두로 숲을 내세웠습니다. 다양성과 차이를 존중하고, 강한 나라와 약한 나라, 전자본주의와 비자본주의도 공존하는 질서가 진보한 문명의 형태입니다.


또 저의 숲은 안토니오 그람시의 ‘진지론’과 같은 의미입니다. 그람시는 완고한 유럽 보수주의 벽 앞에서 아픔을 가졌던 사람입니다. 진지를 만들어서 버티자는 얘기에는 도처에 숲을 만들어서 힘도 기르고 그 속에서 인간적 가치를 위로하는 공간을 만들자는 실천적 의미도 있습니다. 숲은 근대성의 패권적 논리를 성찰하는 문명 개념으로 쓰이기도 하고, 우리 사회의 인간적이고 진보적인 사고를 키워내는 진지의 운동론적 개념으로 쓰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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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609281739451&code=210000

경향 60돌]신영복 교수 “지배구조 고착으로 과도한 대립·갈등 표출”


입력 : 2006.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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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구사회 ... 국가 ... 주변에서는 시민사회로서 참호가 둘러싸 .... 기동전으로 당당하게 뚫고 들어갈 수 없기에 하나하나 참호를 점령해나가야 .... 기동전이 아닌 진지전 .......   ]

 

안토니오 그람시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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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토니오 그람시(이탈리아어: Antonio Gramsci, 1891년 1월 22일 ~ 1937년 4월 27일)는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그리고 반 파시즘을 주장한 이탈리아 지식인, 정치인 그리고 지도자와 사상가였다. 그는 이탈리아 공산당의 창설자 중 한 명이며 한 때 지도자이기도 하였으며, 무솔리니 파시스트 정권에서 투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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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람시는 1926년 1월, 프랑스 리옹에서 비밀리에 열린 전당대회를 통해 정식으로 공산당 총서기로 승인돼 이탈리아 공산당의 지도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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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의 경우 혁명적 세력이 강제기구인 국가를 파괴/점령한 것이다. 러시아에서는 기동전이 가능하다. 그러나 서구사회의 경우, 핵심에는 국가기구로서 국가가 있지만 그 주변에서는 시민사회로서 참호가 둘러싸고 있다. 그러므로 기동전으로 당당하게 뚫고 들어갈 수 없기에 하나하나 참호를 점령해나가야 한다. 이것은 기동전이 아닌 진지전으로서 장구한 시간이 필요하다. 러시아 볼세비키의 혁명전략이 왜 서구사회에 적합하지 않은지를 설명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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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3


[ ..... 일상생활의 곳곳에서 진지를 만들어내는 노력을 계속해야  .......

  ..... 수세국면에서는 역량을 지키는 보루가 되고 객관적인 조건이 성숙했을 때는 공격거점이 되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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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변혁세력은) 일상생활의 곳곳에서 진지를 만들어내는 노력을 계속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진지는 헤게모니를 장악할 수 없는 수세국면에서는 역량을 지키는 보루가 되고 객관적인 조건이 성숙했을 때는 공격거점이 되는 것이지요.


그리고 어느 경우든 생활상의 민주주의를 충실히 견지하여야 함은 물론입니다.…
진지화와 생활상의 민주주의를 토대로 해서 주체적 역량을 키워가야 하는 것이지요.

이러한 역량이 비축되어 있을 때 객관적 조건을 주동적으로 장악할 수 있는 것이지요.”


   - 『황해문화』 2003년 가을호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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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unron.com/3295

 

 

 


[ .....  21세기엔 한그루 한그루 나무인 우리가 더불어 숲이 되는 새 세상을 만들어야 합니다 ........    ]

 

인터넷으로부터의 사색
우리사상 연구자 신영복씨

 

‘더불어 숲’ 새 세상 위해 대화방 개설…“존재론에서 관계론으로 가야 합니다”

그의 이름 석자는 한때 ‘갇혀 있는 이’들이 세상 사람들에게 보내고픈 편지의 대표 발신자였다. 88년에 출간된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93년에 나온 영인본 <엽서>는 20년 긴 세월을 ‘짐승의 시간’에 묶여 지내야 했던 우리 시대 한 양심수의 고백이자 연서로서 많은 이들의 마음을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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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도소에서도, 세상에서도 다수의 선량한 사람들이 소수 악한 조직에 눌려 있어요. 나무가 숲이 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제 다가오는 21세기엔 한그루 한그루 나무인 우리가 더불어 숲이 되는 새 세상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 길만이 오랜 세월 강철의 역사, 제국주의의 역사에 짓눌려온 우리 백성들이 제대로 살아갈 수 있는 빛이 될 겁니다.”

http://legacy.h21.hani.co.kr/h21/data/L981019/1p9yaj04.html
 

 

 

 

[ ...... 사람을 중심에 두고 인간적 가치를 지키는 진지 그것이 학교입니다 ........ 

   .... 환상을 청산하는 실천의 최전선 .....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전선이며 진지입니다. 우리가 지켜내어야 할 숲입니다 .........     ]

 

지상중계 / 신영복 교수 특강 ‘교사로 산다는 것은’
 
‘인간적 가치의 학교’는 지켜야 할 숲
 

정리 유동걸 기자  ㅣ 기사입력  2007/09/04

 
ⓒ 
지난 9월 1일 ‘대화와 실천을 위한 교육사랑방’ 10주년을 맞아 우리 시대 지성을 대표하는 신영복 교수가 축하 강의 원고를 보냈다. 주간<교육희망>은 강의 원고 내용을 간략히 추려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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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완고한 보수적 구조에 절망했던 그람시는 진지(陣地)와 헤게모니에 대하여 이야기합니다. 인간적 가치를 지킬 수 있는 진지, 그리고 지배이데올로기에 맞설 수 있는 저항담론으로 무장한, 이데올로기의 헤게모니를 간절하게 소망했던 그의 고뇌를 읽을 수 있습니다. 사람을 중심에 두고 인간적 가치를 지키는 진지 그것이 학교입니다. 아마 우리시대에 남아 있는 유일한 진지가 학교일 것입니다. 도도한 물결에 무너지는 전선이고 또 쏟아지는 비를 피할 수는 없는 작은 우산에 불과하지만 학교는 우리 시대의 진지입니다.


인간적 가치를 지키고, 성찰성을 드높이고, 환상을 청산하는 실천의 최전선임에 틀림없습니다.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전선이며 진지입니다. 우리가 지켜내어야 할 숲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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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ews.eduhope.net/sub_read.html?uid=8737&section=&section2
 

 

 


 [ ......  국제친선 관람관 ....  '더불어숲'이라고 쓴 서예 작품이 있어서 .........     ]

 

 

동무는 저랑 부부안내원해도 되갔습네다

평양 북남작가대회 참가기(20) 사람아, 이 사람들아


2005.08.29 정용국(yong5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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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일정은 국제친선 관람관을 돌아보는 것이었다. 먼저 이곳은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위원장이 세계 여러 나라의 국가수반이나 외교사절 등 다양한 사람이나 국가로부터 받은 선물을 전시하고 있는 곳인데 그 명칭이 약간은 의아할 뿐 아니라 그 의도도 다분히 속이 들여다 보이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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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일 위원장 전시실에는 오만 점의 선물이 전시되어 있는데 한 점당 일 분씩 보려면 일년 육 개월이 걸린다고 김혜영 안내원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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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일행은 말없이 그 옆에 놓여 있는 현대의 정주영 회장이 보냈다는 다이너스티 승용차만 바라보았다. 선물은 이루 말을 할 수 없을 정도의 가지 수와 규모를 자랑하고 있어서 철도 차량을 통째로 옮겨다 놓은 것에서부터 반지에 이르기까지 그 크기도 천차만별이었다.


신영복 교수의 유명해진 서체로 '더불어숲'이라고 쓴 서예 작품이 있어서 다소 의아해 했는데 신 교수가 사상범으로 20년 동안 감옥에 있었던 사람이란 것을 생각하면 그 의도도 확연하게 보이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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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277292

 

 

 

신영복 "사람이 사람 중심의 세계 인식하는 것이 공부"

30일 오후 저녁 서울 성동청소년수련관 무지개극장에서 '인문학 성찰' 강연


 
2011.10.01  김철관 (3356605) 
 
신영복 선생의 인문강좌, 더 숲 트리오 공연
 


명사의 강의와 교수들의 노래가 어우러진 인문교양강좌가 눈길을 끌었다.

 

"인문학은 인간에 대한 공부다. 살아온 과정,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등을 공부하는 것이다. 인간이 문제의식을 가지고 그 사회를 진단하고 발전시켜가는 것이 공부다. 그래서 인문학과 공부는 같다. 산다는 것이 공부이고, 공부가 곧 산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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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인문학 강연을 한 신영복 교수는 "사람이 사람중심으로 세계를 인식하는 것이 공부를 하는 의미"라면서 "머리에서 가슴으로 가슴에서 발로 가는 것이 공부"라고 말했다.

 

"공부는 머리에서 가슴으로 가슴에서 발로 다른 사람과 함께 공존해 가는 것이다. 개인의 인격완성이 아니라 사회와의 관계를 만들어내, 한알의 밀알이 나무가 되고 숲이 된 것처럼 숲으로 만들어 내는 과정이 공부이다. 공부는 갇혀 있는 생각(사고)을 깨뜨리는 것이다. 갇혀있는 문맥을 깨뜨리는 것이다."

 

그는 "노동자들도 자본가와 같이 욕망의 문맥에 갇혀 있다"면서 "비인간적인 조직성을 가지고 갇혀있는 생각을 많이 하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집은 가옥인데 집값(자본)으로 생각한다. 학벌도 소득과 사회적 지위를 키우는 것으로 생각한다. 이런 강고한 사고의 문맥을 깨뜨려야 한다. 갇혀있는 문맥과 틀을 직시하는 것이 중요하다. 기존 지배이데올로기에 포섭돼 새로운 것에 대한 열망을 잃어버리고 있다. 이제 머리로 생각하는 것을 깨뜨리고 가슴으로 생각할 수 있게 가야한다. 머리로부터 가슴으로 옮아가는 것이 진정한 공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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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남이 허약한 것을 두고 도시과밀 때문이라고들 한다. 인문학적으로 고민한다면 여기에 끝나면 안 된다. 그럼 과밀한 도시는 누가 만들었나를 고민해야 한다. 현대 사회 자본주의 사회가 만들었다. 도시가 만들어진 것은 자본주의를 효율적으로 감당하기위한 물리적 공간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역사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도시다.

과밀이 낳은 근본적인 차이를 고민해야 한다. 자본주의 사회는 얼굴 없는 생산과 얼굴 없는 소비가 일어나고 있다. 보지 않고 사니까 식품에 유해도 색소 넣고, 반사회적 살육이 일어난다. 안보고 죽이고 ,만나지 않으니 죽이는 것이다. 사람이 보이지 않으니 폭탄을 던져 죽인다. 만남이 없는 사회는 엄밀히 말하면 사회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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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634732

 

 


  *   [   북한 헌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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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 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사람중심의 세계관이며 인민대중의 자주성을 실현하기 위한 혁명사상인 주체사상, 선군사상을 자기 활동의 지도적지침으로 삼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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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8 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사회제도는 근로인민대중이 모든것의 주인으로 되고있으며 사회의 모든것이 근로인민대중을 위하여 복무하는 사람중심의 사회제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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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사회주의헌법( 2009.4.9 3차 개정)

 

 

 


[ ..... 통혁당의 지도이념은 .... 김일성동지의 위대한 주체사상(主體思想)이다 .........    ]

 

2006-04-06
 
 
'통혁당'은 北 지령받은 비밀 지하당 조직

written by. 김성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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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9년 발표된 통혁당 선언·강령 역시 소위 “김일성 원수의 위대한 혁명사상, 주체사상(主體思想)을 지도적 지침”으로 삼고 있다.


 선언은 “통혁당의 지도이념은 맑스-레닌주의를 현시대와 우리 조국현실에 독창적으로 구현한 김일성동지의 위대한 주체사상(主體思想)이다. 주체사상(主體思想)은 40여년간의 험난한 혁명의 폭풍우 속에서 완벽함을 과시한 우리 시대의 맑스-레닌주의이다”고 주장했다.


 선언은 또 “우리당은 바로 이 위대한 주체사상(主體思想)을 지도리념으로 삼고 있기에 불패이다. 우리 당의 최고목적은 사회주의, 공산주의 사회를 건설하는 것이다. 사회주의, 공산주의는 인류의 세기적 숙명이며 최고리상이다”며 “미군침략군을 격퇴하고 괴뢰정권을 타도하여 자주적이고 민주주의적인 인민의 정권을 수립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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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konas.net/article/article.asp?idx=8435

 

 

 

*   통혁당 무기수 신영복은  북한의 "사람중심"의 의미에 대해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 .... 선생님의 뜻을 기려 ‘사람중심 민생중심 의회’의 가치를 경기도의회가 앞으로 나아갈 나침반으로 삼겠다 .......    ]

 

경기도의회는 고 신영복 선생을 추모합니다.

기사승인 2016.01.18 

- 경기도의회 현판 글씨는 선생의 마지막 유작으로 남

   
김유임의장(직무대리


[PBS뉴스]유채연 기자=경기도의회 김유임의장(직무대리)은 1월 16일 오후 8시 성공회대학교 대학성당에 마련된 고 신영복 선생의 빈소를 찾아서 이재정 경기도교육감과 함께 조문했다. 또한 빈소에는 경기도의회 근조기를 세워 선생의 명복을 빌었다.

고 신영복 선생은 1월 15일 오후 10시경 지병인 흑색종(피부암)이 악화되어 목동 자택에서 타계하였다. 영결식은 1월 18일 오전 11시 성공회대학교 대학성당에서 학교장으로 치러질 예정이다.


김유임 경기도의회 의장은 “우리 시대 가장 아픈 시련을 겪으셨지만 가장 아름다운 희망을 꿈꾸셨고, ‘사람’이라는 화두를 잡아 평생을 올곧게 살아가신 선생이 부디 영면하셔서 이제는 아픔 없이 평안하시기를 기원한다”고 말했다.

한편 “사람중심 민생중심 의회”라는 경기도의회 현판 글씨는 선생의 마지막 유작으로 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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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 위안부 소녀상 앞에 신영복 선생이 글씨를 쓴 “고등학생이 함께 세우는 평화비”가 2015.11. 3일 제막된 바 있다. 이 평화비는 이화여고를 비롯한 전국 15개 고등학교 학생들이 요청하여 2015년 6월 경 신영복 선생이 글씨를 써주었다.

 

한편 강득구 전 경기도의회 의장은 “사람중심 민생중심 의회”를 제9대 의회의 의정가치로 삼았고, 신영복 선생에게 요청하여 지난해 10월 7일 선생이 암투병 중에도 글씨를 써준 것이다. 선생은 강득구 의장이 사례를 하겠다는 제안을 물리치고, 무상으로 기부하였다. 당시에 선생은 “사람중심, 민생중심은 이 시대 의정철학의 최고 가치이고, 경기도의회가 전국에서 가장 큰 지방의회인 만큼 가장 훌륭한 정치를 해주기 바란다”고 말한 바 있다.


김유임 의장(직무대리)은 “선생님의 뜻을 기려 ‘사람중심 민생중심 의회’의 가치를 경기도의회가 앞으로 나아갈 나침반으로 삼겠다.” 면서, “다시 한 번 경기도의회의 이름으로 선생님의 영면과 명복을 기원한다.”고 말했다.


http://m.pbstv.kr/news/articleView.html?idxno=7006

 

 

 

 

            1996년


 [ ......   근본적인 원칙을 폐기하는 성급한 청산주의적 오류를 범해서는 안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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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 실천에 대해서 얘기해야겠습니다. 사회가 변화했으면 당연히 거기에 상응하는 대응논리도 달라져야 한다고 봅니다. 사회전반의 개방화에 따라 운동이 정치적 목표를 잃고 방황하고 있다는 지적이 많습니다.


“사람들은 커다란 가치보다는 당장의 생활상의 부조리를 개선하기 위해 실천운동에 나섭니다. 특히 개인주의적 사조가 만연해 있는 지금과 같은 조건에서는 개인의 직접적인 삶의 문제로부터 출발해야 한다고 봅니다. 사람들은 교통문제를 단지 교통의 문제로만 보지 않습니다. 교육문제를 단지 학교의 문제로 만 보지 않습니다. 실천투쟁을 통해 이런 문제들이 우리 사회의 구조와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지금은 과거와 분명히 다른 조건에 놓여 있습니다. 우리가 강렬하게 추구했던 실천적인 틀이 지금은 받아들여지기 어렵습니다. 지금 아마 레닌의 전위당과 같은 강령 규약을 받아들이고 충실하게 그것을 이행해 낼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과거의 실천방법은 변화된 사회적 조건에 맞게 반성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반성을 한다고 하면서 근본적인 원칙을 폐기하는 성급한 청산주의적 오류를 범해서는 안된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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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높은 인간성을 향한 불안스럽지만, 확고한‘떨림’
월간‘말’1996년 8월호(글/김경환 기자, 사진/박진희 기자)


*1995 월간말지 기획위원   이광재

http://www.shinyoungbok.pe.kr/

 

 

 

[ 신영복은 2000년에 송두율교수 귀국추진 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였읍니다. ]

 


2000년 8월 통일맞이 서신

발행처 : 통일맞이 발행인 : 이재정 편집인 : 정도상 (110-740) 서울시 종로구 연지동 136-56 한국기독교연합회관 1301호
전화 : 02-762-8201 전송 : 02-708-4985 E-mail : tongilmoon@hanmail.net

 

▣ 송두율교수 귀국추진


제5회 늦봄통일상 수상자인 송두율 교수의 귀국추진위원회가 구성되었다. 시민사회단체, 종교, 정당. 학계 인사를 바탕으로 국회의원인 이창복 의원이 대표를 맡았다.

현재 추진 위원은 총 159명이며 명단은 아래와 같다.


.....권오헌 ...김근태 ....김세균 ...김지하 ...리영희 문규현 ... 박순경 박용길 ... 신영복 ..심지연..이재정 ..임종석..장상환..조희연 ... 진 관 ... 한완상 ... 한상진.....


앞으로 송두율 교수의 귀국 허용 촉구 기자회견과 청와대, 국정원장의 면담을 할 예정이며 민주당과 한나라당을 방문도 추진 중이다.

 

 

 


      2001.4.

 

[ ..... 진짜 문제는 변혁의지가 없는 것 .......

  ..... 현 단계에서 연대성이 가장 중요한 과제 ........    ]

 


신영복의 세상읽기

“따뜻한 가슴과 연대만이 희망이다”


신영복

2001년 07월 호

 

70년대에 민주화운동을 한 서울대 출신자 모임 관악민주포럼(회장·박석운)은 지난 4월19일 창립 1주년 기념강연회를 열었다.

강사는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신영복 교수. 신 교수는 이날 강연에서 관계론적 사고의 중요성과 사회운동의 올바른 방향, 지식인의 사명에 대한 평소의 생각을 다양하고 풍부한 사례를 통해 설득력있게 풀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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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상황이 어렵다는 말을 많이 듣습니다. 어렵다는 것은 이를테면 운동의 상황이 어렵다는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국민의 정부가 보여주는 한계나 세계화와 신자유주의의 파괴적 충격 때문이겠죠. 사실입니다. 사회변혁에 관한 근본적 사고를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서 현재의 객관적 상황을 결코 긍정적으로 볼 수는 없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87년 당시의 열정과 헌신을 찾아볼 수 없음은 물론이고 민주화투쟁에 투신했던 많은 사람들이 주변화되고 흩어지고 서서히 그리고 결정적으로 사라지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처럼 주체적 역량도 취약하고 객관적 조건도 열악한 상황에서 과연 어떤 방향으로 우리 고민을 모아가야 할 것인가, 이러한 문제에 관한 평소의 제 생각을 몇 가지 말씀드릴까 합니다.

 

주체 역량이 역사를 결정한다

 

사회변혁 문제는 여러분이 잘 아시는 바와 마찬가지로 우선 두 가지 측면에서 접근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주체적 역량의 문제이고 둘째는 객관적 조건의 문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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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주체역량의 관점에서 논의하자고 했습니다만 문제는 이 역량이 고립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사회적으로 고립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시간적으로 다시 말해서 세대간에도 단절되어 있다는 것이 더 절망적입니다. 역량의 후속부대를 이뤄야 할 젊은이들의 사고방식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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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우리 사회는 변혁역량의 충원구조가 와해된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현실을 냉정하게 전제하고 고민해야 하는 것입니다. 최근에는 신자유주의 논리와 세계화논리가 막강한 포섭력을 갖게 되고 세계화와 식민의식이 동시에 진행되면서 이제는 근본적인 문제에 대한 담론 자체가 아예 사라지고 없습니다. 참으로 어려운 상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겨야 할 것이 바로 ‘사상’이라고 생각합니다. 민주화운동 과정에 노정된 인식의 불철저성에 관하여 언급하였습니다만 사상이란 현실에 대한 압축적 인식입니다. 그리고 결국 모든 투쟁은 사상투쟁에서 시작하는 것이며 사상투쟁으로 끝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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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본적 인식을 토대로 하여 운동의 주체성을 확립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습니다만, 이 경우 실천과정에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운동성을 생활에서 이끌어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바로 그 생활기반이 이미 황폐해졌다는 사실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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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이 참지 못하는 마음, 다른 사람의 아픔을 참지 못하는 ‘불인인지심(不忍人之心)’이야말로 사회의 가장 중요한 속성입니다. 이것이 없는 사회에서는 ‘차마 못할 짓’이 얼마든지 자행될 수 있는 것이지요. 얼굴 없는 생산과 얼굴 없는 소비, 상품교환관계가 인간관계의 기본인 사회가 곧 자본주의 사회입니다. 그리고 자본주의 사회의 온갖 사회적 비극의 원인은 바로 인간관계가 황폐해지는 데서 비롯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새로운 것을 실천하기 위해 취해야 할 기본적인 방법론은 바로 인간을 그 중심에 놓는 일에서 시작되어야 함은 물론이요, 개인이든 집단이든 그가 관계하고 있는 관계망에 대한 사고를 길러 나가는 태도가 중요하다고 봅니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세례를 받고 있는 우리로서는 이러한 관계론적 사고를 키워가기가 무척 힘듭니다. 관계론적 사고를 운동론에 적용하면 그것이 곧 연대론(連帶論)이지요.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우리의 운동론적 관점 또한 자본주의적 패러다임에 매몰되어 있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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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까 주체적 역량을 질적인 측면에서 보자는 이야기를 했는데, 연대야말로 그 핵심 고리입니다. 연합에서 연맹으로, 다시 전선으로, 파티(party)로 나아가는 연대의 관점에서 우리 사회의 역량을 한번 보세요. 연합형식의 연대도 안 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기본적으로 연대라는, 관계론적 정서가 전혀 없기 때문이에요. 근대자본주의 사회가 지닌 강철의 논리, 그런 존재론적 논리에 다 매몰되고 있는 것이지요.

성공회대 사회교육원에 노동대학이 있습니다. 거기 모이는 노조 간부들께 저는 연대를 해야 한다고 자주 말씀드립니다. 왜냐. 연대야말로 가장 약한 사람들, 역량이 취약한 사람들의 전술이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것이야말로 삶의 실상이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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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얼마 전 우리 학교 동료 교수분들의 요청으로 갔던 참여연대 간부수련회에서는 진지하고 허심탄회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그날 특강 제목이 ‘시민운동 향기가 없다’였습니다. 물론 주최측에서 붙인 제목입니다만, 저는 (우리 시민운동의) 진짜 문제는 변혁의지가 없는 것이라는 말로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감시기능에 국한된 운동은 결과적으로 변혁을 유보하거나 우회하는 개량적 성격을 벗어나기 어렵다는 요지의 말을 했습니다.


어쨌든 저는 현 단계에서 연대성이 가장 중요한 과제라고 봐요. 루카치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히말라야산맥에 사는 토끼가 제일 조심해야 할 것은, 자기가 평지에 사는 코끼리보다 크다고 착각하는 것이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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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hindonga.donga.com/3/all/13/101175/1

 

 

 

         2002.1.

 

[ ..... 자본주의 체제 ... 언제까지 갈 것인가 나도 몰라 ......

 ...... 비인간적 근본적 모순구조는 영원히 지속될 수 없다 .........    ]

 

신영복 교수의 노동자 철학 강연

17일, 연세대 대강의실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사상과 실천' 주제로 강연


2002.01.18 김철관(3356605)

 

구로구 항동에 있는 성공회대학교 신영복(사회교육원장) 교수가 모처럼 바깥나들이를 했다. 그동안 인터뷰나 외부 강연을 자제했던 그가 강연을 시작한 곳은 17일 오후 연세대 신인문대 대강의실. 민주노동당 서울본부(본부장 노회찬)의 끈질긴 노력으로 신 교수는 강연을 수락했다.

 

그는 17일 오후 7시 30분부터 '일하는 사람들의 사상과 실천'이란 주제로 90분 동안 노동자철학에 대해 강의했다. 강의에 앞서 민주노동당 노회찬 서울본부장은 신영복 선생의 '옆서', '나무야 나무야', '더불어 숲' 등 대부분의 저작들이 20회 이상 발간돼 넓은 독자층을 가지고 있다며 많은 독자들이 신영복 선생님의 말씀을 경청하는 것은 선생님의 오랫동안 추구하고 있는 세계관과 철학의 승리라고 말했다.


이날 신 교수의 강의를 듣기 위해 500여 명의 학생, 민주노동당원, 시민단체회원들이 참여해 북새통을 이뤘다. 신영복 선생은 '나무야 나무야', '옆서', '더불어 숲', '감옥으로부터 사색' 등 저작으로 유명하며, 통역당 사건으로 20여년 간 감옥살이를 끝내고 88년 전주교도소에서 출소했다. 98년 사면으로 30년 만에 공민권을 회복해 자유인이 됐다. 현재 성공회대 교수와 사회교육원원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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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때 의자를 들고 서 벌을 받는 기억이 있을 것이다. 이것은 일하는 사람의 소외를 극적으로 보여준 그림이다. 우리가 만든 축적자본으로부터 억압이란 뜻이다. 의자를 든 그림은 오늘날 사회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그림이다. 의자의 목적은 편하게 앉을 수 있는 자리다. 의자의 목적대로 편하게 앉을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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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인간적 가치가 행세할 수 없는 사회에 살고 있다. 의자를 내려놓을 수 없는 사회가 현대사회다. 최근 아프가니스탄 사태를 보며 누가 누구를 테러했는지 세계적 빈국이 강대국인 미국에게 무차별 공격으로 무너졌다. 세상은 조금도 변함이 없다. 현 심정으로는 '눈이라도 펑펑 쏟아져 보기 싫은 세상을 잠시라도 보기 싫게 해주라'고 말하고 싶다. 이런 구조는 자본주의 열강이 만들어 낸 구조다.

 

아프간 사태는 강자가 약자에게 무자비하게 군림하는 것이다. 근대사회 자본주의 300년 역사는 강철의 역사다. 모든 존재는 자신을 강하게 만들려는 역사다. 다른 사람과 경쟁에서 이길 수 있는 사회, 좋은 대학, 경쟁력 있는 회사 등 노심초사한 강철사회다. 강철역사 시대에 우리가 살고있다. 의자를 머리 위에 들고 있는 사회, 무자비 강자의 횡포가 꾸준히 지속적으로 행패를 부리는 사회에 살고 있다. 참담하기 짝이 없다. 이런 사회 논리적 구조 뿐 아니라 이런 체제가 인간적 관계 그 자체를 황폐화 시켰다.

 

자본주의 체제, 종속적 자본주의, 천민적 자본주의가 우리나라에 언제까지 갈 것인가 나도 몰라. 그러나 논리적 이론적 사고를 한다면 비인간적 근본적 모순구조는 영원히 지속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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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 축척은 근본적 모순체제다. 자본이 자본을 수탈하는 체제, 늑대가 늑대를 잡아먹는 체제와 마찬가지 형태로 바뀌어졌다. 큰 자본이 작은 자본을 흡수합병하고 있다. IMF가 대표적 예다. 우리나라 수익성 있는 기업들이 외국 자본으로 가있다. 자본의 축척을 우민화하고 있는 단계다. 이런 문제를 근본적으로 성찰해야 된다.


이제 각자 수 불리기 등 존재론적 발상 즉 근대적 발상은 안된다. 연맹, 민노당, 진보당 등이 있지만 조직화된 곳이 없다. 조직화 수준의 낮다는 얘기다. 이런 단계에서 고민이 연대다. 연대는 노자 사상의 물의철학에 기초해야 된다. 이것은 약자들의 전략이다. 약자들의 실천 방법이 노자철학이다. 노자철학 중 물의철학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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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방연대보다 하방연대를 해야한다는 것이다. 상방연대는 흡수 가능하다. 반드시 하방연대를 해야 된다. 민주노총도 하방연대를 해야하고 약한자 약한 사회와 무조건 연대해야된다. 이것이 결국 바다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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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064307

 

 

 

        2003.2. 자본주의 체제의 변혁을  논합니다.

 

 [ ..... 자본주의 체제의 변혁은 자본주의에 대한 의식의 변혁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지요. .... 모든 투쟁은 사상투쟁에서 시작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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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이 바로 장자가 이야기한 '우물'입니다. 우리들이 개인적으로 갇혀 있는 우물에서 벗어나야 함은 물론이며, 나아가서 우리 시대가 집단적으로 갇혀 있는 거대한 이데올로기 체계를 깨트려야 하는 것입니다. 체제가 쌓아놓은 거대한 성벽을 허물어야 하는 것이지요. 그 시대의 집합표상인 카르마(Karma)를 깨트려야 하는 것이지요.
 

  자본주의 체제의 변혁은 자본주의에 대한 의식의 변혁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모든 투쟁은 사상투쟁에서 시작한다고 하는 것이지요. 우리가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깨달음(覺)의 의미가 바로 이러한 것입니다.
 

  깨달음의 의미를 지극히 명상적인 것으로 해석하는 것 그 자체가 바로 이데올로기라는 사실을 잊지 않아야 하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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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40030129162126&Section=04

깨달음···고전읽기의 시작이며 끝
신영복 고전강독148 제13강 강의를 마치며-2

2003-02-03

 

 

 


      2006.10


[ ..... 신영복 선생의 글씨로 '참민주·참평등·노동해방 세상을 염원하며 산화해 간 이 땅의 모든 열사들이 투쟁의 심장으로 다시 살아 우리들과 함께 하고 있습니다 ........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369958&PAGE_CD=

 

28명 열사 묻힌 솥발산, 합동추모비 제막
 
 
2006.10.30  윤성효 (cjnews) 
 
 
 
"투쟁의 심장으로 다시 살아."


전교조·노동·사회운동을 하다 분신·투신과 사고 등으로 사망한 28명이 묻혀 있는 경남 양산 솥발산공원묘지. 이곳에 열사·희생자들의 정신을 기리기 위한 '솥발산 열사묘역 합동추모비' 제막식이 30일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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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광주 망월동 5·18묘역과 경기도 마석 모란공원과 더불어 열사와 희생자들이 묻힌 대표적인 묘역으로 알려져 있다. 부산·울산·경남지역 열사추모단체와 노동조합, 민주단체를 중심으로 지난 8월 '열사묘역추진위원회'가 결성되어 모금운동을 벌여왔다. 그 결과 훼손된 묘지를 정비하고, 합동추모비와 열사·희생자 묘지 안내판을 세우는 사업을 마무리 지은 것.


합동추모비 앞면에는 "투쟁의 심장으로 다시 살아"라는 구호를 새겼다. 뒷면에는 신영복 선생의 글씨로 '참민주·참평등·노동해방 세상을 염원하며 산화해 간 이 땅의 모든 열사들이 투쟁의 심장으로 다시 살아 우리들과 함께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열사들의 생을 오늘의 삶에 비추어 부산, 경남, 울산지역의 노동조합과 민주단체 동지들의 정성을 모아 이 비를 세웁니다. 역사는 영원히 그들을 기억할 것입니다"라고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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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01-05

 

[.... ‘노동해방’이고 ‘노동해방'은 ‘인간해방’이지요. 근본적인 담론으로 돌아가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처음처럼’ 말이죠 .......]


[ ..... 민주노동당도 우리 사회 해방을 위한 하나의 씨앗이라고 생각합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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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럴 디모크러시’는 오늘 제 이야기의 주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대선 국면에 임하는 민주노동당의 입장, 민주노동당 내부의 정파적 갈등을 어떻게 극복해나갈 건가 등의 논의도 역시 이 맥락입니다.


민주노동당은 기본적인 큰 그림 속에서 사안별 정책적 입장들을 분명하게 위치 규정을 해야 하고, 장기적인 사회변화, 노동운동이 사실은 노동조합운동이 아니잖아요?


‘노동해방’이고 ‘노동해방’은 ‘인간해방’이지요. 근본적인 담론으로 돌아가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처음처럼’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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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께서는 인터뷰 말미에 직접 단순한 그림 하나를 그려주면서 “민주노동당도 우리 사회 해방을 위한 하나의 씨앗이라고 생각합니다”며 의미를 분명히 해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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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ews.kdlp.org/?main_act=board&board_no=2374&jact=art_read&art_no=378045


[진보정치 305호] 
 
신년특집 신영복선생과의 대화
신영복 선생, 민주노동당에 대해 말하다

    신석진 편집위원장  
 

 

 

 

 

            2007.10

 

[ ......  『동지』와 『열사』로 호칭.........


 ...... 「남조선민족해방애국전선(南民戰)」의 주범 이재문·신향식 .......

 ......  「통일혁명당(統革黨)」..... 김종태·김질락·이문규 등 간첩전력자들도 추모대상에 .........    ]

 


 2007-10-14
 
 
국회의원 22명 참여, 광화문서 '간첩·빨치산'추모제

written by. 김성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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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파연합체인 한국진보연대 등은 10월13일 오후 5시 광화문 열린공원에서 「열사(烈士)의 정신으로 일어서라! 민중이여!」라는 구호 아래 소위 「제18회 민족민주열사·희생자 범국민추모제」를 개최했다.

열린공원에 설치한 분향소·전시물의 추모대상인 500여 명의 소위 「열사(烈士)」 중 상당수는 건국 이후 간첩·빨치산 활동으로 실형을 받은 인물들이었다.

 
 

공식자료집에 따르면, 이날 행사는 한나라당 배일도, 원희룡 의원을 비롯해 강기갑, 강창일, 권영길, 김원웅, 김희선, 노회찬, 단병호, 문병호, 심상정, 오영식, 우상호, 이기우, 이목희, 이상민, 이영순, 이인영, 정청래, 천영세, 최순영, 현애자 등 국회의원 22명이 추모위원으로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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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첩에 『통일조국 사업 위해 남한에 파견』>

 

이날 행사 추모대상에는 남파(南派)간첩 출신 「금재성·김도한·김남식·신창길·왕영안·윤용기·진태윤·최백근·최남규·최인정·」, 빨치산 출신 「권양섭·김광길·김병인·김용성·김현순·류낙진·박판수·손윤규·안상운·윤기남·장광명·정대철·정순덕·주명순」 등 다수의 共産혁명기도자들이 포함됐다.


행사장 전시물은 남파간첩 출신과 빨치산 출신들을 가리켜 『동지』와 『열사』로 호칭하며, 각각 『통일조국을 위한 사업을 위해 남한에 파견』, 『조국통일투쟁에 전념하시다』 등으로 미화하고 있었다.


간첩·빨치산 출신들 이외에도 1979년 검거된 共産혁명조직 「남조선민족해방애국전선(南民戰)」의 주범 이재문·신향식, 1968년 검거된 조선로동당 지하당 「통일혁명당(統革黨)」 간부로서 越北해 조선로동당에 입당했던 김종태·김질락·이문규 등 간첩전력자들도 추모대상에 들어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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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反통일(?) 세력 이 땅에 존재하지 못하도록...투쟁』

 

이날 행사는 오후 3시 시청 앞에서 집회를 마친 좌파단체 회원 500여 명이 참석했다. 이들은 앞선 집회에서 10·4선언 실천을 위한 평화협정 체결, 국가보안법 폐지, 주한미군 철수를 주장했었다.

 

추모제는 한국진보연대 공동대표 오종렬(舊전국연합 상임의장)의 대회사로 시작됐다. 오씨는 『자주평등 평화통일 민중해방 세상은 열사(烈士)의 꿈이자 살아있는 우리의 꿈』이라며 『민족을 목 조르는 한미동맹을 해체할 것』『멸망의 재앙덩어리 전쟁기지를 없애버릴 것』『생존과 번영의 6·15선언을 이행해 자주통일·민중해방을 앞당길 것』을 주장했다.


행사는 「섬뜩한」 결의문 채택으로 마무리됐다. 결의문은 『열사(烈士)들은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자신의 목숨을 민중세상을 만들기 위한 공동체 속에 자신을 던지셨다』며 간첩·빨치산 출신을 미화하면서 『한반도의 진정한 평화와 통일을 위해 평화협정 체결과 주한미군철수를 반드시 이룩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 『국가보안법을 비롯한 냉전적 법·제도를 즉각 폐지시키길 것』과 함께 『냉전수구세력을 역사의 뒤안길로 내려 보내야 할 것』, 『反민주·反민중·反통일적 세력이 더 이상 이 땅에 존재하지 못하도록 투쟁할 것』 등을 결의했다.

 
 

[관련기사-1] <소위 「민족민주열사 면면(面面)」>

추모제가 진행됐던 소위 「민족민주열사」들의 구체적 面面은 좌파단체의 발간책자와 인터넷홈페이지에서 확인해볼 수 있다.

이밖에도 좌익들이 출간한 《쓰여 지지 않은 역사(김민희 著)》, 《감옥에서 죽은 비전향장기수들의 이력서(1992년 3월 월간 말지 민가협 권낙기 著)》, 《인민군 종군기자 수기 이인모(월간 말지 刊)》 및 2006년 1월 소위 『파쇼독재 잔당들과 후예들에  매장, 처벌, 처형』을 주장하며 북한이 보내 온 《비전향장기수 공동고소장》에는 좀 더 자세한 설명이 기술돼 있다.

이들 자료에 따르면, 소위 「민족민주열사」들 중 간첩·빨치산 출신들은 검거 후 전향을 거부하다 옥사 또는 출소 뒤 지병(持病)으로 사망한 인물이 대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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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 장군에 대한 충성』으로 전향 거부한 간첩>


소위 「민족민주열사」 중 간첩·빨치산 출신 일부를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최남규는 1957년 간첩으로 남파됐다 체포된 후 1973년 출소했다. 출소 후 3년 간 엿장수 생활을 하다 75년 7월 사회안전법 위반으로 다시 구속돼 89년 풀려났다. 그는 출소 직전인 89년 5월11일 청주보안감호소에서 쓴 글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가고픈 내 고향에 가고파도 내 못가네. 광복된 이 조국에 38선 웬 말인가 이 땅 뉘 땅인데 주인행세 누가하고 아름다운 금수강산 짓밟질랑 말고서 돌아가라, 사라져라, 어서 꺼져버려라. 고-홈 고-홈 양키 고 홈』

1999년 사망한 최남규는 스스로 『백두산 장군(金正日)에 대한 충성 때문에 전향하지 않았다』고 밝혔었다.

 

△류락진은 6.25사변 당시 지리산 일대에서 빨치산으로 활동하다 체포돼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는 57년 가석방된 후 63년 「혁신정당」사건, 71년 「호남통혁당재건委」사건, 94년 「구국전위」사건, 2002년 빨치산위령비 비문(碑文)작성 사건으로 거듭 처벌받는 등 2005년 사망 시까지 대한민국 파괴활동에 매진(?)해왔다. 이 중 구국전위는 「조선노동당」의 남한 지하당으로서 창립선언문과 강령 및 규약에서 북한의 主體思想을 조직의 유일한 지도적 지침으로 삼고 있다.

류낙진은 이적단체(利敵團體) 범민련 남측본부 고문으로 활동하다 사망했다. 그의 가족들은 부의금 5천만 원을 통일운동에 써달라며 범민련 남측본부에 기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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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순은 1952년 지리산 빨치산 활동을 하다가 검거됐다가, 1972년 통혁당 사건으로 재수감됐다.

김용성은 간첩미수죄로 1964년 검거됐다.


권양섭은 남로당 활동하다 복역해 나온 뒤 1972년 조선로동당 지하당 통혁당 사건으로 다시 복역했다.

박판수는 남로당 항양군 군당부책으로 일하던 중 6·25가 벌어지자, 지리산 빨치산으로 활동하다 검거됐다.

정순덕은 6.25사변 발발 후 인민위원회 활동을 하던 남편을 따라 1951년 이후 빨치산 활동을 벌이다, 63년 11월 체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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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konas.net/article/article.asp?idx=12713

 

 

 

 

 


[ ...... 김남주 ... 생가에는  서예가 신영복 선생이 쓴 현판이 ........    ]

 


해남 ‘김남주 시인 생가’에서 하룻밤을

등록 2014-12-29

 

기념사업회, 게스트하우스 열어
20주기 맞아…20명 숙식 가능


민족시인 김남주(1945~1994)의 해남 생가가 게스트 하우스로 꾸며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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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가 옆에는 고인의 흉상과 대표 시를 새긴 공원이 조성됐다. 공원을 산책하면서 시비 ‘노래’를 비롯해 동판에 새긴 ‘조국은 하나다’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저 창살에 햇살이’ ‘자유’ 등을 만날 수 있다.


생가에는 서예가 신영복 선생이 쓴 현판이 붙었고, 옥중에서 담배 포장지에 새긴 원고와 치열했던 일대기를 담은 사진이 전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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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그가 태어나서 중학까지 성장기를 보낸 공간이다. 초기 작품인 ‘진혼가’ ‘잿더미’ 등을 창작한 산실이기도 하다. 그는 74년과 79년 두차례 구속됐지만 독재에 굴하지 않고 치열하게 맞서 옥중 시집 나의 칼 나의 피, 사랑의 무기, 조국은 하나다 등을 냈던 실천적 지식인이었다.


http://www.hani.co.kr/arti/society/area/671260.html

 

 

 

 

 

 

 

 

            2015.11.   김철홍

 

[ ....... “백년전쟁” ..... 그렇다. 이것은 전쟁이다 !  백년간에 걸친, 아직 끝나지 않은 미완(未完)의 전쟁이다. ........

   .......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       ]

 


내가 “신앙인,” “학자,” “국민"으로서 역사 교과서 국정화에 찬성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서울대 좌익 운동권 출신 김철홍 교수의 검인정 교과서 분석
 

 

장로회신학대학교 게시판이 역사 교과서 논쟁으로 뜨겁게 달아 올랐다. 지난 10월 23일 이 대학 역사신학과 교수들이 학교 게시판에 "역사교과서 국정화에 대한 우리의 입장"이란 성명서를 올려 정부의 역사 교과서 국정화 시도 중단을 촉구했다. 이에 대해 같은 대학 신약학과 김철홍 교수는 장문의 반박문을 게시판에 올렸고, 역사 교과서 국정화 찬반 논쟁으로 번지고 있는 것이다. 이 글은 현재 소셜 미디어를 통해 빠르게 전파되고 있다. 아래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는 김철홍 교수의 글을 소개한다. 

 


글 | 김철홍 장신대 신약학과 부교수

2015-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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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 근현대사 역사해석의 문제는 전쟁이다. 그것은 단순히 역사학계 내부의 학자들 간의 논쟁이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나라는 이념문제 때문에 전쟁을 한 나라이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을 건국한 사람들은 우리나라의 정치제도로 자유민주주의를 선택하였고, 경제제도로 자유시장경제를 선택하였다. 북한은 정치제도로 인민민주주의, 즉 사회주의 정치체제를, 경제제도는 사유재산제도를 부정하고 국가가 모든 것을 소유하고 책임지는 사회주의 계획경제제도를 선택했다.

 

사실 조선왕조가 망한 뒤 우리의 선조들은 미래에 세워질 독립국가에서 어떤 정치제도와 경제제도를 선택할 것인지의 문제를 놓고 독립운동을 하던 당시부터 논쟁하였다. 이 두 상반된 입장 중 어느 것을 선택할 것인지의 문제를 놓고 1945년 해방을 맞이하기 오래전부터, 좌-우 양편, 즉 사회주의 진영과 민족주의 진영으로 나누어져 싸워왔다. 그 논쟁은 단순한 말싸움이 아니라 양쪽이 서로 죽이고 죽는 무력충돌로 이어져왔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1921년 6월에 중국에서 일어난 “자유시 참변”이다. 무장 투쟁을 하던 독립군들이 함께 모여 통합하려던 와중에 좌-우파 독립군들끼리 서로 총을 들고 싸운 사건이다.

 

그 이념적 전쟁이 전국적 규모로 확대되어 터진 것이 바로 6.25 전쟁이다. 이 전쟁은 단순히 냉전시대에 미국과 소련을 대신해서 우리민족이 싸운 것이 아니다. 6.25는 우리 민족 안에서 벌어진 자유민주주의와 인민민주주의 간의 전쟁이다. 그리고 지금 그 전쟁은 대한민국 안에서 여전히 현재 진행 중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평화롭지만 우리 사회 내부에서는 지금 좌우 이념 대립의 문제가 해소되지 않고 여전히 진행 중이다.

 

검인정 한국사 교과서 집필진 중 상당수가 관련된 “민족문제연구소”라는 단체에서 만들어 유포한 “백년전쟁”이라는 다큐는 물론 그 내용이 상당히 문제가 많지만, 그 제목은 매우 정직하고 정확하다. 그렇다. 이것은 전쟁이다! 백년간에 걸친, 아직 끝나지 않은 미완(未完)의 전쟁이다. 그들은 한국 근현대사를 전쟁터로 인식하고, 지금까지 충실하게 전쟁을 수행해 왔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본교 역사신학교수들의 견해에 따르면 우리는 이것을 전쟁으로 인식하기는커녕, “한국 학계의 문제해결 능력 및 자정능력을 불신”하지 말고 학자들에게 맡겨놓자는 것이다. 그러나 그 “한국 학계”가 이미 이런 민중사학을 주장하는 역사학자들이 다수가 되어 이미 역사학계는 이들에게 평정되었다. 왜냐하면 한국 근현대사 해석의 문제를 놓고 지금 일개 신학교 바울신학 전공교수인 내가 이 문제를 지적해야 할 정도로 현 역사학계에서 아무도 이 문제를 지적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민중사학에 반대하면서도 용기를 내어 이 문제를 지적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역사학자로서 책임을 방기(放棄)한 것이고, 그것은 비겁한 것이다.


나는 그들의 침묵을 민중사학에 대한 동의(同意)로 간주한다. 그리고 본교 역사신학교수들이 이 교과서 문제에 대해서 지금까지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있다가 지금에 와서야 단 한 페이지짜리 성명서를 발표하는 것으로 자신들의 책임을 다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위선이다.


나는 이 문제에 대해 그들이 지금까지 침묵한 것은 그들이 민중사학의 입장에 암묵적으로 동의하고 있다는 증거라고 본다. 만약 아니라면 소리를 크게 내어 외쳐야 할 것이다. 장신대 교수들이 좋아하는 ‘이 시대의 선지자의 역할’을 해야 할 것이다.

 

다양한 교과서가 있어서 서로 견제하고 균형하는 것이 좋다는 의견에 나도 기본적으로 찬성한다. 역사신학교수들은 “최선의 해결책은 사고의 다양성을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활성화를 통한 건전한 견제와 균형이다”고 성명서에서 주장했다.

 

검인정 교과서들의 문제를 인식하고 보다 더 균형 잡힌 교과서를 만들어 보급하기 위해 지난 해에 교학사에서 한국사 교과서를 만들어 출판했을 때 전국의 초중고 학교 중 교학사 교과서를 채택한 일부 학교들이 교학사 교과서를 채택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전교조와 언론 각종 시민단체들이 어떤 일을 했는지 나는 똑똑히 보았다.


전교조에서는 심지어 교학사 교과서를 채택한 학교들을 위험 학교로 분류하여 홍보하겠다고 위협했다. 소위 다양한 교과서로서 기존의 교과서들과 입장을 달리하는 단 한 가지의 새로운 교과서가 등장했을 때 검인정 교과서를 만들고 지지하는 사람들은 자신들과 역사관을 달리 하는 교과서를 용납하지 못하고, 단 한군데의 학교도 그것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 열을 올렸다.

 

나는 당시 좌파 지식인 중 단 한 사람이라고, 단 한 명의 사람이라도 나서서, “이렇게 하면 안 된다. 사고의 다양성을 통제하면 안 된다. 건전한 견제와 균형을 위해 교학사 교과서를 채택한 학교를 내버려 두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나는 그 ‘단 한명의 사람’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 그 이유는 오늘 날 한국 사회에서 지식인들은 멸종했기 때문이다. 좌파 지식인들은 이념에 다 함몰되었다. 그들은 더 이상 지식인이 아니라, 이념가다.

 

나는 지금도 “사고의 다양성을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활성화를 통한 건전한 견제와 균형”이 해결책이라고 주장하는 본교 역사신학교수들이 왜 그 때에는 하나같이 입을 다물고 있다가 이제야 소리를 높여 ‘국정화반대’를 외치는 지 그 이유가 궁금하다. 그대들은 좌파지식인이기 때문에 그 때에는 목소리를 내지 않은 것인가? 아니면 아예 관심조차 없었던 것인가? 그 때에는 “신앙과 양심의 자유를 정체성의 근간으로 삼는” “장로회신학대학교”의 역사신학교수로서 “사고의 다양성을 통제하는” 행동과 “건전한 견제와 균형”을 무너뜨리기 위해 교학사 교과서를 채택한 학교들이 공격을 당할 때 왜 그 때는 침묵하다가 이제 와서 뒷북을 치는가?


결국 전국 2318개 학교 중 단 한 곳의 학교도 교학사 교과서를 사용하지 않게 되는 비정상적인 결과가 나왔을 때에 나는 좌파 역사학도들의 폐쇄적이고 교조적인 얼굴을 다시 보았다. 그것은 1986년에 내가 본 얼굴, 주체사상을 주장하면서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을 장악해 나가던 주사파(주체사상파)의 얼굴과 다르지 않았다.

 

나는 대한민국의 국민으로 태어난 것이 부끄럽지 않다. 자랑스럽다. 나는 북조선 인민민주주의공화국의 시민이 아니라, 자유 대한민국의 시민으로 태어난 것을 다행으로 여긴다. 자유민주주의 국가가 하나님의 나라도 아니고, 자유시장경제 제도가 완벽한 경제 제도도 아니지만 북한의 전체주의보다 훨씬 낫고, 사회주의 경제제도보다 더 낫기 때문이다. 나는 이 제도에 만족한다.

 

나도 현재의 제도에 약간의 문제가 있고, 개선의 여지가 있다고 본다. 하지만 나는 이 체제 자체를 부정하고, 다른 체제로 바꾸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만약 현재의 체제를 부정하고 다른 체제로 바꾸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그런 시도를 한다면 나는 그들과 싸워 막을 것이다. 6.25 때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해 전쟁터에서 목숨을 바친 나의 선배들이 자유민주주의를 지켰듯이 나도 지킬 것이다.

 

검인정 한국사 교과서는 현재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부정하고 인민민주주의체제로 바꾸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살아있는 증거다. 그 책들을 읽고도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은 사회주의 이론을 잘 모르는 사람일 가능성이 많다. 나는 그런 책으로 대한민국의 미래의 주역들이 한국사를 배우는 것에 반대한다. “신앙인으로서,” “학자로서,” “국민으로서,” 반대한다. 건전한 자유민주사회의 시민으로서 우리 자녀들이 자라기 위해 지금은 ‘긴급한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안 된다. 박근혜 대통령의 긴급한 제안이 없었더라면 나같이 비겁한 사람도 이렇게 글을 쓸 수 있는 기회가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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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pub.chosun.com/client/news/viw.asp?cate=C03&nNewsNumb=20151118662&nidx=186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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