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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총소사 마구 기관포를 쏘더군요。우리들은 눈물을 머금고
2019.12.12 조회수 :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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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앙일보] 입력 1975.08.27 

 

< 신의주 학생사건 >

 

남한에서의 학생운동이 「반탁」의 기치를 들고 확대되기 이전 북녘땅 신의주에서는 소련점령군의 만행에 항거하는 학생의거가 전개됐다.

 

소련점령군에 항거…「자치대」결성 |11월23일 의거에 24명 죽고 3백50명 중상 | 일부학생들 월남…반탁투쟁에 활력소

 

그러니까 1945년 11월23일. 이날 의거에 나섰던 신의주학생들중 일부는 뒤에 사선을 넘어와 월남학생을 거점으로해서 반공대열에 나섰고 이것은 반공·반탁투쟁에 활력소를 불어 넣었다.

신의주학생의거의 배경은 말할 것도 없이 소련 점령군의 만행과 약탈.


1945년8윌20일 성진, 21일 원산과 함흥, 23일 개성, 24일 평양, 30일 신의주등으로 진주해온 소련군은 선진강대국의 해방군이 아니라 점령군으로서의 행패를 부렸다.


살인 폭행 강간 강도 약탈 무전취식이 백주의 노상에서 자행됐고 이와같은 만행은 함흥 신의주 평양등 소군이 진주하고 있는 곳에서는 어디서나 「새로운 질서」인냥 횡행했다.


이런 상황속에서 신성해야 할 학원도 소련군의 병영이나 공산당의 정치훈련소로 징발됐다. 여기서 오랫동안 기독교적 저항정신과 강인한 서북기질로 다져진 학생들의 울분이 폭발했다. 11월3일의 광주학생의거일을 맞아 신의주학생들은 기념식을 갖고 학생대표들이 제일공업학교 강당에 모여 「평북학생자치대」를 결성했다.


날로 불안해져가는 정정속에서 학원·학생들의 자유와 권리를 지켜 보자는 뜻에 자치대가 결성됐다.

 

이 자치대의 한 대표가 11월21일 상오10시 「용암포 주둔 소련군 위로환영대회」에 참석하게 됐다.
대회는 각본에 따라 몇 사람의 아부발언이 진행됐다.

그러나 막상 학생계를 대표하여 학생자치대대표가 연단에 나서자 상황은 크게 달라졌다.


『여러분, 해방이란 도대체 무엇입니까. 피땀 흘려 거두어 들인 곡식을 약탈해가는 자들이 해방군입니까. 공공건물과 심지어 학생들의 배움의 터전인 학교건물까지 징발하여 자기들의 노략질 창고로 쓰는 자들이 해방군인입니까. 그 해방군들은 짐승처럼 이 겨례의 순박한 처녀를 짓밟았습니다. 우리의 쌀뒤주를 뒤졌습니다.』


이 선동연설은 학생들의 가슴에 불을 붙였다.

 

사태는 순식간에 악화됐다. 좌우학생이 격돌했고 공산당원들이 이에 가세했다. 12명이나 되는 학생들이 괭이와 몽둥이질에 중상을 입었고 이를 말리던 제일교회 홍석황장로가 그자리에서 타살됐다.


이 비보는 삽시간에 신의주시내로 번졌다.


학생대표들은 윤순호군(당시제일공업대표)집에 모여 긴급회의를 열고 사후대책을 논의, 22일에 항의「데모」를 갖기로 했다. 노송동 동중강당에서 박선봉(평안중대표·재미) 윤순호 이도명(제일공업·교육계) 조병건·이신일(제이공업대표)등 학생대표들이 당시 도학무국장 함석헌씨를 만나 이 거사를 귀띔했다. 그러자 함선생은 『의로운 일은 그 누구의 힘으로도 막지 못한다』고 격려를 해주어 대표들의 사기를 북돋워 주었다.

 

거사일은 23일, 그리고 H「아워」는 하오2시로 굳혔다.전시내의 6개학교가 행동목표도 분담했다.
동중과 제일공업은 인민위원회 보안부를, 사범과 제이공업은 공산당본부를, 신의주보안서는 평안중과 상업학교를 각기 맡기로 했다.

 

압록강넘어 대륙에서 몰아쳐오는 강바람이 유난히 매서웠던 그날 하오2시. 동중과 제일 공업은 『학원의 자유를 침범말라』『피난민 구제기금 착복자 나오라』는 등의 구호를 외치며 도보안부를 겹겹이 에워쌌다.

그리고는 동중은 정문을, 제일공업은 후문을 타고 넘기 시작했다.

 

이에 맞서 보안부대에서의 무차별사격이 이루어졌다. 동중 이정직군이 쓰러졌다. 같이 담을 넘은 지남선 임춘주 양군은 피투성이가 된 이군을 끌어안고 강안역까지 도망을 쳤다. 「탱크」포가 터지고 상공에는 소군 「야크」전투기가 낮게 떠서 기총소사를 시작했다. 이 습격에서 이정식 백광진 조도우등 13명의 학생들이 죽고 80여명이 중상을 입었다.


한편 공산당본부로 갔던 제이공업과 사범학생들도 김의준 장원봉등 11명의 학생들이 생명을 앗기고 당시 제이공업기계과 2년 김장흥군은 악착같이 추격해오는 소련군을 피해 압록강철교를 줄달음 치다가 그만 푸른 강심으로 뛰어들고 말았다.
희생은 평안중학과 상업학교에서도 났다.


당일 피살자는 모두 21명, 중상자 3백50명…공산당과 소련군사령부에서는 혈안이 되어 학생들을 잡아 가두었으며 체포구금된자 1천여명중에서 2백여명은 「시베리아」로 유형을 보냈다.


뒷날 내가 반탁학생연맹을 이끌며 반탁운동을 벌였을때 나의 좌우에서 고락을 같이한 동지중에는 신의주를 중심한 서북지역출신이 많았다. 장익삼·박선봉·김득신·최찬영·김기석·이범석·김호영·이미수·윤영환·차장준·차순학군등은 서북학생의 대표적 인물이었다.

 

 

 

 

 

         1945.11.23.  신의주

 

[ ......  "그건 사람이 아니다" 라는 쪽지가 붙은 사람들을 골라서 흡수 .......

    .....  없는 계급적 감정을 일부러 만들어서 간 데마다 사회를 파괴 ..........   ]

 


[ ..... 보안부장 한웅이란 놈, 그 부하 차정삼이란 놈이 "쏴라! 쏴라" ......

   .... 문 앞까지 들어왔던 몇이 거꾸러졌다 ..... 셋이 넘어져 ........   ]

[ ..... 공산당 본부 .... 교복 .. 여기저기 쓰러져 ... 한 이십명은 될까? ........   ]

 

[ ..... 사람의 이름을 지명하면서 그 사람의 뒤를 밟아 보고하라 .......   ]

 


내가 겪은 신의주학생사건


 함석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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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하자 해서 아니라, 나도 모르는 새 부르주아 의식에 젖어서가 아니라, 해방될 때까지 나는 그래도 인간적으로 그들을 대하노라 했고 그들도 나를 믿는다고 생각했는데. 하기는 당초에 공산당이 들어오면서부터 한 수법이 그렇다. 동리안에서도 아무리 가난하고 무식한 사람의 눈으로 봐도 "그건 사람이 아니다" 라는 쪽지가 붙은 사람들을 골라서 흡수해가지고 혁명이라는 이름 아래 갖은 악감정을 불어넣어가지고 소위 민청이니 여청이니 하는 것을 조직해서 평지풍파로 없는 계급적 감정을 일부러 만들어서 간 데마다 사회를 파괴시켰다. 그것이 그들의 소위 계급투쟁의 과학적 방법인 것을 내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기로서니 인간 양심을 이렇게 약하단 말이냐. 인심유위, 도심유미란 말은 아는 줄 알았더니 알고도 몰랐었다. 공산당의 하는 일은 나날이 거만하고 사납고 폭력적이 돼갔다. 그것이 일을 일으킨 가장 가까운 원인이었다.

 

11월 23일

 

그렇게 일이 점점 고성낙일이 돼가는 것을 보고 더 있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어느 날  위원장을 보고 사면할 뜻을 말했다. 그는 내 손을 잡으며 "여보 그만두어도 같이 그만두도록 합시다." 했다. 말을 듣고 영감을 보니 참 불쌍했다. 이 어려운 자리에 늙은이를 더구나 자기를 지지하고 돕는다 했던 놈들한테 배신당한 이를 차마 나는 모르겠소 하고 갈 수가 없었다. 더 어려운 것은 내 손으로 끌어서 교육계에 세웠건 모든 사람들, 그들이 나를 믿고 왔다 해야 할 터인데 이제 어떻게 그들을 사지에 두고 나만 나가느냐? 그 중에도 마음에 걸리는 것이 김희철씨였다. 내가 오산을 떠난 후 오산에 가 있었던 일이 있고, 그 후 알게 되어 대번에 서로 마음이 허락되어 일을 같이 해보자고 이끌어왔는데 이제 내가 물러서면 그의 입장은 더 어려워질 것이 뻔한데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느냐? 이리해서 한 번 났던 생각을 누르고 하루하루를 지냈다.

 

공산당 놈들도 내게 대해 정면으로 뭐라 하지는 못했다. 사상적으로 원수로 알 것이야 물을 필요도 없는 일이지만 내가 조금도 사사로운 생각을 품지 않는 것을 저희도 다 아는 이상 어떻게 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잡는 시기가 왔다. 11월 22일, 그러니까 사건 전날 어디서 보도가 들어오는데 시내에 있는 고등학생들이 일제히 일어나 위원회와 공산당 본부에 질문을 하러 들어오려 한다고 했다. 그래서 곧 학교 교장에게 내가 직접 전화를 걸어서 그러게 하면 큰일이 날 터이니 잘 타일러서 미리 막도록 하라고 했다. 그것은 내가 공산당의 소가지가 어떤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학생들이 절대로 잘못 아니지, 하지만 그렇다고 그렇게 해서 죽일 수는 없었다.

 

이튿날 23일 아침, 그때 나는 위원회에 올라온 이래 친척 함국현씨 집에서 자고 먹었는데, 후일에 하는 말을 들으면 아침에 밥을 먹으려다가 젓가락으로 상위에 방아를 찧더라는 것이다. 일은 다가오고 답답해서 그랬을 것이다. 출근을 해서 좀 있다가 정오쯤 되니 학생들이 들어온다는 소식이 들렸다. 청사 안이 긴장하고 사람들이 이리갈까 저리갈까 당황해하기 시작했다. 총소리가 몇 방 땅땅 하고 났다. 방을 뛰어나와 정문 앞을 나가니 저기 학생들이 돌을 던지며 오는 것이 보였다.

 

보안부장 한웅이란 놈, 그 부하 차정삼이란 놈이 "쏴라! 쏴라" 다급하게 하는 소리가 들렸다. 다다다다 학생들은 티끌을 차며 도망했고 문 앞까지 들어왔던 몇이 거꾸러졌다. 그 광경을 보고 저기 멀거니 보고 있는 사람들이 있건만 아무도 가까이 오려 하지 않았다. 청사 안에 직원도 여러 백 명이건만 어디 갔는지 뵈지도 않았다. 하는 수 없이 나는 사무실로 뛰어 들어가 문교부 직원 몇을 데리고 나왔다. 가보니 셋이 넘어져 있지 않나, 까만 교복에 모자를 쓴 채 엎어진 것도 있고 자빠진 것도 있었다. 쓸어안아 일으켰다. 죽었구나! 죽었구나! 26년이 지난 오늘 이 글을 쓰면서 쏟아지는 눈물을 막을 길이 없어 글자를 완전히 이룰 수 없지만 그때는 눈물도 나올 수 없었다. 아직도 따끈따끈한 몸인데 눈을 번히 뜨고 말이 없었다.

 

왜 죽었냐? 왜 죽었냐? 둘은 벌써 숨이 끊어졌고 하나는 아직 숨 기절이 있었으나 가망이 있어 보지 않았다. 그래도 우리는 몇이서 병원으로 안고 갔다. 그 이름들이 무엇이었는지 오늘까지도 모른다. 병원에서 돌아와 도청 정문에 오니 한 사람이 앞을 막아서더니 "이것만이요, 더 큰 것을 보겠소? 갑시다." 했다. 직감적으로 알기는 했지만 비겁하게 회피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럽시다." 하고 따라가니 간 곳은 문제의 공산당 본부였다. 뜰에 썩 들어서니 몇인지는 알 수 없으나 까만 교복을 입은 것들이 여기저기 쓰러져 있었다. 그때 인상으로 한 이십명은 될까? 소련 군인이 뜰에 꽉 차 있었다, 그러더디 내가 온 것을 보고 한 사람이 일어서서 연설을 시작했다.

 

그것은 한국 2세로서 소련 군인인 사람이었다. 그보다 며칠 전 소련군 교육고문이 찾아와서 면회를 한 일이 있었는데 그때 이 사람이 통역으로 왔었다. 그때는 자기 부모는 함경도서 났다는 이야기며 여러 가지 이야기를 아주 친절히 하고 갔는데 오늘은 태도 일변이다. 러시아 말을 내가 모르니 무슨 말을 하는지는 모르나 그 태도와 나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흥분해서 하는 것으로 보아서 나를 이 사건의 장본인이라고 하는 듯했다. 그 소리를 듣더니 소련 군인의 총칼이 일시에 쏵 하고 내 가슴으로 모여들었다.

 

지금 생각해 봐도 이상한 것이 마음이 그렇게 평안할 수가 없었다. 정신이 똑똑했다. 지금도 그때의 내 모양을 그리라 해도 그릴 수 있다. 숨결이 높아졌다는 기억도 겁이 났다는 기억도 없다. 열인지 스물인지 알 수 없는 총부리와 칼과 피스톨이 내 가슴에 방사선형으로 와 닿았을 때 번듯 내 속에 비친 말은 "오늘은 이렇게 가게 되는구나!" 하는 것이었고, 그 다음 순간 "이왕 죽는 것이면 비겁하게 해선 못쓰지" 하는 것이었다. 나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소련 장교로 뵈는 한 사람이 나서더니 그 총칼 떠밀어 제쳤다. 그러나 소용이 없었다. 다음 순간 그 물결은 다시 밀려들었다. 또 떠밀었다. 또 쫓겨 갔다가 또 밀려들었다. 그렇게 하기를 몇 차례 한 후 장교는 이겼다. 군인들이 저만큼 물러섰다.


그 순간 다른 물결이 닥쳐왔다. 이번에는 우리나라 공산당원들이 하는 뭇매질이었다. 또 선채로 맞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누군가가 외쳤다. "이렇게 해서 좋으냐?"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옷이 찢어지고, 매질은 계속됐다. 나는 그대로 버티고 서 있었다. 아픈 감각도 없었다. 마지막에 강한 타격이 뒤통수에 와닿자 나는 머리가 띵해 의식이 없어지는 것을 느꼈다. 내가 정신을 잃는구나 하는 것까지는 기억하는데 그 후는 알 수 없다. 얼마 후에 정신이 드니 나는 여러 사람에게 들리어 방안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찬물이 끼얹어지고 마시라는 대로 마시고 나서 정신이 들어보니 둘러선 사람 중엔 알 수 있는 얼굴도 한 둘 있었다. 그 중 하나가 노인희라는 청년이었다. "아, 선생님 안됐습니다." 어쩌구 하는 말을 했다. 그 순간에도 "진심으로 하는 말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는데 소련 장교가 하나 왔다. 먼저 그 사람인지 다른 사람인지 알 수 없으나 나서라는 것이었다. 총 방아쇠에 손가락을 걸고 나더러 앞서 가라는 것이다. 반항하고 싶지 않았다. 가라면 가지, 떨리지도 않았다. 도망할 생각도 나지 않았다. 다만 비겁하게 굴어서는 사람이 아니란 생각은 여전히 지구의 인력처럼 맘속에 작용하고 있었다. 사실 나는 그때 당하고도 다 잊었는데 후에 그 광경을 봤던 사람들이 말을 해주니 그것이 어떻게 아슬아슬한 장면이었던가를 짐작할 수 있지만, 나는 그때는 조금도 겁나는 생각이 없었다.  남이 말해주는 데 의하면 총을 재어 들고 앞서 가라는 것은 자칫하면 마지막을 의미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총살은 아니 당하고, 그때 거기 와 있다가 같이 붙들린 내 일가 매제되는 조공술과 같이 둘이서 시내에서 한 5리나 되는 비행장까지 끌려나와 유치장으로 들어가게 됐다. 그랬다가 어슬어슬 해가 저무는 무렵 나만 다시 끌려나와 철도 호텔로 갔다. 좀 있더니 소련군 사령관한테로 데리고 갔다. 이 위원장도 거기 와 있었다. 저녁을 먹으라고 가져다주나 먹을 마음이 없었다. 가만 앉아서 생각에 저 영감이 강경한 태도로 항의하여야 내가 나갈 수 있는데, 그가 한 마디 말도 없었다. 조금 있다가 그들은 자기 곳으로 가고 나는 끌려 도 경찰부 유치장으로 들어갔다.

 

쉰 날

 

살문이 육중한 소리로 내 귀에 덜컥 하고 닫히고 감방 안에 주저앉으니 모든 일이 꿈만 같았다. 해방이 됐다기에 이제 밝은 날이 오는 줄 알았는데 이게 무슨 일이냐?


감옥살이는 여러 번 해봤으니 별로 겁날 것이 없었다. 이것이 나의 다섯번째의 감옥 길이다  ...... 이번은 그날 당장 죽지 않은 것도 다행이람 다행이지만, 이제 다시 나갈 길이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공산당이란 법도 도덕도 없는 세계 아닌가?

저희에게 맞지 않으면 인정도 도리도 없다. 그래서 첨부터 나가려니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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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끌려가서 또 한달을 있었다. 또 놔주기에 놔주는 줄 알았더니 아니었다. 내보내는 대신 한 주일에 한 번씩 보안서에 오라는 것이었다. 첨에는 멋모르고 갔다. 지방에 어떤 사정이 없느냐 묻는 것이었다. 별일 없다고 몇 번은 넘겼으나 나중에는 화를 내고 아주 사람의 이름을 지명하면서 그 사람의 뒤를 밟아 보고하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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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sialsori.net/bbs/board.php?bo_table=0205&wr_id=108

 

 

 

 

 

[ ..... 공산당의 활동이 노골화되면서  숙청바람이 불고   학교에도 태극기 대신 붉은 기를 달게 하고   학급마다「레닌」「스탈린」의 초상화를 걸도록 강요 .......   ]


[ ..... 소련군「야크」기가 몇 대 뜨더니 이내 기총소사를 .......  ]

 

▲박선봉(朴善鳳)씨(46)·현 신의주 반공학생의거기념회부회장·당시 평안중학 졸업반)=공산당의 활동이 노골화되면서 숙청바람이 불고 학교에도 태극기 대신 붉은 기를 달게 하고 학급마다「레닌」「스탈린」의 초상화를 걸도록 강요한데 불만을 품어오던 차에 용암포 사건이  터졌다고 해요。기차 통학생들로부터 이 소식을 들은 신의주시내 6개 중학생 대표들은 제일공업 윤순호(尹淳浩)군 집에서 2、3차례 밀회를 갖고『도저히 가만 있을 수 없다』는데 의견이 일치되었읍니다。그때 반공애국청년단체인 「우리청년회」의 유형무형의 지원도 계산했었지요。


22일 동중학교 강당에서 학생대표들과 만난 당시 도 학무국장 함석헌(咸錫憲)씨는 거사의 뜻을 알리자 의로운 일을 억제할 수 없지 않느냐는 의미의 말을 해 학생들의 결심을 굳게 해준 일도 있읍니다。


23일이 되어 내가 다니던 평안중학과 상업학교는 신의주 보안서를 습격하기로 돼 11시부터 각기 교정에 모여 연락이 오기를 고대하고 있었읍니다。


그런데 모든 계획의 본부격인 제일공업학교에서 12시에 거사하자는 연락을 받아오던 학생이 중도에 그 무렵 행패가 가장 심했던 특별보안대원을 만나 『너 오늘 죽어봐라』며 싸움을 벌이는 통에 늦어 이날 1시경에야 학교문을 나섰읍니다。남신의주의 「평중」에서 보안서까지는 약 4㎞나 됐읍니다。


1천여명의 두 줄로 된 학생대열이 「공산당타도」의 구호를 외치며 소련군이 점령하고 있는 비행장 옆을 지나쳤는데 그때 보니까 200m앞 둑 위에 기관총이 걸려 있었고 보안대원들이 공포를 쏘고 몽둥이를 휘두르면서 신의주에 못들어 간다고 소리치고 있었읍니다。대치하고 있던 학생들이 몇 개 분대의 특공대를 편성하고 투석전을 막 벌이는 순간이었읍니다。


그 비행장에서 소련군「야크」기가 몇 대 뜨더니 이내 기총소사를 퍼부었읍니다。그러자 학생들은 도로 옆 논두렁으로 흩어지기 시작했읍니다。나도 몸을 피해 벼 낱가리 속에 숨어서보니까「야크」기는 학생들과 약간 떨어진 논바닥에다 마구 기관포를 쏘더군요。우리들은 눈물을 머금고 물러서지 않을 수 없었읍니다。

 

 

 

 

 

       1945.11.25.  평양

 

[ ..... "철의 장막"이나  "참대의 장막"은 .... 지방과 지방 사이,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늘 .......   ]

 

[ .... 평양민보에는 ... 검열과 지도를 위하여 쏘모프라는 젊은 군인 ........

  .... 쏘모프가 ... "신의주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다는 말을 못들었느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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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의 11월 23일" 신의주학생반공의거사건 당시 나는 아직 평남인민정치위원회의 기관지라고 하지만 그실은 소련사령부와 공산당의 지시하에 움직이는 "평양민보"의 실질적인 책임자로 있었다.......


평양에 하나밖에 없는 신문사 책임자임에도 불구하고 내가 신의주 사건을 어설프게나마 비로소 알게 된 것은 11월 25일경이었다고 기억한다. 당시는 철도도 소련사람들이  장악하고 제멋대로 운영하고 특히 약탈물자반출운전이 위주였기 때문에 각지간의 교통의 불편이란 이루 헤아릴 수가 없었다. 그래서 지방의 뉴스가 평양에  전해지는 것도 아주 느리었던 것이다.


그런데다 이 사건이  폭발하자 소련군정당국과 공산괴뢰들은 그것이 딴지방에 파급될까  당황하고 질겁을 하여 이 뉴스가 퍼져 나가는 것을 백방으로 저지하기에 애를 썼기 때문에  일반인에게는 이 소식이 알려지는 것이 훨씬 늦었거나 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것이다.아니 그 당시에는 이것을  전연 모르고  지낸 사람도 허다 하였으며 모름지기 오늘도 북한동포 가운데는 아직도 이것을 일체 모르고 있는 사람이 적지 않을 것이다. 공산 통치자들의 뉴스 통제책이란 그렇게도 철저한 것이다. "철의 장막"이나 "참대의 장막"은 공산세계와 자유세계 사이에만 쳐지는 것이 아니라  공산사회내부의 지방과 지방 사이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늘 이뤄지는 것이다.

 

그런데 흥미있는 일은 내가 이 사건을 비로소 주워 듣게 된 것은 이 뉴스를 막으려는 소련 사람들의 통제조치 때문에 도리어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당시 평양민보에는 소련사령부로부터 우리신문의 검열과 지도를 위하여 쏘모프라는 젊은 군인 한사람이 배치되어 거의 신문사에 나와 살다시피 하였다. .... 이 쏘모프라는 소련군인은  아직 나이 젊고 계급도 높지 못하였으나... 우리나라말을 전공하였기 때문에 서투른대로 신문검열의 중책을 맡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소련사령부에는 그보다 군계급도 높고 아는 점도 그 보다는 많은 한국인2세 군인들과 통역관들도 많았지만 소련장군들은  새로 나오기 시작하는 이곳 신문검열과 지도를 위한 자리같은 중책에는 그들을 내보내지 않고 비록 젊고 낮고 서투른대로 쏘모프 같은 소련인을 내보내는 것이었다. 소련사람들이란 그렇듯 곰같이  끈끈하고 의심 많고 남의 나라 사람이란 비록  "공산주의 동무"라 해도 잘 믿으려 하지 않는 자들이었다.

 

쏘모프가 하루는 내방에 들어와서 "신의주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다는 말을 못들었느냐?"고 묻는 것이었다.나는 아무것도 듣지 못하였다고 솔직히 말하고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되물었다. 그랬더니 그도 고개를 기웃거리며 자기도 자세히 모르겠는데(정말 모르는 모양이었다) 좌우간 신의주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서는 무슨 기사이던 들어와도 취급하지 말라는 상부(사령부)의 지시라고 전하고 다짐하는 것이었다.

나는 무슨일일인지 의아스럽게 여겨 사내 간부들에게도 이리저리알아 보았으나 아무도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이었다.그런데 몇시간 있다가 사령부에서 들어 오란다는 연락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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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1962.7.1.

김일성을 고발한다
김일성 직속기자의 수기

한재덕

 

 

 


[ ..... 어디서나 밤에 총소리가 끊이지 않고 ........

 

  ..... 술에 취해 행패를 부리고 부녀자를 겁탈하는 범죄도 만연 .........   ]

 


1945년 北 진주 소련의 붉은 군대는 해방군 아닌 약탈군이었다

 


동아일보

입력 2010-03-10


대낮 만취 행패… 무전취식에 부녀자 겁탈까지


■ 소련군이 쓴 보고서 발견


“조선인 노예로 더 있게하자
봉기땐 절반 교수형 시킬것”

처벌 거의 없어 만행 지속
“일벌백계” 건의도 묵살당해

 

 이른바 ‘해방군’을 자처하며 한반도 북쪽에 진주한 소련군이 1945년 8월 이후 5개월간 북한에서 드러낸 행태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문건이 발견됐다. 1945년 12월 29일 소련군 중좌 페드로프가 소련군 진주 후 북한의 황해도와 평안남북도 등 3개도를 방문조사한 뒤 만든 이 13쪽짜리 보고서는 당시 소련군의 약탈 상황을 가감 없이 현장감 있게 전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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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련 군인이 직접 쓴 조선 약탈보고서

 

“우리 군인(소련군)의 비도덕적인 작태는 실로 끔찍한 수준이다. 사병 장교 할 것 없이 매일 곳곳에서 약탈과 폭력을 일삼고 비행(非行)을 자행하는 것은 (그렇게 해도) 별다른 처벌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

페드로프 중좌는 당시 ‘붉은 군대’의 만행을 이같이 기술했다. 그는 “우리 부대가 배치된 시나 군 어디서나 밤에 총소리가 끊이지 않고 있다”며 “특히 술에 취해 행패를 부리고 부녀자를 겁탈하는 범죄도 만연해 있다”고 지적했다.

 

이 보고서는 “대낮에도 거리에서 술에 취한 군인을 심심찮게 볼 수 있었고 신의주 내 70곳 이상의 여관과 공공건물에서는 밤마다 질펀한 술자리가 벌어지고 있다”고 기록했다. 구체적인 사례도 적시됐다. 1945년 12월 6일 공병장교 막시모프는 휘하 병사 7명과 함께 한 여관에 투숙한 뒤 여자를 부르고 밤새도록 술판을 벌인 뒤 다음 날 아침에 돈을 한 푼도 내지 않았다는 것. 더 기가 막힌 일은 막시모프 일행이 5일 후인 11일 또 이 여관에 들러 숙박비라며 돈을 냈는데 당시 북한에서 전혀 통용되지 않아 휴지조각으로 취급되는 만주 돈이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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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ews.donga.com/3/all/20100310/26736705/1

 

 

 

 

 

 

[ ..... 평북 유일의 수산기술학교 .... 폐쇄하여 공산당 정치훈련소로 .......   ]

 

[ .....  전위대인 폭도들을 동원하여 군중들을 강제해산 ... 많은 학생들을 부상 ....

    .... 홍석황 장로가 공산폭도들의 폭행을 막으려 하자 ... 그 자리에서 타살 ......  ]

 

[ .....  소총, 기관총, 따발총 그리고 비행기까지 동원하여 일대 학살행위를 ....

  .....  현장에서 피살자 24명, 부상자 3,500여명, 체포된 자 1,000여명, 그리고 시베리아 유형자 200여명 .......   ]

 


< 45년 11월 23일  신의주 학생의거 특별기고 >


    당신들은 신의주 학생 반공의거를 아는가?!


    조동영 / 평북민보 주필 학생의거 참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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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주 학생들은 왜 들고 일어났는가

 

8.15 해방의 기쁨과 흥분이 채 가시기도 전에 한반도 북쪽에는 소위 해방군이라는 명목하에 소련의 붉은 군대가 진주했다. 원래 공산주의 본질과 공산당의 정체를 전혀 모르고 있던 북한 사람들은 그래도 우리나라를 해방시켜준 군대라 하여 감사의 환대와 존대의 마음을 표시해 보였다.


그런데 이 붉은 군대가 북한 백성들의 기대와 의사에 반하여 살인, 방화, 강도, 강간 등 갖은 만행을 자행하여 해방의 희열과 흥분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온 북한 천지는 공포와 불안 그리고 초조의 생지옥으로 변해 버렸다. 비로소 그들은 해방군이 아니라 日帝(일제) 이상의 침략군이라는 것을 인식하게 되어 애국국민들은 점차 이들과 또다시 투쟁해야 할 역사적 운명을 지각하게 되었던 것이다.

 

더구나 붉은 군대의 주구인 북한공산도당들은 그들과 야합하여 그들의 만행과 비행을 비호하면서 합리화하기에 급급해 했다. 친일파가 사라지면서 다시금 매족, 매국의 반역행위를 보게된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계급투쟁과 숙청이라는 이름아래 무고한 인민들을 닥치는대로 추방하는 동족상잔의 반역행위를 저질렀다.
특히 신의주는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중국대륙과의 국경지대로 소련군과 공산군 출입의 관문이 되어있는 만큼 그들의 행패가 막심했다. 아울러 평북도청 소재지로 공산당 본부가 자리 잡고 있어 공산당들의 횡포와 만행이 더욱 기승을 부렸다.


점차 그들의 탄압은 신성한 학원에까지 침투하기에 이르렀다. 즉, 학교 교사를 마음대로 징발하여 그들의 병사 내지 숙소와 사무실 등으로 사용하는가 하면 일부 학교는 완전히 폐쇄하여 공산당 정치훈련소로 개칭하여 학생들에게 공산주의와 共産黨史(공산당사)를 가르치며 우리민족문화를 말살하고 대신 공산노예교육 주입에 여념이 없었다.


이에 학생들은 학원의 신성과 자유를 부르짖으며 공산賊徒(적도)들의 행패와 만행을 규탄하고 기회만 있으면 총궐기할 일촉즉발의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시위 행진하는 학생 집중사격 24명 즉사, 3천5백여 명 부상

 

이렇게 민심이 날로 악화되어가자 공산도당들은 소련 진주군의 만행과 야욕 그리고 자기들의 비정을 정당화하고 합리화하기위에 시민들을 강제로 동원하여 이른바 군중대회를 개최했으나 이러한 대회는 도리어 그들의 악정과 만행을 규탄하는 성토대회로 변하는 사태가 비일비재 하였다.


때마침 11월 21일 평북 용암포(신의주에서 80리 떨어진 항구도시)에서 인민위원회(당시는 정치위원회) 주최로 시민들의 지지를 얻기 위한 시민대회가 열렸다.
이날 식순에 따라 각계 대표자의 기념사가 있었는데 당시 평북학생자치대 용암포 대표가 연설하게 되었다. 학생대표는 이 절호의 기회를 이용하여 공산당의 불법행위를 규탄했다. 특히 당시 용암포에는 평북 유일의 수산기술학교가 있었는데 공산당이 학교를 폐쇄하여 공산당 정치훈련소로 대체 사용하고 있었다. 그런데 학생대표가 공산당의 불법행위와 행패 등을 지적 성토하자 운동장을 가득 메웠던 군중들은 이에 호응 공명하면서 박수와 환성으로 그간 쌓이고 쌓였던 울분을 폭발시켰다.

 

사태가 이에 이르자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용암포 공산당 당수인 이종흡은 공산당 전위대인 폭도들을 동원하여 군중들을 강제해산시키면서 학생들과 충돌했는데 그들을 곤봉과 철제 체인 등을 휘둘러 많은 학생들을 부상시켰다. 이 광경을 목격하고 있던 용암포 제일교회 홍석황 장로가 공산폭도들의 폭행을 막으려 하자 그들은 홍장로를 그 자리에서 타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신의주 소재 남녀 7개 중학교로 구성된 평북학생자치대는 11월 23일 오전 9시 남자 중학교(6개교) 3,500여명을 대표하는 간부학생들이 신의주 제일공업학교 강당에 모여 공산당 타도의 기치를 높이 들고 이날 오후 2시(처음에는12시) 정각을 기해 총궐기하여 일제히 행동을 감행키로 결의했다. 그리고 6개 학교를 3개조로 편성하고 평안북도 보안부와 평북공산당 본부 그리고 신의주시 보안서를 각각 담당하여 진격 점거하기로 하였다.

 

이러한 학생들의 총궐기를 사전에 탐지한 평안북도 보안부장 한웅(평북공산당수)은 공산당의 비정과 만행을 규탄하고 조국의 자주독립을 외치며 맨주먹으로 행진하는 나이어린 학생들에게 소총, 기관총, 따발총 그리고 비행기까지 동원하여 일대 학살행위를 자행함으로써 많은 희생자를 냈다. 당시 학생들의 투쟁상황과 공산당들의 천인공노할 만행 등은 상술할 수 없으나 여하간 결과는 참담했다. 현장에서 피살자 24명, 부상자 3,500여명, 체포된 자 1,000여명, 그리고 시베리아 유형자 200여명 등, 우리나라 학생 독립투쟁 사상 일찍이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비참한 희생을 초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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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의 탄압 질곡에서 해방되자 소련 제국주의가

 

일제 36년간의 질곡과 탄압에서 우리는 8.15해방으로 조국광복을 맞이했으나 이 해방의 희열과 흥분이 채 가시기도 전에 운명은 다시 우리 젊은 학생들로 하여금 일제 대신 신판 적색제국주의에 항거하여 반소, 반공의 피어린 투쟁을 강요당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따라서 해방 후 오늘날까지 우리 애국 학생들의 피어린 발자취는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의 중요한 한 페이지를 기록한 것이며 또한 그 업적도 청사에 길이 빛날 것이다.


결국 해방된 조국을 적화하려던 국제공산주의자들의 흉책을 끝까지 분쇄하기 위해 우리 학생들이 또 다시 정의의 투쟁과 희생을 아끼지 않은 것이 바로 신의주 학생반공 의거이다. 일제시대의 광주학생의거가 항일투쟁의 대표적 학생봉기라면 신의주학생 반공의거는 반공투쟁의 대표적 학생의거로서  우리역사에 길이 남을 학생의거의 양대산맥의 한 축을 이루고 있다 할 것이다.

그러기에 정부에서도 광주학생의거의 날인 11월3일을 학생의 날로, 신의주 학생반공의거의 날인 11월 23일은 반공학생의 날로 제정 공포했다.(오늘날 이 두 학생기념일은 행정령 간소화라는 구실아래 취소됨)

 

동독, 헝가리보다 수십 년 앞선 반소 반공 학생의거

 

돌이켜 보건데 오랫동안 일본제국주의의 식민지정책에 기인한 문화봉쇄정책 아래 있던 우리민족이 새로운 소련 적색제국주의의 정체와 진상을 잘 알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또한 자유세계의 어느 국민이나 정치가들도 철의 장막 뒤의 크레믈린의 음흉한 정책을 명확히 파악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리고 세계2차 대전이 끝난 후 10년 혹은 20년의 세월이 흘러서야 세계는 점차 그 체험과 관찰을 통해 비로소 크레믈린의 야욕의 정체를 인식하며 각성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런데 우리 한국의 청년학생 특히 신의주의 젊은 학생들은 불과 3개월간의 경험으로 적색침략주의와 그 포악상을 정확히 간파하고 민족자주권과 자유수호의 희생자로서 반공의 선구가 되어 우리나라 반공투쟁의 효시를 이루었다는 데에 신의주학생반공의거의 역사적 의의와 교훈이 있다할 것이다.


신의주학생반공의거 때 나이어린 학생들의 맨주먹 시위에 북한공산적도들과 소련 붉은 군대는 야만적인 잔학행위를 감행했다. 그들은 일제 장총을 비롯해서 권총, 따발총, 기관총, 심지어는 비행기까지 동원하여 의거진압에 혈안이 되었다는 사실만 보아도 이 반공의거가 얼마나 치열했으며 또한 심각했던가를 가히 추측하고도 남음이 있다.

 

1953년 6월 동독노동자들의 반소시위사건, 1956년 10월 헝가리 국민의 반공의거, 1968년 8월 체코 국민의 반소의거 등에서 소련은 모두 군대를 진격시켜 이들 의거를 무자비하게 진압했다. 더욱이 56년 헝가리 반소 반공의거 때는 그 잔학성에 대하여 전 세계 자유 진영 국민들의 분격을 자아내어 헝가리 의거민들에게 격려의 서신과 위문품을 보내게 했다. 당시 우리나라에서도 일반사회단체연합회 주관으로 위문품을 모아 국제 적십자사를 통해 전달한 사실을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동유렵 인민들의 의거 보다 10년 내지 20년 훨씬 앞선 1945년 11월23일의 신의주 학생반공의거 때 그들은 벌써 전차 아니 비행기까지 동원하여 반공인민을 학살한 역사적 사실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 신의주학생반공의거를 계기로 소련은 수많은 청년학생들을 체포, 구금하여 그중 약 200여명을 시베리아에 유형을 보냈다. 즉, 신의주 학생반공의거에 관련하여 체포된 소위 정치범(실은 애국자)들이 우리 한국민족으로서는 시베리아 유형 제1호가 된 셈이다. 그 후 북한에서는 소위 중대정치범들은 이 시베리아 유형이 상례가 되었다.

 

신위주의거가 이북 각지의 학생의거 계기적으로 촉발

 

일찍이 우리는 한 주권국가 국민이 타국의 강제수용소에 끌려가서 노예노동을 강요 당하는 사실을 알지도 못하고 또한 들어 보지도 못했다. 이것만 보아도 공산주의에는 인권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으며 또한 공산주의자들에게는 조국이 없다고 하는 것을 충분히 알고도 남음이 있다할 것이다.


신의주 학생의거야말로 우리나라 집단적 반공투쟁의 시초로 조국해방투쟁사상 특히 반공투쟁사상 찬란한 금자탑을 세웠으며 청사에 길이 빛날 것은 두말할 것 없다. 또한 당시 이 의거를 계기로 분열, 분산되어 있던 북녘의 민족세력을 결합시켜 반공투쟁역량을 강화한 정치적 의의도 과소평가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각종 반공의거의 도화선이 되었으며 촉진제가 되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실제로 이 의거를 계기로 북녘 각지에서는 요원의 불길처럼 반공 반소의거가 계속 일어났다. 즉, 1946년3월4일 함북 길주의 고려학생동맹의거, 동년 3월 30일 함흥 학생의거, 동년 5월 평양 학생의거, 49년 1월 황해도 해주 학생의거, 50년 10월13일 역시 황해도 신천학생 유격대 투쟁 등이 학생의거를 비롯해서 청년, 일반시민들의 각종 반소 반공의거가 점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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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kforum.co.kr/bbs/view.php?id=all&page=1&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910


<45년 11월 23일  신의주 학생의거 특별기고>
 당신들은 신의주 학생 반공의거를 아는가?!

 조동영 / 평북민보 주필 학생의거 참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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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당시 우리뿐만 아니고 일본전체가 우물 안의 개구리로 국제정세에 깜깜이었다. 더욱이 소련에 대하여는 더더욱 심했다. 소련군을 대하는 것은 난생처음이다. 소련군 사령관 이하 고급장성 100여명을 초청하여 대대적인 환영축하연을 베풀었는데 50도가 넘는 독한 소주로 접대하였는데 客(객)은 멀쩡한데 주인이 먼저 곯아떨어지는 해프닝이 연출되기도 했다.

 

소련이란 나라는 선진국이고 물질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우리보다 월등한 나라라는 선입감은 며칠이 못가서 무너졌다.


제일 먼저 눈에 띠는 것이 담배였다. 장성들을 제외하고는 모조리 호주머니에서 葉(엽) 담배를 꺼내 양손으로 비벼서 신문지에 말아서 피우는데 담배 마는 솜씨가 숙련공이 아니고는 그와 같이 빠르게 말수 없을 정도로 능숙했다. 둘째로는 양말대신 발싸개였다. 내가 어릴 적에 머슴들이 발싸개를 발에 감는 것을 본적이 있지만 그때는 이미 발싸개는 볼 수 없는 시대였다. 셋째는 속목시계에 대한 관심이 많을 뿐만 아니라 좋아 하는 것이 역력했다. 어디서 어떻게 구했는지 모르지만 두 개를 차고 있는 소련군을 볼 수 있었다.


또한 재래시장에 많이 몰려와서 물건을 훔치는 사건이 수없이 발생했다. 치안을 담당했던 나로서는 소련군의 행패에 여러 차례 사령관에게 항의한 적이 있다. 검찰이란 붉은 완장을 단 소련군 2명씩 순찰을 하는데 “정지”명령에 불복하고 도망가면 무조건 발사하는데 죽거나 부상당하는 것은 안중에 없는 것 같이 느껴지기도 했다. 소련군에 대한 시민들의 인식은 완전히 변했다. 이와 같은 변화는 일부지방에 국한된 것이 아니고 북한 전역이 그러했다.

 

<소련군 만행과 탄압에 격분한 청년 학생들
맨주먹으로 보안서 등 습격하는 사건 도처에 발생>

 

소련군의 만행과 북한공산당의 탄압에 격분한 청년 학생들은 맨주먹으로 보안서와 공산당 사무실을 습격하는 사건이 도처에서 일어났다. 그 대표적인 사건이 황해도 해주 반공의거사건, 함경남도 함흥학생사건 등이다. 특히 신의주 반공학생사건 주동자들이 재빨리 피신 월남하여 서울에서 진상보고 대회를 열어 대단한 파문을 일으킨바 있다. 실은 그 당시 남한주민들은 소련군이 북한지역에 진주한 이후의 정세를 전혀 모르고 있는데 남한공산당의 선전과는 판이하게 다르게 월남인들의 입을 통해 듣는 것이 고작이었다. 이런 찰나에 신의주 학생들의 반공의거 사건에 직접 가담했다.


도피해온 학생의 진상보고에 관심이 집중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것도 그때는 대학이 없었기에 대부분의 학생이 10대의 중학생들이었다. 10대의 紅顔(홍안) 학생들이 순진한 목소리로 소련군의 만행을 예를 들어 하나하나 가식 없이 설명하는데 감동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해방군이라고 자랑하며 치켜세우던 공산당의 선전이 허위라는 것을 알게 되는 동기를 만들었다.


압록강에 있는 수풍발전소의 기계를 대부분 뜯어 갔고 흥남비료공장의 기계마저 가져갔다는 설명에 남한주민은 비로소 소련군의 정체를 다소나마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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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5.9.20.  스탈린

 

[ ..... 북한에  부르주아민주주의 정권을  수립하는데  협조할 것 ........   ]

 

 

북조선에서 소련군과 현지정권기관 및 주민과의 상호관계에 대한 소련 극동사령관 및 제25군에 내린 소련군최고사령관(스탈린)의 훈령

 

적군 군대에 의한 북조선 점령과 관련하여 최고 총사령부는 다음의 지시에 따를 것을 명령한다.

 

1. 북한 영토 내에 소비에트나 소비에트 정권의 다른 기관을 수립하거나 소비에트제도를 도입하지 말 것.

2. 반일적인 민주주의 정당단체의 광범한 동맹에 기초하여 북한에 부르주아민주주의 정권을 수립하는데 협조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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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

안토노프

1945년 9월 20일

 

- 소련방 과학 아카데미 동양학연구소 편, (1981), 『소련과 북한과의 관계, 1945-1980: 문헌 및 자료』, 국토통일원 번역(서울: 국토통일원, 1987.

 

 

 

 


      1945.11.18.

 

[ ..... 38도 ... 빨리 장벽을 철폐하여 ... 통일을 촉구한다 .........


 .....  소련점령지역에서 특히 언론 출판 집회 결사 신앙의 자유를 확보케 하며  ...  일당일파의 專管을 불허하며  ... 인민위원회에 구속된 조선인정치운동자를 즉시 석방하며  .... 물자를 조선 외로 수출하는 것을 소련당국에 탄원함  .......   ]

 


재경서북인, 38선 철폐촉진대회 개최

 

게재지명 중앙신문
게재일자 1945년 11월 19일
날짜 1945년 11월 18일

 


方應謨 외 여러 재경 서북인유지의 발기로 그 간 준비하여 온 북위 38도 철폐 촉진대회는 18일 오후 1시부터 시내 천도교당에서 서북출신 5백여명이 참집한 가운데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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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군수뇌부에 발송할 결의문은 다음과 같다.

 

◊ 決議文


我朝鮮의 해방을 위하여 일본을 타도한 연합제국에 대하여 감사의 의를 표함.


그러나 북위 38도를 남북으로 미·소 양군이 분단점령한 것은 조선의 자주민족통일국가 완수상 절대지장이 되어 있을 뿐 아니라 생활상 불안 불편이 막대하므로 빨리 장벽을 철폐하여 행정상, 경제상, 교통상 통일을 촉구한다.


一. 북위 38도 이북의 소련점령지역에서 특히 언론 출판 집회 결사 신앙의 자유를 확보케 하며 일본정부로부터 행정 사법기관 등을 접수함에 있어서 일당일파의 專管을 불허하며 8월 15일 이후 현존한 인민위원회에 구속된 조선인정치운동자를 즉시 석방하며 소군의 불합리한 양곡, 의류, 기계 등 물자를 조선 외로 수출하는 것을 소련당국에 탄원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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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11월 18일

在京西北人大會

 

 

 

 

 

      1945.12.25.


[ ..... 인민민주주의운동은 대지주의 토지소유 현실 때문에 지장을 받고 있다. 빠른 시일 내에 농지개혁을 ........  ]

 

 http://www.newdaily.co.kr/news/article.html?no=208685

[제40회 이승만 포럼] 원문으로 본 그 비밀의 정체

스탈린 지령문 "북한에 소련체제 이식은 이렇게 하라"


  

이지수 명지대 교수 | 최종편집 2014.0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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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쉬킨 보고서


(다음은 졸고, “북한의 단독정권 수립과정과 정치적 함의,” 한국정치외교사논총, 34집 2호, 2013.2, 104~105쪽 내용을 전재한 것임. )


   …(공산당의) 목적은 소련에 우호적인 단일-여기서 단일이란 의미는 "단일한 대오"라는 말에서 볼 수 있듯이, 남북을 하나로 묶는 통일이란 의미가 아니라 북조선내에서의 내적 통합성을 강조하는 의미이다-독립민주공화국을 수립할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공산당은 초기 심각한 정치적 좌경의 오류/소비에트 질서의 복사/ (45년 9월 20일자 스탈린의 비밀지령문 1항에 언급한 바, 소비에트 질서를 도입하지 말라고 적시되어 있다-필지 첨가)를 범했다. 이후 당노선은 바로 잡혔으나 아직 부르주아 민주진영 출신의 사회 활동가를 광범위하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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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론


1. 반일 민주 정당 사회단체의 광범위한 블록을 토대로 한 북조선의 부르주아민주개혁이   너무 느리게 진행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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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인민민주주의운동은 대지주의 토지소유 현실 때문에 지장을 받고 있다. 빠른 시일 내에 농지개혁을 실시해야 한다.(농지개혁과 관련한 다른 문서에서는 "반동 친일세력의 기반을 허물기 위해서"라고 언급된다. 여기서 반동이나 친일, 대지주는 반소와 동의어이다.(필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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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처음부터 부르주아 민주정권의 의미를 .... 동유럽에서와 같은 친소정권을 ......  ]

 

구소련의 북한 장악음모 “결정적 자료”/쉬킨 중장 비밀보고서 내용·의미


[한국일보]  1995-08-14

 

◎45년 9월 스탈린지령 이행과정·후속조치 담아/동구처럼 신탁통치 결정 전 이미 단독정권 의도

 

구소련은 북한진주 초기단계부터 38선 이북에 자국의 정치 경제 군사적 이익을 보장할 친소정권을 수립할 계획을 추진하고 있었음이 더욱 확연해졌다.


국내외 학계에서는 소련이 늦어도 45년 10월께는 북한에 친소 단독정부를 수립하려는 의도를 드러낸 것으로 보고 있었으나 이를 입증할 1차 자료의 빈곤에 시달려왔다. 이 같은 상황에서 본보가 입수한 소련군 총정치사령관 쉬킨 중장의 비밀보고서는 소련지도부의 북한 내 단독정권 수립의도를 보다 확실히 뒷받침해주는 문서로 주목된다.


특히 이 보고서는 45년 9월 20일 스탈린이 연해주 군관구와 25군 군사위원회에 보낸 북한정권 수립에 관한 비밀전문의 후속문서라는 점에서 스탈린정권 내부에서 진행된 북한장악 음모를 알려 주는 결정적 자료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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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제1·2항은 북조선지역에 소비에트정권 및 체제를 구축하지 말고 광범위한 블록을 기초로 한 부르주아 민주정권을 수립하라는 내용이다. 이 내용을 놓고 학계에서는 두 가지 해석이 나왔었다. 하나는 부르주아 민주정권이란 공산당을 블록의 중심으로 하는 친소 인민민주주의 정권을 의미한다는 주장이었고 다른 하나는 스탈린은 점령당시 한반도 분단계획이 없었으나 이후 상황이 바뀌자 생각을 달리하게 됐다는 해석이었다.


따라서 이번 문서는 스탈린이 처음부터 부르주아 민주정권의 의미를 한반도에서 소련의 정치 경제적 이익을 담보할 토대로 규정, 북한에 동유럽에서와 같은 친소정권을 세워 소련의 국가이익을 추구하려 했음을 보다 명확하게 입증하는 자료인 셈이다. 특히 이 보고서는 45년 12월 27일 한반도 신탁통치를 결정한 모스크바 삼상회의에 앞서 작성된 것이어서 소련이 남북한 단일정권 수립에 찬성한 것처럼 알려진 것과는 달리 북한 단독정권 수립을 의도하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또 하나 주목되는 것은 소련이 친소정권 수립의 발판으로 토지개혁을 이용했다는 점이다. 북한의 친소세력은 46년 3월 토지개혁법령을 발표, 토착지주세력의 제거에 들어갔다. 이 시도가 친소세력의 실권 장악이라는 정략적 의도에 의한 것임을 알 수는 있었으나 이를 입증하는 문서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따라서 토지개혁 3개월 전인 45년 12월 쉬킨 중장이 「북한의 인민민주주의 운동을 방해하는 지주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토지개혁이 필요하다」고 지적한 대목은 소련이 단독정권 수립 과정에서 토지개혁을 친소세력에 대한 지원책으로 구사했음을 입증해주고 있다.


쉬킨이 『지난 45년 9월 21일(스탈린비밀암호 전문을 수령한 날짜) 최고사령부의 지령서에 명령된…」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 데서도 이 보고서가 스탈린 지령에 대한 이행과정과 후속조치를 담은 것임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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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5


[ ..... 김일성이 ... 신민주주의로 나간다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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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가 신의주학생사건에 직접 가담했기 때문에 잘 압니다만 정말 말이 안되는군요. 신의주 동중 강당에 학생들이 모였을 때 30대의 김일성이 나타났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때 그의 입에서 공산당이란 말은 한마디도 안나왔습니다.

신민주주의로 나간다고 했어요. 당시 신민주주의가 모택동이 내걸었던 사상인 걸 누가 알았습니까. ‘신’자는 빼고 민주주의라는 말에 그대로 박수를 쳤던 거예요. 그래서 강당밖에 환영플래카드를 들고 몰려왔던 공산당원과 농민회원등이 학생들에게 잔뜩 두들겨 맞고 도망가는 사태까지 벌어졌었지요.” (동아일보 오상원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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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웅평 씨의「남과 북」특별 대담-오상원 본사 논설위원, 동아일보 1983년 4월 12일자 3면)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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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민주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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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민주주의(영어: New Democracy, 新民主主義)는 새로운 민주주의를 뜻하며, 프랑스 대혁명 이후에 있었던 부르주아 민주주의, 자유민주주의, 간접민주주의와는 다른 방식의 민주주의를 뜻할 때 주로 쓰는 정치 용어이다.

전 세계에 '신민주주의'란 용어는 널리 사용되며, 각 나라에 따라 그 의미는 조금씩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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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민주주의 (마오이즘): 마오쩌둥이 모택동주의 이념에서 주장한 민주주의 쟁취에 대한 혁명 이론, 사회주의 이행기의 전 단계에 포함되는 민주주의 혁명은 기존의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과 달리 프롤레타리아 계층이 일으켜야 하고, 그 혁명 후의 체제는 자유민주주의가 아닌 사회주의와 비슷한 민주주의 체제가 되어도 사회주의 이행기에 상관이 없다는 내용을 다룬 민주주의 전술 이론이다. 따라서, 신민주주의는 신해혁명 이후에 있었던 중국에 널리 알려진 민주주의인 삼민주의를 구민주주의라고 구별하며, 차별화 된 민주주의를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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