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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에다 감히 적폐청산이라는 저질 구호를 갖다 대느냐” ........
2018.10.21 조회수 : 18

 

[ ......  [대한미국]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자랑 ........

 

  ...... “어디에다 감히 적폐청산이라는 저질 구호를 갖다 대느냐” ........     ]

 

 


‘수리온!’ 22년 전투헬기 조종사의 외침 

 

 


김영주 기자
승인 2017.07.20


문재인 정부가 한국형 기동 헬기 ‘수리온’을 방산비리 적폐청산의 대상으로 삼으려는 움직임에 대해 22년간 전투헬기를 조종해온 한 예비역 장교가 반발하고 나서 화제가 되고 있다.


전투헬기부대에서 22년간 조종사와 지휘관 참모로 근무한 예비역 소령인 조 모 씨는 18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내가 아는 수리온의 개발과 운용은 우리 [대한미국]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자랑이자 역사에 기리 남길만한 엄청난 쾌거”라며 “그것이 개발되기 까지 참여한 많은 사람들에게 훈장을 줘도 모자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시행착오 없는 위대한 산물이 어디 있겠느냐”며 “어디에다 감히 적폐청산이라는 저질 구호를 갖다 대느냐”고 비판했다.

 

조 씨는 “지난 정부의 산물이라 하여 적폐 대상? 우리의 자랑스러운 국산 수리온 헬기에 대해 부실덩어리라고 대대적인 감사돌입?”이라며 “수리온이 만들어지기까지 직접 목숨을 담보로 1호 시험 비행에 참가했던 사랑스런 후배 ○○○기장과 ○○○기장. 그리고 아직도 조금의 결함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일념 아래 산업전선에서… 야전실무부대에서 직접 운용하며 정비와 시험비행에 투입되고 있는 내 전우들… 그 사람들 얼굴에 먹칠하지 마라”라고 일갈했다.


특히 “지금 발견되는 결함들 그리고 그 해결의 경험이 축적되어야만 우리나라 항공산업이 발전한다”며 “아무 데나 이상한 잣대로 접근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다.


이에 누리꾼들은 “아이들이 밥 많이 준다고… 매를 댄다고 성큼 어른이 되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지 않다. 당근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분야다. 영공을 지켜주고 가르쳐 준 공로… 존경스럽다”, “왜 감사원은 전문가들을 포함해서 감사팀을 만들지 않을까요? 해당 분야 전문가들을 참여시켰더라면 객관적이고 훨씬 더 발전적인 감사 결과를 내놓을 수 있었을 텐데”, “짧은 기간에 탄생한 자랑스러운 수리온임을 굳게 믿습니다. 제작한 과학자들, 시험비행한 조종사들 등 수고한 산업전사들은 진정한 이 나라 애국 국민들이다.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여러분께 감사드린다. 절대 용기 잃지 마십시오”, “동감한다. 부족할 수 있다. 개선 해나가면 된다. 수리온 T-50 우리의 자랑이다. 싸잡아 매국노 만들지 마세요. 다들 피땀 흘리며 노력한다. 나도 군시절 율곡사업에 참여했던 사람으로 사명감으로 일했다” 등의 반응을 보였다.
 

 

 

 

       19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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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철호(金喆浩) 연구관의 회고를 들어보자.

 


나는 당시 탄약연구실에서 실무를 담당했습니다. 당시 밤 12시 이전에는 집에 돌아간 적이 없어요. 식사는 연구소 식당에서 해결했습니다. 매일밤 같이 밤늦도록 일하는 것을 보고 식당주인도 감명을 받았는지 아주 친절하게 대해주었어요. 야외시험장에서 밤늦게 돌아와도 귀가하지 않고 기다리고 있다가 식사를 만들어 주었어요. 하다 못해 라면이라도 끓여주었어요. 지금 생각해도 참 고맙게 느껴집니다.


이런 고생이 계속되다보니 어느 날 2층에 있는 사무실로 올라가는데 갑자기 머리가 "핑"돌며 현기증이 나더구만요. 계단에서 쭈그리고 한참 쉬고난 후 겨우 2층으로 올라간 기억이 있습니다. 너무 바삐 뛰어다니고 잠을 제대로 못잔 탓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때는 40대 초반인데도 그랬습니다. 그러나 다음 날은 또 뛰었습니다. 연구실에서도 야전침대에서 잠깐 눈을 붙이던가 아니면 마룻바닥에 매트리스를 깔고 담요만 덮고 자기 일쑤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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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시제품에 대한 시사(試射)가 끝나자마자 곧이어 72년 1월부터 제2차 시제작업으로 들어갔다. 품목은 제1차 시제 때와 같았으나 수량이 좀 늘었다.


1. 칼빈 M2 : 20정

2. 기관총 M1919 A4 : 10정

               M1919 A6 : 10정

3. 박격포 60mm : 5문

              경량 60mm : 10문

              81mm : 5문

4. 로켓 발사기 3.5인치 : 10문

5. 자동소총 MX : 30정

6. 수류탄 M26 A1 : 300발

                   M33 : 100발

7. 대인지뢰 M18A1 : 50발

8. 대전차지뢰 M15 : 20발

                     M19 : 50발

그리고 일부 품목이 추가되었다. 병기로서는 66mm 신형로켓 발사기 10문, 유탄발사기 M79 5정이었다.

포탄의 시제도 개시되었다.

① 박격포탄 60mm : 400발

② 로켓(3.5인치)탄 : 50발

③ 로켓(66mm)탄 : 50발

④ 유탄 40mm : 50발

⑤ 각종 신관 : 1,000개

병사란 무기만 갖고 싸울 수는 없다. 개인장구도 필요하다. 예비군도 공급해 주어야 한다. 그래서 개인장구 개발에 착수했다.

1. 예비군용품 : 피복, 배낭, 수통 (3개 품목)

2. 현역군 공용품 : 철모, 파이버모, 방탄조끼, 방독면, 구명대 (5개 품목)

3. 식량 : 개인용 비상 전투식량


이상 품목만 개발하여 예비군에 공급하면 예비군 무장은 완성할 수 있다. 즉 "예비군 20개 사단의 경보병사단화"라는 필자가 부임할 때 부여받은 임무는 완수되는 것이었다.


기간은 3월말까지 3개월이다. 제2차 시제품은 병기생산을 위한 개발이다. 쓸 수 있는 병기를 만들어야 한다. 그렇다면 우선 설계도면과 각종 스펙크(specification의 약자, 설계명세서라는 뜻)를 구해야만 가능하다. 신응균 소장은 70년에 국방과학연구소가 창설되자마자 미국으로부터 병기개발에 대한 기술원조를 받고자 많은 노력을 했다.


그런데 미국의 반응은 냉담했다. 특히 미 국무부와 주한 미 대사관은 국방과학연구소 설립 자체에 대해 못마땅해 했다. 미국 정부에서 원조를 해서 KIST라는 종합연구소를 설립해 주었는데, "병기개발도 KIST를 이용하면 될 것이지, 왜 별도로 병기연구소를 만들려고 하느냐?" 하는 기본 원칙 문제부터 반대했다. 그리고 남북한의 대치관계가 군비확충 경쟁체제로 들어가는 것에 대해 염려를 했다. 필요한 병기는 미국에서 구해다 쓰라는 것이었고, 한국은 병기개발을 하지 말라는 뜻이기도 했다.

그러나 미 국방부의 견해는 좀 달랐다.


① 우선 한국군은 미군병기로 장비하고 있는데 모두 구식병기이다. 이러한 구식병기는 미군에서는 이미 도태 당하고, 신형병기로 대치했다. 구식병기는 현재 제작하고 있지 않으며 부품조차도 생산할 수 없게 돼있다. 그러니 한국군이 사용하고 있는 병기에 대한 수리 보수는 한국 자체에서 해결할 수밖에 없다.

② 이러한 구식 병기는 전세계의 후진국에서도 사용되고 있다. 이들 국가의 병기유지용 수리부품은 어느 나라에선가 만들어서 공급해 주어야 하겠는데, 이번 기회에 한국으로 하여금 생산토록 하자. 이렇게 하는 것이 미국의 전세계의 안보전략상 미국에게 유리하다.

③ 한국에서 병기를 생산하게 되면 그만큼 미국의 방위원조를 줄일 수 있다.

④ 한국의 방위산업체는 장차 미국의 방위산업체의 계열화 공장(하청공장) 형태로 이끌어 가면 미국의 방위산업체에 대한 피해는 없을 것이다.

⑤ 한국의 방위산업의 범위를 현재 한국군이 보유하고 있는 방어용 목적의 병기로 한정한다면, 미 국무부의 의도에 배치되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국방부의 요구가 국무부에 받아들여져 1972년 1월 7일에 하딘(Hardin)씨를 단장으로 하는 하딘 팀이 한국에 파견되었다. 하딘씨는 ARPA(국방부 기술연구처: Advanced Research Projects Agency 후에 DARPA로 개칭)에서 파견됐기 때문에 ARPA팀이라고 불렀다.

http://ceoi.org/10ceoi(text)/10ceoi(text31).htm

 

 

 


1970.8.6.   국방과학연구소  비밀 설립


ADD는 1970년 1월 박 전 대통령이 자주국방을 천명한 이후 그해 8월 무기개발 전문 연구소로 문을 열었다.


  2015

ADD는 1970년 8월 6일 자주국방과 방위산업 육성을 위한 국방연구개발 전문연구기관으로 창설됐다. 지난 45년간 ADD는 국방에 필요한 병기 장비와 물자에 관한 기술적 조사, 연구, 개발, 시험 등의 임무를 수행했고 국방연구개발에 25조원을 투자해 297조원의 경제효과를 창출했다. 특히 북한 전역을 타격할 수 있는 유도무기 개발과 함께 지상, 해상, 공중 등에서 운용 중인 171종의 무기체계를 국산화하고 KT1 기본훈련기와 K2전차 기술, 함대함 유도무기 ‘해성’ 등의 방산 수출에도 기여했다.

 

 

국방과학연구소

 나무 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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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칭 ADD, 국과연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본부는 대전광역시 유성구 자운대에 위치해 있으며, 창원, 태안, 서울, 포천, 해미에도 연구소와 시험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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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D 설립 초반, 홍릉에 위치해 있을때 홍릉 기계라는 이름으로 위장하고 있었다. 대외적으로는 트랙터 만드는 회사라고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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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각종 방위산업 관련 비리 때문에 방위사업이 황금알을 낳는 거위 격으로 묘사되지만 이건 비리가 섞여서 그런 것이다. 원칙적으로 하면 최소한의 이윤은 보장된다. 법적으로 9%~16% 내외로 이윤을 주라고 명시되어 있으며 대신 업체는 모든 원가비용을 정부에 공개해야 한다. 하지만 떼돈은 못 버는 것이 군수사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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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기 개발에 필요한 예산 자체는 국방부에서 나오다가 방위사업청이 생기면서 예산 출처가 방위사업청으로 바뀌었다. 국방부 소속 기타공공기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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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12월 3일에는 포천 시험장에서 포 훈련을 하다가 폭발사고가 일어나 사망자 3명 포함 6명의 인명피해가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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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ADD에서 개발한 무기들이 잇따라 결함 판정을 받으면서 일부분의 차기 무기 사업에 차질을 겪고있다. K11 복합소총이나 K-21 장갑차, K-2 흑표 전차 등등이 목표성능 미달이나 결함품들 때문에 실전배치가 미뤄지기도 했다. 허나 방위산업의 세계에서는 연구과정 중에 결함이 발견된 것은 전시에 병사들이 목숨을 잃으면서 결함이 발견되는 것에 비해 훨씬 낫다. 돌격소총을 설계하고 제작하는데도 결함이 나오는게 방위산업이다. 당장 우리나라의 K2 돌격소총처럼 이미 성능이 검증된 무기를 K2C1 으로 살짝 개량만 했음에도 불구하고 결함이 나왔다. 그런데 K-11 같은 물건이나 여러 분야의 과학기술들이 총 집합된 물체인 전차, 잠수함, 전투기, 헬리콥터 등에 결함이 안 나오는게 더 이상하다. 미국과 러시아, 유럽, 이스라엘을 포함한 전 세계 군사기술 선진국들의 사례들을 조금만 뒤져봐도 신무기에 결함이 발견되서 개발기간이나 실전배치 기간이 연장되는 경우가 셀 수 없이 많다. F-22 다음가는 성능을 자랑하며 한국 공군을 포함하여 미국, 영국, 일본 등 서방 선진국들이 대량으로 도입하려는 차세대 전투기의 개발 과정에도 많은 결함이 발견되었다.


제일 문제인건 예산과 개발기간을 부족하게 주고 반드시 개발할 것을 강요하며 특히 부족한 예산과 개발시간중에 나올 가능성이 매우 높은 개발 시행착오나 무기에서 발생되는 결함은 결코 인정해주지 않는다는 것이다.[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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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명품무기는 신기술을 투입해 새로 개발된 무기가 아니라 C-130, F-15, AN/SPY-1 등 오랜 시간의 사용을 통해 신뢰성과 성능이 검증된 무기가 명품무기이다. 무작정 비리로 몰아가는 기자들도 문제지만 그 기사를 그대로 믿지 말고 비판적으로 읽을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비판적으로 읽을만큼 지식을 쌓는데는 일반인들에게 한계가 많으므로, 있는 사실 그대로 작성하거나 전문적인 지식을 가진 기자들의 책임감이 반드시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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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2.12.

       
  4대 군사노선 

 

1962년 12월 노동당 제4기 5차 전원회의에서 「국방에서의 자위」 원칙으로 채택된 군사노선으로서 「전군의 간부화」·「전군의 현대화」·「전인민의 무장화」·「전국의 요새화」를 말한다.


「전군의 간부화」는 북한군을 정치·사상적으로, 군사·기술적으로 단련시켜 유사시에 모두가 한 계급 이상의 임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며 「전군의 현대화」는 북한군을 현대적 무기와 전투기술로 무장시키고 아울러 현대적 군사기술을 도입하는 것을 의미한다.


「전인민의 무장화」는 군대는 물론 노동자·농민을 비롯한 모든 주민을 정치·사상적으로, 군사 ·기술적으로 무장시키는 것을 의미하며 「전국의 요새화」는 주요 군사 및 산업시설을 지하화하고 북한전역에 방위시설을 구축하여 철벽의 군사요새를 만드는 것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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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은 4대 군사노선을 군사정책의 기본 노선으로 책정한 이후 이의 추진에 주력해 왔는데 이와 관련해 김일성은 1970년 노동당 제5차 대회에서의 보고를 통해 4대 군사노선을 적극 추진한 결과 전체 인민이 총을 쏠 수 있게 되었다. 모든 지역에 철통같은 방위시설을 구축해 놓았으며 중요한 생산시설까지 요새화하였다. 자립적 국방공업기지가 창설되어 필요한 현대적 무기와 전술기재를 자체적으로 생산하고 있다라고 언급, 4대 군사노선의 완성을 호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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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k.joins.com/dic/view.asp?idx=20001228011310

 

 

1964.10.16. 중공 원폭 실험 성공

1967.6.17.  중공 수소폭탄 실험 성공


1968.1.21.  무장특공대 31명, 청와대 습격시도.  1.21사태.

1968.1.23.  美정보함 푸에블로호 납치.


1968.2.1.   경부고속도로 기공식.

[ .... 「싸우면서 건설해 나가는 그런 국민」이 되어야 하겠다는 ....... ]


1968.4.1.   향토예비군  정식 발족


1968.8.24. 중앙정보부, ‘통일혁명당’사건 발표 .

1968.11.2.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

 

1969.7.25. 괌에서 닉슨 독트린  발표 . 

1970년 2월 국회에 보낸 외교교서를 통하여 닉슨독트린을 세계에 선포.

[ .... 3. 핵공격 이외의 공격에 대해서는 당사국이 그 1차적 방위 책임을 져야 하고 미국은 군사 및 경제원조만 제공한다. .......   ]


1970.2.18. 미국 외교백서

".... (2) 당사국은 美 지상군 병력의 지원을 기대하지 말고, 제1차적 방위 책임을 져야 한다"고 ...."


1970.4. 중공 인공위성 발사 성공


1970.6.5. 서해 휴전선 부근에서 우리 해군 방송선 피랍사건

1970.6.22. 국립묘지 현충문 폭파사건. 암살미수.


1970.7.5.  주한미군 1개 사단 철수 통고

1970.8.    애그뉴 부통령, 약 5년 후에는 완전 철수할 계획 요지의 발언.


1970.10.2. 중공 국지전 계속지원 호언


1971.3. 주한 미 제7사단 병력 2만 철수

1971.7.9 부터 11일까지 베이징에서  저우언라이 키신저 비공개담판

1971.10.  유엔총회는 미·일의 반대를 넘어   중국을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으로 받아들였다.

 

1973.1.27. 월남 휴전협정 체결.  봄에 외국 지원군 전부 철수


1973.8.26. 대만 주둔 미국군 철군 시작,

1979.4.26. 철군완료

 

1974.8.15.   박정희 대통령 저격미수 사건. 육영수 피격 서거.

1974.11.15  제1남침땅굴 발견.  고랑포 동북방 8㎞지점에서.

 

1975.2.  김정일 공화국영웅 칭호.  당 중앙위원회 제5기 10차 전원회의에서는 김정일을 ‘친애하는 지도자 동지’로 부르는 문제를 안건으로 상정하여 만장일치로 통과


1975.4.  북경 방문시 김일성 발언을 통해 무력에 의한 적화통일 의도를 분명히 하였다

 

1975.4.17.  캄보디아 공산화

1975.4.30.  베트남전쟁이 미국의 굴욕적 패퇴로 종결.

1975.8.      라오스 공산화


1976.2.29.  ≪남조선민족해방전선 준비위원회≫ 결성.

 임헌영 = [.... 베트남 전선 방식으로 통일전선을 형성,... 정부를 전복시키고 사회주의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조직이다 .......  ]  경향신문 1979.11.13.


1976.8.18.   판문점 도끼만행사건

 

1977.12.22.  100억 불 수출달성 기념

1978.9.26.    朴대통령 서산에서 고대하던 국산 유도탄(미사일) 발사 참관

 

 

 


  1971.1.   박대통령 신년사

 

국력이 약하면 나라가 기울고, 나라가 일어서려면 국력을 길러야 한다는 것은 흥망성쇠의 기복이 무상했던 인간 역사의 산 교훈입니다. 더군다나 오늘과 같이 세계의 모든 나라들이 국가 이익을 위해서는 어제의 적국을 오늘의 우방으로 삼고 피와 눈물도 없는 적자생존(適者生存)의 이론을 내세우고 있는 냉혹한 생존경쟁의 시대에 있어서는 힘없는 민족은 세계무대에서 영원히 낙오되고 만다는 것을 우리들은 명심해야 합니다.

 

금년은 … 우리의 국가안보상 중대한 시련이 예상되는 해라는 점에서 실로 국운을 좌우할 중차대한 시기입니다. … 이러한 시련의 징후는 한반도를 둘러싼 움직임 속에서 이미 시작됐으며, 중공(中共)(註: 당시는 지금의 중화인민공화국을 中共, 대만을 中國이라 불렀다)은 그 영향력을 강화해 가고 있고, 소련은 전통적인 극동진출의 꿈을 버리지 않고 있으며, 미국은 아시아에서 점차 물러서려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우리의 가상 적국들이 「이 지역에 힘의 진공상태가 생겼고, 공산세력이 자유진영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힘의 우위의 입장에 올라섰다」고 그릇 판단하기 쉽게 만들고 있습니다. …


모든 전쟁 준비를 완료하고 초조하게 무력적화통일의 기회만을 노리고 있는 북괴(註: 당시는 북한을 북괴라고 불렀다)가 정세를 오판한 나머지 또 다시 6·25 동란과 같은 참화를 일으킬 가능성이 많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올해부터 앞으로 2, 3년간이 국가안보상 중대한 시기가 될 것입니다. …


이 시련의 극복을 위해 중요한 것은 국민들의 굳센 결의와 분발과 단결이며 국력을 기르는 것입니다. 우리는 60만 국군을 더 정예화하고 250만 예비군의 전투력을 강화하며, … 또한 경제건설에 더욱 힘써야 합니다.

 

앞으로 민주체제와 공산체제의 대결은 전면적인 무력대결의 차원을 넘어서 번영과 복지를 앞세우는 개발경쟁에서 그 승패가 판가름될 것입니다.


우리는 고도성장을 지속시켜 나가야 하고 수출을 증대시켜 중화학공업의 육성으로 산업구조를 빠른 속도로 고도화시켜 나갈 것입니다.
 

 

 


  1971.1.28.  국방부 연두순시

 

1971년 1월28일 박정희 대통령은 국방부를 연두 순시한 자리에서 70년대에 달성해야 할 국방 연구개발 목표로 첫째, 1976년까지 최소한 이스라엘 수준의 자주국방 태세를 목표로 총포 탄약 통신기 차량 등의 기본 병기를 국산화하고, 둘째, 80년대 초까지 전차 항공기 유도탄 함정 등 정밀 병기를 개발 생산할 수 있는 기술기반을 확보해야 한다고 제시했다.


그러나 당시 국내 공업은 한 마디로 가내공업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다. 예를 들면 공작기계 분야는 직조기의 형틀 주조가 고작이었고, 단조기술은 차량정비용 공구조차 제대로 만들지 못하는 형편이었으며, 통신산업도 야전 전화기를 겨우 만드는 데에 머물러 있었다. 가공 능력도 금성사(현 LG)의 라디오용 금형 제작이 고작이었고, 재봉틀 시계 자전거 및 자동차의 반제품 조립이 공업력의 전부였다.

 

방산 분야는 더욱 한심한 상태였다. 경남 양산에 미국 지원하에 M-16소총 공장을 건설중이었으나 완공되려면 몇 년을 기다려야 하는 상태였고, 총열을 가공할 수 있는 설비는 대전의 국제특수금속회사가 보유하고 있던 「브로칭 머신」 한 대가 전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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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 대통령은 김정렴 당시 비서실장으로부터 美 7사단뿐만 아니라 앞으로 5∼6년 사이에 모든 미군을 한국에서 철수한다는 계획이 추진중이라는 보고를 받고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고 한다.


미군이 완전 철수한다는 것은 우리나라의 안전보장의 기본 「틀」이 완전히 붕괴되고 만다는 뜻이 되기 때문에 朴 대통령은 분명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한국군의 월남파병 결정 때에 존슨 美 행정부가 얼마나 고마워했는가를 엊그제 일같이 기억하고 있는 朴 대통령으로서는 주월 한국군 2개 사단이 지금 이 시각에도 미군을 도와 피를 흘리고 있는 이 시기에 닉슨 행정부가 이러한 태도로 나오는 데 대해 배신감 같은 것을 느꼈을 것이다. 그래서 신년사에서 "자기 국가의 이익을 위해서 피도 눈물도 없는 적자생존의 이론을 내세우고 있다"고 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朴 대통령은 이러한 냉혹한 생존경쟁의 시대에 살고있는 힘없는 약소국가 대통령으로서의 아픔을 되새겼을 것이다.


前記 김정렴 비서실장의 회고록에 의하면, 잠시 침묵이 흐른 뒤 朴 대통령은 "美측 방침에 일희일비하는 처지를 빨리 초월해야 한다. 자주국방만이 우리가 살길이다. 자주국방에는 막대한 내외자가 소요되므로 경제가 잘 되어야 하며, 첨단 정밀무기는 고가이므로 외화는 신종 고성능 무기 도입에만 충당하고 전통적 기본무기는 하루 빨리 국산화해야 한다"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주한미군 완전철수가 앞으로 5∼6년 후에 일어난다고 가정한다면 시간이 촉박하다. 그래서 朴 대통령은 신년사에서 71년은 국운을 좌우하는 중차대한 해이며, 앞으로 2∼3년간이 국가안보상 중대한 시기라고 했다. 2∼3년 사이에 방위산업을 육성하고 국군의 현대화를 끝내야 한다는 뜻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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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ceoi.org/10ceoi(text)/10ceoi(text10).htm

 

 


   1971.3.  주한미군  제7사단 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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닉슨 행정부는 71년 3월에 자동개입에 대한 보장도 없이 주한미군 제7사단을 철수시켰다. 그리고 앞으로 5∼6년 후에 주한미군은 완전 철수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렇게 되면 6·25 직전과 똑같은 상황이 된다. 김일성으로서는 6·25 때와 똑같이 또 다시 오판할 소지가 생겨나게 되는 것이다. 국가안보를 책임지고 있는 朴 대통령으로서는 위기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71년 1월 5일자 동아일보 사설을 통해 당시 우리의 절박한 입장을 엿볼 수 있다.

「우리가 요망하고 싶은 것은 미국이 … 한국이라는 자유의 교두보를 절대로 포기할 수 없으며, 어떠한 대가를 치러서라도 꼭 수호할 것이라는 명백한 의사를 소련이나 중공이나 그리고 북한에게 어떠한 형식이나 경로를 통해서라도 꼭 전달해 주었으면 하는 일이다.」

6·25 직전 주한미군이 철군할 때 이승만 대통령이 미국에 애원하던 말과 똑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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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1970년 닉슨 독트린으로부터 시작하여 주한 美 제7사단의 철수 그리고 핑퐁외교 및 닉슨 美 대통령의 중국 방문 등으로 이어지는 미국과 중국간의 화해 조류는, 미국을 의지하고 있던 한국이나 중국을 스폰서로 하는 북한에게 남북한 문제는 자력(自力)으로 해결할 수밖에 없는 처지로 몰고 갔다.

 

당시 북한의 군사력은 남한에 비해 3배정도 강력했다. 그리고 1970년대를 「적화통일의 연대」로 정하고, 언제든 기습공격으로 시작해서 전면전으로 돌입할 수 있도록 휴전선 일대에 군사력을 전진배치하고 있었다. 휴전선 부근에 있는 황해도 곡산(谷山) 비행장을 전투비행장화하여 MIG-21 등 최신예기를 배치했으며, 서해에는 서해함대사령부를 새로 창설하여 잠수함을 비롯한 ―OSA, KOMAR급 탄도유도탄 발사함정인 ―P-6 어뢰정 및 SU-7 유도탄 발사 함정들을 배치하였다. 또한 지상군 부대에는 FROG-5 지대지미사일, SAM 지대지미사일, STYX 지대지미사일, T-54 및 T-55 신형 탱크, 37mm 대공포, 14.5mm 대공포, 152mm 곡사포, 132mm 로켓발사기, 107mm 로켓발사기, 57mm 대공포, 95mm 대공포 등 각종 신형장비를 새로 공급하고 휴전선 일대에 배치했다. FROG-5 미사일 배치로 서울은 북한의 사정권 내에 들어가게 되었다. 북한의 의도는 전쟁 발발 즉시 미사일로 공격해서 서울을 불바다로 만들겠다는 것이었다.

 

북한은 화력증강과 함께 대폭적인 병력증원 조치를 취했다. 지상군 부대들을 휴전선 근방으로 재배치하여 새로운 막사와 부대시설들을 건설했으며, 휴전선 근방에 항공기를 보호하기 위한 수많은 쉘터(註: 콘크리트 대피소)도 만들었다. 즉 만반의 전쟁준비를 끝낸 상태였다. 그리고는 긴장상태를 조성하기 위해 50척 이상의 경비정을 우리나라 서해 영해에 들여보내 도발행위를 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상황에 따라 朴 대통령은 「국가보위 문제」를 최고긴급과제로 다루었다. 「주한미군 제7사단뿐만 아니라 1976년경이면 나머지 지상군도 철수하겠다」는 발표까지 했다. 그렇다면 3∼4년이라는 시간 여유밖에 없다. 이 기간 중에 전력을 증강해서 국가안보체제를 확고히 해야 한다는 결론이다.

 

朴 대통령은 「자위」(自衛)에 총력을 경주하기로 했다. 「자위」라는 말은 주한 美 제7사단 철군 후부터 朴 대통령이 새로 쓰기 시작한 정책용어였는데, 「우리나라는 우리 스스로가 방어한다」는 뜻이다. 구체적으로는 「정규전과 게릴라전을 배합한 북한으로부터의 군사정치 및 심리전의 위협에 대한 대처방안」이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남북한의 1대 1 대결에서 최소한의 군사력 균형유지가 절대 필요했다. 朴 대통령은 월남파견 장병의 전과를 보고 군의 전략, 전술 면에서나 군장병의 사기 면에서는 자신을 가졌다. 아니 오히려 세계 최강의 상태라고 자부했다. 그러나 군 장비 면에서는 이미 설명한대로 우리나라는 북한에 비해 3분의 1 수준밖에 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국군 현역의 장비의 현대화, 예비군의 무장화 문제는 국가의 사활을 결정하는 중대사일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는 막대한 내자(內資)와 외화(外貨)가 소요되는데, 현역군 장비현대화에만도 약 30억 달러가 필요했다. 그런데 「닉슨 독트린에 의한 한국군 현대화 5개년 계획」은 약 15억 달러로 낙찰을 보았으니, 현역군에 대한 장비현대화에도 부족한 실정이었다.  따라서 250만 명에 달하는 예비군의 무장은 우리 정부 예산으로 마련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朴 대통령은 여기에 소요되는 군장비를 국산화하기로 하고 김학렬(金鶴烈) 부총리에게 방위산업 육성을 지시했다. 1970년 7월의 일이었다. 「4대 핵공장 건설」이 최고긴급과제로 등장하게 된 연유이다. 그러나 이 사업은 1년이 지나도록 진척이 없었다.

 

다음에는 김정렴 (당시) 비서실장의 회고록을 인용한다.

1971년 11월 박 대통령은 경제기획원에서 4대 핵공장 건설의 추진상황에 대한 보고를 받았다. 경제기획원은 전년의 한일 경제각료회의 이후 일본과 계속 협의했으나 일본측이 난색을 표명하자 그 후 미국 및 유럽으로 차관선을 바꾸어 교섭했으나 진전이 전혀 없었다.


박 대통령은 경제기획원의 보고를 받고 청와대로 돌아오는 차중에서 실망과 낙심을 솔직히 토로했다. 청와대로 돌아오자마자 나(金 실장)는 방위산업 육성에 적극적으로 나서야겠다는 결심을 하고 이것저것 생각에 몰두하고 있을 때, 상공부의 오원철 광공전(鑛工電)차관보(필자)로부터 전화가 왔다. 전화를 받으니 오원철씨는 오늘 경제기획원 보고에 배석한 바 있는데, 자기 나름대로 방위산업 육성에 대한 아이디어가 있으니 한번 상의했으면 한다는 이야기였다. 나는 곧 청와대로 올라오라고 했다.


나는 오 차관보와 진지한 토론 끝에,


첫째, 무기생산을 전문으로 하는 군공창(軍工廠) 설립(당시 국방당국에서 강력한 주장이 있었으며 대만도 무기생산을 군공창이 전담하고 있고 일제 때 일본도 군공창 위주였음)은 무기수요가 생산능력에 미달할 때의 비경제성 및 고급 기술인력, 기능인력의 확보난 때문에 이미 건설에 착수한 M16 자동소총공창 외에는 더 건설하지 않는 것이 좋고,


둘째, 병기생산을 위주로 하는 민영군수공장도 병기수요가 불충분할 때의 전문기계의 유휴 등에 따르는 비경제성 때문에 바람직하지 않다.


셋째, 어떤 병기도 분해하면 부품이다. 각 화기에 소요되는 적격소재를 설계대로 정밀가공하여 생산한 부품을 결합시키면 각 부품을 가공하는 공장이 수개, 수십개가 되더라도 최종적으로 결합된 병기의 성능은 설계대로 완벽한 것이 이치다.


넷째, 우리가 소요로 하는 현대무기는 선진국 수준의 중화학공업과 기술 및 기능이 절대적인 전제가 된다. 우리나라 경제의 중화학공업화는 우리 경제의 고도성장, 수출의 지속적인 증대, 국제수지의 개선책을 위해 필수적일 뿐 아니라 안보상 시급한 방위산업 육성의 근간이다.


다섯째, 우리나라 방위산업 육성을 중화학공업화의 일환으로 추진하되 부품별 또는 뭉치별로 유관공장에 분담시켜 무기수요의 변동에 따른 비경제성을 극소화시킨다.


여섯째, 무기제조시설은 물론 기본이나 이에 못지 않게 기술자 기능공의 양성 확보도 긴요하다는 등에 의견일치를 보았다.

 


나는 지체없이 오원철씨를 데리고 박 대통령 집무실로 들어갔다. 오 차관보와 토론 합의한 내용을 간략하게 보고하고 자세한 것은 오 차관보로 하여금 보고하도록 했다. 박 대통령은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보고를 들었고, 설명이 끝난 후에도 여러 각도에서 질문을 하였다. 박 대통령은 우리들의 건의에 원칙적으로 찬성했다. 다만 방위산업체제를 갖추어 본격적으로 대량생산이 가능할 때까지는 4, 5년이 걸린다는 우리들의 건의에 불만이었다. 북한의 심상치 않은 동향과 미국의 해외 주둔군 감축방침에 비추어 2, 3년내의 완비를 강력히 희망하였다. 병기별 부문별 防産 전문공장을 짓는다면 2, 3년내 건설이 가능하나, 가장 경제적인 방법인 중화학공업 건설의 일환으로 방위산업을 육성하려면, 적어도 4, 5년이 소요되며 대신 유사시에는 공장마다 민수부문의 능력을 방산부문으로 전용할 수 있어서 대량공급이 단시일내에 이루어지는 등의 장점을 재차 설명했다.


박 대통령은 한참 심사숙고하더니 돈이 제일 적게 들면서 중화학공업과 방위산업을 동시에 건설하여 유사시에는 민수부문의 전용으로 병기생산능력을 극대화하는 일석이조의 신전략에 찬성, 결단을 내리면서 관계부처와 협조해서 우리들 안대로 진행토록 지시했다. 나와 吳 차관보는 서재를 물러 나왔는데 박 대통령이 다시 나를 찾는다는 전갈이 왔다. 급히 대통령 집무실에 들어갔더니 방위산업 육성은 물론 그 기본인 중화학공업 건설도 박 대통령이 몸소 챙겨야겠다면서 참모진으로서 오원철씨를 청와대비서실에 근무케 하라는 분부였다. 나는 경제제2비서실을 신설하여 차관대우 수석비서관에 임명할 것을 건의, 오원철씨는 그 다음날 정식발령을 받고 방위산업 및 중화학공업을 관장하게 되었는데 그때가 1971년 11월 10일이었다.
 


약간의 보완설명을 가한다. 김 실장과 필자는 이때 다음과 같은 점을 강조했다.


"여하한 병기도 분해하면 부품상태가 됩니다. 이 부품은 규정된 소재를 사용해서 설계도면대로 가공하면 생산이 가능합니다. 이렇게 제작된 부품을 조립하면 병기는 완성이 됩니다. 각 부품을 가공하는 공장이 수 개, 수십 개가 되더라도 최종적으로 결합된 병기의 성능은 완벽한 것이 됩니다. 문제는 병기의 정밀도가 1/100㎜ 정도인데, 현재 우리나라의 가공수준은 1/10㎜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병기를 생산하기 위해서는 1/100㎜를 가공할 수 있는 체제를 마련하는 것이 선결문제가 됩니다. 그 방법으로 생각해낸 것이 국내에서 가장 우수한 유관 민수공장을 선정해서 부품별 또는 뭉치별로 분담생산시키자는 것입니다. 각 업체는 모든 노력을 다해 할당된 부품을 정밀가공하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생산된 부품 중 한국국방과학연구소(ADD)에서 정밀검사를 실시해서 합격된 것만 선정해서 조립하면 병기는 완성됩니다. 이런 방식을 채택하면 당장이라도 병기개발은 가능하다고 봅니다. 그리고 공장건설 비용도 절감할 수 있고 무기 수요의 변동에 따른 비경제성도 극소화시킬 수가 있겠습니다."

 

여기까지 설명하니 朴 대통령은 지대한 관심을 표명했다. 朴 대통령은 병기개발이나 생산은 부득이 미국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M-16 공장도 막대한 자금을 지불하는 불리한 조건으로 미국에게 매달리다시피 하면서 부탁했다. 그리고 나머지 병기를 생산하기 위해 「4대 핵공장」 건설을 추진해 왔다. 그런데 필자의 제안은 국내 기존 시설을 가지고 우리의 기술로 병기개발을 하겠다는 것이니, 朴 대통령으로서는 확인부터 해야겠다고 생각한 것 같다. 그래서인지 핵심을 찌르는 질문이 계속되었다.


朴 대통령은 "1/100㎜ 정밀가공이 가능하냐?" 라는 질문을 했다. 필자는 "현재 국내에서도 몇몇 공장에서는 1/100㎜ 정도의 가공을 하고 있습니다. 자동차 부품 중 예컨대 「피스톤 핀」의 정밀도는 1/100 수준입니다. 1/100㎜를 가공할 수 있는 시설을 하고 소위 정밀가공사(精密加工士)가 작업을 하면 가능합니다. 현재 정밀가공사의 수는 많지 않습니다만 한국정밀기기센터(FIC)에서도 매년 약간 명씩은 양성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방위산업을 육성하기 위해서는 정밀가공사 양성은 본격적으로 추진되어야 하겠습니다. 금오공고도 이런 목적에서 건설 중에 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소재는 어떻게 구하는가?"

 "당장은 수입해서 쓰겠습니다."

"병기에 대한 설계도는 있는가?"

"일부는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없는 것은 미국에서 얻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ADD에 설계실을 설치하겠습니다."

"당장 병기개발을 시작할 수 있다는 거지?"라는 물음에, 필자는 "그렇습니다. 소총 및 기관총 등 개인 화기와 박격포까지는 6개월 정도면 대충 개발을 끝낼 수가 있습니다"라고 자신 있게 답변했다. 그리고는 "각하! 김일성도 이런 식으로 병기개발을 시작해서 현재는 각종 화포는 물론 탱크나 잠수함까지 생산해 내고 있지 않습니까?"라고 했다.


 김일성 이야기가 나오자, 朴 대통령의 눈에서는 순간 번쩍하고 빛이 나더니 나를 노려보듯 쳐다보았다. 朴 대통령의 질문은 여러 각도에서 계속되어서 가족과의 식사시간이 다 될 때까지 두서너 시간 지속되었다. 그리고 드디어 金 실장과 필자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이 날 결정된 사항은 다음과 같다.

 

(1) 250만 예비군을 국산 병기(개인 화기와 박격포)로 무장해서 전력화한다. 이를 위해 병기개발에 즉시 착수한다.

(2) 방위산업은 민영공장 생산체제로 한다. 무기생산을 전문으로 하는 군공창 설립은 무기수요가 생산능력에 미달할 때의 비경제성 및 고급 기술인력·기능인력의 확보난 때문에 이미 건설에 착수한 M-16 자동소총 공장 외에는 더 건설하지 않는다. 병기생산을 전문으로 하는 민영 군수공장도 병기수요가 불충분할 때의 유휴(遊休) 등에 따르는 비경제성 때문에 바람직하지 않다.

(3) 현대 무기의 대량생산에는 선진국 수준의 중화학공업이 절대적인 전제가 된다. 아울러 중화학공업화는 우리 경제의 고도 성장, 수출의 지속적인 증대, 국제수지의 개선을 위해 필수적이다. 이런 이유로 우리나라의 방위산업 육성은 중화학공업화의 일환으로 추진하는 것이 유리하다.

(4) 무기제조시설 못지 않게 기술자·기능공의 양성·확보가 긴요하다.

(5) 경제기획원에서 추진하던 「4대 핵공장」사업은 취소한다.

 

朴 대통령은 이 날 결정된 사항을 우리나라의 방위산업 육성 전략으로 결정했고, 방위산업 육성은 朴 대통령 자신이 총사령관이 되어서 진두지휘하겠다는 결심을 했던 것이다.


이어서 朴 대통령은 金 실장에게 "국방장관과 국방과학연구소 소장에게 즉시 병기개발을 시작하라고 전하시오. 대통령 명령이라고 하시오"라고 지시했다. 이에 따라 金 실장은 국방장관과 국방과학연구소 소장에게 병기개발에 대한 명령을 시달했다. 朴 대통령은 방위산업 육성의 총사령관으로서 임무를 수행하기 시작한 것이다.

 

 


http://ceoi.org/10ceoi(text)/10ceoi(text23).htm


그러나 이 명령을 받고 국방부나 ADD(국방과학연구소)에서는 매우 당혹해했다. 당시 정부 유관부처의 견해와는 완전히 상충되었기 때문이었다. 각 부처의 견해를 정리해 본다.


(1) 경제기획원의 견해 : 이미 설명한대로 방위산업을 육성하기 위해서는 공장부터 건설해야 한다고 판단하고 「4대 핵공장」사업을 추진하고 있었다.


(2) 국방부의 견해 : ① 국내개발 국산병기는 성능상 믿을 수 없다. 6·25 전쟁 때도 국산병기 생산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국산병기 중 실전에서 사용 가능한 것은 수류탄뿐이었다.

② 병기를 국산화할 때에는 軍에서 관장하는 조병창에서 생산해야 한다. 휴전 후 미국 원조로 조병창(소총탄 생산공장)이 건설됐는데, 미국에서 건설해 주었고 초기에는 미국 고문관 감독 하에 운영되었다. 현재 진행중인 M-16 공장건설 사업도 미국의 전문 메이커와 계약을 체결, 턴키(Turn Key) 방식에 의해 공장을 건설하기로 했다. 동시에 기술원조계약을 체결해서 도면 및 기술자료를 획득하고 기술훈련과 생산지도를 받게 된다. 소재나 원자재도 장기공급 계약에 의해 공급받는다.

③ 다른 병기를 생산할 때에도 M-16 소총공장 건설 및 생산방식과 똑같이 실시해야 품질을 보장받을 수 있다.


(3) ADD의 견해 : ADD는 1970년 8월 16일에 창립된 후 15개월밖에 되지 않은 초창기여서 연구요원 확보, 예산 확보, 연구소 물색, 연구기자재 구입 등 준비작업에 부산할 때이고, 당시까지만 해도 연구방향조차 설정되어 있지 않은 단계였다. 대부분의 연구요원이 병기개발에 대한 실적이나 현장경험이 절대 부족했다.

 

이런 상태에서 각종 병기개발을 즉각 추진하라는 대통령의 명령이 하달됐으니 국방부나 ADD로서는 모두 당혹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오로지 朴 대통령만이 방위산업 육성에 대해 자신을 가졌다는 이야기가 된다. 朴 대통령의 비상시국 돌파에 대한 판단력과 결단력이 여실히 드러나는 한 사례이기도 하다. 이렇게 되어서 방위산업 육성은 朴 대통령이 진두지휘하는 국가 최고긴급과제로 등장하게 되었다. 방위산업이란 중화학공업을 기반으로 한다. 우리나라는 방위산업을 육성하기 위해서 「중화학공업화」를 서두를 수밖에 없었다.

 

이 날, 즉 1971년 11월 10일은 방위산업에 관한 기본방침이 결정된 역사적인 날이다. 뿐만 아니라 장차 율곡사업과 중화학공업화로 이어지고 나아가서는 우리나라의 공업구조개편과 제2의 산업혁명의 출발점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경제 제2수석비서관실이 새로이 마련되었다. 이 부서는 다른 수석비서관실과는 성격이 전혀 다르다. 朴 대통령의 특별 관심사항만 담당하게 된다. 처음에는 방위산업 육성이 주 임무였는데 朴 대통령으로부터 새로운 특별과제가 부여될 때마다 임무가 늘어났다. 즉 「중화학공업」, 「기술인력 양성」, 「연구기관 설립」, 「율곡사업」, 「행정수도 이전과 국토개발」 업무 등이 추가된다. 경제 제2수석비서관실에는 ―내각 내에 관장부서가 있는 다른 수석비서관실과는 달리― 특정한 관장부서가 없는데, 이는 업무 내용이 여러 부처에 걸치기 때문이다. 그래서 총리 직속으로 「기획단」을 새로 구성하고 이 기구를 통해 내각의 여러 관련 부서와 협조하게 된다. 다른 수석비서관실은 군대식으로 표현한다면 일반 참모부서이고, 경제 제2수석실은 朴 대통령으로부터 부여받은 과제만을 수행하는 특별 작전참모 본부라고 할 수 있다. 위로는 김정렴 비서실장이 있고 총 사령관은 朴 대통령 자신이다(註: 이 날 있었던 일을 일부 학자들은「11월 10일 청와대 3자회동」, 영어로는「 November 10th 3 members' meeting」이라고 칭하고 있다).

 

 

 

 

1971.11.10.  경제제2비서실  수석비서관  오원철


[ .....  방위산업 육성은 물론 그 기본인 중화학공업 건설도 박 대통령이 몸소 챙겨야겠다면서 참모진으로서 오원철씨를 청와대비서실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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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대통령은 한참 심사숙고하더니 돈이 제일 적게 들면서 중화학공업과 방위산업을 동시에 건설하여 유사시에는 민수부문의 전용으로 병기생산능력을 극대화하는 일석이조의 신전략에 찬성, 결단을 내리면서 관계부처와 협조해서 우리들 안대로 진행토록 지시했다.


나와 吳 차관보는 서재를 물러 나왔는데 박 대통령이 다시 나를 찾는다는 전갈이 왔다. 급히 대통령 집무실에 들어갔더니 방위산업 육성은 물론 그 기본인 중화학공업 건설도 박 대통령이 몸소 챙겨야겠다면서 참모진으로서 오원철씨를 청와대비서실에 근무케 하라는 분부였다. 나는 경제제2비서실을 신설하여 차관대우 수석비서관에 임명할 것을 건의, 오원철씨는 그 다음날 정식발령을 받고 방위산업 및 중화학공업을 관장하게 되었는데 그때가 1971년 11월 10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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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ceoi.org10ceoi(text)10ceoi(text22).htm

 

 


        1971.11.11.   번개사업

 

[ ...... 총포.탄약 등 ... 4개월내에 국산화하라 .......

 ..... 그때처럼 열심히 일해본 적이 없다. 한마디로 다들 미쳤었다 ........     ]


[ ......  반드시 요즘 젊은 세대에게 우리가 사심없이 일에 몰두한 사연들을 더도 말고 사실 그대로만 전해달라 ........    ]

 

[ ...... 1. 21사태, 푸에블로호 피랍, 울진.삼척지구 무장공비 침투 등 북한의 대남 도발과 이 해 3월의 주한미군 철수(2만명) ........     ]

 

   박정희 대통령의 자주국방 집념

 

1. 군장비 국산화 작전  번개사업


71년 11월 11일 청와대비서실을 통해 국방과학연구소(ADD)로 밀명이 떨어졌다. 총포.탄약 등 재래식 경무기와 주요 군수 장비를 앞으로 4개월내에 국산화하라는 황당한 지시였다. 이 명령은 번개 사업이라는 이름 아래 곧바로 실행에 옮겨진다.


금속,기계,전기,전자,화공학 등 무기 생산의 기초가 되는 산업 기반과 기술축적이 전무하다시피한 당시 상황에서 누가 보아도 터무니없다고 할 수밖에 없는 계획이었다. 국산 기관총이나 박격포는 땅에서 솟아나는 것이 아니었다. 이같은 무리한 작전이 감행된 데는 물론 그 이전의 1. 21사태, 푸에블로호 피랍, 울진.삼척지구 무장공비 침투 등 북한의 대남 도발과 이 해 3월의 주한미군 철수(2만명)가 빚어낸 안보 위기 의식이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번개 사업에는 당시 국내 과학계의 핵심 소장들로 손꼽히던 10여명이 부문별 책임자로 동원했다. 후에 품목 변동이 있었지만 우선 소총.수류탄.지뢰 등을 11개 부문으로 나누어 연구에 들어갔다. 11개 부문에 책정된 총예산은 겨우 9백70만원이었다고 한다. 총알이 안 나가도 좋으니 일단 만들어 보라는 엄명 아래에서였다. 연구 작업의 야전 지휘관은 물론 자타가 공인한 맹장 오원철 수석이었다. 당시 연구 작업에 참여 했던 과학자들은 지금도 한결같이 그때처럼 열심히 일해본 적이 없다. 한마디로 다들 미쳤었다고 자부하고 있다. 취재에 응한 뒤에는 반드시 요즘 젊은 세대에게 우리가 사심없이 일에 몰두한 사연들을 더도 말고 사실 그대로만 전해달라 는 부탁도 잊지 않았다.


그해 연말의 성탄절은 물론 신.구정 때도 집에 들르지 못했고 연구실의 전등은 24시간 밝혀져 있었다. 사업 하나하나가 가시밭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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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자주 국방 계획사업


당시 왜 이런 무리한 일들이 감행됐을까 당시 우리의 탄약 비축량은 전쟁이 터지면 불과 10여 일밖에 지탱할 수 없었다고 한다. 또 개인화기의 주종이던 M1 소총도 미국이 생산을 중단하는 바람에 부품 공급이 끊겨 절반 가량만이 반자동 사격이 가능하고 나머지는 모두 단발 사격 기능밖에 없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20개 사단 병력의 예비군도 장비는 2개 사단분밖에 없었다. 거기다 북한군은 병력을 휴전선쪽으로 자꾸 전진 배치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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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적 위기감에서 비롯된 박정희의 야심찬 구상이 미국 유학을 거친 이들을 주축으로 한 젊은 과학자들의 정열과 맞물려 밤낮없는 연구.개발 작업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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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예산은 방위산업에 20억원, 기계공업 육성에 10억원이 잡혀 있었다. 설렁탕 한 그릇 가격이 1백원일때로, 50원짜리 동전이 새로 나온다는 소식이 화제가 될 무렵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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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2년 4월3일
  

   朴대통령은 전해 12월에 만들었던 국산 兵器 시제품의 試射會(시사회)를 참관했다. 이날 시사회는 26사단 지구에서 있었다. 對전차지뢰를 터뜨리는 것을 朴대통령은 쌍안경으로 보고 있었다.


고물탱크 밑에 파묻어놓은 지뢰가 터지자 불기둥이 쏫았다. 그 순간 내빈석에서 보니 무슨 검은 물체가 '휙'하는 소리를 내면서 날아오는 것이 아닌가. 모두 '악'하면서 몸울 움츠렸다. 그 물체는 내빈석을 넘어 멀리 날아가렸다. 모두 '휴'하고 안도하는데 방위산업과 중화학공업 당담수석비서관 吳源哲의 발밑으로 '탁'하면서 떨어지는 게 있었다. 쇠조각이었다. 吳수석이 대통령을 보니 쌍안경으로 폭발지점을 계속 응시하고 있었다. 대통령은 파편이 날아온 것을 모르는지 '지뢰란 대단한 것이구만. 砲身이 떨어져 나갔어'라고 했다.


   劉載興 국방장관은 '중지!'라고 외쳤다. 그러자 朴대통령은 가라앉은 목소리로 '순서대로 진행하세요'라고 말했다. 시사회가 끝난 뒤 대통령은 81mm 박격포쪽으로 가서 포신 윗부분을 몇번이나 쓰다듬었다. 吳수석이 보니 꼭 귀여운 자식의 뺨을 어루만지는 것과 같았다. 그는 더 이상의 치하는 필요없다고 느끼며 눈시울이 적셔지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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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기개발이 워낙 급박하게 진행되다 보니 뜻하지 않은 일도 생겼다. ADD의 신응균(申應均) 소장이 쓰러졌던 것이다. 막중한 업무에 건강을 해친 것이다. 후임에는 현역 KIST 소장인 심문택(沈汶澤)씨가 임명되었다.

 

이런 일이 있은 후 필자는 1972년 2월말 병기개발업무에 대한 브리핑을 했다. ◇ 앞으로의 병기개발 방향 ◇ 병기생산체제 ◇ 기술동원체제의 3개 부분으로 나누어서 설명했다(註: 보고내용에는 2월 21일 현재로 되어 있음). 이 회의에서 병기개발에 관계되는 여러 가지 중요한 결정이 내려졌다. 앞으로의 병기개발은 이때의 결정에 따라 진행하게 되어간다. 내용이 광범위해서 분야별로 나누어서 설명코자 한다(이하 <72년 3월 회의>라고 약칭한다). 이 회의 때 "제2차 시제가 완료되면 날짜를 잡아서 시사회를 열도록 해. 나도 참관하겠어"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래서 ADD는 또 바빠지게 되었다. 시제품의 완성은 물론이지만 시제품에 대한 총점검, 사전시사, 시사회장 마련 등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날짜는 약 한달 후인 4월 3일로 잡혔다. 여기서 홍판기 실장의 회고담을 들어본다.

 

탄약과 로켓포를 제외하고는 내가 만든 병기가 많았기 때문에 내가 제일 바쁠 수밖에 없었습니다. 시사회 때는 육군에서 현역병들이 나와서 병기를 쏘게 됐는데, 실제로 총을 쏘게 되니 대통령 경호문제가 복잡했는데, 여기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대통령 경호실 지시에 따라야 했습니다. 이런 이유로 시사하는 곳과 귀빈용 관람석간에는 꽤 거리가 멀어져 부득이 쌍안경을 준비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쌍안경 갖고도 탄환이 명중했는지를 확인할 수 없어 별도의 고안이 필요했습니다. 표적에다 흰 타일을 부착시켜 기관총에 맞으면 타일이 깨져서 뒷면에 칠해놓은 흑색이 나타나게 했는데, 시험을 해 보니 그럴 듯했습니다. 소총표적에는 백색 접시를 매달았는데, 표적수는 종류마다 10개정도 준비했습니다.

 

이때 기분 좋았던 일은 차출된 병사들의 명중률이 아주 좋았던 사실이었습니다. 이것을 본 인솔장교가 지휘봉으로 병사들의 철모를 두들기면서 한다는 말이 "자식들아, 사격훈련을 할 때 명중시키지 못하던 놈들이 여기서는 왜 이래. 미국총이 국산총보다 못하다는 거야? 부대에 돌아가서 똑같은 성적을 못 내면 기합감인줄 알어" 하더라는 것이었습니다. 저녁때 내가 그 지휘관에게 그 연유를 물어보니 "그래도 미국총이 좋을텐데 이런 상태로 나가다간 국산 무기만 쓰라고 할 것 아니야?" 라고 합니다. 당시는 국산품 불신시대입니다. 하물며 "목숨을 거는 전투에서 국산병기는 못쓰겠다"는 뜻이 담긴 말이었습니다. 초창기에는 있을 수 있는 이야기일지 모릅니다. 여하간 국산 병기의 명중도는 양호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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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으로 시사회는 끝이 났다. 박 대통령은 비로소 박수를 치고 환하게 웃었다. 무척 기쁜 얼굴이었다. 그리고는 관람석 계단을 서서히 내려와서 심 소장에게 악수를 하고 수고했다는 치하를 했다. 다음은 곧바로 병기 진열대 쪽으로 갔다. 그리고는 병기 하나를 손수 만져보고 난 후 81mm 박격포 쪽으로 가서 박격포 포신 윗부분을 몇 번이나 쓰다듬었다. 꼭 귀여운 자식의 뺨을 어루만지는 것과 같았다. 나는 뒤에서 이 장면을 보고 더 이상의 치하는 필요 없다고 느끼며 눈시울이 적셔지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필자가 대통령 명령을 받은 지 5개월 후의 일이었다. 여하간 1972년 4월 3일은 나의 인생 최고의 날이었다.

 
http://ceoi.org/10ceoi(text)/10ceoi(text38).htm

 

 

 


          1975.4.30.


 [  ...... 지키지 못하는 날에는 다 죽어야 한다 ........  ]

 

 

 [ 박정희 대통령 일기 중에서 ]


1975년 4월 30일 : 월남 패망 후..

 


월남공화국이 공산군에게 무조건 항복했다.

비통함을 금할 수 없다.


한때 우리의 젊은 이들이 파견되어 월남 국민들의 자유수호를 위하여 8년간이나 싸워서 그들을 도왔다. 연 파병수 삼십만명. 이제 그 나라는 멸망하고  이제 월남공화국이라는 이름은 지구상에서 지워지고 말았다.

 

참으로 비통하기 짝이 없다.

자기 나라를 자기들의 힘으로 지키겠다는 결의와 힘이 없는 나라는 생존하지 못한다는 당연하고도 냉혹한 현실과 진리를 우리는 보왔다.


남이 도와준다고 그것만을 믿고 나라를 지키겠다는 결심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가 망국의 비애를 겪는 역사의 교훈을 우리눈으로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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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강산은 조상들이 수천 년 동안 고진감래를 다 겪으면서 지켜오며 이룩한 조상의 나라이다. 조국이다.


우리가 살다가 이 땅에 묻혀야 하고 길이길이 우리의 후손들에게 물려주어서 이어가도록 해야 할 땅이다.


영원히 영원히 목숨이 끝나는 그날까지 지켜가야 한다.

저 무지막지한 붉은 오랑캐 들에게 더럽혀서는 결코 안된다.


지키지 못하는 날에는 다 죽어야 한다.


죽음을 각오한다면 켤코 못 지킬 리 없으리라.

 

 


       1976.6.25.


만고역적에게 민족의 원한을 풀어야 한다


1976년 6월 25일 (금) 흐림

 

6.25 26주년이다. 大逆 김일성 도당들이 동족상잔의 전쟁을 도발한 지 26주년이 된다. 조국강산을 피로 물들이고 국토를 초토화시키고 수십만의 동포가 고귀한 생명을 잃었다.


대한민국을 공산화하기 위해서 소위 남조선 해방이라는 구호를 내걸고 이처럼 엄청난 죄악을 저질렀다. 반만년 역사상 동족끼리 이처럼 처참한 살육전은 없었다.


이 대역무도한 놈들의 이 죄과를 어떻게 다스려야 하나. 千秋에 씻을 수 없는 이런 엄청난 죄를 범하고도 지금도 또 다시 남침의 야욕을 버리지 않고 호시탐탐 남침의 기회를 노리고 있으니 이 만고역적들을 여하히 治罪해야 하나.


길은 하나뿐이다. 전력을 경주하여 우리의 국력을 배양하는 길이다. 역적도당들에게 천벌을 가할 수 있는 막강한 국력을 길러서 민족의 원한을 풀어야 한다. 애국선열, 전몰군경, 반공애국투사들의 천추의 한을 풀어줄 수 있는 길은 오직 이 길 하나뿐이다. 나의 모든 생명을 바쳐서 이 민족적 사명을 기필코 완수하리라.

 

천지신명이시여! 나에게 大業을 완성할 수 있는 지혜와 용기와 힘을 주소서!

 

 

 


박경재 시사토론-박근혜씨, 아버지를 말한다
 
1989년 5월 19일  MBC 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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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아까 유신에 대한 얘기가 중간에 끊어져서 말을 못했는데 특히 유신과 자주국방은 뗄레야 뗄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자주국방과 자립경제를 그 기간 안에 이루기 위해서 아버지가 유신을 하신 것이기 때문에. 또 아버지가 생전에 유비무환이라는 얘기를 많이 하셨는데, 아버지의 그 유비무환 정신이 이 자주국방에서와 같이 잘 나타날 수가 없어요.


뭐냐하면 우리가 그 동안 몇 십년동안 미국에 의존해서 국방을 했는데, 나라를 지켜왔 는데, 그 동안 미국이 우리의 국방을 도와준 것은 참 고마운 일이지만 미국뿐 아니라 그 어떤 나라에 대해서도 우리가 스스로 나라를 지키지 못하고 어떤 나라에 의존해서 지켜야 한 다고 할 때 그 서러움, 그 허망함이라는건 아버지 시절에 있었던 일로 잘 나타난다고 생각 합니다.


한가지 예를 들면, 65년도에 아버지와 존슨 대통령이 월남 파병문제에 대해서 협상을 하시고서 곧 이어서 그 당시에 우리나라에 미국대사로 와있던 브라운씨의 이름을 따서 브라운 각서를 통해서 우리나라가 미국으로부터 단단히 약속을 받은 게 있어요. 그것은 한국군을 현대화시키겠다는 것, 또 하나는 한국과 사전협의 없이 절대 미군을 뽑아가지 않겠다는 것, 그렇게 약속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바로 4년후에 닉슨 대통령이 당선되어서 그 닉슨 독트린이 발표되자 72년까지 뽑아가겠다, 이렇게 나왔거든요. 그러니까 그때는 어떤 협상도 소용이 없었지요. 일방적으로 통고하고 뽑아가는 판이었으까. 그 당시에 우리나라의 군대의 사정을 보게되면 그 당시 미국의회 청문회에서도 다 증언이 되었던 얘긴데 그때 우리나라의 군장비가 6·25 당시때 것, 2차대전때 것, 이런 것이 섞여 가지고 완전히 고물부대라는 거죠. 그런 것을 미국에서 뻔히 알면서도 그냥 그 정책에 의거해서 그대로 뽑아가겠다는 것이 그 당시 우리나라로선 얼마나 놀라운 일이었는지 몰라요. 1대 1로 대결해도 힘든, 우리가 그땐 승산이 없던 때였죠. 그런데 북한은 그때 중공과 소련의 비호를 받고 있었잖아요.

 

그리고 대통령이 그 다음에 포드 대통령으로 바뀌니까 더 이상 추가 철군은 하지 않겠다고 굳게 약속을 했는데 , 몇 년 못가서 카터가 당선되니까 이번에는 또 철군을 하겠다고 강력하게 나왔죠.

 


그러니까 우리나라 국민으로서는 목숨이 왔다갔다 하는 일이 남에게 의존해서 국방을 하게 될 적에는 그쪽의 정책에 따라서, 대통령이 바뀔 때마다 변한다는 거지요. 그래서 아버지와 유비무환 말씀을 아까 드렸지만, 71년도에 닉슨 대통령이 여기서 7사단을 뽑아갈 때 잔여 2사단에 대해서 언제 뽑아간다는 언질을 미국에서 주지 않았기 때문에 아버지는 미국에게 약속받은 한국군 현대화 5개년 계획이 끊나면 반드시 잔여부대에 대해서도 얘기가 있을거다, 그때, 미리 짐작을 하시고서 71년부터 방위산업을 육성하기 위해서 굉장히 서두르셨어요. 그러나 그 당시의 그런 방만한 체제를 갖고는 빠른 시일내에 방위산업과 자주국방을 이룰 수 없다고 판단하셔 가지고 정치적 개혁을 단행하셨죠. 72년도에. 그것이 유신이죠.

 

그리고 73년도에는 미국으로부터 원조를 약속 받은 한국군 현대화 5개년 계획이 부족해서 거기에 우리 자체 전력증강 계획을 추가시키셨고, 75년도에는 우리나라의 국방비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기 때문에 방위세를 신설하셨어요. 그래서 75년까지 그렇게 하신 후에 아버지 계획은 1980년도까지는 자주국방을 완전히 이루어서 1대 1로 북한하고 대결할 때 우리가 이길 수 있는, 그런 체제를 갖출 모든 계획을 세우셨고 또 경제면에 있어서는 4차 5개년 계획이 1981년도에 끝나는데 그것도 1년 앞당겨서 1980년도까지 4차 5개년 계획을 마무리 지어 가지고 그때까지 자립경제 자주국방을 완전히 이루시겠다는 것이었어요.

 

아버지 말씀이 그때부터 즉 71년부터 그렇게 자주국방을 위해서 미리미리 대비했기에 망정이지, 80년도까지 자주국방을 이루겠다는 계획이 우연히도 카터 대통령이 4, 5년 후에 미군을 마저 모두 철수시키겠다는 그 연도하고 우연히도 맞아 떨어져서 만약에 미리 그런 대비를 안했다면 카터 대통령의 그런 정책이 나왔을 때 상당히 당황했을 거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유신을 통해 북한보다 10년이나 뒤진 우리나라의 병기생산을 자체적으로, 독자적으로 생산해서 자주국방을 달성하려고 하셨던 것이고, 그런 계획이 차질없이 수행되려면 사회적으로 안정이 유지되어야하고, 사회적인 안정이 유지되려면 강력한 지도체제가 불가피했기 때문에 유신을 통해 그것을 이루려고 하셨던 것으로 말씀드릴 수가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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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0.11.  김대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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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민당 대통령 후보 김대중씨는 대전·부산·인천·광주유세에서 향토예비군제도의 폐지를 주장했으며, 자신이 집권하면 미·일·소·중공에 한반도서의 전쟁 억제에 대한 공동 보장을 받겠다고 말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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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2. 제6기 전대협 총노선

 

[ ..... 연방제합의 반미ㆍ비핵군축, 국가보안법철폐, 통일인사석방등 .......

  ..... 전국연합의 정치ㆍ조직적 지도력 강화 ......범청학련)의 건설 ......


  ..... 가장 중심사항은 올해 모든 반미투쟁의 지향점을 .... 주한미군을 철수시키는데로 모아내는 것이다. .......    ]

 


[ .....  부문계열의 활성화 .... 전교조 .. 민주의사동우회 .. 연계 ..... 사회로의 애국적 진출을 준비하고 진행 .......     ]

 


◇제6기 전대협 총노선분석 민주정부 수립, 전총련 건설에 주력 


송영신 기자


 
  제6기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이하 전대협)대의원 총회가 지난달 8일부터 10일까지 인하대학교에서 열렸다.


   백만학우들의 민주정부수립에 대한 간절한 염원을 필승의 전략전술로 밝혀내는 92년 투쟁결의의 광장으로, 4ㆍ5월의 당면투쟁을 결의하는 장으로써 의의를 가지는 이번 총회에서는 전국 각대학의 총학생회장으로 구성된 대의원들이 모여 올해 전대협 총노선에 대한 결의와 의장선출이 진행되었다.


   대중성 확보와 기층강화에 보다 역점을 두고 구체적으로 하반기에는 전국총학생회연합(이하 전총련)건설을 계획하고 있다는 점에서 지난해 5기 총노선과 차이점을 가지고 있는 6기 총노선은 크게 전국민적 자주ㆍ민주ㆍ통일 운동의 전개와 민중중심 민주대연합의 실질적 실현으로 4천만 민중의 꿈과 희망인 민주연합정부를 수립한다는 투쟁노선과 과ㆍ단대 학생회의 자주화를 통하여 중하부토대를 강화하고 기층의 자주화에 기반한 중앙지도력을 구축하여 기존 협의체로서 나타났던 상층중심의 조직, 대중성의 미확보등 전대협의 한계를 극복하고 전총련을 건설한다는 조직노선으로 나뉘어진다.

 

   투쟁노선은 정치적, 조직적 목표를 내걸고 있다. 먼저 정치적 목표로는 한ㆍ미 불평등조약철폐, 수입개방반대를 핵심내용으로 하는 반미자주화의 기치아래 민중생존권 지지ㆍ연대 투쟁과 민주대개혁 요구투쟁을 기반으로 민주연합정부수립에 중심을 두고 이에 연방제합의 반미ㆍ비핵군축, 국가보안법철폐, 통일인사석방등을 핵심으로 하는 당면 조국통일투쟁과 긴밀히 결합하여 전국민적 자주ㆍ민주ㆍ통일운동을 이끄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조직적 목표로는 지역별 공동연대의 강화를 통한 강고한 지역별 민주대연합의 구축, 각 계급ㆍ계층조직에 기반하여 대중투쟁과의 결합을 통한 전국연합의 정치ㆍ조직적 지도력 강화와 범민주세력의 단결을 통해 민중주도 민주대연합을 실현하는 것이다. 또한 조국통일범민족청년학생연합(이하 범청학련)의 건설로 범민족통일전선 건설의 조직적 토대를 마련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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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한 자주ㆍ민주ㆍ통일투쟁의 부문에서는 반미자주없이 민주화나 통일이 있을수 없다는 기본원칙 아래 모든 투쟁을 전개해나가기로 하였다.


   반미생활문화운동과 반미를 내용으로 하는 과단위 일상기획사업을 반미투쟁의 첫출발점으로 삼고, 한미상호방위조약, 전시접수국지원협정등 우리 민족의 자주권을 말살하고 있는 불평등조약및 협정폐기투쟁을 항시적으로 전개해 나간다. 또한 수입개방 반대투쟁을 또하나의 핵심내용으로 세우고 내정간섭 규탄투쟁과 비핵화 선언의 실천요구투쟁을 계기와 조건을 잘 타산하여 적극 결합시키는 것이다.


   가장 중심사항은 올해 모든 반미투쟁의 지향점을 미국의 정치, 경제, 군사적 침략과 간섭의 근본 물리력이자, 남한변혁의 근본적 장애물인 주한미군을 철수시키는데로 모아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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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한 각 계급ㆍ계층 민중의 생존권적 요구와 민주개혁요구를 하나로 모아 범국민 민주대개혁요구투쟁을 완강히 전개하는 것이다.


   이러한 자주화와 민주화의 성과도 조국통일의 진전 없이는 온전히 보존될 수 없다는 기본입장아래 북한 바로알기운동과 자주적 교류투쟁을 기반으로 연방제합의, 반미비핵군축, 국가보안법철폐, 통일인사 석방투쟁을 대중적으로 전개하여 이의 성과를 범청학련 건설, 민족통일정치협상회의 소집투쟁으로 모아내는 것이다.


   한편 조직노선은 한마디로 요약하여 2대 과제와 5대 방침을 확실하게 틀어쥐고 전총련을 건설하는 것이다.


   2대 과제란 전총련에 부응할 수 있는 중앙지도역량의 확고한 구축과 각 지역ㆍ지구총련의 강화, 건설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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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섯째로 전총련을 건설하는데 있어 제기된 구체적 방침으로 부문계열운동의 활성화를 들 수 있다.

   부문계열의 활성화는 향후 전총련, 전학련을 건설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함과 동시에 백만학도가 단일하고 강고한 조직적 연대의 틀속에서 전진할 수 있게 한다는데서 중요한 의의를 갖고 있다.


   또한 사범대 학우들은 전교조와 같은 교육운동 단체와 의대 학우들은 민주약사동우회, 민주의사동우회, 농과계열 학우들은 농민운동단체와 여학우들은 여성회와 연계하여 각 부문계열 조직들이 자기전망을 내놓는 가운데 사회로의 애국적 진출을 준비하고 진행해 나갈 수 있으며 각 지구ㆍ대학간의 차이를 학술ㆍ문화 등의 교류를 통해 극복시켜 낼 수 있다.


   이러한 의의를 지닌 부문계열운동을 활성화시키기 위해서는 대중적 연대를 가져올 수 있는 사업내용과, 준비주체의 마련, 전대협과 부문계열 조직간의 통로개설이 필요하다.


   올해 총노선으로 결의된 이상의 투쟁노선과 조직노선은 다가오는 대격돌의 전장에서 전대협이 학우들, 민중들 속으로 더욱 깊이 들어가 민중들의 지향과 요구를 더욱 주체적으로 파악하고 구체적으로 지도를 수행하여 민중과 혼연일체를 이뤄 자주적 주체를 강화함으로써 변혁운동을 더욱 높은 단계로 이끌어 나가는데에 있어 총좌표가 될 것이다.


http://press.cnu.ac.kr/news/articleView.html?idxno=9581

 

 


       1998.4.18.  김정일  민족대단결 5대방침

 

[ ..... 외세의 지배와 간섭을 반대하고

      외세와 결탁한 민족반역자들, 반통일세력을 반대하여 투쟁하여야 한다. .......     ]

 

     민족대단결오대방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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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일은 1998년 4월 18일 ‘전조선 제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남북연석회의)’ 50주년 기념 중앙연구토론회에 “온 민족이 대단결하여 조국의 자주적 평화통일을 앞당기자”라는 제하의 서한을 보냈으며, 여기에서 「민족대단결 5대 방침」을 제시하였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민족의 대단결은 철저히 민족자주의 원칙에 기초하여야 한다.’,

 ‘애국애족의 기치, 조국통일의 기치 밑에 온 민족이 대단결하여야 한다.’,

 ‘우리 민족의 대단결을 이룩하자면 북과 남 사이의 관계를 개선하여야 한다.’,

‘우리 민족의 대단결을 위해서는 외세의 지배와 간섭을 반대하고 외세와 결탁한 민족반역자들, 반통일세력을 반대하여 투쟁하여야 한다.’,

‘민족의 대단결을 이룩하기 위해서는 북과 남, 해외의 온 민족이 서로 내왕하고 접촉하며 대화를 발전시키고 연대 연합을 강화하여야 한다.’ 등이다.

 

이 민족대단결 5대 방침은 김일성이 1993년 4월 6일 제시한 「전민족대단결 10대강령」의 내용을 기초로 이를 압축적으로 재정리한 것이다. 그 핵심이 되는 민족대단결론은 북한 정권이 역사적 정통성을 갖고 있고 통일의 중심체가 되어야 한다는 점을 과시하면서 민족이라는 혈연적 동질성을 앞세워 광범위한 통일전선을 형성하려는 데 목적이 있다. 탈냉전이라는 급격한 정세변화에 따라 북한 주민의 충격을 완화시키고 내부정비의 시간을 벌기 위한 책략의 일환으로 제시되었다.

 

민족대단결 5대 방침이 제시된 시기는 김정일이 유훈통치를 끝내고 본격적인 김정일 시대를 여는 준비과정과 맞물려 있다. 김정일은 1997년 「조국통일 3대 헌장」을 발표하여 대남·통일정책과 관련한 기본노선을 그대로 답습할 것임을 밝혔지만, 이를 김정일의 이름으로 다시 한 번 확인하면서 통일지도자 상을 과시하려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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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73835

 


 

        1998.4.20.


[ ...... 반통일적인 법률과 기구를 철폐 .......

  ...... 국가보안법, 안기부 철폐 주장을 거듭 ........    ]

 

[김정일] 새정부 출범후 남북관계 첫 언급


 1998.04.29

 


북한 김정일노동당 총비서는 지난 20일 평양에서 열린 남북연석회의 50돌 기념 중앙토론회에서 "남조선 당국자들이 진정으로 애국애족의 입장, 연북단합의 입장에 선다면 그들과 민족의 운명을 함께 개척해 나갈 것"이라고 밝힌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 중앙방송은 29일 아침 보도를 통해 남북연석회의 50돌 기념 중앙토론회에 전달된 `온민족이 대단결하여 조국의 자주적 평화통일을 이룩하자'는 제목의 김총비서의 서한 전문을 공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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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총비서는 "북과 남은 서로 다른 사상과 제도를 인정하는 기초위에서 화합을 이룩하고 공존.공영.공리를 도모해야 한다"면서 "남조선 당국자들이 정책전환을 해 반북대결정책을 연북화해정책으로 바꾼다면 북남관계가 신뢰와 화해의 관계로 발전하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김총비서는 그러나 "남조선에서 민족적 단합과 조국통일을 가로막는 파쇼적이며 반통일적인 법률과 기구를 철폐하고 온갖 정치적장벽을 없애야 할 것"이라고 말해 국가보안법, 안기부 철폐 주장을 거듭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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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ews.chosun.com/svc/content_view/content_view.html?contid=1998042970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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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외세의 지배와 반통일 세력 반대라는 구절은 한국 내의 모든 보수적인 계층과 그룹을 위협하는 대단히 심각한 구절이다 ........     ]

 

  [ 기획특집 | ‘60살 金正日’ 뭘 노리나 ]


 ‘김정일 주도 통일’에 자신만만한 평양

 <중국의 분석> 츠하오텐 中국방부장 북한방문 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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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측 보고서

 

“나는 2000년 10월 16일부터 30일 사이에 북한을 방문하였다. 이 기간 동안 우리는 북한의 수도인 평양과 개성, 남포, 청진, 향산군(香山郡) 등지를 방문하였다. 아울러 중국 인민지원군의 조선전쟁 참가 50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평양군중보고대회에도 참가하였고, 김정일(金正日) 조선노동당 총서기, 김영남(金永南)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홍성남(洪成男) 정무원총리, 인민군 총정치국장 조명록(趙明祿) 차수, 인민무력부장 김일철(金一哲) 차수 그리고 인민군 총참모장 김영춘(金永春) 차수 등 북한 노동당과 정부의 최고위급 지도자들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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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난의 행군’을 끝내고 ‘제2의 천리마운동’이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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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남북통일에 대한 자신감

 

6·15 정상회담 후 북한에서는 남북통일에 대한 염원이 유례없이 고조됐다. 북한인들은 보편적으로 남북통일 실현의 주도권을 김정일이 장악했다고 여기고 있으며, 김정일이 결심만 한다면 남북통일은 시간상의 문제라고 보고 있었다. 이들은 6·15공동선언은 김정일의 결심을 대표하고 있고, 다시 전쟁이 발생하지는 않을 것이며 김정일이 제기한 ‘남북통일’의 실현과 ‘통일된 강성대국’의 건설 목표는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올해(2000년) 10월 북미(北美) 양국 정상 특사의 상호방문을 성공적으로 실현한 후 북한인들의 이러한 믿음은 더욱 강해졌다.


6·15 정상회담 이후 김정일은 조국통일실현, 민족대단결의 5대 방침을 제기한 바 있다. 이 다섯 가지 방침은 첫째 민족자주의 원칙에서 단결, 둘째 애국애족과 조국통일의 기치에서 단결, 셋째 북남관계 개선, 넷째 외세의 지배와 반통일세력 반대, 다섯째 전민족의 상호 접촉과 대화 및 연대의 강화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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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인민지원군의 조선지원전쟁 참전 50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평양시민대회에서 북한 무력부장인 김일철 차수는 “북한인민은 위대한 수령 김일성 주석의 유훈(遺訓)을 받들고 위대한 지도자 김정일의 조국통일 실현, 민족대단결 5대 방침으로 조국통일의 대업을 반드시 실현할 것”이라고 자신감에 넘쳐 강조했다.


실제로 6·15 정상회담 후 남북한은 문화·경제·군사 등 각 분야에서 다차원적이고 광범위하며 끊임없는 접촉과 대화를 해왔다. 일부 사업은 이미 협상을 거쳐 양측의 승인과 환영을 받았으며 이미 실천단계에 있는데, 경의선 복원공사를 예로 들 수 있다. 또 군사분계선의 임진강 수해방지 공동사업에 대해서도 양측은 내년에 착공하기로 합의하였으며, 북한측이 현재 계획중인 개성공단사업에 대해 한국측은 이미 매우 적극적인 태도를 표시한 바 있으며 그곳에 한국 최대의 자동차 생산기지를 설립할 계획이다. 한국측은 이미 이 사업에 대한 타당성 연구를 진행중이라고 한다.


북미관계 개선의 필요성에 의해 김정일은 미국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의 북한 방문에 대해서도 아주 높은 예우를 해주었다. 김정일이 친히 올브라이트를 안내해 10만여 평양시민들이 벌이는 대형 집단체조를 함께 관람했다. 북한을 방문한 외국지도자들 가운데서 사회주의 국가의 지도자들을 제외하고는 올브라이트만이 이같은 대접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3. 수령에 대한 개인숭배가 극에 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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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측 분석


이번에는 이 중국어 원문을 분석한 미국 정보분석관의 해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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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측 관계기관은 둘째 단락 ‘남북통일에 대한 자신감’ 속에 들어 있는 6·15정상회담 직후 김정일이 내세운 다섯 가지 방침을 다음과 같이 해설했다.


“북한은 이 다섯 가지 원칙을 주민들에게 강조했다. 김정일은 6·15회담 당시 서울에 돌아가는 김대중에게도 이 원칙이 한국에서도 실현될 수 있도록 강조했으리라고 본다. 이 원칙 가운데 넷째인 외세의 지배와 반통일 세력 반대라는 구절은 한국 내의 모든 보수적인 계층과 그룹을 위협하는 대단히 심각한 구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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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동아

  2002 년 02 월 01 일 (통권 509 호)

 

 

 

       1999.8.  범민련  전국연합

 

[ ..... 민족대단결 5대방침의 기치아래 민족단합의 장애물을 제거해 나가자 ........


 ...... 김 총비서를 `민족의 영수'로, `조국통일의 구성(救星)'으로 충직하게 받들자 .......     ]

 


북한, 평양서 "전민족대단결결의대회"


[중앙일보] 1999.08.13
 


북한의 99통일대축전.제10차 범민족대회 행사의 하나인 `전민족대단결 결의대회'가 13일 평양 금수산기념궁전 광장에서 열렸다고 중앙방송이 이날 보도했다.


이 행사에는 북한 김영대 사회민주당 위원장, 유미영 천도교청우당 위원장 등과 함께 남한당국의 승인없이 입북한 범민련 남측본부 나창순 고문과 서원철 청년대표, 이성우.강형구 전국연합 대표 등이 참석했다.


결의대회에서 참석자들은 김일성 주석의 '통일유훈'과 김정일 총비서의 통일방침인 `민족대단결 5대방침'을 철저히 관철할 것을 다짐했다.


특히 김영대 위원장은 결의토론을 통해 "(김일성)수령님의 통일유훈을 한치의 드팀(틈)도 없이 철저히 관철해 나가자", "(김정일)장군님께서 제시하신 민족대단결 5대방침의 기치아래 민족단합의 장애물을 제거해 나가자"고 강조했다.

 

이성우 전국연합 대표도 연설을 통해 "장군님의 사랑과 찬사는 북.남.해외가 함께 건설할 연방제 통일조국 건설의 성전에 보내는 동지애"라고 찬양하고 ▲국가보안법 철폐투쟁 ▲김 주석의 `통일유훈'인 조국통일 3대헌장 관철 ▲민족대단결 5대방침을 기치로한 통일투쟁 강화 등을 호소했다.

 

이날 행사에서 참석자들은 ▲김 주석의 `통일유훈'을 철저히 관철하자 ▲김 총비서를 `민족의 영수'로, `조국통일의 구성(救星)'으로 충직하게 받들자 ▲조국통일 3대헌장을 통일대강으로 틀어쥐고 나가자 ▲민족대단결 5대방침을 중심으로 통일역량을 강화하자 ▲99통일대축전.제10차범민족대회를 2천년대 통일의 돌파구를 여는 통일대행진으로 장식하자는 내용의 결의문을 채택했다.

 

 

 

       2017.12.15.  문재인

 

[ ...... 광주시엔 중국 인민해방군가를 작곡한 한국의 음악가 정율성을 기념하는 ‘정율성로’가 있다 ........     ]

 


[ ..... 북한의 전쟁범죄에 앞장선 죄까지 면책해 줄 순 없다. ........

  ..... 중국의 위대함을 칭송하느라 그들이 과거 한국을 없애려 한 적국이었다는 역사인식이 흔적조차 없다. ........     ]

 

[전영기의 시시각각] 한국은 작은 나라? 누가 연설문 썼나

 

 [중앙일보]  2017.12.18
 
  전영기 기자

 

문 대통령의 국격비하 ‘베이징대 연설’
북한 군가 작곡한 정율성 추앙 발언도

 

. 대한민국 헌법 66조는 ‘대통령은 국가의 원수이며, 외국에 대하여 국가를 대표한다’고 돼 있다. 헌법은 전문(前文)과 4조 두 군데에서 한국이 ‘자유민주적 기본 질서’의 나라라고 천명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중국을 국빈 방문한 것은 그가 한국의 국가원수, 국민의 대표이기 때문이다. 어디서 누구를 만나든 자유와 민주가 숨 쉬는 대한민국의 정체성, 즉 이념과 역사성을 유지해야 한다. 이는 한국 대통령으로서 헌법적 의무에 해당한다.

  

그런데 지난 15일 베이징대에서 문 대통령의 연설은 중국에 대한 자기 비하와 사대(事大)가 흘러넘쳤다. 이게 한국 대통령의 공식 발언인가 싶을 정도로 헌법정신이 망가지기도 했다. 문 대통령의 연설에서 가장 이해할 수 없었던 건 “한국도 작은 나라이지만 책임 있는 중견 국가로서 그 꿈에 함께할 것”이라는 대목이다. 한국이 왜 중국의 꿈에 함께해야 하는지도 수긍할 수 없지만 ‘작은 나라’라는 표현은 치명상에 가깝다. 이 말은 “저는 시진핑 주석에게서 중국의 통 큰 꿈을 보았다” “법과 덕을 앞세우고 포용하는 것은 중국을 대국답게 하는 기초”라는 ‘중국 대국론’을 편 뒤 나왔다.

  

여기서 ‘작은 나라’는 인구나 면적이 아니다. 맥락상 ‘한국 소국론’이다. 국가의 꿈과 가치, 지도력에서 한국이 중국에 비해 작다는 얘기다. 하지만 1인당 GDP와 경제 실력, 과학기술력, 국민 개개인의 삶의 질이나 정신·문화·종교적으로 누리는 가치, 인권·법치·3권분립과 표현·양심의 자유 같은 민주주의 수준에서 한국은 중국보다 큰 나라다.
  


중국인들은 대국의 꿈에 한국 대통령이 책임 있는 자세로 동참하겠다는 다짐을 들으면서 가상하다고 여겼을 것이다. 대한민국 탄생 70년간 이번처럼 대통령이 소국이라 스스로 낮춰 부르고 상대를 대국으로 우러른 적은 없다. 조선시대도 아니고 무슨 이런 사대가 있나. 자유민주의 나라 한국을 대표하는 문 대통령한테 무슨 근거로 공산주의 중국에 가서 조국을 ‘작은 나라’라고 비하해 5000만 국민에게 수치심을 안겼는지 헌법적 책무를 묻지 않을 수 없다.
  


그렇지 않아도 노영민 중국대사가 시 주석한테 신임장을 제정하면서 방명록에 “만절필동(萬折必東)”이라고 쓴 게 논란이 되고 있다. 만절필동은 황허의 강물이 수없이 꺾여도 결국 동쪽으로 흐르듯 천자를 향한 제후의 깊은 충성심을 나타낸다. 선조가 명나라에 숭배와 감사를 표현할 때 썼다고 한다.
  


다시 문 대통령의 연설로 가 보자. 그는 “한국에는 중국의 영웅들을 기리는 기념비와 사당들이 있다. 광주시엔 중국 인민해방군가를 작곡한 한국의 음악가 정율성을 기념하는 ‘정율성로’가 있다”고 말했다. 대통령 연설문의 작성자는 정율성이 북한 군가인 조선인민군행진곡의 작곡자라는 사실을 알았을까. 정율성은 1950년 북한의 6·25 남침 때 중국 팔로군에 섞여 항미원조(抗美援朝·미국과 싸우고 조선을 지원함) 전쟁에 참여했다. 그는 ‘공화국 깃발이 바람에 휘날리네’ 같은 숱한 전쟁 노래를 만들어 김일성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았다.

  

정율성이 사회주의자로서 일제 강점기 독립을 위해 노력했다는 점은 인정할 수 있다. 그렇다 해도 자유민주주의 한국을 공산화하기 위해 북한의 전쟁범죄에 앞장선 죄까지 면책해 줄 순 없다. 대통령의 연설문엔 중국의 위대함을 칭송하느라 그들이 과거 한국을 없애려 한 적국이었다는 역사인식이 흔적조차 없다. 대신 대한민국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적화(赤化)해 자유민주의 씨를 말리려 했던 김일성 측근을 영웅으로 드높였다. 이 끔찍한 국격의 추락과 정체성의 파괴, 누가 책임질 것인가.
  

 

 

        *

       2004.9.17. 전대협동우회


       북한(39.1%), 중국(20.85), 미국(6.9%)

 


[ ..... 350여 명의 청와대 직원 중 80여 명 가까이가 전대협 출신이라고 ......


 ...... 전대협 출신들은  북한을 가장 호감이 가는 나라(39.1%)로 꼽았고  그 뒤로 중국(20.85), 미국(6.9%), ......     ]


[ .... 金日成원전을 읽으며, 북한 주도 통일 실현을 목표로 활동했다 ......     ]


추적) 盧정권 내 主思派 출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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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대협 출신들 청와대 등 대거 포진


주사파에 장악됐던 전대협 출신들은 現정권 실세로 부상했다. 열린당 내에는 12명의 국회의원(1기  이인영·우상호·김태년·이철우 前 의원. 2기  오영식·백원우·정청래·최재성. 3기  임종석·복기왕·이기우·한병도)이 배출됐다.


인터넷매체 데일리안은 2004년 11월18일 350여 명의 청와대 직원 중 80여 명 가까이가 전대협 출신이라고 보도했었다. 기존 언론 등을 통해 확인된 대통령 측근의 전대협 출신들은 아래와 같다.


《김은경 대통령직속 지속가능발전위 비서관, 서양호 대통령직속 동북아시대위 자문위원, 최인호 청와대 국내언론비서관, 김성환 청와대 정책조정비서관, 송인배 청와대 시민사회수석실 행정관, 김만수 前 청와대 대변인, 여택수 前 청와대 제1부속실 행정관, 한주형 前 청와대 국민제안비서관실 행정관, 유송화 前 청와대 균형인사비서관실 행정관, 이승 前 청와대 홍보기획비서관실 행정관, 강현우 국회의장 기획총괄비서관, 이재경 열린당 원내공보실장.》


최인호 청와대 국내언론비서관은 국보법철폐-미군철수-연방제 등 북한의 대남노선을 주장해 온 전국연합 내 부산연합 조직국장(93~95)을 지냈으며, 김창수 통일부 사회문화교류본부 협력기획관(3급. 내정) 역시 전국연합 정책실장, 민화협 정책실장 등을 지냈다.

 

전대협 출신들은 과거의 이념적 세례로부터 얼마나 자유로울까


2004년 9월17일 시사저널이 미디어리서치 의뢰해 전대협동우회 회원 202명을 조사한 바에 따르면, 전대협 출신들은 북한을 가장 호감이 가는 나라(39.1%)로 꼽았고 그 뒤로 중국(20.85), 미국(6.9%), 러시아(4.5.%), 일본(1.0%)을 들었다. 일반 국민이 미국(38.3%), 중국(23.8%), 북한(10.6%). 일본(9.7%), 러시아(4.9%)를 들었던 것과 큰 차이를 보이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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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chogabje.com/board/view.asp?cpage=0&C_IDX=14992&C_CC=BJ

2006-10-07

 

 

 

 

 

[ ...... 조선인민군협주단 단장, 조선국립음악대학작곡부 부장 .....  “조선인민군행진곡”을 작곡하여 김일성에게

.... 김대중이 평양을 방문했을 때, 공항에서 웅장하게 연주......

 

 ..... “인민해방군의 가슴을 음악으로 격동시켜 일본을 물리친 혁명가”라고 떠드는 KBS ......


 ..... 북한에서도 ... 영화 “음악가 정율성”을 1992년에 제작.......  

 ..... 광주 MBC측에서는 홍콩의 칸 인터내셔날과 합작으로 정율성을 영화화하겠다고 ......    ]

 

[ ..... “한성(서울)을 정복하여 미제(미군)를 몰아내자” .......     ]

 


 *  2012.1.


KBS가 띄운 공산당 어용음악가 정율성
 
빨갱이를 미화하는 방송에 헬새 낭비
 


성정태/고성혁 네티즌 논설가  
 

 
KBS와 광주가 띄운 공산당 어용음악가 정율성 (성정태 객원논설위원)

 

코쟁이 지휘자가 금발을 휘날리며 양 손을 힘차게 움직이는 모습이 제법 음악에 취해 있는 듯하다. 중국에서 모택동이 장개석에 맞서 싸우기 위해 진지로 정했던 연안을 찬송한 곡 “연안송”을 광주시립관현악단이 지휘자의 몸 짓에 따라 웅장하게 연주한다. 저 음악회가 바로 중국의 조선인 정율성을 기리기 위한 “정율성(鄭律成) 국제음악회”라고 한다. 듣는 사람들은 저 음악이 중국 공산당 모택동을 위해 작곡되었다는 사실을 모른다.

 

광주가 주장하는 항일투사 정율성, 그는 과연 대한민국에서 어떤 사람으로 받아 들여야 하는가? 광주에서 목청 높이며 주장하는 항일운동가 인간 정율성이 지금 대한민국에서 과연 어떤 대우를 받아야 하는가? 19세에 중국에 건너가 죽음을 맞이 할 때까지 그곳과 북한 땅을 오고 갔던 음악가 정율성을 지금 우리는 항일음악가로서만 받아 들여야 하는가? 광주와 한겨레 그리고 KBS가 그 정율성을 결국 대한민국 국민들 앞에 세우고 만다.

 

지난 일요일 1월15일 저녁 8시부터 1시간 동안 대한민국 공영방송 KBS1에서는 정율성이 나이 19세인 1933년부터 중국 땅에서 국권을 잃어버린 조선을 위해 항일운동을 시작으로 장개석의 국민당에 협력하고, 1937년부터는 연안의 모택동 공산당에 부역하며, 1945년 일본이 패망하고 해방을 맞은 조선의 북한에서 김일성을 도와 음악으로 공산당을 선전 선동하는 일에 부역했던 역사를 편집하여 국민들에게 방영하였다.

 

정율성을 소개하는 KBS스페셜 프로그램은 지난 해 6월부터 기획하여 8.15광복절에 방영하려 했으나 사회적 여론을 의식하여 방영하지 못하다가 양대 노조와 PD들의 투쟁에 의해 결국 최근에야 방영하게 되었다고 당담PD 목포출신 박건이 제작후기에서 들려 주는 여러 가지 이야기는 읽는 이들을 섬뜩하게 할 만큼 대한민국 우파 시민들을 향해 분노와 증오를 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공영방송의 중견 PD들이 이런 사고에 젖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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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D 박건,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은 종북좌파 반역자들이 입에 달고 사는 친일파타령, 박정희 독재, 노동자 투쟁, 그리고 민주화 일색이다. 더 이상 반론을 제기하고 싶은 마음이 싹 가신다. 이런 사람들이 지금 대한민국의 공영방송 KBS의 중견 PD임을 상기하면 여러 말이 필요 없겠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야겠다. 미디어오늘이 말하는 정율성, 그는 현재에도 중국에서 3대 음악가로 칭송된다고 한다. 중국국가를 작곡한 네얼, 황하대합창곡의 셴싱하이 그리고 연안송과 중국인민해방군가를 작곡한 정율성 이렇게 3인이라고 말한다. 정율성은 장개석을 버리고 모택동의 근거지 연안으로 옮기면서 중국공산당에 온 몸을 바쳐 음악으로 부역하게 된다. KBS는 그 시기를 모택동이 일본과 싸웠기 때문에 항일운동으로 그린다.

 

정율성은 해방 후 1945년에 북한 김일성에게 보내져 그곳에서 조선노동국가보안대 구락부, 조선노동당황해도선전부 부장, 조선인민군협주단 단장, 조선국립음악대학작곡부 부장 등을 역임한다. 이 시기에 정율성은 지금도 북한에서 불러지고 있는 “조선인민군행진곡”을 작곡하여 김일성에게 바쳤으며 그 노래는 지난 2000년 6월15일 김대중이 평양을 방문했을 때, 공항에서 웅장하게 연주됐다고 한다. 그는 음악으로 공산당을 선전하는 鬼才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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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인민해방군의 가슴을 음악으로 격동시켜 일본을 물리친 혁명가”라고 떠드는 KBS는 정율성을 공산당 혁명가로 극구 칭송하고 있다.


북한에서도 그런 정율성을 기리는 영화 “음악가 정율성”을 1992년에 제작하였고, 지난 노무현 정부에서는 2005년에 공산주의 혁명열사로 39년을 중국과 북한에서 살다간 정율성을 음악가라는 이름으로 “정율성 국제음악회”를 개최하였으며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광주 MBC측에서는 홍콩의 칸 인터내셔날과 합작으로 정율성을 영화화하겠다고 한다. 광주 저곳에서는 정율성을 마치 항일운동에 몸 바친 영웅으로 떠받들기에 한창이다.

 

지금 저곳 광주 목포는 대한민국의 정체성이 이미 사라지고 중국과 북한의 일당독재 공산당이 이 땅에 부활했다는 듯이, 정율성 그가 청 장년기 평생을 중국과 북한 공산당 일당독재체제를 위해 음악으로 몸 바쳤던 과거행적을 항일운동이라는 왕관을 씌워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각인시키려고 狂奔하고 있다. 해방 이후 김일성을 돕고 6.25남침전쟁에서 북한을 도와 한반도 자유통일을 물거품으로 만들었던 중국에 몸 바친 정율성을, 항일운동 표현으로 대한민국에서 영웅 시 하려 한다. 그 모든 항일운동이 오직 중국과 북한 공산당을 위한 것이었는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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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스페셜 “13억 대륙을 흔들다-음악가 정율성”이라는 프로그램은 대한민국 국민의 세금으로 중국과 북한 공산주의자들의 혁명교육용으로 제작한 공산주의 선전용 선물이었다. 이상 [성정태 객원논설위원: http://allinkorea.net/]

 


빨갱이를 미화한 <KBS스페셜> 시청자게시판에 쏟아진 항의 글(고성혁 네티즌 논설가)

 

지난 일요일 KBS1의 'KBS스페셜'은 대한민국을 모욕하는 프로그램을 방송했다. 모택동군대를 위한 [인민군가]와 김일성을 위한 노래를 만든 정율성을 미화한 방송이었다. 윤이상은 정율성에 비한다면 발 뒤꿈치에도 못미칠 그런 존재가 정율성이다. 중국공산당을 대표하는 음악가로 중국공산당에 이름이 높이 걸린 이가 바로 정율성이다. 이런 사람을 마치 독립운동가인양 KBS는 방송했다.


이것에 대해서 유일하게 국민행동본부에서 방송책임자를 파면하라고 성명을 냈다. 매우 심각한 문제인데도 언론은 물론이고 우파단체 그 어디도 나서질 않았다. 일요일의 인천앞바다 유조선폭발사고와 한명숙의 당대표당선에 묻혀서 기사화되지도 않았다. 그러나 깨어있는 네티즌들은 달랐다.


KBS1 홈페이지의 시청자게시판에 강력한 항의의 글들이 많이 올라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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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중에서 최수경씨가 올린 글이 핵심을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었서 소개하고자 한다.

 

국민의 시청료로 김일성에 부역한 또다른 윤이상같은 정율성 찬양 다큐라니?

 

그동안 논란이 끊어지지 않았던 광주 출신 작곡가 정율성을 조명하는 다큐가 오늘 마침내 공영방송인 KBS가 골든타임 60분 동안 전국에 방송되었다. 우려하였던대로 역사의 극심한 왜곡으로 일관한채 ‘스페설다큐- 정율성편’ 방송에 대해 분노를 금치 못한다.


그가 아무리 중국에서 추앙받는 음악가라 하더라도 대한민국의 잣대로 볼때 공영방송인 KBS가 그에게 ‘뛰어난 음악가’라고 면죄부를 주는 것은 온당치 못하기에 경악을 금치못한다. 일제강점기시절 대한 독립을 위하여 숱한 애국 독립운동가들이 중국에서 우익, 좌익노선으로 갈라져 독립운동을 하였다는 사실은 숙명적인 역사의 아픔이라 백분 이해하더라도 의열단을 이끈 김원봉을 비롯한 숱한 좌파 애국지사들이 광복후 자발적으로 북한에 들어가 김일성이 남침을 하는 조선의용군으로 크게 부역한 것이 사실인데도 방송에서 마치 어쩔 수 없이 북한을 선택한양 왜곡으로 일관하였다.


가장 분노스러운 것은 정율성이 6.25동란 무렵 절호의 남북통일의 기회를 가로막은 중공군의 참전에 크게 기여하였을 뿐만 아니라 인민군을 따라 서울까지 내려와 북한 인민군을 위한 軍歌도 상당히 작곡하였던 충격적인 사실을 얼무버리거나 침묵한 사실이다.

 

정율성이 작곡가로 북한 김일성에 부역한 노래중에는 “한성(서울)을 정복하여 미제(미군)를 몰아내자”라는 북한군의 남침의욕을 북돋우는 여러 군가를 작곡하였음에도 왜 이런 정율성의 원죄에 대해서는 침묵하는가? 이런 중요한 사실은 삭제한채 그저 그가 ‘메기의 추억’이나 부르면서 조국을 그리워하는 상당한 로맨틱한 예술가라고 묘사한 것은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KBS의 중대한 역사왜곡이요 범죄행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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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울러 광주정율성국제음악제조직위원회가 펴낸「정율성작품집」에는 ‘한중우의’라는 정율성이 작곡한 노래가 수록되어 있다. 이 곡은 분명 대한민국과 중국의 우의를 노래한 것이 아니라 중공과 북조선의 우의(中朝友誼)를 찬양한 그들, 공산주의 찬양곡이다. 가사는 ”영웅국민 주인되고 참략자들 기염 꺽었네… 한중국민 전진하여 원수를 소멸하자…“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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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시는 국민들이 낸 막대한 혈세로 이런 골수공산주의 음악가를 미화하는 ‘정율성국제음악제’를 매년 열고 기념관을 건립하는데, ‘윤이상국제음악제’와 함께 진정으로 청산되어야할 공산주의 추종자를 예찬하는 음악제이다. 왜 대한민국 국가보훈처는 의열단을 조직하여 그렇게 항일운동을 열심히 펼쳤던 김원봉을 애국지사로 아직도 인정하지 않는가. 정율성의 멘토였던 김원봉은 함께 조선의용군으로 북한군을 창립하는데 일조하였고, 북한 노동상이자 공산당 중앙위원회 중앙위원으로 김일성 정권에 부역한 핵심 빨갱이였기 때문이다.


국민이낸 막대한 세금인 시청료로 정율성을 미화하기 위해 오랫동안 해외취재까지 하여 이런 한심한 방송을 내보낸 KBS는 평양중앙방송국인가 중국공산당 홍보방송국인가. 이따위를 공영방송에서 방송하니 중국정부가 대한민국을 마치 자기들 속국인양 우습게 취급하지 않는가.


이번 정율성 미화방송을 제작한 KBS는 대오각성하고, 이 방송을 기획한 관련자들을 문책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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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1/17


http://allinkorea.net/sub_read.html?uid=24035&section=section3&section2=

 

 

 

 

[ ..... 반동파를 깨끗이 소멸할 때까지, 마오쩌둥의 기치는 높이높이 휘날린다. .......

 ..... 동지들 발맞춰 해방의 전쟁터로 달려가자, .......

 ..... ‘연안송’은 .... 피끓는 젊은 청년들을 연안으로 끌어들이는 촉발제가 됐다 .......      ]

 


[ ..... 조선인민군협주단 단장, 조선국립음악대학작곡부 부장 등을 역임 ........

 .... <조선인민군행진곡>... <조선해방행진곡>... 등을 작곡 .......

 .....  북한은 1992년 대형예술영화 <음악가 정률성>을 출품 .......     ]

 


조선인 음악가 ‘정율성’ 중국 또 하나의 보물 - 중국·북한 2개국 군가 작곡

 

하얼빈(哈爾賓)에서는 안중근(安重根) 의사 기념관 이외에 반드시 들러야 할 곳이있다.


그곳은 ‘정율성 기념관’(鄭律成記念館)이다. 정식 명칭은 ‘인민음악가 정율성 생애사적 전시관’이다. 이름 그대로 이 곳은 정율성 음악가(1914~1976)가 살아 있을 때의 행적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곳이다. 안중근 의사가 총으로 직접 적을 쓰러뜨렸다면 정율성 음악가는 노래의 선율로 인민해방군의 심장을 격동시켜 일본을 물리친 혁명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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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서 더 인정받는 조선인 음악가…‘신중국창건 100명 영웅’에 뽑혀

 

중국 사람에게 정율성 음악가를 물어 보면 모르는 사람이 없다. 실제 13억의 중국 인구중 80%이상인 10억의 인구는 정율성이 작곡한 노래를 최소 1곡 이상은 알고 있다. 정율성은 중국 국가(國歌)를 작곡한 네얼(?耳,1912~1935)과 황하대합창을 창작한 셴싱하이(先星海,1905~1945)와 더불어 중국의 3대 음악가로 불린다. 정율성은 2009년 건국 60주년때 ‘신중국창건 100명 영웅’에 뽑혔다.

 


정율성은 일생동안 서정가곡을 포함해 군가, 합창, 동요, 영화음악 및 오페라음악을 포함한 360여 곡을 남겼다. 그중 중국이 인정하는 정율성의 최대 공로는 ‘연안송’(延安頌)과 ‘중국인민해방군군가’(中國人民解放軍軍歌) 두 곡이다. 이 두곡은 중국 현대음악사에서 큰 줄기를 형성한 작품으로 평가된다. 이외에 ‘우리는 얼마나 행복한가’(我們多?幸福)는 아직까지도 초등학교에서 불리고 있다.

 

특히 사회주의 국가인 중국에서 ‘인민해방군군가’는 중국 국가(國歌) 다음의 위상을 갖고 있다.  정율성 기념관에 들어서면 대형 텔레비전 모니터에 육해공 인민해방군인들이 행진하는 영상과 함께 장중하면서도 힘찬 ‘인민해방군군가’가 흘러나온다.

 

전진, 전진, 전진! 우리의 대오는 태양을 향하고, 조국의 토지를 밟으며 민족의 희망을 ?어지고 있는, 우리는 하나의 무적의 역량. 우리는 농민과 노동자의 자제, 우리는 인민의 무장, 두려움없이, 굴복은 없다. 영특하고 용맹하게 전투해서 반동파를 깨끗이 소멸할 때까지, 마오쩌둥의 기치는 높이높이 휘날린다.


들어라! 바람이 외치고 신호나팔 소리가 울려온다. 들어라! 혁명의 노래소리 얼마나 우렁찬가! 동지들 발맞춰 해방의 전쟁터로 달려가자, 동지들 발맞춰 조국의 변강으로 달려가자, 전진, 전진! 우리의 대오는 태양을 향하고, 마지막 승리를 향하고, 전국의 해방을 향한다!

(출처:  ‘중국인민해방군군가’)

 

중국 정부의 정율성에 대한 평가는 아주 높다. 중국포털 사이트 바이두(百度)에는 이렇게 기록돼 있다.

 

“정율성은 중국의 걸출한 작곡가이다. 또한 유명한 국제주의 전사이다. 그중에 인민해방군군가는 순박간결한 언어와 울림이 있으면서도 힘있고 장엄하고 호방한 곡조를 담고있다. 인민군인의 이미지를 강하게 새겼다. 인민군대의 무한한 전투품격과 산이 첩첩이 줄을 서고 바다를 뒤집는 기세를 보여준다. 진군의 나팔소리와 같이 인민군대 성장의 장대함과 인민전쟁승리의 역정에 따라서 중국인민해방군전투역량과 정치적업무의 한 구성부분이 되었다.”

 

정율성 기념관을 방문한 중국인들중 팔로군 출신의 옛 병사들은 이 영상을 보면 감격의 눈물을 흘린다고 한다. 기념관 입구에서 “샹첸!(向前) 샹첸!(向前) 샹첸!(向前)~” 이란 곡조를 듣다보면 항일 당시의 치열성과 긴장감이 온몸에 전해온다. 중국 대륙을 삼키려는 일본에 대항해 죽음을 각오한 인민해방군들에게 이 노래는 심장의 피를 끓게 하고 곧바로 전쟁터로 달려가도록 만드는 진군의 나팔소리였다.

 

이 곡은 중국 역사의 큰 줄기와 함께 했다. 이 노래는 홍군이 국민당군을 물리치고 베이징에 입성해 1949년 10월 1일 천안문광장에서 중화인민공화국 성립을 선포할 때 불렸다.

 

정율성 음악가는 1937년 10월에 연안에 가게 된다. 이름도 본명 정부은(鄭富恩)에서 “아름다운 ’선율’(律)로 인민의 목소리를 완성(成)하겠다”란 의미에서 정율성(鄭律成)으로 고쳤다.

 

그가 ‘인민해방군군가’를 작곡한 것은 1939년 가을로 25살 때였다. 정율성은 공목(公木)과 연안에서 총 8곡으로 구성된 <팔로군대합창>을 창작하였고 <팔로군행진곡>은 그중의 대표곡이다. 이 <팔로군 행진곡>은 1951년 2월 1일 <인민해방군군가>로 이름을 바꾸면서 가사에 약간의 변경이 있었다.

 

그 뒤 1953년 5월 1일 <인민해방군행진곡>으로 고쳤다가 1965년에 <중국인민해방군진행곡>으로 명명되었다. 그러다가 1988년 7월 25일 덩샤오핑(鄧小平)이 서명한 명령에 의해 정식으로 ‘중국인민해방군군가’로 반포되었고 그뒤 군대의 모든 행사, 각종 집체의식 및 중국인들의 일상생활에서 널리 유행중이다.

 

1990년 베이징 아시안게임 개막식때도 울렸고 중국 건국 60주년 기념식때 톈안먼(天安門) 광장에서도 울려퍼졌다. 또 매년 건국기념일 열병식 때마다 톈안먼 광장에서 들을 수 있다.


 

이와함께 중국 공산당의 혁명기지였던 산시성(陝西省) 옌안(延安) 도착뒤 1년이 안된 1938년 4월 작곡한 ‘연안송’(延安頌)은 서정적이면서도 웅장한 느낌으로 당시 중국 전역에서 애창됐다.

 

석양의 빛은 산봉우리 탑을 비추고, 달빛은 강가의 반딧불을 비춰주네, 봄바람은 평탄한 벌판에 불어가고, 많은 산들은 견고한 장벽을 이루었네.

아, 연안! 너 이 장엄하고 웅위한 고성(古城), 여기저기에 항전의 노래소리가 울려퍼지네. 아, 연안! 너 이 장엄하고 웅위한 고성, 뜨거운 피가 너의 가슴속에서 끓어오르네.

 

천만 청년의 마음, 적들에 대한 원한을 품었네, 산야와 논밭의 길고긴 행렬에서 견고한 전선을 이루었네. 봐라! 군중들은 이제 머리를 들었노라, 봐라! 군중들은 이제 손을 들어올리노라. 무수한 사람과 무수한 마음, 적들에 대해 분노의 포효를  하고 있네. 사병들은 총구를 겨냥하고, 적들과 싸울 준비를 하고 있네.

 

아, 연안! 너 이 장엄하고 웅위한 성벽, 견고한 항일의 전선을 구축하였고 너의 이름을 만고에 남길 것이며, 역사에서 찬란하게 빛나리!

<‘연안송’(延安頌)에서)

 

 ‘연안송’은 발표뒤 옌안(延安) 뿐만 아니라 항일 기지는 물론이고 전국으로 퍼지면서 피끓는 젊은 청년들을 연안으로 끌어들이는 촉발제가 됐다. 연안송은 중국의 아리랑으로 불리고 있다. 이 작품에는 서양의 서정성과 한민족의 음악 특징이 유기적으로 조화되어 중국인들의 큰 사랑을 받았다. 실제 연안송은 요즘 원더걸스와 소녀시대의 ‘K팝’과 같은 인기를 당시 중국대륙에서 누렸다고 볼 수 있다.

 

“당시 연안은 혁명의 근거지였고 연안송은 혁명의 의지를 다지는 역할을 했다. 또한 연안에서 전국 각지로 번지면서 젊은 청년들이 연안으로 모여드는 역할을 했다. 사람들이 모이면 불렀던 것이 연안송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정율성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정율성에 대해 당시의 사람들은 ‘만약 군중들의 노랫소리가 타오르는 불과 같았다면 정율성은 바로 한 점의 불씨였다. 그가 가는 곳은 바로 불같이 일어나는 노랫소리에 불을 당기는 지점이었다’라고 말하고 있다.

<출처: 중국포털 바이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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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가을 베이징에서는 둘의 러브 스토리를 다룬 영화 ‘태양을 향하여’(走向太陽)가 개봉됐다. 이 영화는 2010년 9월 베이징에서 또다시 재상영돼 30만명이 관람한 것으로 전해졌다. 딩쉐쑹 여사는 1979년 중국의 첫 여성대사로 네덜란드에 부임했으며 1982년 덴마크 대사를 지냈다. 딩쉐쑹 여사는 2011년 5월 93살을 일기로 별세했다. 정율성 음악가와 딩쉐쑹 여사와의 사이에는 외동딸 딩샤오티(丁小提,69살)가 있는데 이름에 사연이 있다. 옌안에서 딩쉐쑹 여사가 젖이 잘 나오지 않자 정율성은 자신이 보물같이 아끼던 바이올린을 팔아 분유를 산다. 그래서 딸의 이름을 ‘바이올린’(violin), 중국말로 ‘샤오티’(小提)라고 짖게 된다. 정샤오티는 현재 베이징 바로크 실내합창단 단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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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율성은 1959년 중국반우파정치운동 기간 반당분자라는 누명을 썼으며 1966년 문화대혁명 초기 특무(스파이)라는 죄명으로 감금돼 음악활동 자격이 박탈되기도 했다. 1976년 문화화대혁명이 끝난 뒤 창작활동을 재개하였으나 베이징 근교의 운하에서 취미인 그물고기잡이를 하다 고혈압으로 세상을 떠났다. 정율성 사후 1년째인 1977년 베이징에서 ‘정율성선생 추모1주년 기념작품음악회’가 열렸으며  당시 유명 작곡가 리환즈(李換之)가 지휘를 맡았다.

 

정율성은 중국 공산당 혁명열사들이 묻히는 스징산루(石景山路) 바바오산혁명공묘(八寶山革命公墓)에 묻혀 있으며 비문에 그의 공적이 적혀 있다.

 

중·북 2개국 군가 독보적…김대중-김정일 정상회담때 ‘조선인민군행진곡’ 울려

 

중국 음악계는 정율성 음악가가 두 나라의 군가를 작곡한 것은 사상 유례가 없는 일로 평가한다. 정율성은 해방뒤 팔로군총부 6호의 명령에 따라 무정 사령관 통솔하의 조선의용대에 소속돼 가족이 1945년 조선으로 가게 된다.

 


북한에서 정율성은 조선국가보안대(조선인민군 전신) 구락부(군 문화부 부장에 해당), 조선노동당 황해도선전부 부장, 조선인민군협주단 단장, 조선국립음악대학작곡부 부장 등을 역임했다.

 

이 기간중에 조선인민의 투쟁과 중조우의를 담은 <조선인민군행진곡> <중조우의> <조선해방행진곡> <두만강> <동해어부> 등을 작곡하게 된다. 특히 북한은 2000년 6.15남북정상회담 때 평양 공항에 내린 김대중 대통령을 맞을 때 <조선인민군행진곡>을 연주했다. 북한은 1992년 대형예술영화 <음악가 정률성>을 출품하는 등 정율성에 대해 여전히 높게 평가하고 있다.

 

1950년 9월 부인 딩쉐쑹이 북한에서 귀국해서 얼마 지나지 않아 저우언라이(周恩來)가 북한내 연안파의 숙청을 우려해 친필로 김일성 주석에게 정율성을 중국으로 돌려보낼 것을 요청했으며 김 주석의 동의하에 정율성은 중국으로 돌아가 음악 창작활동을 계속하게 된다.

 

KBS 다큐 ‘정율성 편’ 거듭 방송불방…한국은 ‘이념’ 때문에 제 대접 못받아

 

한국은 1996년 10월 서초동 국립국악원 소극장에서 ‘정율성 작품 발표회’가 국내 처음으로 열렸다. 당시 부인 딩쉐쑹 여사가 처음 한국을 방문했다. 그뒤 2005년 정율성의 고향인 전남 광주에서 ‘정율성국제음악회’가 처음으로 열린뒤 2011년 10월 7회째를 기록했다. 그간 광주에서는 정율성 기념사업회 현판식과 사진 전시회, 흉상 제막식, 정율성로(路) 개통과 생가터 표지판 건립 등 다채로운 기념사업과 각종 논문발표 등 학술적인 연구까지 진행되고 있다. 광주문화재단에서 2011년 8월에는 하얼빈, 베이징 등 정율성 관련 유적지를 탐방하는 프로그램을 진행하기도 했다.

 

광주쪽의 이러한 노력에 따라 2007년 9월 중국인민해방군 건군 80주년을 맞아 베이징 음악청(北京音樂廳)에서 중국 문화부 주관과 광주시 협력으로 ‘우호평화행진곡 정율성 작품음악회’가 열린 적이 있다. 또 2011년 8월에는 하얼빈에서 ‘정율성음악제와 광주의 밤’이 열렸다.

 

그러나 중국과 북한의 정율성에 대한 높은 평가와는 대조적으로 국내에서는 정율성 음악가의 북한에서의 활동을 이유로 제대로 된 평가가 내려지지 않고 있다. KBS는 정율성 음악가의 북한행적을 문제삼아 2011년 8월 광복절 특집으로 방영키로 한 정율성 편을 11월로 연기한뒤 또다시 2012년 1월로 방영을 미룬 바 있다.

 

사실 정율성과 관련해서는 2002년과 2004년에 걸쳐 4차례나 국내 방송에서 다뤄졌음에도 KBS는 정율성 음악가가 북한의 군가를 작곡했고 한국전쟁때 중국인민지원군으로 참전한 사실을 들어 방송을 못하게 한 것이다.

 

정율성은 조선인으로 생의 대부분을 항일독립을 위해 중국에서 음악을 무기로 활동한 예술가이다. 올해는 한중수교 20주년이 되는 해다. 많은 중국인들의 가슴속에 아직도 살아 있는 정율성을 기념하는 행사를 확대하는 것은 양국간 관계발전에 커다란 도움이 될 것이다.

 
2011.1. / 미디어오늘 / 하성봉 기자

 

 

 


       2017.7.


[ ..... 박정희 탄생 100주년 기념우표 발행을 재심의해 뒤집어버렸다. .......     ]


 2017.7.31.


‘대중독재’의 그림자
   
 
오승훈 경제산업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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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2017년 7월, 대통령 탄핵과 재판 국면에서 문재인 정부가 출범한 지 두 달 만에 우정사업본부는 ‘우상화 반대’를 외치는 진보 시민단체들의 압박에 지난해 결정했던 박정희 탄생 100주년 기념우표 발행을 재심의해 뒤집어버렸다. 기념사업들도 취소되고 있다.


반면 노무현재단은 2020년까지 서울 창덕궁 인근에 노무현센터를 건립하기로 했고, 경남 김해 봉하마을의 노무현기념관도 조만간 착공에 들어간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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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170731010330110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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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대중 --- 신민당 조직부장   ]

 

김대중 등 24명 공소장 전문

[중앙일보]   1980.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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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고인 김대중>


1945년8윌15일 해방직후인 동년9월경 건국준비위원회의 선전책으로 일하다가 그 후 남로당 선전책으로 암약하던 임영춘의 권유로 동 위원회 목포시 지부에 가입하여 선전부원으로 있으면서 목포청년동맹에 가입 활동하다가,


동년10월경 건국준비위원회와 목포청년동맹이 해체되자 당시 신민당(후에 공산당·인민당과 합쳐 남로당이 됨)목포시 당위원장이며 그 후 남로당부위원장으로 위원장으로 암약하다가 행방불명된 이채헌의 권유로 위 신민당에 입당하여 조직부장으로 활동하는 한편, 공산계열의 행동전위대원 집단인 민주청년동맹 목포시 지부에 가입, 부위원장으로 활동하던 중,


1946년10월1일 위지부원 등이 목포경찰서 남교동 파출소를 습격하여 경찰관을 살해하고, 파출소를 방화한 폭동사건 배후조종 혐의로 구속되어 조사를 받다가 당시 한민당 목포시 당 부위원장이던 전처 망 차용수의 망부 차보륜의 신원보증으로 석방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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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article.joins.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1543862&ct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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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전쟁시기 조선인민군 제6사단으로 개편된 원 중국인민해방군 166사단은 선봉부대로 개성을 공략하고 강화도, 금포를 점령한후 계속 서해안을 따라 전라도의 목포, 광주, 순천을 공략하고 남해안을 에돌아 경상남도의 하동, 진주까지 점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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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율성은 지금도 북한에서 불러지고 있는 “조선인민군행진곡”을 작곡하여 김일성에게 바쳤으며 그 노래는 지난 2000년 6월15일 김대중이 평양을 방문했을 때, 공항에서 웅장하게 연주됐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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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allinkorea.net/sub_read.html?uid=24035&section=section3&section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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