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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국부 이승만
2018.10.04 조회수 : 24

대한민국 국부 이승만  


이승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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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대전 후 수많은 신생 독립국가들이 예외 없이 사회주의의 노선을 따라 시행 착오를 거듭할 때, 이 전 대통령은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확고한 신념으로 대한민국을 건국하였고, 또 공산주의의 허구성을 꿰뚫어본 선견지명의 지도자였다. 이 전 대통령은 조국의 독립을 위한 헌신과 자유민주국가를 건국한 공로만으로도 전국민에게 귀감이 되는 것이며, 민족의 지도자로서 추앙받을 충분한 자격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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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어 자신이 내무부차관보로 재직시 경제사절단을 이끌고 1987년 헝가리를 방문했던 당시를 언급했다.


"그 때는 헝가리도 공산국가 시절인데 수상실로 들어가자 수상의 첫 인사가 '축하합니다'였다"며 "당신네 나라는 2차대전후 선조를 잘 만나서 자유민주주의를 지켰기에 오늘날 발전한 게 아니냐. 2차대전 전 산업화를 했음에도 완전 평등이라는 달콤한 이론에 넘어가서 동구권은 이렇게 살고 있다"면서 "세계사를 미리 예측한 사람은  이승만과 서독의 아데나워 수상이었다고 말하는 것을 들으면서 자부심을 가졌다" 고 전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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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8-09-24
 
"경제 대통령 이승만"
written by. 이현오 

 

 

  *

아직도   우리는  이승만의  벽을   넘지  못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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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왜 많은 개발도상국들이 독립을 쟁취하고도, 정치·경제적 발전과 안정을 달성할 수 없었는가.


李光耀 선임장관은 『1960~1980년대까지 많은 개발도상국 지도자들을 실패로 몰아간 것은 사회주의 경제체제』라고 결론지었다. 국가개입 경제정책은 자원분배의 효율성을 저해하고 부패를 심화시킴으로써, 開途國(개도국) 경제성장의 발목을 잡았던 것이다. 제3세계의 많은 지도자들은 그들의 뛰어난 능력에도 불구하고, 사회주의 경제모델의 환상에 사로잡혀 경제성장의 결정적인 기회를 놓치는 중대한 실수를 저질렀다. .........   ]


월간조선
2000.12.

하버드에 온 李光耀의 특별 강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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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04 -- 1910    이승만  '독립정신'

 


[ .....  자유를 존중하는 것은 나라를 세우는 근본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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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9세의 李承晩, "첫째, 우리는 세계에 대해 개방해야 한다"


李承晩이 1904년 獄中에서 썼다가 출옥한 뒤 출판했던 '독립정신'을 읽어보면 그는 20代 후반에 이미 정신적으로 대통령 자리에 올랐다는 느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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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정신’ 에는 ‘요약과 결론’에 해당하는 ‘後錄’이 있다. 여기서 뽑은 말들을 소개한다. 이 글이 104년 전 29세의 조선 청년에 의하여 쓰여졌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읽어보자.


첫째, 우리는 세계에 대해 개방해야 한다.


1. 우리는 세계와 반드시 교류해야 한다. 2. 通商(통상)은 서로에게 이익이 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3. 오늘날 通商은 나라를 부강하게 하는 근본이다. 4. 외국인들이 우리나라에 오는 것은 우리를 해치려는 것이 아니라 서로에게 이롭게 하기 위한 것이다. 5. 외국인들을 원수같이 여기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둘째, 새로운 文物을 자신과 집안과 나라를 보전하는 근본으로 삼아야 한다.


1. 외국인들이 들어오는 것을 막을 수 없다. 2. 경쟁하는 마음이 없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 3. 외국인의 압제에 대해선 싸워야 한다. 외국인에게 뭇매를 맞은 한국인이 그 외국인을 죽이고 경찰에 자수한 일은 칭찬할 것이 못 되지만 그 의지는 본받을 만하다. 4. 동양의 옛날 책보다는 새로운 학문에 대한 책들을 공부해야 한다. 무엇보다 먼저 국제법, 통상조약, 우리나라 역사와 지리에 대해 공부해야 한다. 5. 과거의 제도 중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던 것조차도 버리고 바꿀 수 있다는 각오를 가지고 사람과 가정과 나라가 모두 새롭게 됨으로써 우리나라가 영국과 미국과 같이 되도록 한마음으로 힘쓰면 일본을 염려할 필요가 없다. 6. 물건을 만드는 것이 무엇보다 긴급하다. 7. 신학문을, 한글로 번역하여 한문을 모르는 사람도 배울 수 있도록 해야 한다. 8. 공부하는 것은 잘 살기 위한 투자이다. 9. 유학을 간 사람은 나라를 위해 시급한 것부터 공부하여야 한다. 귀국할 형편이 못 되더라도 뿌리치고 반드시 귀국하여 어두운 세상에 등불이 되어야 한다.


셋째, 외교를 잘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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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째, 나라의 주권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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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째, 도덕적 의무를 소중히 여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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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째, 자유를 소중히 여겨야 한다.


 1. 자유를 자기 목숨처럼 여기며 남에게 의지하지 말아야 한다. 2. 다른 사람의 권리 또한 존중해야 한다. 우리 집 종이나 다른 사람들의 하인, 또는 부녀자들과 아이들까지 모두 존중해야 한다. 3. 개화되지 못한 사람들에게 자유를 주어서 폐단이 있더라도 윗사람들이 어느 정도 손해를 보는 것이 옳다.

3. 부디 깊이 생각하고, 고집부리지 말고, 모든 사람들이 힘껏 일하고 공부하여 성공할 수 있도록 자유의 길을 열어놓아야 한다. 그렇게 하면 사람들에게 스스로 활력이 생기고, 관습이 빠르게 변하여 나라 전체에도 활력이 생겨서 몇 십 년 후에 부유하고 강력한 나라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자유를 존중하는 것은 나라를 세우는 근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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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korea318.com/client/board/view.asp?sEtpnum=7342&sEtpTp=BA01&cPage=11
 
"자유를 존중하는 것은 나라를 세우는 근본이다” 
哲人통치자 李承晩이 선물한 자유가 국가경쟁력의 源泉이다. 
 
 趙甲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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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후로는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지난 3월 26일 이승만 초대 대통령의 1941년판 영문저서 ‘Japan Inside Out` (일본, 그 가면의 실체)의 번역출판 기념회가 있었다. 그 자리에서 송방용 헌정회(憲政會) 회장은 “내가 95세를 살면서 역사를 좀 알게 되었습니다. 해방 후 ‘좌우합작’이다 ‘찬탁(贊託)’이다 라고들 할 때 이승만 박사의 ‘단정(單政)’노선이 관철되지 않았다면 대한민국도 없었을 것이고 오늘의 자유와 번영도 없었을 것”이라며 원로로서 애국충정을 토로하였다.


이어 강영훈 전 국무총리는 “이승만 박사는 호놀룰루의 병상에서 아들 이인수 박사에게 우리나라 사람이 과거의 역사적 사실을 자주 잊어버리는 것을 경계하시고, ‘이제 후로는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는 성경 갈라디아서 5장 1절을 유언으로 남겼다”고 전하였다.

자유인이라면 자유를 지키기 위하여 값을 치른다. 자유는 공짜로 누릴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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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건국이래 구축해온 엄청난 정신적"물질적 자산... 이건 아마 상당수 국민이나 현집권층도 제대로 잘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것 같습니다.


그건 뭐냐하면 첫째 이승만대통령이 우리나라 민주주의의 씨를 심었고, 이를 송두리째 뽑아버리려는 공산주의와 싸워 이를 지켰으며, 신생 자유민주주의 독립국으로서 토지개혁을 감행했습니다. 이승만은 세계사상世界史上 유례드믄 위대한 지도자였습니다.


사회주의 국가가 아닌, 자유민주주의 신생 독립국에서 토지개혁을 해서 농민에게 분배해준 나라는 전세계에서 우리 대한민국밖에 없습니다. 남미각국이나 동남아, 예컨대 민주주의를 잘한다는 필리핀도 아키노(전대통령)가 국토의 상당부분을 소유하고 있을 정도로, 몇몇 사람들만이 국토를 분할"소유하고 있습니다. 동남아가 대체로 다 그렇습니다. 토지개혁이 된 나라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6?5남침을 당하고서도 우리가 위대한 이승만대통령과 함께 반공정신으로 싸워 이길수 있었습니다.


이승만 다음으로 위대한 인물이 박정희대통령입니다. 그는 근대화를 성취한 우리나라 최초의 지도자였는데, 그는 아무도 언감생심 생각조차 할수없던 중화학공업을 이 후진적인 농경국에 뿌리내렸습니다. 전세계에 중화학공업을 발전시키고 있는 나라가 몇 됩니까? 스칸디나비아각국이 잘산다고 하지만 우리와 같은 중화학공업은 없습니다. 유럽 선진권에서도 영국 "프랑스"독일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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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욱이 전쟁의 와중에서도 선거가 중단된 일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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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민국 건국, 그 의미를 이해하려면 국가의 건설과 해체과정에서 빚어지고 있는 엄청난 流血사태를 보면 될 것입니다. ......... 

광복 이후 한반도에서 이루어진 대부분의 학살사건에서 원인 제공자이자 선제공격자는 북한공산당과 그들에 의해 조종된 세력이었음 ........  ]

 


[ ....... 李承晩이 주도한 建國, 强軍건설, 農地개혁, 교육확충, 韓美 상호방위조약 체제 구축. .......

  ...... 근대화를 추진하도록 지켜주고 떠받쳐준 울타리이자 주춧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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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承晩이 主導한 국민국가로서의 대한민국 건국, 그 의미를 이해하려면 국가의 건설과 해체과정에서 빚어지고 있는 엄청난 流血사태를 보면 될 것입니다. 東티모르 사태, 러시아와 체첸 사이의 전투,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爭鬪, 舊유고연방의 내전 같은 일들은 모두가 한 민족국가가 탄생하고 해체되는 과정에서 치러지는 통과의례인 것입니다. 19세기 유럽의 後發國인 독일과 이탈리아가 통일국가를 건설해간 과정, 2차 세계대전 후 영국과 프랑스 식민지들이 독립을 쟁취해갈 때 일어났던 流血사태도 같은 경우입니다.
민족국가는 祝砲나 祝歌 속에서 탄생하는 것이 아니라 砲煙(포연)과 학살의 피범벅 속에서 피어나는 경우가 보통입니다.


프러시아는 독일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1864년엔 덴마크와, 1866년엔 오스트리아와, 1870년엔 프랑스와 결전을 벌였습니다. 대한민국도 마찬가지였습니다. 1946년의 대구 10월 폭동, 1948년의 제주도 4·3 공산폭동, 그해 10월의 여순 14연대 반란사건, 그리고 6·25 남침. 이런 流血 속에서 나라를 세우고 나라를 지켜내는 한가운데 있었던 李承晩을 평화시의 기준으로써 평가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李承晩 시절에 벌어졌던 학살사건으로 요사이 말이 많습니다만 광복 이후 한반도에서 이루어진 대부분의 학살사건에서 원인 제공자이자 선제공격자는 북한공산당과 그들에 의해 조종된 세력이었음을 잊어버려선 因果關係(인과관계)를 이해하기 힘듭니다. 우리나라는 단일민족에다가 포용력이 큰 토착종교 샤머니즘의 영향이 강해 유럽이나 중동에서 되풀이되었던 인종·종교학살의 전통이 없었습니다(19세기에 천주교 박해가 있었지만 규모면에서 유럽과는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그런 나라에서 未曾有(미증유)의 살육극이 벌어진 것은 「증오의 과학」인 공산주의 이념이 들어와서 계급간의 적대의식을 고취시키고 「계급의 원수들」에 대한 보복을 위대한 혁명과업이라 선동함으로써 인간양심을 마비시킨 때문이었습니다.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촉발된 학살에 대한민국측이 대응하는 과정에서 많은 무리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과잉방어였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朴正熙가 인터넷 月刊朝鮮 독자들로부터 받은 지지표의 상당수는 李承晩에게 갖다 바쳐야 할 것들입니다. 李承晩이 없었으면 朴正熙도 없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李承晩이 주도한 建國, 强軍건설, 農地개혁, 교육확충, 韓美 상호방위조약 체제 구축. 이것들은 1960, 70년대에 朴正熙가 근대화를 추진하도록 지켜주고 떠받쳐준 울타리이자 주춧돌이었던 것입니다. 民主主義의 형식은 선거이고 실질은 안보, 복지, 자유라고 볼 수 있습니다. 안보, 복지, 자유가 보장되어야 민주주의, 즉 글자 그대로 국민이 주인이 되는 제도가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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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북한에서는 이미 1945년 末부터 정권기관들이 만들어지고 소비에트化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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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의원께서는 李承晩 대통령에게 單政수립의 책임을 돌리고 계십니다. 그러나 북한에서는 이미 1945년 末부터 정권기관들이 만들어지고 소비에트化 과정에 들어가 있었습니다. 單政문제를 먼저 공론화했다고 해서 분단의 책임을 李承晩에게 돌리는 것은 잘못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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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소련군은 북한지역을 점령하자마자 38선을 경계로 하여 남한지역과의 교통·통신을 단절 ........  ]


[ ....  미군은 .... 교통·통신을 회복하고 남북한 자유로운 왕래와 상거래를 회복할 것을 소련군에 제의했으나 소련군은 일절 응하지 않았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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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이 소련군과 분할 점령을 위해 군사분계선으로 38선을 책정한 것은 이론의 여지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미국이 38선을 책정한 사실이 곧 한반도 분단에 대한 미국의 책임으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이는 제2차 세계대전 終戰(종전) 직후의 서독과 오스트리아에서 확인된다. 서독에는 美·英·佛 군대 간의 군사분계선이 있었고, 오스트리아에는 美·英·佛·蘇 군대 간의 군사분계선이 있었으나 그것이 곧바로 국토분단을 초래하지는 않았다.
 


  광복 직후 남한을 점령한 미국은 38선을 순수한 군사분계선으로 유지하려고 했던 데 반하여, 북한을 점령한 소련은 38선을 통치분계선으로 변질시켰다. 소련군은 북한지역을 점령하자마자 38선을 경계로 하여 남한지역과의 교통·통신을 단절하여 남북 주민 간의 자유로운 교통·통신을 금지시켰다.

 

  스탈린은 1945년 9월20일 비밀지령에서 북한에 독자적인 공산정권의 수립을 지시했다. 이에 따라 소련 점령군 사령부는 10월8일부터 10일까지 평양에서 북조선5도인민위원회 대표자대회를 소집하고, 이어 이북5도행정위원회를 수립한 뒤 산하에 10개 행정국을 두었다. 이는 북한에 이미 별개의 정부가 들어선 것이다.
 
  소련은 金日成을 내세워 북한지역에서 1946년 2월에 토지개혁과 중요산업의 국유화를 골자로 하는 이른바 「민주개혁」을 단행했다. 뿐만이 아니다. 미군은 美·蘇공동위원회를 비롯하여 몇 차례 단절된 남북 간의 교통·통신을 회복하고 남북한 자유로운 왕래와 상거래를 회복할 것을 소련군에 제의했으나 소련군은 일절 응하지 않았다.

 

  미국이 남한지역을 식민지化·군사기지化하려 했고, 처음부터 남한지역에 분단정권을 수립하려 했다는 주장도 사실과 다르다. 미국은 처음부터 남한의 전략적 가치를 낮게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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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5.8.24.

 

"경원선 철도 끊기며 분단 시작 너무 어이없고 황당하지 않나"


 2009.06.29


신작 '별들 너머 저쪽과 이쪽' 낸 소설가 이호철

 

"남북 분단은 소련군이 1945년 8월 24일 서울~원산 간의 경원선(京元線) 철도를 차단하면서 시작됐다."


'분단시대'의 실향민 작가 이호철씨(78)는 함경남도 원산이 고향이다. 1945년 광복 당시 10대 소년이었던 이씨는 "지난 60여년간 우리를 고통스럽게 한 남북 분단이 이렇게 '철도 차단'에서 시작됐다는 것은, 당사자인 우리로서는 너무 어이없고 황당하지 않은가"라고 회상했다.


"소련군은 이어 8월 25일 서울~의주 간의 경의선(京義線) 운행도 막았고, 미군이 서울에 진주한 9월 6일에는 전화·전보 등 통신과 우편물 교환을 완전 차단했다. 소련은 처음부터 동구권을 먹었듯이 북한을 자국의 패권주의 틀 속에 편입하려고 했다. 미국은 소련과의 전후(戰後) 처리 합의에 따라 그저 먼 산 쳐다보듯 할 수밖에 없었다."

 
이호철씨는 얼마 전 "분단과 6·25전쟁의 원흉은 스탈린"이라고 강조하면서 허구와 역사의 결합을 통해 남북 분단을 새롭게 조명한 신작 장편소설 《별들 너머 저쪽과 이쪽》을 펴냈다. 이씨는 "문학성보다는 내 경험을 바탕으로 젊은 세대에게 6·25와 남북 관계의 실체를 알려주기 위해 현대사 참고서로 사용할 수 있는 책을 썼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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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5.12.17.

 

[ .....  러시아를 저의 조국이라 부른다니 ........

   ..... 한국에서 떠나서 저의 조국에 들어가서 저의 나라를 충성스럽게 섬기라 ........     ]

 

이승만, ‘공산당에 대한 나의 입장’ 방송
 
 
게재지명 서울신문
 
 게재일자 1945년 12월 21일

 

李承晩은 17일 7시반 ‘共産黨에 대한 나의 입장’이라는 제목하에 그 대변인으로 하여금 서울중앙방송국을 통하여 다음과 같은 방송을 하였다.

 

“共産黨에 대한 나의 입장

 

한국은 지금 우리 형편으로 공산당을 원치 않는 것을 우리는 세계 각국에 대하여 선언합니다. 기왕에도 재삼 말한 바와 같이 우리가 공산주의를 排斥하는 것이 아니오 공산당 극렬파들의 파괴주의를 원치않는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비록 4천여년의 오랜 역사를 가졌으나 우리가 다 잘못한 죄로 거의 죽게 되었다가 지금 艱幸히 살아나서 다시 발을 땅에 디디고 일어나려고 애쓰는 중이니 까딱 잘못하면 밖에서 들어 오는 병과 안에서 생기는 병세로 생명이 다시 위태할 터이니 먹는 음식과 행하는 동작을 다 극히 조심해서 어린애기처럼 간호해야 할 것이고 건강한 사람처럼 대우할 수 없는 것입니다.


공산당 극렬분자들의 행동을 보시고 우선 동서 각국에서 遂要되는 것만 볼지라도 폴란드 극렬분자는 폴란드 독립을 위하여 나라를 건설하자는 사람이 아니오 폴란드獨立을 파괴하는 자들입니다. 이번 전쟁에 독일이 그 나라를 점령한 후에 애국자들이 임시정부를 세워서 영국의 수도인 런던에 의탁하고 있어 백방으로 지하공작을 하며 英·美의 승인까지 받고 있다고 급기야 러시아가 독일軍을 몰아내고 그 땅을 점령한 후에 폴란드 공산분자가 외국의 세력을 藉托하고 공산정부를 세워서 각국의 승인을 얻고 또 타국의 軍機를 빌려다가 국민을 위협해서 민주주의자가 머리를 들지 못하게 만들어 놓아 지금도 정돈이 못되고 충돌이 쉬지않는 중이며 이외에도 歐羅巴의 해방된 모든 나라들을 보면 각각 그 나라 공산분자들이 들어가서 제나라를 파괴시키고 타국의 권리범위내에 두어서 독립권을 영영 말살시키기로 위주하는 고로 전국 백성이 처음으로 그자들의 선동에 끌려서 뭣인지 모르고 따라가다가 차차 각오가 생겨서 죽기로써 투거하는 고로 구라파의 각 해방국은 하나도 공산분자의 파괴운동으로 인연하여 분열 분쟁이 아니된 나라가 없는 터입니다.

 

동양의 중국으로 보아도 蔣介石總統의 애국심과 용감한 軍略으로 전국 민중을 합동해서 왜적에 항전하여 실낱 같이 위태한 중국운명을 보호하여 놓았더니 연합 각국은 다 그 공적을 찬양하며 극력 후원하는 바이어늘 중국의 공산분자는 백방으로 파괴운동을 쉬지 아니하고 공산정부를 따로 세워 중국을 두 조각으로 나누어 놓고 무장한 군병을 양성하여 중앙정부와 蔣總統을 악선전하여 그 세력을 뺐기로 극력하다가 필경은 내란을 일으켜 관병과 접전하여 동족상쟁으로 피를 흘리게 쉬지 아니하는 고로 타국들은 이것을 이용하여 이권을 도모하기에 기탄치 않기에 이르나니 만일 중국의 공산분자가 만분지일이라도 중국을 위하여 독립을 보존하려는 생각이 있으면 어찌 차마 이같은 파괴적 행동을 취하리오.

 

우리 대한으로 말하면 원래에 공산주의를 아는 동포가 내지에는 불과 몇명이 못되었다니 공산문제는 도무지 없는 것입니다. 그중에 공산당으로 지목받는 동포들은 실로 독립을 위하는 애국자들이요 공산주의를 위하여 나라를 파괴하자는 사람들은 아닙니다. 따라서 시베리아에 있는 우리 동포들도 다대수가 우리와 같은 목적으로 생명까지 희생하려는 애국자들인줄 우리는 의심없이 믿는 바입니다.

 

 불행히 양의 무리에 이리가 섞여서 공산명목을 憑藉하고 국경을 없이하여 나라와 동족을 팔아다가 이익과 광영을 위하여 浮言僞說로 인민을 속이며 도당을 지어 동족을 위협하며 軍機를 사용하여 재산을 약탈하며 소위 공화국이라는 명사를 조작하여 국민전체에 분열상태를 세인에게 선전하기에 이르다가 지금은 민중이 차차 깨어나서 공산에 대한 반동이 일어나매 간계를 써서 각처에 선전하기를 저이들이 공산주의자가 아니요 민주주의자라 하여 민심을 현혹시키니 이 극렬분자들의 목적은 우리 독립국을 없이해서 남의 노예로 만들고 저의 사욕을 채우려는 것을 누구나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분자들이 러시아를 저의 조국이라 부른다니 과연 이것이 사실이라면 우리의 요구하는 바는 이 사람들이 한국에서 떠나서 저의 조국에 들어가서 저의 나라를 충성스럽게 섬기라고 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우리나라를 찾아서 완전히 우리의 것을 만들어 가지고 잘하나 못하나 우리의 원하는대로 만들어 가지고 살려는 것을 이 사람들이 왜 조선사람의 形容을 쓰고 와서 우리 것을 빼앗아다가 저의 조국에 붙이려는 것은 우리가 결코 허락치 않는 것이니 우리 3천만 남녀가 다 목숨을 내 놓고 싸울 입니다. 우리의 친애하는 남녀들은 어디서든지 각기 소재지에서 합동해서 무슨 명사로든지 애국주의를 조직하고 분열을 일삼는 자들과 싸워야 됩니다. 우리가 우리나라와 우리 민족과 우리 가족을 팔아 먹으려는 자들을 방임하여 두고 우리나라와 우리 민족과 우리가족을 보전할 수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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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이 사람들을 회유시켜서 이 위급한 시기에 합동공작을 형성시키자는 주의로 많은 시일을 허비하고 많은 노력을 써서 시험하여 보았으나 종시 각성이 못되는 모양이니 지금은 중앙협의회의 조직을 더 지체할 수 없이 협동하는 단체와 합하여 착착 진행중이니 지금이라도 그중 극렬분자도 각성만 생긴다면 구태어 거절하지 않을 것입니다. 다만 파괴운동을 정지하는 자로만 협동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에 이 문제를 우리손으로 해결치 못하면 종시는 우리나라도 다른 해방국들과 같이 나라가 두 切分으로 나누어져서 동족상쟁의 화를 면치 못하고 따라서 결국은 다시 남의 노예노릇을 면키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경향각처에서 모든 애국 애족하는 동포의 합심합력으로 단순한 民主政體下에서 국가를 건설하여 만년무궁한 자유복락의 기초를 세우기로 결심합시다.”

 

 

 

巨惡 스탈린과 공산당을 조롱한 李承晩의 대연설
 
 
 트루먼 독트린을 2년 앞선 이 연설은 建國 지도자에 의하여 이뤄진, 2차 대전 이후 소련과 공산당에 대한 세계 최초의 정면 대결 선언이다. 


趙甲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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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연설은 70세 老鬪士(노투사)의 위대한 先制공격이었다. 급소를 얻어맞은 조선공산당 박헌영은 중앙위원회 대표 명의로 ‘세계민주주의전선의 분열을 책동하는 파시스트 이승만 박사의 성명을 반박함’이라는 長文의 성명을 발표하였다. 표현은 극렬했지만 守勢的(수세적)일 수밖에 없었다. 박헌영 등 공산세력이 주도한 좌익의 통일전선체인 조선인민공화국은 李承晩이 귀국하기 전에 그를 主席으로 추대하였던 적이 있었다. 그래 놓고 그를 파시스트라고 공격하니 국민들에겐 잘 먹히지 않았다. 대중의 李承晩에 대한 신뢰는 공산당의 선전 선동이 무너뜨릴 수 없을 정도로 깊은 뿌리를 박고 있었다.
 


  李承晩이 공산당을 賣國세력으로 규정한 지 1주일이 지난 12월26일 모스크바에서 열린 美, 英, 蘇 3國 外相 회담은 남북한에 대한 5년 기한의 신탁 통치안을 발표하였다. 金九, 李承晩이 주도한 反託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났다. 朴憲永의 조선공산당은 熱火(열화)와 같은 민심에 동요하여 贊反(찬반)을 정하지 못했다. 지령이 내려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박헌영은 서울 주재 소련영사관을 찾아가 지침을 받으려 했으나 영사관측은 본국으로부터 훈령을 받지 못하였다고 했다. 박헌영은 12월28일 밤 비밀리에 38선을 넘어 평양으로 갔다. 그는 김일성 등 조선공산당 북조선 분국 간부들에게 신탁통치에 대한 남한의 민심이 반대쪽이라고 설명하였다. 김일성도 어쩔 줄 몰라 하였다. 모스크바에 갔던 북한주둔 소련군 民政사령관 로마넨코가 평양으로 돌아온 다음날 朴憲永에게 지침을 하달하였다. 신탁통치를 결의한 모스크바 협정을 지지하라는 것이었다.
 

  朴憲永은 1946년 1월1일 밤 평양을 출발, 2일 새벽 서울에 도착, 김일성과 보조를 맞추어 조선공산당 이름으로 모스크바 협정, 즉 신탁통치 지지 성명을 발표하였다. 李承晩의 1주일 전 예언대로 극렬공산주의자들은 民心을 거스르고, 소련의 지령에 충직하게 복무함으로써 민족반역자로서의 면모를 드러내었다. 그들은 회복이 불가능한 敗着(패착)을 두었다. 좌익은 賣國세력, 우익은 民族진영이 된 것이다. 右翼(우익) 주도의 反託, 좌익 주도의 贊託(찬탁) 政局은 김구의 臨政(임정)세력을 오른쪽으로 몰았다. 그 뒤 한 동안 李承晩-金九 연합전선이 형성되면서 좌익은 더욱 고립된다.
 


  李承晩은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先制공격으로 역사의 주도권을 잡았다. 그가 2010년 한국 대통령이었다면 연평도 도발 직후 평양의 금수산 기념궁전을 폭격하도록 명령하여 김일성의 屍身(시신)을 날려버리고 김정일-김정은을 昏絶(혼절) 시켰을 것이다.
 

  李承晩의 공산주의자 배격 연설은 한반도 정세를 賣國者와 愛國者, 파괴자와 건설자, 敵과 동지, 善과 惡으로 가른 역사의 分水嶺(분수령)이었다. 오늘의 한반도 정세는 그 연설의 결과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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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7.

 

 

 

        *

[  ...... 조선공산당의  청년동맹규약 .......

  ..... " 사회주의조국  쏘베-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에  무한의 충성을  다하도록  교육한다. "  ..........   ]

 


1946.5.28.동아일보


사회주의조국에 충성하라

조공청년동맹의 지도강령

 


한때 조선을 소련의 일연방 되기를 희망한다고 외국기자단에서 말한 조공책임비서 박헌영에 대한 사실이 미국 뉴욕타임쓰지로부터 세간에 보도되자 세인의 공노를 사게 되엇슬대 변명이 구구하엿는데 요지음 조선공산당의 청년동맹규약을 들추어보면 막쓰 레닌의 리렴과 모순되는  다음과 같은  일절이 있다.


"사회주의조국 쏘베-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에 무한의 충성을 다하도록 교육한다."


이것은 조선혼이 사라있고 조국재건에 피끓는 조선청년남녀에게는 이따위 얼빠진 지도가 감히 손을 대지 못할 것으로 밋으나 일방 상심할 일이 아닐수 없다.

 

 

 

   *   1946.3.10.   [  조만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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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지막 면회 때 주신 당신의 두발(頭髮)

 

   제가 방에 들어가니까 그간의 안부를 물으시더니 누런 종이의 편지봉투를 제 앞에 꺼내 놓으시는 것이었습니다. 접히고 속에는 뭔가 들어있는 듯 약간의 두께를 지녔는데, 제가 집어보니 눈에 익은 그분의 만년필 글씨가 쓰여 있었습니다.


           檀紀四二七九年 三月十日
           西紀 一九四六年 三月十日
           頭髮

 

 저는 가슴이 철렁하고 눈앞이 캄캄해졌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분은 최후를 준비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가족과 영영 이별하실 때가 가까워졌음을 판단하신 것이었습니다. 눈물을 참기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분의 마음을 어지럽히지 않으려고 눈물을 애써 참았습니다. 그리고 그 봉투가 무엇인지, 왜 이런 것을 저에게 주시는 것인지 묻지 않았습니다. 묻지 않아도 그분이 하고 싶으신 말씀을 충분히 알 수 있었습니다.

 


 봉투에 적으신 날짜로 보아 연금되신지 2개월쯤후, 그러니까 이미 반년 전에 준비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망설이시며 품고 계시다가 이젠 때가 됐다고 판단하셨던 것입니다.

 

 조 선생님은 아이들의 머리를 쓰다듬으시며 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눈 끈 장님을 만드느니, 위험이 따르겠지만 애들을 서울로 데려다 공부를 시키는게 좋겠어요."


 '눈 뜬 장님'말씀은, 당시 북한 당국이 북한공산화 작업을 서두르는 한편 반대세력에 대한 피비린내 나는 숙청과 탄압을 점점 심하게 할 때인데, 그 일환으로 소위 '반동분자'의 자녀들은 국민학교 이상의 교육을 제도적으로 봉쇄하도록 준비하는 중이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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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해 봄 연흥(然興)이 국민학교에 입학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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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데 학교 교육 이란 것이 문제였습니다. 세상이 어지럽고 공산당이 세상권력을 잡고 나니 늘 학교에서 배워준다는 것이 '김일성 장군'노래 아니면 붉은 군대 노래이고,'이승만 원수', '김구 원수'이런 구호들이었습니다. 아이들이 늘 그런 것만 배워 갖고 오니, 도강 선생께서 아이들을 데리고 월남하라는 말씀의 뜻을 알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도 1년여의 세월이 흘러갔습니다. 조 선생님이 어디로 끌려가셨는지, 어떻게 지내시고 있는지 전혀 소식을 알 수 없었습니다. 그분 걱정에 저는 깊은 절망감에 빠지게 됐습니다. 게다가 시골생활이란 것이 아무 대책도 없는 것이어서 생계마저 위협 받게 됐습니다.
 
 
 
 그 분 말씀 따라 어린 세 자녀 데리고 월남


   48년 가을, 이제 더 이상 월남을 미룰 수는 없게 됐습니다. 저 선생님의 생사조차 모른 채 소식이 끊긴지 언 2년이 가까워진 때였습니다. 6남매를 이끌고 먼저 월남한 장녀 선부(善富)는 인편에 우리도 월남할 것을 권해 왔습니다. 세 자녀를 데리고 월남하는 것이 고당 선생의 말씀을 따르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가장 결정적으로 월남을 서둘 수밖에 없었던 것은 북한에 '통행증'이란 제도가 곧 생겨나 몇 달 후부터 군(郡) 경계를 벗어나려면 면(面) 인민위원회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반동세력은 물론 주민을 효과적으로 통제하기 위한 제도였습니다. 만약 우리가 주저하고 있는 동안 몇 달 후 이 통행허가 제도가 실시되면 우리는 영영 그 강서마을을 벗어나지 못하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같은 '반동'의 여행을 허가해 줄 리가 없었던 것입니다.

 

 만약이 곳을 벗어날 수 없다면 "아이들을 눈뜬 장님으로 만들지 말고 서울로 데려가 공부시켜라"는 조 선생님의 마지막 당부조차 받들지 못하게 될 것같았습니다. 저는 '월남하는 것만이 조 선생님께서 남기신 세 자녀를 위하는 길' 이라고 판단, 조 선생님을 북한 땅에 남겨둔 채 38선을 넘기로 결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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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8.3.


[ ...... 월남동포가 약 150만 명이고 그후도 계속적으로 매달 2, 3만 명이 월남중 .......   ]

 

월남자 140만 명, 귀환동포 200만 명 등 이재민 실태


 대한일보  1948년 09월 11일

 

해방 이후 해외 각지로부터 귀환한 해외동포, 38이북으로부터 남하한 월남동포 또는 그 동안 마비상태에 빠진 각 생산공장에서 수없이 밀려나온 실업자군, 기타 친족·가족 등을 잃어버리고 거리를 방황하는 어린이·노인 등 300여만 명이 지금 남조선 각지에서 조국애도 동포애도 인정도 모르는 채 정처없이 헤매이고 있다.


즉 그 동안 보건후생부·외무처·노동부 등에서 지난 3월말까지 조사한 숫자로만 보더라도 월남동포가 약 150만 명이고 그후도 계속적으로 매달 2, 3만 명이 월남중에 있다고 하며 해외귀환동포는 모두 212만 7,503명, 세궁민이 약 1백만 명, 실업자가 약 103만 명 그밖에 孤子·불구자 등의 구호를 요하는 자 약 21만이라고 하는데, 그 중에서 구호를 요하는 자 수는 실로 남조선 총인구의 약 15%에 해당하는 300만 정도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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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회에서 증오가 중요한 정치적 요소로 처음 등장한 것은 러시아의 공산당 혁명이 성공해서 공산주의가 널리 퍼진 1920년대 이후였다. 공산주의가 反제국주의적이고 反식민주의적 이념으로 인식되었으므로, 다른 식민지들에서와 마찬가지로, 일본의 식민지였던 조선에서도 공산주의는 인기가 높을 수밖에 없었고 많은 지식인들이 공산주의자들이 되었다.


그리고 공산주의의 전투적 신조에 따라, 공산주의자들은 다른 이념을 가진 사람들에 대해 드러내놓고 적대적이었다. 그래서 공산주의의 세력이 커질수록, 좌우 대립은 심해졌다. 김좌진 장군의 암살과 金九 선생의 암살 기도는 1930년대에 이미 좌우 대립이 화해할 수 없는 정도로 치달았고 두 세력들이 서로 극심한 증오를 품었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광복으로 권력 투쟁이 시작되자, 좌우 대립은 당연히 더욱 격렬해졌고, 두 세력들 사이의 증오도 커졌다. 그리고 그런 대립과 증오는 한반도의 분단을 확고하게 만드는 데 한몫을 했다. 좌우익 사이의 대립이 그렇게 격화되지 않았고 두 세력들이 서로 품은 증오와 불신이 그리 크지 않았더라도, 이미 세계 정치에서 냉전 구도가 굳어진 상태였으므로, 분단은 필연적이었을 터이다.


그래도 좌우익이 서로 품었던 증오와 불신이 분단 구도를 좀더 확고하게 만든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남한과 북한에서 세력을 잃은 소수에 대한 박해가 나왔다. 북한 정권에 의한 地主 계급에 대한 혹심한 박해는 많은 북한 주민들의 南下를 불렀다. 그리고 남한 지역에서 일어나 좌익 세력의 반란들은 혹심한 진압을 불렀고, 그 과정에서 양민들이 큰 피해를 입었다.


6·25 전쟁은 좌우익의 대립으로 생긴 증오가 거침없이 분출될 곳을 제공했다. 북한의 공산주의 세력은 그들이 점령한 곳에서 그들이 적이라고 인식한 사람들에 대해서 지금까지 우리 역사에서 볼 수 없었던 종류의 증오를 드러냈다. 그들은 주민들 사이의 증오를 의도적으로 키웠고 그것을 통치에 효과적으로 이용했다.


그들의 그런 非인간적 정책은 북한군이 물러간 지역에서 우익 세력의 처절한 보복을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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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장 유능했던 독립운동가

 

이승만은 배재학당을 2년 만에 졸업하면서 각국 외교관을 포함해 800여명의 청중 앞에서 유창한 영어로 졸업생대표 연설을 할 정도로 수재였다. 당시 졸업연설의 제목이 ‘한국의 독립(Independence of Korea)’이었는데 이는 이후 그의 일관된 목표였다.


급진개혁을 도모하다가 체포돼 6년여의 옥살이를 하고 나와 러일전쟁 직후 구국의 사명을 띠고 미국에 보내져 한국인 최초로 미국 대통령을 만났다. 그는 또 조지 워싱턴대와 하버드, 프린스턴대를 거치며 학사-석사-박사 학위를 5년만에 받았다.


귀국해 전국을 돌며 독립사상 고취에 주력한 그는 105인 사건이 발생했을 때 이미 체포대상 1호였다. 하와이로 건너가 한인교포를 대상으로 교육과 언론사업에 주력한 그가 정치가로 떠오른 것은 3·1운동(1919년) 이후 생겨난 5곳의 임시정부에서 모두 그를 대통령 또는 국무총리로 추대하였다. 그만큼 그는 독립운동가 중에서 유능한 인재였다.

 

● 공산화를 막아낸 용미주의자


1946년 6월 남한만이라도 단독정부를 세우자는 이승만의 정읍 발언을 들어 그에게 한반도 분단 고착화의 책임이 있다고 지탄하는 것은 오해다.

1993년에 공개된 소련측 자료를 보면 스탈린은 1945년 9월 20일 이미 북한에 친소 단독정권을 수립하라는 지령을 내렸다. 이에 따라 1946년 2월 수립된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위원장 김일성)는 토지개혁과 산업국유화, 인민군 창군 등 실질적 정부의 역할을 수행했다. 분단 고착화의 원흉은 소련이다.


이승만은 한반도를 공산화하려 한 소련의 속셈과 전략적 가치가 없다는 이유로 한반도를 포기하려 했던 미국의 속내를 동시에 읽고 있었다. 당시 한국의 공산화를 막는 길은 남한이라도 민주정부를 수립하는 것이었다. 국제법을 전공한 그는 미국이 아닌 유엔을 떠올렸고 그 덕분에 대한민국은 유엔 감시 하에 총선거로 탄생한 세계에서 드문 신생국이 됐다.


이승만은 ‘미제의 앞잡이’가 아니었다. 그는 광복 전부터 미국의 기피인물이었다. 미국은 1947년 중반까지 말 안 듣는 이승만보다는 김규식을 더 지지했다. 이승만은 미국식 제도를 지지했다는 점에서는 ‘숭미(崇美)주의자’였지만 실제 외교에서는 철저히 미국을 이용하는 ‘용미(用美)주의자’였다.

 

● 대한민국의 합법적 설계자


이승만은 1948년 제헌국회의 의장으로서 대한민국 헌법제정의 총책임자였다. 당시 제헌국회에서는 내각책임제를 구상했지만 이승만은 건국 초기의 혼란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리더십이 필요하다며 대통령중심제를 고집했고 이를 관철시켰다.


그는 또한 부정선거로 대통령이 된 것이 아니었다. 1948년 총선거는 유엔의 감시 하에 평화롭고 민주적으로 진행됐다. 당시 총선에 반대한 사람이 있었지만 대다수의 한국인이 여기에 참여했다는 점에서 대한민국의 건국은 국민적 지지를 받았다.

이승만은 총선을 통해 구성된 국회의 압도적 지지로 초대 대통령에 당선됐으며 대한민국을 공산화로부터 막아내고 민주주의의 틀을 구축함으로써 오늘날 번영의 기초를 닦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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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9.

 

[...... 예닐곱 개의 臨時政府에서 실질적인 정상의 지도자로 추대되었다 .........


.... 〈당시 형세는 내외지를 막론하고 인심의 추이가 오직 李承晩에게 폭주하였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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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1 운동은 40대 중반에 이른 李承晩과 金九의 인생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李承晩은 3·1 운동 이후에 국내외에서 선포되거나 논의되던 예닐곱 개의 臨時政府에서 실질적인 정상의 지도자로 추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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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內外地의 인심이 李承晩에게 瀑注해』

 
  그러나 〈당시 형세는 내외지를 막론하고 인심의 추이가 오직 李承晩에게 폭주하였었다〉는 현순의 표현대로 이때는 이미 李承晩은 어느 누구도 견줄 수 없는 존재가 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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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孫世一의 비교 評傳 한국민족주의의 두 類型-李承晩과 金九

  31. 임시정부 국무총리 李承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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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5.9.


 “왜 우리 대통령 이승만 박사를 빨리 데려오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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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승만을 귀국시켜달라고 요청했던 이는 남한 점령 미군 사령관 존 리드 하지 장군이었다. 하지는 이승만과 상하이 臨政(임정) 사람들이 귀국해야 한국의 혼돈 상황이 정리될 것이라고 판단했다.


1945년 9월 13일자 하지 사령부 일일보고서는 “대부분의 한국사람들은 이승만을 한국의 孫中山(손중산·孫文)으로 여기고 있다”고 했다. 이승만은 남한의 좌우익 사람 모두로부터 지지를 받고 있다는 것이었다.
 

 하지 중장은 인천에 상륙한 9월 8일, 한국에서 태어났고 한국말을 잘하는 해군중령 윌리엄즈를 특별보좌관으로 임명했다. 윌리엄즈는 비행기를 타고 대전, 광주, 대구, 부산 등을 돌아다니면서 민심동향을 파악했다. 한국의 서민들은 그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왜 우리 대통령 이승만 박사를 빨리 데려오지 않는가?”
 
 “이승만 박사가 미국에 있다는데 왜 모셔오지 않는가?”
 

 이정식 교수에 따르면 당시 한국인들은 해방과 독립을 동일시했고, 미군과 공산세력과의 갈등이 표면화하기 전이라 좌익도, 우익도 없었다는 것이다. 더구나 9월 14일 좌익들이 발표한 조선인민공화국 내각 명단에 이승만은 주석으로 추대되었다.

 
 순진한 한국인들은 해방되고 독립한 나라의 대통령이 이승만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이승만이란 이름은 오랫동안 많은 한국인의 가슴속에 ‘위대한 독립투사’라는 傳說的(전설적) 이미지의 뿌리를 내려놓고 있었다.
 
 이런 民心(민심)보고를 받은 하지 중장이 본국에 이승만을 귀국시켜달라고 건의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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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monthly.chosun.com/board/view_turn.asp?tnu=200810100078&catecode=C&cpage=1

2008년 10월호 
 
다시 생각하는 國父 李承晩 - 李承晩의 미국다루기
“공산주의자와 대결하는 방법을 가르쳐 준 賢人” (리처드 닉슨 前 美 대통령)
 
趙甲濟 月刊朝鮮 편집위원·조갑제닷컴 대표

 

 


[ ..... 이승만 32%, 김구 22%, ......

  ..... 박헌영 10%, 김일성 3%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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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지도자 지지도를 묻는 조사에서는 이승만 32%, 김구 22%, 김규식 9% 등 우파 쪽이 72%인 반면, 여운형 13%, 박헌영 10%, 김일성 3% 등 좌파 쪽은 28%에 그쳤다. 같은 해 “미국인이 소련인보다 더 심한가”란 질문에는 ‘아니다’(68%)가 ‘그렇다’(16%)를 압도했다(전상인, ‘고개숙인 수정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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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第 1次 大統領은 누구인가?

      李承晩 博士 1,916인 29% 弱

      朴憲永 84인 1% 强  ........    ]

 

동아일보 1946년 07월 23일   


한국여론협회, 초대 대통령과 식량정책 등에 대한 여론조사결과

 

韓國與論協會는 (略) 17일 서울시내 鍾路 南大門 鍾路 4정목의 3개소 통행인 6,671인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설문으로 여론조사를 하였다는데 그 結果는 다음과 같다.


(問) 第 1次 大統領은 누구인가?


李承晩 博士 1,916인 29% 弱

金九 主席 702인 11% 弱

金奎植 博士 694인 10% 强

呂運亨 689인 10% 弱

朴憲永 84인 1% 强

其他 110인 2% 弱

모르겠다 2,476인 37% 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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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정 정보보고서는 조봉암이 1946년 9월 신당 창당과 관련된 집회에서 "5퍼센트밖에 지지층을 가지지 못한 공산당이나 극우세력이 정권을 독점하고자 하는 것은 잘못"이라며 "나는 95퍼센트의 중간층을 중핵으로 한 정당을 조직하고자 한다"고 말했다고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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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회주의의 구호를 걸었다면, 인민들은 우리를 무서워했을 것이며 곁에도 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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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공산주의는 공산국가 소련과 결부되어 폭동, 혁명, 테러와 같은 부정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므로 대중에게 쉽게 접근하기 위해서는 공산당 대신 영국의 노동당(勞動黨)과 같은 온건한 복지정당으로 위장하는 것이 편했다. 그 때문에 김일성은 자신의 조직을 북조선노동당(북로당)으로 바꾸고, 남한에서도 박헌영, 여운형, 백남운의 좌파 3당을 남조선노동당(남로당)으로 통합하게 했던 것이다. 1945년 11월 신의주 학생 사건에서 많은 학생들이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죽고 다치자, 김일성은 현지로 찾아가 유감을 표시하면서,“우리 노동당이라는 것은 다른 게 아니라 민주주의를 하자는 거요. 우리가 민주주의를 하자는 거지, 공산주의를 하자는 것이 아니요”라고 자신을 감추었던 것이다.

 

공산주의를 민주주의로 위장한 김일성의 전술은 성공했다. 그러므로 그는“그때에(해방 직후에) 우리가 사회주의의 구호를 걸었다면, 인민들은 우리를 무서워했을 것이며 곁에도 오지 않았을 것입니다”라고 만족스럽게 회고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에 따라 ‘공산주의 혁명’도 ‘민주적 개혁’으로 둔갑했다. 그리하여 토지개혁의 혁명적 조치로 몰수된 지주들의 토지에 대한 경작권이 농민들에게 분배되었다. 그리고 화폐 개혁의 혁명적 조치로 상인들의 자본이 몰수되었다. 그 결과로 기득권을 가진 식자층과 유산계급은 뿌리가 뽑히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북한 사회에 인재 부족의 재앙을 가져 왔다. 이른바‘민주개혁’으로 불리는 공산주의 혁명으로 얼마나 많은 인재들이 사라졌는가는 김일성대학을 비롯한 대학들의 이공계(理工系) 신입생이 부족한 사실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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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www.sdjs.co.kr/read.php?quarterId=SD201002&num=390
 
2010년 여름호 
[특집] 이승만 시기의 보수세력과 민주제도

[이주영 | 건국대학교 사학과 명예교수]

 

 

 

  [ ...... 김일성도 ‘전국을 통치할 분은 이 박사밖에 없다’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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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촉에는 누가 참여했습니까.

“정확한 기억은 못하는데 대부분 참여했지.”


―이 박사가 만든 단체에 어떻게 공산당까지 참여했습니까.

“당시 이 박사는 민족의 어른이었어. 임시정부 대통령을 했고 대한제국 때부터 독립운동을 한 분이니 다들 이 박사를 모시려했지. 건준이 만든 조선인민공화국에 주석으로 추대됐고, 북의 김일성도 ‘전국을 통치할 분은 이 박사밖에 없다’고 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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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chosun.com/national/news/200508/200508070248.html

[손주에게 들려주는 광복이야기]<6> "당시 이승만박사, 백범과 소홀했다고? 친형제 같았어"

이을식옹이 말하는 이승만과 '독촉'
요즘 사람들 건준만 알고 독촉은 몰라… 해방정국 주도했지

입력 : 2005.08.07

 

 


[ ......  ‘조선인민공화국’ .... 이승만을 주석으로 발표 ........

  ......  공산당의 朴憲永도 이승만의 귀국 후 그를 찾아가 당수가 되어 줄 것을 요청 ...........      ]

 

[ ...... 국회의장으로 .... 재석 198명 중에서 188표를 .....대통령선거에서도 180표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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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3·1 운동 직후 수립된 漢城임시정부에서 執權官總裁, 統合임시정부 임시대통령, 상해임시정부 국무총리, 블라디보스톡임시정부 국무총리 등으로 선출된 정통성을 가지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李王家의 후예, 미국과 중국에서의 독립운동, 한국인 최초의 미국 프린스턴대학 정치학박사 등의 화려한 배경을 가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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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5일 일본천황의 항복방송과 동시에 건국준비위원회를 발족시키고 9월 5일에 전국인민대표회의를 열어 ‘조선인민공화국’이라는 정부수립을 선포했던 呂運亨이 9월 14일 발표한 조각에서 김구·허헌·김규식·여운형 등 국내외의 지도적 정치가들을 모두 망라한 중에서도 이승만을 주석으로 발표한 것은, 이승만이 귀국하기 이전에도 그는 국내 정치인들 로부터 가장 높은 위치의 정치인으로 인정받고 있었음을 나타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3)


또한 공산당의 朴憲永도 이승만의 귀국 후 그를 찾아가 당수가 되어 줄 것을 요청한 바 있으며,4) 우익세력의 최대정당이었던 韓民黨도 1945년 9월 16일의 창당대회에서 이승만을 서재필·김구·이시영·문창범·권동진·오세창 등과 함께 당의 영수로 추대하였다. 이외에도 1945년 11월 2일에 좌우익의 모든 정당 및 단체들이 모여 결성한 獨立促成中央協議會 에서도 이승만은 회장으로 선출되었다.5)


1946년 2 월 미 군정하에서 공산당을 제외한 임시정부요인, 한민당, 신한민족당, 국민당, 인민당, 무소속, 기독교, 천주교, 불교 등 모든 정치세력들이 참가한 비상국민회의 최고위원회가 성립되었다. 비상국민회의의 최고정무위원으로 구성된 민주의원은 처음에는 하지중장의 자문기관으로 발족하였으나 곧 정부수립을 준비하는 과도정부적 성격을 띠게 되었다. 이 비상국민회의 최고위원회에서도 이승만 은 민주의원의 의장으로, 김규식은 부의장으로, 그리고 김구는 총무에 선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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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5·10선거로 수립된 제헌국회에서 이승만이 국회의장으로 선출될 때에도 재석 198명 중에서 188표를 얻어 당선된 점이라던가 대통령선거에서도 180표를 얻어 압도적으로 당선된 것들은 당시의 정치인들이 이승만이 대통령이 되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할 정도로 이승만의 집권은 이변이 아니라 정상적인 절차였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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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7.11.


[ ...... 유엔의 南北韓同時選擧를 통한 統一案이 발표되자

       共產黨은 선거에 승산이 없기 때문에 소련과 국내의 共產勢力이 맹렬하게 반대 ........   ]

 

美軍政의 韓國政治指導者에 對한 政策硏究 (1945〜1948)

李 仁 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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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美國務省은 10월 9일, 점령군의 철수문제는 統韓 獨立政府樹立問題 解決의 필수적 부분으로 알고 있으며 소련제의에 대해 유엔총회의 주의를 환기시켰다고 回信하였다.139) 그리고 유엔의 미국대표는 10월 17일, 臨時委員團의 감시아래 남북한에서 선거를 실시하여 人口比例로 대표를 선출하고 국회와 정부를 수립해서 이 정부로 하여금 防衛軍을 조직하게 한 다음 占領軍을 철수하게 한다는 決議案을 제출하였으며 총회는 11월 14일 이 안을 採擇하였다.140) 그동안 소련에 대한 美側의 宥和政策으로 인해 북한을 共產化하고 남한마저 赤化하려는 소련의 팽창정책에 守勢만을 지키던 미국은 이제야 유엔을 통한 外交로 信託統治가 아닌 民族自決主義 原則에 입각한 한국의 통일독립을 추진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북한에 16萬의 赤軍을 투입하여 이미 共產政權을 수립해 놓고 있는 소련이 비록 유엔의 決議라 하여도 共產化를 막게 할 自由選擧를 북한에서 거부할것은 國際間 權力政治를 아는 사람이면 추측이 가능하였고, 그것은 통일을 갈망하는 한국민의 마음을 어둡게 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유엔의 南北韓同時選擧를 통한 統一案이 발표되자 共產黨은 선거에 승산이 없기 때문에 소련과 국내의 共產勢力이 맹렬하게 반대한 것은 물론이다. 그동안 信託統治를 반대하며 즉시 독립을 주장해 온 민족진영에서는 이 유엔의 결의를 크게 환영하였으나 韓國獨立黨을 중심으로 하는 各 政黨協議會는 美蘇兩軍의 철퇴를 요구하며 南北政黨의 대표회의를 구성하여 統一政府를 세우라고 주장하였다.141) 이와 같이 金九를 추종하는 韓國獨立黨系列에서는 계속해서 선거를 기피하며 共產黨의 주장과 같이 兩軍撤收와
南北韓政黨代表들의 卓上會議로 정부를 수립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11월 21일, 民族陣營 70개단체들이 이러한 주장은 共產黨의 대변자로 볼 수밖에 없다고 규탄하자 金九는 이 주장을 보류하게 하였다.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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歸國後 李承晚과 政治路線을 같이 하면서도 그의 追從者들과 獨自的 路線을 취하기도 하였던 金九는 유엔選擧案을 반대하는 주장이 규탄을 받게되자 12월 1일 대체로 유엔의 안을 찬성하면서 이승만의 선거를 통한 政府樹立案을 支持하는 談話를 발표하였다.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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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李承晩 1,024표 .... △朴憲永 62표, △金日成 33표 .........    ]

 

동아일보 1948년 06월 27일   

조선여론협회, 초대대통령 선출 가두여론조사

 

조선 여론협회에서는 23일 서울시내 5개소에서 초대 대통령은 누구를 원하오하는 설문으로 통행인 1천5백명의 여론을 조사한 바 다음과 같은 결과를 얻었다.


△李承晩 1,024표, △金九 568표, △徐載弼 118표, △金奎植 89표, △朴憲永 62표, △金日成 33표, △許憲 30표, △李靑天 26표, △曺奉岩 18표, △申翼熙 12표, △이외 23명 45표, △무효 475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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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주의자들은 그들의 상전인 소련의 지령으로 선거를 반대하고 있다. 그들은 절대적인 공산당의 형식과 지배 이외에는 여하한 형식의 비밀투표에 의한 선거를 원하지 않는다. 왜그러냐 하면 그들은 선거를 행하면 자기의 국가를 공산주의의 일위성국가로 팔아 먹고자 하는 조선인의 수효가 극소수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판명될 것을 잘 알고 있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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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중대한 사실은 공산당과 밑走狗들의 선거에 대한 모든 선전 및 위반 또는 선거를 배척하고 반대하는 자들의 온갖 수단에도 불구하고  남조선내의 전유권자의 90% 이상이 등록을 하였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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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갑제  날 짜 2003년 7월 26일


이승만: "인간은 콜레라와 타협할 수 없다"

 


金正日에게  체제보장을 해주고 돈을 주면 핵무기를 포기할 것이라고 믿는 바보 겸 위선자들에게 李承晩 건국 대통령이 미리 남긴 말이 있다.

<공산주의는 콜레라와 같다. 인간은 콜레라와 타협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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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이 유일한 독립 운동가임!!!!

 

글쓴이 우익만이 살길 날 짜 2004/04/29

 

 

독립운동가들중에,,,,
좌익도 있었고 무정부주의자도 있었다!
그들은 결국 이나라를 더 어렵게 했다!

이승만만,,,,독립운동가라고 할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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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시? 이승만이 나라를 망쳐?


글쓴이 대중이

 


이승만 시대에 들끌던 빨갱이 때려잡은 공이 얼만데 나라를 망쳐?

그분 없었으면, 박정희 시대도 들어가기 전에
이나라는 빨갱이화 했다..


정말 고약한 심뽀 아님,
역사관이 0 점 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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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03


제목 : 미군부터 죽이고 전진해라 !!!

미군부터 죽이고 전진해라 !!!

 

6.25 전쟁후 한국에는 - 정말 피폐하고, 자원도 없고, 과부, 고아들이 득시글대던 - 미군기지가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지구의 역사상 유례없게 초강대국가 미국이 자국군 일개 사단을 바로 적들의 코앞에 trip wire 란 명목으로 늘 주둔하게 만들어서, 한국인을 죽이려거든 우리 미군부터 죽이고 전진해라 하는 희안하고도 기막힌 정책이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미국인들은 대체 한국인의 무엇을 보았기에, 우리부터 죽이고 나서 한국인을 죽여라 라는 정책, 또는 한국인에게 손대면 너희들 먼저 요절날 것이다 는 정책 소위 인계철선 이라는 정책을 만들어 낼 수 있었던 것일까요 ?


여러분들이 여러분의 자녀를 외국, 아주 먼 나라, 예를 들면, 지금의 콩고 같은데에다 적들이 총부리를 겨누는 바로 코앞에 그대들의 자녀를 배치하고 우리 자녀부터 죽인 후 콩고 흑인들을 죽여라 하는 그런 일을 감히 하실 수 있을 것 같습니까 ? 천만에 이지요. 아마 절대로 그런 요상한 일은 절대로 발생하지 않을 듯 합니다.


그럼 한국인들은 대체 미국인들에게 어떻게 아름답게 보였기에, 세계 초강대국인 미국국민들은 키작고 색깔도 노란 가난하기 그지없던 한국인들에게서 무엇을 보았기에 한국인의 생명을 그처럼 고귀하게 취급하고 보존하고자 하는 정책을 시행하게 된 것입니까 ?

 

한국전을 치룬 후 맥아더 원수는 미국 의회로 돌아가 고귀한 연설을 하였습니다. 그 가운데, 한국국민들에 대한 극찬이 들어있습니다.

"전세계 국가들 중에서 한국만이 지금까지 모든 위험을 무릅쓰고 공산주의에 대항해 싸워온 유일한 나라입니다. 한국국민들이 보여준 그 대단한 용기와 불굴의 의지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노예상태를 택하느니 차라리 죽음을 무릅쓰고자 헸습니다. "


북진통일을 요구하던 고집스런 이승만대통령에게 하루 빨리 휴전에 동의하게 만들기 위해서 한국을 찾았던 미국무부 월터 S. 로버트슨 차관보는 그의 정부에다 이렇게 보고합니다.

"이 대통령은 전 국민을 분발시켜 공산주의와 싸우도록 만들었습니다.
미국을 포함해서 세계 어느 나라의 지도자도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런 정신과 의지는 보존해야 하며, 파괴해서는 안됩니다.
더구나 우리가 장비를 제공한 그의 군대는 아시아에서 공산주의에 대항해서 싸울 수 있는 가장 크고 강력한 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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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매일 노XX 정권과 X대중의 반역죄를 보며 낭패감과 울분과 좌절에 젖는 여러분과 저의 피속에 13척의 배로, 백여척의 왜적배를 몰사시킨 이순신 장군의 분노가 같이 흐르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피속에 전세계에 유례없이 공산당들에 강인하게 대항해 죽기까지 싸운, 죽음을 두려워않고 치열하게 싸운 한국인의 피가 같이 흐르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부패와 타락에 찌들어 살 핏줄들이 아니고, 여러분의 삶은 보다 고상한 이상과 목표를 위하여 진행되고 설계된 한반도 역사의 자랑스러운 후손들, 작품들입니다.
여러분들의 피 속에 맥아더 원수가 극찬한, 미국인들이 감동한, 고귀함, 정의에의 용기, 불굴의 의지가 담겨 있단 말입니다.


여러분, 깨어 나십시오.
잠자는 당신들의 영혼을 깨우십시오.
정의를 향하여, 고상함을 위하여, 조국을 위하여,
총이든 칼이든 부여잡고,
기울어가는 이 나라, 죽어가는 이 나라의 운명을 살리기 위하여 그만 잠에서 깨어 일어나라고 명하십시오.


우리들은 자랑스런 대한민국인입니다.
우리들은 불의에 굴하지 않을 것이며,
우리들은 연방제통일주의자들의 농간에 속지 않을 것이며
우리들은 한총연,전교조, 범민련의 농간에도 속지 않을 것이며
우리들은 공산주의자들을 기필코 한반도에서 쓸어낼 것입니다.


미국인들의 한국인에 대한 신뢰가 아직 남아 있을 적에
저 강대국가의 도움을 빌릴 수 있을 적에
얼른 벌떡 일어나 조국을 구하기 위해 분연히 싸웁시다.
싸우지 않고는 우리에게 죽음만이 남을 터이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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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承晩 대통령은 처칠과 맞먹는 지도자

 

사회 月刊朝鮮(월간조선)이 인터넷으로 20세기 20명의 대표적 한국인을 제시하고 여론 조사를 실시한 결과, 1등은 朴正熙 대통령으로 약 52%, 2위는 金九(김구) 선생 16.6%, 3위는 金大中(김대중) 대통령 10.7% 등입니다. 李承晩 대통령은 1%에도 미달합니다. 건국과 독립 운동의 상징인 이승만 대통령이 20세기 전반부의 대표적 인물이 되어야 할텐데도 일반의 평가는 전혀 다르게 나옵니다. 여기에는 교육의 영향이 크다고 봅니다만….


南悳祐 李承晩 대통령에 대한 일반의 낮은 평가가 대단히 의외인데, 해방 이후 좌파적 이데올로기가 강한 시대를 지나면서 근 20년 동안 그를 독재자로 매도했기 때문에 국민들이 그런 의식을 가지게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하지만 李대통령이 아니었더라면 남한만이라도 자유 민주체제로 이끌지 못했을거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쓴 「국제화 시대와 한국경제」라는 책에 李박사에 관한 이야기들이 담겨 있습니다.


역사를 공부한 사람도 아닌데, 내가 왜 그런 걸 썼냐 하면, 李대통령 고문을 지낸 올리버를 하와이에서 만나서 나도 몰랐던 것을 많이 배웠습니다. 李박사는 정말 자주적이었습니다.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러시아는 한국을 赤化하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으니까 이것을 막지 못하면 미국이 나중에 크게 후회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아주 자주적이고 앞을 내다보고, 국제 정치를 올바르게 판단한 것이지요. 올리버는 李대통령이 처칠이나 루스벨트에 맞먹는 지도자라고 썼어요. 그런데 그런 전체적인 이야기를 우리 젊은이들이 잘 몰라요. 그래서 우리 젊은 사람들에게 그것을 읽히기 위해서 내가 요약을 좀 했어요.


姜英勳 李대통령이 민족국가 건설을 위해 反共(반공)주의자로 사니까 공산주의자들이 비판하고, 매도한 것입니다. 민족을 반역했다든가, 친일파라고 욕했습니다. 1956년인가, 내가 육군 본부에 근무할 때(관리부장 중장)인데 어느날 갑자기 李 대통령에게 불려갔어요. 중동과 남미 지역 특사로 가라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미국으로 공부하러 가느라 특사로 가지는 못했지만 그때 그분이 하신 말씀은 이랬습니다.


『우선 중동으로 가는 길에 오키나와에 들러 독립정신을 고취해 줘. 옛날에는 오키나와가 우리나라와 제일 가까운 나라인데, 다시 일본에 붙어서 살겠다고 하니 정신들이 어떻게 된 것인가. 중동에 가서는 공산주의가 어떤 것인지를 철저히 가르쳐 주어야 해. 우리 경험을 통해서 말이야. 내가 군인들을 특사를 보내는 것은 공산당하고 직접 싸워보았기 때문이야. 우리가 전쟁을 통해서 얻은 귀중한 경험을 세계 평화를 위해 써야 해. 공산주의자들의 음모가 어떤 것인가를 알려주라고…』


李대통령은 한반도 안에 가두어두기 어려운 분이에요.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언제나 세계를 생각하고 바라보면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를 생각한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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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조선 20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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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박사가 후년의 많은 과오에도 불구하고
국가의 토대를 실용주의(자유시장경제+친미) 쪽으로 확실히 잡아 놓은 것은 건국의 아버지라고 불리워도 될 충분한 이유가 될 수 있다고 봅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수많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일본과의 수교를 재개하고 월남파병을 통해 미국과의 굳건한 혈맹관계를 재확인하고, 미국의 핵우산 안보보장 아래서 북한과 휴전 대치 상태의 국가적 핸디캡을 현명히 극복하며 경제개발의 초석을 굳건히 놓아 오늘의 한국이 있게 한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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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필재 기자가 작성한 것임.

 

[건국의 아버지 이승만, 근대화의 기수 박정희]


-이승만, 대한민국의 기틀 확립, 팍스 코리아의 꿈 키워-

 


해방이후 극심한 혼란 속에서 한국사에 있어 최초의 공화제 민주국가를 세운 이승만 대통령. 그는 공산주의와 신탁통치에 대한 반대를 기치로 대한민국 단독정부를 수립해 오늘날 대한민국의 큰 틀을 확립했다. 그는 제헌국회 의장으로서 헌법제정을 주도하고 헌법에 따라 대한민국 대통령으로 당선된 다음 1948년 7월 24일 초대대통령으로 취임했다. 이 대통령은 이날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선포 할 수 있었지만 일부러 해방 기념일인 8월 15일까지 기다렸다가 ‘대한민국정부수립식’ 행사를 치렀다.

 

세계史 유례없는 고도성장기틀 마련


이렇게 시작된 대한민국은 1948년 이후 세계 역사상 유례가 없는 고도성장을 달성했다. 이 대통령이 추구했던 국가 전략은 부국강병과 영세자유(永世自由)로 요약할 수 있다. 특히 그는 한국전쟁을 전후해 혼란을 수습하고 치안을 확립, 경제성장의 기초를 만들었다. 또한 미국과의 끈질긴 협상을 통해 육성한 60만 대군은 경제가 안정될 수 있는 또 다른 여건을 조성했다. 이 과정에서 청년들에게 부여된 병역의무는 한국청소년들의 의식수준을 향상시켰고 급속하게 동질화시키는 효과를 가져왔다.

 

이승만 대통령


이 대통령은 상공업 장려와 농지개혁 등 시장경제체제를 도입했으며 의무교육제도입 등 근대적 교육제도의 완비를 통해 교육적 기적을 이뤄냈다. 특히 이 대통령의 혁명적 교육개혁결과 해방직후 78%였던 문맹률은 1959년에는 10%로 급감됐으며 대학생의 수는 12배나 증가해 고도성장의 기초가 됐다. 휴전직후 엄청난 재정적 압박을 타개하기 위한 노력으로 초등학교교사들의 봉급을 삭감하는 안건을 이 대통령이 강력하게 제지한 사례에서 볼 수 있듯 교육에 대한 이 대통령의 열정은 탁월했다.


한편 이 대통령은 농지개혁을 통해 소작농을 자영농으로 전환시키면서 농민들의 의욕적 영농을 가능케 했으며 한국사회의 평등화를 위해 공헌했다. 이밖에도 그는 재임기간동안 일민주의(一民主義), 양반제 종식, 여권신장 등 평화 주의적 사회개혁을 이뤄냈고 한글과 기독교 장려 등을 통해 문화적 개혁도 달성했다.

 

美 반대 설득,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이승만은 철저한 반공 주의자였으며, 동시에 지미(知美)주의자였다. 그는 해양국가인 미국을 대한민국의 생존을 위해 한국민이 의존해야만 하는 유일한 나라라고 여겼다. 이승만 대통령은 건국초기부터 한미상호방위조약의 체결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이러한 그의 주장은 물론 공산주의의 위협과 일본의 팽창주의에 대한 사전봉쇄와 신속한 대응이 한국의 생존에 필수적이라는 현실적인 판단에 근거하고 있었다.


이승만의 거듭되는 요구에도 불구하고 아이젠하워 대통령, 덜레스 국무장관, 그리고 콜린스 육군참모총장 등은 모두 방위조약의 체결에 반대했다. 그러나 이승만의 반공포로 석방이라는 특단의 조처는 방위조약의 신속한 체결을 재촉하기 위한 최후의 승부수였다. 비록 이승만의 일방적인 행동은 모험적인 것이었으나, 휴전의 성립을 위해 이승만의 협조가 절실했던 미국은 이승만에 대한 ‘경고’이외의 다른 제재방법을 찾을 수가 없었다. 이승만의 ‘벼랑끝’ 외교 전략의 궁극적인 승리이기도 했다.


이승만은 미국으로부터 방위조약의 신속한 비준약속을 받아냈고, 미국도 휴전을 방해하지 않겠다는 이승만의 약속을 얻어냈다. 그 결과 1953년 8월 8일 변영태 외무장관과 덜레스 국무장관은 ‘대한민국과 미합중국간의 상호방위조약’에 가조인했다. 이 조약을 매개로 하여 미국은 남한에 대한 공산주의 세력이 침략위협을 봉쇄하는 동시에 이승만의 북진통일의지도 단념시키는 ‘이중 봉쇄’의 효과를 기대했다. 반면 이승만은 공산주의의 위협과 공격을 사전에 봉쇄하는 동시에 그가 심각하게 우려해온 일본의 팽창주의적 야욕도 저지시키는 또 다른 ‘이중 봉쇄’의 효과를 발휘하는 법적 장치를 마련함으로서 대한민국의 안보가 확실하게 보장되는 튼튼한 울타리를 마련했다.

 

한편 일본의 팽창과 관련해 이승만 대통령은 6.25 동란 중 유엔군 사령부가 군사상의 목적으로 선포한 소위 ‘맥아더라인’이 휴전과 함께 철폐될 것을 예상하고 재빨리 공산세력이 침투방지와 일본어선의 불법침입을 방지한다는 구실로 ‘평화선’을 선포해 일본을 당황케 만들었다. ‘평화선 선포’에서 그는 “日人들이 맥아더 선을 넘어 우리 해안까지 침입하여 우리의 해중자원(海中資源)을 불법으로 빼앗아 가고 있으므로 우리는 참을 수 없어 공평히 그어진 해상획정선을 설정해 우리의 어권(漁權)을 보호 한다”고 말해 대일 강경론을 표면화했다. 실제로 이 ‘평화선 선포’는 이후 박정희 대통령이 한일회담을 추진하는데 있어 한국 측을 유리한 입장에 서게 만들어준 직접적인 계기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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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갑제 날 짜 2003년 4월 19일 토요일


최고 지성인이 최고 권력자가 된 축복-이승만

 

 

1948년 대한민국이 건국될 당시 한국인들 중 知的 수준이 가장 높았던 인물은 누구일까. 李承晩일 것이다. 지능, 동서양의 학문에 대한 종합적 능력, 세계사의 흐름을 보는 시각, 미국 朝野의 인사에 대한 영향력, 특히 공산주의에 대한 통찰력, 언어구사 능력, 판단력 등 모든 인문, 사회과학 분야의 능력을 종합했을 때 2위와는 상당한 차이로 李承晩이 1위를 차지했을 것이다. 한국 최초의 박사, 수많은 漢詩에서 보듯이 동양학문에 대한 깊은 지식, 조지 워싱턴 대학 학사-하버드 석사-프린세튼 박사가 말해주는 영어 학문의 조예, 여기에다가 찬란한 독립투쟁 이력.

 

세계 역사상 그 나라의 최고 지성인, 최고 지능인이 정권을 잡은 예는 흔치 않다. 나폴레옹 정도일까. 대한민국의 축복은 그런 최고 지성인이 정권을 잡아 낙후한 국가와 국민들을 이끌어가면서, 가르쳐가면서 발전의 토대를 만들었다는 사실이다. 평균적인 국민들보다 월등한 지도자를 만난 행운을 우리는 지금도 보고 있다. 농지개혁, 국군 양성, 한미동맹 구축, 교육투자, 원자력 연구 시작 등 이승만 대통령의 어려운 결단들이 없었더라면 오늘의 대한민국은 없다. 보통 국민들보다 수십년을 멀리 내다보는 그를 올리버 박사(대통령 고문)는 "20세기의 대표적인 위인"이라고 말했다.

 

박정희도 평균적인 한국인보다는 훨씬 앞선 지성과 추진력과 국제감각을 가졌던 인물이다.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세 대통령도 그런 일류 인간이었던가. 어떤 점에선 그렇다. 김영삼은 빠른 정치감각과 행동력에서, 김대중은 술수에서, 노무현은 선동성에서 월등한 재능의 소유자이다. 그러나 종합적인 지능에서도 이승만, 박정희처럼 정상급이었을까.


아니다. 확실히 아니다. 이 세 사람의 종합적인 知的 능력과 판단력은 국민 평균 수준일 것이다. 이는 선거를 통해서 지도자를 선택하는 민주정치에선 불가피하다.


인천 갑문의 원리를 보면 알 수 있다. 배의 높이는 水位와 같다. 수위보다 높은 배는 날아다니는 비행기가 아니면 불가능하다. 국민의 평균 수준을 수위에 비교한다면 지도자는 그 물위에 떠 있는 배이다. 국민의 평균적 수준이 水位처럼 높아져야 배의 높이도, 즉 지도자의 수준도 높아진다. 국민들의 평균적 수준이 높아지려면 시행착오와 교육이 필요하다. 보통 인간은 수많은 실수를 통해서 현명해진다. 그런 과정을 거치지 않고 현명해지는 사람은 드물다.


민주주의는 일부 엘리트에 의해서 지도자가 뽑히는 제도가 아니라 평균적인 수준의 사람이 지도자를 뽑기 때문에 현명한 사람, 정직한 사람, 특출한 사람이 지도자가 되기란 매우 어렵다.

우리는 대통령을 원망하기 전에 우리의 수준을 탓하고 공부를 더해야 한다는 이야기이다. 우리는 앞으로도 우리의 평균 수준과 같은 대통령만을 뽑게 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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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갑제 날 짜 2001년 7월 4일 수요일


이승만과 김대중, 그 숙명의 대치관계

 

 

1948년 7월24일 74세의 李承晩 대통령은 중앙청 광장 연단 위에 올라가 초대 대통령 취임 선서를 한 뒤 연설을 시작했다.

"여러번 죽었던 이 몸이 하나님 은혜와 동포들의 애호로 지금까지 살아 있다가 오늘에 이와 같이 영광스러운 추대를 받은 나로서는 일변 감격한 마음과 일변 감당키 어려운 책임을 지고 두려운 생각을 금하기 어렵습니다."

李박사가 연설의 첫 문장을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으로 시작한 것은 이해 8월15일에 있었던 정부수립 기념축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승만 박사를 이해하는 데 그가 독실한 프로테스탄트였다는 점을 빠뜨려서는 안된다는 이야기이다.


대통령 취임 연설에서 이승만은 북한의 김일성을 향하여 이렇게 말했다.

"이북 동포중 공산주의자들에게 권고하노니 우리 조국을 남의 나라에 부속하자는 불충한 사상을 가지고 공산당을 빙자하여 국권을 파괴하려는 자들은 우리 全민족이 원수로 대우하지 않을 수 없나니 남의 선동을 받아 제 나라를 결단내고 남의 도움을 받으려는 반역의 행동을 버리고..."


그는 김일성 집단을, 스탈린의 소련에 종속되어 조국을 배신한 사대매국노로 단정하고 있는 것이다. 김정일은 지금 가짜 민족주의를 앞세워 남한에서 외세를 몰아내고 민족의 자주성을 회복한다는 통일전략을 구사하려 하고 있다. 父子가 합쳐서 600만의 동족을 살육함으로써 민족반역자가 되었는데도 민족주의자를 자처하고 또 이 악마적 父子를 맹종하는 자들이 대한민국에도 수두룩한 상황에서 다시 읽어본 이승만의 연설은 김정일의 가면을 벗길 수 있는 명쾌한 논리를 제공한다.


이승만이 공산주의의 악마성을 정확하게 볼 수 있었던 비결은 그가 진정한 크리스찬이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크리스찬의 사랑이 공산주의자의 증오를 간파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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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0.6.28


[ ..... 시민들에게 동참하라고 악을 쓰고 있다. ........

  ..... 시민들은 정신 나간 사람같이 멍하니 서서 이 광경을 바라봤다. ........     ]

 

2008.06.01  신동아  통권 585호  
 
 
[6·25 58주년 특집]


사학자 이현희 교수가 겪은 전란 속 서울

눈 부릅뜬 시체더미, 남녀 포로 나체 연행… 30년보다 긴 3개월

 

이현희 성신여대 명예교수·한국근현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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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대문에 나가보았다. 로터리에는 군가를 부르며 트럭을 몰고 인공기를 휘둘러대는 인민군이 신바람 난 무당처럼 소리를 내질러대면서 시민들에게 동참하라고 악을 쓰고 있다. 어린 인민군의 얼굴에서는 평화로움마저 느껴진다. 시민들은 정신 나간 사람같이 멍하니 서서 이 광경을 바라봤다.


 차에 올라탄 한성중학교 학생 30여 명이 “김일성 장군 만세!”를 외치면서 동조했다.


담벼락에는 ‘김일성 장군 만세, 영용한 인민해방군 만세!’ 라는 벽보가 어지럽게 붙어 있다. 아직 풀이 마르지도 않았다. 누구의 소행일까.


인민군 병사들은 대부분 10대 소년들이고 온몸에 풀잎, 참나무를 꺾어 위장한 채 시가지를 누빈다. 인민군 7개 사단과 탱크부대가 서울을 빼앗았다고 한다.

 

유엔 안보리가 북의 수중에 들어간 한국을 위해 무력사용을 여러 나라에 요청해 허락을 받았다고 한다. 유엔이 우리나라를 승인했기 때문이다. 미국 등 16개국 친구의 나라가 한국을 도우러 온다고 한다. 감사한다. 큰길가에 국군의 시체가 덩그러니 누워 있으나 누가 나서서 치울 생각도 않는다. 썩는 냄새가 코를 찌른다. 살벌하다. 이게 전쟁인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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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hindonga.donga.com/docs/magazine/shin/2008/06/10/200806100500001/200806100500001_1.html

 

 

 1950.7.


북한군 점령 하의 서울 상황

 

7월 8일 서울을 떠난 한 경찰관이 오늘 이 곳에 도착하였다. 다음은 그의 진술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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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이 거리를 오가고 있지만 도시는 거의 죽어 있고, 간간히 청년단만이 공산당 시위에 참여하고 있다. 화신과 미쯔코시 등 두 개의 백화점과 채소가게를 제외하고 모든 상점은 문을 닫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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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시민들의 사기는 높다. 그들은 미국의 원조로 결국 해방될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다. 그들은 트루만의 6월 28일 성명서에 대해 알고 있으며, 미군의 북한 폭격 사실에 매우 고무되어 있다. 용산이나 서울 안에 밀집해 있는 적에 대해 미 공군이 폭격을 해 주기를 희망하고 있다.


무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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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대한민국사 제18권   >   1950년   >   북한군 점령 하의 서울 상황
제목 북한군 점령 하의 서울 상황 
연월일 1950년 7월 8일 
출전 미 국무부 한국 국내 상황관련 문서 Ⅴ ; 한국전쟁 자료총서 43, 541~542쪽 

 

 


2004/04/13


기도로 지킨 낙동강전선, 기도로 이루어낼 통일한국

 

해방직후 1945년 11월 서울 정동교회에서 개최된 환영예배에 참석한 김규식, 김구, 이승만, 아놀드(좌로부터)


“제 늙은 목숨 조국통일의 제단에 바치겠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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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대통령의 기도 뒤에는 프란체스카 여사와 오스트리아 빈의 그의 어머니 언니 베티까지 전쟁이후 근심하며 밤을 새워 금식하며 한국의 자유와 평화를 위해서 기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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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대통령은 매일밤 우리 민족이 통일을 이룩할 수 있는 용기와 힘을 갖게 해주시고 이 민족을 올바로 이끌어갈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를 하나님께 기도하며 간구했다고 전한다.

“일본의 압제에서 우리민족을 해방시켜주신 하나님 아버지 저의 늙은 목숨을 조국통일의 제단에 바치겠나이다. 불쌍한 우리민족을 굽어살피사 통일과 재회의 기쁨을 안겨주시고 영세자유와 평강복락을 누릴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저의 보잘 것 없는 영혼을 조국의 통일 제단에 바칠테니 원하실 때에 아버지 곁으로 거두어 주옵소서”(중앙일보 1984/3/1, 6·25와 이승만 대통령중)라는 기도는 당시 대통령이 전쟁속에서도 남북의 통일을 생각하며 시대를 초월해 하나님께 간구하고 있음을 잘 나타내고 있다. 전란중 대통령이 했던 많은 일중에 가장 간절히 했던 일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었다.

 

오진석기자 2002-07-22

 

 


       1950.10.1.


[ .... ‘와아, 38선이다. 저걸 넘어 김일성의 목을 받으러 가자’.......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일반 주민의 환영이 대단했다”고 .......  ]

 


[ ...... 우리를 보자마자 20, 30명이 모여들어 ‘국방군 만세’를 목이 터져라 외쳤어요. ........

 ...... 갑자기 가마니를 가져오더니 그 안의 사과를 길에 좍 깔아놓더군요. ........     ]

 


“와, 38선… 김일성 목 받으러 가자”

 


《 1950년 10월 1일 국군은 38선 이북으로 진격했다. 9·28 서울수복 후 미국 정부와 유엔이 전쟁 확대에 부정적인 태도를 보이자 이승만 대통령은 국군 단독의 38선 돌파 명령을 내렸다. 6·25전쟁 발발 후 계속 밀리기만 했던 국군이 ‘남한 사수’에서 ‘북진 통일’로 목표를 전환한 것이다. 10월 1일 국군의 날은 여기서 유래한다. 》

 

■  당시 박격포 탄약수로 강원도 양양서 북진

 

당시 보병 3사단 23연대 제1중화기중대 박격포 소대 탄약수로 강원 양양에서 최초로 38선을 넘었던 박한진 예비역 육군 대령(82세·당시 이등병)으로부터 1일 60년 전 북진 과정을 들었다.


“9월 18일 포항을 탈환한 뒤 승승장구하며 9월 30일 오후 강원 양양에 다다랐습니다. 38선이 보였어요. 병사들이 ‘와아, 38선이다. 저걸 넘어 김일성의 목을 받으러 가자’라고 환호하는데 갑자기 정지하라는 겁니다. 북진을 놓고 유엔군과 이견이 있다는 건 전혀 몰랐죠. 하루 쉬고 기력을 충전한 뒤 진격하려는 줄 알았습니다.”
 
 

1950년 10월 1일 국군은 단독으로 38선 이북으로 북진했다. 동부전선을 관할한 육군 제1군단장 김백일 장군(오른쪽)이 38선 돌파 직후 기념비를 세우고 있다. 기념비에는 ‘아아 感激(감격)의 三八線(38선) 突破(돌파)’라고 적혀 있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사실 잇단 승전으로 사기는 충천했지만 보름 동안 매일 70∼80리 행군을 하며 북상한 장병들의 몸 상태는 말이 아니었다고 한다.

“물자 보급이 거의 안됐습니다. 군화도 고무신 밑창에 헝겊을 씌운 형태였어요. 그나마 고무 두께는 1cm도 되지 않았죠. 끔찍할 정도로 발에 물집이 생겨 쩔뚝이면서 행군을 했습니다.”

 

그러나 고구마밭에서 숙영을 마친 10월 1일 오전 진격명령이 떨어지자 장병들은 서로를 얼싸 안았다. “철모와 군복에 나뭇가지와 풀을 꽂고 신이 나서 38선을 넘었습니다.” 이 부대가 38선을 넘은 공식 시간은 오전 11시 45분으로 전사(戰史)에 기록돼 있다.


38선을 넘은 뒤 가장 처음 마주친 사람은 허름한 주막에 있던 마을주민이었다. “우리를 보자마자 20, 30명이 모여들어 ‘국방군 만세’를 목이 터져라 외쳤어요. 그때의 감격은 말할 수 없습니다. 발 아픈 건 까맣게 잊게 되더군요.”
 

선물은 또 있었다. “이 사람들이 갑자기 가마니를 가져오더니 그 안의 사과를 길에 좍 깔아놓더군요. 배 속으로 들어가는 사과가 어찌나 시원하고 맛있던지 그 맛을 잊을 수가 없어요. 보급이 안돼 전날 아무것도 먹지를 못했거든요. 그렇게 북진의 첫날이 시작됐습니다.”


38선 이북의 북한군은 무력했다. 전쟁 초반 막강했던 인민군이 아니었다. “싸울 의지라는 게 거의 없었고 (전투라는 게) 패잔병 잔당을 소탕하는 수준이었죠.”

 몇 차례 공방전을 치르며 그는 10월 9일 원산 시가지에 도착했다.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일반 주민의 환영이 대단했다”고 그는 회고했다.

하지만 그는 이날 가장 가슴 아픈 경험을 했다.

“아침에 시가지에 들어가니 미루나무에 70여 명이 죽은 채 매달려 있었습니다. 인민군이 퇴각하며 교도소에서 끌어내 죽인 것 같았어요. 시신을 살펴보니 몸이 채 굳지도 않았어요. 몇 시간만 더 일찍 들어갔으면 이들을 구할 수도 있었을 텐데 하는 자괴감이 전쟁 내내 저를 괴롭혔어요. 지금도 그때 기억이 생생합니다.”


11월 말에는 함북 길주를 지나 혜산진까지 진격했다. 개마고원에도 올라갔다. “두만강이 코앞에 있었습니다. 통일이 왔구나 싶어 가슴이 설레 춥지도 않았어요.”


그러나 12월 1일 철수명령이 떨어졌다. “영문도 모르고 남하하다가 함북 경성에 도착해서야 중공군에 밀려서 철수하게 됐다는 걸 알았어요. ‘부산에서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하는 생각에 막막해지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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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ews.donga.com/Society/3/03/20101002/31554739/1

국군의 날 유래된 1950년 10월 1일 38선 첫 돌파… 박한진 예비역 대령의 ‘그날’ 증언
 
 2010-10-02

 

 


1950.10.29.


이대통령 평양 방문


감개 더욱 무량히....39년동안 그리든 곳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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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 시청에 이르는 연도에는 피난갔다가 돌아오는 짐을 진 주민들도 포함한 시민 다수가 손에 태극리를 휘날리며 이날의 세기적인 대통령 방문을 만세소리도 우렁차게 환영하였으며 거리에는 ‘대한민국 국부 이대통령 만세’ 등 대통령을 한영하는 프랑카드와 아치 문이 처처에 보였다.


오전 10시 대통령 각하께서는 과거 5년간 김일성 도당이 선량한 민중을 억압하고 쏘련에의 예속을 위하여 온갖 혹독한 짓을 다해 오던 살인 방화의 마전이었든 지금은 평양시의 새살림집이 된 평양 시청에 무사히 도착하시었다.

 

39년만의 평양...환호성 천지를 진동

 

평양시에 무사히 역사적인 제일보를 드딘 이대통령은 평양시청에서 박현숙 권옥희 양씨의 인사를 받은 다음 평양시 관리위원회 위원장 임정득씨를 비롯하야 부위원장들을 인견하고 간단히 시 운영상황을 청취한 뒤에 그들을 치하하면서 앞으로도 성심성의 노력하라는 부탁을 하였다. 그리고 이어 미국 임시민정관 벨파이어 대좌와 힐 중좌도 인견하고 위무한 다음 약 5만여명에 달하는 운집한 시민들의 열광적 환호리에 발코니에 나섰다.

 

“맹세하자 민주 쟁취를”

이대통령 환영대회서 유시


조국이 일제기반으로부터 광복된 지 5년동안 그리고 그리웠던 이대통령을 처음 맞이하는 시민들의 환호성은...(판독불가)....태극기의 바다로 화하였으며 오랫동안 간판을 내걸지 못하였든 조만식 선생이 영도한 조선민주당을 비롯하야 서북의용대 학생단체들....(판독불가)....

이날 식은 먼저 주악대의 대통령 환영주악.....(판독불가)......대통령을 처음 모시고 애국가를 봉창하는 평양 시민의 제창소리는 온천지를 울릴만큼 웅장하고도...(판독불가)..한복의 대통령은 마이크를 손에 들고 감개무량한 어조로 다음과 같이 약 한시간에 걸쳐 간곡한 인사말씀과 유시를 하시었다.

 


“본인이 39년 만에 다시 한번 대동강을 건너 평양을 찾아보게 되니 감개무량하며 무한히 기쁩니다. 여러분, 그동안 얼마나 고생하시었습니까.


제2차대전후 적국 일본이 패망하자 자유조국이 독립하여 즐거운 신생활을 할 줄 알었드니 세계 정복을 꿈꾸는 쏘련이 하등 정당한 이유도 없이 비법적으로 우리나라를 양단하여 38선이란 운명의 선을 그었습니다. 쏘련은 김일성 공산도당을 시켜 한국의 쏘련 예속화를 위한 충성을 다하도록 교사하는 한편  방화 약탈을 감행하도록 하여 아름다운 우리 향토 국토를 더럽혔습니다.

그동안 2백만 이상의 북한 동포들이 재산과 가족을 떠나 남쪽으로 내려왔으며 우리는 없는 것은 너로 노나 먹으면서 화해롭게 살아왔습니다. 이북에서 피난해온 동포들은 그 동안 대한민국의 헌법을 준수하면서 민중의 선두에 서서 공산당의 비행을 지적하면서 눈부신 활동을 해왔습니다. 여러분의 가족 친척중 많은 사람들이 민주활동을 많이 해왔습니다.


쏘련은 소위 막부(모스크바) 삼상(三相)결정이라 하여 우리나라를 신탁통치하에 두고 자기의 위성국가화 하려고 가진 모략과 술책을 다하여 왔으나, 우리는 죽음을 걸고 한마음 한뜻으로 싸워왔습니다.


좌우합작이니 뭐니 가진 방법을 쓰다못해 실패에 돌아가자 쏘련은 무기를 김일성에게 주어 급기야는 지난 6월25일 38선을 넘어 대한민국에 침범하야  수도 서울을 점령하고 전국을 정복하려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동안 우리는 돈을 가지고 무기를 사려하여도 여러 가지 국제관계상 무비를 충분히 하지 못했습니다. 쏘련이 대한민국의 무비가 약한 것을 보고 침략을 한 것은 어느면 그들의 판단이 옳았다고는 할 수 있으나 그러나 그들은 목전의 침략에 눈이 어두어 대한민국 뒤에 53개국의 자유민주진영이 있음을 몰랐던 것입니다.

 

보시오. 우리의 우방 53개국의 평화애호 국가는 24시간 내에 자유을 위해 총궐기하여 오늘날 우리국군을 도와 용감히 싸우고 있지 않습니까.

쏘련은 필시 한국 같은 조그만 나라를 위하야 전세계가 다 같이 일어날 줄은 몰랐을 것이요, 지금은 머리를 싸매고 앓고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유엔의 지원을 얻어 다시 통일 되었습니다.

이제는 어떠한 나라일지라도 우리를 다시 분단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공산당은 한국 내에서 축출되었으며 앞으로 중공이나 쏘련이 나온다 할지라도 우리는 하등 겁낼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자유와 정의를 위하여 싸울 뿐이오, 우리가 합하면 감히 덤벼들지 못할 것입니다.

 

여러분, 나와 같이 맹세합시다.

자유와 독립과 민주주의를 위해 싸울 것을!

우리 대한민국은 앞으로 국토를 튼튼히 방어하기 위하야 강력한 군대를 보유할 것이며 유엔은 우리를 도와줄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날 세계는 우리 대한사람들이 얼마만큼 훌륭히 잘 일을 해나갈 것인가 많은 기대를 가지고 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루 속히 부흥건설에 노력하지 않으면 아니 됩니다.

 여러분, 이제는 도지사도 중앙에서 임명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 자신의 의사로 선량한 대표를 선출하여 임명할 것입니다. 머지않아 도지사 선거가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여러분에게 가장 긴요한 것은 의식주인데 우리 다 같이 모자라는 것은 노나먹고 서로서로 살아나갑시다. 정부는 하루 속히 교통이 통하는 대로 쌀과 광목을 남에서 가져와 여러분에게 나눌 작정인데 모자랄 경우에는 외국에서 쌀과 광목같은 것이라도 우선 사다가 보내드릴려고 합니다. 정부는 현재 만반준비를 가지고 여러분과 같이 한 살림을 하려고 하는 바 유엔을 비롯한 국제적 지원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시기는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과
맥아더 장군이 우리와 뜻을 같이하고 우리를 지지하고 있으므로 그다지 멀지 않을 것입니다.

현재 무초 대사가 워싱턴에 가서 모든 것을 협의하고 있습니다. 유엔도 만사를 잘 되도록 도와줄 것입니다.

 

여러분, 이제 와서 누가 남쪽사람이니 북쪽사람이니 하거든 우리 대한민국의 앞날을 저해하는 사람으로 지목해두어 규탄하십시오. 그리고 언제든지 본인이 필요하시거든 청해주십시오.

다 같이 의논하야 살아가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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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여러분! 다시 한번 나와 같이 맹서합시다.

통일된 자유조국을 위하야 싸워나갈 것을!“

 

약 한 시간에 긍한 대통령의 간곡한 유시가 끝나자 시민들은 감격의 열루를 흘리면서

“우리 대통령 만세”를 연속 절규하며 대통령의 유시에 보답할 결의를 표명하였다.


이리하야 식은 오전 11시55분 국방부 전훈국파견 군악대가 연주하는 가운데 원만히 끝났는데 자유의 종소리는 자유로운 행복된 금일을 축복하면서 계속하여 울렸다.

 

식 종료후 대통령은 이별을 아까워하는 시민들 속을 지나 열광적 환송속에 “대통령각하 만세” 소리를 뒤에 들으시면서 수행원을 대동하시고 비행기에 탑승하야 일로 서울로 귀환  하오 한시 반 무사히 도착하시었다.

 (조선일보, 1950. 10.31)

 

이처럼 이승만은 평양에 가서도 당장의 민생고 해결과 더불어 ‘도지사 직접선거’를 힘주어 강조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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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이승만史(2) 한미동맹의 탄생 ② 통일의 눈앞에서

인 보길 /뉴데일리 대표, 이승만 포럼 대표

 

 

 

[ ..... 수십만 평양시민과 이북동포들이 열렬히 환영하는 가운데 감격적인 연설을 했었다는 역사적 사실은 왜 전혀 언급하지 않는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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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6.25전면남침당시에도 나이 아직 40이 채 안되었던 김일성이 무려 석달동안이나 서울을 점령하고도 위장된 군용차를 타고 쥐새끼처럼 비밀리에 서울시내 곳곳을 시찰한적은 있으나 (이같은 사실은 박헌영 직계측근으로서 박헌영 월북 이후 남로당지하총책이었던 朴甲東의 회고록뿐만 아니라, 그 어떤 기록에도 김일성이 이미 적화된 서울에서 단 한번도 군중에게 모습을 공개한 적이 있다는 기록이 없다!) 단한번도 감히 환영군중대회를 개최하거나 군중앞에 모습을 드러낸적이 없는 반면,


대한민국의 이승만 대통령은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성공을 기점으로 전세가 역전되기 시작- 국군과유엔군이 마침내 3.8선을 돌파 , 파죽지세로 북진하기 시작하여 한 때나마 평양을 수복하였을 때 , 당시 이미 80을 바라보는 노구를 이끌고 당당히 평양을 방문! 수십만 평양시민과 이북동포들이 열렬히 환영하는 가운데 감격적인 연설을 했었다는 역사적 사실은 왜 전혀 언급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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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신문 김기백, 프레시안에 강력한 공개장
"김일성 장군 환영 대회가 광화문에서 열렸다면…"기사에 7가지문제제기!
 
빅뉴스, pyein2@hanmail.net 
등록일: 2011-05-10

 

 


      1950.10.26.

 

 [.... "야! 압록강이다".......

       1950년 10월 26일 오후 2시 15분이었다 .......

  ..... 병사들은 목이 터져라 "대한민국 만세"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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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10월 24일 맥아더 원수는 다시 "모든 작전 제한선을 없애고 국군과 UN군은 모든 지상부대를 투입해 신속히 한·만 국경선까지 밀고 올라가라"고 지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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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군 6사단 7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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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무제한 북진 명령의 선봉에 선 것은 임부택 대령이 이끈는 국군 6사단 7연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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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24일 김종오 6사단장은 임부대 7연대장에게 "조속한 시일 내에 국경도시 초산을 점령하라"고 명령했다.이때부터 7연대는 인민군에게서 노획한 차량을 타고 초고속으로 진격했다.진격 속도가 너무 빨라 당시 평북(지금은 자강도) 강계 쪽으로 후퇴하던 인민군 부대를 앞지르기도 했다.


초산에서는 오일용(吳日龍)이 이끄는 인민군 8사단이 패잔병으로 부대를 꾸려 일시 저항을 시도했으나 상대가 되지 않았다.


10월 26일 드디어 7연대는 한·만국경지역인 초산군을 점령했다.초산읍에서 압록강까지는 6km였다.임대령은 1대대장 김용배(金龍培) 소령에게 "국경까지 진출하라"고 명령했다.

 

1대대가 30여 분을 더 진격하자 인민군 패잔병들이 고지에서 사격을 가해 왔지만 일거에 제압되었다.그 직후 중토동 마을 고개에 올라선 1대대원들은 수풍댐 때문에 거대한 호수가 된 압록강을 발견했다.

"야! 압록강이다"

병사들이 어울려 고함치는 소리가 무전기를 타고 임부택 대령에게 전달되었다.

 

마침내 압록강

 

잠시 후 1대대 1중대 수색소대가 신도장이라는 마을 앞 강변으로 달려가 태극기를 꽂았다. 이때가 정확히 1950년 10월16일 오후 2시15분이었다.

병사들은 목이 터져라 "대한민국 만세"를 외쳤다.

 

압록 강변에 도달한 7연대 1대대 1중대장은 이대용(李大鎔) 대위였다.압록강변 수색에 나선 이대위는 만주 통천구로 이어진 뗏목다리 위로 인민군이 도주하는 것을 발견하고 57mm 대전차포를 쏴 뗏목다리 를 끊어버렸다.

 

이대용대위는 그 후 준장으로 전역해 베트남 주재 한국 공사가 된다.주월공사시절 한국군과 미군이 월남에서 철수하고 베트남이 공산화되었다(1975년). 이때 이대용 공사는 마지막까지 사이공에 남아있다가 월맹군에 붙잡혀, 감옥살이를 하다 1979년 한국으로 돌아왔다.

 

다음날 7연대 본대가 압록강에 도달했다.그러자 김종오 6사단장이 임대령에게 "압록강물을 수통에 담아 이승만 대통령께 보내라"고 지시했다. 압록강 물을 수통에 떠온 것도 이대용 대위가 이끄는 1 중대였다.이때 누군가 수통에 압록강 물을 채우는 국군 병사의 모습을 촬영했다.

 

그러는 사이 미 10군단 예하 미 해병1사단은 장전호에 접근했고, 미 육군 7사단은 압록강 상류인 혜산진에 도착해 사단에 부여된 작전을 거의 완수해 놓았다.국군 3사단은 함북 길주를 지나 함수-백암-보천보를 거쳐 백두산으로 진격하고 있었다.국군 수도사단은 청진을 장악한 후 나진-무산을 지나 회령-온성을 공격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전선에는 인민군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어쩌다 발견되는 인민군들도 잠시 저항하다 황급히 도주했다.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김일성은 모든 인민군들에게 평북 강계로 모이라는 지시를 내려놓고 있었다.인민군들을 강계를 향해 황급히 모여드는데 국군과 UN군은 강계를 무시하고 국경선으로 진격하는 데만 진력하고 있었다.

 

이때부터 전선에서 중공군 포로가 잡히기 시작했다.하루가 다르게 날씨가 추워지는데 전선 분위기는 전과 다르게 긴장감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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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공군 참전으로 인한 UN군의 패배는 맥아더 원수의 해임으로 이어진다(1951년 4월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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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아더는 종신 원수이기 때문에 전역을 신청하지 않는 한 원수계급을 계속 유지할 수 있다.하지만 명예를 존중하는 그는 해임 즉시 전역을 신청했다.그해 4월19일 그는 미국 상하 양원 합동회의에서 장문의 고별연설을 발표했는데 말미에 이런 대복이 들어 있었다.

 

"전세계 국가 중에서 유일하게 한국이 모든 위험을 무릅쓰고 공산주의에 대항해 싸우고 있다.한국인들이 보여준 대단한 용기와 불굴의 투지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다.그들은 노예가 되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하자고 한다.그들이 내게 던진 마지막 말은'(미국은) 태평양을 포기 하지 말라'였다.(중략)


나는 20세기가 시작하기 직전에 꿈과 희망을 갖고 군에 입대했다. (줄약)그 후로 세상이 여러 번 바뀌면서 그 꿈과 희망은 사라졌지만,어린 시절 즐겨 부르던 군가 후렴만은 분명히 기억하고 있다. '노병은  죽지 않는다.다만 사라질 뿐'이다(Old soldier never die. They just fade away).' 나는 이 군가처럼 나의 군 생활을 마치고 사라지려고 한다.신이 주신 의무를 끝까지 다하려고 한 노병으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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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12.2. 국방부장관, 국민 총궐기에 대해 성명
 
 

친애하는 국군장병과 애국동포 여러분!

 

저 잔인무도한 공산비적의 침략을 받아 민족과 조국이 공전의 고난을 맛보게 된지도 이미 만 5개년을 경과하게 되었습니다.

이 동안 우리가 경험한 바를 회고하여 본다면 저 역도들의 독수에 걸려 국군과 경찰과 청년과 학도와 기타의 비무장 남녀노유까지 합쳐서 100만 가까운 인명이 학살 혹은 납치당하였고, 도시와 농촌의 주요시설이며 주택·가재 등의 파괴·灰爐 당한 손실까지 계상한다면 실로 형언할 수 없는 처절 참절한 현실임에 틀림없습니다.

 

이러한 점에 생각이 미치고 저 폐허를 살필 때마다 본관은 끝없는 통분과 아울러 위로 대통령 각하에 대하여서나 다시 전국 동포에 대하여서나 항상 죄송스러운 느낌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 전무후무한 민족적 수난을 치르게 된 반면 우리는 국군장병과 UN군 장병의 용전감투한 혜택으로 그처럼 발호하던 공산역도배도 거의 무찔러 버리고 만 5년 동안 철의 장막에 가로막혀 격리 당하고 말았던 이북동포들도 다시 찾아 자유로 상봉할 수 있게 되었으며 서로 합심하여 조국통일의 대업도 완수할 수 있게 되었으니 민족국가의 장래를 위하여 감격도 새로운 바 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영명하신 이대통령 각하께서도 張勉 대사 같은 훌륭한 공로자를 국무총리에 등용하는 동시 정부 각 부처의 인사도 쇄신 강화하여 조속한 시일 내에 이북통일의 위대업을 완성하고자 日夜 고심하고 계신 것이 사실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 동안의 수난을 완전히 극복하고 오로지 통일 재건의 민족적 대업만을 달성하고자 우리 국민은 상하 일치하여 싸우며 또 노력하고 있는 것입니다.

 

친애하는 국군장병과 애국동포 여러분!

자유와 평화를 사랑하는 우리 민족의 근본 염원이 이러하였고 우리의 건국실천이 또한 이 범위를 초과하지 않았던 만큼 미국을 위시한 세계 민주우방도 6·25사변 이래 적의 잔인한 침략과 살상에 분격하여 우리와 함께 이 땅에서 피 흘려 싸워준 것이오, 나아가 우리 국가의 통일재건을 조속히 달성시킴으로써 적색제국주의의 세계 제패 야망도 분쇄코자 기도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하여 9월 15일 국군과 UN군이 맥아더장군의 직접 지휘아래 경인지구를 탈환한지 불과 1개월 우리는 평양·원산까지 수복하고 다시 전진하여 서에서는 청천강 건너 압록강으로, 동에서는 함흥과 길주·명천을 지나 청진까지 탈환할 수 있으며 혜산진까지 만주벌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동포여러분!

昨今에 이르러 戰局의 모든 양상과 성질은 급변하게 되었으니 다름 아니오 중국의 외적이 패잔의 김일성 역도배와 결탁하여 越境入寇하였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역사에 대해 이 무리의 침략행위는 저 소위 공산의용군이라는 명목아래 이미 오래 전부터 행동을 개시하였던 것입니다 만은 이제 와서는 20만 넘는 대부대가 UN군과 우리 국군의 정면에서 모든 가면을 벗어부치고 적색침략의 毒牙를 벌리게 되었습니다.

 

동포 여러분!

솔직히 알려드립니다. 이 외적의 무리가 공산도배의 잔당을 대신하여 대량의 인해전술로 남하하기 때문에 용감무쌍한 우리 국군이나 UN군도 서부전선에 있어 청천강 남안으로 후퇴를 부득이 하였고, 기타의 전선에 있어서도 예전의 진격을 중지하며 차기 작전에 대비할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이 새로운 외적 중공 오랑캐의 입구로 인하여 민족과 조국은 국토통일의 대업을 완수하기 일보직전에서 또다시 방해 당하고 53개국의 민주우방으로 더불어 새로운 세계적인 중대국면에 봉착하게 된 것이 사실입니다.


다시 말하면 조국과 민족의 운명은 물론 민주우방으로 더불어 자유민주세계의 존망을 위하여 중공은 물론 그 이상의 적색제국주의와도 감연히 싸워 이를 격멸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저들의 노예로 민주세계의 멸망을 앉아서 기다리느냐 하는 중대 계단에 직면한 것입니다.

 

동포 여러분!

민족국가의 번영을 위하고 세계적인 최후 승리를 위하여 우리는 최후 일인 최후 일각까지 싸울지언정 이 오랑캐 무리의 유린에 민족과 국가를 내맡길 수는 도저히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트루만 대통령이나 맥아더장군은 물론 UN의 민주열강 대표들도 이미 저들의 야망과 저들의 침략을 간파하고 자유민주세계의 안전을 위하여 20만의 중공군이 우리를 침입하면 20만의 UN군으로써 이를 격멸하고 100만의 중공군이 우리를 범한다면 100만의 UN군이 우리를 지원하기로 각오도 새로운 터이니 충용무쌍한 우리 국군장병이나 삼천만 애국동포가 그 무엇을 주저하며 그 무엇을 겁낼 것입니까.


 
국군장병과 애국동포 여러분!

 

조국의 통일재건을 위하여 민족의 기백, 민족의 영예를 세계만방에 선양할 날도 이제는 닥쳐왔으며 자유민주세계의 평화와 행복을 위하여 대한청년의 위대한 투쟁으로 잔인무도한 공산비적을 이 지구상에서 완전히 섬멸하여 볼 날도 닥쳐왔습니다. 이날 이 판국에서 전 민족이 총동원 총무장하여 혈투로써 임하지 않고 다시 어느 시절을 기다리겠습니까.

 

충용무쌍한 국군장병과 애국일념에 불타는 동포 여러분!


강철 같은 민족의 단결로써 우리는 모든 외적에 임하여 주도 치밀한 작전아래 무장·비무장을 막론하고 공산비적들을 뿌리 채 뽑아치웁시다.

도시에서나 농촌에서나 가가호호 총궐기하여 도끼와 낫이든 호미나 괭이라도 들고 나서 싸웁시다.

그리하여 이 간악한 적도가 제아무리 애국자로 가장하고 감언이설로 임하더라도 모조리 적발 타도하며, 제아무리 위협 공갈하며 약탈과 파괴로써 임하더라도 감연 혈투하여 모조리 섬멸하여 치웁시다.

 

중공은 그만두고 그 이상의 외적들을 산길에서 오면 산길에서 무찌르고 공중에서 오면 공중에서 쳐부수고 바다로 오면 바다에서 깨칩시다.

 

국군장병과 애국동포 여러분!

끝으로 우리 자신의 핏줄기를 다시 한번 더듬어 보십시다. 우리 혈맥에는 요동벌과 살수인 청천강에서 수·당의 100만 대군을 무찔러버린 고구려의 선민들과 을지문덕·연개소문의 핏줄이 아직도 뛰고 있으며, 우리의 혈맥에는 남해 한산도에서 왜적 왜함을 모조리 깨쳐버린 이충무공의 핏줄도 뚜렷이 남아있습니다.

 

산이며 바다이며 공중이요 지하이든 그 어느 때 어느 곳에서나 세계 우방의 젊은 용사들로 더불어 공산비적이라면 모조리 잡아 소탕하고 자손만대의 행복과 인류사회의 자유를 위하여 끝까지 이겨봅시다.


우리 민족이나 우리 국가만을 위하여서가 아니라 세계와 인류를 위하여서도 최후 승리는 반드시 우리의 것입니다.

 

 

 

 


[.... 소련과 중국 공산군이 우리나라에 가져온 공산 괴질을 청소해야만 될 것입니다 ........   ]

 


1950.12.2.  新戰局에 대하여 대통령 특별성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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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의 괴뢰인 한인공산당을 우리 국군과 연합군의 능력으로 다 소탕시키고 서울과 평양과 함흥을 다 해방시킨 것입니다.


 전장에는 적군의 잔재만 남았으므로 군인들과 평민들이 다 일체로 기대한 바는 전쟁은 다 지나가고 평화를 회복해서 통일이 완수되기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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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태가 이렇게 됨에 이 공산제국주의자들이 다시 이 전쟁을 시작키로 결정한 것입니다.
 

거대한 중공군이 한국에 침입하고 또 의외에 비밀이 넘어와서 우리를 공격함으로 약간 승리를 갖게 된 것입니다. 우리 국군과 모든 UN군에 많은 손실을 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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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전쟁은 우리의 자유와 독립을 위하는 최후 결전임을 일반 애국동포들은 다 각오해야 될 것입니다.


모든 애국남녀가 먼저 생각할 것은 우리의 근본적 문제입니다. 이것은 우리 한국의 독립과 자유를 위해서 꿋꿋이 싸우자는 것입니다. 이 정신이 기미년에 모든 애국자를 궐기시킨 것이오, 또 오늘 우리 모든 애국자들을 다시 궐기시킨 것입니다.

 

우리는 남녀를 물론하고 다 한 마음 한 뜻으로 이 강폭한 원수를 대항해서 우리의 역량을 있는 대로 전장에 공헌해야 될 것입니다.


전선에서 싸우는 군인이든지 안전을 유지하는 경찰이든지 기관차나 모든 기계창에서나 또는 군기 군물을 제조하고 운반하는데 종사하는 사람들이나 학교와 병원이나 또는 도로상에서나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이 우리나라를 위하고 우리 자유를 위하며 전 세계의 자유를 위해서 싸우는 직책과 영광을 다 가져야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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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군은 하나도 빠져나가지 못하게 해야 될 것이므로 전 국민이 한사람처럼 일제히 궐기해서 어깨를 겨누고 소련과 중국 공산군이 우리나라에 가져온 공산 괴질을 청소해야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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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장 큰 공은 6·25전쟁을 치르면서 우리나라의 기초를 튼튼히 하고 나아가 군을 육성·발전시켜 .......


  ...... 나라 없는 설움만은 참을 수 없었다 .......

  ......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10억 달러 경제원조, 70만 군에 대한 지원을 약속받아 .........     ]

 

그때 그 이야기    
 
 
<961>老兵이 걸어온 길-211-위대한 지도자 이승만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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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대 창설식 참석 등 군 사랑 각별


해방 후 귀국한 그는 독립촉성중앙협의회를 구성해 정부 수립에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그 과정에서 그는 하지(Hodge) 중장과 불화로 한때 미국에 잠시 가기도 했으나, 유엔감시하에 총선거를 실시케 해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지금 생각해 봐도 이 대통령이 있었기 때문에 해방정국의 혼란기를 비교적 무난히 극복하고 대한민국을 건국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12년간 대통령으로 집권하는 동안 그의 가장 큰 공은 6·25전쟁을 치르면서 우리나라의 기초를 튼튼히 하고 나아가 군을 육성·발전시켜 대한민국을 오늘날과 같은 국가가 되게끔 만들어 놓았다는 것이다. 그는 늘 우리에게 “배고픔도 참을 수 있고, 어떠한 굴욕도 참을 수 있는데, 나라 없는 설움만은 참을 수 없었다”고 역설하면서 “우리는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며 국민의 대동단결을 강조했던 애국자였다.


그는 군에 대해서는 자다가도 일어날 정도로 깊은 관심과 애틋한 감정을 갖고 대했다. 그 때문에 군에 대한 그의 사랑은 남달랐다. 그는 서울대학교 졸업식에는 못 가더라도 사단급 이상 부대 창설식에는 반드시 참석해 장병들을 격려했다. 혹자는 이 대통령이 군을 잘 모른다고 하는데 그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는 미국 독립전쟁시 민병대(militia)에 대한 깊은 지식과 아울러 이의 역할에 대해서 많이 알고 있었다. 또 그는 미국 남북전쟁에 대해서도 제3자가 들으면 탄복할 만큼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었다. 오죽했으면 유엔군사령관 클라크 장군이 이 대통령의 깊은 학문적 지식에 대해 자신보다 미국 역사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있다고 했을까!


6·25전쟁 때 나와 우리 군은 이와 같이 뛰어난 이승만이라는 위대한 대통령을 모시고 전쟁을 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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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모총장이 되고 나서는 수시로 전선 상황을 비롯해 군 현안을 보고하러 나는 경무대로 이 대통령을 예방했다. 전쟁 중 이 대통령은 휴전에는 적극 반대하면서 오로지 북진통일만을 추구했다.


특히 휴전의 막다른 길목에서 그는 미국 대통령 특사로 방한한 로버트슨을 상대로 18일간의 협상 끝에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10억 달러 경제원조, 70만 군에 대한 지원을 약속받아 오늘날 대한민국을 있게 한 영명한 대통령이었다.


http://kookbang.dema.mil.kr/kdd/ColumnTypeView.jsp?writeDate=20090603&writeDateChk=20090525&menuCd=2001&menuSeq=16&kindSeq=1&menuCnt=30917

 

 


      1886.7.29.

 

[ ....  부세도 200만 석(石)이 못되고, 군사도 수천 명에 불과하니 ..........

 ...... 중국 .... 정병이 30만이고 전선(戰船)도 100여 척(隻)이 되며 해마다 들어오는 수입도 6,000만 석(石)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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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세개(袁世凱)가 ‘조선 정세를 논함〔朝鮮大局論〕’이라는 글을 써서 의정부(議政府)에 보냈다.

그 글의 내용에,


“조선은 동쪽 모퉁이에 치우쳐 있는 나라로서 영토는 3,000리(里)에 불과하고 인구는 1,000만 명도 못되며 거두어들이는 부세도 200만 석(石)이 못되고, 군사도 수천 명에 불과하니 모든 나라들 중에서도 가장 빈약한 나라입니다.


지금 강대한 이웃 나라들이 조여들고 있는 때에 사람들은 안일만 탐내고 있습니다. 역량을 타산해보면 약점만 나타나서 자주 국가로 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강국의 보호도 받는 데가 없기 때문에 결코 자기 스스로 보존하기 어려운 것은 자연적인 이치로서 천하가 다 아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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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병력이 구주만 못하지만 정병이 30만이고 전선(戰船)도 100여 척(隻)이 되며 해마다 들어오는 수입도 6,000만 석(石)이나 되므로 만약 일부 부대를 출동시켜 조선을 점령하려고 한다면 돌로 달걀을 깨듯이 쉬울 것이다.’ 라고 하니,


어떤 사람이 비웃으면서, ‘공의 말과 같다면 이것은 조선이 중국를 몹시 두려워한다는 말인데 중국도 조선이 중국를 두려워하듯이 오히려 구주를 두려워하는데 어떻게 구주를 방비할 수 있겠는가?’ 라고 말하므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이것은 또한 그렇지 않다. 중국은 영토가 넓고 백성들이 많으며 나라 안은 태평하다. 그래서 군사를 모두 동원하여 사람들을 죽여 들판에 차게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이것은 어진 사람의 마음으로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려는 것이지 구주를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프랑스와의 전란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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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23권, 23년(1886 병술 / 청 광서(光緖) 12년) 7월 29일(경신) 3번째기사

 원세개가 조선 정세를 논함이란 글을 써서 의정부에 보내다
  
 

 

 

[ ......  해산 당시 한국군은 ..... 도합 8,800여 명에 불과 ........    ]

 

신편 한국사 42 대한제국  >   Ⅴ. 대한제국의 종말   >   3. 군대해산과 사법권 피탈   >   1) 군대해산과 의병봉기 

 


1) 군대해산과 의병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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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무년간 고종은 꾸준히 군비증강에 힘써 왔는데, 이러한 군비증강사업은 국방력 강화뿐 아니라 대내적으로 황제의 친위세력을 보강하려는 의도로 추진된 것이었다. 1898년 6월 육해군 친총을 천명한 고종은 육군 증설과 해군 定制에 관한 조칙을 잇달아 내리고 친위 각대 편제를 개정하였으며, 1898년 7월에는 武官學敎를 창설하고 1899년 6월에는 元帥府를 설치하였다.註 769

 신무기·군함의 도입에도 막대한 비용을 썼을 뿐 아니라註 770 1903년 3월에는 징병제 실시 계획을 발표하기도 하였다.註 771


 그러나 1904년 러일전쟁 발발과 함께 일제는 韓日議定書를 강제로 체결하고 군사적 공수동맹이라는 미명하에 한반도에서의 군사행동을 합법화하였다. 한국 주차군사령부를 설치하고 대규모 군대를 파견함과 동시에 고문협약으로 군부고문 野津鎭武를 파견하여 갖가지 명목으로 대한제국의 군비를 축소하였다.


1904년 5월 일제가 파악하기로 실병력수 16,000여 명에서 1905년 4월과 1907년 4월 2단계에 걸쳐 대대적인 감축을 실시한 결과 해산 당시 한국군은 시위보병 2개 연대 약 3,600명, 기병·포병·공병·치중병 약 400인, 지방군대 8개 대대(수원·청주·대구·광주·원주·해주·안주·북청 8개소) 약 4,800인, 도합 8,800여 명에 불과하였다.註 7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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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88국제여단 ..... 조선인 ... 약 60여 명 ........    ]

 

소비에트 연방 극동군 제88국제여단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소비에트연방의 극동군 제88국제여단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김일성 주석을 비롯한 "혁명 1세대"의 모태이다.


김일성이 주도한 보천보 전투 이후 만주에서 일본군의 항일세력 토벌작전이 심화됨에 따라 동북항일연군 소속의 조선인과 중국인들은 국경을 넘어 러시아 연해주로 도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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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 참가한 조선인 가운데 약 60여 명이 확인되며, 이들 대부분은 소학교 중퇴자이며 김일성을 비롯한 4인이 중학교 중퇴이다. 이들은 88여단에서 1940년경부터 해방까지 약 5년간 복무했으며, 소군정하에서 김일성의 측근이 되어 훗날 북조선 권력층의 핵심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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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1년 ..... 광복군은 300명의 인원을 확보 ........    ]


[한국광복군(韓國光復軍)]
 


1940년 9월 17일 대한민국임시정부 산하의 무장독립군으로 충칭[重慶]에서 창설된 항일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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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1941년 3월 강남일대 초모공작을 위해 김문호를 단장으로 4명의 특파단을 설치하여 장시 성으로 파견했다. 이러한 초모공작의 결과, 총사령부 창설 1년 만에 광복군은 300명의 인원을 확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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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편된 광복군의 1942년 10월을 전후한 시기 병력은 제1·2지대 270여 명, 제3지대는 70명 내외였다. 광복군의 재편성은 곧 중국관내 한인무력의 통일을 뜻하며, 광복군 활동의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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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20개 사단 60만 대군으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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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피해에도 불구하고 6.25전쟁은 국군이 성장하는 원동력이 되기도 했다. 전쟁초기 8개 사단
105,752명에 불과했던 육군은 휴전 당시 3개 군단 18개 사단으로 증강되었고 휴전 이후에는 5개 군단에
20개 사단 60만 대군으로 확충되었다.


해군 역시 6개 전대를 가진 함대로 성장하였고, 공군은 독립작전 능력을 구비한 1개 전투비행단과 1개 훈
련비행단 및 전투기 80대를 포함하여 110대의 항공기를 보유하게 되었다. 해병대는 전쟁 중 귀신 잡는 해병,무적해병의 전통을 쌓으며 1개 사단 규모로 성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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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군60주년, 국군의 사명-북한해방·자유통일
 
맨 주먹으로 시작, 세계 9위의 군사력 확보


김필재 기자 2008-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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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미국은 ‘밴 플리트 계획’으로 명명된 국군 확장계획을 클라크(Mark W. Clark, 前 UN군 총사령관) 대장이 적극 추진함으로써 1954년 11월 무렵에 육군 66만 명, 해군 1만5,000명, 해병대 2만7,500명, 공군 1만6,500명 등 72만 명의 대군으로 늘어났다.


무기와 장비도 육군은 M-36 전차나 155㎜ 곡사포를, 해군은 전투용 함정(PF·PT·PCS·LSSL) 50척을, 공군은 F-51 무스탕 전투기 80대를 갖추게 됐다.


특히 정전 이후 ‘한미상호방위조약’ 안에서 주한미군 철수와 현대화를 전제로 국군 정원이 63만 명 수준으로 확정했다. 이와 함께 부대의 합리적인 지휘 관리를 위해 최초의 야전사인 제1군사령부(사령관 백선엽 대장) 창설을 필두로 후방지원의 제2군사령부와 교육훈련 전담의 교육총본부를 창설해 육군의 군 구조를 정비했다.


이로써 1960년 기준으로 육군은 제1군(5개 군단 18개 사단), 제2군(4개 군관구, 10개 예비사단, 전투병과 교육사령부), 군수기지사령부로 재편됐고, 해군은 제1함대를 대한민국 함대로 증편 2개 전단 2개 전대로, 해병대는 제1해병사단을 비롯한 1개 여단으로, 공군은 제트화를 추진한 제10전투비행단과 제11전투비행단 등을 구비한 전술 공군체제로 발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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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2.1.20.   『이젠 마음 놨어!』

 

[특별기고] 영욕의 陸士 60년
 
 
『이젠 마음 놨어!』

(李承晩 대통령, 정규 陸士 1기 입교 때)

 

월간조선  

 

老애국자의 평생 恨
 
1952년 1월20일 진해 陸士에서 열린 정규 陸士 1기(11기) 입교식.
 
 

花郞臺(화랑대) 60년 역사상 가장 감격적인 날은 1952년 1월20일이었다. 그날은 바로 4년제 정규陸士 제1기생(1955년 졸업時 「陸士 11기」로 호칭을 바꿈)의 입교식 날이었다.


입교식을 위해 참석한 美 극동군사령관 리지웨이 大將(대장)을 비롯해 16개 참전국 將星(장성) 등 內外 귀빈들의 수가 入校(입교)하는 4년제 陸士 1기생 200명보다 더 많았다. 성대하고 뜻있는 잔치였다. 리지웨이 사령관은 『오늘은 여러분이 獻身(헌신)의 式典(식전)에 몸을 바치는 날』이라고 말했다.


국기에 대한 경례, 대통령 말씀, 군악대의 연주 그리고 생도대장 이승우 중령(5기)의 『부탁한다』는 심각한 당부와 발진, 『우로 봐!』를 외치면서 우리를 이끄는 구대장 신현수·이상익·홍완표 대위의 구령….


온몸에 소름이 끼치고 머리칼이 솟는 듯했다. 감격의 순간이었다. 식전이 끝나고, 모든 귀빈이 떠났다.

 

그런데 갑자기 생도들에게 「小강당으로 집합하라」는 명령이 하달되었다. 귀빈들 가운데 제일 먼저 떠난 줄 알았던 李承晩 대통령께서 우리 신입생 생도들을 한번 가까이 보겠다고 부르신 것이었다. 우리들은 긴장했다.


나는 동기생 중에서 키가 제일 작았다. 맨 앞줄에서 허리를 펴고 앉아 있는데 李대통령께서 바로 내 앞에 오셨다. 그분의 숨소리도 들을 수 있었다. 李대통령의 얼굴에는 경련이 일고 있었다.


한참 우리들을 바라보시던 李대통령은 낮은 음성으로 우리들에게만 들리게, 마치 긴요한 당부라도 하듯이 한 말씀 하셨다.

『이젠 마음 놨어!』

그리고는 떠나셨다. 그 한마디 속에는 老애국자의 평생의 恨이 서려 있었다.

 

軍의 法統 세우려 교장에 安椿生 장군 임명


진해에서 4년제 陸士가 개교하기 이전, 陸士는 1946년 5월1일 入校한 제1기부터 제10기까지 5735명의 장교들을 배출했다. 이들 가운데 1310명이 戰死했다. 세계적으로도 그 나라 陸士 출신이 한 전쟁에서 3년 만에 이렇게 많은 피를 흘린 사례가 없었다. 특히 생도 1기(나중에 「陸士 10기」로 호칭)와 생도 2기는 6·25전쟁이 터지자 사관생도 신분으로 戰線(전선)에 투입됐다가 커다란 희생을 치렀다. 그들이 이 나라를 지킨 것이다.


전쟁의 와중에 일시 休校(휴교)했던 陸士가 다시 문을 열고 4년제 정규 생도들을 모집한 것은 李承晩 대통령의 恨 맺힌 집념과 國權수호 의지의 소산이었다.


당시 육군참모총장은 李鍾贊(이종찬) 장군이었다. 일본 陸士 출신인 李鍾贊 장군은 부산 정치파동 당시 『부산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하라』는 李承晩 대통령의 지시를 거부한 곧은 분이었다.


戰線에서 勇名(용명)을 떨친 일본 陸士출신 장성들은 새로 문을 여는 4년제 정규 陸士의 교장이 되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李鍾贊 장군은 李대통령에게 安椿生(안춘생) 准將(준장)을 새 교장으로 추천했다. 중국 黃浦(황포)군관학교 출신인 安장군은 安重根(안중근) 義士의 조카였다. 李承晩 대통령과 李鍾贊 장군은 한국軍의 法統(법통)을 安重根 義士 등 애국지사들의 독립정신에서 찾으려 했던 것이다.


李대통령은 安椿生 교장의 건의를 받아들여 교훈을 「智(지)·仁(인)·勇(용)」으로 정하고, 친필 휘호를 내려 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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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란 온 서울大 교수들이 출강

 

1950년대의 진해 陸士 교육은 철저한 西歐式(서구식) 교육이었다. 당시 부산으로 피란 와서 산꼭대기에 천막을 치고 교육했던 일반 대학들과는 너무나 달랐다.


陸士 11기생 200명을 교육하는데, 20여 명씩 소단위 교실교육을 실천했다. 피란을 내려와 있던 서울大 교수들이 陸士에 출강했다. 최윤식(수학)·정봉협(수학)·이숭녕(국문)·차상원(국문)·강봉식(영어)·이장환(영어)·송욱(영어)·방성희(물리학)·이두겸(물리학) 교수 등 쟁쟁한 분들이었다. 황찬호·조순·문원·엄장익·오윤용·김영전·임재규·유광열 교수는 대위나 소령으로 우리들을 가르쳤다.

 

후일 조순 교수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경제학자로,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장관을 거쳐 民選(민선) 서울시장을 지냈다. 당시 空士 교수였던 이현재 교수는 서울大 총장과 국무총리를 지냈고, 海士 교수였던 송욱 교수는 영문학자로 이름을 떨쳤다. 당시 3軍 사관학교는 우리나라 知性(지성)들의 집결지였고, 士官(사관)문화의 요람지였다.


당시 陸士에서는 매일, 매시간 일일시험을 치르고 채점을 했다. 생도들의 명예를 존중해서 시험감독은 없었다. 그래도 부정행위는 없다. 만일 부정행위를 저지르다가 고발되면 당장 退校(퇴교) 된다.

 

매일 시험을 보고 채점을 하는 데 부담을 느낀 교수들은 기말시험이나 章末 시험으로 제도를 바꾸자고 건의했다. 학교 본부의 美 고문관들의 답변이 왔다. 미국에서는 陸士와 海士가 축구시합을 응원하러 필라델피아로 가는 기차 안에서 일일시험을 친다는 것이었다. 이것이 西歐 군사교육 제도였다.

 

그래서 陸士 생도들은 4년간의 재학기간에 약 1000번의 시험을 치렀다. 그 평균성적이 67점을 넘지 못하면 퇴교해야 했다. 교관은 낙제생 후보를 불러 놓고, 『자네 평균을 계산해 보라』고 해서 66.9999점이 안 되면 퇴교시켰다.

 

눈물도 인정도 없는 시험 또 시험

 

참으로 눈물도 인정도 없이 이 전통이 지켜져서 보통 한 期에 약 27%가 도태됐다. 물론 50년 동안 한 시간의 휴강도 없었다. 사회가 아무리 혼란해도 모든 교과서는 진도대로 마쳐야 했다. 흔히 우리나라 대학에서는 『入學이 곧 卒業』이라고 말하지만, 陸士는 예외였다. 陸士 생도들은 졸업식을 하고 나서야 마음을 놨다.


나는 대령 때 美 프린스턴大로 교환교수로 갔었다. 그 대학의 「교수 對 학생」 비율이 「5 對 1」이었다. 한국 陸士도 「교수 對 학생」 비율이 「5 對 1」 비율로 생도들에게 「기초가 넓고 철저한」 교육을 했다.

 

이 陸士 교육의 진가를 일찍 인정한 분이 서울高와 경기高 교장을 지낸 김원규 선생이었다. 그분은 서울高 교장 재직 시절, 조회 때마다 陸士 교육의 미래를 높이 평가하고 우수한 학생을 陸士로 보냈다. 그래서 陸士 16기에는 서울高 출신이 20여 명이나 입학했다. 1등 학생이 서울法大에 가지 않고, 陸士로 진학했다.


陸士 17기, 18기에는 경기高 출신도 많았다. 吳明 前 과학기술부총리가 경기高 출신 18기이다. 전국의 유명한 고등학교 수재들이 陸士로 모였다. 李承晩 대통령의 양아들인 이강석씨도 陸士에 입교했다. 이때 입교한 생도들이 후일 월남戰에서 중대장으로 활약했다.

 

李대통령, 『무엇이 무서워서 제3차 세계대전에서 꽁무니를 빼겠소?』

 

1953년 정월이 왔다. 아무리 陸士에 대한 기대가 높아도, 전쟁 중인 가난한 나라 형편은 어쩔 수 없었다. 배는 고팠고, 난로도 없이 겨울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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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거리에서는 休戰(휴전)반대 데모가 매일같이 열렸다. 陸士도 反共北進통일의 분위기에 휩싸여 있었다. 당시 생도들의 90% 이상은 전투를 경험했던 병사 출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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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6-06-05

 

 

 

<건국62주 특집> 이승만의 대한민국 만들기

"제주도 못가!" 美대사에 권총 빼든 李대통령


최종편집 2010.08.20

  
『6.25와 이승만, 프란체스카의 난중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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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돼! 서울을 사수해! 나는 떠날 수 없어!"

6월 27일


숨 막힐 듯한 긴장과 긴박감 속에 하루가 지났다. 대통령이나 나나 자정을 넘겨 막 잠자리에서 눈을 붙였을 때 비서의 다급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머리맡의 시계는 27일 새벽 2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신성모 국방장관이었다. 불길한 예감이 뇌리를 스쳤다. 이어 서울시장 이기붕(李起鵬) 씨와 조병옥(趙炳玉) 씨가 들어왔다.

“각하, 서울을 떠나셔야겠습니다.”
신 장관이 간곡히 남하를 권유했다.
“안 돼! 서울을 사수해! 나는 떠날 수 없어!”

대통령은 그 이상 아무 말도 않고 문을 쾅 닫으며 방으로 들어갔다.

 

"대전 사수해, 난 여기서 죽겠다" 유서 남겨

7월 1일 오전 3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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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은 차라리 대전에서 죽는 게 낫지 더 이상 남쪽으로 내려가 경멸을 당하지는 않겠다며 대전 사수를 고집했다. 침실로 들어가 문을 걸어 잠근 대통령은 책상 위에 두 손을 올리고 기도하는 자세였다. 그의 얼굴은 불행한 국민들에 대한 연민의 정과, 잇단 패전에 대한 분노가 드리워져 있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당장 상황을 뒤바꿀 어떤 대책이 있을 수도 없었다.
대통령은 노트를 꺼내 내게 건네주며 메모를 부탁했다. 나는 조용히 그가 부르는 대로 받아 적었다.


“죽음이 결코 두려운 것은 아니다. 다만 어떻게 죽느냐가 문제다. 나는 자유와 민주제단에 생명을 바치려니와 나의 존경하는 민주국민들도 끝까지 싸워 남북통일을 이룩해야 할 것이다. 다만 후사 없이 죽는 게 선영에 죄지은 불효자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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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난길엔 너나없이 단벌신사들이었다. 장관이고 국회의원이고 고위관리고 간에, 양복이나 와이셔츠를 아끼려고 지사관저에 들어오면 팬츠만 입고 웃옷은 옷걸이에 모셔놓았다. 그러다가 회의가 있거나 외국손님이 올 때면 옷을 챙겨 입고 나타나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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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에 망명정부를..." 美대사 말에 권총 꺼내

"이 총으로 적을 죽이고 처를 쏘고 나를 쏘겠소"

 

무초 대사는 대구가 적의 공격권에 들어가자 정부를 제주도로 옮길 것을 건의했다. 그의 주장은 그곳이 적의 공격으로부터 멀리 떨어져있고, 최악의 경우 남한 전체가 공산군에 점령된다 해도 망명정부를 지속시켜나갈 수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무초가 한참 열을 올려 이야기하고 있을 때, 대통령이 허리에 차고 있던 모젤권총을 꺼내들었다. 순간 무초는 입이 굳어져버렸고 얼굴색이 하얗게 질렸다. 나도 깜짝 놀랐다. 미국에서 살 때 고속순찰 오토바이를 따돌리고 과속으로 달릴 때 가슴이 떨린 이후 그렇게 놀란 적이 없었다.


대통령은 권총을 아래위로 흔들면서 “이 총으로 공산당이 내 앞까지 왔을 때 내 처를 쏘고, 적을 죽이고 나머지 한 알로 나를 쏠 것이오. 우리는 정부를 한반도 밖으로 옮길 생각이 없소. 모두 총궐기하여 싸울 것이오. 결코 도망가지 않겠소.”라고 단호히 말했다.

대통령이 권총으로 어쩔 것은 아니었지만, 긴장한 무초 대사는 더 이상 아무 말을 못하고 혼비백산하여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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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www.newdaily.co.kr/news/article.html?no=54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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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박사의 가장 위대한 업적은 한국을 미국의 '부하'에서 '동맹자'로 끌어올리려고 한 점이다.


 6.25개전 초기 북한군이 대전을 포위하자 무초 미 대사는 한국정부를 제주도로 옳길 것을 제안했다. 그러자 이 박사는 권총울 꺼내 들고 한반도를 떠나기보다는 끝까지 싸우다 죽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제주도로 정부를 옳기고 트루먼 대통령이 공산주의자들을 대한해협에서 저지했으면 한반도는 동구처럼 공산화되는 선에서 해결되었을 것이다. 이 박사는 이러한 것을 보았기 때문에 한국군의 훈련과 무장을 지원해 달라고 요구했고, 압록강까지의 진격을 촉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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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미상호방위조약 ..... 이승만은 공산주의의 위협과 공격을 사전에 봉쇄하는 동시에 ..... 일본의 팽창주의적 야욕도 저지 ........   ]

 


조갑제 날 짜 2003년 5월 25일 일요일


독후감/이승만의 벼랑끝 전술과 韓美방위조약

 


오늘 오전 감동적인 논문을 읽었다. 유영익-이채진 편 [한국과 6.25전쟁](연세대학교 출판부)에 실린 [李承晩과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읽으면서 金大中 전 대통령과 盧武鉉 현 대통령이 꼭 보아야 할 글이란 생각을 했다. 金씨는 이 책을 읽으면서 한미동맹을 약화시킨 자신을 자책해야 할 것이고 盧 대통령은 "부모가 나무를 심으면 자식이 그늘 덕을 본다"는 중국 속담의 의미를 알게 될 것이다.


이 논문의 著者는 충남대학교 사학과 차상철 교수이다. 그는 李承晩을 이렇게 정의했다.


<이승만은 분명히 철저한 反蘇주의자요, 동시에 철저한 反日주의자였다. 그러나 그는 맹목적인 친미주의자도 결코 아니었다. 휴전협정이 체결되기 직전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자신의 日記에 이승만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이[승만]이 철저하게 비협조적이고, 나아가 반항적이기까지 한 사례를 담은 긴 목록을 여기서 열거하기 위해 시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이[승만]은 지금까지 너무나 마음에 들지 않은 동맹자였기 때문에 그를 가장 심한 말로 통렬히 비난해도 조금도 지나치지 않는다.">


이승만 대통령은 휴전협정을 서두는 미국을 북진통일과 작전지휘권 환수란 카드로 견제하면서 자신의 말이 공갈이 아님을 보여주기 위하여 1953년6월18일 유엔군이 관할중이던 반공포로 25000명을, 한국 헌병들을 시켜 석방했다. 휴전협정이 깨질 지경에 이르렀다. 휴전협상이 2년간 끈 가장 큰 이유는 반공포로를 강제송환할 것인가, 그들의 자유의사에 의해 송환 여부를 결정할 것인가에 대한 유엔군과 공산군의 이견 때문이었던 것이다.


이날 열린 미국 국가안보회의(NSC)에서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이런 말을 했다.

"우리는 (이승만이란) 또 다른 적을 만난 것 같다.">

 

6월19일 주한 미국 대사 브릭스에게 이승만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

"나의 행동이 옳은지 그른지는 후일의 역사가 판단해줄 것이다. 설령 그것이 자살행위라 할지라도 그것은 우리의 특권이다."

 

저자 차상철 교수는 이런 말로 논문을 끝내고 있다.


<한미상호방위조약을 매개로 하여 미국은 남한에 대한 공산주의 세력의 침략위협을 봉쇄함과 동시에 이승만의 北進무력통일 의지도 단념시키는 이중봉쇄의 효과를 기대했으며 반면에 이승만은 공산주의의 위협과 공격을 사전에 봉쇄하는 동시에 그가 심각하게 우려해온 일본의 팽창주의적 야욕도 저지시키는 이중봉쇄의 효과를 지닌 법적 장치를 확보함으로써 대한민국의 안보가 확실하게 보장되기를 기대했다. (중략).


이승만은 신생 독립국인 대한민국의 장래를 위해 한미상호방위조약이라는 "나무"를 심어야 한다고 믿었으며, 나아가 그것을 심는 데 성공했다. 한국민은 그 "나무"의 그늘 덕을 아직까지 보고 있다. 한미상호방위조약, 그것은 이승만에게 있어서 한국의 생존이 걸린 정녕 포기할 수 없는 생명줄이었다>


이 논문을 읽어보면 이승만이 미국의 멱살을 잡고 벌인 벼랑끝 전술에 아이젠하워나 덜레스나 로브트슨 특사는 진저리를 쳤지만 결국 그 뒤 한미동맹이 해낸 일들을 보면 미국의 3인방은 저승에서 이승만의 억지와 위협이 한미 양국의 국익은 물론이고 자유진영, 나아가 세계 평화에 기여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란 감회가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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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3년 3월 미국 정부는 중공군의 개입으로 교착상태에 빠진 한국전쟁을 정치적인 해결, 즉 휴전협정을 맺고자 했다. 李承晩은 휴전의 전제조건으로 韓美방위조약의 체결이 우선되어야 한다고 고집했다. 李承晩은 이를 관철하기 위해 1953년 6월18일 일방적으로 反共포로를 석방하는 강수를 두었다.

 
  미국은 독자적인 北進(북진)통일을 주장하고 휴전에 非협조적인 李承晩을 제거하려는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그러나 미국은 결국 휴전협정에 반대하는 李承晩과 타협하기 위해 그가 요구하는 군사방위조약을 맺을 수밖에 없었다.
 

  韓美상호방위조약은 1953년 11월17일 정식으로 발효되었다. 이 조약을 통해 미국은 휴전의 성립과 李承晩이 주장했던 단독 北進 무력통일을 견제하는 데 성공했고, 반면에 李承晩은 공산주의 세력과 일본의 팽창주의로 인해 위협받고 있는 대한민국의 안보를 미국으로부터 보장받는 데 성공했다.
 
  韓美상호방위조약은 그후 대한민국의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루는 가장 큰 밑받침이 됐다. 이 조약으로 인해 지난 반세기 동안 한반도에 전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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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3.6.17.  반공포로석방

 

[ ..... 밀고 당기던 반공포로 2만6000명을 일방적으로, 기습적으로 석방........   ]


[ ..... 팽덕회가 美측에게 李대통령으로부터 휴전보장을 받아 내도록 요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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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휴전을 통일기회의 소멸로 볼 수밖에 없는 李承晩 대통령은 온 국민들의 열화같은 휴전반대 데모를 주도했다. 한국군을 UN군 사령부로부터 빼내어 비록 집단자살이 될지라도 북진을 하겠다고 거듭 밝혔다.
 


  한편에서 李대통령은 휴전회담의 포로교환 교섭이 자유·공산 兩진영의 이데올로기의 전장인 것에 눈이 가 있었다.
 
  회담의 양측 대표가 군사분계선에 합의하여 조인 절차만 남겨놓고 있던 시점인 1953년 6월 17일, 李대통령은 全세계 앞에 카드를 제꼈다. 회담 양측간에 밀고 당기던 반공포로 2만6000명을 일방적으로, 기습적으로 석방해 버린 것이다.

 
  자유라는 상징이 갖는 전략가치를 李대통령만큼 절묘하게 활용한 지도자는 없을 것이다. 휴전을 빨리 못해 안달이 나 있는 세계의 頂上 아이젠 하워, 처칠, 毛澤東으로 하여금 李承晩 대통령이 결심만 하면 그들의 다급한 목표인 휴전을 파기할 가능성을 가졌음을 현실로서 절감케 해버렸다.
 

  국면전환의 열쇠가 일거에 李承晩 손 안에 들어와 버린 것이다. 이 순간 한국전쟁은 한번 한국化됐던 것이다. 당시 소련의 한 잡지가 反語的으로 그 정도를 일러주고 있다.
 

 
  당당하게 받아낸 한미상호방위조약
 

 
  『한국전쟁이 일어나고서 지난 3년 동안은 도대체 李承晩이란 이름을 별로 들어보지 못했다. 이 3년 동안 남한의 모든 문제는 미군 사령관에 의해서만 지시되고 李承晩은 부산의 한 모퉁이 미군 병사의 뒤뜰 안에 안치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제 갑자기 李承晩은 너무도 강대·강력하기 때문에 유엔군사령관이나 美대통령도 그리고 미국 의회도 그와 겨룰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이런 꼴불견의 연극이 또 어디 있겠는가』(「歷史의 證言」에서 재인용)
 

  金日成과 중공군사령관 팽덕회가 美측에게 李대통령으로부터 휴전보장을 받아 내도록 요구해 왔다. 공산측까지 나서서 李承晩 대통령의 對美협상 입지를 강화시켜 준 것이다.
 


  아이젠하워 美대통령이 워싱턴으로 李承晩 대통령을 초청했으나 시간이 없다고 거부했다. 미국은 대통령 특사를 서울로 보냈다. 월터 로버트슨 美대통령 특사는 6월26일부터 이후 보름 동안 매일 경무대로 출근하다시피 李대통령과 회담하고, 그동안 미국이 소극적이던 한미 방위조약 체결, 2억 달러로 시작되는 전후 복구 원조개시, 20개 사단으로 한국군 증강 등의 틀을 잡게 된다. 전쟁기간중 몇 번이나 버릴 생각을 했던 한국한테, 쫓아낼 생각을 했던 李承晩한테 미국은 한국이 필요한 모든 것을 주지 않을 수 없었다.

 
  7·27 휴전협정 조인이 있고 나서 일주일 만에 강경한 반공주의자인 델레스 미 국무장관이 서울로 와 李대통령과 회담하고, 8월8일 변영태 외무와 더불어 한미 방위조약에 가조인했다. 李대통령은 이 만족을 성명으로 표시했다.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성립됨으로써 우리는 앞으로 여러 세대에 걸쳐 많은 혜택을 받게 될 것이다. 이 조약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앞으로 번영을 누릴 것이다. 한국과 미국의 이번 공동조치는 외부 침략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함으로써 우리의 안보를 확보해 줄 것이다』
 

  李承晩은 휴전의 묵인과 한미상호방위조약을 맞바꾸어 놓았다. 이후의 경과를 보면 거인 李承晩은 전화에 휩쓸려 초토와 폐허만 남은 나라에 세계에서 가장 탄탄한 울타리를 주문해다 쌓아 올려 번영의 기틀을 다져 놓았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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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 국군헌병총사령관 원용덕 장군과 반공포로 석방
 
李대통령 비밀지령 받고 철저한 보안속 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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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국군헌병총사령관 원장군은 이대통령을 적극 보좌해 국가적 난제를 해결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이대통령의 용단과 원장군의 적극적인 수명(受命)으로 꽃을 피운 반공포로 석방이다. 아침에 이 뉴스를 듣고 면도하던 영국 처칠 수상은 놀란 나머지 얼굴을 베었고, 덜레스 국무장관은 잠자고 있는 아이젠하워 대통령을 깨울 정도로 이것은 ‘빅(big) 뉴스’였다.


이는 자유우방국뿐만 아니라 적대국 공산 측에도 일대 사건이었다. 이제까지 공들여 온 휴전이 파산될까 봐 미국 등 자유우방국과 공산권 국가들도 대책 마련에 부심할 정도로 그 파장은 넓고 깊었다. 그것은 누구도 예측 못 한 휴전협상 막바지에 몰아닥친 ‘이승만의 해일(海溢)’이었다.


이렇게 대담하고 엄청난 일을 이대통령과 원장군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해냈다. 이대통령은 국군지휘관에게 혹여 해가 될까 봐 백선엽 육참총장을 비롯해 군 수뇌부에게 비밀로 했다. 대통령으로부터 직접 비밀지령을 받은 원장군이 철저한 보안속에 이 일을 처리했다.


이대통령은 이를 위해 이미 3개월 전인 53년 3월 24일 대통령령 제153호에 의거 국군헌병총사령부를 국방부 내에 설치했고, 원용덕 육군소장을 중장 진급과 동시에 헌병총사령관에 임명했다.


그리고 휴전협상의 마지막 관문인 포로문제가 타결되기 2일 전인 53년 6월 6일 원장군을 경무대로 불러 포로석방 문제를 비밀리에 연구하도록 지시했고, 원장군은 포로문제가 타결된 6월 8일 경무대로 이대통령을 예방했다. 이 자리에서 대통령은 “나의 명령이니 반공한인애국청년들을 석방하라. 가만(可晩)”이라는 친필명령서를 전수했다.


원장군은 대통령의 밀명을 은밀히 진행시켰다. 이 일은 국방장관과 육참총장에게도 비밀로 했다. 모든 일은 육군헌병사령부와 포로경비부대를 통해 진행됐다. 작전은 6월 18일 0시에 개시돼 반공포로 2만7000명이 석방됐다. 6월 19일 새벽 6시 원장군은 중앙방송국에서 반공포로 석방에 대한 담화문을 발표했다. 그의 목숨을 건 대명(大命)이 성공한 순간이었다.


이를 들은 애국학생들은 헌병총사령부 정문 앞으로 몰려들어 “원용덕 장군 만세 !”를 외쳤다. 대통령은 원장군에게 ‘의로운 용기(義勇)’라는 휘호를 하사하며 그의 공을 치하했다. 그 후 그는 풀려난 반공포로들로부터 ‘포로의 아버지’ 대우를 받으며 1968년 63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이런 점에서 그의 공과(功過)에 대한 역사적 재평가를 기대해 본다.


남정옥 군사편찬연구소 책임연구관

2008.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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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히 이승만은 스탈린의 소련이 제2차 대전에 승전국으로 참여함에 따라 나타나는 국제질서의 성격을 이해하고 소련 공산제국주의의 본질을 꿰뚫으며 이에 대한 미국과 세계의 대응을 선구자적으로 이끌어내고자 했다. 그의 세기적 정치적 식견과 노선은 결국 동유럽의 소비에트화와 중국 공산화를 포함한 소련 공산주의의 팽창과 수많은 희생, 그리고 대한민국의 분단과 한국전쟁(6.25)을 겪고서야 확인되었고 이승만이 건국한 대한민국의 성공 역사로 입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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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러나 조씨가 복원한 ‘1952년 여름 부산’은 다르다. 대립의 중심축은 이승만과 미국이다. 좀더 정확히 말하면 국민을 등에 업은 이승만과 미국을 등에 업은 야당의 대립이다. ........   ]

 

[ .....  서둘러 휴전하려는 미국과 이를 방해하며 궁극적으로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얻어내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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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을 조선일보 동아일보 서울신문 경향신문 등에서 정치부기자로 일했던 원로 언론인 조용중(74)씨는 기자의 필치로, 그러나 52년이라는 시간의 거리를 두고서 ‘1952년 여름 부산’을 복원했다. 그동안 부산 정치 파동을 바라보는 시각은 단순했다. 정권 연장욕에 눈먼 노독재자 이승만의 폭거와 그에 항거했으나 무력하게 당해야 했던 야당의 대립구도가 그것이다. 독재와 민주주의의 이분법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조씨가 복원한 ‘1952년 여름 부산’은 다르다. 대립의 중심축은 이승만과 미국이다. 좀더 정확히 말하면 국민을 등에 업은 이승만과 미국을 등에 업은 야당의 대립이다. 이승만이 국민을 등에 업었다는 말은 당시 이승만의 개헌 시도는 다름아닌 직선제였기 때문이다. 국민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지만 국회에서는 지지받지 못하는 상황을 돌파하기 위해 이승만은 무리한 개헌 시도를 해야 했던 것이다.


중심축을 이승만과 야당에서 이승만과 미국으로 바꾸는 순간 핵심 쟁점도 달라진다. 정권 연장 음모보다는 휴전 여부를 둘러싼 이승만과 미국의 갈등이 훨씬 본질적이다. 하긴 이승만과 야당의 대립으로 당시 사건을 풀게 되면 그 시절이 전시(戰時)였다는 엄중한 사실마저 배제된다.

 

조씨는 이번 작업을 위해 그동안 비밀 해제된 미국과 영국측의 방대한 자료들도 함께 조사를 했다. 서둘러 휴전하려는 미국과 이를 방해하며 궁극적으로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얻어내려 한 이승만의 벼랑 끝 신경전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심지어 이승만을 무력으로 축출하고 꼭두각시 정권을 세워 전쟁을 끝내려는 미국에 의지해 권력을 잡으려는 야당 지도자들의 행태도 실증적 자료를 통해 그대로 보여준다. 그 동안 피해자라는 이유로 가혹한 평가를 피하려 했던 학계의 시각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이다. 온갖 시도에도 불구하고 결국 미국은 마땅한 대안을 찾지 못해 이승만을 눌러앉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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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보고받았네. 공부하러 가는 데야 말릴 수 있나. 미국 가면 군사학만 배우지 말고 경제학도 좀 배워라. 국내적으로 경제가 매우 중요하다.” ........  ]

 


[ ..... 이박사가 아니었던들 대한민국이 있었겠는가. .....

 ..... 분단, 민족분열 ... 독립투쟁 당시부터 분열했던 사람들이 누구인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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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박사는 나를 보자마자 “중동하고 아프리카에 대통령 특사로 다녀오라”고 지시하는 것이 아닌가. 이번에도 나는 깜짝 놀랐다. 나는 평소부터 대통령 특사로 외국에 나가려면 아무래도 참모총장과 국방장관 등을 지낸 인물이 적격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저는 나이도 어리고 선배님들도 계신데…”라며 머뭇거리자, 이박사는 마치 다 알고 있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그 사람들은 그 사람들 대로 할 일이 있고, 자네는 자네대로 거기에 다녀오면 돼”라고 못을 박았다.


당시 나의 군 선배로는 정일권·이형근·백선엽·유재홍·김일환·이종찬같은 분들이 계셨고, 이한림 같은 분들이 친구로서 나와 친하게 지냈다.내 짐작으로는 53년 차관 거부사태 때 이박사께서 나에 대해 ‘별난 놈’ 이라는 인상을 받았던 모양이었다. 이박사는 내 앞에서 일사천리로 자신의 생각을 말씀하셨다.


“특사로 바깥에 다녀올 마음의 준비를 하게. 이제부터는 공산당과 싸운 경험을 세계와 나누는 일이 중요해. 중동지역 국가들은 알라신이 공산주의를 막아준다고 생각하는데 정말로 뭘 모르고 하는 소리다. 그들에게 공산당과 싸운 경험을 전해 주고, 조언해 주는 것이 한국 외교에서 아주 중요하다네. 자네처럼 젊은 군인이 적임자야.

그리고 가는 길에 오키나와에 들러 따끔하게 독립정신을 일깨워줄 필요가 있네. 오키나와가 원래 대한민국과는 가까운 사이였는데, 이 사람들이 또 일본 치하에서 살려고 그러는 모양일세(당시는 미군정). 그들에게 우리의 예를 들면서 독립이 얼마나 중요한지 가르쳐주게.”

 

이를 계기로 나는 이박사를 다시 한번 쳐다보게 되었다. 당시 대한민국은 국제사회에서 별 영향력이 없었다. 그러나 이박사의 생각은 달랐다. 어떤 정치인과 관료들도 엄두를 내지 못할 때 그분은 자유민주주의를 세계에 전파해야겠다고 결심한 것이다. 생각이 넓고 깊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또한 전쟁을 치러본 젊은 장군을 ‘특사’로 내보내려고 마음먹은 것도 남달랐다. 요즘 젊은이들이 이박사에 대해 이런저런 말을 하면서 저평가하고 그러는데, 내가 아는 이승만은 요즘 우리 젊은 세대들보다 민족의 장래를 훨씬 멀리 내다보고, 깊게 생각하는 분이었다.


하지만 1957년 8월 나는 갑자기 미국 참모대학에 유학을 가게 되었다. 주변에서도 병과 장교로 군에 있으려면 한번은 다녀와야 한다고 권했고, 마침 기회가 찾아온 것이었다. 백선엽 장군이 나에게 “특사 문제가 걸려 있으니 각하를 한번 뵙고 인사드려라”라고 하길래 인사차 경무대에 들렀다. 나에게 특사 임무를 맡겼기 때문에 무어라 말씀드려야 할지 걱정도 되었다.


그러나 이박사는 또 한번 나를 놀래켰다.

“보고받았네. 공부하러 가는 데야 말릴 수 있나. 미국 가면 군사학만 배우지 말고 경제학도 좀 배워라. 국내적으로 경제가 매우 중요하다.”

이런 말씀을 듣고 경무대를 나오면서 나는 ‘이박사야 말로 이 나라를 어떻게 끌고 가야 하느냐를 항상 고민하는 분이다. 이박사야말로 정말로 훌륭한 국가 지도자다’라는 생각을 굳혔다.

 

요즘 젊은 역사학자들이 이박사에 대해 광복후 친일파를 재기용한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그런 시각에는 감정이 배어있다고 생각한다. 이박사는 평소 “식민지 경험이 없는 사람이 지도자가 되는 그날, 한일관계가 진정으로 청산될 것”이라고 말씀하시곤 했다. 요즘 친일파 기용 문제로 젊은이들 일부에서 이박사를 비판하는 것은 당시 상황에 대한 고려가 전혀 없는 단견이다.

 

자유민주주의를 세계에 전파하겠다는 깊은 안목

 

이박사가 독재를 했다는 비판도 그렇다. 당시 우리 국민 수준에서 그분만큼 국제정세를 꿰뚫어볼 만한 분이 어디 있었나. 전쟁중인 1951년부터 휴전회담을 했는데, 한번은 대통령 주재로 긴급 내각회의를 열었다. 그때 정세는 미국과 소련이 양쪽으로 갈려 의견이 충돌했는데 대한민국이 어떤 입장을 취하느냐가 매우 중요한 때였다. 이박사가 내각회의에서 각료들에게 자문을 구했으나 누구 하나 의견을 내놓는 사람이 없었다. 결국 이박사가 독자적으로 결정해 처리했다.


그런 의미에서 독재를 했다면 그것은 독재라고 비판해도 무방하다. 미국이 우리에게 잉여농산물을 제공할 때에도 이박사는 결코 비굴하게 굴지 않았다. 당당했고 대등한 태도를 취했다. 무쵸 대사 시절이었는데 미국이 이것 저것 참견하니까, 이박사는 그들에게 “당신들이 우리를 도우려면 우리가 도움이 필요없어지도록 도와줘야지, 우리가 언제나 당신들 도움을 받아야만 살아가도록 도와주면 뭐하나. 그런 식의 도움은 필요없으니 여기서 미국 것 다 거둬가라”고 호통친 일화는 유명하다. 나라의 주권을 지킨다는 견지에서 그분의 배짱은 정말 대단했고 높게 평가받아야 마땅하다.


이박사가 아니었던들 대한민국이 있었겠는가. 공산화됐을 것이다. 분단, 민족분열의 책임이 이승만에게 있나? 독립투쟁 당시부터 분열했던 사람들이 누구인가. 당시 군대까지 다 붉은 물이 들었었다. 공산당이 다 침투했다. 북한이 전쟁을 일으켰을 때 박헌영이 김일성에게 호언장담하지 않았는가. “남쪽에는 각계에 공산당이 다 침투해 있기 때문에 전쟁만 일으키면 금방 남한을 점령할 수 있다”고 말이다. 이박사가 아니었으면 이 나라가 어떻게 됐을지 걱정이다.


나는 고향이 이북(평안북도 창성)이다. 해방후 고향에서 보니 소련 점령군 장교들이 들어와서는 성출미라는 명목으로 주민들 쌀을 거둬가고 압록강 수풍댐 등 수력발전소 5개 중에서 발전기 3개를 떼어가고 그랬다. 당해보지 않은 사람들은 모른다.


나는 그걸 보고 공산주의가 우리를 잘 살게 해줄 수 있겠나, 회의적인 생각이 들었다. 대학 시절(만주 건국대)에도 공산주의에는 부정적인 시각을 갖고 있었는데 직접 경험한 셈이었다. 그런 관점에서 소련군이 발전기를 떼어가고 거지같이 남루한 차림으로 쌀을 빼앗아가는 것을 보고 우리 민족의 운명이 순탄치 못할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민주주의를 지키는 데는 군대가 필요하고, 내가 거기에 일조하겠다는 생각으로 군에 입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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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영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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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해 8월 8일 그는 경무대로 이사를 했다. 대통령 내외는 가구도 없었으므로 그때 처음 신접살림을 꾸미는 거나 다름없었다.


당시 이승만은 부인 프란체스카가 손수 꿰멘 양말을 신기를 좋아했다고 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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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신헌법에 따라 1948년 7월 20일 대통령 선거가 실시되었다. 국회의원들에 의한 간접 선거였는데, 이때 이승만은 재적의원 1백98명 중 1백80표를 얻어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압도적인 지지표를 얻어 대통령에 당선되는 순간 「대통령 이승만 만세!」라는 소리로 의사당 안은 떠나갈 듯하였다. 그때 이승만의 눈에는 희미한 눈물이 괴었다. 그의 나이73세 때였다.


이승만은 1948년 8월15일, 그 많은 난관에도 불구하고 초대 대통령이 되어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선포했다. 그해 8월 8일 그는 경무대로 이사를 했다. 대통령 내외는 가구도 없었으므로 그때 처음 신접살림을 꾸미는 거나 다름없었다.


당시 이승만은 부인 프란체스카가 손수 꿰멘 양말을 신기를 좋아했다고 한다. 그들은 두 사람의 가정부를 고용하였고, 1층 응접실과 두 개의 사무실, 2층에 침실과 식당이 마련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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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은 대통령에 취임해서 최초 18개월 동안 일주일에 한번씩 내외신 기자들과 정례회견을 가졌다고 한다. 회견에 임해서는 보통 미리 성명서를 준비하는 것과는 달리 자유자재로 담화를 발표하고 기자들이 질문에 응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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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재자는 자기 친족과 재산을 챙기기 마련이지만 이 대통령은 하야 이후 사람 키 만한 박스에 막대기를 꽂아 옷장으로 사용했을 정도였다”고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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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무대 석 자를 팔지 말라』

그런가 하면 李承晩 대통령은 「냉정한 사람」이라고 한다.


『일가 친척들을 경무대에 얼씬도 못하게 했습니다. 대통령의 甥姪(생질) 가운데 생활이 어려운 사람이 있어서 도움을 요청한 적이 있습니다. 대통령께서 생질 남매에게 금족령을 내려서 경무대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했 지요. 그런 분이었으니 당신께서 不正(부정)을 할 리가 없지요. 4·19 때 李대통령이 스위스 은행에 몇백억을 예치해 놓았다는 얘기가 나돌았지만 지 금까지 한 푼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금전적으로 깨끗한 분이었습니다』 李承晩 대통령이 수행원들에게 늘 당부한 말이 있었다고 한다.

 

『「냉수먹고 된똥 싸라. 밖에 나가서 경무대 석 자를 팔지 말라」고 하셨어요. 경무대를 등에 없고 부정부패에 연루되지 말라는 의미였죠. 그 말씀을 자주 하셔서 항상 수행원들이 가슴에 새기고 있었습니다. 張勉(장면) 정권이 들어서서 강도 높은 조사를 했지만 경호원 가운데 부정과 연루된 사람이 없었습니다. 경호원이었던 곽영주씨가 사형을 당한 것은 4·19 때 발포 사건과 연루되었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그것도 정확한 얘기인지 알 수 없는 일이죠. 어느 해는 비서실 예산을 반납시켰을 정도로 경무대 사람들도 검소하게 지냈습니다』

 

李대통령은 항상 뭔가 골똘히 구상하는 모습이었다고 한다. 金正旭씨가 바라본 李대통령의 최대 관심사는 백성을 배불리 먹이는 일이었다. 당시 유일한 돌파구는 미국으로부터 원조를 많이 받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영어를 잘하는 사람이 국무위원에 많이 기용되었으며 그들은 대부분 유학파로 미국과 돈독한 관계를 유지했다고 한다.


『대통령께서는 밀가루 한 포라도 더 원조받으려고 애쓰셨습니다. 국무위원 들과 한국말로 하시다가 긴밀한 얘기, 우리 수행원들이 들으면 안되는 얘기들은 영어로 하셨어요. 당시 국무위원들은 상당히 격조 있고 수준 높은 분이었어요. 또 연륜이 있는 분들이었죠』 당시 국무위원 중에 李範奭(이범석) 국무총리와 錢鎭漢(전진한) 사회부 장관이 영어를 좀 못했을 뿐 대부분 영어에 능통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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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 때면 수행원들에게 와이셔츠를 하사하곤 했는데 그것도 모든 수행원들에게 다 주는 것이 아니라 몇몇에게만 주었다.


『경호원들에게 봉투에 돈을 넣어서 준다든가 하는 일은 한 번도 없었어요 . 두 분이 워낙 검소하게 사셨기 때문에 남에게 선물을 줄 만한 물건이 없었어요. 저도 몇 번 와이셔츠를 받았는데 영광이었지요. 한번은 쓰시던 중 절모를 저에게 하사하셨습니다. 대통령의 중절모를 아버지께 갖다 드렸더니 몹시 기뻐하시더군요. 대통령께서 대신 나에게 충무로에 가서 중절모를 사 오라는 심부름을 시키셨습니다』


李대통령은 좀처럼 화를 내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는데 어느 해인가 공휴일에 북한 어선이 연평도를 침공했을 때 洪璡基(홍진기) 해무청장과 金貞烈 (김정열) 공군참모총장이 자리에 없어서 불같이 화를 낸 적이 있다고 한다 .


李承晩 대통령의 유일한 취미는 낚시였다. 광나루 워커힐 아래 강가나 경복궁 內의 경회루에서 매주 토요일 낚시를 했다. 낚시 외에는 가끔 비원을 산책하면서 깊은 상념에 젖곤 하는 것이 취미생활의 전부였다.

『술도 마시지 않으셨어요. 오로지 모든 시간을 나라 살리는 일에만 투자했기 때문에 지금 이 정도 살 만하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분이 우리나라 초대 대통령이 된 것은 國運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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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발발 사흘 후 1차 선발대가 대구로 떠나고 다음날 2차 선발대가 대전 으로 갈 때 金正旭씨도 합류했다. 李대통령은 대구에서 대전으로 옮겨와서 『왜 나를 멀리 보내려 하느냐. 나는 서울로 돌아가겠다』고 말했다. 하지 만 戰勢(전세)가 좋지 못해 수행원들이 서울로 가려는 李대통령을 충남도지 사 관저에 모셨다.


『대전 모기가 대단합니다. 모두들 고생이 많았지요. 戰時여서 대통령 내외 를 편하게 모실 수가 없었어요. 두 분께 따로 식사를 차려드리긴 했지만 먹는 것은 우리와 다를 바 없었습니다』


李대통령은 대전에서 사흘 간 머무는 동안 수원으로 가서 미국 측과 회담을 하고 오기도 했다. 대전에서 다시 진해에 있는 대통령 별장으로 가기로 결정했다. 밤이면 등화관제 때문에 칠흑 같은 어둠이 사방을 둘러싸고 있었다 . 어두운데다 초행길이어서 수행원들이 대통령을 안전하게 모시기가 힘들었다. 게다가 그날 밤 비까지 오고 있었다. 수행원들이 그곳 지리에 밝은 충남도지사에게 안내를 부탁했지만 자유당 소속이 아니었던 그는 거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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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행원들에게 별로 말을 건네는 일이 없는 李承晩 대통령이 전쟁중에 질문을 한 적이 있다고 한다.

『「맥아더가 왜놈들을 상륙시켜 北進하자고 하는데 자네들 어떻게 생각하나」 그렇게 물으셨어요. 모두들 묵묵부답이었지요. 그러자 「나는 왜놈이 한국에 발을 들여 놓으면 총부리를 왜놈들에게 대겠다. 왜놈은 우리 땅에 한 발짝도 들여놓지 못한다」고 말씀하시더군요』

대통령 일행은 仁川상륙 직후인 9·28 수복 때 서울로 돌아왔다가 1·4 후퇴 때 다시 피난을 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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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 말 듣지 않았다


金正旭씨는 프란체스카 여사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만약 퍼스트 레이디가 한국 부인이었다면 경무대가 조용하지 않았을지도 모르죠. 프란체스카 여사의 가족 가운데 아무도 한국에 살지 않아 외척이 문제를 일으킬 소지가 아예 없었습니다. 프란체스카 여사는 너무나 검소하고 부지런한 분이었습니다. 계절마다 옷이 한 벌씩밖에 없었어요. 거의 매일 같은 옷을 입고 있었습니다』 경무대에서 모임에 초대되었다가 고픈 배를 안고 돌아가는 이들이 많았다고 한다.


『경무대에 초대받았으니 점심을 주겠지 생각하고 왔던 분들이 간단한 다과만 대접받고 가면서 굶고 간다고 말하곤 했죠. 특히 과자를 프란체스카 여사가 직접 구워 대접하였는데 그 일로 초대받은 이들이 감격하곤 했습니다 』

 

그는 李起鵬씨를 모질거나 이상한 사람으로 여기는 이들이 있지만 「여자 같은 성격에 마음이 매우 곱고 음성이 조용하고 착한 분」이라고 평가했다 . 李起鵬씨의 아내 朴마리아씨가 프란체스카 여사를 조종하여 李承晩 대통령으로 하여금 잘못된 판단을 하게 하였다는 얘기에 대해 그는 고개를 흔들었다. 李承晩 대통령은 부인이 간섭한다고 해서 받아들일 분이 아니라는 것이다.

 

『나중에 국회 부의장을 하셨던 任哲鎬(임철호) 비서관이라는 분이 있었어요. 그분이 대통령께 바른말을 잘했어요. 프란체스카 여사가 任비서관에게 너무 직설적으로 말하면 대통령께서 흥분하고 심기가 불편해진다며 주의를 줬어요. 프란체스카 여사의 최대 관심사는 남편의 건강이었습니다. 그러자 任비서가 비서직을 그만두고 경무대를 나가 버렸어요.

 

대통령이 任비서가 필요하니 불러오라고 해서 찾아갔지만 두 번이나 거절하더군요. 또다시 대통령이 오라고 하자 그제야 任비서가 경무대로 돌아왔습 니다. 아내의 말을 듣는 사람이면 아내 때문에 나간 사람을 다시 불러올 리가 없지요. 李대통령이 연세가 많으셨어도 판단력은 흐리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도 프란체스카 여사는 남편 일에 참견을 하는 분이 아닙니다. 옆에서 조용히 돕는 분이었습니다. 任비서에게는 단지 남편의 건강이 걱정되어 그 런 얘기를 한 것뿐입니다』

 

朴마리아씨는 알려진 것과 달리 경무대에 자주 오지 않았다고 한다. 金正旭 씨는 이강석을 양자로 받아들인 것은 잘못된 일이라고 말했다. 프란체스카 여사는 자나깨나 남편 건강을 챙기는 일에 관심을 기울였다고 한다.

 

『산책을 갈 때면 프란체스카 여사께서 꼭 스웨터를 챙겨서 들고 나오십니 다. 자신이 스웨터를 들고 다니면서 좀 쌀쌀하다 싶으면 바로 입혀 드리고 좀 덥다 싶으면 바로 벗겨 드렸어요. 그 정성이 이루 말로 다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수행하면서 세심하게 배려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많이 배웠습니다. 아내가 그렇게 챙겨 주니 대통령께서 스스로 건강에 신경을 많이 쓰셨어요. 틈나면 운동하고 장작을 패고 정원의 나무를 직접 자르면서 운동 을 하셨죠. 두 분이 늘 산책을 하면서 많이 걸으셨어요』金正旭씨는 지금도 프란체스카 여사를 생각하면 항상 타이프치는 모습이 떠오른다고 전한다.


『한 번도 앉아서 편하게 쉬는 걸 못 봤습니다. 늘 분주하게 움직였지요. 집안일 뿐만 아니라 타이프를 치면서 대통령의 일을 많이 도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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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상황에서 물러나지 않아도 되는데 백성이 원하면 물러난다며 대통령께서 이화장으로 향한 것은 높이 평가해야 할 일입니다. 李대통령의 强點이라면 청렴하고 검소하고 지혜가 있다는 점입니다. 단점이나 아쉬운 점이라 면 단지 나이가 많았다는 점이죠. 당시 대통령의 나이가 85세였는데 60代 정도만 되셨어도 좋았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는 자유당 정권을 3選 개헌을 제외하고는 나무랄 데가 없다고 평가했다.


李대통령이 정치를 잘했으며 특히 韓美 방위조약을 체결한 것은 높이 살 일이라고 말했다.


말에 좌지우지되지 않았습니다. 우리를 도와 주러 왔으면 우리 필요에 의해서 미국이 움직여야 한다고 말씀하셨죠. 그러니 미국 측과 마찰이 잦았고 재임 시절 UN 사령관과 미국 대사가 자주 바뀌었어요. 미국측 인사들에게 항상 당당하셨지요』金正旭씨는 자유당 정권을 3選 개헌, 3·15 부정선거로만 볼 게 아니라 살기 어려운 시절, 외국 원조를 끌어들여 나라의 기틀을 잡고 어려운 일을 많이 했던 것을 잊지 않아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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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무대에서 근무한 사람은 옷을 벗으라고 한 것은 잘못된 일입니다. 玉石을 가려야지, 무조건 경무대에서 근무했다고 그만두라고 하는 건 부당한 일이죠. 날짜를 소급하여 부정축재자를 가리는 조사를 하겠다고 할 때 나는 응하지 않았습니다. 잘못한 일도 없는데 조사받을 일이 뭐 있습니까? 내가 맡은 일을 열심히 했고 남 괴롭힌 일 없이 떳떳하게 살아왔습니다. 당시 경찰관들은 깨끗했습니다. 4·19 이후 부정축재자를 소급해서 찾았지만 경무대 사람들 가운데 아무도 적발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시효가 지난 뒤 집으로 돌아왔고 그 뒤 조사받은 일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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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는 李承晩 대통령의 장례식 광경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고 한다. 김포 비행장에서 이화장으로 운구할 때 연도에 너무 많이 운집한 시민들을 해산시키기 위해 원래 계획과 달리 자동차 속도를 올려야 했다. 장례식 당일 이화 장에서 과학관이 있던 연근동까지 시민들이 꽉 들어차서 장례식을 거행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고 한다.
장례식 날 金正旭씨는 장의위원으로 선정되어서 영구차에 타고 함께 국립묘 지까지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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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례식 차량은 GMC 군용 차량이었는데 이화장 을 떠나 정동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시청 앞 광장으로 가서 李대통령의 육 성을 들을 예정이었다. 하지만 사람이 너무 많이 모여 시청으로 가지 못하 고 바로 국립묘지로 가야 했다.

『국민들이 정말 李承晩 대통령을 사랑했습니다. 장례식 때 셀 수 없을 정 도로 많이 모인 군중들이 그 증거지요. 모두들 통곡을 하며 울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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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5 부정선거의 책임을 지고 사형을 당한 최인규 내무부 장관이 법정 최후진술에서 「李박사 이상 존경할 사람이 없다」고 말했는데, 가까이서 뵌 분들은 누구나 그렇게 생각할 겁니다』 경무대 경호원들 중에 생존자가 몇 분 없어 요즘 만남이 좀 뜸하다고 한다. 과묵한 그는 인터뷰를 끝내고 일어서는 필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죽을 때 그분 존경하는 마음을 안고 갈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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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때로는 일당 1달러 50센트를 받고 농장에서 교민들과 함께 일한 적이 ........     ]

 

 윤치영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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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년부터 그는 미국 하와이대학교 국제법학과에 입학하여 수학했다. 1924년 다시 하와이에 도착했을 때 7월 10일 이승만이 그를 만나 자신의 독립운동을 도와줄 것을 호소하였다. 이승만의 설득으로 윤치영은 대한인동지회에서 활동하며 동지회 기관지인 월간 태평양 잡지의 집필과 인쇄 과정을 맡아 봤고,발간, 발송, 광고, 수금 등의 일도 직접 맡아 보았다. 1924년 7월부터 1937년까지 대한인동지회 총본부 사무총장을 역임했다.


미국 본토행을 단념한 그는 이승만의 요청대로 하와이에 눌러앉아 이승만이 교포 2세들의 교육을 목적으로 설립한 한인기독학원에서 강사로 교편을 잡으면서 태평양 잡지의 편집을 맡았다.[16] 이 잡지는 이승만이 발행하던 것으로서 한국사(韓國史)와 한국 문화를 영어영문으로 소개하는 것이 주 내용이었다.


운전을 할 줄 몰랐던 미국생활 초기에는 이승만이 직접 운전하는 자동차를 타고 함께 배달하러 다녔다. 후일 모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그는 '아침은 15센트 짜리 빵 한 개, 4~5센트 하는 커피 한 잔으로 때우고, 점심에도 빵 한 개와 야채 스프가 고작이었다'고 회상했다. 그의 회고록에 의하면 당시 그 시절 대부분의 한국인 교민들은 사탕수수, 파인애플 농장에서 품팔이를 하며 생계를 꾸려 나갔고, 윤치영과 이승만도 때로는 일당 1달러 50센트를 받고 농장에서 교민들과 함께 일한 적이 있었다. 윤치영의 회고에 의하면 이승만은 대화와 언변에도 능했지만 잡다한 재주도 있었는데, '이 박사는 농사일 뿐만 아니라 어디서 익힌 솜씨인지는 몰라도 목수 일, 미장이 일까지 못하는 일이 없었고 솜씨도 대단해서 샌님인줄 알았던 한국 교포들이 모두들 감탄했다'고 회상하였다. 뒤에 1920년대 후반에 가서야 몇인의 배달부를 채용하여 배달, 배송을 시켰지만 기타 제반사항은 윤치영 자신이 직접 주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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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프란체스카 여사는 경무대 시절 양말을 직접 기워 신는 등 절약 생활을 몸소 여준 모범적인 영부인이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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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체스카 여사는 경무대 시절 양말을 직접 기워 신는 등 절약 생활을 몸소 여준 모범적인 영부인이었다.


이화장에서 노년을 보낼 때에도 연료 절약을 위해 겨울철이면 본채 대신 경비실에서 추운 겨울을 지냈고 검소한 생활을 실천하였다.

술고래였던 청와대 요리사 양학준 노인은 프란체스카를 "깍쟁이 사모님"이라고 불렀고
모든 면에서 절제하고 아끼는 그녀를 "소금 조금","간장 조금" 이라고 하면서 흉내를 낸 적이 있을 정도로 그녀는 상당히 근검절약하는여성이였다.(프란체스카, 1988:39-40)

이런 영부인 자리에서 물러난 후 그녀는 파란 눈의 거리감 있는 영부인이 아니라 알뜰하고 자상한 이웃 할머니와 같은 친근감으로 국민들에게 다시 다가올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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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장 음식은 검박하고 서민적이다. 새우젓은 으뜸으로 치는 음식 재료다. 찌개도 고기 대신 새우젓을 넣어 담백하게 끓여낸다.

"아버님께서 새우젓 들어간 음식을 아주 좋아하셨어. 우리 집 음식 중에 사치하는 게 있다면 이 새우젓이야. 한 깡통에 8만원 씩이나 하는 걸 1년에 세통은 사야 하니까.".

이화장 안주인인 이대통령 며느리 조혜자(56)씨는 시어머니 프란체 스카 여사 시절 입맛을 고스란히 잇고 있었다. 새우젓국에 집에서 만든 두부를 듬뿍 넣어 부드럽고 고소하다. 프란체스카 여사는 외국 국빈들 을 접대할 때도 평소대로 새우젓을 넣은 찌개를 올리곤 했다.

"우리네 음식이야말로 어머님,아버님이 장수하신 비결이었어. 아버 님은 아흔, 어머님은 아흔둘에 타계하셨는데, 두분 다 기름기를 멀리하 고 콩과 두부를 즐겨 드셨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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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지찌개도 거의 빼놓지 않고 식탁에 오른다. 이대통령 양자인 이화 장 주인 이인수 박사 역시 부모 입맛을 그대로 닮았다. "우리집 비지찌 개는 꼭 두부를 걸러낸 비지로 만들어. 뭐니뭐니 해도 그게 비지의 제 맛이라고 어른들께 배웠거든. 우리집 양반도 비지찌개 하나면 밥 한 그 릇을 금방 비우시지.".


경무대 시절 주방에서 좀더 고급스럽게 만든다고 두부를 거르지 않 은 비지를 썼다. 그랬더니 이대통령은 "이 맛이 아닌데…" 하며 고개를 저었다. 어쩐지 조씨가 끓여낸 비지찌개는 맛과 모양새가 토속적이다. 걸쭉하고 투박한 "진짜 비지"와 풋고추, 홍고추가 어우러져 영락없는 시골집 어매 손맛이다.


"어머님은 김치를 담그시다가 무가 달고 맛있으면 깎아 나눠주시곤 했어.시루떡을 즐겨 드셨고 떡국 끓이는 솜씨는 전문가셨지. 하와이 망명시절에 어머님이 끓이신 떡국이 어찌나 맛있든지 아버님께서 단숨에 두그릇을 비우셨대. 전형적인 한국 아낙이셨지. 국민들이 못 먹고 못 입는데 어떻게 사치하느냐고 입버릇처럼 걱정하시던 분이야.".


프란체스카 여사는 평생 근검절약을 실천했다. 협립우산 한개를 30년 넘도록 사용했고, 옷은 물론 양말과 스타킹도 기워 신었다. 열두폭 스 란치마를 휘날리지 않았어도 생활에서 배어나던 그의 기품이 아직도 이 화장 거실에 배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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普天堡 전투는 크게, 李承晩은 작게

 

2002년 8월, 북한이 金日成의 대표적 抗日 투쟁 업적으로 꼽고 있는 普天堡(보천보) 전투가 한국의 고등학교 검정 교과서에 실리게 됐다는 사실이 언론에 보도됐다(북한의 金日成이 普天堡 전투와 관련이 있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비록 金日成의 이름은 직접 언급되지 않았지만, 普天堡 전투가 교과서에 실리게 됐다는 사실만으로도 논란이 야기됐다. 결국 교육인적자원부(이하 교육부)는 『보천보 전투처럼 학계의 평가가 엇갈리거나 연구성과가 축적되지 않은 주제는 교과서 본문에서 직접 다루기보다는 脚注(각주)나 학습자료란을 통해 소개』하기로 했다.

 

현재 고등학교 검정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 6종 모두 普天堡 전투나 이와 관련이 있는 동북항일연군(1936년 중국공산당 지도 아래 만들어진 抗日유격부대), 조국광복회(1936년 만주 및 함경도 일대에서 결성된 抗日지하조직. 普天堡 전투 당시 동북항일연군에 內應했다가 日帝의 탄압으로 붕괴) 등에 대해 記述하고 있다.

 

그중에는『1936년 이른바 동북항일연군이 결성되자 韓人 무장군도 이에 합세하여 1940년 소련으로 넘어가기까지 항일 전투를 전개하였다』(두산, 194쪽)고 간략하게 記述한 것도 있다. 금성출판사 刊 교과서(196쪽)는 본문 중에서 동북항일연군과 조국광복회에 대해 언급한 외에도 「역사의 현장」이라는 난에서 「항일 유격대의 普天堡 점령」이라는 제목으로 普天堡 전투에 대해 特筆(특필)하고 있다. 普天堡 사건을 보도한 東亞日報 사진도 함께 실었다. 2002년 8월 언론보도에 의하면 원래 제목은 「日帝의 간담을 서늘케 한 보천보 전투」였던 것으로 되어 있다. 대한교과서刊 교과서(187쪽)에서도 「도움글」난에서 「항일유격대의 계속된 투쟁」, 「조국광복회의 결성」이라는 제목으로 東亞日報 사진과 함께 普天堡 전투에 대해 상세히 記述하고 있다.

 

普天堡 전투 외에도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는 사회주의 계열의 항일투쟁에 대해 상세히 記述하고 있는 것이 눈에 뜨인다. 金元鳳(김원봉) 義烈團(의열단), 조선의용대 등 과거 교과서에서도 언급됐던 抗日투쟁들에 대한 記述이 한층 자세해졌고, 원산노동자 총파업·암태도 소작쟁의 등이 관련 자료들의 풍부한 인용과 함께 깊이 있게 다루어졌다.

 

반면에 李承晩(이승만)의 경우를 보면 대한민국 임시정부라든가, 외교독립론과 관련해 그의 이름이 언급되는 정도로 간단하게, 비판적으로 다루어지고 있다. 독립운동 시절 李承晩의 사진을 실은 교과서는 단 하나도 없었다. 천재교육刊 교과서(191쪽)는 李承晩이 1919년 윌슨 미국대통령에게 보낸 「위임통치청원서」와 임시정부의 「임시대통령 李承晩 彈劾 주문」을 소개하고 있다. 금성출판사刊 교과서(187쪽)에서는 申采浩(신채호)의 「조선혁명선언」과 李承晩의 「위임통치론」을 나란히 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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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의 흉상

 


내년에 개원 50년을 맞는 국회가 초대 의장 이승만 전대통령의 흉상을 세우려다 몇몇 의원의 반대로 무산되었다는 것은 그의 개인적인 공과와 대한민국 건국사의 법통수호 필요성을 구분하지 않은 매우 유감스런 처 사가 아닐 수 없다. 2대 의장 신익희 선생의 흉상을 함께 세우려던 안이 24명의 위원중 신한국당 이신범, 국민회의 국창근 한영애 의원등 3인이 막고나서 좌절됐다니 먼저 세 의원에게 묻고 싶다. 광복후 좌우 대립속 에서 대한민국이란 나라가 세워지지 않았다면 지금의 의원직이 가능했겠는가. 그들은 먼저 의원직부터 거부해야 했다.


헌법이 제정되고 정부가 수립되어 오늘에 이르렀기에 건국 대통령이자 초대 국회의장인 이승만 박사의 흉상을 국회내에 건립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세 의원은 과거 독재를 했다는 이유로 이를 반대 했다. 이는 부분만을 내세워 전체를 부정하는 잘못이 아닐 수 없다. 이 승만 전대통령을 평가할 때, 종신집권을 위한 개헌과 3.15 부정선거를 빼놓을 수 없다. 또 독재자란 비판도 가해질 수 있다. 그러나 그 어떤 잣대로도 1948년8월15일 대한민국 건국 자체의 의미를 부정할 수는 없다. 오늘 우리가 이만큼의 주권을 누리고 삶을 영위하게된 것도 나라를 설계하고 주춧돌을 놓은 이승만이라는 선견지명의 인물이 있었기 때문임을 망각해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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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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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2.10.22.   백범 김구 기념관  건립

 

[ ..... 백범 김구의 기념관은 건평 3000평에 총사업비 180억원으로 2002년에 건립됐음에도

     초대 대통령이었던 이승만의 기념관이 없다 .......    ]

 

[김대중 칼럼] 건국 대통령의 기념관 누구 눈치 보나


   2010.09.05

 


이젠 나라 됨됨이 챙겨야 할 때

이승만 기념관 하나 없는 건 수치 좌파 눈치가 그렇게 두렵나

 

가난해서 삶이 어려웠던 집(家)이라도 여유가 생기고 먹고살 만한 정도가 되면 자신의 집안과 주위를 살펴 빚을 갚고 사람살이의 앞가림을 하게 되는 것이 세상사의 순리다. 나라도 마찬가지다. 나라가 어려웠을 때 미처 챙기지 못했던 것들을 지금이라도 제자리를 찾아주는 것이 성숙한 국민과 건강한 나라가 우선적으로 할 일이다.

 

그것은 곧 대한민국 탄생의 '족보'를 정리하는 일이다. 오늘을 있게 한 사람들에 대한 예의, 그들의 기여와 희생에 대한 보훈의 뜻을 잊지 않는 것―그것이 곧 민족 됨됨이를 가늠하는 척도다. 6·25전쟁 60주년인 올해, 우리는 정말 어른스러운 일들을 했다. 전쟁에서 대한민국을 지켜준 자유세계인들의 노고와 희생을 잊지 않고 그들을 찾아가거나 모셔오고 또 추모하는 훌륭한 행사들을 치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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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우리의 나라 됨됨이 또는 나라다움을 만들어야 한다. 그것은 곧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바로 세우고 지켜나가는 것이다.

 

대한민국 정통성을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것은 건국의 역사, 건국의 인물들에 대한 우리의 자부심을 통해서다. 그런 의미에서 이 땅에 건국 대통령 이승만의 기념관 하나 없다는 것은 나라의 수치다.


상징물로 보면 우리나라에 '조선'은 있어도 '대한민국'은 없다. 세종대왕과 이순신 장군이 세종로를 지키는 유일한 인물이라는 것은 이 땅의 지난 500년 역사가 무의미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어째서 우리는 대한민국 건국 대통령의 기념관 하나 못 만들고 있는 것일까?


우파는 이승만이 4·19를 촉발한 독재정치인이었기에 건국의 역사에 오점을 남겼다고 말하고 있고, 좌파는 그가 분단의 주도자였고 그래서 통일을 저해한 사람이라고 매도하고 있다.

 

그러나 누가 뭐래도 이승만은 대한민국 헌법을 만들어 냈고 정부를 세웠으며 6·25를 이겨냈고 우리를 미국을 매개로 세계로 나아가게 만든 지도자였다. 그것은 이 민족을 살린 성공의 역사였다.

그가 없었으면 이 땅은 일찌감치 '공산국가'가 됐을 것이다. 공산주의자들이 지금도 땅을 치고 원통해하며 이승만을 배척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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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 김구의 기념관은 건평 3000평에 총사업비 180억원으로 2002년에 건립됐음에도 초대 대통령이었던 이승만의 기념관이 없다는 것은 그 어떤 '정치적 궤변'으로도 설명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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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전 대통령의 동상은커녕 기념관조차 없는 것이 그가 보수·우파의 반공주의자였기 때문이라면 그럼 지금 이 나라는 무슨 나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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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히 대한민국 역사의 주역들인 이승만·박정희의 호칭에는 인색하면서 이미 '역사'가 된 지 오래인 북한의 김일성에게는 깍듯이 '주석'을 붙이고 김정일은 예외 없이 '위원장'으로 부르는 일부 언론에 익숙해 있는 풍토에서는 더욱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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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대통령이 이승만 기념관 세우는 일에 결단을 내릴 수 없다면 어디 재벌 하나쯤 나설만도 한데 모두 좌파들 눈치가 그토록 두려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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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 국민의정부와 참여정부에서는 백범(白凡) 김구(金九.1876-1949) 선생이 10년 가까이 각광을 받았다. 범여권 대표주자를 표방한 대통합민주신당 정동영 후보 또한 대선 투표 전날 백범김구기념관에서 기자회견을 갖는 등 백범김구기념관이 있는 효창공원을 중요한 상징 장소로 활용하곤 했다.

 

김대중 정부는 2002년 10월22일 "백범 김구의 삶과 사상을 계승 발전시키기 위함"을 표방하면서 백범김구기념관을 개관했다.


국민의정부가 주도한 이런 백범 현창사업은 김대중 전 대통령의 개인적인 성향과도 밀접하다. 그가 가장 존경한다고 거론한 인물이 바로 백범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남북한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해 통일정부수립을 위한 남북협상에 투신하다 암살된 백범의 정치적 성향이나 행보는 국민의정부와 참여정부가 남북관계 기조로 채택한 '햇볕정책'과 손쉽게 결합한 측면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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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3.3.1.  노무현


[ ..... 정의는 패배했고 기회주의가 득세했습니다.

  ..... 이제 비로소 역사적 전환점이 마련되었습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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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정부의 출범으로 이제 아픔의 근, 현대사는 막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지난날은 선열들의 고귀한 희생에도 불구하고 좌절과 굴절을 겪어야 했습니다. 정의는 패배했고 기회주의가 득세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비로소 역사적 전환점이 마련되었습니다. 국민이 진정 주인으로 대접받는 시대가 열린 것입니다.


참여정부에서는 권력에 아부하는 사람들이 더 이상 설 땅이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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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pa.go.kr/research/contents/speech/index.jsp?spMode=view&artid=1309352

제84주년 3·1절 기념사

연설일자 2003.03.01

 

 

      *   2005.7. 노무현


[ ..... 역사의 고비마다 ... 분열 세력이 승리 .......  
  ..... 무엇보다 남북 간 분열을 극복해야 .....   ]

 

[ ..... 이승만 대통령의 남한 단독정권 수립, 이후 지역주의 조장 세력의 장기집권 등을 지칭 ........     ]

 

“역사 고비마다 분열세력이 승리”노대통령 언급

입력  20050701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은 1일 청와대에서 열린 ‘민주평통 12기 전체회의’ 대회사를 통해 “우리를 더욱 우울하게 하는 것은 지난날 역사의 고비마다 통합을 주장한 사람들은 항상 좌절하고 분열 세력이 승리해왔다는 사실”이라고 말했다.


노 대통령은 “나라가 외세에 무릎을 꿇고 국민이 고통을 받았던 국난의 시기마다 내부에는 분열이 있었고 그렇게 겪은 치욕의 역사는 우리에게 분열을 강요해왔다”고 말했다. 노 대통령은 이어 “무엇보다 남북 간 분열을 극복해야 하고, 우리 내부의 지역주의와 남남갈등도 극복할 때가 됐다”면서 “이제 배제와 타도가 아니라 공존하는 문화, 대결이 아니라 협력하는 문화, 투쟁과 타협이 조화를 이루는 문화, 독선이 아니라 상대를 존중하고 다른 주장과도 합의를 이뤄내는 관용의 문화를 키워가야 한다”고 말했다.

 

청와대 관계자는 ‘분열세력 승리’ 언급의 의미와 관련, “이승만 대통령의 남한 단독정권 수립, 이후 지역주의 조장 세력의 장기집권 등을 지칭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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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ews.chosun.com/svc/content_view/content_view.html?contid=2005070170367

 

 


"KNCC 마저" 여권 당혹감


[한국일보 2004-09-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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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총무는 또 “얼마 전 속초에 갔다가 김일성 별장을 수리하는 사람에게 주민들이 ‘왜 이승만 대통령 별장은 수리하지 않느냐’고 묻더라”며 “국민들이 매사 그런 식으로 보고 있다”고 국보법 폐지에 대한 국민정서를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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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1.


[ ...... 지난해 가을 문을 닫았어요. 맥아더 장군 동상을 철거한다고 야단이고 ........


 .... '통일기원관'은 문틀의 창호지가 떨어져 나갔다. ........    ]

 


`문 잠긴` 이화장 … `빈약한` 구미 생가

 [중앙일보]

 

`YS 기록·전시관` 예산 부족으로 착공 못해
`문서 썩기 전에 정부 나서고 민간 협조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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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잠긴 건국 대통령 전시관=서울 종로구 이화동 1-2번지 이화장(梨花莊). 이승만 초대 대통령의 유품이 전시된 곳이다. 지난해 12월 11일 대학로 뒷골목 이화장의 대문은 잠겨 있었다. 초인종을 누르자 신분을 확인한 뒤 문을 연다.


"많을 땐 하루에 관광버스가 99대나 왔었는데 지난해 가을 문을 닫았어요. 맥아더 장군 동상을 철거한다고 야단이고 관리할 이도 없고…."

이 전 대통령의 며느리 조혜자(63)씨는 입구 쪽 한옥을 보여줬다.


서울시 지원으로 다시 지었다는 '통일기원관'은 문틀의 창호지가 떨어져 나갔다.

"예산 지원이 안 돼 내부공사가 3년째 중단돼 있어요. 아버님 재임 시절 문서 일부가 골방에 쌓여 있지만 난방도 안 되니 이곳으로 옮길 수가 없네요."


1904년 이 전 대통령이 밀사로 미국에 갈 때 사용한 여권과 이듬해 현지에서 보낸 외교 보고서 등이 진열된 본관도 전문적 관리가 안 되기는 마찬가지다. 이 전 대통령의 부인 프란체스카 여사가 '한국도 실크 양장을 만들 수 있다'는 걸 외국인사 부인들에게 알리려고 손수 디자인해 봉제소에서 제작한 옷은 세탁소용 비닐에 싸인 채 벽에 걸려 있다.


전시 공간이 없어 본관 창고에 신문지를 깔고 쌓아 놓은 유품도 상당수다. 이 전 대통령의 양자 이인수(75)씨는 "건국 대통령의 전시관이 이 지경인 나라는 한국뿐일 것"이라고 말했다.

 

80년대 중반 도둑이 들어 자료를 잃은 이화장은 사진 2만여 장과 A4용지 15만 쪽 분량의 자료를 98년 연세대에 기탁했다. 연구를 맡고 있는 연세대 현대한국학연구소 오영섭 교수는 "그대로 있었더라면 국내에서 거의 유일한 임시정부 관련 문서 등은 빛을 보지 못했을 것"이라고 했다.

 


◆관리인 없는 대통령 생가=경북 구미시 상모동 박정희 전 대통령의 생가. 한 해 45만 명이 찾는다는 이곳엔 지난해 12월 12일에도 관광객의 발길이 이어졌다. 하지만 박 전 대통령의 유품이라곤 나무 책상과 책꽂이.호롱이 전부다. 분향소 입구에 걸린 사진 10여 장이 그나마 볼거리다.


충북 청주에서 온 김대곤(56)씨는 "박 전 대통령의 생가가 초라해 놀랐다"며 "우리도 이젠 대통령을 기릴 정도는 되지 않느냐"고 씁쓸해했다. 구미시 관계자는 "시와 경북도가 기념공원을 조성하려고 생가 주변 2만 평을 사들였지만 예산이 없어 착공을 못하고 있다"고 했다.


경남 합천과 대구에 있는 전두환 전 대통령과 노태우 전 대통령의 생가는 관리인도 없다. 그저 빈 집일 뿐이다.

 

윤보선 전 대통령도 충남 아산에 생가 고택(古宅)이 있지만 전시물은 없다. 자손들이 사는 서울 안국동 자택에 있는 유품 일부도 일반에 공개되지 않는다. 최근 작고한 최규하 전 대통령의 생가 터엔 원주시립박물관 부속건물이 들어섰다. 서울 서교동 자택의 자료가 한 대학 측에 기탁될 것으로 알려진 게 고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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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article.joins.com/article/article.asp?Total_ID=25535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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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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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혼시절 남편과 내가 방문했더 미주의 우리동포들은 대부분 생활이 어려웠다. 어떤 집에서는 먹을것이 없어서 젖을 빨리고 있는 엄마와 아기가 다 영양실조에 걸린것을 보게 되었다.  나는 그때 너무나 가슴아파하던 남편의 모습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그리고 그토록 어려운 생활속에서도 오직 나라의 독립을 찾겠다는 일념으로 독립운동 자금을 모아서 보내는 한국동포의 뜨거운 애국심에 나는 절로 머리가 숙여졌다. 그리고 한국의 독립운동가로 유명한 남편이 왜 3등열차나 3등선실만을 골라서 타고 다니며 그토록 오랫동안 필사적인 독립투쟁을 계속하였는지 이해 할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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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초부터 남편과 나는 매일 새벽 함께 성경을 읽고 하나님께 기도드리는 생활을 했다.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생활은 남편이 독립운동을 할때나 대통령직에 있을 때나 하와이 병실에서 돌아가실때까지 한결같이 계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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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결혼하자 남편의 비공식 여권을 내줄때마다 신경을 써야했던 미국무성의 미시즈 시플리는 지겨운 나머지 나에게 남편을 설득하여 미국시민권을 받도록 하라고 말했으나 남편의 대답은 한결 같았다.

[한국이 독립할 것이니 기다려 주시오]

그리하여 나는 남편의 조국독립에 대한 집념과 그 누구도 범할 수 없는 한국인 특유의 위엄과 민족적 자부심에 언제나 압도 당하는 것이었다.

 

지금은 아름다운 추억이 됐지만 그분과 결혼하러 빈에서 미국으로 건너갈때도 나는 입국비자를 얻기 위해 남다른 고충을 겪어야만 했다. 그분이 끝까지 미국시민권을 거부했기 때문이었다. 이 당당한 무국적인 남편과 내가 이로 인해 겪은 고초는 그분이 대한민국 건국을 이룰 때까지 계속되었다.

 

일본이 내건 30만달러의 현상금이 목에 걸린채 비공식 여권을 가지고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하와이와 상해, 제네바, 모스크바등 오대양과 각대륙을 종횡무진 나그네 생활을 하였었다. 그리고 중국인 시체를 운반하는 배안에 누워서 태평양을 건넌 적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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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독립지도자의 위신을 지키며 모든 면에서 남모르는 내핍생활을 지속했던 독립운동시절에 우리는 하루 두끼를 절식할 때도 있었다. 나와 단 둘이 식사할 때는 남편은 늘 기도를 했다.

 [우리가 먹는 이 음식을 우리동포 모두에게 골고루 허락해 주시옵소서]

하루 한끼의 식사에도 감사하며 머리숙여 기도하는 남편이 측은하게 느껴져서 목이 메인 일이 이제는 먼 옛날 얘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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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 하느라 밤낮없이 넓은 미국땅을 누비고 다닐때 였다.

남편은 이곳저곳의 강연시간과 방송이나 신문기자와의 약속시간에 대느라고 운전대만 잡으면 과속으로 차를 몰아 태풍처럼 질주했다.

 

 그의 과속운전은 먼거리를 짧은 시간에 가야하는 바쁜 일정 때문이기도 했지만 마음껏 달려야먄 직성이 풀리는 혁명가적 기질 탓으로 보였다.

 

워싱턴의 프레스클럽에서 연설하기 위해 남편이 차를 몰고 뉴욕에서 워싱턴으로 달리던 때의 일이다. 시간이 급박했기 때문에 남편은 그 격렬한 과속운전솜씨를 발휘하기 시작했다.

 

나는 조심스러워서 과속을 제지했지만 남편은 아랑곳없이 대낮에 헤드라이트를 켠채 신호를 무시하고 논스톱으로 마구 달렸다.

 

곧 두대의 기동경찰 오토바이가 사이렌을 울리며 우리차의 뒤를 따라왔다. 남편은 더욱 무섭게 속력을 내며 달렸다. 나는 간이 콩알만해지고 등과 손에 땀이 나다 못해 새파랗게 질렸으나 남편은 태연하고 의기양양했다.

 

뉴욕에서 워싱턴으로 끝까지 따라왔던 두대나 되는 기동경찰의 오토바이에 붙잡히지 않은채 남편의 차는 정시에 프레스클럽 강연장에 도착했다.

 

남편이 연단에 올라서서 열변을 토하며 청중들을 웃기기도 하고 울리기도 하며 수십번 박수갈채를 받았다. 강연장 입구에서 나편이 나오기를 기다리며 벼르고있던 두대의 기동경찰도 어느새 열렬히 박수를 보내고 있었다. 아마 그들도 남편의 연설에 무척 감동된 모양이었다. 연설을 끝내고 나오는 남편을 붙잡을 생각도 않고 나에게 다가와서 한마디 충고를 해주었다.

 

[기동경찰 20년에 우리가 따라잡지못한 유일한 교통위반자는 당신 남편 한사람뿐이오. 더 일찍 천당가지 않으려면 부인이 단단히 조심시키시오]하고 그들이 남편을 향해 승리의 신호를 보내고 웃고 돌아가자 나는 그제서야 정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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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편은 늘 [욕심내고 화내고 남을 미워하는 것이 건강에 제일 해롭고, 항상 기뻐하고 감사하며 남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은 늙지 않는다]고 말했다. 건강을 유지하는 최선의 비결은 언제나 마음을 편안히 갖고 잠을 잘 자는 것이라고 남편은 말해주었다. 미국에서 남편은 많은 사교모임에 나갔지만 술과 담배는 일체 입에 대지 않았다.

 

청년시절 집안 어른들로 부터 술 마시는 법을 배웠다는데 구국운동할때부터 술과  담배를 끊어버렸다고 했다. 그러나 해방후 귀국해서 가끔 윤석오씨와 이기붕씨 집에서 정성껏 담가보낸 막걸리를 [불로장수주]라고 남편은 나에게도 조금씩 권하며 즐긴적은 있었다.

 

그러나 6.25전쟁후 [굶는 국민이 있는데 어찌 쌀로 만든 막걸리를 마실수가 있겠는가]고 막걸리는 물론 다른술도 입에 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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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은 가슴에 울분이 쌓이면 장작을 열심히 팼다. 장작패는 일은 남편이 젊었을 때부터 해왔다고 했다.

약소민족의 지도자로서 나라없는 설움과 냉대를 받으며 강대국의 횡포에 시달려 온 남편에겐 장작패는 습관이야 말로 쌓인 스트레스를 풀어주고 건강을 지켜준 비결이 아니었나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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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보통 나물 두가지에 국 한가지로 식사를 했다 .......

 ...... 저녁 식사 때면 낮에 먹던 반찬 갖고 오라고 말하셨어요.......

 .....  생활하시는 게 일반 서민들하고 하나도 다르지 않았어요. 오히려 보통 사람들보다 훨씬 궁핍하게 살았어요 ........     ]

 

 

『저렇게 살려면 우리는 대통령 안한다』고 했지요

 


1947년 이화장 뒷집에 살았던 인연으로 李承晩 대통령 일가와 14년간 생활 했던 方在玉(71)씨를 만났다. 이화장을 시찰하러 왔던 李起鵬씨가 그녀에게 청소를 부탁했고 그 일을 계기로 이화장에서 경무대, 다시 이화장까지 대통령 내외와 가장 가까이서 지내게 되었다. 경무대 禹石根(우석근) 경사와 결혼했다.

 

方在玉씨는 李대통령을 매우 자상한 분, 프란체스카 여사는 매우 알뜰한 분 이라고 기억했다. 方在玉씨가 맹장염에 걸렸을 때 대통령은 方씨의 아버지 를 경무대로 불러서 수술을 시켜도 좋은지 물은 다음 수술하게 했다. 처녀의 몸에 칼을 대려면 아버지의 허락을 받는 게 마땅하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소탈한 성격의 李承晩 대통령은 보통 나물 두 가지에 국 한 가지로 식사를 했다고 한다.

 

『저녁 식사 때면 낮에 먹던 반찬 갖고 오라고 말하셨어요. 손님을 초대했 을 때 외에는 특별한 음식을 준비하지 않았어요. 생활하시는 게 일반 서민들하고 하나도 다르지 않았어요. 오히려 보통 사람들보다 훨씬 궁핍하게 살았어요』

 


프란체스카 여사는 경무대에 있을 때도 미장원에 가지 않았다고 한다. 실핀으로 머리를 감았다가 드라이로 말리는 게 고작이었다. 옷도 산 적이 없다고 한다. 천을 구입해 와서 비서인 김신영씨와 함께 블라우스를 만들어서 입었다. 경무대에서도 옷을 꿰매 입는 건 여전했는데 어느 날 대통령이 方在玉씨에게 이렇게 하소연을 했다.

 

『대통령께서 내복을 들고 저에게 「재옥아 이 꿰맨 걸 나더러 또 입으라 그런다」하시면서 난처한 표정을 지으셨던 기억이 나요. 너무나도 알뜰하신 영부인이었죠. 양말도 기워 신고 가루비누도 숟가락으로 재서 썼어요. 무섭게 절약하셨어요. 오스트리아에서 영구 귀국하실 때는 다 떨어진 행주까지 갖고 오셨더군요』

 

14년간 한집에서 생활하면서 대통령의 수발을 들었던 方在玉씨는 두 사람이 부부싸움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고 한다.

 

『대통령이 급한 성격이어서 화를 내면 할머니(方씨는 프란체스카 여사를 할머니라고 지칭했다)가 일단 피하기 때문에 부부싸움이 되지 않아요.


할머니가 李대통령의 음식을 일일이 만들어 드리고, 또 다른 사람이 만든 음식을 일일이 확인해 봤다는 얘기들을 하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아요. 할머니가 우리들에게 지시를 하면 우리들이 알아서 척척 했지요. 우리들에게 많이 맡겼어요. 소탈한 성격이어서 아랫사람들 하는 일에 별로 간섭을 하지 않았어요.


 다만 두 분 내의와 양말은 항상 할머니께서 직접 손으로 세탁하셨어요. 언제나 「고맙습니다」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사셨어요. 사람 차별하지 않고 일하는 우리들에게도 늘 「고맙습니다」하고 인사하셨지요. 한국말을 배워서 우리들에게 간단한 명령어와 단어를 사용해 말씀하셨어요.

두 분은 아랫사람들과 격의없이 지내셨어요. 그야말로 인정 많은 할아버지 할머니 셨어요. 제가 허리가 아파 고생할 때 할머니께서 허리에 안티프라민을 바르고 손으로 맛사지해 주셨던 일을 잊을 수가 없어요. 할머니는 명절 때 선물이 들어오면 모아두었다가 일하는 사람들 생일이 되면 나눠주셨어요』

 


方在玉씨는 李대통령이 나이가 많아 세상 물정에 어두웠다고 말하는 것은 와전된 얘기라고 전한다. 아침마다 자신이 직접 일간신문과 경제신문을 갖다 드렸고 신문을 꼭 읽었다는 것이다.

 

 

프란체스카 여사가 李起鵬씨의 아내 박마리아와 유일하게 친분을 가졌던 것으로 알려진 것도 잘못된 점이라고 지적했다. 김정열 국방장관, 손원일 해군참모총장, 윤치영 내무장관의 부인들과도 친밀하게 지냈으며 정운수 의원 부인 편정희 여사, YWCA 총무였던 박에스더, 이화여대의 金活蘭 박사, 김신실·김영의 교수, 중앙대 설립자 임영신씨 등 영어로 대화가 가능한 사람들이 경무대로 프란체스카 여사를 자주 찾아왔다고 한다. 김활란 박사와 임영신씨는 李承晩 대통령 영결식 때 흰족도리를 썼을 정도로 친밀하게 지냈다.

 

 

方在玉씨는 李대통령이 하야하던 날 경무대에서 근무하던 사람들이 너무 많이 울어 울음바다를 이루었다고 일러주었다. 이화장으로 다시 돌아왔을 때 기름이 없어서 총무처에 기름을 좀 달라고 했지만 거절당했다고 한다. 쌀을 살 돈이 없어서 온실의 화초를 팔아서 쌀을 사기도 했다.

 

『대통령께서 돈이 없어서 우리들에게 월급을 못 주실 거라는 걸 알았지만 두 분을 너무 존경하고 좋아했기 때문에 모두들 이화장까지 따라왔어요. 함께 생활하면서 두 분에게서 무엇 하나 어긋난 점을 발견하지 못했어요. 검소하고 소박하고 너무도 존경할 만한 분들이었지요』

 

대통령 내외가 하와이로 떠나자마자 경찰서에서 나와 물건에 딱지를 붙이고 물건을 실어 내갔다. 모두들 어쩔 줄 몰라 그저 발만 동동 구르며 울었다고 한다. 짐을 실어 내가고 폐가처럼 되어버린 이화장에서 사람들은 눈물을 흘리다가 뿔뿔이 흩어졌다.

 


경무대 식구들은 프란체스카 여사가 다시 한국에 돌아온 후 정기적으로 찾아뵈었고 方在玉씨를 비롯해 경무대에서 일했던 많은 사람들이 프란체스카 여사 영결식 때 상복을 입었다고 한다. 지금까지 경무대 식구들은 아들 李仁秀씨 가족들과 내왕을 하고 있다.

 

『전 정치적인 건 잘 몰라요. 하지만 그렇게 높은 자리에 있으면서 기운 옷을 입고 아끼느라 물건 하나 제대로 못 쓰는 모습은 모든 국민이 본받아야 돼요. 그때 경무대에서 일하던 사람들끼리 그랬어요. 저렇게 살려면 우리는 대통령 안한다고요. 높은 자리에서 그렇게 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죠』方씨는 부정부패가 만연한 세상에서 새록새록 李대통령 내외가 생각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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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붓글씨로 [안빈낙업(安貧樂業)]이라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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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내로서 가장 행복했을 때는 남편이 대통령이 된 후 첫월급을 받았을 때였다. 그 때 남편은 붓글씨로 [안빈낙업(安貧樂業)]이라는 글씨도 함께 써주었다.

 [어려운 나라실정과 자기분수에 맞는 검소한 생활을 즐기고 일하는 것에서 기쁨과 보람을 느낀다]는 뜻이 담긴 이 붓글씨를 나는 지금도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남편의 대통령 재임시 경무대에서 식사는 주로 내가 마련했고 우리의 내의와 양말도 꼭 내손으로 빨았다. 남편의 뜻에 따라 비싼 고기류는 명절과 축일 또는 손님접대할 때만 사왔다. 대통령은 보통가정의 평범한 음식인 물김치.콩나물.두부.김.된장찌개.생선구이 같은 것을 좋아했기 때문에 우리집의 단골반찬은 이런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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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월급을 건넬 때 李박사는 아내에게 「安貧樂業」(안빈낙업)이라는 글씨를 써주면서 『어려운 나라 실정과 자기 분수에 맞게 생활하라』고 일러주었다. 이미 독립운동가의 아내로 12년을 살아온 그녀에게 그 일은 힘들지 않았다. 돈암장에서 마포장, 이화장을 거쳐 대통령 관저 경무대의 주인이 된 李대통령은 스스로가 근검절약을 실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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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무대는 일본식과 미국식이 뒤섞인 불편하고 우중충한 분위기였다. 일본인 총독 미나미가 지은 이 건물에는 역대 조선 총독들이 살았으며 李대통령이 입주하기 전에 미군 하지 장군이 살았다. 일본식인 다다미방을 좋아하지 않았으나 李대통령은 경비를 절약하기 위해 경무대를 개조하지 않았다. 목욕탕의 욕조가 너무 좁아 욕조 한편을 파내 다리를 뻗을 수 있게 했을 뿐이다. 李대통령은 『나라 일 보는 사람이 자기 집을 고치다 보면 그런 데서 부정부패가 싹트게 된다』며 이화장은 물론 경무대도 손대지 못하게 하였다. 대통령이 진해에 내려가 있는 동안 경무대의 베란다 수리를 했다가 혼이 난 직원들은 다시는 대통령의 허락 없이 경무대를 수리할 수 없었다. 경무대 공보실장을 지낸 吳在璟(오재경·前 공보부 장관)씨는 어느 날 밤 경무대 갔다가 이층에서 내려오는 대통령 부부를 보고 이렇게 느꼈다고 한다.


『2층에서 가운을 입고 내려오시는데 어느 양로원에서 온 것 같았어요. 커튼 하나도 바꾸지 않고 일본 시대 쓰던 그대로였죠. 경무대를 하나도 수리하지 않고 사용할 정도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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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재자는 자기 친족과 재산을 챙기기 마련이지만 이 대통령은 하야 이후 사람 키 만한 박스에 막대기를 꽂아 옷장으로 사용했을 정도였다”고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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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27일 새벽 2시 申性模(신성모) 국방장관 과 李起鵬(이기붕) 서울시장, 조병옥씨가 李대통령에게 南下(남하)를 권유했을 때 『 서울을 사수해야 해. 나는 안 떠나겠네』 하며 화난 걸음으로 침실문을 닫고 들어갔다. 곧이어 따라 들어간 프란체스카가 『어려운 때 국가원수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나라가 위태롭다고 합니다. 수원으로 잠시 내려갔다가 곧 올라오시면 어떨까요?』하고 간곡히 말했다. 李대통령은 아내에게도 화를 내면서 그렇게 말한 사람이 누구냐고 소리질렀다.


그때 경무대 경찰 간부가 청량리까지 적군이 들어왔다는 긴급보고를 했고 申장관이


『잠깐만 수원까지 내려가 주시면 훨씬 유 리하게 싸울 수 있고 꼭 서울을 지켜낼 수 있습니다』 하며 머리를 조아렸다. 다시금 사태가 긴박하게 돌아간다는 긴급보고가 이어지자 대통령 일행은 새벽 3시 30분 경 무대를 떠나게 되었다. 경무대 금고를 다 털었을 때 5만원밖에 없어 그 돈을 가지고 피난길에 올랐다. 당시 5만원은 요즘 화폐 가치로 따졌을 때 2만원 남짓한 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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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에 피난갔을 때 曺在千(조재천) 경북지사 관저에 머물렀다. 대통령 부부와 정부각료 국회의원 등 70여 명이 함께 지냈다. 수발을 드느라 曺지사 부인이 유산을 하기까지 했다. 李대통령은 부인의 일을 덜어주기 위해 아침에 사과와 토마토, 날달걀을 먹고 모시옷에도 풀을 먹이지 않고 그냥 입었다. 일선장병 위문을 가거나 피난민 수용소를 갔다가 때를 놓쳐 굶는 경우가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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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부부는 모기에 물린데다 땀띠까지 나서 고생이 심했다. 워커 장군에게 땀띠연 고를 부탁하자 다른 상비약과 영양제 한 박 스까지 보내왔다. 이 약상자를 본 대통령은 아내에게 한마디 의논도 없이 보고를 하러 들어온 申性模 국방장관에게 『일선의 우리 아이들에게 갖다 주라』고 건네주었다. 李대통령은 평소 군인들을 「우리 아이들 」이라고 불렀다. 워커 장군이 보낸 약에다가 오스트리아 처가에서 보내온 비타민까지 몽땅 들려보냈다. 프란체스카가 申장관에 게 땀띠연고 하나만 놓고 가라는 사인을 보냈으나 李박사가 무서운 눈으로 노려보아 申장관은 즉시 떠나야 했다. 전쟁 중에 빈의 친정집에서 언니 베티가 「 디 프레세」紙 특파원 편에 보내온 비타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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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은 부상당한 군인들을 위해 자신이 사용하던 삼베 홑이불까지 싸보냈다. 대통령 부부는 밤새워 미국에 있는 친지들에게 거적 위에서 신음하고 있는 부상병들의 형 편을 알리고 구호품을 보내달라는 편지를 보냈다. 오스트리아 친정에서 보낸 구호품 을 필두로 속속 금품이 도착하였다. 李대통령은 식료품이 많이 들어오면 경무대 주방장인 양학준 노인을 데리고 가서 군인 들에게 음식을 만들어 주기도 했다. 李대통령은 양노인을 시켜 계속 쌀값을 체크하면서 전쟁 중의 물가동향을 주시했다. 남편 앞에서 눈물을 보이지 않는 프란체스카도 언니의 편지를 받으면 혼자서 눈시울을 적시곤 했다. 시집온 후 17년 동안 한번도 뵙지 못한 어머니였다. 그녀는 「전쟁이 승리로 끝나면 꼭 찾아뵈올 테니 그때까지 기다려 달라」고 마음속으로 되뇌였으나 어머니는 한국전쟁 기간에 세상을 떠났다. 대통령 부부는 이 사실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李대통령은 아내에게 장례식에 다녀오라고 했지만 여비도 없는데다 한시라도 대통령 의 곁을 떠날 수 없는 상황이었다. 9·28서울 수복으로 경무대로 돌아왔을 때 대통령 집무실에 고급양복 웃저고리와 양 말, 소련제 양주 등이 널려 있었고 바닥은 온통 대변투성이였다. 어디서 약탈해 왔는 지 세탁기 10여 대, 양복장 일곱 개도 있었다. 대강당 바닥에는 말똥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이화장은 침대 하나만 남겨놓고 몽땅 털어가 버렸다. 그 광경을 보고 李대통령은 공산군을 『敵(적)이라기보다는 강도 집단』이라고 표현했다.

 

그해 겨울, 이화여대 金活蘭(김활란) 박사가 워커 장군의 동상기금으로 써달라며 교수들의 월급을 모아 경무대를 방문했다. 난로도 안 피우고 온몸을 담요로 감싼 채 일 하는 李대통령을 보며 金活蘭 박사는 눈물 을 글썽였다. 金活蘭 박사가 『연세도 있으 시니 난로 정도는 피우고 일하시라』고 권 고하자 대통령은 『다리 밑에서 떨고 있는 수많은 피난민 동포들을 생각하면 이것도 과분하다』면서 『찬 손을 따뜻하게 해줄 테니 내게 가까이 오라』고 말했다. 그러자 프란체스카가 『내 허락 없이는 안 된다 』고 농담하여 오랜만에 대통령 부부는 파안대소를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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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후퇴 때 프란체스카는 손과 발에 동상이 걸려 한동안 고생했다. 중요한 기밀서신 을 타이핑해야 했던 아내가 몹시 괴로워하자 대통령은 마늘껍질과 대를 삶은 물을 미 지근하게 식혀서 손발을 담그도록 했다. 프 란체스카는 그런 방법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잠자코 남편의 뜻을 따랐다. 당시 부산 임시관저에 미국 무초 대사와 미국 장군 들이 드나들었는데 그들에게 부탁하면 동상 치료 연고를 쉽게 구할 수 있었겠지만 李대 통령은 외국인들에게 개인적으로 신세 지는 일을 몹시 싫어했다. 결국 李대통령이 가르쳐 준 민간요법으로 동상을 치료할 수 있었다.


1951년 부산 임시관저에서 생일을 맞았을 때 李대통령은 미역국과 안남미 쌀밥 외에는 단 한 가지도 더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엄명을 내렸다. 프란체스카는 그때를 가장 잊혀지지 않는 생일날이라고 6·25 비망록에 기록했다.


전쟁 중에 李대통령은 「죽음이 결코 두려운 것은 아니다. 다만 어떻게 죽느냐가 문제다. 나는 자유와 민주제단에 생명을 바치려니와 나의 존경하는 민주국민들도 끝까지 싸워 남북통일을 이룩해야 할 것이다. 다만 後嗣(후사) 없이 죽는 게 先塋(선영)에 죄지은 불효자일 뿐이다」라는 유서를 써 서 갖고 다녔다. 프란체스카는 「後嗣 없는 불효자」란 대목에 가슴이 갈기갈기 찢기는 고통을 느껴야 했다. 李박사는 화가 나면 가끔 『아들도 못 낳는 주제에…』라고 소리를 쳐 아내를 울렸다고 한다. 李대통령은 모제르 권총 한 자루를 머리맡에 두고 『이것은 공산당 서너 놈을 쏜 뒤에 우리 둘을 천당으로 보내줄 티켓』이라고 아내에게 말했다. 잠자리 들기 전에 프란체스카가 『우리 두 사람 티켓은 잘 간수 했어요?』 하면 『잘 있지』 하며 크게 웃곤 했다. 두 사람은 극약도 몸에 지니고 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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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체스카 여사는 「대통령의 건강」에서 남편의 모습을 이렇게 기술했다.


『웃음을 잃지 않았고 질투나 노여움, 분노의 감정을 갖지 않았다. 남편은 유머가 풍부해 늘 주변을 즐겁게 하였으며 모함하고 중상하는 자들에게도 늘 관대했다. 나에게도 항상 용서하고 잊어버리라고 타일렀다.


무엇보다도 자신의 일에 자부심을 가진 것이 건강을 가져왔다. 「독립 미치광이 노인 」이라는 말을 듣기도 했지만 확고한 신념과 사명감을 갖고 굽히는 일 없이 일했다. 늘 젊은이처럼 활기에 차서 일했다.


그는 언제나 배우는 자세를 견지했다. 80이 넘은 후에도 새로운 영어단어를 손바닥에 써 가지고 외우기도 했다. 남편이 건강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민족의 소원인 남북통일을 기어이 이룩해야겠다는 굳건한 의지와 신념을 갖고 불철주야 일하며 노력 한 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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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평생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생활을 계속한 것도 건강의 비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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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중 李起鵬씨의 아들 康石(강석)을 양자로 맞은 후에 집안에는 웃음꽃이 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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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무대 내실에서 일했던 方在玉씨는 康石이가 깍듯하고 반듯한 청년이었다며 「귀하신 몸」으로 알려진 것과 달리 경무대 이층의 낡고 초라한 방에서 지냈다고 일러주었다. 겨울에는 李대통령이 손수 창호지를 오려서 문풍지를 발라주었지만 돈이 든다며 도배도 안 해주고 침대나 家具도 사주지 않았다고 한다.하지만 정을 쏟았던 아들이 자결하고 자유당 정권도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아들의 자결 소식은 프란체스카가 그토록 지키려고 애썼던 대통령의 건강을 영원히 빼앗아 가고 말았다. 李대통령은 아들의 자결 소식을 접하고 실어증까지 겹쳐 유창한 영어를 모두 잊어버리고 말았다.대통령직을 사임해야겠다는 결심이 이미 서 있었을 때 그토록 사랑했던 양자 康石이 경무대 안에서 자기 권총으로 부모와 동생을 쏘고 함께 자결했다는 비보를 들었을 때 노인의 슬픔과 충격이 너무나 깊었다.자살 소식을 듣고 李대통령은 심한 안면경련을 일으키며 눈이 충혈되더니 『이 불쌍한 늙은이를 버리고 죽다니』라며 비통해 하면서 『아들 하나 제대로 못 지키는 주제에 살아서 무엇 하나』 하며 한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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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29일 대통령 부부는 하와이로 떠나면서 마당에 모여 있던 사람들에게 『늦어도 한 달 후에는 돌아올 테니 집 잘 봐달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그 길로 李承晩 대통령은 살아서 고국에 돌아오지 못했다. 짐은 전부 네 개였는데 옷을 담은 트렁크 두 개와 마실 것과 점심, 약품을 담은 가방 하나, 타자기 가방이 전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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還國(환국)이 쉽게 이루어지지 않자 崔伯烈씨에게 『나를 20년간 여기다 붙잡아 둘 작정이냐, 나는 걸어서라도 떠날 테야』라며 신발을 찾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李대통령은 여비를 崔伯烈씨와 윌버트 최씨가 대주기로 했다고 누차 얘기해도 여비가 없어서 돌아가지 못한다고 생각하였다. 여비를 마련하기 위해 돈을 아껴야 한다며 이발을 하지 않아 프란체스카가 집에서 머리를 잘라주어야 했다. 시장에서 식품을 사올 때 봉지가 크면 『귀국할 여비를 쓴다』며 나무랐다. 李대통령이 물건을 구입하면 걱정을 많이 해서 일주일에 한 번만 식료품을 사러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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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지나면 비행기 여행조차 불가능해진다는 李대통령 주치의의 판정에 따라 1962년 3월17일, 부부는 귀국을 결정했다. 출발 사흘 전부터 보행이 불편하여 휠체어에 의지하게 되었으나 李대통령은 섭섭해 하는 교포들에게 『우리 모두 서울 가서 만나세』라며 어린애처럼 좋아했다.출발 당일 간단한 아침식사를 끝낸 뒤 외출복을 입고 소파에 앉아 있을 때 金世源(김세원) 총영사가 찾아왔다. 본국 정부의 지시에 따라 총영사가 귀국을 만류하자 조용히 듣고 있던 李承晩 대통령의 눈이 발갛게 충혈되기 시작했다.『누가 정부 일을 하든지 정말 잘해가기 바라오』그렇게 말하면서 휠체어에 몸을 기댄 李대통령은 다시는 혼자 일어서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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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5.7. 이승만 대통령  가족장 장례

 


[ ..... 장례식 때 엄청난 인파가 몰려와 참배를 하는 바람에 이화장 담이 무너지기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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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仁秀 박사는 李承晩 대통령이 국민에게 남긴 유언을 소개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는 신약성경 갈라디아서 5장 1절 말씀을 자주 하시면서 국민들께 남기는 유언이라고 하셨어요.


다시 나라를 잃고 침략을 당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경제적, 문화적 침략에 대비해 정체성을 해칠 노예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유해가 운구되고 이화장에 빈소가 마련되자 전국에서 추모객이 몰려들었다.

장례식 때 엄청난 인파가 몰려와 참배를 하는 바람에 이화장 담이 무너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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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시경은 .... 고 이박사의 장례행렬을 보러 나온 서울 시민의 수를  1백만명이 넘는 것으로 추산,


         해방 이후 최대의 인파 ..........   ]

 

 

[ ..... 시청앞에 모인 약 35만명(경찰 추산)의 인파로 막혀 ......

  ..... 시민과의 고별절차는 취소 ......    ]

 

 

1965.7.27.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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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 정오 무렵 정동 교회에서 나와 동작동으로 향해 떠난 영구차는 시청앞에 모인 약 35만명(경찰 추산)의 인파로 막혀 한동안 나아가지 못하다가 낮 12시 25분경 길이 트여 남대문쪽으로 빠져 나갔다. 시청앞에서 있을 예정이던 이 박사의 녹음 방송 등 일반 시민과의 고별절차는 취소됐다.


연도


ㅇ 이화동 입구에서부터 광목줄로 영구차를 매어 앞뒤로 사방에 남녀 90명씩 7백 20명의 남녀가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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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 종로 5가 로타리에는 수천 시민이운집해서 교통은 완전두절, 종로에 접어들자 영구행렬은 제대로 틀이 잡히기 시작 , 호상 변영태 씨가 선두에 섰으며 그뒤에 태극기 초상화 행장 만장을 든 배재중학생들 해군조악대에 이어 영구차가 따라 영구차량쪽에는 2대의 경찰 백차와 기마대가 호위했다.


국립묘지


ㅇ 삼각지에서부터 차로 운구하려던 예정을 바꾸어 영구행렬은 계속 도보로 오후 2시 40분 한강 인도교를 통과 , 3시반경 동작동 국립묘지에 도착하여 용사문 앞에서 정부 주관으로 영결식을 가졌다.이 식전에서 박치순 목사의 기도와 박대통령의 조사(정총리 대독)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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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후 최대인파


연도의 만송시민
경찰은 백만추계


서울시경은 27일 고 이박사의 장례행렬을 보러 나온 서울 시민의 수를  1백만명이 넘는 것으로 추산, 해방 이후 최대의 인파라고 밝히고 이날 연도 경비를 위해 관하 3천명의 경관을  동원했다고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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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와는 달리  이박사 장례식행렬이 세종로 그 자리를 지나갈 때의 연도광경은 그의 영구가 하와이로부터 돌아 오던 그날의 성관보다 한층 장관을 이루었다. 이박사의 사면초상화를 앞세운 그뒤로 5백여개를 헤는 만장과 4백여개의 조화대열 그리고 소복에 상장을 두른 수천백명의 남녀수상객과 악대들이 호위하는 가운데 황국 꽃으로 뒤덮힌 영구차  그만하면 고 우남에게 영광의 극치라고 할 수 있다.


국장은  그 보다 더 성할 것이며 국민장인들 그 이상 장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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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5년의 서울인구는 3백80만

 

 

 

 


   *    2009.5.

 

[ ..... 노 전 대통령의 노제(路祭)와 서울역까지 이어진 거리 운구행사에서는


        최대 18만여명(경찰 추산, 노제 주최측 40만~50만명 주장)의 시민들이 .......      ]

 

 

<김前대통령서거> 되돌아본 전직 대통령 장례


노무현·최규하 국민장, 박정희 국장, 윤보선·이승만 가족장

 

 연합 | 2009-08-18

 

 
  
전직 대통령의 장례는 `국장·국민장에 관한 법률'에 따라 국장(國葬)이나 국민장(國民葬)으로 거행될 수 있다.


18일 행정안전부에 따르면 노무현·최규하 전 대통령은 국민장, 박정희 전 대통령은 국장, 윤보선·이승만 전 대통령은 가족장으로 치러졌다.

 


노 전 대통령의 영결식은 5월 23일 스스로 생을 마감한 지 7일만인 5월 29일 서울 경복궁 앞뜰에서 이명박 대통령을 비롯한 정·관계 주요 인사, 권양숙 여사를 포함한 유족 등 2천5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거행됐다.


김대중 전 대통령도 노 전 대통령의 영결식에 참석했다.


특히 서울광장에서 거행된 노 전 대통령의 노제(路祭)와 서울역까지 이어진 거리 운구행사에서는 최대 18만여명(경찰 추산, 노제 주최측 40만~50만명 주장)의 시민들이 참석해 노 전 대통령을 애도하기도 했다.

 


노 전 대통령의 유해는 이어 경기도 수원시 연화장에서 유족과 추도객들의 애도 속에 화장식이 치러진 뒤 김해시 진영읍 봉하마을 사저 인근의 봉화산 정토원에 임시로 안치됐고, 49재를 마친 뒤 봉화산 사자바위 아래에 조성된 묘역에 안장됐다.


노 전 대통령의 서거 당시 전국 102곳의 정부 분향소에는 약 100만명이 조문하고, 서거 이후 안장식까지 봉하마을 분향소와 묘역에는 160만명 가량이 다녀간 것으로 집계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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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수립 이후 현재까지 국민장은 노무현·최규하 전 대통령과 1983년 미얀마 랑군 국립묘지에서 북한의 폭탄테러로 순직한 당시 서석준 부총리 등 17명의 장례식을 포함해 총 13회 엄수됐다.

 


반면 국장은 1979년 10월26일 서거한 박정희 전 대통령의 장례가 유일하다.


박 전 대통령의 영결식은 9일간의 장의 기간을 거쳐 11월3일 중앙청 광장에서 엄수됐고, 유해는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 국가원수 묘역에 안장됐다.


박 전 대통령의 장의기간 전국에는 조기가 게양되고 중앙청 광장뿐 아니라 일선 읍ㆍ면ㆍ동사무소와 재외공관까지 분향소가 설치됐으며, 국장 당일은 임시 공휴일로 지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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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전 대통령의 장례도 1965년 7월 가족장으로 치러졌고 유해는 국립묘지에 안장됐다./연합

 

 


  * 2009  서울시 인구 1046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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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8년 9월7일  농지개혁법 기초위원회가 발족

 

[ ...... 이승만은 정부수립 선포식이 끝나자마자 농지개혁법의 제정을 다그쳤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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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은 정부수립 선포식이 끝나자마자 농지개혁법의 제정을 다그쳤다. 그리하여 농림부 직제가 공포되기도 전인 1948년 9월7일에 농지개혁법 기초위원회가 발족했는데, 위원장은 농림부 장관 조봉암, 부위원장은 기획처장 이순탁(李順鐸)과 농림부 차관 강정택(姜鋌澤), 그리고 위원은 갓 발령받은 농림부 농지국장 강진국(姜辰國)과 지정과장 윤택중(尹澤重), 분배과장 배기철(裵基澈), 사정과장 안창수(安昌洙) 세 담당과장들이었다.3)


법안기초에 착수는 하였으나 참고자료도 아쉽고 각종 통계도 신빙성이 희박하여 필요한 자료를 농촌으로부터 직접 수집해야 할 형편이었다. 초안을 기초했던 강진국은 “농촌 부락의 머슴방이 농지개혁법안 기초의 산실이었다.… 민국정부 수립 후에도 좌익분자가 농촌지대에 많이 묻혀 있다고 짐작했던 까닭에 중앙 관리가 왔다면 경계하고 함구하리라는 예감에서 신문기자를 가장했다”라고 썼다.4)


농림부가 자료수집으로 시일을 끌자 1949년 봄갈이까지 농지개혁을 실시한다고 공언하고 있던 이승만은 11월 중순에 조봉암을 불러 불호령을 내렸다. 이승만이 격노한 것은 농지개혁 계획이 늦어지면서 신문지상에 지주와 소작인 사이의 분쟁이 보도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농림부의 농지개혁법 시안은 이렇게 쫓기는 상황 속에서 11월19일과 20일 이틀 동안 강진국의 집에서 강진국과 세 담당과장이 꼬박 이틀 밤을 새워 만들었다. 이 시안을 다시 강진국과 차관 강정택이 머리를 맞대고 이틀 재검토했다. 초안을 들고 가서 조봉암에게 보고하자 조봉암은 내용을 읽어보지도 않고 “소작인이 잘된다지만 지주도 살아야 할 것 아니오”라고 말했다고 한다.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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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부가 대지주가 되고  농민들은 다 소작인으로 경작 ........

  ...... 부호에 노예되던 것이  지금은 정부에 노예가 된다면 ........    ]

 


[  ...... 자본가가 있어야 국내에 경제가 유통되어서 민중이 다 살 수 있다 ........

   ..... 공장에 일을 얻어 생활방도를 만들어 주어야 .......

  ...... 공업과 산업은 자본이 아니고는 될 수 없는 것이니 .........   

  ...... 토지를 내어놓고 그 가격을 받아서 자본을 만들어야 공업에 착수할 수 있을 것 .........      ]

 

 

 李承晩 대통령, ‘토지개혁문제’라는 제목으로 방송연설

 

게재지명 서울신문
게재일자 1948년 12월 07일

 

지난 4일 오후 8시 이승만 대통령은 ‘토지개혁문제’에 관하여 23분간에 걸쳐 중앙방송국 마이크를 통하여 대요 다음과 같은 요지의 강연방송을 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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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나라에 소위 국유지라는 농토와 적산토지를 합하여 다 민유지로 분배시킬 것인데 땅 없는 농민들에게 넉넉히 나누어서 作農하게 하되 그 땅을 그저 내주는 것이 아니고 정당한 가격을 정하여 매년 얼마씩 정부에 보상하기로 約條를 정하고 팔게 할지니 보상하는 條理와 몇 해만에 다 갚는다는 등 細節目은 다 국법으로 정하게 될 것이니 미리 말할 수 없으나 대체로 말하자면 농민이 그 땅에서 自農하여 묵히는 땅이 없고 그 所出미곡으로 가족에 1년 計糧을 제하고는 여유를 팔아서 돈으로 바치거나 미곡을 대신하여 몇 해만에 다 완납한 후에는 정부에서 문서를 주어서 영구히 농민에 사유지로 만들 것이니 이것이 즉 우리 정부에서 주장하는 토지개혁책의 요점이요, 모든 농민은 이대로 되기를 바라며 또한 노력할 것입니다. (서울신문 1948. 12. 7)

 


다소간 문제되는 것은 소위 대지주에 소속인 큰 농지에 관한 것입니다. 이 대지주들로 말하면 혹은 몇 대 조상적부터 遺傳하여 내려오는 소유지도 있고 또 혹은 돈을 주고 사서 차지한 토지도 있는 것이니 이상에 말한 바 공공한 천연적 재원을 부자들이 사유로 만들었다는 것은 몇 천년 전에 시작이 잘못되었다는 말이요, 중간에 와서 무슨 방식으로든지 소유권을 가지게 된 것은 누구나 인정치 않을 수 없는 것이니 이 대지주들의 땅을 무조건하고 몰수한다는 것은 法理도 아니오 公義도 아닐 것이므로 이 지주들에 소유권은 인정할 뿐만 아니라 국법으로 보호하는 것이 민주주의에 피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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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제도를 행하는 나라에서는 지주의 땅을 乾沒해서 소작인에게 나누어 준다 하나 실상은 농민에게 주는 것이 아니오 농민들에게 맡겨서 경작하게 하고 그 땅은 정부에서 차지하고 있으므로 그 실상을 말하자면 공산제도가 토지를 인민에게 분배하는 것이 아니라 정부에서 빼앗아서 정부가 대지주가 되고 농민들은 다 소작인으로 경작해서 정부에 받기만 할 뿐이니 부유한 대지주에게 세를 물고 얻어 경작하느니보다 정부의 땅을 얻어서 경작하는 것이 더욱 자유롭지 못하고 속박을 받는 것이니 전에는 부호에 노예되던 것이 지금은 정부에 노예가 된다면 경제상 이해에 무슨 차별이 있으며 농민생활에 아무 도움도 없을 것이다. (서울신문 1948. 12.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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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주의자들의 토지개혁책이라는 것이 우리와 같지 아니한 외에 또 한가지 우리와 같지 아니한 것은 소위 자본주의라는 문제입니다. 그 사람들의 말은 토지분배로 많은 경제력을 공평히 조정하기에 부족한 모든 금융과 각종 재산을 다 평균히 분배해서 자본가가 없게 만들어야 한다 하나니 우리 주의는 이와 상반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본가가 있어야 국내에 경제가 유통되어서 민중이 다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나라가 자고로 농업을 근본으로 삼아서 자족자급할 능력을 가졌었지마는 지금은 인구가 해마다 증가되어 토지는 한정이 있으므로 그 땅의 소출만 가지고는 그 민중이 먹고 살 것이 부족합니다. 그러므로 공업을 숭상해서 생산력이 발전되어야 땅 속에 묻힌 재산을 패어서 인류생활에 공헌할 것이요, 공업의 소출 물산으로 우리도 쓰고 또한 국외에 수출해서 남의 물건을 바꾸어다가 우리의 생활을 돕게 할 것이며 기계공장을 시설해서 國中에 땅이 없이 농사 못하고 일없이 굶게 되는 사람들이 공장에 일을 얻어 생활방도를 만들어 주어야 될 것이니 이것은 공업과 산업이 아니고는 될 수 없는 것이고 공업과 산업은 자본이 아니고는 될 수 없는 것이니, 그러므로 자본가를 다 없이 해다가 노동자만 살 수 있게 하자는 것은 우리가 찬성할 수 없는 것이니 우선 예를 들어 말할지라도 자본이 없어서 기계공장이 문을 닫게 된다면 다수 실업자가 먼저 타격을 당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공산주의자들은 罷工罷業 등 행동으로 자본가와 충돌을 내며 농민으로 지주와 충돌을 내서 모든 민중이 서로 싸우는 중에 정부가 모든 것을 차지하게 하는 폐단을 우리는 절대 포용치 아니하는 것이니 세계 모든 재원에 세 가지 근본되는 토지와 노동과 자본, 이 세 가지가 서로 충돌을 내지 말고 피차 도와서 합류하여 나가는 중에서 모든 것이 和意로 진전되며 부강전진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니 우리는 농민이 지주를 질시하거나 노동자가 자본가를 원수로 여기거나 하여 自相충돌하는 것을 피하고 서로 제휴 공헌하는 중에서 다 잘살 수 있기를 도모하자는 것입니다. (서울신문 1948. 12. 9)


우리 나라의 자본은 대부분이 토지에 있나니 지주들이 다 토지를 내어놓고 그 가격을 받아서 자본을 만들어야 공업에 착수할 수 있을 것이므로, 정부에서는 토지대가를 갚아 줄 것이 큰 문제가 되니 이것은 정부와 국회에서 무슨 특별한 방법이 있어서 지금 지주들로 하여금 상당한 자본을 얻게 하는 것이 긴요한 문제이니 이것은 많은 연구로 해결책이 생기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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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신문 1948. 12.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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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박사 재임 중 국회는 지주 출신이 다수를 점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 박사가 공사주의자였던 조봉암을 농림장관에 임명해 농지개혁을 강력히 추진했다는 점은 대단히 높은 평가를 받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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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차에 걸친 법개정을 통한 우여곡절 끝에 개정안은 1950년 2월 국회에서 통과되었고, 농지개혁법은 최종 확정되어 정부는 이것을 3월 10일 법률 128호로 공포했습니다. 같은 달 25일 이 법의 시행령이 공포되며, 4월 28일에는 시행규칙이, 그리고 농지분배에 관한 세부규정과 요령을 담은 농지분배 점수제규정은 6월 23일에 공포되었습니다.

 

이로부터 이틀 후에 전쟁이 터졌기 때문에 많은 학자들은 농지에 대한 실질적 매수 및 분배는 전쟁 전에 이루어질 수 없었다고 생각했고, 북한으로부터 서울을 되찾은 그 해 가을에나 가서야 실시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 그 동안 널리 알려진 중론이었습니다.


북한도 이와 유사하게 남한 정부는 어떻게든 농지분배를 하지 않으려다가 '조선전쟁' 개시 후 인민군이 전체 면의 78.5%에 해당되는 1,198개 면에서 토지개혁을 실시한 후'에야 마지못해 실시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는 전적으로 잘못 알려진 사실로서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이승만 박사는 정부수립 이전부터 농지개혁에 적극적이었고 이러한 그의 의지 덕분에 전쟁이 터지기 전인 1950년 3월에서 5월 사이에 적어도 농지의 70~80% 정도에 대한 분배가 단행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사실들은 1980년대 중반 한국농촌경제연구원에 의해 그 동안 여러 가지 사정으로 완성을 보지 못했던 농지개혁사 편찬사업이 다시 추진되면서, 농지의 실제 분배과정을 정밀하게 추적한 결과 농지의 분배가 시행령이 공포(3월 25일)되기도 전에 거의 완료되었음을 밝혀낸 것입니다.(김성호, "한국토지제도의 연속성과 단절성(하)", 『농촌경제』, 8권, 4호, 1985년 12월, pp.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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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에서.

 

 


[ ..... 시행령 공포 하루 전인 1950년 3월 24일 이미 농지분배 절차가 완료되어 4월 10일부터 분배 통지서가 발급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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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민당이 지연전술로 나오자 이승만 대통령은 1950년 4월 농림부에 ‘농지개혁 지침’을 내려 보내 “비록 입법이 되지 않아 추진상 곤란이 없지 않으나 만난을 배제하고 단행하라”고 엄명을 내렸다.


 당시 문서를 보면 시행령 공포 하루 전인 1950년 3월 24일 이미 농지분배 절차가 완료되어 4월 10일부터 분배 통지서가 발급됐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관련법규가 마련되지 않은 상황에서 대통령 결단으로 밀어붙인 일종의 월권행위이자 초법적 행위였다.

 
  이승만 대통령의 결단으로 관련법규도 없이 진행된 토지개혁으로 인해 전 농지의 92% 이상이 자작화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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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한의 토지개혁을 어떻게 볼 것인가?
 월간조선  2006

 

 


[ .... 작년 12월 13일 국무회의에서 특별 교시로 금년 춘경기 이전에 완수하게 하라 .......
 

 ..... 1월 17일에는 국회의장에게 공한을 .... 농지개혁관계 추가예산안을 우선 상정케 하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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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전쟁 전에 분배가 단행될 수 있었는가?

 

이러한 여러 가지 증거들로 미루어 볼 때 한국전쟁이 터지기 전에 농지의 상당 부분이 분배되었다는 사실은 부인되기 어려울 것 같다. 문제는 어떻게 관련법규가 정비되기도 전에 정책이 먼저 시행되는 일이 발생했는가이다. 정상적인 근대국가에서는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 1950년 봄 한국에서 발생되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이러한 헤프닝이 벌어질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소관부처의 행정적 판단과 李承晩의 독려가 어우러졌기 때문이다. 정부는 1949년 6월 21일 우여곡절 끜에 농지개혁법(당초법안)을 공포하지만, 그 법안은 내용상 논리적 모순을 안고 있었기 때문에 곧 이어 국회에서 개정작업에 들어갔다. 이 때 행정부의 관련부처에서는 개정안의 국회통과가 시간 문제일 뿐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판단 아래 시행령과 시행규칙을 마련하기 위해 애썼다. 그 결과 세부규칙들은 형식상 공포되지 않았을 뿐 내부적으로는 이미 분배 시행 훨씬 전인 1949년 후반에 마련되어 있었다. 1950년에 들어서자마가 농지개혁 시행에 관한 통첩뿐 아니라 그에 필요한 각종 용지 등이 일선 행정관서에 보내질 수 있었던 것도 이 때문이다(김성호 외,『농지개혁사연구』, 서울 : 한국농촌경제연구원, 1989, pp. 648, 998~999)

 

주무부서인 농림부로서도 농지개혁 사업이 순조롭게 추진되려면 농지분배가 늦어도 보리수확 및 모내기 작업이 시작되는 6월 이전에 끝마쳐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으면 농민들이 곧 누구의 소유가 될지도 모를 농지에 파종하려 들지 않아 올 한 해 농사가 망쳐질 우려가 있었다. 또한 농림분는 농민들에게 서둘러 농지를 분배하고 그들로부터 하곡을 대상으로 상환을 받아야 한편으로는 곧 닥쳐올 지주들에 대한 보상에 충당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당시 식량수급과 관련하여 중요한 행정수단인 양곡수집을 제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한편 이러한 관련 부서의 과잉신속을 부추긴 것은 李承晩의 독려였다. 당시 李承晩이 농지분배를 조속히 시행토록 재촉한 증거는 여러 곳에서 나타나고 있는데, 여기서는 1950년 2월 22일에 있은「서산군 농지개혁 사무 주무자회의 서류」와 1950년 4월 25일 농림부에서 작성한「농지개혁지침」의 해당내용을 소개해 보겠다.

 

 농지개혁 사무는…예산의 불성립과 지방기구 및 각급 농지위원회 미구성으로 천연 중이었던 바 대통령각하께서는 이에 대하여 각별히 진념하시어 작년 12월 13일 국무회의에서 특별 교시로 금년 춘경기 이전에 완수하게 하라는 분부가 있었고 또 1월 17일에는 국회의장에게 공한을 보내시어 농지개혁관계 추가예산안을 우선 상정케 하라 하였으며…사무추진에 적극 매진함을 요함(「서산군 농지개혁사무 주무자회의 서류」, 김성호 외,「농지개혁사연구」, 서울 : 한국농촌경제연구원, 1989, p.936에서 재인용)

 

 춘경기(春耕期)가 촉박하였으므로 추진상 불소(不小)한 곤란이 유(有)하였으나, 만난(萬難)을 배제하고 단행하라는 대통령각하의 유시를 받들어 정부로서는 최선을 다하여 실행단계에 돌입한 것이다. 제1단계로서는 소작인에게 파종기전, 즉 4월 10일까지 농지분배 예정통지서를 교부하여 장차 자기 농지가 된다는 것을 전제로 하여 안심하고 파종하라는 것이다.(「농지개혁지침」4쪽, 김성호외, 위의 책 p603에서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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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李承晩대통령과 농지개혁 3
  
한국전쟁 전에 농지의 상당부분이 분배되었다
김일영 성균관대학교 교수. 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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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萬甲 선생의 관찰에 따르면 토지개혁과 함께 정부가 발행한 地價(지가) 증권이 대학 설립의 자본으로 집중되면서 새로운 私立 대학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더구나 6·25 전쟁과 함께 대학생 軍 징집 보류 정책이 대학을 폭발적으로 증가시키는 요인의 하나로 작용한 것도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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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클럽] 브라질 대통령도 인정한 李承晩의 농지개혁

 

裵振榮 月刊朝鮮 기자 (ironheel@chosun.com)

 

최근 중앙일보의 南美 특집을 읽다가 흥미로운 얘기를 발견했다. 중앙일보 기자가 룰라 브라질 대통령에게 『브라질처럼 풍부한 자원을 가진 나라에 어째서 5000만 명이 넘는 절대빈곤층이 존재하는 겁니까』라고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한국은 과거 1950년대에 농지개혁을 했지만 브라질은 그러지 못했고, 아직도 그것이 풀어야 할 숙제입니다』

순간 기자는 李承晩 대통령을 떠올렸다. 李承晩 정부는 제헌헌법 제정 당시부터 『농지개혁이야말로 공산당을 막는 最良의 길』(헌법 기초위원 兪鎭午의 말)이라는 인식 아래 헌법에 농지개혁에 대한 근거 조항을 마련하고, 의욕적으로 농지개혁을 추진했다.

李承晩 정부의 농지개혁 추진 소식을 전해 들은 金日成은 술잔을 내던지면서 『만일 남한에서 토지개혁이 되면 남한의 농민을 다 대한민국에 뺏기고 말아, 우리들이 이제껏 해왔던 赤化운동은 모두 수포로 돌아가고 만다』고 개탄했다고 한다.

 

기득권층의 반발이 있었지만 李承晩 대통령은 『萬難(만난)을 배제하고 농지개혁을 단행하라』고 독려했다. 정부는 관계 법령이 제정·정비되기도 전에 불도저식으로 토지개혁을 밀어붙여 1950년 4월15일까지 농지개혁과 관련된 행정절차를 마무리지었다. 그로부터 두 달 열흘 뒤에 6·25가 발발했다.


金日成은 전쟁 전부터 준비해 온 남한지역에서의 토지개혁 프로그램을 내밀며 남한 민중(농민)들의 봉기를 선동했다. 하지만 농지개혁 이후 『李박사 덕분에 쌀밥을 먹을 수 있게 됐다』고 희망에 부풀어 있던 남한 민중들에게 金日成의 선동은 먹혀 들지 않았다.

농지개혁 결과 전체 농지의 92.4%가 自作地(자작지)가 됐다. 이는 농지개혁으로 전체 농지의 90%가 자작지가 된 일본의 성과를 넘어서는 것이었다.

정부가 地主(지주)에게 보상한 20억원 가운데 절반 가량이 地主의 손을 떠나 산업자본으로 전환되었다.

 

반면에 「無償 몰수, 無償 분배」를 내걸고 시작된 북한의 토지개혁은 결국 모든 농민을 小作農化하는 「농업 집단화」로 귀결됐다. 그 결과는 농업생산성의 저하와 기근, 대량 餓死(아사) 사태로 이어졌다.

농업경제학자인 金聖昊 前 한국농촌경제연구원 고문은 『李承晩의 농지개혁이 한국의 번영을, 북한의 소련식 土地 국유화가 오늘의 북한 참상을 불렀다』고 단언한다. 李承晩 대통령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의 「개혁자」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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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한의 농지개혁이 북한보다 못했다는 얘기가 있었는데.


 “중국이나 북한에서 농민에게 분배된 토지는 곧 집단농장으로 바뀐다. 중국은 덩샤오핑(鄧小平)의 개혁에 이르기까지 수천만 명이 굶어 죽었다. 북한은 오늘날까지 만성적 식량 부족에 시달린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대비다.


대한민국 건국과 농지개혁, 한국전쟁이 전개된 과정을 새롭게 조명해야 한다. 이승만 정부의 농지개혁으로 땅을 갖게 된 수많은 자영농의 자발적 중노동과 창의력이, 또 그들의 교육열이 오늘 대한민국의 자본주의 경제발전 기적을 만든 에너지의 원천이다. 위대한 나라가 탄생했다. 대한민국 건국이야말로 우리 민족 역사에서 가장 큰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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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은 우리 민족사 가장 큰 기적 … 진보도 인정해야”
[중앙일보] 입력 2013.04.10

주대환 사회민주주의연대 대표가 보는 현대사 논쟁

 

 


   *  1930  소련


[ ..... 차라리 임차한 땅에서 경작하는 것을 선호하여 .... 중농, 빈농들이 집단농장에서 대규모로 이탈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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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호들의 조직적인 사보타지와 선동, 위로부터의 급속한 집단화에 따른 농민들의 인식부족과 일부 공산당원과 빈농들 사이에서의 좌경적 경향으로 농민들이 국경을 넘어 중국을 도피하는 일이 발생하였다.


많은 빈농들이 과중한 국세가 책정되어 있는 국영농장에서 반강제역노동 하는 것 보다는 차라리 임차한 땅에서 경작하는 것을 선호하여, 1930년 3-4월 일부 마을에서는 중농, 빈농들이 집단농장에서 대규모로 이탈하는 일이 발생하기도 했다. 뿐만아니라 극도로 높게 책정된 과세, 원시적인 농업기술, 높은 생산노동을 향한 의욕 부재 등으로 인하여 벼 파종면적의 축소와 수확량 감소를 초래하였다.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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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로한인(在露韓人) 강제이주(强制移住) 이전(以前)의 한인사회(韓人社會)의 동향(動向)(1923-1937) 

반 병 율(潘 炳 律)* 

 

 


[ ...... 지주가 사전 방매한 토지의 가격이 법정 상환가격보다 높지 않음이 일반적 ........

 ...... 전 경지의 96%가 자작지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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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지개혁의 효과에 관해서는 1980년대까지만 해도 비판적인 견해가 우세했습니다. 정부가 직접 수용하여 분배한 토지가 전체개혁 대상의 절반도 되지 않은 가운데, 많은 토지가 지주에 의해 은닉되거나 사전에 소작농에게 고가로 강제 처분되었다는 것이죠. 그런데 최근의 여러 구체적인 연구는 지주가 사전 방매한 토지의 가격이 법정 상환가격보다 높지 않음이 일반적이었으며, 또 대량의 사전 방매도 결국 개혁의 강제성 때문인 만큼 크게 보아 농지개혁의 효과로 간주해야 한다는 견해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재인식》에 실린 장시원 교수의 논문, <농지개혁ㅡ지주제 해체와 자작농체제의 성립ㅡ>은 이러한 새로운 동향의 연구 성과를 잘 대변하고 있습니다. 어쨌든 농지개혁으로 지주제가 소멸하고 전 경지의 96%가 자작지로 바뀌었습니다. 농지개혁의 효과는 어느 정도 국가체제가 안정된 1950년대 말부터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자신의 농지를 소유하게 된 농민들의 생산의욕으로 농업생산력이 부쩍 증가하기 시작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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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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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개혁에 대한 저항세력은 상당수 북한을 탈출하고 없어진 것이다. 그러나 이후에도 반발세력이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니다. 새로운 반발세력이 생성된 것이다. 토지개혁 이후 무거운 세금을 거두어 갔기 때문이다.


북한은 토지개혁 후 당해연도의 산물에 대하여 농업현물세제를 실시하였다. 처음에는 25%를 징수하도록 하였으나 이 수치는 법령상의 규정일 뿐이었다. 농업현물세뿐만 아니라 애국미, 성출 등 잡세로 인하여 실제로는 40% 정도를 납부해야 했다. 북한의 농민들이 낸 각종의 잡세는 토지개혁 이전과 다를 바가 없었다. 결국 북한의 토지개혁은 사인지주제에서 국가지주제로 변화하였다고 볼 수 있다. 당시 북한은 도시나 농촌에서 기아가 속출하는 현황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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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5년에 150% 상환' ..... 소작료를 불과 5년만 내면 .......

    ..... 농지세 .... 세율이 7%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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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 바로 '5년에 150% 상환'이라는 대원칙이었다. 즉 북한에서는 30%씩 영원히 새로운 지주에게 바쳐야 했지만, 한국에서는 30%씩 단 5년만 내면 영원히 그 땅을 자신이 소유하여 자손에게도 길이 물려 줄 수 있게 한 것이다. 1년에 50%~ 60% 소작료를 바치던 일제시대와 비교하면, 소작료를 불과 5년만 내면 영원히 토지를 소유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반면에 북한은 30%씩 5년이 아니라 500년을 내도 그 땅은 자기 땅이 안 되었던 것이다!

 

문제는 하나 더 남는다. 지가를 상환한 다음에 국가에 세금을 얼마나 냈느냐는 것이다. 만약 농지세를 10% 이상 걷어 가면 고려초나 조선초보다 못하게 된다. 이에 대한 자료를 알 수 있는 것이 1950년의 임시토지수득세이다. 이 해에 정부는 200만 정보의 농지에 대해서 140만석의 농지세를 걷기로 했다. 이것으로 세율을 계산해 보면 한국의 농지개혁이 농민에게 유리했는지 불리했는지 알 수 있다. 1950년 곡물 생산이 345만 톤 곧 2156만석. 140만석을 2000만석으로 나누면, 0.07 곧 세율이 7%였다. 성군인 세종조의 세율과 비슷하다. 북한에서는 세율이 30%이고 한국은 7%였던 것이다! 고추와 마늘, 배추와 무 등에 대해서는 따로 걷지 않은 걸 감안하면 6% 정도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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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사학위 논문으로 “농지개혁 과정에 관한 실증적 연구 - 충남 서산군 근흥면의 사례를 중심으로”를 썼다. 70년대 당시 학계에서 박현채 선생 등은 농지개혁이 실패했다고 했는데, 농민운동을 하면서 살펴본 농촌 현지에서는 지주계급을 찾아볼 수 없었다. 이러한 기존 인식과 현실의 괴리를 메우기 위해 충남 벽지 농촌에서 농지개혁 당시 농지매매경험이 있는 촌로들을 발로 찾아다니며 논문자료를 수집했고, 농지개혁에 대한 기존 인식을 전환시키는 데 일정한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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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상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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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북한식 농지개혁 .... 정부에 노예가 되는 것에 불과하다 ........

  ..... 가격을 받아서 자본을 만들어야 공업에 착수할 수 있을 것 ........    ]

 


위대한 지도자 이승만의 경제 리더십(8)

 

8.  이승만의 토지개혁으로 ‘차별 없는 시대’ 실현


  
농지개혁에 성공했기 때문에 한국은 근대화 출범 초기부터 지주-소작인간의 갈등이 존재하지 않는 균질한 사회로 출발했다. 그 결과 자본주의 사회로의 이행 과정에서 첨예한 계급 갈등의 소지를 미래 해소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농지개혁이 우리에게 준 가장 큰 성과다.
 
  
관리자  

 

지주-소작관계 청산하고 시장경제와 자유민주주의 뿌리내려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의 업적을 논하는 과정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토지개혁이다. 현대사 전문가들은 건국 직후 이승만 대통령의 결단으로 시행된 토지개혁이 없었다면 오늘의 대한민국은 존재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는 평을 내놓을 정도다.


조선 500년을 지배했던 유교는 물질이나 돈을 비천한 것으로 규정했다. 황금 천시(賤視)사상은 곧 상업 천시로 이어졌고,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신분제도 하에서 상업을 가장 비천한 것으로 여기는 사회 풍토가 깊이 뿌리내려졌다.

농업을 제외하고는 산업이 태동하지 못해 민족자본 축적이 불가능했고, 그 결과 대규모 자본이 투자되어야 하는 산업화는 엄두도 못내는 상황에서 해방을 맞게 됐다. 국내에 남은 유일한 민족자본이라고는 조선시대부터 일제시대를 거쳐 해방 후까지 이어져 온 토지자본이 전부였다.

 

선각자 이승만의 앞선 사고방식

 

이승만 대통령은 세계 최고의 선진 공업국이었던 미국에서 수십 년을 풍찬노숙(風餐露宿)하며 엘리트 교육을 받은 당대의 선각자이자 지성인이었다. 그는 미국 망명 생활과 독립운동 과정에서 미국식 자본주의와 자유민주주의, 선진 공업국의 장점을 깊이 통찰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건국 대통령에 취임한 직후 한국 사회의 근본을 개혁하기 위해서는 ‘농토는 농민에게 돌려야 한다’는 구상을 갖게 되었다. 그래야만 수천 년 이어온 지주-소작인의 갈등 관계를 청산하고 시장경제와 자유 민주주의를 뿌리내리는 토양이 될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농지개혁에 돌입하게 된 배경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농지개혁의 방법론에 있어 북한 식의 무상몰수 무상분배가 아닌, 유상몰수 유상분배여야 한다는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서울신문(1948년 12월7일자) 보도에 의하면 이대통령은 “북한식 농지개혁을 할 경우 정부가 대지주가 되고 농민들은 다 소작인으로 경작하게 되어 전에는 부호에 노예 되던 것이 지금은 정부에 노예가 되는 것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또 같은 신문 12월10일자에는 “자본이 대부분 토지에 있는 한국에서는 지주들이 다 토지를 내 놓고 그 가격을 받아서 자본을 만들어야 공업에 착수할 수 있을 것”이라면서 유상몰수 유상분배 형태로 농지개혁을 진행하고, 지주들에게 토지대금으로 지급된 자금으로 산업화로 나갈 방침을 밝혔다.

 

당시 의회의 다수 의석은 지주 계급이 주가 된 한민당이 차지하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 지주계급에 결정적 타격이 가해질 농지개혁 법안을 통과시키기 위해서는 비장한 각오와 비상한 수단이 필요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농지개혁을 반드시 성공시켜야만 나라가 바로 선다는 각오 아래 과거에 공산주의자였던 조봉암씨를 농림부장관에 발탁하여 한민당의 반대를 무릅쓰고 농지개혁을 강도 높게 밀어붙였다.

 

그 결과 1950년 3월부터 농민들에게 ‘분배 농지 예정 통지서’를 발급하기에 이른다.

여기서 주의 깊게 봐야 할 점은 농민들에게 분배 농지 예정 통지서를 발급한 것은 법과 시행령이 완성되기 이전에 이대통령의 의지로 단행됐다는 점이다. 이대통령은 “춘궁기가 촉박했으므로 추진상 불소한 곤란이 있더라도 만난을 배제하고 (농지개혁을) 단행하라”는 명령을 내림으로써 개정 법령과 시행령이 미처 마련되지 못한 상황에서 먼저 행정적 조치들이 신속히 추진됐다.


지주들은 소유하고 있던 전답을 내놓는 조건으로 정부로부터 지가(地價)증권을 받았는데 농지개혁이 시행된 지 3개월만에 6ㆍ25 전쟁이 터졌다. 전쟁은 모든 질서와 가치를 파괴한다. 돈의 가치라 해서 예외는 아니었다. 전쟁 수행을 위해 막대한 자금이 필요했던 정부는 마구 돈을 찍어 유통시킴으로써 전시(戰時) 인플레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물가지수는 서울 도매 물가를 기준으로 1945년을 100으로 할 때 1947년 855, 1950년 2974, 1951년 1만8753, 1952년 4만605, 1953년 5만863으로 폭등하는 하이퍼 인플레이션 양상을 보였다. 부산으로 피난을 온 지주들은 전시 인플레로 인해 휴지 조각처럼 변한 지가증권을 투매하여 생활비로 사용했다.


그 결과 호남지역을 중심으로 한 대지주 계급은 몰락했고, 경제 부흥과 산업 발전에 쓰여졌어야 할 유일한 민족자본이었던 토지자본은 지주들의 생활비나 소비 자금으로 유실되어 갔다.

 

우리와 달리 대만은 토지자본의 산업자본화에 성공한 나라다. 특히 중소 규모의 지주들이 내놓은 토지를 대가로 받은 지가증권을 산업자본화는 데 성공함으로써 대만은 건실한 중소기업 위주의 산업 발전이 가능했던 것이다.

 

반면 우리 나라는 6ㆍ25 전쟁으로 인해 중소 지주들의 지가증권이 제 역할을 못하고 소비됨으로써 특히 중소기업의 뿌리가 근본적으로 취약한 경제 구조가 되고 말았다.

이처럼 자본축적이 미약한 상황에서 산업화가 추진된 결과 우리 기업들은 만성적인 자본 부족 상태에 빠지게 된다. 그 결과 우리 기업들은 지속적으로 원조자금이나 해외 차입금, 은행 차입금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구조적 한계를 가지고 출발했다. 또 중소기업의 뿌리가 허약해 대기업 위주의 경제발전에 매달릴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나가는 단서를 제공하게 된다.

 

우리 나라 유일의 민족자본이었던 토지자본을 소유하고 있던 지주들이 6ㆍ25를 맞아 몰락해 가자 정부는 귀속 기업체 매수자가 타인 명의의 지가증권을 매입하여 이를 귀속기업체 인수 대금으로 지불할 수 있도록 제도를 고쳤다. 즉 지주가 아닌 제3자가 지가증권을 매입하여 귀속 기업체 매수에 참여할 수 있도록 문호를 개방한 것이다. 정부는 지가증권이 더 이상 부스러기 돈으로 공중분해되는 것을 막고, 산업으로 유도하기 위해 이 제도를 도입한 것이다.


전시 인플레에 시달리고 피난살이의 와중에 생활비 해결에 애를 먹던 지주들은 지가증권을 액면가의 40%~80%로 처분하고 몰락해 갔다. 반면에 신흥 기업가들은 지가증권을 싼값에 매입하여 귀속재산 불하 대금으로 납입함으로써 손쉽게 산업 자본가로 도약하는 기회를 얻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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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대 이지수씨의 연구 결과에 의하면 농지개혁 당시 20정보 이상의 농지를 분배당했던 호남지역 지주 418명을 조사한 결과 산업 자본가로 전업한 지주는 이 가운데 47명에 불과했다고 한다. 불과 11%의 지주만이 성공을 거두었을 뿐, 토지자본의 산업자본화라는 시대의 흐름에 편승한다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었다.

 

농지개혁 때 일반 보상으로 지급된 지가증권의 총 보상액 가운데 귀속재산 매입에 동원된 비율은 54%로 집계됐다. 전체 귀속 기업체 불하대금의 절반 정도만 지가증권으로 납입되어 산업자본화했고, 나머지 절반은 생활 자금, 소비 자금 등으로 부스러기 돈으로 흩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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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런 의견에 대한 반론도 적지 않다. 당시 우리 나라 지주 계층이 근대식 경영을 해 본 경험자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토지자본이 산업자본화 했다 해도 실제 경영은 불가능했을 것이란 의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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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에 우리 나라는 사회 지도층이었던 지주와 양반 계급이 해방될 때까지 공업이나 산업의 개념이 무엇인지 인식조차 없었다. 해방 후에는 우리 나라 기업인이 창업한 기업 중 경성방직이 유일한 산업 시설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산업 수준이 보잘 것 없었던 것이 현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농지개혁으로 지주들이 받은 지가증권을 산업자본화 하는 데 성공했다 해도 산업 시설 운영 능력이나 경영 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제대로 성공할 수는 없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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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농지개혁은 우리 사회 전반에 엄청난 파장을 몰고 왔다. 지주계급은 대대로 토지를 세습했고, 소작인 계급은 대를 물려 소작인으로 존재함으로써 부익부(富益富) 빈익빈(貧益貧) 현상을 되풀이해 왔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지주 계급이 소멸됨으로써 뿌리 깊게 이어져 오던 지주-소작인, 즉 부자와 빈자(貧者)간의 갈등을 일거에 불식시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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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그 동안 지주들에게 갖다 바쳤던 소작료의 상당 부분이 농민 자신의 것이 되자 농민들은 늘어난 소득을 자녀교육에 집중 투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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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하여 반공주의자들이 된 농민들이 이승만의 장기 집권을 가능케 한 지방의 이승만 지지층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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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풀이하지만 김일성은 일본 덕을 제일 많이 보았다. 무엇보다 일본은 패망하면서 이남보다 10배나 많이 세웠던 공장과 발전소를 고스란히 삼팔선 이북에 남기고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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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에 이승만은 일본인들이 철도 외에는 남겨 놓은 게 없어서 일본으로부터 덕 본 게 거의 없었다. 미국으로부터 잉여농산물을 받아 국민들을 간신히 먹여 살렸다. 인기가 있을 리 없었다.


청사에 길이 남을 농지 개혁을 단행한 것도 철저히 왜곡하면서 날이면 날마다 배운 자들과 토지를 빼앗긴 자들이 그를 독재자라고 규탄하는 소리를 들을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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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지도자 이승만의 경제 리더십(4)

 4.전란의 참화를 딛고 일어서다

 

  김용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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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돈으로 철강공장을 지어라


 
  정부가 겨우 안정을 찾은 것은 1955년 무렵. 이때부터 사회 각 분야 사람들이 산업화에 눈을 뜨기 시작했고, 정부 관리나 국회에서도 비슷한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이전, 피난수도 부산에서는 한국 산업사의 진행에 있어 중대한 의미를 갖는 두 가지 작업이 검토 진행되기 시작했다. 하나는 전후 복구사업에 긴급한 철강공장 건설이요, 다른 하나는 수입대체산업의 상징이랄 수 있는 제일제당 부산공장 건설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현대 산업문명에 대한 이해와 깊은 통찰력을 가진 지도자였다. 그가 산업문명의 핵심이 철강공업에 있으며, 철강이 산업의 쌀이라는 사실은 미국에서 오랜 망명생활 과정에서 깨달은 화두(話頭)였다. 6ㆍ25의 휴전 문제가 흘러나오던 1953년 부산 임시정부는 이미 전후복구를 위한 그랜드 디자인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이승만 대통령이 철강산업에 대한 의지를 피력한 것은 1953년 4월4일의 일이다. 이날 이대통령은 내각에 다음과 같이 특별지시했다.
 

  “전쟁이 끝나면 하루 빨리 부흥사업을 펼쳐야 할 것이니 그 기초가 되는 철강산업 진흥책을 마련하라. 특히 주택건설사업을 위한 함석, 철판 등의 공급을 담당할 제강사업 건설계획을 우선적으로 강력히 추진하라.”
 

  관계부처는 철강산업에 대한 기본 대책을 검토한 끝에 대통령령으로 인천의 대한중공업공사(현재 인천제철)를 국영기업으로 출범시키고, 파괴된 공장을 복구하는 작업으로 연산 5만t 규모의 평로(平爐:구식 용광로)를 건설하여 제강공장과 압연공장을 재건하기로 결정했다.

 
  당시 우리 경제는 전적으로 미국의 원조에 의존하고 있을 때다. 미국으로부터 오는 무상원조액 4억 달러에 달하는 등 우리 나라의 모든 경제계획은 미국의 경제고문관에 의해 좌우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 정부는 철강공장 건설계획을 수립한 후 미국 원조기관에 철강공장 건설에 필요한 자금 지원을 요청했다. 이런 소식을 접한 미국 원조당국은 “지금 수백만의 피난민들이 굶주리고 있는데 무슨 철강공장인가. 시급한 민생문제부터 해결하자”며 우리측 요구를 거절했다.
 


  보고를 받은 이대통령은 “못이나 양철이라도 만들어야 판잣집이라도 지을 것 아닌가” 하면서 미국이 돈을 못 낸다면 우리 정부가 보유한 자체보유불로 공장을 지으라고 내각에 지시했다. 극심한 달러 부족으로 장관이 외국 방문을 할 때면 손수 달러를 세어 주었던 이승만 대통령이 외환사정이 지극히 어려운 전시(戰時)에 철강공장 건설을 위해 140만 달러를 투자키로 결정한 것은 역사적 결단이었다.


 
  이대통령은 전쟁 부상자 치료를 위해 부산에 와 있던 서독 적십자병원장 후버 박사에게 한국의 철강공장 건설에 서독이 기술지원을 할 수 있도록 도움을 요청했다. 이대통령이 서독과 교섭에 나선 이유는 미국이 우리 나라 철강공장 건설에 비협조적인 태도로 나왔기 때문이다.
 

  그 무렵 서독은 2차대전 패전 후 마샬 플랜에 의해 전후복구가 한창이었다. 때문에 서독 기업들도 해외 공사를 수주하여 달러를 벌어들이는 일에 전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이승만 대통령의 부탁을 받은 후버 박사는 한국의 철강공장 건설계획을 서독 정부에 알렸고, 서독 정부는 일본에서 활동하며 유엔군에 물자를 공급하던 유태인 중개상 아이젠버그를 교섭 상대로 내세워 적극적인 수주 활동을 벌였다.
 

  1954년 실시된 대한중공업공사의 5만t 규모 평로 제강공사 국제입찰에는 미국, 스위스, 서독의 전문회사가 참여하여 경합을 벌였다. 그 결과 서독 최대의 제철시설 제조회사인 데마그사(社)가 건설공사를 수주했다. 이어 1956년 2단계로 실시한 380만 달러 짜리 압연공장 건설사업도 데마그사에게 돌아갔다.
 

  이승만 대통령은 제강공장 건설공사가 진행되는 인천의 대한중공업공사 현장을 수시로 방문하여 건설작업을 독려했다. 마침내 1956년 하반기에 인천중공업의 평로 제강공장 건설이 완공되어 첫 출강식(出鋼式)이 거행됐다. 이것이 우리 나라 철강산업 발전의 결정적 전기가 된 것이다. 평로 제강공장에 이어 압연공장 건설이 완료되면서 본격적인 생산이 개시된 것은 1959년의 일이다.
 


  정부는 철강공업육성 5개년계획을 수립하고 연산 20만t 규모의 제철소 건설안을 마련하여 미국 국제원조처(ICA:International Cooperation Administration)에 건설자금 지원을 요청했다. 동해안에 건설하려 했던 이 제철공장은 코크스를 쓰는 용광로 제철이 아니라 우리 나라에서 생산되는 무연탄을 활용하는 전기제철공장 건설안이었다. 문제는 이 공장의 가동을 위해서는 전력공급을 위한 발전소 하나를 새로 지어야 하는 문제 때문에 더 이상 진전을 보지 못했다.

 
  1958년 들어 대한중공업공사의 압연공장 건설공사가 진전되자 김일환 상공부장관이 서독을 방문하여 데마그사와 연산 20만t 규모의 제철소 건설문제를 협의하고 서독, 미국, 프랑스, 오스트리아, 노르웨이 등이 힘을 합쳐 국제차관단을 조직하는 문제를 협의하기도 했다.

 
  우리 정부가 6ㆍ25 직후에 외국 차관 한푼 안 들이고 순수한 우리 자본으로 제강공장을 건설한 것은 2차대전 종전 후 후진국에서 벌어진 최초의 중공업 프로젝트였다.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의 강력한 반대를 물리치고 자체보유불로 철강공장 건설이라는 결단을 내릴 정도로 국가 근대화에 대한 깊은 안목과 식견을 가졌던 지도자였다. 철강공장 건설과정에서 수많은 한국의 기술자와 관리자들이 서독에 가서 현대식 철강산업을 배우고 돌아와 우리 나라 철강산업의 기초를 닦았다. 이 때 양성된 인력들이 박정희 정권 시절 포항제철 건설에 대거 참여하여 오늘의 ‘포철 신화’를 이룬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산업계 관련 인사들은 “이승만 대통령이야말로 우리 나라 중공업의 기초를 닦은 인물”이라고 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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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 중시했던 독립운동가 이승만, 그는 누구인가


이승만 시절 뿌려진 산업화 씨앗들 ‘한강의 기적’ 일구는 초석

 

마연옥 기자    k-today@hanmail.net
 
2015.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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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자력 · 경공업 · 중화학 등 산업 전반의 시장경제 초석 다져

 

이승만 대통령은 우리나라의 산업화와 자유통상의 초석을 다지기도 했지만 이러한 업적에 대해서는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김용삼 경기콘텐츠 진흥원 감사는 “이승만 대통령은 철도와 비료 철강 등 중화학은 물론 제당 모직 등 경공업육성에도 힘썼다” 며 “원자력 연구소를 설립하는 등 일지감치 원자력에 대한 관심을 보였다”고 말했다.


이러한 이 대통령의 경제개발, 산업화는 박정희 대통령의 산업화와 한각의 기적을 가능케 하는 원동력이 됐다는 것이다. 특히 이승만은 유학 과정에서 자신이 다니던 학교 근처에 있는 MIT를 보면서 근대국가 건설을 위해서는 과학기술이 필수임을 절실하게 깨달았다.


대통령 재임 시절 그는 하와이 교포회관을 매각한 대금으로 ‘한국의 MIT'목표로 설립한 인하공대 설립자금으로 투자하기도 했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경제인, 기업인, 기술자, 외국 유학생 출신 등을 돈암장에 초청해 나라 발전을 어디서부터 시작할 것인지에 대해 의논을 했다. 이러한 전문가들의 조언을 받아 그는 ‘국가발전은 광업에서부터’라는 청사진을 마련해 금과 중석, 석탄을 집중 개발하게 된다.


광업 진흥을 위해서는 험산준령을 넘는 철도 건설이 시급했다. 건국된 지 8개월 만인 1949년 4월 8일, 영주에서 태백 탄전지역인 철암까지 연결하는 영암선 철도건설에 착공했다. 한 달 후인 1949년 5월 3일에는 중앙선 제천역에서 영월발전소를 연결하는 함백선을 착공했다. 영암선은 6.25로 중단되었다가 휴전 후 공사가 재개되어 1955년 12월 31일에, 함백선은 1957년 3월 9일에 완전 개통되었다. 이승만 시절 기본적인 산업철도가 건설되었기에 박정희 대통령 때 태백산 종합개발사업이 본격화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국가 차원의 산업화 전략이 추진되기 시작한 시기는 1953년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1953년 4월 4일 내각에 철강산업 진흥책을 마련하라는 특별 지시를 내렸다. 이 지시에 의해 대통령령으로 인천의 대한중공업공사를 국영기업으로 출범시키고, 파괴된 공장 복구를 위해 연산 5만톤 규모의 평로(구식 용광로)를 건설하기로 결정했다.


미국 원조당국이 한국의 철강공장 건설계획에 반대하자 이 대통령은 자체보유불로 공장 건설을 강행했다. 그 결과 서독의 데마그 사가 공사를 수주하여 1956년 하반기 첫 출강식이 거행되었다. 압연공장 건설이 완료되어 1959년부터 철강제품 생산이 개시되었다. 공장 건설과정에서 많은 기술자아 관리자들이 국비로 서독 유학을 가서 신기술을 익혔다. 이들이 바로 박정희 정부에서 포항제철 신화를 일구는 주인공이다.


전후복구 과정에서 우리 정부는 미국의 원조자금으로 공장 건설을 원했지만, 미국은 한국에서 빈곤과 질병의 해소가 목표였다. 미국은 한국에 원조를 제공하면서 농산물을 제외한 공산품과 비료, 시멘트 등은 일본 제품을 구매하도록 하여 일본의 경제부흥을 유도했다. 일본을 부흥시켜 동북아에서 공산주의의 방파제 역할을 맡기기 위해서였다. 이 때문에 한국의 공장 건설을 억제한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의 정책에 맞서기 위해 자체보유불로 공장을 건설하거나 유엔한국재건위원회(운크라 · UNKRA)를 설득해 운크라 자금으로 인천에 판유리공장, 문경에 시멘트 공장을 건설했다. 이러한 노력들이 결실을 맺자 미국 정부도 할 수 없이 충주비료공장 건설에 동의하여 대규모 비료공장 건설을 시작하게 된다.


이처럼 이승만 대통령 시절 산업 각 분야에서 시장경제의 발전을 위한 초석을 다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때 원자력산업에도 시동을 걸었다. 1956년 2월 우리나라는 원자력의 비군사적 이용에 관한 한미 간 협력 협정을 맺었고, 1957년 8월에는 국제원자력기구(IAEA)에 정식 회원국으로 가입했다. 1958년 3월에 원자력법을 제정 공포하고 1959년 1월에 대통령 직속으로 원자력원을 설립했다. 미국으로부터 연구용 원자로(트리가 마크2)를 도입했다.


이승만 정부는 체계적인 발전을 추진하기 위해 경제개발 7개년계획을 수립해 고도성장을 가능하게 하는 기반들을 마련했다. 이 계획의 전반부에 해당하는 3개년계획을 완성했으나 국무회의를 통과한 지 4일 후 4.19가 터져 시행되지 못했다.

장면 정부 시절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수정되었으나 5.16으로 사장되었다가 박정희 정부 때인 1962년 1월부터 본격 추진된다.

 

이 뿐만 아니다. 이승만 대통령 시절 농지개혁, 교육혁명을 통해 우수 인재 배출 시스템을 만들기도 했다.


 http://www.k-today.com/news/articleView.html?idxno=8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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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서관을 세우는 일이 지금으로서는 가장 긴요하다 .........       ]


 
  李承晩의 "민중속으로!"
 
 
  조갑제
 


  <무릇 開明進步하는 길은 대략 네 가지가 있다. 하나는 학교를 세워 학문을 일이키는 것이요, 하나는 民會를 열어 토론을 하는 것이오, 하나는 널리 신문사를 설치하는 것이오, 하나는 도서관을 세우는 일이다. 이 네 가지 중에서 도서관을 세우는 일이 지금으로서는 가장 긴요하다>

 
  이 글은 李承晩이 고종황제를 쫒아내려는 쿠데타 계획에 연루되었다가 한성감옥에 갇혀 있던 시절(1899-1904년)에 쓴 논설이다. 이 글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李承晩의 대중노선이다. 그는 국민 전체의 역량이 향상되는 것이 나라가 잘 되는 근본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국민들을 교육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 교육의 수단이 학교, 신문, 도서관, 민회인 것이다. 이런 점에서 李承晩은 대중을 설득하여 여론을 형성하고 그리하여 대중의 지지를 확보하는 것이 최선의 전략임을 인식한 민주적 정치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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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감옥 안에 학교와 도서실을 만들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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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사람의 옥중생활은 감동적이었다. 옥중에서 기독교에 입교한 李承晩은 외국선교사들의 도움을 받아 감옥 안에 학교와 도서실을 만들고, 「제국신문」의 논설을 쓰고, 「영한사전」을 편찬하고, 초인적인 노력으로 콜레라 환자를 돌보고, 「독립정신」을 집필하고, 완벽하리만큼 영어를 익혔다.

金九는 첫 번째 옥중생활 때에 「泰西新史」 등의 서양문물을 소개하는 책을 읽고 위정척사파에서 개화론자로 변신하는 한편, 문맹인 수인들에게 글을 깨우쳐 주었다.


李承晩과 金九가 감옥에서 다른 죄수들에게 글을 가르쳤다는 사실은 세계적으로도 行刑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일이다. 그것은 한국 역사에서의 문화의 힘, 곧 지금도 한국인의 특성으로 꼽히는 교육열을 말해 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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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02

 

[ ..... 李承晩의 건의에 따라 .... 감옥서 안에 학교가 개설 ........

  ..... 성인반을 개설하여 聖經, 英語, 地理, 文法 등을 ........

 

  ..... 외국사람들이 .... 西洋의 開明한 나라에도 그러한 일이 없다 ........

  ...... 1903년 1월 중순 .... 서적실에서 기거하면서 서적실 운영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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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監獄署學校와 書籍室
 


  李承晩의 옥중활동 가운데에서 가장 괄목할 만한 것은 옥중에 학교를 만들어 죄수들을 가르친 일이었다. 李承晩은 1901년 초에 감옥서장 金永善에게 刑政의 개혁을 건의하는 「寄本署長書(기본서장서)」라는 건의서를 제출했다. 한문으로 된 이 장문의 건의서는 李承晩의 서양 선진 제국의 형정에 관한 지식과 함께 한국 형정 개혁에 관한 구체적인 비전을 보여주는 것이어서 주목된다.
 

  〈무릇 감옥을 설치한 것은 사실 백성 가운데 불량한 자로 하여금 개과천선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泰西(西洋)의 옥정을 살펴보건대 仁愛寬恕(어짐, 사랑, 관용, 용서)의 제 조항 밖에도 별도로 지극히 선한 한 가지 조항이 있습니다. 이는 우리 한국이 마땅히 빨리 본받아 시행해야 할 일입니다.… 백성으로서 法律을 위반하는 일은 태반이 직업을 잃어 의지할 곳이 없는 자들로부터 나오는데, 이것 역시 敎化가 미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백성 위에 있는 사람은 그들에게 사랑을 베풀 것을 생각하지 않고, 다만 그 죄만을 미워하여 죄과에 따라 오직 법으로만 다스리려 합니다.…〉
 

  이처럼 그는 교화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러면서 그는 몇 가지 형정 개혁방안을 말하고 나서 결론적으로 감옥 안에 학교를 개설할 것을 건의했다.
 

  〈바라건대 각하께서는 이러한 정황을 가엾게 여기시고, 겸하여 學校를 세워 學問을 권장하는 훌륭한 뜻을 본받으십시오. 특별히 한 칸의 방을 허락하시어 학문에 뜻을 둔 사람들을 골라서 한 곳에 모아 수업을 받게 하고, 아울러 등에 불을 켜는 것을 윤허해 주십시오. 필요한 火具는 모두 자력으로 준비하고 주야로 권면하여 切磋(절차: 연마)의 보람을 찾을 수 있을 것이며, 겸하여 심심풀이하는 방편으로 삼고 또한 책을 번역하고 물건을 만들어 비용에 충당하겠습니다.…〉85)


 
  이러한 李承晩의 건의에 따라 1902년 8월에 감옥서 안에 학교가 개설되었다. 옥중학교의 설립 경위와 운영 실태에 대해서는 李承晩 자신이 감리교단에서 발행하던 잡지 「신학월보」에 기고한 「옥중전도」라는 감동적인 신앙고백에 자세히 서술되어 있다.


 
  우선 옥사의 한 칸을 치우고 각 칸에 수감되어 있는 아이들 수십명을 불러다가 「가갸거겨…」를 써서 읽혔다. 더러는 웃기도 하고, 더러는 흉도 보고, 또 더러는 책망도 했다. 그러나 李承晩은 이러한 일에 개의치 않고 아이들을 열심히 가르쳤다. 반년이 채 지나지 않아 아이들은 한글을 모두 깨우쳤고 「東國歷史」와 「明心寶鑑」을 어려서부터 배운 아이들 못지 않게 익혔다. 각자의 희망에 따라 英語와 日語도 가르쳤고, 산술은 加減乘除(가감승제)를 제대로 할 수 있게 되었다.
 
 
  찬송가 너댓 가지는 「매우 들을 만하게」 불러
 
 
  글을 가르치는 것과 동시에 그는 전도에도 힘써서 아이들은 「신약」을 열심히 읽고, 아침 저녁 기도는 저희들 입으로 하며, 찬송가 너댓 가지는 「매우 들을 만하게」 부를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성과에 대해 李承晩은 〈어린 마음이 장래에 어떻게 변할는지는 알 수 없으나 지금 믿을 만한 사람은 이 중 몇 아이만한 사람이 많지 못할지라〉 하고 자부하고 있다.86)
 

  이 시대까지도 한국에서는 물론 세계적으로 미성년범죄자를 별도로 다루는 제도가 없었다. 한국에서는 오히려 부모나 가까운 친척 대신에 징역을 사는 어린 代囚(대수)들도 있었다. 시카고에 세계 최초로 소년재판소가 설치된 것은 1899년의 일이며 한국에서는 1923년에 처음으로 소년교도소가 설치되었다.
 

  영어를 큰 소리로 따라 읽고 찬송가를 합창하고 아침저녁으로 기도를 하는 아이들과 이들을 가르치는 李承晩의 열성적인 모습은 절망적인 감옥 안의 분위기를 크게 바꾸어 놓았을 것이다. 소년죄수들이 공부하는 것을 보고 성인죄수 가운데서도 배우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李承晩은 감옥서의 협조를 얻어 다시 성인반을 개설하여 聖經, 英語, 地理, 文法 등을 가르쳤다. 이들 어른 죄수들은 거의가 漢文은 말할나위도 없고 다른 外國語를 배운 경험이 있는 政治犯들이었으므로 학업의 성취도 빨랐다. 이 무렵 한성감옥서에 수감된 죄수들은 350여 명쯤 되었는데,87) 이들 가운데에서 40명 가량이 정치범이었다.88)
 


  감옥서장 金永善도 매우 협조적이었다. 그는 토요일마다 大廳(대청)에서 都講(배운 것을 시험하는 것)을 받아 우수한 사람에게는 종이로 상급을 주고 못하는 사람에게는 벌로 절을 시켰다.

 
  이 감옥학교에는 李承晩과 함께 다른 敎師 두 사람이 있었다. 한 사람은 李承晩과 같이 배재학당에서 공부했던 申興雨였고, 다른 한 사람은 독립협회 간부로 활동했던 梁起鐸이었다. 신흥우는 1901년 11월23일에 수감되어 3년 징역형을 언도받고 복역했고, 양기탁은 1901년 무렵에 구속되어 종신형을 받았다가 1903년 무렵에 석방되었다.89) 신흥우는 어른반을 맡아 가르쳤고, 양기탁은 아이들반을 맡아 가르쳤으며, 李承晩은 두 군데를 다 맡아 가르쳤다. 李承晩은 가끔 여러 주제에 대해 강의를 했는데, 그 내용은 주로 미국의 정기간행물에서 읽은 민주주의에 관한 것들이었다.90)

 
 
  『감옥학교는 西洋의 開明한 나라에도 없어』
 
 
  金九와 마찬가지로 李承晩 역시 같이 수감되어 있던 죄수들을 가르칠 생각을 했다는 것은 매우 주목할 만한 사실이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朝鮮朝의 전통적인 교육열에 기인하는 것이겠으나, 세계의 刑政史에서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李承晩의 이러한 열성은 그를 지원하는 외국 선교사들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그러한 사정은 신흥우의 아버지 申冕休(신면휴)가 쓴 「獄中開學顚末」이라는 글에도 잘 나타나 있다.

 
  〈며칠 전에는 외국사람들이 옥중에 학교가 설립되었다는 소문을 듣고 기뻐하면서, 西洋의 開明한 나라에도 그러한 일이 없다고 하면서 서적과 식품을 많이 가지고 들어가서 여러 학생을 모아놓고 일장 연설을 하고 극구 찬양도 하고 갔으니…〉91)

 
  그러면서 신면휴는 李承晩이 어려서 자기에게 배울 때에도 才明이 있었음을 강조했다. 또한 당시의 신문은 옥중학교의 개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감옥서장 金永善씨가 人民의 敎育이 無하야 근일에 犯科處役한 자가 甚多(심다)함을 개탄하야 月前부터 감옥서 내에 學校를 설립하고 죄수를 교육하는데, 교사는 李承晩, 梁義宗(梁起鐸의 初名. 宜鍾이라고도 썼다)씨요 교과서는 개과천선할 책자요, 英語 算術 地誌 등서로 열심 교도하는 고로 英人 벙커씨가 매 일(일요일) 일차씩 와서 교과를 贊務(찬무)하고 서책을 다수 공급하므로…〉92)


 
  감옥서 안의 학교 소식은 밖에서도 큰 관심거리가 되어 많은 내외국 사람들이 연조를 해 왔다. 제물포에 사는 어떤 사람은 익명으로 「제국신문」에 지폐 2원을 보내면서 감옥서학교의 학비에 보태라고 했다. 李承晩은 이 일과 관련하여 〈이원으로 보태어 아이들에게 의복을 고쳐 입히니 참 감동할 만한 일이라〉 하고 적고 있다.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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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날 감옥을 찾아온 벙커 목사는 모인 아이들을 보고 대단히 기뻐하며 매 일요일마다 와서 이들을 가르치겠다고 약속했다. 이때부터 그는 약속대로 일요일마다 감옥에 와서 아이들이 공부한 것을 문답도 하고 성경도 가르쳤다. 이날 벙커 목사는 크리스마스 선물로 종교서적 150여 권을 가지고 왔었는데,94) 이것이 기본이 되어 감옥서 안에 서적실이 마련된 것은 특기할 만한 일이다.

 
  서적실을 꾸리기 위해서는 우선 책장이 있어야 했다. 李承晩은 〈사백냥 돈을 들여 책장을 만들고…〉라고 적고 있는데,95) 그것은 李承晩 자신이 책장을 직접 만들었다는 뜻이다.96) 李承晩은 손재주가 좋아서 옥중에 있으면서 반닫이 같은 간단한 가구를 만들어 朴씨부인에게 내보내기도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97)
 
 
  책장 직접 짜서 書籍室 만들어
 
 
  책장이 마련되자 李承晩은 여기 저기에 부탁하여 책들을 수집했다. 李承晩이 〈성서공회에서 기꺼이 찬조하여 50원을 위한하고 보조하기를 허락하여 각처에 청구하야 서책을 수합함에, 지어 일본과 상해에 외국 선교사들이 듣고 서책을 연조한 자가 무수한지라〉98)라고 썼듯이, 서적실을 가장 적극적으로 도와준 것은 국내는 물론이고 일본과 상해에서 활동하던 외국인 선교사들이었다.

 
  처음 서적실을 개설할 때에는 장서 수가 250여 권 정도였으나 개설한 지 2년이 못 되어 두 배 이상으로 늘어났다. 이때의 監獄署圖書貸出簿가 보존되어 있어서 서적실에 어떤 책들이 비치되어 있었는지를 알 수 있다. 이 도서대출부는 마치 금전 출납부와 같은 대장에 1903년 1월17일에서 1904년 8월31일까지 20개월 동안 죄수들과 간수들이 언제 누가 무슨 책을 대출해가고 또 언제 반납했는지를 적고 있고, 끝에 「監獄署書籍目錄」이라고 하여 서적실에 비치되어 있던 책 523권의 목록이 실려 있다. 성서를 비롯한 기독교 관계서적이 대부분이었으나, 4분의 1 가량은 정치, 경제, 법률, 역사, 과학에 관한 책과 개인전기 등이었다.99)
 

  李承晩은 서적실이 마련되는 1903년 1월 중순부터 유길준의 아우 兪星濬과 함께 서적실에서 기거하면서 서적실 운영을 담당했다. 한성감옥의 감방 수는 모두 20칸이었고, 일련번호가 붙어 있었다. 그 가운데에는 「大廳直房」,「學堂」,「書籍室」과 같은 기능별 방을 비롯하여 「東 1간」,「外東 2간」 등의 별채도 있었다. 물론 「女間」은 따로 있었다. 李承晩은 5월 중순에 「서적실」에서 7간으로 옮겼다가 11월 말부터 이듬해 여름 출옥할 때까지 「학당」에서 지냈다.100)

 
  서적실이 얼마나 인기가 있었는가는 개설되고 처음 15일 동안에 책을 본 사람이 무려 268명이고, 2월 한 달 동안에 249명이 되었다는 사실만 보더라도 짐작할 수 있다.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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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孫世一의 비교 評傳 - 李承晩과 金九(11)
한국 민족주의의 두 類型
 
孫世一 논설위원
 

 

 

 

  1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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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李承晩의 옥중도서 보며 깊은 감개 느껴

 
  「백범일지」의 두 번째 옥중생활 이야기 가운데에서 특별히 눈길을 끄는 것은 李承晩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술회하고 있는 대목이다.
 


  〈서대문감옥에는 역대의 진귀한 보물이 있으니, 지난 날 李承晩 박사가 자기 동지들과 같이 투옥되었을 때에 서양인 친구들과 연락하여 옥중에 도서실을 설치하고 우리나라와 외국의 진귀한 서적을 구입하여 5, 6년 동안 긴 세월 獄囚에게 나라를 구하고 부흥시키는 방도를 강연했었다.


노역을 쉬는 날 서적고에 쌓인 각종 책자를 각 방에 들여보내 주는데, 그 가운데 이박사의 손때와 눈물 흔적으로 얼룩진 監獄署라는 도장이 찍힌 「廣學類編」, 「泰西新史」 등의 서적을 보았다. 나는 그러한 책자를 볼 때에 그 내용보다는 배알치 못한 이박사의 얼굴을 보는 듯 반갑고 무한한 느낌이 있었다.〉27)


 
  李承晩이 1899년 1월부터 1904년 8월까지 漢城監獄署에서 영어생활을 하면서 감옥서 안에 학교를 개설하여 죄수들을 가르치는 한편 외국선교사들과 聖書公會의 도움을 받아 서적실을 설치하고 자신이 그 서적실에서 기거하면서 수인들로 하여금 基督敎와 新學問을 깨우치게 했던 것은 앞에서 본 바와 같다(「月刊朝鮮」 2002년 6월호 「基督敎人이 되어 獄中傳道」 참조).
 


  1908년 10월에 서대문감옥이 신축되어 한성감옥서의 기능이 그곳으로 이관될 때에 한성감옥서의 주요 비품들도 서대문감옥으로 이관되었는데, 이때에 李承晩이 관리했던 서적실도 함께 옮겨졌을 것이다. 이승만이 관리하던 때에 서적실에는 국문서적 52종 165권, 한문서적 223종 338권, 영문서적 20종 20권이 있었는데,28) 어느 정도가 서대문감옥으로 이관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런데 그 책들 가운데에서 김구가 「廣學類編」과 「泰西新史」 두 권의 이름을 들고 있는 것이 흥미 있다. 「태서신사」는 일찍이 자신이 仁川감옥에서 옥중생활을 할 때에 간수들의 권유로 얻어 읽고 그때까지 衛正斥邪派였던 그가 開化論者로 사상전환을 했을 만큼 큰 영향을 받은 책이었다(「月刊朝鮮」 2002년 5월호, 「衛正斥邪派에서 開化論者로」 참조).
 


  김구는 이 서적들이 〈역대의 진귀한 보물〉의 하나라고 말하면서, 그 서적들을 볼 때에 그 내용보다 〈배알치 못한 李博士의 얼굴〉을 보는 듯한 감개를 느꼈다는 것이다.
 

  김구는 두 번째 영어생활을 할 때까지 이승만을 만난 적이 없다. 그러나 이러한 「백범일지」의 기술로 미루어 보면, 비록 직접 대면하지는 못했더라도 이무렵 김구도 獨立協會 이래의 이승만의 활동과 경력에 대하여 숙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 이승만은 美國留學 이전에 이미 30대의 청년으로서는 유일하게 徐載弼, 尹致昊, 朴泳孝, 李商在 등과 같은 정도로 빈번히 신문 잡지에 그 이름이 보도될 만큼 知名度가 높았는데,29) 그 뒤로 渡美하여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哲學博士(실제는 政治學博士)를 받았다는 사실은 「博士 李承晩씨」의 명성을 한결 드높이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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孫世一의 비교 評傳 (24) 한국 민족주의의 두 類型
李承晩과 金九
 
『우리 정부 창문 닦아보고 죽게 하소서』
 

 

 

 


[ ......  1945년 80%에 이르던 문맹률은  1958년 4.1%로 급감 ........    ]

 

 1954년 전 국민을 대상으로 6년에 걸친 의무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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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대통령은 제3세계 지도자 중 교육에 대한 관심이 가장 높았다. 이 대통령의 담화를 분석했을 때 가장 많이 언급된 것이 국가안보였고 둘째가 교육이었다.


당시 예산 수준으로 1954년 전 국민을 대상으로 6년에 걸친 의무교육을 단행한 것은 놀라운 일이다. 이로 인해 1945년 80%에 이르던 문맹률은 1958년 4.1%로 급감했다. 이는 4·19혁명 등 민주화의 문화적 토대가 됐으며 1960년대 경제개발의 인적자본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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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군은 “전쟁 직후 미국의 원조로 ‘밀가루 (기독교) 신자’가 늘었고 기복신앙이 강화됐다는 설명이나, 한미상호방위조약의 체결로 미군의 보호 아래 한국의 경제발전이 가능했다는 강연내용이 인상적이었다”고 말했다. 김군은 “광복 직후 80%에 이르렀던 문맹률이 의무교육 실시와 군대에서의 교육 덕분에 대폭 줄었다는 이야기가 새로웠다”면서 “당시에 비해 지금의 교육상황이 얼마나 좋은지 깨닫게 됐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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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李承晩은 6년제 의무교육제도를 도입하고 중·고등학교 및 대학교를 대폭 증설해 광복 당시 75%였던 문맹률이었던 대한민국이 문자 해독률이 가장 높은 나라로 변모하는 데 기여했다.
 
  李承晩이 대통령에서 물러날 무렵 대한민국의 대학 진학률이 영국을 앞질렀다. 1950년대에 추진한 교육개혁 덕택에 1960년대 이후 朴正熙 시대의 「경제 기적」이 가능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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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은 무엇보다 대한민국의 엘리트를 형성했던 인물이다.

그는 의무교육제로 문맹자를 없앴고, 미국으로 유학을 보내 고급인력을 육성했다. 군 장교·하사관 등 선진문물을 배워 온 이들은 60년대 산업화를 주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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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돈만 생기면 국비유학생을 .......

   .... 1953년부터 1960년까지 .... 국비유학생의 숫자가 2만여명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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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삼 객원연구원은 이승만 정부가 국가 및 사회발전에 필수적인 유능한 지식인과 엔지니어들을 길러냈고, 산업화의 기반을 다졌다고 강조했다.


“이승만은 정부에 돈만 생기면 국비유학생을 외국으로 유학 보내 고급기술을 배워오도록 했다.

1953년부터 1960년까지 정부의 지원을 받아 해외 유학이나 연수를 다녀온 국비유학생의 숫자가 2만여명에 달했다.

박정희 시절의 경제개발계획에 참여한 엘리트들 가운데 상당수가 이승만 시절 국비로 유학을 다녀온 인재들이었다.”


김 연구원은 이승만 대통령의 경제발전의 기틀을 다졌다는 사실을 실증적으로 설명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6.25전쟁이 끝난 뒤 ▲화천발전소 2호 발전 ▲디젤기관차 운행 ▲충주비료공장 기공 ▲영암선 철도 전 구간 개통 ▲국내최초 원자력 전시회 ▲대한양회 문경공장 준공 ▲한강인도교 재건 ▲국산 판유리 미국 최초 수출 ▲외자도입촉진법 시행령 공포 ▲부산 디젤 전기기관차 공장 건설 등을 통해 경제개발을 위한 ‘시동’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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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핫바지들만 전쟁터에 나가 총알받이가 되란 말이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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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교육부문에 대대적인 투자와 복구를 통해 문맹을 퇴치하고 고급 인재를 육성하여 산업사회에 필요한 인력을 대량 배출하는 바탕을 마련했다고 지적한다. 이승만 정부가 총력을 기울인 것은 누가 뭐래도 교육이었고, 산업화의 시초를 교육으로부터 시작했다. 국가 지도부는 초등학교에서 대학까지 교육시설의 복구와 개선을 국가운영의 최우선과제로 삼았다.

 

이승만 대통령은 교육시설 확충을 위해 폐쇄됐던 교육계를 개방하여 사립학교를 대대적으로 허가했다. 그리하여 사립학교가 곳곳에서 설립되면서 전체 숫자가 공립학교를 능가하는 상황이 전개됐다. 이런 노력으로 이승만 시대에 이미 우리는 교육 분야에서 세계 선진국에 육박하는 수준까지 올라간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전쟁 중 부산 영도에 전시(戰時)연합대학을 설립했다. 대학이래야 천막을 치고 칠판 하나 걸어놓은 것이 전부였다. 이승만 대통령은 전시 연합대학 문을 연 후 국내 대학 재학생들은 다 등록시켰다. 그리고 내각에 지시하여 “무슨 일이 있어도 대학생들은 보존해야 한다”며 군에 입대시키지 않았다. 그러자 사방에서 “못 배운 핫바지들만 전쟁터에 나가 총알받이가 되란 말이냐” 하는 비난이 쏟아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대통령은 끝까지 물러서지 않았다.


“조금만 더 견디면 전쟁이 끝난다. 전쟁이 끝나면 우리는 나라를 새로 건설해야 한다. 전후 복구와 나라 발전을 위해서는 반드시 인재가 필요하다. 그 때를 위해서 대학 재학생들을 보존시켜야 하는 것이다. 아무리 욕을 먹더라도 이것만은 양보할 수 없다.”


이것이 이승만 대통령의 생각이었다. 그의 혜안은 그대로 적중했다. 교육보급율은 경제발전에 직결되는 것이 몇 년 후부터 서서히 그 성과가 나타난다.


1950년대 정부 예산 구성비를 국방비가 전체 예산의 50%, 문교 예산이 20%를 차지했다. 국방비를 제외하면 전체 예산 중 문교 예산이 비중이 가장 클 정도로 교육을 중시한 시대였다. 임영신(任永信)씨가 중앙대학교를 세우고 건물 등 시설을 짓기 위해 기자재를 외국서 수입할 때 정부는 무관세로 통관시켜 학교시설 확장을 도와주기도 했다.


이승만 대통령의 교육에 대한 투자는 당대에는 별다른 혜택을 보지 못했지만 국가의 백년대계를 위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1950년대에 우리에게 가장 시급하고 중요한 것은 교육이었다. 만약 이승만 시대에 교육적 토대가 마련되지 않았다면 박정희 시절의 고도성장이 과연 가능했을까.

 

기술원조


미국의 원조 중에서 우리 정부 관계자들이 유효 적절하게 사용한 것이 미국 원조 중에 포함되어 있던 ‘기술원조’라는 항목이었다. 이것은 원조를 제공받는 나라의 경제 사회 발전에 필요한 인재양성이나, 기술습득, 행정능력의 효율성을 높이는 작업, 혹은 그 나라가 필요로 하는 산업기술 인력의 파견 등에 사용할 수 있는 예산이었다.


이승만 정부에서 부흥부장관, 재무부장관을 지낸 송인상 효성 고문은 자서전에서 “미국의 원조계획이 한국에 남긴 것 중에서 가장 성공한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서슴지 않고 기술원조계획이었다고 답변하는데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할 정도다.

그 시절에 정부 관료들은 대부분 일본식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미국 사람들과 대화가 잘 통하질 않았다. 그래서 지도층 인사들은 “기술원조 자금으로 인재를 길러 사회 각계에 진출시켜야 나라 운영이 제대로 되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 시절 기술원조 자금으로 이루어진 인재육성 사례는 다음과 같다.


우선 서울대와 미네소타대학의 공대ㆍ의대ㆍ농대간에 700만 달러를 들여 계약을 체결하여 교수를 상호교류하고, 우리 학생 상당수를 미네소타대학에 유학을 보냈다. 게다가 연구와 관련된 많은 기계와 설비들이 미네소타대학을 통해 들어오기 시작했다. 오늘날 우리 나라 박사 중에 미네소타대학 박사가 가장 많은 것은 이승만 시절에 노력한 결과다. 중고등학교 교육 프로그램은 피보디사범대학과 연계해서 개선작업을 시작했다.


또 워싱턴대학과 연세대ㆍ고려대간에 협정을 맺어 경영학과를 신설했다. 해방 후엔 화신의 박흥식씨나 경방의 김연수씨 정도를 제외하면 한국에 경영자다운 경영자가 없었는데, 연세대와 고려대에 경영학과가 설치됨으로써 많은 인재들이 기업경영의 선진기법을 공부하는 기회를 맞게 되어 우리 나라 기업사에 새로운 장을 열게 되었다.

이밖에도 서울대학교의 행정대학원, 국방부 산하의 국방대학원이 미국의 기술원조자금으로 설립되었다.

 

이밖에도 AID 자금으로 정부 관리, 기업체 사원, 기술자들을 외국에 파견해 3개월, 6개월, 1년 단위로 연수를 시켰다. 그 하나의 사례가 발전소 운영요원 연수였다. 이승만 대통령 시절에 당인리(10만kW)와 묵호(5만kW), 마산(5만kW)에 화력발전소가 건설됐다. 이 발전소 운영을 위해 이공계통의 젊은 기술자들을 기술원조 자금으로 디트로이트의 에디슨 전기회사에 연수를 보냈다.


이들이 귀국해 최신식 발전소를 차질 없이 운영한 것이다. 당시 10만 kW의 당인리 발전소에 근무한 인원은 총 180명. 미국이 똑같은 규모의 화력발전소를 파키스탄에 지어주었는데, 그곳 운영요원은 1500명이었다고 한다. 그 정도로 우리 엔지니어들은 열심히 공부를 하여 최소 인원으로 발전소를 원활히 운영할 수 있는 자질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또 한국 정부가 필요로 하는 미국인 기술자도 기술지원 프로그램을 통해 한국에 초청할 수 있었다. 우리 정부는 각 분야에서 미국 원조기술단을 초빙했는데, 그 중 가장 성공을 거둔 사례는 철도였다. 우리 나라에 온 미국 철도기술 고문단은 총 25명이었다. 그런데 다른 분야와 달리 철도 고문단은 현장 기술자 위주로 구성되어 있었다.


드 그로 고문단장은 텍사스주의 철도기사 출신이었는데 이들이 불철주야 노력하여 서울-부산 간 정시운행 시스템을 확립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 시절만 해도 혼란한 사회 분위기, 정비되지 않은 운행 시스템 등으로 인해 기차가 연착하지 않고 정시에 도착한다는 것은 기적이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그 무렵 우리 나라 철도는 100% 증기기관차로 운행되고 있었다. 그런데 기관차 연료인 유연탄이 비밀리에 명동 음식점으로 흘러나가 연료로 사용됨으로써 사회문제로 대두되기 시작했다. 고민 끝에 한미 양측의 담당자들은 디젤기관차를 도입하여 연료를 탱크에 넣고 봉인하여 운행하면 연료의 외부 유출을 막을 수 있을 것이라는 의견에 합의했다. 더구나 증기기관차는 열효율이 5%인 데 비해 디젤기관차는 18%나 된다는 장점도 있었다.


그리하여 제너럴일렉트릭에서 도입한 디젤 기관차 27대가 도착했고, 이를 운행할 기관사 양성이 시작됐다. 이 과정에서 미국 철도 고문단은 한국인들의 천재적인 소질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고 한다. 이런 각고노력 끝에 우리 나라는 1960년대 초까지 수송의 애로를 완전 타개하는 데 성공할 수 있었다.


이런 사례에서 보듯 미국의 기술원조는 우리 사회 전반에 큰 영향을 주었고, 특히 교육에서 큰 성공을 거두는 계기가 됐다. 박정희 시절의 경제개발계획에 참여한 엘리트들 가운데 상당수가 이승만 시절에 미국에 가서 공부하고 온 사람들이었다. 미국 원조자금으로 정부 관계자들은 문맹퇴치에 앞장섰고, 나라를 이끌어 갈 인재를 양성하여 세계 유수의 교육수준을 유지하는 나라로 올라서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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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지도자 이승만의 경제 리더십(5)
이승만의 공헌-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과 교육시설 확충

김용삼 월간조선 전략기획실장

 

 

 


[ ........ 해방 당시 약 80% ...문맹률을  1960년까지 10% 이하 수준으로 .......

   ...... 건국 당시 ... 대학생수는  7,800여명에서 9만7,800여 명으로  ......

    ..... 당시 영국의 대학생 수에 맞먹는 것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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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째 (교육분야에서), 청년기부터 교육입국(敎育立國)론을 외쳤고 박사학위 취득 후 장기간 교육에 종사했던 이 대통령은 집권하자 6년제 의무교육제도를 실시하고 문맹퇴치운동을 전개하여 해방 당시 약 80%이었던 한국인의 문맹률을 1960년까지 10% 이하 수준으로 낮추는 데 성공하였다. 동시에 그는 국민학교(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및 대학(교) 등 각급 학교의 수를 대폭 증설하였다.


그 결과 대학(교)의 예를 들면 건국 당시 19개에 불과했던 대학(교)의 수가 63개교로, 즉 3.3배 증가하였고 대학생수는 7,800여명에서 9만7,800여 명으로 10배 이상 증폭하였다. 9만7,800명이라는 수치는 당시 영국의 대학생 수에 맞먹는 것이었다. 이 대통령은 고급 인력 양성에 관심을 기울여 청년들의 해외 유학을 장려하였다.


그 결과 한국에는 전례 없는 ‘유학 붐’이 일어나 1953~1966년 약 7,400명의 젊은이가 해외유학인정시험을 거쳐 해외 특히 미국으로 유학하였으며 그 중 약 1,500명이 1982년까지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이들 정규 유학생 이외에 미국경제원조처(USOM)가 후원하는 ‘교육교환계획’에 따라 약 2,500명의 고급 인력이 유학, 단기 훈련, 단기 시찰 등 명목으로 외국(주로 미국)에서 교육을 받았고 미 국무성이 지원하는 ‘지도자 단기시찰 계획’의 일환으로 940여 명의 정치인, 고급 관료 및 교육자(특히 영어교사)들이 미국을 다녀왔다.


이상과 같은 교육개혁조치로 말미암아 대한민국에는 일찍이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교육기적(敎育奇蹟)’이 일어났다. 이 기적은 이 땅에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데 필요한 문화적 토대를 구축하였다. 그리고 1950년대에 양산된 고급인력은 1960년대의 이른바 ‘한강의 기적’으로 알려진 경제발전의 주역이 되었다.


말하자면 이 대통령은 한국민의 교육수준을 현격히 상향시키고 수많은 고급인재를 길러냄으로써 1961년 이후 남한의 눈부신 경제 발전과 민주화의 기틀을 조성하였다. 따라서 그의 이름은 역사상 ‘교육대통령’으로서 길이 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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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마치 '광란의 시대'를 연상하는 '대약진' 운동의 어처구니없는 정책의 예를 몇 가지 들어보자. 이러한 정책이 실시될 수 있었던 밑바탕에는 국민의 문맹율도 일조하였다. 국공내전에서 패배한 장제스(蔣介石)도 자신이 실패의 원인을 중국인들의 문맹에 두고 있다는 점도 같은 맥락이다. 실제로 공산혁명이 성공한 1949년의 중국인들의 문맹률은 80%에 달하였고, '대약진' 운동을 거친 뒤인 1964년의 일부 조작된 통계수치로도 문맹률이 52%에 달해 국민의 절반이 문맹이었던 시기였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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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대한민국 대통령 취임했을 때,
13세 이상 인구의 80%가  문맹자였다>

 

해방이 되어 그가 대한민국의 대통령으로 취임했을 때, 한국인은 13세 이상 인구의 80%가 어떤 형태의 교육도 받지 못했던 문맹자 국민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서둘러 1949년에 초등교육을 위한 의무교육제를 도입하고, 매년 정부예산의 10% 이상을 교육에 투입하였다. 그 결과로 그의 대통령 임기가 거의 끝나가는 1959년에 대한민국은 취학 적령기 아동의 95%가 의무교육을 받는, 그리고 순 문맹 율이 22.1%대로 낮아진 개화된 나라로 바뀌었다.


초등교육의 확산은 고등교육의 확산으로도 이어져 대학 숫자는 해방 직후의 19개교에서 1960년의 63개교로 크게 늘어났고, 대학생 숫자는 10만 명에 이르렀다. 여기에는 6.25전쟁 당시 대학생에 대한 병역 혜택의 조치도 중요하게 작용하였다. 그러나 일단 양적인 측면에서 고등교육 혁명이 일어난 것은 틀림이 없었다.


이러한 교육인구의 증가는 1960년대 이후에 그 성과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산업화를 시작하려는 나라에 이승만 시대의 교육은 우수하고 풍부한 인적 자원을 공급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급인력의 양성은 대한민국 정부의 힘만으로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그것은 최고 수준의 문명국인 미국과의 연계를 통해서만 가능했다. 그 과정에서 이승만은 한국을 해양문명권의 중심인 미국과 군사적, 문명적으로 연결시키려고 하였다. 


그러한 결합의 계기는 한국과 미국이 동맹국으로 싸운 6.25전쟁을 통해서 찾아 왔다.  새로운 엘리트의 대량 양성은 군대를 통해 이루어졌다. 군대는 한 때  80만 명 선까지 갑자기 커지기도 하였지만, 1954년에만 보더라도 병력 65만 명에 정부예산의 40%를 사용하는 막강한 집단으로 성장하였다. 군대의 유지를 위해 이승만은 미국으로부터 막대한 군사원조를 받아냈다. 매년 1천명 이상의 장교들이 미국에 파견되었다. 그의 통치기간에 기술실무를 맡은 하사관의 단기 파견 연수는 거의 1만 명에 이르렀다. 한국이 그와 같은 미국의 원조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냉전에서 반공의 첨병 역할을 했기 때문이었다.


군인들이 배워 온 군사기술은 대부분이 일반사회에서도 필요로 하는 요긴한 것들이었다. 특히 조직 관리의 기술은 무질서한 한국사회에 합리적이고 능률적인 행정체계를 도입케 하는 중요한 수단이 되었다. 그렇게 해서 형성된 유능한 장교집단은  후일 한국 사회에 기획과 조직의 개념을 확산시키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한강의 기적’은 대한민국을 해양문명권에
  편입시킨 이승만의 ‘文明史的 전환’서 시작>


그러한 사회 분위기에 맞추어 선진문명을 배우기 위한 해외유학 붐이 일어났다. 이승만 대통령 자신이 해외 유학을 적극 권유하였다. 그래서 나라가 경제가 어려운 상태인데도 불구하고 1950년대에는 매년 600명 이상이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선진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특히 1956년부터는 미네소타 계획에 따라 서울대학교의 많은 교수들이 미국 유학의 기회를 얻게 되었다. 그들은 나중에 한국 과학기술계를 주도하게 되었다.


미국 문명의 습득은 미국의 원조 가운데 포함된 기술 원조를 통해 가장 잘 이루어졌다. 전시긴급구호(CRIK), 대외 활동처(FOA), 국제 협력처(ICA) 등의 원조 계획에 따라, 수많은 과학자와 기술자가 훈련 목적으로 미국에 파견되었다. 그것은 한국과 미국 사이에 상호방위조약이 개정된 1956년부터 특히 활발해졌다.


이승만 통치기에 이루어진 미국의 최고 기술 지원이 원자력 부문 이었는데,  1956년에 ‘원자력의 비군사적 이용에 관한 한미간의 협력을 위한 협정’이 체결됨으로써 한국은 미국으로부터 농축 우라늄을 공급받을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정부는 트리가마크Ⅱ 연구용 원자로를 구입하고, 그 사업에 필요한 인력을 양성하기 위해 정부는 과학자들을 제작업체인 제네럴 일렉트릭 사로 파견하여 훈련을 받게 하였다. 1956년부터 1963년까지 200여명이 기술훈련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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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kforum

  한국논단 2008년 1월호
<건국 60주년 특집③>
                                               
이주영  / 건국대 사학과 명예교수

 

 

 

[ ...... 초등학교 취학률이 .... 1959년에는 96.4퍼센트 ..........

  ..... 중학생이 .... 1960년에 가면 65만 ..........    

 

  ..... 대학생 .... 1960년 ... 9만7819명 .........

  ..... 10만 명당 고등 교육 .... 1960년 .... 일본은 750명, 한국은 367명, .......    ]

 


한국이 잘된 건 일본 가르침 덕분 뉴라이트의 헛소리


김덕련 기자, 서어리 기자

2015.01.24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83 경제 개발, 아홉 번째 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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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해방되면서 문화적, 교육적 혁명을 맞이했다. 일제 때 초등학교 취학률이 얼마나 낮았느냐 하는 건 전에도 이야기한 적이 있지만 다시 한 번 살펴보자.


일본은 1904년에 이미 초등학교 취학률이 94.4퍼센트가 돼서 세계적인 수준으로 가고 있었는데, 한국은 일본이 98.1퍼센트로 세계 최고 수준으로 갔을 때인 1911년에 적령 아동의 초등학교 취학률이 1.7퍼센트였다. 1929년에도 18.6퍼센트밖에 안 됐다. 1930년대 후반부터 일제가 한국인을 동원하면서 취학률이 좀 높아지지만, 일제 시기 내내 그렇게 높지는 않았다.

 

그런데 해방되면서 초등학교 취학률이 갑자기 높아지는 것을 볼 수 있다. 1945년에 초등학교에 다닌 학생들이 136만여 명으로 통계가 나와 있는데, 이게 1955년에 294만여 명, 즉 두 배 이상으로 늘어난 것으로 나온다. 1960년에는 408만 명이나 된다. 그러면서 해방 직후에 이미 70퍼센트를 훌쩍 뛰어넘는 것을 볼 수 있고, 의무 교육을 실시한 직후인 1954년에는 82.5퍼센트가 된다. 1958년에는 94.6퍼센트, 자유당 정권 말기인 1959년에는 96.4퍼센트가 된다. 96.4퍼센트라고 하면 유럽에서도 이만큼 되는 나라가 많지 않다. 일본과 마찬가지로 한국도 초등학교 취학률로는 선진 대열에 들어갔다고 볼 수 있다. 다만 그 당시 학교 유리창도 깨진 게 많았고, 초등학교 교육 환경이 말할 수 없이 안 좋았다. 그리고 제대로 가르쳤느냐, 교사 질은 어땠느냐 하는 문제가 있긴 했지만, 그래도 이때 대량으로 한글세대가 탄생하게 된다. 엄청난 한글세대의 탄생을 이 시기에 맞이하게 된다.

 

평준화와 더불어 한국을 역동적인 사회로 만든 교육열과 한글세대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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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실 일제 때는 한국에 문맹자가 참 많았다. 예컨대 문맹자가 1930년에 77퍼센트였고 1933년에 72퍼센트였다. 그런데 해방 후에는 한국인이 초등학교에는 100퍼센트 가깝게 들어갔고, 13세 이상 인구 중에서는 1960년 통계를 보면 159만 명이 글을 모르는 것으로 돼 있다. 문맹률이 27.9퍼센트, 그중 남자는 15.8퍼센트로 나온다. 무학자 비율도 1955년에는 50.4퍼센트, 1960년에는 39.5퍼센트로 대폭 줄어든다. 그 후에는 훨씬 더 줄어든다. 거듭 얘기하지만 여기서 대량의 한글세대가 탄생하게 된다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

 

중학생 숫자가 해방 직후에 엄청 늘어나는 것도 눈여겨봐야 한다. 일제 때는 초등학교에 들어가는 것도 어려웠다고 이야기하지 않았나. 그러니까 중학생은 더더욱 적었다.

한국에 와 있는 일본인이 1910년의 경우 한반도 거주자의 1.3퍼센트, 1940년에는 3.0퍼센트였다. 그래서 한반도 거주자 중에서 일본인이 대략 40분의 1 정도였다고 보면 된다. 그런데 중등학교에 다닌 학생 수를 살펴보면 일본인 숫자와 한국인 숫자가 거의 같은 것을 볼 수 있다. 한국인은 일본인의 40분의 1밖에 중등학교에 못 들어갔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예컨대 1922년 조선총독부 통계를 보면 한국인은 7691명으로 돼 있는데, 그 당시 인구의 2퍼센트를 조금 넘던 일본인은 1만2567명으로 한국인보다 월등 많았다. 1938년에 가면 한국인은 2만4473명, 3퍼센트 정도 되던 일본인은 2만10명으로 일본인이 약간 적었다.


이때까지 한국인이 다닌 학교는 고등보통학교, '고보'라고 보통 말했고 여자의 경우 여자고등보통학교, '여고보'라고 했다. 이와 달리 일본인이 다닌 학교는 중학교였다. 초등학교도 이름이 달랐다. 한반도에 있던 일본인이 다닌 학교는 소학교, 한국인이 다닌 학교는 보통학교였다. 이름만 격이 떨어지는 게 아니라 교육 수준도 떨어졌다. 하여튼 중등학교에 다닐 수 있는 숫자가 무척 적었다. 그렇게 일본은 문맹 수준으로까지는 아니더라도 한국인이 교육 받는 것을 제한하려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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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통계를 보면 중학생이, 이 당시에는 중·고등학교가 합쳐 있었는데, 8만4572명으로 나온다. 일제 때보다 숫자가 많이 늘어났다. 이게 1955년에 가면 47만5302명이 된다. 5배 이상으로 급증한 것이다. 1960년에 가면 65만5123명으로 나온다. 고등학생 숫자도 1955년에, 이때는 중·고등학교가 분리됐을 때인데, 이미 21만2518명에 이르렀고, 1960년에 32만3693명이 된다.


그러니까 이 시기에 초등학교, 중학교를 나온 한글세대라고 할 수 있는 이 세대들은 1960년대의 노동 집약적 경공업에서는 전부 다 일할 수 있었다. 일하는 데 조금도 지장이 없었다. 그뿐 아니라 1970년대에 중화학 공업이라고 하더라도 우리나라에는 소비재 중화학 공업, 그러니까 석유화학 계통, 조선, 가정용 전기·전자 제품을 만드는 중화학 공업이 많았는데 여기에서도 초등학교, 중학교를 나온 사람들이 거의 다 일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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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중석  대학생의 경우 숫자로만 따지면 일제 때보다 훨씬 비율이 높다. 사실 수준은 그리 높지 않았지만 그나마 일부 있던 대학 과정을 일제가 한국을 병합하면서 없애버리지 않았나. 그러고 나서 대학을 세우지 않았다. 일본의 중요 지역, 그러니까 교토, 도쿄에는 대학이 몇 개씩 있었고 다른 어지간한 도시에도 대학이 다 있었으며 중국만 하더라도 큰 도시에는 몇 개씩 있었던 건데, 도대체 한국에는 나라 전체를 통틀어서 대학을 안 세운 것이다. 그러니까 1920년대 초에 민립대 기성회라는 것이 생긴 것이고, 그러자 일제가 할 수 없이 1924년에 경성제국대학 예과(豫科)라는 것을 만든 것 아니겠나.


이 경성제국대학이 일제 시기를 통틀어 유일한 대학이었는데, 뽑는 숫자도 얼마 안 됐고 거기에 들어갈 수 있는 인원이 1920년대에서 1930년대를 기준으로 하면 한국인은 20퍼센트에서 30퍼센트밖에 안 됐다. 정원이 얼마 안 된 이 학교에조차 대부분 일본인이 들어갔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한국인은 특별히 돈이 많거나 아르바이트를 정말 열심히 해서 일본이나 미국 등에서 유학을 하는 방법 이외에는, 국내에서 대학을 다니기가 아주 어려웠다.

전문학교라는 것도 몇 개밖에 안 됐다. 서울을 중심으로 의학전문학교니 고등사범학교니 하는 몇 개의 전문학교가 있었다. 이런 전문학교도 대개 20퍼센트, 많아야 30퍼센트만 한국 학생을 뽑았고 나머지는 한반도 거주자의 2퍼센트에서 3퍼센트밖에 안 되던 일본인으로 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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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중석  8.15 당시에는 대학이 갑자기 늘어나서 19개나 된다. 통계를 보면 대학생 숫자가 7819명으로 나와 있다. 1952년에는 3만2542명, 1955년에는 대학 숫자도 많이 늘어나서 53개 학교에 7만8649명, 그리고 4월혁명이 난 1960년에는 남학생 8만770명, 여학생 1만7049명 해서 총 9만7819명으로 통계가 나온다. 대학생 숫자는 그 뒤에 엄청나게 늘어나지만, 지금까지 살펴본 시기에도 일제 때와는 비교가 안 된다.


고등 교육을 받은 사람들의 숫자를 비교한 통계가 있는데, 거기서 한국은 수준이 아주 높게 나온다. 1955년에 인구 10만 명당 고등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일본은 470명으로 나와 있는데, 한국은 177명이고 대만은 그 반절인 88명밖에 안 된다. 버마는 18명, 인도는 영국이 해놨기 때문에 112명이었다. 1960년 통계를 보더라도 일본은 750명, 한국은 367명, 대만은 많이 올라와서 329명인데 한국보다는 적었다. 버마는 63명, 인도는 220명이었다. 그러니까 교육 수준에 의해서 아시아에서 한국과 대만이 일본 다음으로 경제 발전을 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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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1234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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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1.18.  ‘대한민국 인접해양의 주권에 대한 대통령의 선언’

 

평화선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평화선(平和線)은 1952년 1월 18일 대한민국의 대통령 이승만이 대통령령 ‘대한민국 인접해양의 주권에 대한 대통령의 선언’을 공표함으로써 설정된 대한민국과 주변국가간의 수역 구분과 자원 및 주권 보호를 위한 경계선이다. 미국, 중화인민공화국, 일본에서는 이승만 라인(영어: Syngman Rhee line, 중국어 정체: 李承晩線, 일본어: 李承晩ライン)으로 부른다. 이는 오늘날 배타적 경제 수역과 비슷한 개념이다. 이렇게 해양 경계선이 획정되었는데 1952년 2월 8일 이승만 정부는 동선을 설정한 주목적은 한·일 양국간의 평화유지에 있다고 발표함으로써[1] 이를 "평화선"이라 부르게 되었다

. 평화선의 설정목적은 해양분할이 국제적 경향이 됨에 따라 정당방위책으로 해안 어족(魚族)의 보호와 생물자원의 육성을 기하고, 특히 발달한 일본 어업활동으로부터 영세적인 한국어민을 보호하려는 데 있었으며, 국제관계상 합법적인 조치였다. [1]이 경계선은 독도를 대한민국의 영토로 포함하고 있다.

 

1952년 1월 18일 이승만은 동해에 평화선을 선포하였고[2], 2월 12일 미국은 이승만의 평화선을 인정할 수 없다고 이승만에게 통보해왔으나[2] 이승만은 이를 묵살하였다. 이 경계선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1945년 9월 27일 미국이 일본어업의 조업구역으로 설정한 ‘맥아더 라인’이 1951년 9월 8일 샌프란시스코 미일평화조약이 1952년에 발효됨에 따라 무효화되자 이승만은 이를 대체할 법안으로 당시 한국과 일본과의 어업분쟁에서 대한민국의 주장에 의한 방위 수역을 설정하고자 한 것이다. 한반도 주변 수역 50-100해리의 범위를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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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평화선이 설정된 직접동기는 맥아더 라인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종전 직후 미국을 중심한 연합국은 일본 어업이 세계어장에 출어하여 남획(濫獲)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1947년 2월 4일 맥아더사령부 명령으로 일본어선의 출어금지선을 책정하였기 때문에 한국은 직접적으로 큰 혜택을 받아왔다. 그러나 1951년 9월 8일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 조인됨으로써 맥아더 라인은 자동적으로 철회될 운명(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 1952년 4월에 발효할 예정이었다.)에 있었고, 그것은 곧 일본어선의 한국연안 대거출어·남획을 가져올 것이 분명했기 때문에 한국정부는 이에 대한 사전준비 대책으로 평화선을 선포하게 된 것이다. [1]

 

'인접해양의 주권에 대한 대통령의 선언'의 내용


1952년 당시는 한반도는 한국 전쟁 중이었다. 부산을 임시 수도로 한 대한민국의 대통령 이승만은 한국의 연안수역보호를 통해 수산 자원과 광물, 공산주의 국가로부터의 안보와 인근 국가로부터의 영토주권을 주장하기 위한 선언을 만들게 되었다. 공식명칭은 '인접해양의 주권에 관한 대통령선언'으로서 1952년 1월 18일 국무원 공고 제14호로 선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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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는 동선언 제3항 규정에 따라 1952년 12월 12일 '어업자원보호법'을 제정, 동선 내의 해양의 어업자원보호를 위한 관리수역을 명시하고(제1조), 동 수역안에서 어업활동을 하려는 자는 주무장관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고 규정함으로써(제2조), 국적여하를 불문하고 한국정부의 허가를 받아야 하며, 이를 위반하면 처벌받게 되었다. [1]


한국 정부는 이러한 전례가 없다는 일본의 주장에 대해 1945년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에 의한 '연안어업에 대한 선언'과 '해저와 지하자원에 관한 선언' 그리고 아르헨티나(1946년), 파나마(1946년), 칠레(1947년), 코스타리카(1948년), 엘살바도르(1950년), 온두라스(1951년), 칠레, 페루, 에콰도르(1952년) 등 다른 나라에서 채택한 유사한 사례가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 선언은 이후 한국의 수역 내에서 외국 선박의 불법 어로 행위를 단속하는 근거가 되었다.

 

일본의 반응


일본은 평화선의 선언에 대해 민감한 반응을 보이며 공해자유의 원칙을 내세워 반대하였다. 선언 직후인 1952년 1월 24일 성명을 통해 다음과 같이 발표하였다;

1.미국·캐나다·일본의 어업 협정에서 공해의 자유가 인정된 것과 같이 공해 자유의 원칙이 인정되어야 한다.
2.공해에 국가 주권을 일방적으로 선언한 전례는 없다.
3.한일 양국의 친선을 위해 이는 신중히 검토되어야 한다.


한국보다 발달된 수산업으로 이 지역에서 당시 연간 23만 톤 이상의 어획고를 올려오던 일본으로서는 경제적 타격과 함께 영토의 위협으로 여긴 여론이 민감하게 반응하였다. 또한 1월 28일에는 일본의 자국 영토라고 주장하는 독도를 경계선 안에 넣은 것은 한국의 일방적인 영토 침략이라고 주장하였다.

 

대치 국면의 전개

대한민국의 강경 정책

대한민국은 선언 이후 1952년 10월 14일 대통령 긴급명령 제12호로 '포획심판령'을 제정 공포하고 포획심판소및 고등포획심판소를 개설 하였으며 1953년 해양경찰대 설치계획을 수립하고 이해말에 180톤급 경비정 6척으로 부산에서 한국해양경찰대를 창설하여 평화선을 침범하는 외국선박과 밀무역을 단속하도록 하였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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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년 2월 4일 일본어선 제1대방환호와 제2대방환호가 제주도 남쪽 해안의 평화선을 넘어 조업하다가 경찰에 적발되어 나포 도중 총격으로 제1대방환호의 선장 세토준지로(瀬戸重次郎)가 숨지는 사고가 일어났다. 이후 대한민국 영해를 넘나드는 일본 선박에 대해서는 체포, 억류 등의 강경대응을 하여 1965년 한일국교 정상화로 평화선이 새로운 한일어업협정으로 대체되기 전까지 한국 해경은 328척의 일본 배와 3929명의 선원들을 나포, 억류하였으며[4] 나포한 일본 배를 해양경비대의 경비정으로 쓰게 하기도 했다[4]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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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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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閔泳煥과 韓圭卨이 高宗에게 건의
 
 
  그러나 閔泳煥과 韓圭卨 등 李承晩을 신임하는 중신들이 高宗에게 그를 미국에 밀파하도록 건의한 것은 사실이었던 것 같다. 李承晩은 민영환과 한규설이 처음에는 자기를 駐美公使로 임명시키려 했으나 日本人들의 방해로 실현되지 못했다고 적고 있다.35) 또 李承晩은 뒷날 다음과 같이 술회하기도 했다.
 


  〈… 외교방면에 국내에서는 어쩔 수 없이 되었다. 그래서 민영환, 한규설, 金宗漢(김종한), 金嘉鎭(김가진)제씨와 상의하고 그중 한 사람이 주미공사의 책임을 띠고 나가서 평화회의시에 해외활동을 미리 준비치 않을 수 없다 하여 그 방법으로 주선하여 보다가, 일사(日使:日本公使)의 조종에 막가내하(莫可奈何:막무가내)임을 각득(覺得:깨달아 앎)하고, 나를 대행하려 하여 보아도 역시 불가능하므로 나를 위탁하여 조용히 도미케 한 고로… 〉36)
 


  일본군의 점령 아래 일본공사의 내정간섭을 받고 있는 상황에서 미국을 비롯한 열강의 지원을 요청하는 직접적 외교활동을 벌이기는 불가능한 일이었으므로, 미국정부에 대해 1882년의 朝美修好條規에 따른 지원을 교섭하고 앞으로 있을 러-일 강화회의에 대비할 사람을 駐美公使館에 확보해 두는 것은 高宗과 한국정부로서는 절실히 필요한 일이었다.


그런데 그것을 먼저 제안한 것은 자기 자신이었다고 李承晩은 적고 있다. 〈그때에 나는 閔公이나 民族黨에서 어느 누구를 해외로 보내도록 하려고 했으나 때는 이미 늦어서 그럴 수 없었다〉37)는 것이다. 올리버도 李承晩이 민영환과 한규설에게 미국을 방문하도록 설득했다고 적고 있다.38) 독립유지를 위한 지원을 교섭할 밀사 파견이 李承晩의 말대로 그 자신의 아이디어에 의한 것이었다면, 그것은 1907년의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이르기까지 高宗의 거듭된 밀사파견의 효시였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閔泳煥과 韓圭卨은 자기들 대신에 李承晩을 미국에 가도록 권유했다. 민영환은 李承晩에게 가족의 뒷일을 자기가 돌보아 줄 것이며, 李承晩이 워싱턴에 있는 한국공사관에서 일할 수 있도록 주선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李承晩이 「韓國獨立黨」또는 「民族黨」이라고 한 것은 말할 나위도 없이 개화파 관료들을 지칭한 것이므로, 그의 미국행은 민영환이나 한규설과의 상의에 의한 것만은 아닐 것이다.
 
 

  高宗의 부름을 즉석에서 거절
 
 
  이 무렵의 어느 날 李承晩이 외출했다가 집에 돌아오니까 궁중에서 온 시녀 한 사람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황제가 李承晩을 단독으로 만나고 싶어한다는 말을 전했다. 그러나 李承晩은 황제의 이름이 나오자마자 그에 대한 평소의 증오감이 복받쳐 올라와 즉석에서 거절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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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렇게 하여 李承晩은 여러 통의 「外交文書」를 트렁크 속에 숨겨가지고 급히 미국으로 떠났다고 술회하고 있다. 이때에 그가 지니고 떠난 「외교문서」란 閔泳煥과 韓圭卨이 딘스모어(Hugh A. Dinsmore) 하원의원 앞으로 써 준 편지와 민영환이 주미공사에게 보내는 편지였다.41)
 

  딘스모어는 1887년부터 2년 동안 주한미국공사로 와 있던 사람이다. 韓圭卨은 李承晩에게 여비로 50원을 보탰고, 독립협회 회장과 農商工部 大臣을 지낸 金嘉鎭도 李承晩의 여비를 보탰다.42) 한규설은 자신이 喪中(상중)이므로 격식을 갖추지 못하고 노자를 보태니 꺼리지 말고 받아달라는 정중한 편지를 함께 보냈다.43)
 

  그런데 李承晩의 여비조달이 이처럼 개인차원의 구차한 방법일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의 미국행이 고종의 「밀사」 임무가 아니라 민영환과 한규설을 중심으로 한 개화파 관료들의 「밀사」 임무였음을 말해 준다.
 
 
  알렌公使는 소개장 써주지 않아
 
 
  李承晩의 도미 목적은 그러한 「밀사」임무만이 아니었다. 아마 그보다도 더 직접적인 목적은 留學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그가 미국으로 떠나기에 앞서 게일, 언더우드, 벙커, 질레트, 스크랜턴, 프레스턴, 존스 등 한국에 와 있던 외국 선교사들로부터 미국 敎會 지도자들이나 그밖에 도움을 줄 만한 주요인사들에게 자신을 소개하는 추천서를 무려 19통이나 받아 놓았던 사실로도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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孫世一의 비교 評傳 - 李承晩과 金九(15)

 

 

 


[ ...... 1905년 7월에는 .... 이승만을 밀사로 선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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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 7월에는 러일간의 강화담판이 루즈벨트(Theodore Roosevelt) 대통령의 중재로 미국 포츠머스에서 열리게 된다는 사실을 알고, 우리 대표를 파견하여 한국의 독립을 보장받자는 취지로 이승만을 밀사로 선정하였다.11) 이승만은 독립협회운동 당시 급진공화세력으로 활동하다가 체포되었으나, 선교사들의 배려로 1904년 8월 특별사면을 받고 11월 미국으로 출국한 상태였다.


당시 정부대신 중 미국과 가까웠던 민영환과 한규설은 이승만에게 미국정부 요로에 한국의 독립보전을 요청하는 서신을 전달하게 하였고, 이승만은 주한 미국공사였던 딘스모어(H. A. Dinsmore)의 주선으로 1905년 1월 상순에서 2월 사이에 미국무장관 헤이(John Hay)를 면담한 바 있었다.12) 이때 다시 이
승만을 강화담판 밀사로 선정했던 것은 러일간의 협상이 한국에 유리하게 결정되도록 잘 교섭해 보라는 지시였던 것이다.


이승만은 8월 4일 하와이 교민 8,000명을 대표해서 미국에 온 목사 윤병구와 함께 루즈벨트 대통령을 면담하고 한국의 주권과 독립보전에 대한 청원을 전달하였다. 그러나 친일파인 주미 한국대리공사 김윤정이 한국정부의 공식 훈령없이는 움직일 수 없다면서 이들의 對美교섭을 지원하지 않음으로써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13) 물론 미국이 이미 태프트-가츠라밀약을 통해 일본의 한국 보호국화를 승인한 상태였으므로 이승만 등의 루즈벨트 면담이 특별한 결과를 낳을 것도 없는 상황이었다.


이승만의 면담에도 불구하고 러일강화조약이 일본의 한국보호권을 승인하는 것으로 결정되자, 고종은 미국인 헐버트(Homer B. Hulbert)를 1905년 10월 미국 대통령에게 보내 친서를 전달했다. 1882년 朝美條約 제1조의 ‘居中調整’조항에 의거하여 미국이 나서서 한일의정서를 파기하고 열강의 공동보호를 통해 일본의 침략을 견제해달라는 요청이었다. 일제의 강압으로 ‘保護條約’이 체결된 직후인 11월 26일에는 헐버트에게 勒約은 무효라는 긴급 전문을 보냈고, 주프랑스공사 閔泳讚에게도 밀명을 내려 12월 11일 미국무장관 루트를 면담하게 하였다. 그러나 루트는 ‘한국은 1904년 2월의 한일의정서와 8월의 顧問協約 체결로 사실상 일본의 보호국 상태가 되었으므로 미국은 어떠한 협조도 할 수 없다’고 대답하였다. 전 주한미국공사 알렌(Horace N. Allen)도 고종으로부터 운동자금 1만불과 황제의 어새가 압인된 백지 친서 등을 전달받고 미국정부를 상대로 교섭을 벌였으나 미국은 고종의 호소를 모두 묵살하였다. 미국정부의 입장은 일관되게 친일적이었기 때문이다.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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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9 국 사 편 찬 위 원 회

Ⅴ. 대한제국의 종말
1. 고종의 국권회복 노력과 강제퇴위
1) 밀사파견 외교의 전개

 

 

 


1905.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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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李承晩은 閔泳煥과 韓圭卨의 편지를 가지고 아칸소州 출신 하원의원 휴 딘스모어(Hugh A. Dinsmore)를 찾아갔다. 딘스모어는 1887년부터 1888년까지 주한 미국공사를 지낸 인물로서 그의 밑에서 서기관으로 일했던 알렌에 따르면 〈냉정하고 빈틈없는 法律家〉이며 〈양심적인 크리스찬 紳士〉였다.5) 그는 동아시아의 정세에 밝았을 뿐만 아니라 한국에도 우호적이었다.
 

  딘스모어는 옛 친구들의 소식을 들어 기쁘다면서 국무장관 존 헤이(John Hay)와의 면담을 주선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헤이는 매킨리 행정부의 국무장관으로 있던 1898년에 중국에 대한 문호개방정책을 제창한 인물이었다. 그의 문호개방정책은 중국에 대한 열강의 통상기회의 균등과 영토보전을 강조함으로써 열강에 의한 중국 분할을 방지했고 이후 오랫동안 미국의 동아시아정책 기조가 되었다. 李承晩은 물론 딘스모어도 이같은 정책기조에 따라 헤이가 親韓的 조치를 취할 것으로 기대했던 것이다.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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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튿날 아침에 딘스모어 의원은 의원사무실에서 기다리지 않고 자기 마차를 몰아 아이 스트리트에 있는 李承晩의 거처로 데리러 왔다. 국무부로 간 두 사람은 곧 장관실로 안내되었다. 면담은 30분 이상 계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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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헤이 장관은 條約上의 義務이행 약속

 
  李承晩은 그에게 한국이 開港한 이래로 한 사람의 선교사도 아무런 화를 입지 않았음을 상기시켰다. 그러고 나서 결론적으로 말했다.
 
  『우리 한국인들은 장관께서 中國을 위해 하신 일을 韓國을 위해서도 해주시기를 원합니다』
 
  李承晩이 지적한 것은 헤이 장관이 1899년에 발표한 「무역상의 門戶開放政策에 관한 宣言」을 뜻하는 것이었다.8)
 
  헤이는 李承晩이 자신의 문호개방 정책을 거론한 데 대해 기뻐하는 듯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기회가 주어지는 대로 나는 개인적으로나 미국정부를 대표해서 우리의 條約상의 의무를 이행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할 것입니다』9)
 


  이때에 헤이 장관이 李承晩에게 조약상의 의무를 다하겠다고 이처럼 확실하게 말했는지는 의심스럽다. 왜냐하면 헤이 장관은 바로 한 달 전에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 대통령으로부터 〈우리는 日本의 의사를 거슬려가면서까지 韓國問題에 관여하고 싶지 않다. 韓國人은 자신들의 방위를 위해 一擊을 가할 능력도 없다〉10)는 편지를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루스벨트는 러-日 사이의 講和가 성립되면 韓國은 日本의 保護國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한국문제로 자신과 대립했던 알렌 공사를 3월에 해임하고 후임으로 모건(Edwin V. Morgan)을 임명했다.
 

  李承晩은 헤이 장관과의 면담으로 크게 고무되었다. 국무부를 떠나면서 딘스모어 의원도 회담결과가 매우 만족스러웠다고 말했다.
 

  李承晩은 閔泳煥과 韓圭卨에게 회담에 대한 상세한 보고서를 썼고, 딘스모어는 그것을 외교 파우치 편으로 주한 미국공사관에 보내어 두 사람에게 전하게 해주었다. 李承晩이 閔泳煥과 韓圭卨에게 보내는 편지를 주미 한국공사관 파우치를 이용하지 않고 미국 외교파우치를 이용한 것은 이 무렵은 이미 스티븐스(Durham W. Stevens)가 외교고문에 취임하여 일체의 외교관련 업무를 장악하고 있어서 편지가 日本人들에게 알려질 염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헤이 장관이 한국정부의 공식 사절도 아닌 젊은 李承晩을 만난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李承晩은 이때의 일을 오래도록 자랑스럽게 기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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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플록코트와 실크해트로 정장한 李承晩과 尹炳求는 오후 3시에 새가모어 힐에 도착하여 안내하는 대로 마차에서 내려 대기실로 들어갔다. 집 안은 들고 나는 사람들로 붐볐다. 그들 가운데에는 문무관 복장을 한 러시아 사람들이 많이 눈에 띄었다. 러시아의 수석대표 위테(Sergei Witte) 일행이 막 도착해 있었던 것이다. 일본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다. 이윽고 안내인이 와서 두 사람을 한 작은 방으로 안내했다. 두 사람은 가슴이 조마조마했고 사지가 떨렸다. 이 때에 루스벨트가 안쪽에 있는 방에서 나오면서 문 밖에서 기다리는 외교관들을 보고 잠깐 기다리라고 말하고는 빠른 걸음으로 두 사람이 있는 방으로 들어왔다. 그는 두 사람에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어서 오시오. 반갑습니다』
 
  그러고는 옆에 있는 의자에 앉으면서 두 사람에게도 의자를 권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루스벨트가 어떻게 바쁘게 서두는지 두 사람은 말을 꺼낼 겨를이 없었다.

 
  尹炳求가 청원서를 꺼내면서 말했다.
 
  『우리는 하와이에 거주하는 우리 국민의 청원서를 가지고 각하에게 바치러 왔습니다』
 
  루스벨트는 그 자리에서 청원서를 읽었다. 그가 청원서를 읽는 동안 두 사람은 가만히 앉아 있었다. 청원서를 다 읽고 나서 루스벨트가 말했다.
 

  『두 분이 내 말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나는 러시아와 일본을 초청하여 講和를 논의하도록 권할 뿐이고 다른 간여는 못합니다. 그런데 이 일은 대단히 중대하여 이 청원서를 내가 사사로이 받을 수 없고, 그러나 실제로는 내가 다 보았으며, 또 이렇게 두 분을 만났으니까…, 나의 권리가 防閑(방한·하지 못하게 막는 범위)이 있는 줄을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각하의 스퀘어 딜을 구하러 왔습니다』
 
  그러자 李承晩이 입을 열었다.
 
  『저희는 먼 지방에서 각하의 스퀘어 딜(Square Deal: 공평한 처사나 정책, 공정한 거래 등의 뜻)을 구하러 왔습니다』
 

  李承晩의 이 말은 사전에 여러 사람과 상의하여 준비했던 말이었을 것이다. 「스퀘어 딜」이라는 말은 이 무렵 루스벨트가 大企業과 勞動組合의 대립을 조정하면서 슬로건으로 표방한 말로서, 루스벨트의 국내정책을 상징하는 용어가 되어 있었다.
 

  李承晩의 말에 루스벨트는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줄 압니다』
 

  李承晩은 말을 이었다.
 
  『저희가 온 것은 각하께 강화회의에 구태여 간섭을 하시라는 것이 아니라 언제든지 기회있는 대로 朝美修好條約에 입각하여 불쌍한 나라의 위태함을 건져 주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러자 루스벨트는 한국 공사관을 아느냐고 물었다. 두 사람은 대답했다.
 
  『이 일은 공사관에서도 다 알고 있습니다. 다만 이 일은 우리 백성끼리 전국 관민의 뜻을 받들어 행하는 것이므로 공사관에서 간여하는 것은 긴요치 않은 줄 알았습니다』
 
  『淸國政府에서도 항의 서한을 공사관을 통해서 보내었으므로 이 청원서도 마땅히 그렇게 해야 합니다』
 
  이렇게 말하면서 루스벨트는 이 일의 중대성을 거듭 강조했다. 그리하여 두 사람은 『공사관으로 보내어 보겠습니다』하고 일어섰다.37)
 


  李承晩은 자서전 초고에서 이때에 루스벨트가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적고 있다.
 
  『만일 당신들이 이 문서를 귀국 공사관을 통해 제출하신다면 나는 그것을 中國의 청원서와 함께 강화회의에 제출하겠습니다. 귀국 공사더러 국무부에 가져다 주라고 하십시오. 국무장관을 만날 수 없거든 아무에게나 내게 보내라고 말하고 맡기라고 하십시오. 그러면 됩니다』38)
 


  태프트가 써준 소개장의 내용이 어떤 것이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루스벨트가 바쁜 일정 속에서도 두 사람을 만난 것은 극히 이례적인 일이다. 루스벨트가 두 사람을 만난 것은, 그 자신이 면담사실 자체의 중요성을 언급하고 있는데서 보듯이, 어쩌면 위테 백작과 고무라 주타로의 면접에 앞서 잠깐 동안이나마 한국인을 만나는 것이 강화회의를 주선하는 자신의 영향력에 도움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회견은 30분 가량 걸렸다.39) 루스벨트는 기분이 한껏 고조되어 있어 보였다. 그러나 이때는 루스벨트가 태프트에게 가쓰라와의 비밀협정을 확인하는 전보를 보내고 5일밖에 되지 않은 때였다. 그러므로 루스벨트가 韓國政府의 공식문서가 아니라 하와이에 사는 민간인들이 대통령인 자기에게 보내는 청원서를 굳이 公使館을 통해서 제출하라고 한 것은 청원서의 접수를 정중하게 거절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기자들의 축하받으며 워싱턴으로 달려가

 
  李承晩과 尹炳求는 루스벨트의 친절에 진정으로 감사했다. 루스벨트와 작별인사를 하고 돌아서 나오는 두 사람은 흥분과 희망으로 들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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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사람은 뉴욕을 거쳐 이른 아침에 워싱턴에 도착했다. 그들은 밤새 기찻간에서 뜬눈으로 보냈으나 아침 신문들에 난 자신들의 기사를 보자 다시 힘이 솟았다. 「워싱턴 포스트」는 두 한국 사절이 루스벨트 대통령을 만나서 청원서를 제출했고, 이미 그 청원서를 공사관을 통해 공식으로 접수시키기 위해 워싱턴으로 오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러한 신문보도에 대해 李承晩은 閔泳煥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는 지금 우리나라 형편에 앉아서 몇 천원, 몇 만원을 각 신문에 주어가면서도 이렇게 될 수 없는 일이라. 초목 같은 무리라도 흥기나는 마음이 없지 못할러라〉라고 적었다.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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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츠머드 강화회의가 폐막되고, 며칠 뒤인 9월10일에 李承晩은 閔泳煥으로부터 그와 尹炳求의 노고를 치하하는 편지를 받았다. 편지에는 그 동안의 비용이라면서 130달러의 송금수표가 들어 있었다.58) 민영환은 皇帝가 자기편에 두 사람의 노력에 대해 감사의 뜻을 전하면서 비밀 경로를 통해 두 사람의 활동자금을 보낼 것을 약속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閔泳煥의 격려편지도 실의에 빠진 李承晩을 일으켜 세울 수는 없었다. 高宗이 비밀경로를 통해 활동 자금을 보낼 것을 약속했다는 말에 대해서도 李承晩은 〈나는 그가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고 적고 있다.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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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請願外交路線과 여론환기 작업의 원형
 

  李承晩의 대미 「밀사」 사명은, 미국의 「居中調整」을 통하여 大韓帝國의 독립유지를 보장하게 한다는 목적에서 보면, 헐버트 등 다른 밀사들의 경우와 함께, 결국 실패로 끝났다. 그러나 그것은 처음부터 李承晩의 개인적 능력 밖의 사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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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헤이國務長官을 만난 데 이어 포츠머드 강화회의를 앞두고 루스벨트 大統領을 만나고, 특히 그것을 계기로 美國의 유수한 신문에 韓國問題를 부각시킬 수 있었던 것은, 李承晩 자신의 말마따나 한국정부가 〈몇 천원, 몇 만원을 각 신문에 주어가면서도〉할 수 없는 일이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成果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李承晩은 루스벨트와의 면담을 계기로 제국주의적 國際政治秩序의 냉엄한 현실을 깊이 인식하게 되었다. 그리고 서른한 살의 젊은 나이에, 그것도 아무런 공적 직함이 없는 신분으로 미국의 大統領과 國務長官을 만났다는 사실은 여러 가지 면에서 큰 경험이 되었다. 사실 李承晩은 이때 이후로 독립운동 기간 내내 미국의 어떤 대통령이나 국무장관도 만날 수 없었다.
 


  이때에 李承晩이 헤이 국무장관과 루스벨트 대통령을 만나고 또 그것에 대한 미국 신문의 반응을 통하여 깨달은 것은 뒷날 그가 독립운동 방략으로 시시포스의 神話처럼 되풀이하는 請願外交와 여론 환기작업의 원형이 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金九가 國母報讐(국모보수)의 의분에서 변복한 일본인 쓰치다(土田讓亮)를 살해했던 치하포 사건과 대비되는 상징성을 가지면서, 그 자신의 名聲과 權威를 높여 주는 근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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孫世一의 비교 評傳 - 李承晩과 金九(17)
  루스벨트 大統領을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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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루즈벨트의 별장에는 세계 각처에서 남긴 귀한 선물들이 전시되어 있는데 이 중에는 조선의 전통 나전 칠기가 있다. 나전칠기 뒷면에는 조선의 왕이 보냈다는 글귀가 선명하게 쓰여 있다. 이승만이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보낸 선물로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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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k-today.com/news/articleView.html?idxno=879
 
외교 중시했던 독립운동가 이승만, 그는 누구인가
이승만 시절 뿌려진 산업화 씨앗들 ‘한강의 기적’ 일구는 초석

마연옥 기자     2015.03.03

 

 

 


1908.9.  프린스턴대학 박사과정에 입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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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李承晩의 프린스턴 생활에서 가장 큰 수확은 우드로 윌슨(Woodrow Wilson) 총장과 그의 가족들을 가깝게 사귈 수 있었던 일이었다. 윌슨은 메릴랜드州 볼티모어에 있는 존스 홉킨스 대학교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은 정치학 교수로서 「議會政府論」과 「國家論」이라는 명저로 이름이 높았다. 그는 변호사로서도 평판이 좋았다. 윌슨의 가족들은 韓國과 韓國宣敎에 대해 큰 관심을 보이면서 李承晩이 귀국해서 추진하고자 하는 기독교 사업에 대해 격려해 주었다. 李承晩이 프린스턴 대학교 대학원에 입학하던 해 겨울에 윌슨이 불특정 다수의 여러 사람 앞(“to whom it may concern”)으로 써 준 다음과 같은 소개장은 李承晩에 대한 윌슨 총장의 신임이 어떠했는가를 보여 준다.


 
  〈李承晩씨는 프린스턴 대학교 대학원생으로서, 탁월한 능력과 고매한 인품으로 우리에게 호감을 주고 있습니다. 그는 자기 나라 韓國의 현재 상황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東洋의 전반적인 정세에 대해 놀랄 만한 식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상황에 대해 일반 대중을 대상으로 하는 강연에서도 특별한 성공을 거두고 있습니다. 투철한 애국심과 동포들에 대한 뜨거운 열정을 지닌 그는 그의 조국을 위해 큰일을 할 것입니다. 우리가 마땅히 연구하고 보존해야 될 위대한 東洋에서의 우리의 권익에 대해 직접 배우고자 하는 분들에게 나는 기꺼이 그를 추천합니다.〉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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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李承晩의 윌슨 가족들과의 교분은 자별했다. 윌슨 가족들은 피아노 옆에 둘러서서 노래 부르기를 좋아했는데, 李承晩은 그러한 가족모임에 초대되는 몇 안 되는 프린스턴 대학교 학생의 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李承晩은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노래는 부르지 않았다. 그래서 딸들은 李承晩과 자기네 아버지를 함께 놀리곤 했다. 학생손님은 흐트러짐이 없이 위엄을 지키고 있고 그를 초대한 대학총장은 풀어져서 마냥 즐거워한다는 것이었다. 캠퍼스에서 윌슨은 방문객들에게 李承晩을 소개하면서 곧잘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장차 한국의 독립을 되찾을 사람〉이라고 소개했다고 한다.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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孫世一의 비교 評傳 - 李承晩과 金九(21)
 

 

 


  19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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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럽을 거쳐 시베리아 횡단철도로 귀국

 
  李承晩이 윌슨 총장 가족과 웨스트 대학원장과 어드먼 박사 등 친지들에게 작별 인사를 한 다음 뉴욕항에서 영국의 리버풀로 향하는 발틱호(S. S. Baltic)를 탄 것은 9월3일, 곧 「한일병합」 조약이 공포된 지 닷새 뒤였다. 李承晩이 미국을 떠나기에 앞서 「병합」 소식을 들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李承晩은 귀국하고 나면 언제 다시 출국할 수 있을지 모르는 일이었으므로 귀국 길에 유럽 여러 나라를 잠깐씩이나마 둘러볼 생각이었다. 발틱호로 1주일 동안 大西洋을 항해한 끝에 리버풀에 도착한 그는 런던에서 다시 배로 도버해협을 거쳐 파리, 베를린, 모스크바 등 유럽의 대도시들을 둘러본 다음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타고 유라시아 대륙을 횡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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孫世一의 비교 評傳 - 李承晩과 金九(22)
 
 

 

 

        1912


[ ....... 대통령후보 지명대회가 치열한 .... 주말 저녁을 윌슨 가족이 李承晩과 같이 지냈다 ........


 ....... 윌슨 가족과의 교분은 이때 이후로 李承晩의 정치 행로에 압도적인 권위를 지닌 정치적 자산으로 .........    ]

 


[연재再開] 孫世一의 비교 評傳 (23) 한국 민족주의의 두 類型

李承晩과 金九
 
 
기독교 국가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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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承晩은 1912년 3월26일에 두 번째 渡美길에 올랐다.
이때부터 33년 동안 그는 고국 땅을 밟지 못했다. 渡美 도중에 그는 日本에 들러서 가마쿠라(鎌倉)春令會를 주재하고 유학생 대표들을 만났다. 이때에 만난 많은 사람들이 뒷날 民族運動의 지도자가 되었다.


李承晩은 5월에 미네아폴리스에서 열린 국제감리교 총회에 韓國平信徒代表로 참석한 다음 프린스턴大學 때의 은사 우드로 윌슨을 만나, 윌슨이 民主黨 대통령후보로 지명되는 전당대회를 참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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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시거트의 州知事별장에서 윌슨 만나


 
  李承晩이 미국으로 떠날 때부터 가장 기대했던 일은 프린스턴 대학시절의 은사인 우드로 윌슨(Woodrow Wilson)을 만나는 것이었다. 1910년에 民主黨에 영입되어 뉴저지州 知事로 당선된 윌슨은 과감한 革新政治를 실행함으로써 전국적인 평판을 얻어 일약 1912년 대통령선거의 유력한 후보로 급부상했다.
 

  시카고에서 나흘 밤을 묵은 李承晩은 6월3일에 시카고를 떠나 4일 오후에 필라델피아에 도착했다. YMCA에 숙소를 정한 그는 다음날 윌슨의 딸 제시 윌슨(Jessie Wilson)을 만나서 윌슨 지사와의 면담을 주선해 줄 것을 부탁했다. 이승만과 제시는 프린스턴 대학시절에 연애감정에 빠진 일이 있을 만큼 서로 친하게 지냈었다고 한다.22) 윌슨은 6월25일로 박두한 민주당 대통령후보 지명대회를 앞두고 몹시 분주한 때였으나, 제시는 면담을 주선해 보겠다고 약속했다.
 
 
  출판된 博士學位논문 들고 윌슨 찾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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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라델피아에서 2주일 동안 머문 李承晩은 6월18일에는 프린스턴으로 갔다. 첫날 저녁은 「알렉산더 홀」의 게스트 룸에서 자고, 이튿날 같은 홀의 A룸으로 옮겼다. 이 때부터 이듬해 1월에 하와이로 떠날 때까지 프린스턴은 그의 활동 근거지가 되었다. 李承晩이 프린스턴으로 간 것은 그의 학위논문 「美國의 영향을 받은 중립(Neutrality as Influenced by the United States)」이 대학 출판부에서 출판되었기 때문이었다. 비록 120쪽밖에 되지 않는 얄팍한 책이었으나 학위논문이 출판된 것은 거취문제로 고민하던 李承晩에게 크게 용기를 주는 자랑거리가 아닐 수 없었다.
 

  도착한 이튿날인 19일에 출판을 주선해준 웨스트(Andrew F. West) 학장으로부터 책 50부를 받아 든 李承晩은 그 길로 뉴저지州의 시거트(Sea Girt)로 갔다. 시거트는 주지사의 여름별장이 있는 곳인데, 그곳에 머물고 있던 윌슨이 이승만을 그곳으로 오라고 한 것이었다.
 

  李承晩은 그 날 저녁에 윌슨을 만났다. 윌슨이 대통령후보 지명대회를 앞둔 바쁜 일정 속에서도 李承晩을 만난 것은 李承晩 개인에 대한 호의도 호의지만 대통령후보로서의 외교정책 공약 등과 관련하여 東아시아 정세에 대한 李承晩의 견해를 한번 들어보겠다는 생각도 없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두 사람 사이의 대화 내용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려진 것이 없다. 徐廷柱의 「李承晩博士傳」이 유일하게 대화 내용을 기술하고 있는데, 서정주는 李承晩의 두 번째 미국行의 동기 자체가 감리교 총회에 참가하는 것보다도 윌슨을 만나서 한국의 실정을 설명하고 한국의 해방을 위하여 그의 협력을 얻는 데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있었다고 했다. 그리하여 李承晩은 윌슨을 만나자 한국의 해방을 세계에 호소하는 성명서를 만들고자 하니 거기에 同意署名을 해달라고 요청했고, 이승만의 이러한 요청에 대하여 윌슨은 다음과 같은 말로 정중히 거절했다는 것이다.
 

  『나 개인으로서는 거기에 물론 서명해드리고도 싶소. 서명할 뿐만 아니라 당신의 일을 도와주려고도 하오. 그렇지만 미국의 정치를 위해서는 아직도 내가 당신의 성명에 도장을 찍을 때는 아니오. 그러나 이제 우리가 같이 일할 때는 반드시 올 것이니 그것을 믿으시오. 그렇지 않아도 나는 벌써부터 당신의 조국 한국을 포함한 모든 약소민족 국가들의 일을 생각해 오고 있는 중이오』

 
  이러한 윌슨의 대답에 대하여 李承晩은 한번 더 그의 요구를 간청했다고 한다.
 
  『현상유지의 정치보다 正義人道의 미래를 위하여 나의 편이 되어 주시오』
 
  그러자 윌슨은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다는 것이다.
 
  『물론이오. 그렇지만 모든 일의 해결에는 그 적당한 때가 있는 것이오. 하여간 내 당신의 갸륵한 뜻을 명심해 두리다』23)
 
  그러나 이러한 기술은 비록 그것이 이승만의 구술을 토대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윌슨이 이때에 美國 大統領이었다고 적고 있는 데서도 알 수 있듯이, 많이 과장된 것이다. 徐廷柱는 윌슨이 李承晩에게 지방 순회 강연을 할 수 있도록 여러 사람을 소개해 주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덧붙였다.
 
  『이승만씨! 당신은 나 한 사람의 도장을 받을 생각을 하지 말고, 미국 국민들의 마음의 도장을 모두 받도록 하시오』
 
 
  볼티모어에서 열린 民主黨 대통령후보 지명대회
 

  이튿날 李承晩은 제시 윌슨을 다시 만나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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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李承晩은 노스필드에서 1주일 동안 머문 다음 매사추세츠州의 스프링필드로 갔다. 그곳의 YMCA 트레이닝 스쿨에 와 있는 조남복을 잠시 만나본 다음, 뉴욕을 거쳐 일요일인 6월30일 아침에 뉴저지州의 애즈베리파크(Asbury Park)에 도착했다. 그리고 그 날 저녁에는 시거트 별장으로 다시 윌슨 가족을 방문했다. 볼티모어에서 열린 민주당 대통령후보 지명대회가 치열한 접전으로 말미암아 끝나지 않고 있는 주말 저녁을 윌슨 가족이 李承晩과 같이 지냈다는 사실은 매우 주목할 만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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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볼티모어 지명대회는 7월 초까지 투표가 계속되다가 46번째 투표 끝에 윌슨으로 결정되었는데, 李承晩은 지명대회 동안 윌슨과 같이 있었다.24) 그것은 李承晩이 美國式民主政治의 극적인 장면을 직접 목격한 값진 체험이었다.
 

  李承晩은 윌슨에게 큰 기대를 걸고 있었다. 지명대회가 있고 난 뒤에 李承晩은 또다시 시거트를 찾아갔다. 그는 7월6일 아침에 프린스턴을 떠나 오전 11시30분에 뉴저지州의 벨머(Belmar)에 도착했다. 그리고 시거트에서 또다시 윌슨 후보의 딸 제시 윌슨을 만났다. 이러한 윌슨 가족과의 교분은 이때 이후로 李承晩의 정치 행로에 압도적인 권위를 지닌 정치적 자산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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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9.

 

[...... 예닐곱 개의 臨時政府에서 실질적인 정상의 지도자로 추대되었다 .........


.... 〈당시 형세는 내외지를 막론하고 인심의 추이가 오직 李承晩에게 폭주하였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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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1 운동은 40대 중반에 이른 李承晩과 金九의 인생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李承晩은 3·1 운동 이후에 국내외에서 선포되거나 논의되던 예닐곱 개의 臨時政府에서 실질적인 정상의 지도자로 추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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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內外地의 인심이 李承晩에게 瀑注해』

 
  그러나 〈당시 형세는 내외지를 막론하고 인심의 추이가 오직 李承晩에게 폭주하였었다〉는 현순의 표현대로 이때는 이미 李承晩은 어느 누구도 견줄 수 없는 존재가 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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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孫世一의 비교 評傳 한국민족주의의 두 類型-李承晩과 金九

  31. 임시정부 국무총리 李承晩

 

 

 

      1919.6.


[ ..... 스펜서 의원은 ..... 국무장관이 상원에 보고할 것을 요구하는 결의안을 제출 .........      ]


      1919.10.


[ .... 상원과 하원에 각각 한국문제에 대한 결의안이 제출되었다 ..........       ]

 

[ ...... 한국친우회는 .... 1만 명 이상이라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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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美國의회에서 韓國 문제 논의


 
  3·1 운동 이후의 한국사태와 특히 미국인 선교사들과 관련된 일본의 부당한 처사 등에 대해 미국 언론의 관심이 높아지고, 李承晩 등의 미국 의원들을 상대로 한 청원운동이 강화되면서 미국의회에서 한국문제가 거론되기 시작했다. 그것은 주로 베르사유 조약에 포함된 국제연맹규약에 반대하는 공화당 의원들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베르사유 조약에 대한 심의를 하면서 가장 논란이 된 것은 조약에 포함된 국제연맹규약 제10조였다. 그것은 연맹 가맹국들은 각 회원국의 영토보전과 현재의 정치적 독립을 보장하고 외부의 침략에 대하여 공동으로 대응할 의무를 갖도록 규정한 것이었다. 이 제10조는 국제연맹규약의 핵심 조항이었다.4)
 


  공화당 의원들은 이 제10조가 열강의 기존 식민지 지배를 보장하는 것으로서 그것은 미국의 외교전통인 먼로주의(Monroe Doctrine)에 위배될 뿐만 아니라 윌슨 자신이 제창한 민족자결의 원칙에도 부합되지 않는다면서 반대했다. 그러면서 반대의 논거의 하나로 한국문제가 거론된 것이었다. 미국이 국제연맹 가맹국이 되면 일본의 폭압적인 한국지배를 보장하게 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의회의 움직임은 이 무렵에 미국에서 일고 있던 국제연맹 및 베르사유 조약 반대운동과 고립주의로의 복귀경향, 반일무드 등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베르사유 조약에 대해서는 윌슨을 지지했던 자유주의자들도 윌슨의 이상주의가 패배하고 말았다면서 반대하고 있었다.5)


 
  李承晩은 윌슨 대통령에게 마지막 전보를 보낸 6월27일에 美 국무장관 대리 포크(Frank L. Polk)에게도 편지를 보내어 1882년의 朝美修好條約을 상기시키고 한국문제에 대한 미국의 개입을 촉구하는 한편, 법률고문 돌프(Fred A. Dolph)로 하여금 미주리州 상원의원 스펜서(Seldon P. Sepncer)에게 장문의 편지를 쓰게 했다. 돌프는 한국에서 3·1 운동이 일어나고 그에 따라 공화국이 선포된 것과 현재 한국인들이 일본인들로부터 부당하게 억압받고 있는 사실을 설명하고, 미국이 조미수호조약에 따라 한국인을 도울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6)
 


  스펜서 의원은 돌프의 편지 내용을 근거로 하여, 사흘 뒤인 6월30일에 한국의 현상황과 관련하여 미국이 조미수호조약의 거중조정 조항(제1조)에 의거하여 어떤 조치를 취하는 것이 가능한지에 대하여 국무장관이 상원에 보고할 것을 요구하는 결의안을 제출했다. 이것은 한국문제가 미국의회에 정식으로 상정된 최초의 일이었다. 李承晩은 1905년의 포츠머스 강화회의 때에 시어도어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 대통령을 상대로 벌였던 외교활동이 무위로 돌아간 이래로 거듭해 온 자신의 청원외교 활동을 회상하면서 남다른 감회를 느꼈을 것이다.


 
  선교사들의 보고서 「한국사정」을 의사록에 수록


 
  한 달 뒤인 7월4일에 포인덱스터(Miles Poindexter) 상원의원은 뉴욕州 로체스터에서 행한 독립기념일 연설에서, 국제연맹에 대해 반대하는 이유로 연맹이 한국인을 구제하기는커녕 3,000만의 중국인을 일본의 지배하에 두는 협정을 일본과 체결하는 데 급급하다고 비난했다. 이 연설은 7월15일의 상원의사록에 수록되었다.7)
 

  또한 7월15일에는 네브래스카州 출신 노리스(George W. Norris) 상원의원이 강화회의가 중국 山東半島의 독일조차지에 대한 일본의 요구를 수용한 사실을 비난하면서, 일본의 한국통치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그는 3·1 운동 진압과정에서 일본이 자행한 잔혹행위를 提岩里(제암리)사건 등의 구체적인 보기를 들어 비판하고, 한국 기독교인들에 대한 일본의 만행을 보도한 7월13일자 「뉴욕 타임스」지의 기사를 의사록에 수록하도록 했다.8)
 
  이틀 뒤인 7월17일에는 매코믹(Malcom C. McCormick) 상원의원이 미국기독교회 연합평의회 동양관계위원회에서 발행한 「한국사정(The Korea Situation)」 전문을 의사록에 수록할 것을 요구하여 받아들여졌다.9)
 
  「한국사정」은 3·1 운동 이후에 한국에 있는 미국인 선교사들이 보내온 각종 보고서를 간추려서 작성한 125쪽짜리 팸플릿이었다.10)
 

  매코믹에 이어 공화당의 거물인 보라(Willian E. Borah) 의원은 국제연맹의 결성에 관여한 사람들이 이집트, 아일랜드, 중국의 주장에 귀를 귀울이지 않고 한국을 어느 탐욕스러운 나라(곧 일본)가 기다리고 있는 도살장으로 돌려보냈다고 역설했다.11)
 


  노리스 의원은 또 한 달 뒤인 8월16일에 헐버트(Homer B. Hulbert)를 의회에 불러 증언하게 했다. 헐버트는 1905년에 을사조약이 강제될 때에 高宗이 자기를 미국에 보내어 미국 정부와 교섭하게 했던 사실 등을 진술하면서 일본의 한국 통치의 부당성을 역설했다.12)

 
  노리스 의원은 뒤에 워싱턴 한국친우회의 부회장직을 맡기도 했다.
 

  李承晩이 워싱턴에 대한민국 특파 구미주찰위원부, 통칭 구미위원부를 개설하는 것은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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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미위원부의 설치를 대외적으로 알리는 대회가 8월30일에 워싱턴에서 열렸다. 이 대회에서는 李承晩과 金奎植의 명의로 된 선언서가 발표되었다. 이 선언서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포함되어 있었다.
 


  〈아래 서명자는 2천만 한국민족을 대표하여 행동하는 바, 일본이 (한국인을) 무력으로 속박하며 노예 만드는 것을 항의하며, 한국의 독립선언서와 정부의 성명서를 빙거하여 또는 우리 국가와 민족이 소위 일본연방의 한 자치국으로는 발전할 수도 없고, 더구나 일본 귀족정치와 군인정치 밑에 우리 민족이 한 분자가 되어 가지고는 도저히 생존할 수 없는 까닭으로, 우리는 한국 민족의 절대적 독립과 완전한 자유를 기록한 뜻으로 성명하노라. …〉22)

「新韓民報」 1919년 9월2일자, 「한국은 일본의 속박을 벗어――우리 집정관 총재의 선언」.


 
  그런데 선언서에 서명을 마친 李承晩이 선언서를 배부할 곳으로 미국 국무부, 상하원의 외교위원회, 상하원 의장, 상하원 의원, 워싱턴 주재 외국공관, 파리평화회의 대표들, 연합통신(AP)과 각 외국신문 및 잡지를 들고 있는 것을 보면, 그가 평소에 얼마나 홍보활동에 신경을 쓰고 있었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23)
 
  이 선언서에는 3·1 운동 때에 선포한 독립선언서와 임시헌법이 포함돼 있었다고 했는데,24) 이때의 임시헌법이란 아마 한성정부의 임시약헌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주목되는 것은 일본 정보기관이 이때의 李承晩의 선언서에 대해 언급하면서, 이것은 일본의 자치운동을 방해하기 위한 것으로 전해진다고 말하고 있는 점이다.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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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의 건립을 위해 미국의 자본이 필요하다』
 


  구미위원부의 설립작업을 마친 李承晩은 워싱턴의 업무는 金奎植에게 맡기고 여러 지방을 순회하면서 강연활동에 온 정력을 쏟았다. 그의 「일지」에 보면, 한 지방의 교회와 학교에서 강연을 한 다음 밤차로 이동하여 다른 지방의 로터리클럽 오찬모임에서 강연한 것 같은 경우도 있었다.
 
  강연회에는 徐載弼이나 鄭翰景, 그리고 구미위원부의 선전원으로 위촉된 헐버트와 벡(S. A. Beck)이 같이 참석하기도 했다. 헐버트와 벡에게는 월 200달러의 사례비가 지급되었다.
 
  강연회의 순서나 강연내용은 집회의 성격에 따라 조금씩 달랐으나 대체로 비슷했다. 그 지방의 유학생들이나 교민들이 교회나 학교를 통하여 청중들을 모으면 李承晩이나 그밖의 연사들이 참석하여 일본의 한국통치와 한국의 실정을 알리는 강연을 한 뒤에, 그 자리에서 동조자들을 모아 한국친우회를 결성하고, 이들로 하여금 미국정부와 의회에 탄원서를 보내고, 지역언론에 한국문제에 관한 기사를 내게 하는 것이었다.28)
 
  李承晩의 강연내용은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최근의 전쟁(제1차 세계대전)이 무엇을 위한 싸움이었는가 하면, 그것은 전제정치에 항거하는 민주주의를 위한 싸움이었습니다. 이제 2천만 한국인은 민주주의와 기독교의 원칙들을 위해 일본제국주의와 싸우고 있습니다. …
 
  우리 한국인은 미국의 그것과 같은 원칙들을 위해 싸우고 있습니다. 우리는 기독교의 원칙들을 지지합니다. 우리는 한국의 건립을 위하여 미국의 자본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일본은 그것에 반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만주뿐만 아니라 아시아 전역의 문호개방에 찬성합니다. 반대로 일본은 대전쟁(제1차 세계대전)의 원인이 되었던 제국주의 방식을 옹호하고 있습니다. 미국이 한국과 체결한 조약에 따르면 여러분은 외부의 침공으로부터 우리나라를 지켜주도록 되어 있습니다…』29)
 

  이것은 1920년 1월11일 오후에 매사추세츠州 보스턴의 한 교회에서 열린 집회에서 한 연설이었다.
 
  이렇게 하여 결성된 한국친우회는, 필라델피아 한국친우회 회장 톰킨스 목사의 말에 따르면, 1921년 6월까지 미국 내 21개 도시에 2만5,000명의 회원을 확보하게 되었다.30)
 
  일본경찰은 한국친우회의 회원수가 3,000명을 넘지 않을 것으로 추정했는데,31) 1920년의 친우회 광고에 회원수가 1만 명 이상이라고 한 것을 보면,32) 친우회 회원수는 1만 명쯤이었을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 같다.33) 하와이동포들을 포함하여 재미동포들의 총수가 1만 명이 채 되지 않던 상황에서 각 지역의 정치가, 종교지도자, 실업가 등의 유지들로 구성된 친우회 회원수가 1만 명에 이르렀다는 것만으로도 괄목할 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렇게 하여 확보한 미국인 인맥은 해방 이후까지도 李承晩의 큰 정치적 자산이 되었다.
 
  한국친우회는 1920년 10월26일에 영국에서도 결성되었는데, 창립멤버는 국회의원 17명을 포함하여 학자, 신문기자, 목사 등 62명이었다.34)
 
 
  美國 의회에 韓國결의안이 제출돼


 
  李承晩은 친우회 회원들의 협조도 얻고 하여 미국의원들을 상대로 한 홍보와 청원활동을 더욱 강화했다. 그러면서 그는 미주 한인단체와 상해 임시정부에 전보를 쳐서 우호적인 발언을 하는 의원들에게 감사하다는 전보를 치게 했다. 심지어 파리에서 뉴욕에 막 도착한 金奎植에게까지 그러한 전보를 치라고 타전하고 있다.35) 그것은 동포사회에 그 자신의 권위를 높여주는 일이 되기도 했다.
 


  李承晩은 9월에 돌프로 하여금 「대한민국을 위한 진술과 적요(Statement and Brief for the Republic of Korea)」라는 문서를 작성하여 상원에 제출하게 했다. 이 문서는 상원의사록에 수록된 뒤에 외교위원회로 회부되었다.36)

 
  이러한 노력의 결과로 상원과 하원에 각각 한국문제에 대한 결의안이 제출되었다. 10월1일에는 펠런(James D. Phelan) 상원의원이 〈미합중국 상원은 스스로 선택한 정부를 갖고자 하는 한국인의 열망에 대하여 동정의 뜻을 표한다〉는 결의안을 제출했다. 이 결의안은 본회의에서 낭독된 뒤에 외교위원회에 회부되었다.37)
 

  또 10월9일에는 프랜스(Joseph I. France) 상원의원이 베르사유 조약에 대한 반대연설을 하면서, 그 이유로 한국에 대한 부당성을 거론했다.38) 그의 발언에는 4월의 필라델피아 한인대회(제1차한인회의)에서 채택된 결의문이 첨부되었다. 10월13일에 노리스 의원이 다시 국제연맹규약에 반대하는 입장에서 한국문제에 관해 긴 연설을 했다.39)
 

  또한 10월24일에 이번에는 하원에서 메이슨(William E. Mason) 의원이 펠런 상원의원의 결의안과 같은 내용의 결의안을 제출했다.40)
 


  베르사유 조약의 비준에 대한 표결은 11월19일에 있었다. 유보조건 없는 결의는 찬성 38 對 반대 53, 러지(Henry Cabot Lodge) 의원이 제안한 유보조건부 결의는 첫 번째 투표에서 찬성 39 對 반대 51, 두 번째 투표에서 찬성 41 對 반대 51로 모두 부결되었다. 베르사유 조약 비준문제에 대한 상원의 심의는 이듬해 2월에 재개되는데, 이때에 다시 한국문제가 거론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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孫世一의 비교 評傳 (33) 한국 민족주의의 두 類型
李承晩과 金九
 
대통령 李承晩, 경무국장 金九
 
 孫 世 一

 

 

 

      1920.3.

 

[ ...... 미국 상원에서 베르사유조약의 비준문제 ..... 韓國문제 유보조건안 .......

  ...... 한국안은 34대 46(기권 16)으로 부결 ........     ]

 

 

[ ....... 합중국 상의원들의 신의와 인도 정의의 주장을 조금도 의문할 여지가 없는 동시에,


       이번 실패는 실상은 실패가 아니요 승리이니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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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美國 上院에서 韓國問題 다시 擧論
 
 
  李承晩은 1920년에 접어들어서도 강연여행에 주력했다. 1월10일부터 1주일 동안 그는 林炳稷과 함께 동부지방을 순회하면서 대학과 교회 등에서 강연했다. 그러나 李承晩은 2월 한 달은 워싱턴에 머물러 있어야 했다. 미국 상원에서 베르사유조약의 비준문제가 다시 논의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때에는 비준을 전제로 15가지가 넘는 유보조건이 제의되어 토론이 계속되었는데, 한국문제도 그 가운데 포함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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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民主黨의 토머스 議員이 韓國문제 유보조건안 제의


 
  미국 상원에서 한국문제가 다시 거론된 것은 3월16일부터였다. 이번에는 공화당 의원들이 아니라 민주당 소속의 토머스(Charles S. Thomas) 의원이 앞장섰다. 그는 콜로라도州의 지사를 지내고 같은 콜로라도州에서 상원의원으로 선출된 사람이었다.

 
  이날의 회의에서 오언(Robert L. Owen) 의원은 이집트의 독립문제와 관련된 유보조건안을 제출했고, 이어 쉴즈(John K. Shields) 의원이 아일랜드의 독립문제와 관련된 유보조건안을 제출했다. 그러자 토머스 의원이 쉴즈 의원의 유보조건안에 한국독립문제를 추가한 수정안을 제출했다. 이러한 제안들을 놓고 장황한 논란이 계속된 끝에 세 가지 제안을 통합한 다음과 같은 수정안이 다시 제출되었다.
 

  〈합중국은 조약 제6항에 따른 보호는 단지 전쟁기간 동안 이집트의 영토와 독립의 보전을 위한 전쟁조치였다고 이해한다.
 
  합중국은 나아가 국제연맹조약의 근본정신인 모든 민족의 자결과 평등의 대원칙을 실행하기 위하여 영국과 일본이 각각 아일랜드 공화국과 한국 구왕국(the ancient kingdom of Korea)의 존재와 정치적 독립을 즉시 인정하고 아일랜드와 한국이 다른 독립 주권국들과 동등한 대표권을 갖는 국제연맹 회원국이 되는 데 동의할 것으로 이해한다.〉2)

 

  이 유보조건안에서 한국의 존재가 「대한민국」이 아닌 「한국 구왕국」으로 되어 있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토머스 의원이 그의 주장의 근거로 강조한 것이 1882년에 조선왕국과 맺은 한미수호통상조약에 따른 미국의 책임문제였기 때문이다.
 

  이 유보조건안의 표결은 연기되었다. 이틀 뒤에 게리(Peter G. Gerry) 의원은 아일랜드 독립에 관한 유보조건안만을 분리하여 다시 제출했다. 그러자 토머스 의원은 그 유보안에 〈또한 합중국은, 역시 민족자결의 원칙에 따라, 한국인민의 울분과 그들의 구왕국을 회복하고 일본의 압제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열망에 대한 동정을 표명하며, 나아가 그것이 달성될 때에는 즉시 국제연맹의 회원국으로 가입되어야 한다는 것을 표명한다〉는 내용을 첨부한 수정안을 제의했다.3)
 
 


  『「舊王國 회복 지지」는 美國 議會에 처음있는 일』


 
  이 수정안을 놓고 의원들 사이에서 갑론을박이 전개되었다. 한 의원은 외교관계를 고려하여 〈일본의 압제(the tyranny of Japan)로부터 벗어난다〉는 구절을 삭제하고 다만 신의적으로 동정을 표시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 다른 한 의원은 〈민족자결의 원칙에 따라〉라는 문구의 삭제를 요구했다. 수정안에 반대하는 월쉬(Tomas J. Walsh) 의원은 토머스 의원의 수정안에는 아일랜드의 독립문제와 관련된 유보조건안을 부결시키려는 의도가 있다고 비난했다. 그는 또 이 수정안의 〈구왕국을 회복한다〉는 용어에서 보듯이 군주제 정부의 부활에 찬성의사를 밝히는 것은 미국의 의회 및 어떤 의회기관에서도 처음 있는 일이라고 비꼬았다. 토머스 의원은 이 모든 수정요구를 받아들였다.4)

 


  이러한 논란이 있은 뒤에 아일랜드와 한국에 대한 유보조건안은 각각 표결에 부쳐졌다. 아일랜드안은 38대 36(기권 22)으로 가결되었으나, 한국안은 34대 46(기권 16)으로 부결되었다.5)
 
  아일랜드안이 가결된 데에는 아일랜드계 미국인들의 영향력이 작용한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이 시기에 아일랜드계 미국인의 인구는 3000만 명에 이르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6)
 


  미국 상원은 3월19일에 다시 베르사유조약 비준에 대한 표결을 실시했다. 결과는 찬성 49, 반대 35(기권 12)로 찬성표가 반대표보다 많았으나, 비준에 필요한 3분의 2에 미치지 못하여 부결되었다.7) 이렇게 하여 국제연맹은 미국이 불참하고 또한 소비에트 러시아와 패전국 독일이 배제된 채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일본의 4개국을 중심으로 설립되어 운영되게 되었다. 그것은 세계평화보장기구의 창설이라는 윌슨 대통령의 꿈이 실현되는 첫 출발이기는 했으나 윌슨 자신의 정치생명에는 치명적인 패배였다.
 


  상원에서 비준이 거부되자 윌슨은 국민투표를 검토했다. 그러나 그것이 실행 불가능한 것임을 알고는 1920년 가을의 대통령 선거를 그 대신으로 삼으려 했다. 그러나 윌슨의 이상주의, 국제주의에 환멸을 느낀 미국 국민은 윌슨의 후임 후보로 지명된 민주당 소속의 오하이오州 지사 콕스(James M. Cox) 대신에 그보다 인물이 떨어지는 공화당의 하딩(Warren G. Harding)을 선택했다. 실의에 빠진 윌슨은 마침내 21년의 연두교서에서 국제연맹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선거 유세 때의 과로로 중병을 앓게 된 윌슨은 1924년 2월3일에 숨을 거둘 때까지 폐인과 같은 생활을 보냈다. 그에게는 1920년에 받은 노벨평화상이 유일한 위안이었을 것이다. 프린스턴 대학 시절의 윌슨과의 교분을 자신의 정치적 자산으로 내세워 왔던 李承晩은 그러나 만년의 윌슨을 한 번도 방문하지 않았다. 대통령 재임 때의 윌슨의 냉대에 대한 원한 때문이었을 것이다.
 


 
  추억 어린 덴버市 방문


 
  미국 상원에서 한국독립과 관련된 유보조건안이 토의되는 것을 보고 李承晩은 토머스 의원의 출신지인 콜로라도州의 덴버로 떠났다. 한국친우회 결성을 위한 강연여행이었다. 3월17일 새벽에 워싱턴을 떠난 그는 시카고를 거쳐 이틀 뒤인 19일 아침에 네브래스카 역에 도착했다. 鄭翰景이 마중 나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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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 실패는 실패가 아니요 승리이니…』


 
  李承晩이 미국 상원의 한국문제에 관한 표결을 눈앞에 두고 콜로라도州를 방문한 데에는 그나름의 계략이 있었다. 그것은 토머스 의원의 노력이 얼마나 중요한 의의를 지닌 것인가를 그곳 미국 시민들이나 동포들에게 주지시키고 그것을 기반으로 하여 활성적인 한국친우회를 결성하고자 한 것이다. 그 자신의 희망적인 전망과 과장된 선전에도 불구하고 미국 상원이 한국독립과 관련된 유보조건안을 채택하리라고는 아마 李承晩 자신도 확신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비록 한국조항이 가결되지는 못했더라도 한국의 독립문제를 두고 미국의 도의적 책임이나 조약상의 의무와 관련하여 미국 의회에서 열띤 토론이 전개되었다는 사실은 그와 구미위원부의 외교적 노력의 큰 성과였다. 그러한 사정은 李承晩에게 비판적 입장이었던「新韓民報」의 다음과 같은 「논설」로도 짐작할 수 있다.


 
  〈우리는 한국에 향하여 막대한 동정을 주는 합중국 상의원들의 신의와 인도 정의의 주장을 조금도 의문할 여지가 없는 동시에, 이번 실패는 실상은 실패가 아니요 승리이니, 곧 미구에 합중국 상의원은 한국문제를 따로 제출하고 따로 토의한 후에 일반 한국동정 상의원들의 투표로 단독의 보류안을 성립할 기회를 예비함인 까닭이라. …


 이번 첨가 개의안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한 번 더 확실히 아는 바는, 곧 합중국 상의원의 인도주장이 참 굉장한 일이라. … 만일 우리가 힘이 있거나 기회가 있어 우리 독립을 찾으면 온 세계 여러 나라 중 먼저 우리 독립을 승인할 나라는 곧 합중국이라.


달리 말하자면 우리의 독립은 첫째는 우리에게 있다 하며, 우리 독립을 위한 외국의 동정은 벌써 우리 외교대표들의 힘과 인도와 정의를 주장하는 외국, 특별히 합중국을 우리는 마땅히 마음을 다하여 감사하고, 우리의 실력 예비와 우리의 외교 계속에 진력하여, 이 다음 첫 번 오는 독립전쟁 기회를 잃지 말 일이로다.〉10)


 
  또한 上海의 「獨立新聞」도 논설에서 〈회상하라, 國恥(국치) 10년 이래로 언제 한국문제가 세계의 여론에 오르내렸더뇨. … 한국과 한족이라는 명칭은 다만 사학자의 필기장에나 희미히 기억된 명칭에 불과하였도다〉라고 말하고, 미국 상원에서 한국문제가 논의된 것은 3·1운동 이래 계속되어 온 우리의 독립운동이 전 민족적 운동임을 세계가 명확히 인식하게 되었음을 나타내는 「위대한 사업」이라고 평가하면서, 〈동포여, 이번 미국 상원의 한국독립안을 경시치 말지어다〉라고 강조했다.11)
 

 

  國際聯盟에는 기대 안 해

 
  한국유보조항을 찬성한 34표 가운데에서 23표는 공화당 의원들에 의한 것이었다. 거기에는 미국의 국제연맹 가입을 맹렬히 반대한 외교위원장 로지(Henry C. Rodge)를 비롯하여 보라(William Borah), 존슨(Hiram W. Johnson) 등 강경파 고립주의자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李承晩과 구미위원부는 이처럼 윌슨에 반대하는 상원의원들의 협조를 얻어 한국의 독립문제에 대한 결의안을 성립시키려 했던 것이다.12)

 

  李承晩은 한국의 독립문제가 미국 의회에서 거론되는 일에 정력을 쏟으면서도, 새로 발족하는 국제연맹에 대해서는 처음부터 큰 기대를 걸지 않았다. 역사상 처음으로 세계평화보장기구로 발족하는 국제기구이기는 하나, 미국이 참가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제대로 기능을 발휘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점은 상해 임시정부가 처음에 국제연맹에 대하여 큰 기대를 걸고 있었던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임시정부에서는, 앞에서 본 대로, 연맹의 출범을 앞두고 제일 먼저 착수한 작업이 연맹에 제출할 한국문제에 관한 보고서를 작성하는 일이었다. 또한 1920년부터 실시하기로 한 「대한민국임시정부 시정방침」에도 〈국제연맹회에 대하야 대사를 파견하며, 독립승인을 요구하며, 또한 한국이 국제연맹에 가입함을 요구함〉이라는 항목이 포함되어 있다.13)

 
  미국 상원에서 베르사유조약 비준이 거부되고 나자 미국 의회에서의 한국문제논의도 일단 끝이 났다. 구미위원부는 법률고문 돌프로 하여금 3·1운동 이후에 미국에서 진행된 李承晩과 구미위원부의 활동을 정리한 「업무 보고서」를 작성하게 했다. 「보고서」는 1920년 9월15일자로 위원장 金奎植에게 제출되었는데, 거기에는 국제연맹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는 대목이 있다.
 

  〈국제연맹에 관하여는 본인은 이를 죽은 기관이라고 판단합니다. 연맹으로는 아무것도 성취하지 못할 것입니다. 본인의 판단으로는 美國은 결코 연맹에 참여하지 않을 것입니다. 연맹은 근근이 유지되다가 자멸할 뿐입니다.〉14)
 
  돌프의 「보고서」의 이러한 언급은 李承晩을 포함한 구미위원부 인사들의 국제연맹에 대한 인식의 일단을 보여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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孫世一의 비교 評傳 (35) 한국 민족주의의 두 類型
李承晩과 金九
 
金九, 공산주의를 거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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