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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지처럼 보였다. 군복은 낡았고 군화는 헤졌으며
2018.09.27 조회수 : 26

 

 

 

 

 


  ..... 거지처럼 보였다. 군복은 낡았고 군화는 헤졌으며, 땀과 때에 절어 있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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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월 8일 함경북도의 나진을 공습했던 소련군은 8월 9일에 한반도의 끝에 발을 들여 놓은 뒤, 8월 12일에는 한반도의 북쪽 끝 작은 도시 경흥과 옹기, 그리고 함경북도 나진항 과 청진항을 차례로 점령했다. 이어서 8월 24-26일 북한의 중심도시인 평안남도의 평양 에 진주했다. 바로 이날 소련 점령군은 38도선까지 내려와 공식적으로 38도선을 봉쇄했다. 구체적으로, 남과 북을 잇는 경의선을 끊고 전화 통신도 끊었으며, 심지어 사람과 물자의 왕래도 끊었다. 이 당시에 한반도의 우리 민족은 남이건 북이건 분단을 전혀 생각하지도 않았는데, 소련 점령군은 이처럼 분단을 굳히는 조치를 취해 나간 것이다. 남한의 좌익서적들은 소련의 이런 분단 조치에 대해서도 방관, 침묵하고 있다.


  이 무렵 소련군은 점령과정에서 일제 기관을 인정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제25군은 북한의 모든 지역에 대해 당분간 일본 헌병과 경찰이 치안을 유지하며, 행정 사무는 종래대로 일본인 도지사가 도청 직원들과 함께 집행한다고 포고해 버렸다. 그러나 이 포고로 인해 북한 주민들의 항의를 받고 난 뒤 잘못된 것을 깨닫고는 8월 하순에 가서야 전면 취소하였다. 일제 기구를 인정한 것은 남한에 진주한 미군의 실수와 비슷하다. 이런 소련군의 실수도 국내의 좌익서적들이 철저히 침묵하며 외면하는 부문이다.

 

  소련은 제2차대전 때 강력한 나찌 독일군에 맞서기 위해 당연히 정예군을 유럽 전선에 배치했다. 북한은 소련에게는 훨씬 덜 중요한 지역이었으므로 북한 점령을 맡은 제25군은 질적으로 떨어졌다. 김학준 교수는 『북한50년사』(동아출판사刊)에서 소련군 제25군의 모습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중앙아시아의 감옥에서 풀어내서 강제로 징집한 죄수 출신 사병들이 많아서, 약 30% 가 머리를 빡빡 깍인 채 끌려온 사병이었다고 한다. 보급도 부족하여, 군용 열차를 타고 온 그들이 평양 역에 내렸을 때 평양시민들의 모습에 비친 그들은 '해방군'이 아니라 거지처럼 보였다. 군복은 낡았고 군화는 헤졌으며, 땀과 때에 절어 있었다. 그들은 거의 홀렙이난 빵을 들고 다녔는데, 이것을 그들의 식량이며 베개였다. 땅바닥에 않을 때에도 그 것을 깔개로 썻으며, 식사 때에도 그렇게 쓴 것을 식빵으로 먹었다. 해방군이 온다고 환영을 나갔던 평양 시민들은 소련군의 남루하고 무식한 분위기에 경악하고 말았다. 그래도 흉악무도한 나치 군대와 야만적인 일본 군대를 무찌르기 위해 너무 고생했구나 하고 동정심을 아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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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5.9.

     
[ ..... 대낮에 거리에서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발언을 한 사람이 공산당원인 경찰의 총을 맞고 죽었다. ......


 ...... 사람들은 압도적 다수가 공산주의에 반대하지만 공포와 테러 분위기에 사로잡혔고 ........    ]

 


[ ..... 먼저 은행에 가서 현금을 강탈 .......

 ...... 가정집에 침입해 시계부터 여성복까지 귀중품을 약탈하고 부녀자를 강간 .......     ]

 


[단독] "소련군에게 무기 넘겨받은 공산주의자들, 라디오 방송국과 지역신문 빼앗고 있다… 반대세력 학살 위협하고 대낮에 총살"

 


조선일보    이선민 선임기자

입력 2017.08.16

 

[오늘의 세상]


故한경직 목사가 1945년 9월 평안북도 상황을 알린 비밀청원서 발견


"청원서 받은 美군정 정치고문… '소련군 활동, 믿을 만한 첫 증언'
소련군, 도시에 들어가면서 현금 강탈·부녀자 강간 일삼아"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우리는 평화와 민주주의를 기대했다. 그러나 놀랍게도 소련군이 진주해 우리 백성을 약탈하고 많은 비행을 자행하고 있다. 게다가 이 모든 것이 공산당 지배를 예고하고 있다. 우리는 '공산 한국'을 원하지 않는다(We do not want red Korea). 이런 상황이 계속되면 북한 지역은 완전히 황폐질 것이다. (연합군이) 즉각 위원회를 파견해서 상황을 조사해 달라."


 
20세기 후반 한국을 대표하는 개신교 지도자인 한경직(1902~2000) 목사가 광복 직후인 1945년 9월 26일 서울의 미군정에 소련군이 점령한 평안북도 일대의 정치 상황을 알리고 도움을 요청한 영문(英文) 비밀청원서가 발견됐다. 한국기독교사를 연구하는 박명수 서울신학대 교수가 최근 미국 국립문서기록보관소(NARA)에서 찾아낸 이 문서는 일본이 패망한 뒤 신의주에서 소련군 및 공산당과 마찰을 빚던 한 목사가 서울로 내려와 미군정 당국에 제출한 것이다. 당시 미군정 정치고문이었던 베닝호프는 비밀청원서를 자신의 평가를 담은 보고서와 함께 미국 국무부에 보냈다. 베닝호프는 이 청원서가 "38도선 이북을 점령한 소련군의 정치 활동에 관한 최초의 믿을 만한 목격자 증언"이라고 평가했다. 베닝호프의 보고서는 미 국무성 외교문서집(FRUS)에 수록됐지만 한 목사의 비밀청원서는 포함되지 않아 그동안 전문이 알려지지 않았다.


 
한경직 목사가 신의주 제1교회 담임인 선배 윤하영(1889~1956) 목사와 연명으로 작성한 A4용지 3장 남짓 분량의 청원서에 따르면, 일본이 항복한 다음 날인 8월 16일 신의주의 지도급 인사들은 질서 유지를 담당할 자치위원회를 구성했고, 8월 25일 평안북도 각 시·군 대표들이 참여하는 평북 자치위원회로 확대됐다. 8월 30일 소련군이 신의주에 들어오면서 시태가 급변했다. 소련군은 인민정치위원회를 새로 만들고 급조된 두 개의 소규모 공산주의 조직과 자치위원회가 함께 참여하도록 지시했다. 곧 공산주의자들이 인민정치위원회의 다수를 차지했다.

 

소련군은 일본군을 무장해제시킨 뒤 그들에게서 빼앗은 무기를 공산주의자들에게 넘겨주었다. 며칠 뒤 조직된 공산당은 법원 건물을 무력으로 차지해 본부로 사용했고 라디오 방송국과 유일한 지역신문을 빼앗아 공산주의 선전 선동을 시작했다. 공장과 농촌 마을에는 공산당 조직이 만들어져 무력으로 공장과 농지를 접수했다. 소련군은 비행기로 선전 유인물을 살포하면서 공산당을 지원했다.


이런 사태 전개에 놀란 개신교 지도자들은 '기독교사회민주당'을 만들었다. 이를 알게 된 공산당은 그들이 공식 활동을 하면 소련군이 대량 학살할 것이라고 위협했다.


한경직 목사는 신의주에서 벌어진 테러 현장을 생생하게 증언한다. "9월 16일 대낮에 거리에서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발언을 한 사람이 공산당원인 경찰의 총을 맞고 죽었다. 살인자는 풀려났고, 평상시처럼 일하고 있다. 사회민주당 지도자들이 이에 항의하자, 다음 날 경찰이 몰려와 체포했다."

 

비밀청원서는 "사람들은 압도적 다수가 공산주의에 반대하지만 공포와 테러 분위기에 사로잡혔고,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알지 못하고 있다. 이런 상황이 계속되면 공산주의자를 제외하고는 살 수 없게 될 것이다. 소련군은 철수하기 전 북한 전역을 공산화하려고 결심한 것이 분명하다"고 적었다.

 

이어 소련군의 비행이 "상상을 넘어선다"며 자세히 설명한다. 소련군은 도시에 들어가면 먼저 은행에 가서 현금을 강탈한다고 했다. "신의주에서 소련군은 (은행에서) 120만엔을 가져갔다. 가정집에 침입해 시계부터 여성복까지 귀중품을 약탈하고 부녀자를 강간한 사례는 셀 수조차 없이 많다." 이런 절망적인 상황을 피해 남쪽으로 내려가는 사람은 38선을 넘으면서 소련군에게 약탈과 강간을 당한다고 폭로했다.

 

1932년 미국 프린스턴신학교 유학에서 돌아와 신의주 제2교회에서 목회하던 한경직 목사는 일제 말 교회를 사임한 뒤 고아원과 양로원을 설립해 운영했다. 광복 후 신의주 자치위원회 부위원장, 기독교사회민주당 부위원장으로 활동한 한 목사는 비밀청원서를 제출한 뒤 평양으로 돌아갔지만 10월 말 윤하영 목사와 함께 북한을 탈출했다. 그가 북한을 떠난 뒤 용암포 지역의 기독교사회민주당 창립 모임을 공산당이 습격하자 신의주 일대의 개신교 학생이 중심이 돼 저항한 사건이 신의주학생의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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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7/08/16/2017081600252.html

 

 

 


(1)광복 31주년…각계인사가 말하는 그날의 비화(상)

조연명(조일식씨 장남 한민당준비위원장)

 

 [중앙일보] 입력 1976.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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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석(강서군)에 피신해 계시는 아버님(고당 조만식)을 뵙고 15일 다시 평양으로 들어갈 무렵이다. 정오쯤 평양서 30리 떨어진 태평이라는 곳을 지나는데 면사무소 앞에 사람들 한 떼가 모여 웅성됐다.


일순에 사라진 해방의 감격|소군, 진주하자 겁탈·약탈 일삼아|만행 항의했으나 "죄인들로 조직돼 어쩔 수 없다"고만|제련·제철소 등 공장 시설 마구 뜯어가

 

한사람에게 물으니 「라디오」에서 일본천황이 연설을 하고 있다고 했다.


사람들 틈으로 얼굴을 내밀어 자세히 들어 보려하는데 벌써 『해방이다』 『조선독립만세』하는 고함소리가 터져 나왔다. 나도 모르게 자전거를 집어탔다. 온 몸에 땀을 뒤집어쓰며 40리 길을 단숨에 반석으로 되돌아가 『아버님, 해방이 됐대요. 일본이 항복했답니다』하며 대문을 들어서기도 전에 소리부터 질렀다.

 

그러나 아버님께서는 조용한 어조로 『그래』하시더니 「라디오」연설내용을 몇 마디 묻고는 여느 때처럼 뒷동산에 올라가 깊은 사색에 잠긴 채 저녁 때가 다 되도록 내려오시질 않았다.

 

나는 아무래도 평양의 상황이 궁금했다. 그 길로 평양에 나왔다. 시내가 온통 환희와 흥분으로 들끓고 있었다.

거리로 쏟아져 나온 시민들은 밤새도록 『만세』 『만세』 고함을 계속하는가 하면 잠도 자지 않고 술을 마시며 잔치를 벌이는 사람들도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어떤 청년들은 일본인 집을 때려부수겠다고 몰려가기도 했다. 거리에는 일본 헌병들의 모습이 사라지고 일본인 상점들의 문도 이미 닫혀 있었다.

 

이튿날 도지사가 반석에 계시는 아버님을 모셔가기 위해 자기 차를 보내왔다.


심부름을 온 김항복씨(독립문표 「메리야스」 전 사장)가 『아무래도 이북에서는 고당이 주인이니 업무를 인수해 달라』는 지사의 말을 전하자 아버님께서는 『일본지사가 타던 차를 내가 탈 수 있는가. 조만식이를 그렇게 밖에 보지 않았느냐』고 나무라시고는 『나는 인수를 맡을 자격이 있는 사람이 아니다』며 김씨를 그냥 돌려보냈다.

 

아버님은 같은 교회의 오윤선 장로(고 오영진씨의 부친)가 송효경이라는 청년 편에 차를 보내 『평양에 나와 민심을 수습해달라』는 말을 듣고야 17일 상오 평양에 올라 오셨다.


아버님과 오 장로 이윤영 김병연 박현숙 한근조 한재덕씨 등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평남건국준비위원회의 주목적이 치안의 유지에 있었으나 건준이 생기고도 당장은 평양시민들의 흥분이 가라앉질 않았다. 건준 산하의 청년들도 조선인으로서 고등계 형사나 일본인 앞잡이 노릇을 한 사람들을 끌어다 「린치」를 가하는 것을 간혹 본 일이 있다.
그러나 학생들과 청년들이 거리의 교통을 정리해 주는 등 치안에 협조하고 학교와 교회가 다시 문을 열고 상가에서도 건준의 정상화 호소에 호응하여 얼마안가 질서가 회복되었다.

 

그런데 정작 북한 주민들의 어려움은 소위 해방군이라는 소련군대가 진주하고부터 시작되었다. 8월25일 이들이 평양역에 도착하고부터 시민들의 생활은 공포와 불안 속으로 빠져들고 말았다.


소련병사들은 들어오자마자 부녀자 겁탈과 약탈에 광분했다.

공산주의자들이 조직한 소위 적위대라는 불량배들까지 소련군인들에 편승하여 날뛰는 바람에 시민들의 불안과 고통은 더욱 심했다.


시민들은 밤이면 동네입구에 「바리케이드」를 쌓고 소련군이 나타나기만 하면 꽹과리를 쳐 사람들에게 알리는 등 자위책을 강구하기도 했다.


아버님은 치스차코프나 로마넹코 등 진주군 간부들에게 『당신들의 군대는 우리나라를 독립국으로 만들어 주기 위해 임시로 진주한 것인데 병사들의 이런 만행을 왜 다스리지 않느냐』고 여러 번 항의했으나 그들은 시정하겠다고 말만 할 뿐 소련군의 만행은 계속 되었다.


어느 대학출신 소련군 소령은 『진주군 사병은 죄수들로 구성돼 그런 만행을 하는 것이지 소련군이 다 그런건 아니다』며 참아 달라고 간청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말은 변명일뿐 소련 정부에서도 겸이표의 제련소, 진남포의 제철소, 흥남의 비료공장 등 공업설비를 마구 뜯어가고 있었으며, 북한의 식량도 수백만 섬씩 마음대로 실어 가버렸다.

 

건준은 약1개월만에 해체되고 그해 10월 민족진영 18인과 공산진영 15인으로 평남인민정치위원회가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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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처에서 약탈·강도·강간이 .....
  ..... 팔뚝시계를 서너개씩 차고 .....


  ..... 가는 곳마다 『젠기·다와이』 (돈 내라) 『마담·다와이』 (여자 내라) ........      ]

 


8·15전후…평양과 서울 (5)|

광복 31주년…각계 인사가 말하는 그날의 비화

 

 [중앙일보] 입력 1976.08.14

 

나는 유감스럽게도 8·15 당일 일본 천왕 유인의 항복 성명 방송을 듣지 못했다. 패전 막바지의 일본이 최후 발악으로 요시찰 인물들을 대량 학살할 것이란 소문이 돌아 평안남도와 황해도 접경의 배미라는 곳의 친척집을 찾아가 피신 중이었다. 그날 밤 평양에 다녀온 사람의 전문으로 해방 소식을 들었다. 흥분된 밤을 지내고 날이 밝자 화물 「트럭」에 편승하여 평양에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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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인으로 환영했던 소군, 「다와이」 군대로 돌변|

북쪽의 8·15는 「멍든 해방」|


박재창 <평안남도 지사>

 

모두 향리인 강서에 은거 중이던 고당 조만식 선생이 돌아오는 것을 기대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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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일 새벽 고당 선생이 평양에 입성했다. 그날로 건국 준비 위원회가 조직되고 명단이 발표됐다. 이 건준은 서울에서 여운형씨가 만들었던 조직과는 무관한 것으로 앞으로 중앙 정부가 수립될 때에 협력하기 위한 순수한 조직이었다.


이 건준이 백선행 기념관에 자리를 잡고 활동을 시작하자 곧 소련군이 진주했다. 우리는 이 붉은 군대를 2차 대전에서 전승한 연합군의 일원으로 맞이하지 않으면 안되게 됐다. 『해방의 은인 붉은 군대 만세』라는 벽보와 「플래카드」를 들고 8월26일 소련군의 입성을 환영했다.

 

도처에서 약탈·강도·강간이 그들에 의해 자행됐지만 다발총을 들고 떼를 지어 다니며 하는 행동을 막을 도리가 없었다.

그들이 평양에서 팔뚝시계를 서너개씩 차고 다닌 얘기는 너무나 유명하다. 가는 곳마다 『젠기·다와이』 (돈 내라) 『마담·다와이』 (여자 내라)다.

 

해방과 동시에 가까운 사람과 조그맣게 경영하던 피혁 회사를 집어치우고 치안 활동에 협력했다. 건준안에 치안부 (자유당 때 동대문구에서 이승만 박사와 맞서서 국회의원 선거에 입후보했던 최능진씨가 부장)가 있었으나 갑자기 생겼기 때문에 조직이 없어 임무를 수행하기 어려웠다. 나는 내가 졸업한 숭인 상업 학교의 동창회를 비상 소집하여 「숭인 치안대 를 조직, 건준에 협력하자는 결의를 하도록 했다. 모인 사람이 약 3백명이었는데 일인이 쓰던 총검으로 무장해 치안 확보 활동에 나섰다.

 

평양 시내이건, 지방에서 억울한 일을 당하거나 폭력배가 난무하면 우리가 출동해 진압했다. 치안대가 점점 알려져 공산당이 세력을 뻗치면서부터는 제일 미움을 받은 것이 우리였고 1개월도 못 돼 무장 해제됐다.

 

소련군의 행패는 점점 심해졌다. 대로상에서도 차고 가던 시계를 그들에게 빼앗기기 일수였다. 나도 두어 차례 호주머니를 털렸다. 일제 말 때 파놓은 방공호 속에 여자들이 끌려들어 갔다. 은인으로 영접했는데 원수 「다와이」 군대로 변한 것이다.


이때부터 공산당은 적군을 등 뒤에 두고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고, 자위대는 소군 만행의 길잡이가 되어 동족의 피를 파는 참상을 연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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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09월호 
      
 
6·25 전쟁 50년의 재조명 ⑥- 金日成의 대학살
 
 
 
 
6·25 전쟁 당시 함경북도 내무서원(경찰관)으로 복무했던 脫北者 이천명의 고백證言
 

 
  
●8·15 광복 후 진주한 소련군, 부녀자들 무차별 性폭행… 지역마다 위안소 두었다

 

●6·25 나자 후방지역서 무차별 학살… 지주·자본가·일제시기 관료들과 그 친척들이 대상

●함경북도 종성군서 고급중학교 학생들이 만든 「서북 청년단」 27명 중 20명 검거… 내무서원들이 집단 사살해 암매장

●전쟁 후 즉시 주민들에 대한 성분조사 시작… 「정치범 수용소」의 前身인 「주민 수용소」 설치… 끌려온 주민들로 감옥은 터지고 넘쳐났다

 
  
이천명 脫北者

 

 
머리말 / 해방자로 나타난 「소련군」
 


 나의 이름은 이천명이다. 나이는 69세, 한반도가 갈라져 어언 54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8·15 광복의 기쁨도, 6·25 동란도 다 겪으며 공산독재 옹호기구의 일선에 서 있던 내가 이제는 枯木(고목)이 되어 마지막 인생을 살아보겠노라 이국땅을 방황하고 있다.
 
  배고파 방황하고 있는 몸임에도 마음은 항시 한반도 땅에서 순간도 떠난 적이 없다. 세월이 흐르고 해가 바뀌어 우리 代(대)에 통일이 되는가 싶었는데, 갈라져 여전히 아웅다웅이다.
 

  자칫하면 끔찍했던 6·25 동란도 다시 저지를 것 같은 팽팽한 분위기다. 이번 6월15일 서해 해상 交戰(교전) 사건을 듣고는 다시는 그런 일이 벌어지지 말아야 함도 새삼스레 느꼈다. 전쟁이라는 것이 軍(군)은 물론 일반백성들까지 얼마나 무고하게 해치는가를 체험으로 엮어보니, 도움이 되길 바라는 바이다.
 
  1999년 7월, 중국땅에서, 이천명.
 


 
  해방자로 나타난 「소련군」

 
 
  나는 1930년도에 함경남도 영흥군(지금의 금야군)에서 출생하였다. 광복 전 나는 함경북도 청진시 인곡동 철물공장에서 야장쟁이로 일하였다. 당시 日帝(일제)는 조선에 대한 약탈행위를 심하게 하였다.

 
  「공출」이라 하면서 집집마다 곡식을 감추었다 하여 마당과 뒤울안을 살피었고 마구 뒤져 빼앗아갔다. 조선사람은 밥을 먹지 말라고 하면서, 조밥을 먹으라 하였다. 밥먹는 시간에 경찰들이 마을을 다니면서 주인도 찾지 않고 문을 열고 뛰어들어와서는 쌀밥에 콩을 섞어먹지 않으면 경찰서에 끌고가 귀뺨을 때리며 시국에 맞지 않는 생활을 한다고 떠들어댔다.

 
  상점에는 가짜상품을 내다놓고, 쌀을 개인이 팔다가 들키면 몰수하고 벌금을 안겼다. 게다가 「징용」 「징병」 「보국대」니 하면서 무고한 청·장년들을 일본 본토나 만주로 끌고가, 전쟁 대포밥으로 노동력으로 부려 먹었다. 일제에 대한 원한은 조선 각지에서 하늘과 땅에 사무쳤다.

 
  어른들은 매일 모여앉으면 독일이 세계에서 제일 강대하고 지금 소련을 거의 다 점령했다고들 하였고 일본은 꼭 패망한다고들 하였다.
 


  하루는 일본 경찰들과 조선인 관리 몇명이 부락에 나타나더니 사람들을 다 모아놓았다. 그들은 소련이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였으니 최후를 각오해야 한다며, 모두 칼을 몸에 지니고, 맞닥뜨리면 싸울 준비태세를 갖추라고 하였다. 그러나 백성들은 몸에 칼을 준비하기는커녕 무사태평이었다. 며칠이 지나자 일본 사람들은 2열 3열로 줄을 지어 늘어서서 저녁 9시경부터 청진 시내를 벗어나 어디론가 가버렸다.

 

  이틀 후 소련 군대가 청진 앞바다에 포 몇 방을 쏘더니 상륙하였다. 주민들은 「조선독립 만세!」를 부르며 소련 국기와 태극기를 들고 거리에 떨쳐나섰다.
 

  노동자들은 일제가 가면서 부수고 간 공장을 복구하러 나갔고 농민들은 자기 밭에 나가 여물어가는 곡식을 가꾸었다. 고향을 이남에 두고 북한에 온 사람들은 광복이 되자 고향으로 갈 차비를 서둘렀다.


  일제 식민치하에서 고통당하며 서로 같이 살다가 헤어지는 슬픔을 달래려 송별연이 벌어졌고 눈물의 헤어짐이 온 강토를 휩쓸었다.

 
  잘 가세요, 잘 있어요, 눈물지으며 떠나는 사람들의 행렬은 시작과 끝을 분간하기 어려웠다. 어른들은 마주앉으면 이제 이남에는 美軍(미군)이 들어온다, 미국은 소련보다 발전하였다고 말하면서도 강토가 갈라질 줄은 누구도 예견 못했다. 다만 소련은 공산주의다, 네 것 내 것 없이 공동으로 일하고 먹고사는 나라다. 그러니 소련이 좋으냐, 미국이 좋으냐 하는 이야기뿐이었다.

 


소련 군대가 청진시에 주둔하여 소련군 위수사령부를 설치하고 질서를 유지하기 시작했다.
 
  소련군 병사들은 거리와 골목마다 돌아다니면서 마음에 드는 물건은 다 집어갔다. 특히 집집을 이곳저곳에서 본격적으로 수색해 나갔다.
 
 


  젊은 여성들 가차없이 잡아가

 
 
  젊은 여성들은 가차없이 잡아갔고 여자의 부친이나 남편이 가로막거나 반박하면 구타하고 총으로 쏴 제끼었다. 내가 살던 청진시 인곡동에서도 우리 마을의 열일곱 살 되는 김정옥이와 스물두 살이 돼 시집갈 날짜를 이틀 앞둔 유금숙이를 트럭에 강제로 싣고 갔다.

 

  유금숙의 새 신랑될 사람과 부모들이 소련군 위수사령부를 찾아가서 사연을 말하니 자기들은 모른다고 딱 잡아뗐다. 잃어버린 여자로 통곡소리 높던 집안에 유금숙이가 한 달 후 불쑥 나타났다. 울면서 말하는 유금숙이의 증언에 의해 사실이 밝혀졌다. 소련군은 청진시에서 부령군 쪽으로 나가는 골짜기에 외딴집 몇 채가 있었는데 집주인들은 모두 쫓아버리고, 여기에 열댓 명도 넘는 여자들을 가두어놓았다. 열명 가량이 이 집들을 호위하고 있었는데, 한집에 여자들을 세 명씩 가두어넣고는 소위 「위안소」로 이용하고 있었다.

 

  이들은 여자들에게 소련식으로 흘레브와 빠다를 먹여 여자들은 밥 생각이 나 혼이 났다고 한다. 性(성)에 주린 소련군 군인들은 트럭에 무리로 타고 와서는 섹스를 하였다. 반항하면 때려눕히는지라 여자들은 모두 할 수 없이 순응하였다.

 
  오전에 한 트럭, 오후에 한 트럭씩 근 한 달 동안 수백 명을 치르고 나니, 여자들은 기진할 대로 기진해 버렸다.
 

  요행히 새로 잡아온 여자들이 많아서 「교대」를 시키고는 집으로 가라고 쫓더라는 것이다. 같이 잡혀갔던 김정옥이는 보름 만에 견디다 못해 기절하여 정신을 잃었는데 깨어나지 못하고 죽었다 한다.

 
  너무나 강간당해 걸음도 제대로 걷지 못하는 유금숙은 결혼식을 할 수 없었고, 침대에 누워 일어날 줄 모르는 폐인이 되었다.
 
 


  소련 군인들의 만행

 
 
  청진시에 사는 내 고모 되는 32세의 김상옥이라는 여인도 이같은 봉변을 당할 뻔했다. 내 고모는 조선 치마저고리를 항상 단정하게 입고 다니는 외모가 깨끗한 여성이었다. 1945년 10월에 여섯 살 나는 딸애를 데리고 집에 있는데, 마을을 수색하던 소련군 군인 2명이 들이닥쳤다. 다소곳이 고개숙이고 앉아 있는 어여쁜 여성을 보자, 소련군 군인들은 신발을 신은 채로 온돌방 위에 올라서며 징그럽게 웃었다.
 

  다짜고짜로 끌어안으려고 하는 군인들을 보고 고모와 딸애는 질겁하였다. 옆에서 우는 딸애의 귀뺨을 후려쳐 울음을 멈추게 한 군인들은 달라붙어 반항하는 고모의 아래웃옷을 다 벗기고 깔고 앉았다. 이때 밖에 일하러 나갔던 고모부가 술을 마시려고 친구를 데리고 집에 들어섰다.

 
  이 광경을 본 고모부는 들고 있던 술병으로 고모 위에 올라탄 소련 군인의 뒤통수를 내리치고 재차 고모 팔을 붙잡고 있는 다른 군인도 후려갈겼다. 두 군인이 쓰러지자 온 동네에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어른들은 잘했다고 좋아하는 한편, 빨리 도망치라고 권하였다.

 
  고모 내외는 고향인 함경남도 영흥군으로 피해갔다가 6·25 전쟁기간에 남한으로 나갔다는 소식을 들은 후 나는 아직까지 그들의 생사를 모른다.
 

 

  이즈음 청진 시민들은 식량이 없어 일제가 패망 당시 5척의 배로 실어가려 하다가 소련군대가 들어오는 바람에 배를 폭파시켜, 바다 밑에 침몰된 배에서 썩은 쌀을 가져다가 먹으면서 살고 있었다.

 

 
  그래도 광복이 되었다고 사람들은 떠들면서 공장과 주요 설비를 지켰다. 공장에는 자위대가 조직되어 경비를 섰고, 중요한 물자가 저장된 장소에는 자위대원들이 있었다. 주인들인 듯한 쉰 살 되는 남자와 서른 살 정도된 남자가 나와서 소련 군인들에게 목재를 실으면 안된다고, 말이 잘 통하지 않으니, 손짓과 몸짓을 했다. 그런데 소련군 대위는 다짜고짜로 권총을 뽑아들더니, 그 사람들을 보고 차 세워둔 데로 걸으라고 호통쳤다. 권총 앞에 선 이들이 기가 질려 돌아서 두세 발자국 걷는데 권총소리가 터지면서 모두 꼬꾸라졌다.

 
  소련군 대위는 아무 일도 없었던 듯 권총을 권총갑에 찌르며 씩 웃었다. 나는 너무나 겁이 나 틈을 보다가 냅다 도망쳐 버렸다.
 

 

  내 부친도 거리에서 이런 봉변을 겪었다. 부친에게는 代(대)를 물려오던 금이 섞인 회중시계가 있었는데, 하루는 거리에서 소련군 병사와 맞닥뜨렸다. 부친의길게 드리운 회중시계를 보자 소련군 병사는 부친을 멈춰 세우더니, 그 시계를 달라고 하였다. 소련 연해주 근방에서 六穴砲(육혈포)를 차고 다니며 독립활동을 하던 부친은 러시아어에 유창해 안된다고 사정하였다. 하지만 막무가내인 소련군 병사는 가슴에 대고 따발총을 쏘는 입시늉을 하더니 공중에 대고 공포 두 발을 갈겼다.


 
  회중시계를 지키려다 목숨을 잃겠다고 생각한 부친은 할 수 없이 시계를 꺼내 주었다. 시계가 금시계라고 설명해주니, 소련군 병사는 너무 좋아 공중에 대고 또 한방 공포를 쏘며 시계 가진 것을 자축한다고 떠벌이고는 가버렸다 한다. 부친은 집에 돌아와 「해방자」라 자처하는 「마우재」들에게 빼앗겼다고 통분해 하였다.

 
  그러면 광복이고 뭐고 大國(대국)에 아부, 굴종해야 하는 약소민족의 슬픔은 언제 가시겠는가고 부르짖었다. 소련군은 2차 세계대전에서 이긴 戰勝國(전승국) 군대이고, 해방자는 틀림없다, 하지만 약소국가를 마구 강탈·강간하니 진정한 해방자는 아니었다.

 
  독일이든, 소련이든 자기의 이해관계와 이익을 위해 세계 곳곳에서 약소국가들을 지배하여 욕심을 채우려는, 다 같은 승냥이 본성을 가진 나라들이라 볼 수밖에 없다.

 

 
  나는 1948년 부친의 연줄로 열아홉 살에 평양에 있는 평양 내무성 보안간부학교에 들어가 1년 동안 공부와 훈련을 받게 되었다. 이 보안간부학교 교관도 역시 「고문」이라는 명칭을 단 소련군 소좌였다. 그러니 일체 훈련방식은 모두 소련군 식이었다. 광복되었다 하여 완전히 해방된 것이 아니라, 다만 일제로부터 소련으로 북한의 통수권이 넘어갔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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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단강간과 '다와이'… 짐승만도 못한 ‘야만적인 소련軍’

 

[88세 老記者의 現代史 체험①] 개가 交尾(교미)를 해도 구경꾼이 몰려드는 데, 번잡한 네거리에서 한 여자를 뉘어놓고 5~6명의 병사가 집단 강간을 하고 있었다.

 


金鏶(체험수기 우수상 수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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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鏶

 

1928년 평양 출생으로, 1948년 단신으로 월남하였다. 1955년 <대구매일신문>에서 기자 생활을 시작해 부산 <국제신문>을 거쳐 <동양방송> 기자로 재직했다. 1974년 KBS 對北방송 사회교육 전문위원을 지냈고, 1988년 정년퇴직하였다. <동양방송> 기자로 판문점을 담당하고 있던 1967년 3월22일, 李穗根(이수근)의 북한 탈출 全과정을 생생하게 취재해 보도하는 역사적인 특종을 했다.
 

 

소련軍의 만행

 

16세, 중학교 3학년 때 해방이 되었다. 日帝(일제) 식민지 때에도 공산주의니 민주주의니 하는 말은 듣고 있었지만 그것이 어떤 것인지 전혀 알지를 못했다. 하지만 해방이 된 지 보름도 안 되어 공산주의가 어떤 것인지 실감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해방된 지 이틀 후인 17일 평양에서는 ‘건국준비위원회’가 조직되고 중학교 3년 이상 남학생들은 학생 治安(치안)대원이 되어 평양의 주요거리들에 배치되었는데 22일부터 소련군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USA 표시가 분명한 미국제 지프와 트럭을 탄 소련 군인들이 평양거리에 밀려들어오자 거리 곳곳에서는 ‘다와이(약탈)’ 소동이 벌어지게 되었다. 어느 날 전차길이 있는 평양의 번화가를 걷고 있었는데 지프를 타고 접근해 온 소련군 장교가 내 손목시계를 가리키며 ‘다와이’를 연발하기에 그 시계를 벗어 줄 수밖에 없었다. 중학교 입학기념으로 아버지가 사준 ‘스위스 12석’ 손목시계였다.


자기들이 해방시켜 주었다는 식민지의 중학생 손목시계를 ‘다와이’하는 이 장교를 보면서 ‘공산주의는 사람 못살 주의로구나’라고 직감하게 되었다.

 

손목시계를 ‘다와이’ 당한 지 이틀 후, 나는 평양에서 가장 번화한 조선은행 앞 네거리에서 대낮에 소련군 병사들이 집단 강간을 하는 현장을 목격하게 되었다. 개가 交尾(교미)를 해도 구경꾼이 몰려드는 데, 번잡한 네거리에서 한 여자를 뉘어놓고 5~6명의 병사가 집단 강간을 하고 있었다.


그곳에 사람들이 몰려들었는데 소련 군인 하나가 다발총을 하늘에 대고 드르륵 드르륵… 쏘면서 고함을 치는 소리가 ‘카레스케 노- 야폰스키’(조선 사람 아니다. 일본 사람이다) 참으로 짐승보다도 못한 야만이었다.


소련 군인들의 집단 强姦(강간)소동은 일본인만이 아니었다. 밤에는 조선인 거주지역에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때문에 큰 거리에서 주택가로 들어오는 골목길 입구에는 나무판자와 철조망으로 바리케이트를 치고 작은 출입구를 만들어 놓고 보초를 서게 되었는가 하면 한옥집 조선인 거주지역들에서는 소련 군인을 처음 발견한 사람은 부엌에 들어가 가마솥 뚜껑을 들고 나와 두들겼다.


그러면 집집마다 가마솥 뚜껑을 부지깽이로 두드리게 되고 여자들은 숨고 남자들은 골목 밖으로 나와서 침입해온 소련 군인들을 다른 곳으로 쫓아내었다. 이래서 해방이 된 평양에서는 편하게 잠잘 날이 드물었다.

 

내가 다니던 평양사범학교의 경우는 수업시간에도 소련 군인들의 ‘다와이’ 소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우리 학교는 평양 비행장 옆에 있었던 탓으로 소련군이 점유한 까닭에 평양역 부근 일본인 소학교 자리로 옮기게 되었다. 2층인 이 학교의 아래층에는 만주에서 철수해 온 일본인 피난민들이 있었고 우리는 2층에서 공부를 했다.


소련 군인들은 우리가 수업중인 대낮에도 이 피난민들을 습격했다. ‘마담 다와이‘(여자를 내놔라)를 연발하며 소련 군인들이 들이닥치면 ‘○○옥상(부인) 야라렛다요(당했다)’ 등 비명소리와 함께 이리저리 도망치는 피난민들로 온 학교 건물이 소란스러웠다. 이래서 일본인 피난민 속의 젊은 여자들은 얼굴에 검댕이 칠을 하고 누더기 옷을 입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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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製 김일성’의 등장과 反蘇 학생운동

 

1945년 10월14일 ‘소련製 김일성’이 등장하면서부터 북한에서는 공산주의자들의 활동이 노골화되기 시작했다. 이날 모란봉 공설운동장에서는 평양시 군중대회가 열렸는데 처음에는 ‘소련군 환영 군중대회’라고 하더니 ‘김일성 장군 환영 군중대회’로 둔갑하였다.

 

이 군중대회에서 소련 軍政 장관 ‘로마넨코’는 30대 초반의 젊은이를 내세워 김일성이라고 하면서 ‘민족적 지도자요 절세의 애국자’라고 소개를 했다. 순간 군중들 속에서는 ‘가짜다…’라는 소리가 실망어린 한숨소리처럼 퍼져 나왔다. 평안도 지방에서는 ‘김일성 장군’이라는 항일투쟁 영웅에 관한 전설이 1920년대부터 널리 전해져 왔었으니 30대 초반의 ‘소련製 김일성’을 가짜라고 하게 된 것은 당연했다.

 

‘소련製 김일성’은 이때부터 이른바 ‘민주기지 노선’을 앞세우며 소련 군정의 지시에 따른 북한지역의 공산화 작업을 강행하게 되었는데 공산주의라면 콩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곧이듣지 않게 된 학생들과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11월7일 함흥 ‘反共학생사건’에 이어 11월23일에는 신의주에서 反共反蘇(반공반소) 학생의거가 대규모로 터져 나왔다. 맨 주먹으로 봉기한 중학생들에게 인민위원회나 보안署(서) 공산 당사들에서는 처음부터 기관총과 小銃(소총) 심지어 소련군의 비행기로 機銃掃射(기총소사)까지 감행했다. 무자비한 무력진압으로 학생 23명이 피살되고 700여 명이 부상을 당했고, 1000여 명이 검거되어 그 중 100여 명이 시베리아로 끌려갔다.


대규모 反共反蘇 학생시위는 1946년 3월13일 함흥에서 또 발생, 일반 시민들까지 학생 편에 가세하여 보안署와 공산당 그리고 소련군에 맞서 싸웠다.

 

하지만 평양학생의 경우는 신의주나 함흥과는 그 양상을 달리한다. 평양에서는 소련군정이 左右同數(좌우동수) 인사로 구성되는 평남 인민정치위원회(위원장 曺晩植)을 앞세우고 있었기 때문에 광복 초기에는 공산당과 학생들이 부딪치는 일이 별로 없었다. 하지만 민족진영과 함께 모스크바 3相회의 결정인 신탁통치를 반대하던 공산당이 소련의 지시로 신탁통치 찬성으로 돌변하자 판세는 급변했다.


신탁통치를 완강히 반대해 온 曺晩植을 고려호텔에 감금하고 공산당 一色으로 ‘평남인민정치위원회’를 ‘평남인민위원회’로 개편했는가 하면, 김일성을 위원장으로 하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를 수립했다. ‘임시’字만 붙어있을 뿐 사실상의 ‘북한단독 공산괴뢰정권’의 시초다.
 


평양서 불 붙은 학생운동


이로 말미암아 민족진영 인사들이 대거 38선 이남으로 넘어가게 되어 평양의 분위기는 매우 어수선 할밖에 없었다. 이 같은 변혁은 해방 이후 학생들의 첫 겨울방학 동안 있었던 일이다. 개학이 되자 각 학교의 학생 자치회 활동이 활발해지고 소련의 지시로 신탁통치 찬성을 선전하더니 토지개혁 등 공산화작업에 몰두하게 된 김일성 일당을 주시하게 된다. 여기서 당면하게 된 게 1946년 3·1절 행사이다. 김일성 일당은 해방 이후 첫 3·1절 행사를 북한 공산화 작업의 기폭제로 계획하고 있었다.


이들은 각 학교 학생들을 3·1절 행사에 동원할 것을 지시하면서 이날에 사용될 구호까지 배정했다. 그 첫번째가 ‘우리를 해방시켜주신 위대한 소비에트 만세’였고 두 번째가 ‘…스탈린 대원수 만세’로 20개에 달하는 구호가 모두 소련과 공산주의를 찬양하고 공산화 개혁을 촉구하는 것들이고 맨 마지막 하나가 ‘조선자주독립만세’였다.


각 학교 자치회가 분개했다. 우리의 선열들이 ‘소비에트 만세’니 ‘스탈린 만세’나 부르자고 3·1운동을 일으켰단 말인가? 3·1절을 하루 앞둔 2월28일 각 학교 자치회장들은 평양 神學校(신학교)에 모여서 3·1운동을 모독하며, 북한공산화에 狂奔(광분)하는 공산도당에 항거하기 위해 무기한 동맹휴학을 결의, 이날 오후 각 학교별로 즉시 단행했다. 이래서 평양 驛前(역전) 광장에서 열린 3·1절 기념행사에는 단 한 명의 학생도 참가하지 않았고 그 후 40일 가까운 동맹휴학이 계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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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chogabje.com/board/view.asp?C_IDX=64174&C_CC=AP

 

 

 


 1945.8.24.

 

"경원선 철도 끊기며 분단 시작 너무 어이없고 황당하지 않나"


 2009.06.29

 

신작 '별들 너머 저쪽과 이쪽' 낸 소설가 이호철

 

"남북 분단은 소련군이 1945년 8월 24일 서울~원산 간의 경원선(京元線) 철도를 차단하면서 시작됐다."


'분단시대'의 실향민 작가 이호철씨(78)는 함경남도 원산이 고향이다. 1945년 광복 당시 10대 소년이었던 이씨는 "지난 60여년간 우리를 고통스럽게 한 남북 분단이 이렇게 '철도 차단'에서 시작됐다는 것은, 당사자인 우리로서는 너무 어이없고 황당하지 않은가"라고 회상했다.


"소련군은 이어 8월 25일 서울~의주 간의 경의선(京義線) 운행도 막았고, 미군이 서울에 진주한 9월 6일에는 전화·전보 등 통신과 우편물 교환을 완전 차단했다. 소련은 처음부터 동구권을 먹었듯이 북한을 자국의 패권주의 틀 속에 편입하려고 했다. 미국은 소련과의 전후(戰後) 처리 합의에 따라 그저 먼 산 쳐다보듯 할 수밖에 없었다."

 
이호철씨는 얼마 전 "분단과 6·25전쟁의 원흉은 스탈린"이라고 강조하면서 허구와 역사의 결합을 통해 남북 분단을 새롭게 조명한 신작 장편소설 《별들 너머 저쪽과 이쪽》을 펴냈다. 이씨는 "문학성보다는 내 경험을 바탕으로 젊은 세대에게 6·25와 남북 관계의 실체를 알려주기 위해 현대사 참고서로 사용할 수 있는 책을 썼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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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군 총격 받을때가 엊그젠데… /“북행열차 언제 가려나”

 

 [중앙일보] 입력 1990.12.30

  이하경 기자 .... 

 

◎마지막 남하열차 기관사 오화석씨/

귀환길 막힌 만주동포 4천명 싣고/보름눈치끝 결사의 38선 돌파 감행

 

『북녘의 철도를 다시한번 힘차게 달려보는게 저의 유일한 꿈입니다. 올해엔 총리회담을 비롯,남북축구·통일음악회 등 교류가 잦아 한층 기대가 컸었는데….』


90년이 저물어 가는 29일 남북철도의 동맥 경의선 최북단인 임진각을 찾은 「마지막 기관사」 오화석씨(66·서울 독산동 891)는 북으로 뻗어나간 철길을 바라보며 아쉬움을 달랬다. 오씨는 45년 9월 하순 남북의 산하를 하나로 잇는 경의선 열차를 마지막으로 몰아 소련군의 저지선을 뚫고 남하했던 장본인.


당시 21세의 청년이었던 오씨는 그때의 흥분을 이기지 못해 해마다 연말이면 최북단인 이곳을 찾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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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소군의 남북 진주를 맞아 아직 38선이 그어지기 전인 45년 9월6일 경원선이 두절됐지만 경의선은 부정기적으로 다녔지요. 9월6일 북에서 근무하면서 월급을 받으러 서울의 경성철도주식회사에 왔던 함흥철도국 직원 7∼8명과 이들이 타고온 객차가 평양으로 가는게 문제였습니다.』


미군은 9월8일 오전 10시에 남한에 진주한다고 전해졌다. 철도 당국은 미군이 들어오기전에 이들을 돌려 보내기 위해 신촌역에서 새벽 6시에 출발하는 임시열차를 배차했다. 목적지는 당시 38선 이남인 개성역이었고 개성에서부터는 북에서 온 기관사가 몰고가도록 되어 있었다. 승무원은 지도기관사인 오씨와 기관조수·견습 각 1명으로 모두 3명이었다.

 

황해도 금천군 태생으로 42년 경성 철도국 견습으로 입사,미혼이던 오씨는 혹시 고향을 마지막으로 가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자원했던 것.
열차가 금촌역에 정거하자 북행자들이 기관차 난간까지 매달릴 정도로 아우성이었다.


막상 개성역에 도착했으나 약속과 달리 북의 기관사는 없었고 다급해진 함흥철도국 직원들은 권총으로 위협,38선 이북인 황해도 신막역으로 몰도록 했다.


오씨의 고향부근인 금교역에 들어서는 순간 소련군 병사들이 눈에 띄었고 오씨는 불안해졌다.

 

신막역에 도착하자 또다시 평양행을 강요했지만 오씨는 남행을 위한 통행증 발급을 요구하며 보름간을 승무원 숙소에서 눌러 앉아 버텼다. 그동안 북측 철도 당국의 요청으로 두번이나 남행을 원하는 만주동포들을 태우고 서울로 향했지만 금교역에서 소련군의 저지로 좌절됐다.
보름째로 기억되는 9월 하순 다시 만주동포 4천여명을 태운 객차 25량을 인계받은 그는 세번째로 금교역에 도착했다.


역시 소련군이 앞을 막았지만 북쪽으로 회선하는 척하다가 남쪽을 향해 전속력으로 38선을 넘었다. 당황한 소련군은 총을 쏘며 남행을 막았지만 정신을 차려보니 미군이 진주해 있던 개성역이 보였다.
숨을 죽이고 있던 승객들은 눈물을 흘리며 감사의 뜻으로 일본·만주 돈을 일곱부대나 거둬 주었다.


『지금도 눈을 감으면 당시의 상황이 생생하게 떠오르고 북쪽의 역이나 구간마다의 특징·주변풍경이 삼삼해 견딜 수가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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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에 반드시 친소적인 정권을 세워야 한다 .......

  ..... 8월 24일 경원선을 끊은 데 이어 25일 경의선을 끊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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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군이 웅기와 나진을 점령한 직후이며 일제가 항복을 선언한 8월 15일 출간된 소련의 국제문제전문지 ‘노보예 브레미야(새로운 시대)’는 이승만을 비롯한 임정 지도자들을 비난하면서 조선은 소련의 원조를 받아야 독립국가를 세울 수 있다고 주장했다. 북한만은 결코 반소친미의 길로 나아가서는 안 된다는 뜻을 강하게 내비치기도 했다.

 

●더욱 구체화되는 친소정권 수립 의도


소련군이 청진 원산 함흥을 점령하고 평양으로 향하던 8월 23일 작성된 소련 외무부 극동제2국의 보고서 역시 같은 논지였다. 조선에서 반소적인 정치인들이 영향력을 가져서는 절대 안 되며, 조선에 반드시 친소적인 정권을 세워야 한다는 것이었다.


비슷한 시기에 소련군은 38선을 공식 봉쇄했다. 8월 24일 경원선을 끊은 데 이어 25일 경의선을 끊어 남북간에 사람과 물자의 왕래를 막았다. 9월 6일엔 남북간의 전화와 통신마저 끊었다. 소련군사령부는 “분단이 빚어낸 심각한 경제문제들에 관해 협의하자”는 미군사령부의 제의를 묵살했다. 미군사령부는 거듭 “석탄의 수송과 전기의 공급 및 통화의 조정 등에 관한 문제들을 협의하자”고 제의했지만 허사였다. 이는 비록 초보적인 수준이지만 분단 상황을 개선하려는 미국의 시도에 소련이 비협조적이었다는 해석을 가능하게 한다.


9월 12일 런던에서 열린 미국 소련 영국의 외무장관 회담을 계기로 소련의 의도는 한층 노골화됐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처음 열린 연합국 외무장관회담의 소련대표단을 위해 소련 외무부 극동제2국이 작성한 ‘조선에 관한 제안’이라는 정책건의서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제주도와 대마도까지 넘본 소련의 야심


이 건의서는 약 2년 후 미소(美蘇)의 한반도 분할점령이 끝난 뒤 부산-진해, 제주도, 인천 등 세 지역을 소련군의 관할 아래 둘 것과 대마도를 조선에 넘겨줄 것을 미국에 요구하라고 제안했다. 만약 첫 번째 제안이 받아들여진 상태에서 대마도가 조선에 넘어온다면 대마도까지 자연스럽게 소련군의 영향권에 들어가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소련은 동해만 아니라 서해도 지배하게 된다. 나아가 제주도는 동해와 서해의 중간지점에 놓여 있으므로 그곳을 소련 극동해군의 핵심기지로 만들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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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ews.donga.com/List/Series_70070000000600/3/70070000000600/20040905/8103336/1

[광복 5년사 쟁점 재조명]<1부>④소련은 야심이 없었을까

기사입력 2004-09-05

 

 

 

[ ....  스탈린은 1945년 9월 20일 이미 북한에 친소 단독정권을 수립하라는 지령을 내렸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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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6월 남한만이라도 단독정부를 세우자는 이승만의 정읍 발언을 들어 그에게 한반도 분단 고착화의 책임이 있다고 지탄하는 것은 오해다.


1993년에 공개된 소련측 자료를 보면 스탈린은 1945년 9월 20일 이미 북한에 친소 단독정권을 수립하라는 지령을 내렸다.


이에 따라 1946년 2월 수립된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위원장 김일성)는 토지개혁과 산업국유화, 인민군 창군 등 실질적 정부의 역할을 수행했다. 분단 고착화의 원흉은 소련이다.

 

이승만은 한반도를 공산화하려 한 소련의 속셈과 전략적 가치가 없다는 이유로 한반도를 포기하려 했던 미국의 속내를 동시에 읽고 있었다. 당시 한국의 공산화를 막는 길은 남한이라도 민주정부를 수립하는 것이었다.

국제법을 전공한 그는 미국이 아닌 유엔을 떠올렸고 그 덕분에 대한민국은 유엔 감시 하에 총선거로 탄생한 세계에서 드문 신생국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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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소련군은 북한지역을 점령하자마자 38선을 경계로 하여 남한지역과의 교통·통신을 단절 .......  ]


 [ ..... 미군은 .... 교통·통신을 회복하고 ..... 자유로운 왕래와 상거래를 회복할 것을 ..... 제의했으나 소련군은 일절 응하지 않았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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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이 소련군과 분할 점령을 위해 군사분계선으로 38선을 책정한 것은 이론의 여지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미국이 38선을 책정한 사실이 곧 한반도 분단에 대한 미국의 책임으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이는 제2차 세계대전 終戰(종전) 직후의 서독과 오스트리아에서 확인된다. 서독에는 美·英·佛 군대 간의 군사분계선이 있었고, 오스트리아에는 美·英·佛·蘇 군대 간의 군사분계선이 있었으나 그것이 곧바로 국토분단을 초래하지는 않았다.
 


  광복 직후 남한을 점령한 미국은 38선을 순수한 군사분계선으로 유지하려고 했던 데 반하여, 북한을 점령한 소련은 38선을 통치분계선으로 변질시켰다. 소련군은 북한지역을 점령하자마자 38선을 경계로 하여 남한지역과의 교통·통신을 단절하여 남북 주민 간의 자유로운 교통·통신을 금지시켰다.

 

  스탈린은 1945년 9월20일 비밀지령에서 북한에 독자적인 공산정권의 수립을 지시했다. 이에 따라 소련 점령군 사령부는 10월8일부터 10일까지 평양에서 북조선5도인민위원회 대표자대회를 소집하고, 이어 이북5도행정위원회를 수립한 뒤 산하에 10개 행정국을 두었다. 이는 북한에 이미 별개의 정부가 들어선 것이다.

 
  소련은 金日成을 내세워 북한지역에서 1946년 2월에 토지개혁과 중요산업의 국유화를 골자로 하는 이른바 「민주개혁」을 단행했다. 뿐만이 아니다. 미군은 美·蘇공동위원회를 비롯하여 몇 차례 단절된 남북 간의 교통·통신을 회복하고 남북한 자유로운 왕래와 상거래를 회복할 것을 소련군에 제의했으나 소련군은 일절 응하지 않았다.

 

  미국이 남한지역을 식민지化·군사기지化하려 했고, 처음부터 남한지역에 분단정권을 수립하려 했다는 주장도 사실과 다르다. 미국은 처음부터 남한의 전략적 가치를 낮게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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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북의 인적 왕래와 물적 교류를 차단 ........

  .....  독일이나 오스트리아에선 이런 봉쇄가 일어나지 않았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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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을 ‘한반도 분단’에 적용했을 때 그 정확한 원인은 1945년 8월부터 12월까지 취해진 소련군의 38선 봉쇄 조치에서 시작된다. 소련은 진주 직후 서해안에서 동해안까지 38선 이북에 연접한 북한의 교통 요지를 모두 점령했고, 이어 남북의 인적 왕래와 물적 교류를 차단했다. 당시 소련이 분할 점령했던 다른 지역인 독일이나 오스트리아에선 이런 봉쇄가 일어나지 않았다.

 

이후 소련은 북한 각 지역에 인민위원회를 조직하고 사회주의 간부를 양성하는 등 남한과는 대단히 이질적인 통치를 실시했다. 그런 과정을 거쳐 들어선 북한 지역만의 ‘새로운 주권적 통치체제’가 1946년 2월 설립한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였다. 이 위원회는 스스로를 ‘정부’라고 말하지 않았지만, 사실상 정부였다. 법령을 결정·집행하는 중앙행정주권기관의 학술적 명칭은 ‘정부’밖에는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북한만의 단독 정권’이 먼저 수립됨으로써 분단의 두 가지 핵심사항이 모두 실현됐다는 것이다.

 

양 교수는 “따라서 남·북한 정부 수립을 분단의 원인으로 보는 시각은 ‘사망의 증상을 사망의 원인으로 주장하는’ 오류를 저지르는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좌우합작운동·남북협상의 실패 같은 내인이 외인과 함께 분단의 원인이 됐다는 견해(강만길) ▲분단이 미국의 책임이라는 견해(강정구) ▲미·소의 공동 책임이라는 견해(신용하) 등은 모두 실제로는 사망 판정에서 필연적이지 않은 유사원인(類似原因)을 원인으로 오판했거나, 역사적 상황을 잘못 해석한 결과라고 양 교수는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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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7/12/31/2007123100032.html

소련의 38선 봉쇄→북한 인민위 수립”
 “한반도 분단의 근본적 원인이다”

양동안 교수 논문서 밝혀

48년 남·북 독자정부 수립을 분단 원인으로 보는 시각은
사망의 부수적인 증상을 사망 원인이라 주장하는 오류

 

 

 

[ ..... 좌익진영은 ... 통일만 주장했을 뿐  .... 남북한간 교통 통신 단절의 해제를 주장해본 일이 단 한번도 없다 .......   ]

 

 1945.10.


 무조건 단결과 38선 철폐를 주장

 


해방정국에서의 우익진영의 초기 열세는 45년 10월 중순 이승만이 귀국하면서부터 다소 만회되기 시작했다.


이승만은 귀국과 동시에 민족의 무조건 단결과 38선 철폐를 주장했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을 역임했고 장기간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해옴으로써 독립운동의 최고지도자로 알려진 이승만이 귀국과 함께 천명한 2가지 사항은 대중에게 큰 호소력을 발휘했다.

 

그동안 공산당과 좌익으로부터 친일파라는 비판을 받아온 한민당은 독립운동의 최고지도자인 이승만의 “먼저 단결하여 완전독립을 달성하고 그 다음에 친일파 문제를 정당한 절차에 따라 처리해야 한다”는 주장에 의해 구원받게 되었다.


또한 이승만이 38선 철폐를 공공연하게 주장해줌으로써 소련의 행동은 무엇이나 옳다고 옹호하고 따라서 38선을 경계로 남북한간 교통 통신을 일방적으로 단절시킨 소련의 조치도 옹호해온 공산당의 입장을 수세로 몰아넣을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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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의 귀국 이후 우익진영은 기회 있을 때마다 38선의 철폐를 주장하고, 38선을 경계로 소련에 의해 강요되고 있는 남북한 주민간 교통 통신 단절을 해제할 것을 반복하여 주장했다.


 그에 반해 좌익진영은 48년 남북한에 2개의 정부가 수립될 때까지 통일만 주장했을 뿐 38선을 경계로 남북한간 교통 통신 단절의 해제를 주장해본 일이 단 한번도 없다.

좌익진영은 단지 남한에서도 북한에서와 같이 인민위원회에 정권을 넘겨주고 친일파 숙청과 토지개혁이 이루어지면, 다시 말해서 남한사회가 북한사회처럼 되면 38선은 자연히 해소될 것이라고만 주장했다.
 

이 하나의 사실만으로도 해방정국의 좌·우익 중 어느 쪽이 보다 자주적이며 통일지향적이었던가를 쉽게 판단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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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5.9.25.


군정청, 일반인의 38선여행은 자유라고 발표


게재지명 매일신보
게재일자 1945년 09월 25일
날짜 1945년 09월 25일

 

북위 38도를 사이에 두고 그 이남으로부터 그 이북으로 가는 교통문제는 자못 힘드는 문제로 되어 있으며 마치 외국가는 것 이상으로 되어 있어 이래서는 절대로 여행을 못가는 것 같이 생각하는 것에 대하여 군정청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북위 38도 이북으로 가는 데에는 미국군정청 발행의 패스가 있어야 한다고 전해지고 있으나 아직은 이러한 것을 발행하지 않고 있다. 따라서 38도 이북으로 여행하지 말라는 것은 아니오 다만 우리 미국군인에게 대해서만 이를 금지하고 있다.


그러므로 조선인측에서 이리로 여행하는 것은 우리가 금하지는 않으니까 갈 수 있으면 가도 좋을 것이다.


다만 소련측이 점령하고 있는 38도 이북이므로 현재 철도편이 원상대로 회복되기만 우리는 방금 절충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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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5.10.14.

 

[ ..... 그 어떤 자라도 사람의 마음까지를 정복할 수는 없는 것이며 정당한 염원은 하나님의 은덕으로 반드시 ..........   ]

 

 동아일보   1962.5.10.목요일.

 

 김일성을 고발한다

 김일성 직속 기자의 수기 8


  한재덕

 고당의 명연설

 

이윽고 오전 열시 좀 넘어서 이주연에 의하여 개회가 선언되고 당시의 상례대로 쏘련국가와 우리 '애국가'가 연주되었다.

북한에서도 해방후 얼맛동안 즉 그들 공산독재자들이 그것을 억지로 막을 때까지는 모든 사람들은 즐겨서 이 '애국가'를 불렀던 것이며 공식회의에서도 통용되고 제창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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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날 대회에서도 '로마넹코' 소장이 '다와리시치'(동무) 김일성을 소개하고 그가 마치 일제와 가장 영웅적으로 싸운 최고의 애국자인 듯이 장황하게 늘어 놓고 "이러한 애국영웅을 지도자로 맞이하는 조선 민족을 축복한다"는 환영사인지 축사인지 모를 독단적 연설을 내리 읽었다. 후일 입증된 바와 같이 그실 이것은 이 김일성을 자기들의 공산위성국=북한의 영주로 임명하는 '사령장'의 낭독인 셈이었던 것이다.

 

이 날 조만식 선생도 '평안남도 인민정치위원회' 위원장으로서 어차피 연설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조선생은 전날 밤과 같이 김일성에 대해서는 마지 못해서 그를 환영한다고 간단히 언급한 다음 자기가 일상 생각하고 있던 바를 이 기회에 한마디 하련다고 전제하고 일장의 연설을 베풀었다.사람들은 오래 간만에 대망의 조만식 선생의 열변을 들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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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하여간 지금도 기억나는 고당의 연설의 한 항목에 이런 것이 있었다.

 

" 일제시대 일본사람들은 우리나라 사람 보고 하도 못살게 굴다 못해 나중에는 정오 싸이렌이 나면 어디서든지 엄숙히 서서 일본군의 무운장구를 비는 묵도를 하라고 하였다. 우리는 할 수 없이 이에 따를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우리가 매일 정오 싸이렌 때마다 엄숙히 서서 하나님께 빈것은 일제의 무운장구가 아니라 일제가 하루 빨리 망하게 해주십사 하는 것이었다.


하나님은 불의하고 무리한 일제의 뱃심 좋은 소원을 들어 주신것이 아니라 우리들 약소민족의 지당하고도 절실한 염원을 들어 주셨다. 그 어떤 자라도 사람의 마음까지를 정복할 수는 없는 것이며 정당한 염원은 하나님의 은덕으로 반드시 이루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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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5.11.18. 재경서북인, 38선 철폐촉진대회 개최

 

[ ...... 북위 38도 이북의 소련점령지역에서 특히 언론 출판 집회 결사 신앙의 자유를 확보케 하며 .........


 ...... 일당일파의 專管을 불허하며 ..... 인민위원회에 구속된 조선인정치운동자를 즉시 석방하며 .........      ]

 

재경서북인, 38선 철폐촉진대회 개최


게재지명 중앙신문
게재일자 1945년 11월 19일
날짜 1945년 11월 18일

 


方應謨 외 여러 재경 서북인유지의 발기로 그 간 준비하여 온 북위 38도 철폐 촉진대회는 18일 오후 1시부터 시내 천도교당에서 서북출신 5백여명이 참집한 가운데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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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군수뇌부에 발송할 결의문은 다음과 같다.

 

◊ 決議文


我朝鮮의 해방을 위하여 일본을 타도한 연합제국에 대하여 감사의 의를 표함. 그러나 북위 38도를 남북으로 미·소 양군이 분단점령한 것은 조선의 자주민족통일국가 완수상 절대지장이 되어 있을 뿐 아니라 생활상 불안 불편이 막대하므로 빨리 장벽을 철폐하여 행정상, 경제상, 교통상 통일을 촉구한다.


一. 북위 38도 이북의 소련점령지역에서 특히 언론 출판 집회 결사 신앙의 자유를 확보케 하며 일본정부로부터 행정 사법기관 등을 접수함에 있어서 일당일파의 專管을 불허하며 8월 15일 이후 현존한 인민위원회에 구속된 조선인정치운동자를 즉시 석방하며 소군의 불합리한 양곡, 의류, 기계 등 물자를 조선 외로 수출하는 것을 소련당국에 탄원함

附帶決議 右決議를 연합국 수뇌자에게 타전함


1945년 11월 18일
在京西北人大會

 

 

 


(1432) 전국학련 ―나의 학생운동 이철승<제47화>


 [중앙일보] 입력 1975.08.27 

 

< 신의주 학생사건 >

 

남한에서의 학생운동이 「반탁」의 기치를 들고 확대되기 이전 북녘땅 신의주에서는 소련점령군의 만행에 항거하는 학생의거가 전개됐다.

 

소련점령군에 항거…「자치대」결성 |11월23일 의거에 24명 죽고 3백50명 중상 | 일부학생들 월남…반탁투쟁에 활력소

 

그러니까 1945년 11월23일. 이날 의거에 나섰던 신의주학생들중 일부는 뒤에 사선을 넘어와 월남학생을 거점으로해서 반공대열에 나섰고 이것은 반공·반탁투쟁에 활력소를 불어 넣었다.

신의주학생의거의 배경은 말할 것도 없이 소련 점령군의 만행과 약탈.


1945년8윌20일 성진, 21일 원산과 함흥, 23일 개성, 24일 평양, 30일 신의주등으로 진주해온 소련군은 선진강대국의 해방군이 아니라 점령군으로서의 행패를 부렸다.


살인 폭행 강간 강도 약탈 무전취식이 백주의 노상에서 자행됐고 이와같은 만행은 함흥 신의주 평양등 소군이 진주하고 있는 곳에서는 어디서나 「새로운 질서」인냥 횡행했다.


이런 상황속에서 신성해야 할 학원도 소련군의 병영이나 공산당의 정치훈련소로 징발됐다. 여기서 오랫동안 기독교적 저항정신과 강인한 서북기질로 다져진 학생들의 울분이 폭발했다. 11월3일의 광주학생의거일을 맞아 신의주학생들은 기념식을 갖고 학생대표들이 제일공업학교 강당에 모여 「평북학생자치대」를 결성했다.


날로 불안해져가는 정정속에서 학원·학생들의 자유와 권리를 지켜 보자는 뜻에 자치대가 결성됐다.

 

이 자치대의 한 대표가 11월21일 상오10시 「용암포 주둔 소련군 위로환영대회」에 참석하게 됐다.
대회는 각본에 따라 몇 사람의 아부발언이 진행됐다.

그러나 막상 학생계를 대표하여 학생자치대대표가 연단에 나서자 상황은 크게 달라졌다.

『여러분, 해방이란 도대체 무엇입니까. 피땀 흘려 거두어 들인 곡식을 약탈해가는 자들이 해방군입니까. 공공건물과 심지어 학생들의 배움의 터전인 학교건물까지 징발하여 자기들의 노략질 창고로 쓰는 자들이 해방군인입니까. 그 해방군들은 짐승처럼 이 겨례의 순박한 처녀를 짓밟았습니다. 우리의 쌀뒤주를 뒤졌습니다.』

이 선동연설은 학생들의 가슴에 불을 붙였다.

 

사태는 순식간에 악화됐다. 좌우학생이 격돌했고 공산당원들이 이에 가세했다. 12명이나 되는 학생들이 괭이와 몽둥이질에 중상을 입었고 이를 말리던 제일교회 홍석황장로가 그자리에서 타살됐다.


이 비보는 삽시간에 신의주시내로 번졌다.

학생대표들은 윤순호군(당시제일공업대표)집에 모여 긴급회의를 열고 사후대책을 논의, 22일에 항의「데모」를 갖기로 했다. 노송동 동중강당에서 박선봉(평안중대표·재미) 윤순호 이도명(제일공업·교육계) 조병건·이신일(제이공업대표)등 학생대표들이 당시 도학무국장 함석헌씨를 만나 이 거사를 귀띔했다. 그러자 함선생은 『의로운 일은 그 누구의 힘으로도 막지 못한다』고 격려를 해주어 대표들의 사기를 북돋워 주었다.

 

거사일은 23일, 그리고 H「아워」는 하오2시로 굳혔다.전시내의 6개학교가 행동목표도 분담했다.
동중과 제일공업은 인민위원회 보안부를, 사범과 제이공업은 공산당본부를, 신의주보안서는 평안중과 상업학교를 각기 맡기로 했다.

 

압록강넘어 대륙에서 몰아쳐오는 강바람이 유난히 매서웠던 그날 하오2시. 동중과 제일 공업은 『학원의 자유를 침범말라』『피난민 구제기금 착복자 나오라』는 등의 구호를 외치며 도보안부를 겹겹이 에워쌌다.

그리고는 동중은 정문을, 제일공업은 후문을 타고 넘기 시작했다.

 

이에맞서 보안부대에서의 무차별사격이 이루어졌다. 동중 이정직군이 쓰러졌다. 같이 담을 넘은 지남선 임춘주 양군은 피투성이가 된 이군을 끌어안고 강안역까지 도망을 쳤다. 「탱크」포가 터지고 상공에는 소군 「야크」전투기가 낮게떠서 기총소사를 시작했다. 이 습격에서 이정식 백광진 조도우등 13명의 학생들이 죽고 80여명이 중상을 입었다.


한편 공산당본부로 갔던 제이공업과 사범학생들도 김의준 장원봉등 11명의 학생들이 생명을 앗기고 당시 제이공업기계과 2년 김장흥군은 악착같이 추격해오는 소련군을 피해 압록강철교를 줄달음 치다가 그만 푸른 강심으로 뛰어들고 말았다.
희생은 평안중학과 상업학교에서도 났다.


당일 피살자는 모두 21명, 중상자 3백50명…공산당과 소련군사령부에서는 혈안이 되어 학생들을 잡아 가두었으며 체포구금된자 1천여명중에서 2백여명은 「시베리아」로 유형을 보냈다.


뒷날 내가 반탁학생연맹을 이끌며 반탁운동을 벌였을때 나의 좌우에서 고락을 같이한 동지중에는 신의주를 중심한 서북지역출신이 많았다. 장익삼·박선봉·김득신·최찬영·김기석·이범석·김호영·이미수·윤영환·차장준·차순학군등은 서북학생의 대표적 인물이었다.

 

 

 

[ ..... 소련군이 들어오자마자 시내는 공포 분위기에 싸이게 됐다 ........   ]

 

       1945   신의주

 

[ ...... 연회가 끝나갈 무렵 보안부장 한웅이란 자가 피스톨을 꺼내어 쐈다 .... 항의를 한 사람이 없었다 .........


 ...... 그날부터 일은 자꾸 기울어지기 시작 .... 하룻밤 새 생긴 공산당원의 횡포뿐이다. 정체 알 수 없는 특무대란 것이 생겼다 .........   ]

 


내가 겪은 신의주 학생 사건 - 함석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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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군이 들어오자마자 시내는 공포 분위기에 싸이게 됐다. 첫째로 한 것이 상점 약탈이었다. 시계, 만년필은 닥치는 대로 "다와이"(내라)다. 그 담은 여자다. 어디서 여자가 끌려갔다, 어디서 무슨 일이 있었다 하는 소리가 날마다 들려왔다.

 

위원회로서 소련군 장교 환영 모임을 위해 의논을 하는데 부위원장이라는 사람의 첫번 소리가 미인계를 써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몹쓸 데를 왔구나 후회하는 생각이 났지만 이제 갑자기 빠져나갈 수도 없었다. 한 손에 무슨 알코올 병을 들고 한 손에는 냉수컵을 들고 마셔대는 소련군, 인간으론 보이지 않고 짐승으로만 보이는 공산당 위원들, 나라가 뭔지 아냐 모르냐 물어보고 싶은 재재거리는 기생들을 번갈아 보며 그 자리엘 앉아있자니 살아 있는 것 같지를 않았다.

 

연회가 끝나갈 무렵 보안부장 한웅이란 자가 피스톨을 꺼내어 쐈다. 일동이 놀랐으나 뛰어 일어선 사람은 없었고 천장을 향해 쐈으니 사람이 상하지는 않았다. 위협하는 것이었다. 옆의 소련 장교가 빙그레 웃고 빼앗아버렸으나 인간의 짓이라 할 수 없는 일이고, 누가 봐도 그들 사이에는 뒷면에 무슨 오고감이 있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나부터도 못했지만, 누구도 그 자리에서도 그 후에도 거기 대해 항의를 한 사람이 없었다.

 


 이튿날 일본 사람을 모두 한 수용소로 모으고 여자를 순번으로 징발해내어 소련 군인에게로 보내기로 했다. 일본 여자들도 승락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니 삶이란 뭐냐 또 한번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일이 다 말할 수도 없지만 그날부터 일은 자꾸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들려오는 것은 그저 하룻밤 새 생긴 공산당원의 횡포뿐이다. 정체 알 수 없는 특무대란 것이 생겼다. 그저 횡행천하다. 그러니 해방으로 인해 왔던 그 감격, 그 바다같이 넓어졌던 민중의 마음, 서로 믿고 서로 협력하고 서로 일하려던 그 열심을 다 달아나버리고, 있는 것은 공포, 불안, 분개, 낙심뿐이었다.

 

소련군 사령관이 오자마자 환영식을 했는데 그 자리에서 그는 분명히 말하기를 "우리는 당신들에게 아무것도 강요하지 않고, 당신들이 원하는 대로 어떤 형태의 정부를 세워도 자유입니다." 했다. 그러나 그것은 말뿐이고 사실은 소련 일생으로 기울어지는 것이었다. 벌써 거리마다 레닌, 스탈린 초상이 나붙지, 거리 이름을 레닌가 스탈린 광장으로 고치지, 학교에서 소련말을 가르치기 시작하지, 그러더니 평양에서 5도연합회의가 열린다고 통지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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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족은 운명을 같이하는 단체지만 가족끼리는 의식적인 단결은 없다. 의식적 단결은 도리어 그 가족을 멸망시키려는 도둑 편에서 먼저 한다. 그러나 도둑의 단체가 생기면 가족도 자연적인 하나됨만으로도 아니되고 의식적으로 단결해 부서를 짜고 활동해서만 그 도둑의 단체를 이길 수 있다. 나라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사실 민족주의적, 자유주의적인 사상은 우리의 역사적 단계에서 전체를 이끌어갈 수 있는 정상적인 이념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특히 계급적 대립이 심하지 않았던 이북, 이북 중에서도 평안도 지방은 그렇다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거기 공산군대가 들어왔다. 권력에 대해 야심있는 분자가 달라붙었다. 이리해서 일종의 어거지 혁명이 시작되고 있었다. 그러면 사회 양심이 멍청하고 있을 수 없다. 사회의 안전한 발전을 위협하는 그 세력에 조직적으로 대항하지 않으면 아니 된다. 의식적으로 어느 만큼 자각이 됐었는지 모르나 역사적인 의미를 판단할 때 우리 청년회와 하룻밤새 만들어진 사이비 공산당 사이에는 충돌은 운명적인 것이었다. 공산주의자들의 비인도적인 횡포가 늘어가면 늘어갈수록 그 충돌은 표면화해가고 격화되어갔다. 공정하게 전체의 역사적인 운명을 생각해서 그 어느 편이 이겼어야 할 것이냐 하면 물론 우리청년회가 발전하고 마음껏 활동했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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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sialsori.net/bbs/board.php?bo_table=0205&wr_id=108

 

 

 


[ ..... 어디서나 밤에 총소리가 끊이지 않고 ......

  ..... 술에 취해 행패를 부리고 부녀자를 겁탈하는 범죄도 만연 ........   ]

 


1945년 北 진주 소련의 붉은 군대는 해방군 아닌 약탈군이었다

 


동아일보

2010-03-10


대낮 만취 행패… 무전취식에 부녀자 겁탈까지


■ 소련군이 쓴 보고서 발견


“조선인 노예로 더 있게하자
봉기땐 절반 교수형 시킬것”

처벌 거의 없어 만행 지속
“일벌백계” 건의도 묵살당해

 

 이른바 ‘해방군’을 자처하며 한반도 북쪽에 진주한 소련군이 1945년 8월 이후 5개월간 북한에서 드러낸 행태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문건이 발견됐다. 1945년 12월 29일 소련군 중좌 페드로프가 소련군 진주 후 북한의 황해도와 평안남북도 등 3개도를 방문조사한 뒤 만든 이 13쪽짜리 보고서는 당시 소련군의 약탈 상황을 가감 없이 현장감 있게 전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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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련 군인이 직접 쓴 조선 약탈보고서

 

“우리 군인(소련군)의 비도덕적인 작태는 실로 끔찍한 수준이다. 사병 장교 할 것 없이 매일 곳곳에서 약탈과 폭력을 일삼고 비행(非行)을 자행하는 것은 (그렇게 해도) 별다른 처벌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


페드로프 중좌는 당시 ‘붉은 군대’의 만행을 이같이 기술했다. 그는 “우리 부대가 배치된 시나 군 어디서나 밤에 총소리가 끊이지 않고 있다”며 “특히 술에 취해 행패를 부리고 부녀자를 겁탈하는 범죄도 만연해 있다”고 지적했다.

 

이 보고서는 “대낮에도 거리에서 술에 취한 군인을 심심찮게 볼 수 있었고 신의주 내 70곳 이상의 여관과 공공건물에서는 밤마다 질펀한 술자리가 벌어지고 있다”고 기록했다. 구체적인 사례도 적시됐다. 1945년 12월 6일 공병장교 막시모프는 휘하 병사 7명과 함께 한 여관에 투숙한 뒤 여자를 부르고 밤새도록 술판을 벌인 뒤 다음 날 아침에 돈을 한 푼도 내지 않았다는 것. 더 기가 막힌 일은 막시모프 일행이 5일 후인 11일 또 이 여관에 들러 숙박비라며 돈을 냈는데 당시 북한에서 전혀 통용되지 않아 휴지조각으로 취급되는 만주 돈이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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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ews.donga.com/3/all/20100310/26736705/1

 

 


 1945.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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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 북위 38도 이북의 소련점령지역에서 특히 언론 출판 집회 결사 신앙의 자유를 확보케 하며

일본정부로부터 행정 사법기관 등을 접수함에 있어서 일당일파의 專管을 불허하며

 8월 15일 이후 현존한 인민위원회에 구속된 조선인정치운동자를 즉시 석방하며 소군의 불합리한 양곡, 의류, 기계 등 물자를 조선 외로 수출하는 것을 소련당국에 탄원함


附帶決議 右決議를 연합국 수뇌자에게 타전함


1945년 11월 18일

在京西北人大會

 

 

 


      1945.11.23.  신의주

 

[ ..... 공산당의 활동이 노골화되면서 숙청바람이 불고 학교에도 태극기 대신 붉은 기를 달게 하고 학급마다「레닌」「스탈린」의 초상화를 걸도록 강요 .......   ]


[ ..... 소련군「야크」기가 몇 대 뜨더니 이내 기총소사를 .......  ]

 

▲박선봉(朴善鳳)씨(46)·현 신의주 반공학생의거기념회부회장·당시 평안중학 졸업반)=공산당의 활동이 노골화되면서 숙청바람이 불고 학교에도 태극기 대신 붉은 기를 달게 하고 학급마다「레닌」「스탈린」의 초상화를 걸도록 강요한데 불만을 품어오던 차에 용암포 사건이  터졌다고 해요。기차 통학생들로부터 이 소식을 들은 신의주시내 6개 중학생 대표들은 제일공업 윤순호(尹淳浩)군 집에서 2、3차례 밀회를 갖고『도저히 가만 있을 수 없다』는데 의견이 일치되었읍니다。그때 반공애국청년단체인「우리청년회」의 유형무형의 지원도 계산했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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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일이 되어 내가 다니던 평안중학과 상업학교는 신의주 보안서를 습격하기로 돼 11시부터 각기 교정에 모여 연락이 오기를 고대하고 있었읍니다。


그런데 모든 계획의 본부격인 제일공업학교에서 12시에 거사하자는 연락을 받아오던 학생이 중도에 그 무렵 행패가 가장 심했던 특별보안대원을 만나『너 오늘 죽어봐라』며 싸움을 벌이는 통에 늦어 이날 1시경에야 학교문을 나섰읍니다。남신의주의「평중」에서 보안서까지는 약 4㎞나 됐읍니다。


1천여명의 두 줄로 된 학생대열이「공산당타도」의 구호를 외치며 소련군이 점령하고 있는 비행장 옆을 지나쳤는데 그때 보니까 200m앞 둑 위에 기관총이 걸려 있었고 보안대원들이 공포를 쏘고 몽둥이를 휘두르면서 신의주에 못들어 간다고 소리치고 있었읍니다。대치하고 있던 학생들이 몇 개 분대의 특공대를 편성하고 투석전을 막 벌이는 순간이었읍니다。


그 비행장에서 소련군「야크」기가 몇 대 뜨더니 이내 기총소사를 퍼부었읍니다。그러자 학생들은 도로 옆 논두렁으로 흩어지기 시작했읍니다。나도 몸을 피해 벼 낱가리 속에 숨어서보니까「야크」기는 학생들과 약간 떨어진 논바닥에다 마구 기관포를 쏘더군요。우리들은 눈물을 머금고 물러서지 않을 수 없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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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강성재 기자, 남북의 대화 <51> 신의주학생 반공의거 괴뢰 김일성의 등장 ⑩, 동아일보 1972년 2월 5일자 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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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5.12.17.

 

[.... 러시아를 저희 조국이라 부른다니 .......

     한국을 떠나서 저희 조국에 들어가서 충성스럽게 섬기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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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대통령은 1945년 12월 17일 한국이 공산당을 원치 않는 이유를 서울중앙방송국을 통해 이렇게 역설했다.

 

“....공산명목을 빙자하고 국경을 없이 하야 나라와 동족을 팔아다가 사익(私益)과 영광을 위하여 부언위설(浮言僞說 뜬소문과 거짓말)로 인민을 속이며, 도당을 지어 동족을 위협하며, 군기(軍器)를 사용하여 재산을 약탈하며, 소위 공화국이라는 명사를 조작하여 국민전체의 분열 상태를 세인에게 선전하기에 이르다가.....


이 분자들이 러시아를 저희 조국이라 부른다니, 과연 이것이 사실이라면 우리의 요구하는 바는 이 사람들이 한국을 떠나서 저희 조국에 들어가서 충성스럽게 섬기라고 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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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6.5.


[  ...... 조선공산당의  청년동맹규약 .......

  ..... " 사회주의조국  쏘베-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에  무한의 충성을  다하도록  교육한다. "  ..........   ]

 


1946.5.28.동아일보


사회주의조국에 충성하라

조공청년동맹의 지도강령

 


한때 조선을 소련의 일연방 되기를 희망한다고 외국기자단에서 말한 조공책임비서 박헌영에 대한 사실이 미국 뉴욕타임쓰지로부터 세간에 보도되자 세인의 공노를 사게 되엇슬대 변명이 구구하엿는데 요지음 조선공산당의 청년동맹규약을 들추어보면 막쓰 레닌의 리렴과 모순되는  다음과 같은  일절이 있다.

"사회주의조국 쏘베-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에 무한의 충성을 다하도록 교육한다."

이것은 조선혼이 사라있고 조국재건에 피끓는 조선청년남녀에게는 이따위 얼빠진 지도가 감히 손을 대지 못할 것으로 밋으나 일방 상심할 일이 아닐수 없다.

 

 

 

       1945.12.17.  김일성  민주기지 노선

 

[ ..... 民主基地(민주기지)의 강화는 조국통일의 결정적 담보이다 .......    ]

 

[時論]  南北聯合에 共産化의 함정 있다.

북한 民主化와 남북 자유총선거가 유일한 統一 방안
 

 
 
金正剛 사회批評家
 

 
고려민주연방 통일안은 민주기지 노선의 上層 통일전선테제


 
 1945년 12월17일 朝鮮共産黨北朝鮮分局(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중앙 제3차 확대집행위원회는 「북조선을 통일적 민주·독립국가 건설을 위한 강력한 정치·경제·문화적 민주기지로 變轉(변전)시킬 것」을 결의했고, 同 대회에서 金日成(김일성)은 『民主基地(민주기지)의 강화는 조국통일의 결정적 담보이다』라는 연설을 하여, 이른바 民主基地路線(노선)을 공산당의 한반도 공산화 혁명 전략으로 채택하였다.

 
 민주기지 노선이란 소련 점령지구에 빨치산式 해방구 국가를 만든 후, 이를 거점으로 평화적, 非평화적 무한투쟁을 전개하여, 남한을 병탄함으로써 마지막에는 한반도 전체를 공산화한다는 혁명전략이다. 즉 민주기지 노선은 러시아 공산혁명 과정에서 빨치산 해방구의 경험을 가진 스탈린이, 한반도를 미국과 더불어 분할점령하게 되자, 이 조건을 이용하여 全한반도를 공산화할 목적으로 안출해 낸 교활한 혁명전략이었다.
 


 그후 조선공산당 북조선 분국이 北朝鮮共産黨으로 변하고 공산당이 朝鮮勞動黨으로 변하면서 민주기지 노선은 한반도 공산화 전략의 기본으로 정립되어 오늘에 이른다.
 


 共産黨과 그 연속인 勞動黨은 이 민주기지 노선에 따라, 북한에서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주권기관을 꾸리는 한편, 남한의 해방공간에서 합법 정치투쟁, 신탁통치 지지운동, 2·7 폭력파업, 10·1 폭동, 4·3 폭동, 여순 14연대 반란 등 갖가지의 평화적, 非평화적 방법으로 대한민국을 전복하여 남한마저 공산화하려고 하였고, 여의치 않자 급기야는 인민군으로 남침하여 6·25 사변을 일으켰다.
 

 6·25 사변을 정점으로 하는 모든 폭력혁명의 방법이 실패하자, 노동계급 중심의 지하당 구축, 폭력혁명 등의 下層 통일전선 전술에다 上層 통일전선 전술을 배합하고, 上層 통일전선 전술에 더욱 큰 중점을 두게 되는데, 이 上層 통일전선 전술의 핵심고리에 해당하는 테제가 바로 高麗民主聯邦共和國(고려민주연방공화국) 통일방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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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monthly.chosun.com/
 
김정강  (2000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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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2월 8일 사실상 북한 단독정부 수립 

 

이 확대협의회가 열린 첫날인 2월 8일에 김일성이 행한 조직문제에 대한 연설문을 보면 “오늘 북조선에 중앙 주권 기관을 조직하는 것은 완전히 성숙된 과업입니다. 우리는 우리나라에 통일 정부가 수립될 때까지 북조선 임시 인민위원회가 이런 기관으로 되어야 한다고 인정합니다. 중앙 주권 기관을 조직할 목적으로 북조선의 민주주의적 정당 사회단체 지도자들은 발기위원회를 조직하였습니다. 소련군사령관도 발기 위원회의 의견을 지지하였습니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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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asiatoday.co.kr/view.php?key=20150906010003761

김일성, 남한보다 먼저 단독정부 세웠다.

 

 

 

[ .....  집집마다 스탈린과 김일성의 사진을 일제시대의 천황사진 모시듯 위하고  ..... 

 .....  요즈음은 금족령이 내려 외출을 못한다고 ......  ]

 

동아일보 1948년 04월 27일   

신화당당수 文容彩, 북조선시찰담 피력

 

남북협상에 참석하기 위하여 지난 20일에 서울을 출발한 新化黨 당수 文容彩는 38선 부근 남천에 4일동안 강금당하고 있다가 24일 아침에 서울에 돌아왔는데 방문한 기자에게 며칠동안 그가 보고 온 이북의 생생한 소식을 기자에게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였다.


“우리는 이번 남북회담을 기회로 그 회담광경을 구경할겸 이북의 모든 상황을 좀 살펴보려고 갔는데 회담 구경은커녕 38경계선 부근 남천에서 약 나흘동안이나 감금당하고 말았는데 그들 관헌의 소행으로 미루어 남북회담이 환멸의 비애를 느끼고 서울로 돌아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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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우리여관이란 숙소에 들어갔는데 감시하는 보초가 총에다 칼을 꽂고 문밖에도 못나가게 하고 변소에 갈 적에도 보초병이 따라 다니니 산보삼아 거리에 나가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들의 눈을 속여 잠깐 문밖에 나가 보니 거리는 쓸쓸하고 사람하나 볼 수가 없어 옆집 노인에게 그 연고를 물어보니 요즈음은 금족령이 내려 외출을 못한다고 머리를 쩔쩔 흔들면서 기운없이 대답하였다. 다 같은 피가 흐르고 있는 동족끼리 말 한 마디 못하게 외출을 금지하는 이북 관헌들을 나는 다시 한번 새롭게 원망하고 분함을 금치 못하였다.


그런데 저녁때쯤 되니 거리에 학생들이 열을 지어 노래를 부르면서 지나가는데 첫째 그 복색이 빈약하기 짝이 없고 그중에는 걸레같은 옷을 감고 있는 학생들이 있어 남조선 학생들은 아직 행복이라는 것을 절실히 느끼었다. 그리고 집집마다 스탈린과 김일성의 사진을 일제시대의 천황사진 모시듯 위하고 있는 것을 보니 일제시대의 재판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났었다. 23일 밤에는 평양 중앙민전에서 누가 왔다기에 그이를 만나 여러가지 이야기하던 끝에 실업자는 없는가 하고 물어보니 실업자가 많다고 대답하기에 어째서 실업자가 없다는 곳에서 그렇게 실업자가 있는가 하고 반문하니 우물쭈물 답변을 못하였다.


그리고 그쪽 신문을 몇 가지 주는데 보니 전지면이 백힌듯이 꼭같은 공산주의 선전이고 변화가 없어 싫증이 나서 그래도 남조선의 신문이 재미있다고 생각하였다. 하여간에 이북은 말 한마디 자유롭게 못하는 가슴이 답답하고 감옥에 얽매여 있는 듯한 곳이라는 감을 주게 한 것은 아마 나 개인의 감상뿐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 1928

 

[... 조국 조선을 버리고 ......

    새 조국으로서 적로의 忠奴가 될 것을 自言自誓하고 ......  ]

 


  〈제군의 조국 소비에트 러시아〉 聲明이 論難 불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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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일독립당 촉성운동이 결렬된 데에는 1928년 12월에 코민테른(국제공산당)이 발표한 이른바 「12월테제」(조선의 농민 및 노동자의 임무에 관한 테제)의 영향도 컸다.

「12월테제」는 코민테른 제6차 대회에서 결정된 조선공산당에 대한 승인을 취소하면서, 한국공산주의자들이 분파주의를 극복하고 노동자 농민의 대중적 기반 위에서 조선공산당을 재건할 것을 지시한 것인데,23) 이 「12월테제」에 입각한 공산주의자들의 국제주의 원칙이 민족주의자들과의 타협을 거부하는 요인으로 작용한 것이다.


 
  1928년 7월에 이르러 유일독립당 촉성운동을 결렬시키는 결정적인 사태가 발생했다. 中東鐵道사건이 그것이었다.

중동철도란 만주지역의 옛 東淸鐵道 가운데에서 일본에 양여한 남만주철도를 제외한 부분을 말하는데, 이 철도노선은 1924년의 중·소협정에 따라서 중국과 소련이 공동으로 관리하고 있었다. 그러나 국민당 정부가 1929년 7월10일에 일방적으로 그 회수를 선언하고 만주의 張學良으로 하여금 이를 강제로 집행하게 했다.

소련은 국민당 정부에 강력히 항의하고 중국대표의 철수를 요구하는 한편, 8월에는 극동군을 편성하여 중·소국경에 집결시키고, 11월 들어서 본격적인 교전이 벌어졌다.24)

 

재중한청 제1지구 상해지부에서는 7월23일에 「檄함. 전조선 피압박대중 제군에게」라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소련을 지원할 것을 촉구했는데,25) 성명서 가운데 있는 〈제군의 조국 소비에트 러시아〉라는 말이 민족주의자들의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민족주의자들은 당장 「청년동맹원 賣母換祖[어미를 팔고 조상을 바꿈]사건비판회」를 열고 이들을 맹렬히 비난하는 「赤鬼忠奴 청년동맹원의 매모환조사건 公布狀」을 발표했다.


 
  〈반만년의 역사를 가진 그들의 조국 조선을 버리고 그들이 귀화한 赤露를 그들의 새 조국으로서 적로의 忠奴가 될 것을 自言自誓하고 있다.


당신들과 같이 살려고만 하고 일하기를 싫어하는 무리들은 餓鬼國(아귀국)에라도 가서 공산주의를 실행하라.


며칠 전 동지 여운형이 검거된 밤에 이른바 공산동지들이 위문한다는 구실로 呂의 집에 들어가서 집기를 절도한 것과 같은 행위가 공산운동이냐?

또는 하숙비를 잘라 먹고서 그 주인 여자를 구타한 것과 같은 행위가 계급투쟁의 하나이냐?〉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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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PD(민중민주)계열 운동권은 소련을 사회주의 조국이라고 생각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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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D(민중민주)계열 운동권은 소련을 사회주의 조국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본인은 1990년 소련에 들어가 공산당에 입당 후 소련 첩보기관과 연계해 (좌익)활동을 펼쳤다.

 
 일례로 지난 88년 서울 올림픽 때 상부로부터 지령을 받은 것이 소련 팀을 응원하는 분위기를 조성하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대학가 운동권 서클과 연계된 학생들을 동원했고, 실제로 이들은 당시 미국과 소련이 벌인 농구경기에서 열렬히 소련을 응원했다. 이 사건은 당시 신문에 크게 보도되기도 했다. 이러한 성과를 인정받아 소련공산당에 입당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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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6.1.5. 박헌영

 

[.... 우리는 소련 일국 신탁통치에 이의(?)가 업다......

 .... 소련화한 사회주의적 노선에 따라 ... 발전되기를 바란다 ......  ]

 


[.... 조선을 소련방의 일연방국으로 하고저 조선을 소련화하게 되는 것이 아닌가


     대답   그러타고 볼 수 있다 .......  ]

 

 

1946.2.19. 동아일보

 

미국기자와 박헌영씨의 문답

정확한 사실임이 조사로 판명

 

군정청 공보국 발표


미국인 기자에 대한 비난을 풀기 위하야 다음의 기사를 발표하는 바이다.

지난 1월 26일 박헌영 씨는 뉴욕 타임스기자 존스톤 씨를 조선으로부터 방축하기를 요구한다는 공문서를 서명날인하야 미군사령관에게 제출하얏고 동시에 조선인기자 수명도 존스톤씨에게 대한 비난서에 각각 서명하였다.


즉 박씨는 1월 5일 기자단회견석상 자기가 발표한 성명서 중에 존스톤 씨는 완전히 공산당 당수의 성명을 오해하야 인용하얏다는 사실을 특별히 비난하얏다.

미군사령관은 이 비난을 대단히 중대한 사건이라고 생각하고 백반 조사를 시켯다.조사한 결과의 사실은 다음과 같다.

 

조선공산당 정식대변자로 박씨는 1월 5일 기자단 회견에 미국인 기자를 초청하였다.

3명의 미지특파원 존스톤 씨 마속크씨 콘월 군조는 미군사령부 피알오 장교 턱카 대위와 동반하야 정식으로 기자단회견에 출석하였다.

 

미국인기자회견석상에서는 모다 영어를 사용하였다.당시 기록한 턱카 대위와 존스톤씨의 수기중에는 질문한 것과 대답한 것이 있는 데 그 내용은 정확한 것으로 콘월 군조도 기후에 그 정확성을 인정하였다.즉 박씨와 조선인기자의 비난중에 인용된 내용은 다음과 같은 데 이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질문 (존스톤) 조선을 소련 일국의 신탁통치로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어떠케 생각하는가


대답 (박씨 영어로) 나는 그 문제에 대해서는 아무 이의(?)가 없다. 즉 우리는 소련 일국 신탁통치에 이의(?)가 업다.

 

질문 장래 조선의 정치적 발전과정에 대한 의견여하


대답 우리는 소련화한 사회주의적 노선에 따라 10년 내지 20년 안에 자주독립민주주의국가로 발전되기를 바란다.

 

질문 이것은 결국 가까운 장래에 조선을 소련방의 일연방국으로 하고저 조선을 소련화하게 되는 것이 아닌가


대답 그러타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지금 불가능하다

 

질문 왜 지금은 불가능하냐


대답 현재 조선인은 이것을 조와하지 않는다. 그리고 또 지리적으로 보아서 지금 소련방에 포함되는 것은 불가능할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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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공산당의  청년동맹규약 .......

  ..... " 사회주의조국  쏘베-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에  무한의 충성을  다하도록  교육한다. "  ..........   ]

 

1946.5.28. 동아일보


사회주의조국에 충성하라

조공청년동맹의 지도강령

 


한때 조선을 소련의 일연방 되기를 희망한다고 외국기자단에서 말한 조공책임비서 박헌영에 대한 사실이 미국 뉴욕타임쓰지로부터 세간에 보도되자 세인의 공노를 사게 되엇슬대 변명이 구구하엿는데 요지음 조선공산당의 청년동맹규약을 들추어보면 막쓰 레닌의 리렴과 모순되는  다음과 같은  일절이 있다.

"사회주의조국 쏘베-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에 무한의 충성을 다하도록 교육한다."

이것은 조선혼이 사라있고 조국재건에 피끓는 조선청년남녀에게는 이따위 얼빠진 지도가 감히 손을 대지 못할 것으로 밋으나 일방 상심할 일이 아닐수 없다.

 

 

 


[ ..... 노동자에게는 나라가 없다 .......

  ..... 전세계 노동자여, 단결하라! ........    ]

 


공산당선언

칼 마르크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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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아가, 공산주의자는 나라와 국적을 폐지하려 한다고 비난받는다.

노동자에게는 나라가 없다. 갖고 있지 않은 것을 빼앗을 수는 없는 일이다. 프롤레타리아트는 무엇보다도 정치적 지배권을 획득해야 하므로, 해당 민족의 영도적 계급으로 떠올라야 하므로, 자신이 스스로 그 민족을 구성해야 하므로, 비록 부르조아적 의미는 아니지만 그 자체가 민족인 것이다.

민족들 간의 민족적 차이와 적대는 부르조아지의 발전, 상업의 자유, 세계시장, 생사양식과 그에 따른 생활조건에서의 제일성 등으로 인해 날이 갈수록 사라져가고 있다.

프롤레타리아트의 지배는 그것들을 한층 더 빨리 사라지게 할 것이다. 선진문명국의 통일행동은 프롤레타리아트의 행방을 위한 1차 조건 가운데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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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세계 노동자여, 단결하라!

WORKING MEN OF ALL COUNTRIES, UNI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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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익계 각단체 긴급협의회, 조선공산당 배격 결의

 

게재지명 전단

게재일자 1946년 01월 16일
날짜 1946년 01월 16일

 


○○의 연방되기 요구한 △△△派를 배격하라


賣國賊懲治緊急協議會 結成

 

朝鮮共産黨○○○○○○○이 작년 11월 5일 급 금년 1월 8일 외인기자단에 대하여

朝鮮共産黨은 5년이나 10년이나 ○○一國에 의한 신탁통치를 요구하고 그 후는 ○○○의 일연방으로서 참가하기를 희망한다고 언명한 사실은

 3천만의 분노를 사서 1월 16일 韓國民主黨本部에서 38단체가 회합하여 賣國賊懲治 緊急協議會를 조직하고 賣國賊○○○도당을 격멸하는 국민대회 성토강연회를 개최하기로 되었는데 그 결의내용은 如左하다.

 

 결의


우리 3천만민중은 하루바삐 완전독립을 요구한다. 그런데 모스크바三相會議에서 ○○의 일국에 의한 조선의 신탁통치를 주장하고 이것을 朝鮮共産黨이 지지결의한 것은 3천만민중의 분노의 적이 되어있다.


특히 同黨 ○○○ ○○○이 1월 8일 외국기자단에게 대하여 朝鮮共産黨은 ○○一國에 의한 신탁통치를 10년이나 20년이나 받아도 좋고

그 후는 ○○○의 일연방으로서 참가할 것을 찬성한다고 언명한 것은

실로 조선의 독립을 말살하고 영원히 조선민족을 ○○의 노예화를 유치하는 매국 매족의 행위로서 3천만민중이 일제히 배격하는 바이다.

吾等은 전국민족 운동을 일으켜 朝鮮○○黨을 격멸하기로 결의한다.

 

부대결의


一. 吾等은 朝鮮共産黨 ○○○○○○○○ 타도 국민대회를 개최함

一. 吾等은 朝鮮共産黨 ○○○○○○○○ 성토강연회 개최함

一. 此 결의를 美·蘇·中·英國 당국에 타전함

一. 朝鮮共産黨 ○○○○○○○의 언동은 매국행위이므로 군정청에 대하여서는 동일파와의 면회, 방송, 성명 등 일절 정치행동을 금지할 것을 요구함

一. 각신문 통신사에 대하여 ○○○一派의 언동에 대한 기사취급을 불허할 것을 요구함

 

賣國賊懲治團體緊急協議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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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조건 단결과 38선 철폐를 주장

 


해방정국에서의 우익진영의 초기 열세는 45년 10월 중순 이승만이 귀국하면서부터 다소 만회되기 시작했다.


이승만은 귀국과 동시에 민족의 무조건 단결과 38선 철폐를 주장했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을 역임했고 장기간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해옴으로써 독립운동의 최고지도자로 알려진 이승만이 귀국과 함께 천명한 2가지 사항은 대중에게 큰 호소력을 발휘했다.

 

그동안 공산당과 좌익으로부터 친일파라는 비판을 받아온 한민당은 독립운동의 최고지도자인 이승만의 “먼저 단결하여 완전독립을 달성하고 그 다음에 친일파 문제를 정당한 절차에 따라 처리해야 한다”는 주장에 의해 구원받게 되었다.


또한 이승만이 38선 철폐를 공공연하게 주장해줌으로써 소련의 행동은 무엇이나 옳다고 옹호하고 따라서 38선을 경계로 남북한간 교통 통신을 일방적으로 단절시킨 소련의 조치도 옹호해온 공산당의 입장을 수세로 몰아넣을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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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의 귀국 이후 우익진영은 기회 있을 때마다 38선의 철폐를 주장하고, 38선을 경계로 소련에 의해 강요되고 있는 남북한 주민간 교통 통신 단절을 해제할 것을 반복하여 주장했다.


 그에 반해 좌익진영은 48년 남북한에 2개의 정부가 수립될 때까지 통일만 주장했을 뿐 38선을 경계로 남북한간 교통 통신 단절의 해제를 주장해본 일이 단 한번도 없다.

좌익진영은 단지 남한에서도 북한에서와 같이 인민위원회에 정권을 넘겨주고 친일파 숙청과 토지개혁이 이루어지면, 다시 말해서 남한사회가 북한사회처럼 되면 38선은 자연히 해소될 것이라고만 주장했다.
 

이 하나의 사실만으로도 해방정국의 좌·우익 중 어느 쪽이 보다 자주적이며 통일지향적이었던가를 쉽게 판단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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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6.3.6.  38선 철폐요구 국민대회

 


 [...生地獄 38以北의 同胞를 살리자 .....]

 [...38以北의 言論·集會·結社의 자유를 다오 .....]


 [...‘건국의 장애물인 38선을 철폐하라’.....]

 

 

  38선철폐요구 국민대회 개최
 
 
게재지명 동아일보
 
게재일자 1946년 03월 06일
 

 

 
38線撤廢要求國民大會가 5일 오전 11시 반 서울운동장에서 개최되었다.

이날 38선철폐요구국민대회에 군중이 들고 나선 기치와 표어는 다음과 같다.

 

38絞首線 撤廢

38以北의 農民의 食糧을 약탈 말라

生地獄 38以北의 同胞를 살리자

自主獨立의 전제조건이다

38以北의 機械없는 공장의 노동자를 살리자

38以北의 言論·集會·結社의 자유를 다오

言論機關은 반성하라 38以北의 진상을 정확히 報道하라

民族의 總意로 38線 撤廢를 요구하자

 


이날 오전 11시 반 대회장에는 남북 각지에서 모인 수천명이 ‘건국의 장애물인 38선을 철폐하라’ 38絞首線을 철폐하라라고 쓴 깃발을 휘날리고 국민의 총의를 무시한 38선의 철폐에 돌진하려는 결의가 움직이는 가운데 대회의 막이 열리었다.


개회사와 국기게양이 끝난 다음 애국가 합창이 성동중학교의 취주악대와 함께 있은 후 대회위원장 李允榮(平壤朝鮮民主黨副黨首)으로부터 “38선의 문제를 해결하기 전 우리의 완전독립은 가망없다. 우리는 이 대회를 기점으로 38선철폐 국민운동을 전국적으로 전개하려 한다”라는 개회사가 있었다.

그 다음 임시정부 외교부장 趙素昻으로부터 李承晩, 金九의 축사를 대독한 후 서북선의 실정보고에 들어가 宋義淳, 崔奎恒, 白凡石 3인의 보고연설에 이어 다음과 같은 決議文 낭독이 있은 후 독립만세 삼창으로서 의의깊은 대회의 막을 닫고 동 오후 2시에 폐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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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決議文

 

1) 朝鮮의 38도선은 外敵이 항복하기 전 聯合軍參謀總長會議에서 작전상의 필요로 획정하였다는 사실에 비추어 보건대 금일의 朝鮮에 있어서는 이미 그 필요성을 인정치 아니한다.


 이 후도 美蘇兩軍이 38선을 경계로 분할 주둔하여 현재와 같은 3천만 민족의 統一團結과 自主國家 건설에 지장이 클 뿐 아니라 국가경제의 파멸을 초래하여 國民生活을 도탄에 빠지게 하며 政治·經濟 文化·交通·通信·居住의 자유를 拘?하는 바 큼으로 우리는 3천만 민족의 이름으로써 聯合軍과 聯合軍總司令官 及 美蘇共同委員會에 대하여 38선의 즉시 철폐를 요구하여 其 목적의 관철을 기하기를 결의함.

 

1) 우리 동포중에는 □□을 기화로 선량한 동포들을 기만 □□하여 政權의 획득을 꾀하는 賣國奴가 있어서 심지어 光輝있는 祖國을 外夷에게 팔아 먹으려는 □□□ 이땅에서 횡행 활보하니 어찌 통탄치 아니하랴.


 38以北을 바라보건대 진정한 民意를 무시하고 소수인원의 恣意로 된 臨時人民委員會가 있어 입으로 民主主義를 표방하면서 민중을 억압 기만하여 후일 政權의 횡탈을 꾀하려 하니 우리 어찌 만연 방관할 수 있으랴.

 

이제 우리 3천만 동포는 理論과 표방에 속지 말고 사리와 감정을 떠나서 현실을 엄정 냉정히 관찰하여 정사를 가르고 □□을 판단하여 우리의 추앙 신앙하는 民族의 領導者를 선택치 아니치 못하게 되었으니 여기서 우리는 朝鮮의 血統과 民族的 良心을 가진 3천만 동포의 이름으로 大韓國民代表民主議院을 절대 지지하는 것을 천하에 선명하여 써 內로는 民心의 歸一을 策하며 外로는 이를 萬邦으로 하여금 大韓國民의 完全統一政權으로 승인케 하기를 결의함.

 

 
大韓民國 28년 3월 5일

38線撤廢要求國民大會

 

동아일보 1946년 03월 06일 

 

 

 

 


[ ..... 協定된 것도 蘇聯軍司令官의 거부로 성립되지 아니하였으니 蘇聯軍의 心腸은 과연 어디에 있는가.

 .... 38도 以北의 우리 동포는 무한한 모욕과 각종의 학대를 받아 파멸상태에 빠졌다는 보도를 눈물을 흘리면서  .......  ]

 


민주의원 김준연, 38선문제 등 소군정당국 반성 촉구 방송


게재지명 동아일보
게재일자 1946년 03월 16일
날짜 1946년 03월 13일

 

民主議院 金俊淵은 現下의 最緊急한 38선과 농촌문제에 관하여 13일 오후 7시 15분 中央放送局에서 방송하였는데 그 요지는 다음과 같고, 지면관계로 농촌문제는 割愛하고 38선문제만 揭載하여, 美蘇共同委員會를 앞두고 특히 蘇聯軍當局에 반성을 촉구하였다.

 

“去年 8월 15일 이후 우리 3천만 민중은 37년이란 세월을 고통으로 비참한 死線에서 방황하던 日本의 虐政을 벗어나서 하루바삐 자유독립의 완성을 기하였을 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상상도 아니하던 38도선이 가로 막아 누구나 그 理由와 原因如何를 물론하고 놀라지 아니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 민족이 南北으로 갈리어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생활 전면에 차단을 당하여 왕래의 자유가 없음은 물론 通信의 왕복도 전연 不能한 상태에 있어 벌써 반년을 경과하였으니 이와 같은 우리 民族 相互間의 고통과 비애는 과거 屢千年 역사상에 보지 못하였던 일이 아닙니까.

 

우리는 이러한 고난을 받으면서도 美蘇兩軍이 우리의 自主獨立에 협력하기 위하여 우리 땅에 進駐한 것으로 믿고 그들에게 무한한 감사를 드리며 큰 기대를 가졌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과거 京城에서 열린 美蘇共同委員會는 우리 自主獨立의 過渡政權을 수립하는데 협력하는 전제로 38도선 문제를 해결할 것이라고 하는데 대하여 그 회답의 내용과 경과의 발표가 있기를 날로 기다리던 바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略) 協定된 것도 蘇聯軍司令官의 거부로 성립되지 아니하였으니 蘇聯軍의 心腸은 과연 어디에 있는가. 우리는 그 제반행동에 관하여 38도 以北의 우리 동포는 무한한 모욕과 각종의 학대를 받아 파멸상태에 빠졌다는 보도를 눈물을 흘리면서 믿지 아니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蘇聯軍의 과오인가 소수 民族反逆者의 죄악인가.


 우리는 民衆의 총력을 집결하여 蘇聯軍當局의 반성을 요구하는 동시에 民族反逆者를 배격하여야 하겠습니다. 여러분 우리 다 같이 마음과 힘을 모아 死滅에 빠진 38도 以北의 동포를 구해냅시다.

 

美蘇共同委員會가 또다시 금명중에 회담을 개시하는 모양이니 여기에 대하여서도 우리는 그 경과를 주시하여 우리의 自主獨立完成에 협력하는 것이면 마땅히 滿腔의 성의를 드리고 우리도 심혈을 다하여 목적완성에 奮迅 勇往함은 물론이나 만일 38도선의 철폐를 거부하여 우리 민족의 통일을 저해하거나 소위 信託問題 等을 제의하여 우리 民族의 독립을 거부하는 자 있다면 그야말로 우리 3천만 민족의 사활문제이니 우리가 일심협력하여 끝가지 이것을 반대하지 아니하면 안될 결심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우리는 비통한 마음으로 蘇聯軍當局에 대하여 반성을 요구하는 所爲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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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신문은 잇스나 38이남의 소식을 전혀 드를 길이 업는 이북 사람들의 ......  ]


   1946.3.18.월요일. 동아일보.

 " 라듸오"로 듯는 이남의 소식


평양에서 발행되는 신문은 잇스나 38이남의 소식을 전혀 드를 길이 업는 이북 사람들의 심정은 오즉 답답할 뿐이다. 그러나 지난번 , 미소회담에서 방송파장이 협정되면서부터 라듸오만은 잘들리어 , 서울중앙방송국으로부터 보내는 뉴스로서 자위한다고 한다.

 

 

 


        1946.4.  평양

 


[ ..... 그때였다 아조 가까운 곳에서 총소리가 낫다 ..... 평양의 민심은 말할 수 없는 불안을 품고 이대로 있다가는 이 불안에 눌리워 질식해 죽겟다는 것 .......

 ..... 십오륙세의 소년들을 모아 무□소년단을 조직하야 밤이면 이집저집에 보내여 탐정을 시켜 .........   ]

 

[ ..... 제7인민병원(人民病院)이라는 간판이 .... 작년 10월 10일부터 ....『모-든 것을 인민의 손에 인민의 손으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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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국경 아닌 국경『삼팔선』이북답파기 (3), 1946년 4월 8일자 2면.

 

평안반 본사특파원 KK생, 제비처럼 남국이 “그립다”, 컴은 거리에 총성이 은은

 

평양역에 나렷다 평양、여기가 북조선의 수도인가하는 생각이 화살같이 머릿 속을 스치고 지나간다 개찰구를 나서니 붉은 깃발 붉은 포스타 스타린 수상의 초상 토지개혁의 해설 등이 거리마다 부터있을 뿐만 아니라 소련부인과 소련어린이들까지 길거리에서 만나게 되였다. 기자는 여기가 제2의 적도(赤都)나 아닌가하고 조선의 지도를 펴보고 싶은 충동을 바덧다.


남북이 갈린지 일년도 못되어 평양의 자태는 너무나 엄청나게 소련식으로 변하고 말앗다 검으침침하고 기름끼 하나 돌지안는 평양 쓸쓸한 거리 정포를 벌리고 안저 잇는 상인들의 얼골에는 회색비치 지텃다. 거리에 다니는 사람들의 발거름은 무거웟고 얼굴은 한없이 우울해보였다


거리를 지나다니면 소련군완장과 군모를 파는 조고마한 점포가 눈에 띠인다 장총을 질머진 채 두 소련군이 그 가개 아페서 완장을 골르고 가격을 흥정하고 있다. 새로 설립된 북조선중앙은행(北朝鮮中央銀行) 아플지나 대동교(大同橋)쪽으로 발거름을 옴겻다 여기도 보안서원이 오고가는 시민을 감시하고 있다

 

3월도 중순이 훨신 넘었건만 날세는 그대로 추웟다.『북쪽손님이 오시드니만 날세까지 돌변 햇는 걸』하고 슬쩍 우서버리는 담화가 기자의 귀청을 울렷다 기후까지 소련식이냐 하고 기자는 혼자 우섯다. 강물도 흐렷다 모란봉 을밀대도 바람 속에 맴도는 것 같앗다 이 강을 오르나리든 검은 석탄배 네댓척이 강 건너 사장에 올라안진 채 동민(冬眠)을 게속하고 있다.

 

저녁을 먹고 나서 영화구경이라도 가보자고 하니 친구가 반색을 하며 말린다。바로 그때였다 아조 가까운 곳에서 총소리가 낫다 방안에 안잣든 사람들의 얼굴에는 긴장한 비처 돌앗다 잠깐 침묵이 게속되였다. 부억에서 설거질하든 친구의 부인도 놀랫는지 한참동안 그릇소리가 나지 안앗다『헛방 같은데.』하고 등무의 입에서 판결이 나린 다음에야 안심들하였다.등무는『이러케 마음을 조리고서야 어디 살 수가 있어야지』하고 허두를 내노코 자기 집도  삼팔이남으로 이사가겠다는 것이였다。


이곳에서는 여섯시 반만 되면 상점문은 불이나케 다다버리고 시민은 일곱시가 되면 거리에 나다니기를 꺼린다고 한다. 친구의 부인은『살아야 사는 것 같어야지요』하고『이웃집 순자네도 며칠 전에 서울로 이사갓다고』기자 보고 들으라는 것보다 자기 남편의 의견을 슬적 떠보는 것이였다. 친구는 비단 자기네뿐 만아니라 적어도 평양사람의 대부분이 떠날 수 있으면 삼팔 이남으로 가겟다는 사람들뿐이라고 들려주었다 부인은『벌서 간 사람은 얼만데요』라고 이 사□울 증명한다.


 평양의 민심은 말할 수 없는 불안을 품고 이대로 있다가는 이 불안에 눌리워 질식해 죽겟다는 것이 그 친구의 말의 전부였다。기자는 이 불안의 원인이 어데있는가를 물었드니『기자자격이 없구만 그래 육감으로 알지 못해 이제 총소리도 들엇겟지』라고 말문을 내노코는  보안 행정이 너머나 탄압적이라는 것을 비롯하야 이것저것 들려주었다. 그 중에는 십오륙세의 소년들을 모아 무□소년단을 조직하야 밤이면 이집저집에 보내여 탐정을 시켜온다고 한다。그 말을 듯고 기자는 온몸에 소름이 쪽 끼첫다。(게속)

 


4.국경 아닌 국경『삼팔선』이북답파기【4】,1946년 4월 9일자 2면.

 

평안반 본사특파원 KK생, 지하실 속에서 “애국가”, 민중의 지도자는 어디 갓나?, 전기관(全機關)은 인위(人委)서 운영

 

선교리(船橋里)환차정류소 채 못가서 제7인민병원(人民病院)이라는 간판이 눈에 띠웟다 제7이 있으니 제1도 있겟고 혹은 제10도 있으리라고 생각하였다

가치가든 친구는『이북에 약품이 적어서 통제하는 뜻으로 제7호니 멧호니 부친 줄 아나 그런 것이 아니고 공산주의사회제도를 만들기 위한 준비공작이야 이제 탁아소(托兒所)만 되면  볼장은 다본걸 멀 그래』


기자는 친구의 해설이 억측이기를 바랫다. 그러나 행정기관은 물론 초등교육기관에도 인민학교라고 간판을 내건 것을 보면 삼팔이북의 정치의 지향이 어되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인민! 이 두 글자가 삼팔이북에 류행되기는 8·15도 훨신 지난 10월 중순경이라 한다 작년 10월 10일부터인가 평양에서 개최된 제1차 5도 임시정치위원회(그때는 인민이라는 글자는 석겨 있지 아니하였다) 이후부터 인민이라는 두 글자는 세도하기 시작하였다한다『모-든 것을 인민의 손에 인민의 손으로』라는 구호밋테 나날이 달라가는 평양의 자태를 발견할 수 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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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dongne.donga.com/2013/04/30/d-story%e2%85%a1-%ec%9d%b4%eb%b6%81%eb%8b%b5%ed%8c%8c%ea%b8%b01/

 

 

 


[ ...... 우리의 조국은 단하나 노동자농민의나라 소련뿐이라는 공식적기계적민족파괴의 불길한 암운이 이북의 천지를 뒤덮으려 .........    ]

 

1949.1.4. 동아일보


이북동포에 보내는 글월

이헌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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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잘 압니다. 나는 내 눈으로 분명히 보았읍니다.  8.15 해방 이후  함경남북도, 평안남도, 황해도를 거쳐 오는 동안 이북의 우리 동포들은 이남의 동포보담도 오히려 더 열렬하고 더 씩씩하게 민족정신을 발휘했고 태극기를 높히 쳐드렀든 것입니다. 소련의 붉은 ㅇㅇ가 ㅇㅇ해 오는 것을 환호하면서도 속(손?)에는 태극기를 드렀고 입으로는 대한독립만세를 외첬든 것입니다.인제야 왜놈들이 다몰려 나간다고 열기를 띠고 치안과 민심수습에 활약하였읍니다.

 

그러나 나는 또 한가지 사실을 보았읍니다. 과거의 사회주의운동하던 이들중에서 새로운 사대주의가 소련에  문(영?)합하는 태세를 가추고 나왔다는 것입니다.농민조합,노동조합을 결성하여 토지는 농민에게 사유재산금지 노동자여 단결하라는 등의 구호가 소련군대진주와 더부러 여기저기서 일어낫든 것도 사실이였읍니다. 여기에 우리민족으로서의 불행의 씨가 싻트기 시작한 것입니다.소련적인 계급공산독재의 깃빨을 내들고 민족을 무시하고 국경을 초월한 아니 우리의 조국은 단하나 노동자농민의나라 소련뿐이라는 공식적기계적민족파괴의 불길한 암운이 이북의 천지를 뒤덮으려 드렀던 것입니다.이남에서 통역관이 군정3년을  망쳐 놓드시 이북에는 이러한 맹목적 공산당 압재비로 하여서 현실과 민정을 무시하는 학정이 계속 강화처절화되어 왔든 것입니다.


그러나 진실로 조국을 사랑하는 이북 일천만동포 여러분 하로 바삐 철의 뇌옥에서 해방되기를 갈망하고 있는 여러분, 최후의 피한방울을 흘려서까지 자유와 조국을 찾으려는 이북동포 여러분 진실로 여러분 앞에 제2의 해방의 날은 올 것입니다.그는 목첩에 급하였다고도 할 수 있읍니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철리를 가슴 깊이 깨다를 날이 닥쳐 올 것입니다. 우리는 동족상잔을 원하지 않습니다. 이북 괴뢰정권은 항시 남벌하여 서울에 적기(별칭 인공기)를 휘두르는 날이 멀지 않다고 호언하는 사실도 잘 압니다. 죽일 사람은 누구요  죽는 자는 누구며 또 원수는 누구입니까?  원수를 미워할지언정 죽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우리는 해방후 왜적의 눈앞에서 뵈여준 그야말로 대국민의 금도를 가젓든 우리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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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8의 絞首線問題도 蘇聯의 거부에 의하여 장벽이 상존한 채 철폐가 무망이니.......

 ...... 국제적 公理인 의사발표의 자유까지도 부정한 蘇聯의 독단을 .......  ]

 

[......  敵은 우리 墻內에..... 惡質共系의 叛逆言動을 일소하여 民族綱紀의 숙청을.......  ]

 


조선일보, 동아일보 1946년 05월 13일   


독립戰取국민대회가 개최

 

반 만 년의 찬란한 역사와 한 피로 자라온 배달민족의 명예를 피와 땀으로 뭉치고 뭉쳐 우리의 살길을 찾기 위하여 수 개월을 두고 세계공약에 의하여 우리의 자주정부를 수립하여 줄 미소공동위원회의 추이를 고대하고 은인자중하여 오던 애국렬에 불탄 10여 만의 애국시민은 서울동쪽언덕에 운집하여 하늘이 찢어져라 부르짖은 (略)


 獨立戰取國民大會는 12일 오후 1시 반부터 서울운동장에서 개최된 바 대회는 먼저 국기에 경례를 하고 애국가 합창에 이어 선열에 대한 경건한 묵도를 드린 다음 대회 회장인 吳夏英으로부터


 “우리는 미소공동위원회에서 어떤 기쁜소식이 나오지나 않나 하여 매일같이 라디오 신문에 온 신경을 총집중하였던 것이나 오늘날에 접한 소식은 과연 우리를 기쁘게 하였던가. 해방이래 9개월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오늘 바라고 바라던 기쁜소식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이때 우리는 다시 한 번 각성하고 주먹을 힘있게 쥐어 싸워 나가지 않을 터인가.


 오늘 이 자리에 모인 여러분은 사느냐 죽느냐 하는 이 중대한 시기를 당하여 우리의 나라를 우리의 손으로 완전자주독립시켜 4천년래 이어받은 혁혁한 역사를 자손만대에 물리지 않을 터인가. 자! 전취하자. 완전자주독립을”


하는 열열한 개회사가 있자 곧 이어 咸尙勳으로부터 미소공동위원회진상보고가 있고 뒤따라 조선민주당 白南弘의 서북조선진상보고가 있었으며, 선언문을 申均이 결의문을 朴永昌이 각각 낭독하였다. 그리고 다음의 순서로 각 단체대표의 결의를 표명하고 동 오후 4시 경에 만세 3창으로 뜻깊은 대회를 마치었다.

 

◊ 各團體代表 決意表明

 

大韓獨立促成全國靑年總聯盟 韓旻洪, 基督敎全國靑年聯合會 姜元龍, 大韓獨立促成愛國婦人會 黃基成, 大韓獨立促成勞動總聯盟 金龜, 大韓獨立農民總聯盟 方致規, 美蘇共同委員會對策全國國民總聯盟 金一, 反託學生總聯盟 李哲承, 大韓獨立促成國民會 李重根, 新朝鮮建設同盟 李康勳, 文學家協會代表, 學生獨立戰線代表

 

◊ 大會宣言

 

모 단체 고집으로 인하여 우리의 절실한 요구는 위기를 통하여 흐르는 先代의 긍지를 받들어 깊이 자손만대의 번영을 염원하는 우리는 이에 獨立戰取國民大會를 개최하고 3천만 대중의 이름으로써 밖으로 34隣諸邦의 숙고를 구하고 안으로는 혈족동기의 궐기를 촉하여 엄숙히 선언하는 바이다.


國際公約에 의하여 보장된 우리 臨時政府의 수립을 위하여 개최되었던 美蘇共同委員會는 蘇聯의 번복에 의하여 시일을 徒費한채 무기로 정회되었으니 세계의 公眼은 이를 어떻게 보려고 하는가 國土와 國民을 兩斷하고 나아가 國是와 國權을 兩分케 한 38의 絞首線問題도 蘇聯의 거부에 의하여 장벽이 상존한 채 철폐가 무망이니 세계의 公議는 이를 어떻게 논하려 하는가?


자주독립의 이념과 배치되는 신탁관리를 우리에게 강요하려는 蘇聯의 權謀와 인류적 특권이오 국제적 公理인 의사발표의 자유까지도 부정한 蘇聯의 독단을 어디다 문책하며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


外力의 제압에 血과 肉이 제물이 되었던 40년 통한을 回憶하고 다시금 外力의 方寸에 形과 體가 左右되려는 현하의 苦境을 직시할 때 우리는 他를 책하여 허물을 3자에게 찾기 보다도 源由를 자신에게 살피어 內省할 필요를 느끼나니 究其本源의 길이 여기에 있다고 믿는 까닭이다. 보라! 來寇보다도 敵은 우리 墻內에 있고 外傷보다도 菌은 우리 體內에 있으니 시공이 자별한 민족적 독자성을 무시하는 叛逆徒黨의 존재가 그것이며 他方에 追尾하여 外侮를 誘致한 惡質共系의 언동이 그것이다. 민족적 자아의 존엄을 모독하여 受託의 妄論을 공언하고 민족적 巨役인 광복의 전야에 처하여 분쟁을 시사하니 이를 가히 참을 수 없다 할진대 무엇인들 못참을 것이랴?


실리만을 취하여 互全에 苟安함이 본래 우리의 義가 아니오, 명분만을 위하여 玉碎로 나감도 우리의 策이 아니나 그러나 民族正氣의 주축은 부동이라 行坐進退의 한계가 자재하여 자율정체의 주권과 독립국가의 면목을 고수할 背水陳頭의 일선이 있으니 이는 곧 우리의 생명이다.


이를 世界에 명시하여 輿論을 수긍케 할 자가 누구이며 이를 永劫에 護持하여 만민을 일관케 할 힘이 무엇인가! 오직 自我요 오직 自力이다. 自尊·自持의 기초가 바로 여기에 있고 自立·自行의 진로가 바로 여기에 있으며 自助·自勉의 방책이 바로 여기에 있다. 전지 전능을 이 일점에 응결시키고 총의 총력을 이 일선에 集注시키어 解放朝鮮을 거룩하게 하고 光復朝鮮을 빛나게 하자. 이에 5개 조의 결의를 들어 3천만 겨레의 심장에 격한다.

 

獨立戰取國民大會

決意5箇條


1) 美蘇共同委員會의 책임을 규명하여 국제여론의 심판을 구함

2) 自主政府의 자율적 수립을 촉진하여 民意의 歸一을 기함

3) 38장벽의 철폐를 목표로 國民動員의 실적을 擧함

4) 惡質共系의 叛逆言動을 일소하여 民族綱紀의 숙청을 圖함

5) 友邦善隣의 협력하에 경제건설의 매진을 요함

 

大韓民國 28년 5월 12일

獨立戰取國民大會


조선일보, 동아일보 1946년 05월 13일

 

 

 


      1946.10.7.  합작7원칙


[ .... 합작7원칙은 .......

  7) 전국적으로 언론·집회·결사·출판·교통·투표 등 자유를 절대 보장하도록 노력할 것 ........      ]

 

제목
한민당 김준연의 「합작에 대한 나의 고찰」(2)   

연월일
1946년 12월 01일   

출전
동아일보 1946년 12월 03일   


한민당 김준연의 「합작에 대한 나의 고찰」(2)

 

합작7원칙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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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전국적으로 언론·집회·결사·출판·교통·투표 등 자유를 절대 보장하도록 노력할 것

 

우측 8대책 합작7원칙을 소개하였으니 독자의 편의상 좌측에서 제출한 5원칙도 그 전문을 게재하기로 한다.

 

첫째 조선의 민주주의 독립을 보장하는 삼상회의 결정을 전면적으로 지지함으로써 미소공동위원회 속개촉진운동을 전개하여 남북통일의 민주주의임시정부 수립에 매진하되 북조선민주주의민족전선과 직접 회담하여 전국적 행동통일을 기할 것


둘째 토지정책(무상몰수·무상분여) 중요산업국유화 민주주의적 노동법령 및 정치적 자유를 위시한 민주주의 기본과업 완전에 정진할 것


세째 친일파·민족반역자·팟쇼·반동거두들을 완전히 배제하고 테러를 철저히 根滅하며 검거·투옥된 민주주의 애국동지의 즉시 석방을 실현하여 민주주의적 정치운동을 활발히 전개할 것

넷째 남조선에서는 정권을 군정으로부터 인민의 자치기관인 인민위원회에 직접 다양하도록 기도할 것


다섯째 군정고문기관 혹은 입법기구 창설에 반대할 것

 


우측의 8기본대책·합작7원칙·좌측의 5원칙 이 삼종 문서는 우리 조선의 정치사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될 것을 나는 믿는 터인 고로 전부 원문대로 여기 게재하여 주는 바이다.


좌측에서 제안한 원칙으로 말하면 요컨대 남부조선에 있어서 북부조선에 있어서와 꼭 마찬가지로 공산주의적 제도를 실시하자는 것이니 그들의 주의에 가장 충실한 것으로써 도리어 경의를 표하고자 하는 바이다.


좌측의 대표로 또 개인자격으로 관계하고 있다는 呂運亨氏는 작년 8월 15일 오전 10시경 경성 창덕궁 경찰서 앞에서 내게 선언하기를 ‘공산혁명으로 일로 매진하겠오’ 하였다. 그 소리가 지금도 내 귀에 쟁쟁하다. 우리는 사태를 어디까지든지 사실대로 파악하고 해결방법을 강구하여야 되었다. 조선을 공산주의화하여 가지고 소련방에 가입시켜야 할 것인가? 그렇지 아니하면 참으로 독립을 꾀하여 조선민족의 행복을 목적으로 하고 나아갈 것이가?


혹자는 말하리라 呂運亨 氏를 위시하여 좌측에서는 모두 다 민주주의를 말하지 않는가? 과연 좌측에서는 이 민주주의란 말을 쓰기를 퍽 좋아한다.

 

그러나 나는 동일한 용어에 종종의 의의가 있다는 것을 지적하여 두지 아니할 수 없다. 즉 좌측에서 사용하는 민주주의는 공산주의를 지칭하는 것이고 팟쇼란 말은 非쏘비에트 신조에 대한 비난의 말이다. 이 점에 대하여 근자에 영국노동당 당수이고 총리대신인 애틀리氏가 명확히 지적한 바이고 今般 국제연합 회의시에도 민주주의란 말을 세계공통되는 의미로 해석하자고 하는 것이 고조되었다는 것을 우리가 기억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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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1946년 12월 03일

 

 

 

      1946.4.30.

 

[ .... 太極旗는 大韓의 國旗요 愛國歌는 大韓의 愛國歌이다.

      赤旗는 蘇聯의 國旗요 革命歌는 蘇聯의 革命歌이다 .......  ]

 

[ ..... 어째서 양심이 없으며 의리가 없으며 판단이 없는가? .......

  ..... 모두 쌀밥 먹고 쓴 것인가? ........   ]

 


반민족언론기관대책위원회, 일부신문을 배격하는 격문 발표   

연월일
1946년 04월 30일   

출전
전단 1946년 04월 30일   

 


반민족언론기관대책위원회, 일부신문을 배격하는 격문 발표

 


檄!

 

反民族新聞들아 너희 罪를 모르느냐?

反民族記者들아 너희 罪를 모르느나?

反民族新聞印刷職工들아 너희 罪를 모르느냐?

너희들은 大韓疆土에 살지 아니하느냐?

너희들은 檀君子孫이 아니냐?

너희들은 大韓獨立을 싫어하느냐?

 

어째서 40여 년이나 海內 海外에서 독립운동으 평생을 다하는 李承晩 博士를 강도나 절도처럼 막말로 욕설을 써서 신문에 기재하며 金九主席이하 臨時政府要人들에게 무쌍한 욕설을 역시 써서 신문에 기재하며 己未獨立宣言記念全國大會의 記事는 일언반구도 기재치 아니하며


民族分裂의 책임은 어째서 李承晩博士나 金九先生이나 己未獨立宣言記念全國大會 주최측이나 韓國民主黨이나 國民黨이나 소위 右翼에만 돌린다는 기사로 선전하며 밤이나 낮이나 ○○黨만 옳고 좋은 일 하고 민족을 바로 지도하고 독립운동을 하고 ○○黨이나 ○○戰線이나 人民共和國이나 ○○○이나 ○○○이나 모두 좋은 일 하는 政黨이요 모두 바른 일 하는 사람이요 모두 愛國獨立黨이요 모두 獨立運動者요 모두 우리의 지도자란 말인가? 李承晩博士外 우익진영은 모두 親日派요 팟쇼요 모두 民族反逆者요 모두 非愛國者요 모두 獨立妨害者란 말인가?


소위 동방예의지국이란 명칭을 듣고 5천년 역사를 등지고 태어난 제위여! 어째서 양심이 없으며 의리가 없으며 판단이 없는가?


그대들이 지금까지 기재하여온 기사가 모두 정확하고 무도 愛國的이요 모두 獨立運動이요 모두 民族地圖요 모두 良心的이요 모두 쌀밥 먹고 쓴 것인가?


新聞의 사명을 완수하기 위하여 썼으며 신문의 가치를 올리기 위하여 썼으며 우리 민족을 광명한 길로 지도하기 위하여 썼으며 우리의 완전독립을 위하여 썼으며 사실을 표명하기 위하여 썼으며 보도를 정확하기 위하여 썼는가?

 

우리는 그대들을 욕도 아니하고 책도 아니한다. 다만 그대들의 양심에 묻는 것 뿐이다. 그대들의 行動의 是非判斷은 대중에게 맡기고 神明에게 돌린다.

神經이 있고 感覺이 있고 理念이 있다면 금일 우리의 처지를 당하여 共産黨이나 人民黨이나 國民黨이나 韓民黨이나 各黨의 주의·정책만을 고집하고 서로 욕하고 서로 방해하며 서로 격투할 때인가?

과거의 원수도 오늘에는 악수하며 과거의 미워하던 親日派도 오늘에는 악수하며 과거의 反逆者도 오늘은 악수하며 과거에는 主義政策으로 싸우던 것도 오늘에는 참고 참아서 合心合力하며 협동보조하며 친애하며 통일하여 우리의 난관을 돌파하여 獨立을 완수하고 민족에게 행복을 누리게 하여 千秋萬代의 遺恨이 없도록 하는 것이 옳지 아니한가?

 

李承晩博士가 통일하자고 하여 獨立促成中央協議會를 조직함에도 탈퇴하고, 신탁통치를 반대하자는 3천만 대중의 이상에 배치되는 託治支持라는 간판으로 民族的 수치를 사고, 己未獨立宣言記念도 별개로 주최하고, 非常國民會議에도 불참가하고 별개로 민족전선을 구성하고, 臨時政府를 배격하고 別로 人民共和國을 창조하여 민중으로 하여금 현혹케 하니, 이것이 모두 누가 한 것이며 누가 民族分裂을 시킨 것이며 누가 정당하다고 생각하는가?


아! 南山廣場에서 3,000명쯤 모인 것을 30만 대중이 모여 記念行事를 하였다는 것이 확실한 사실이며 정당한 기사며 양심에 허락된 기사인가?


이것은 누구를 위하여 기재한 기사며 어떤 민족을 위하여 선전한 기사이며 우리 獨立을 위한 기사인가? 大義名分은 그만두고 共産만하여 배만 채우면 사는가? ○○의 託治나 聯邦이나 되면 우리 민족이 안락한 생활을 하고 문화가 발전하는가?

 

아-한탄하도다 그들의 행동과 이념이여 각성할지어다!

아-3천만대중이여 정당한 비판을 내려라!

정당한 指導를 쫓아라! 정당한 理念을 가져라! 우리는 목하 백척간두에 오른 위급존망지추가 아닌가!

 

自我를 잊어라! 利慾을 버려라! 自家主義를 고집말라! 自黨政策만 주장말라!

東으로나 西로나 우리 민족을 위한다는 理念과 우리 獨立을 완수하겠다는 목적으로 모두 합하여라! 허물을 남에게 돌리지 말아라!

우리는 羊과 같은 자손으로 하여금 西伯利亞나 우랄山麓에 가서 살게 하기는 싫다. 우리는 꽃과 같은 우리의 婦女로 하여금 노란 머리 노란 눈을 가진 子女를 낳도록 하기는 싫다!

 

그대들의 책임이 중한 줄을 알아라. 대중은 참으로 현명하고도 어리석다. 新聞報道에 따라 東으로 가라하면 東으로 가고 西로 가라하면 西로 가는 맹목적 행동이 많다. 우리 민족의 행복과 독립완수는 오직 그대들 붓 끝에 매인 것을 아는가? 고쳐라! 지금부터라도 고쳐라! 改則爲善이라 고치면 과거의 허물은 다 씻어버린다! 反省하여라! 용감하여라! 일층 바른 길로 노력하여라! 非國民的 反民族的 행동을 잘 구별하여라!

 

警醒한다 各 新聞의 집필자들이여!

아-정당한 판단을 내려라 3,000만 형제자매여!

 

太極旗는 大韓의 國旗요 愛國歌는 大韓의 愛國歌이다.

赤旗는 蘇聯의 國旗요 革命歌는 蘇聯의 革命歌이다.

太極旗를 들고 愛國歌를 불으면서 人民共和國萬歲를 불으는 것은 무슨 짓이며?

赤旗를 들로 革命歌를 불으면서 ○○○萬歲를 불으는 것은 무슨 일인가?

 

半島江山에서 나서 컸으며 檀君의 피를 받았으며 한글을 배웠으며 쌀밥을 먹으며 한복을 입는 우리는 36년 간 倭賊의 폭정을 해탈하고 聯合國의 후의로 독립을 주겠다는 보도를 듣고 감사하겠거늘 나도 너도 잘났소 나는 愛國者요 나는 영웅이요 나는 지도자요 하고 손을 내밀어서 참으로 어떤 자가 정말 지도의 자격이 있는지 모를 지경이다. 3,000만의 손은 하나가 되고 3,000만의 발은 하나가 되고 3천만의 눈은 하나가 되고 3천만의 귀는 하나가 되고 3천만의 맘은 하나가 되고 3천만의 입은 하나가 되어야지 가고 오고 주고 받고 보고 듣고 생각하고 말하는 것이 모두 한결같고 한 덩어리로 뭉쳐서 한 사람의 행동이 된다면 우리에게는 光明이 있고 幸福이 있고 正義가 있고 영광이 있고 독립이 있을 것이다.

 

한 가닥의 실이 무슨 힘이 있으며 한 개의 돌이 무슨 城을 쌓는가?

우리는 모두 주초가 되어도 못쓰고 모두 진동이 되어도 못쓰고 모두 들보만 되어도 못쓴다. 각각 힘에 적당한 자리로 찾아가거라 모든 것이 합하여야 함도 있고 城도 쌓고 집도 되는 것이다.

 

檀紀 4279년 4월 일

反民族的言論機關對策委員會

 

주지 말아라! 기사도 광고도 반민족적 신문에

보지 말아라! 거짓말 신문을 저-○○新聞 저-○○報 ○○新聞

 

전단 1946년 04월 30일

 

 

 

 

  *  [.... 절대한 언론자유가 있는 것이다 ......

      .... 출판에 대하여 검열같은 것을 하려 하지도 않는다 .......]

 

  1945.9.12.  매일신보 .


 하지, 기자회견에서 미군 施政方針을 발표

 


11日 오후 2시 40분 존R.하지중장은 아놀드소장과 헤이워드중좌를 대동하고 시내 각 대표신문기자들과의 회견석상에서 제1성을 발하였는데 (略)사령관과의 회담은 2시간 40분에 亘하였으며 (略) 이날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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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이 진주해 온 후인 현재 조선에는 문자 그대로의 절대한 언론자유가 있는 것이다. 미군은 조선사람의 사상과 의사발표에 간섭도 안하고 방해도 안할 것이며 출판에 대하여 검열같은 것을 하려 하지도 않는다. 언론과 신문의 자유는 여러분들을 위하여서 대중의 論을 제기하고 또한 여론을 소소하게 알리는데 그 직능을 다 해야 할 것이다.


이와같이 미군은 언론자유에 대하여 취재를 방해하고 검열을 하려하지는 않으나 그것의 정당한 의미의 치안을 방해하는 것이라면 이런 경우는 별도로 강구하려 한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필요까지는 없으리라고 믿는다. 나는 조선에 온 뒤로 조선의 역사와 조선의 신문사를 통해서 조선이 어떠한 지경에 처해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그런만큼 나는 바라노니 부디 여러분은 이 기회를 조선신문사상의 일대 혁신전환단계로 삼아 주기를 바란다.


미국의 제 신문과 같이 신문의 역할을 다 하는데 있어서는 대중을 지도하고 여론을 일으키는 지대한 역할을 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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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7.9.

 

[ ...... 세계 프로레타리아 계급은 위대한 소련의 지도하에 이 강력한 제국주의 미국을 격파할 것이다.

       진보적 민주주의의 위력하에는 원자탄은 너무나 무력한 것이다. ........


  ...... 소련이 조선은 미국의 확장주의에 투쟁하는 군사기지가 될 것이며 우리는 미국과 싸워야 한다 ........    ]

 


[ ...... 일인도 용서하여서는 아니된다 .......

  ...... 인도상 또는 安價한 민족주의를 위하여 조선의 반동분자에게 동정하여서는 아니된다. ........


  ...... 우리의 적에 대하여서는 무자비하여야 한다. .........     ]

 


제목
駐서울UP특파원 스탠리 리취, 북조선의 무력행동 계획 발표   

연월일
1947년 10월 25일   

출전
조선일보, 동아일보 1947년 10월 26일   


駐서울UP특파원 스탠리 리취, 북조선의 무력행동 계획 발표


先月 남조선으로 도망하여 온 한 前北朝鮮관리는 소련에 의하여 훈련 장비된 북조선 군대는 미소 양 점령군의 철퇴와 동시에 조선을 원조코자 행동을 일으키고 조선을 제18소련공화국으로 할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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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은 9월 6일 평양에서 개최된 긴급비상회의의 모양을 상설하였는데 동 석상 내무부장 朴一禹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이 회의는 서울에서 9월 26일 행한 쉬티코프 상급대장의 기획된 동시철퇴 제안을 심의하기 위하여 소집된 것이다. 余는 모든 보안대 지휘관 제위가 莫府決議에서 약속된 임시조선 민주정부 수립후 남조선으로 향할 것을 명기하도록 요망한다. 제위는 명령이 내리는 대로 행동할 준비를 갖추어야 한다.”


역시 이 회의에 출석하였던 북조선인민군사사령관 崔用健은 전략을 설명하고 모든 俘虜 소위 남조선경찰대 기타의 무장부대원은 사살하여야 하며 일인도 용서하여서는 아니된다고 훈령하였다. 남조선 반동분자에 대한 전쟁이 시작되는 때에는 우리는 남조선에 대한 송전을 중단할 것이며 이는 우리의 공격을 용이케 할 것이다. 세계 프로레타리아 계급은 위대한 소련의 지도하에 이 강력한 제국주의 미국을 격파할 것이다. 진보적 민주주의의 위력하에는 원자탄은 너무나 무력한 것이다. 인도상 또는 安價한 민족주의를 위하여 조선의 반동분자에게 동정하여서는 아니된다. 그들은 우리의 적에 대하여서는 무자비하여야 한다.


윤은 또한 “소련이 조선은 미국의 확장주의에 투쟁하는 군사기지가 될 것이며 우리는 미국과 싸워야 한다고 조선인에게 말하고 있으므로” 북조선요직에서 탈주하였다고 말하였다고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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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8.1.


소련의 (UN委員團) 북조선 입경거부에 대한 각계 견해
 
 

게재지명 경향신문
 
게재일자 1948년 01월 25일
 
 
날짜 1948년 01월 25일
 
 
▷金九 談:우리 3천만의 염원은 南北統一 총선거이다. 그러나 蘇側의 거부가 있었다면 이는 최대의 불행이다. 차후문제에 대해서는 지금 言及하기를 삼가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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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이 해결할 문제는 ... 38선을 철폐하는 문제라고 강조하고


   38선을 만들어 한국을 분단케 한 것은 일본이 아니라 소련이 아니냐고 격렬한 어조로 ......   ]

 

1949.2.22.


鄭翰景 駐日한국대표단장, 한국이 해결할 문제는 對馬島나 대일배상 요구가 아니라 38선 철폐라고 언급
 
 
게재지명 대동신문
 
 게재일자 1949년 02월 23일
 날짜 1949년 02월 22일

 


[동경에서 薛특파원 22일발 합동] 對日관계에 관한 한 주일한국대표단측의 태도는 본국측과 다소의 거리가 있는 것 같이 보인다. 주일한국대표 단장 정한경박사는 2월 초 公館으로 왕방한 기자에게 한국이 해결할 문제는 대마도나 대일배상 문제가 아니라 38선을 철폐하는 문제라고 강조하고 38선을 만들어 한국을 분단케 한 것은 일본이 아니라 소련이 아니냐고 격렬한 어조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일본은 현재 무기생산이 금지되어 있는 만큼 일본이 隣邦 諸國을 재침략할 가능성은 없는 것이다. 이는 소련과 공산당의 선전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대마도 반환을 지금 한국에서 요구한다는 일은 나는 알 수 없는 일이다. 한국측이 고려할 문제도 대마도 문제가 아니라 38선 철폐와 통일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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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6.7.

 

  [.... 스탈린이 김일성과 박헌영을 불러 직접 면접을 보고 김일성을 북한의 지도자로 선택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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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며칠 전 黃長燁 선생과 대화하다가 중요한 역사적 진실을 알게 되었다. "스탈린이 김일성과 박헌영을 불러 직접 면접을 보고 김일성을 북한의 지도자로 선택했다는 주장이 러시아측으로부터 제기되고 있다(아래 자료 참조)"는 이야기를 꺼냈다. 黃 선생이 빙긋 웃더니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김일성이가 그런 말을 합디다. 제가 직접 들었어요. 스탈린한테 두 사람이 불려가 시험을 쳤다는 겁니다. 스탈린이 출제한 것을 가지고 두 사람이 각각 다른 방에 들어가 답안을 썼다고 해요. 여기서 김일성이 쓴 답안이 합격된 셈이지요"
 


 黃 선생의 이 증언은, 김일성으로부터 직접 들은 내용이다. 따라서 학자들이 하는 주장과는 차원이 다르다. 당사자의 증언이기 때문이다.


김일성, 박헌영 두 사람이 불려간 시기에 대해서 러시아 전문가들은 1946년 7월이었다고 증언하다. 이때 박헌영은 남한에서 활동하고 있었으니 비밀리에 북한을 경유하여 모스크바로 갔다는 이야기이다. 그는 그해 10월에 미 군정의 추적을 따돌리며 북한으로 피신한 뒤 돌아오지 않았다. 데일리 엔케이 손광주 편집국장은 자신의 칼럼에서 이렇게 썼다.


 
 <김일성과 박헌영은 스탈린 앞에서 시험을 본 적이 있다. 누가 공산주의 지도자로 더 적합한가를 놓고 시험을 본 것인데, 사실은 누가 더 스탈린에게 충직한가를 따져본 것이다.

당시 스탈린이 무슨 문제를 ‘출제’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시험이 끝난 후 스탈린은 박헌영의 답안지까지 김일성에게 주면서 “알아서 처리해라”는 메시지를 보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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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8.1.1.


[ ...... 우리에게 一條의 서광이 있으니 이는 UN 위원단의 내한이다 ............    ]

 

제목 이승만, 김구 등 정계요인 연두사 발표


게재지명 조선일보, 동아일보
게재일자 1948년 01월 01일
날짜 1948년 01월 0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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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九


“우리에게 一條의 서광이 있으니 이는 UN 위원단의 내한이다. 우리는 잠시라도 모든 비애를 잊고 새해에 새손님을 기쁘게 맞이하는 동시 최선을 다하여 그들과 공동 노력할 것이며 수시로 우리의 정당한 주장을 발표하므로서 기어히 우리의 염원을 관철하도록 하자. 따라서 우리가 기대하는 자주독립의 통일정부 수립을 위한 總選擧가 실시된다면 우리는 귀중한 一票를 유효하게 던져야 한다. 우리는 마땅히 新年劈頭에 있어서 과오를 청산하고 먼저 우리 민족이 단결하여 정치·경제·교육의 균등사회를 건설하기 위하여 노력하여야 할 것이며 단결된 역량으로써 UN 위원단도 맞이하고 그들의 도움도 청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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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中將


“1948년 조선국민의 자유의사 발표에 의하여 민주주의적 통일국가 재건을 볼 수 있는 해가 되기를 본관은 진심으로 염원합니다. 위대한 국가를 유지하는데 필수조건인 전국민의 완전한 통일 및 경제와 교육의 발전이 있기를 기원하는 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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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蘇側의 거부가 있었다면 이는 최대의 불행이다 .........    ]

 

소련의 (UN委員團) 북조선 입경거부에 대한 각계 견해
 
 
게재지명 경향신문
 
게재일자 1948년 01월 25일
 
 
날짜 1948년 01월 25일
 
 
▷金九 談:우리 3천만의 염원은 南北統一 총선거이다. 그러나 蘇側의 거부가 있었다면 이는 최대의 불행이다. 차후문제에 대해서는 지금 言及하기를 삼가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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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의 法政大 교수 시모도마이 노부오(下斗米伸夫)가 쓴 '아시아 冷戰史'에 따르면

1948년 4월24일 모스크바 교외에 있는 그의 별장에서 스탈린은 몰로토프와 주다노프 등 소련공산당 간부들과 만나 북한 헌법 제정 등의 절차를 결정했다.

 

  <헌법은 1947년부터 소련헌법을 기초로 하여 준비되었으나, 일부는 스탈린 자신이 집필했고, 또 당초 있었던 임시헌법에서 임시라는 표현을 삭제한 것도 스탈린이었다.


이 회의에는 북한 지도자는 아무도 참가하지 않았다. 소련이 일방적으로 결정했다.


이 4월 회의의 결정에 따라 8월에 조선최고인민회의 선거가 이뤄지고 9월2일에 제1회 회의를 소집했으며, 8일엔 헌법을 채택, 9일엔 인민공화국 창설이 선언되었다.


國名이 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도 러시아語로부터 直譯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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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스탈린은 김구, 김규식이 김일성과 협상 중임을 알고도 이날 밤 정치국이 이 헌법을 승인한다고 결정토록 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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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우리 민족연방제 통일추진회의가 목표하고 있는 ‘연방’의 상대쪽인 북한이 스탈린과 소련 정치국에 의해 성립된 단독정부이며 수령 김일성은 스탈린의 지령을 충실히 수행한 스탈린주의자임을 정확하게 분석해 냈다.

 

 란코프 박사는 특히 ‘우리민족’측이 연방제의 근원으로 생각하는 1948년 4월19~25일까지 평양에서 있은 남북협상이 속칭 4김 회담(남쪽의 김구, 김규식, 북의 김일성, 김두봉)이 스탈린의 지령에 의해 추진되었음을 밝혀냈다.


그는 1946~52년까지 소련 공산당 정치국의 한반도 관련 결정문 (공산당 수뇌부의 지령) 67건을 분석 끝에 북한은 스탈린이 만든 나라며 김일성은 그의 충실한 실행자였음을 결론냈다.

 

남ㆍ북 협상은 1948년 4월12일의 소련 공산당 정치국 지령에 의해 김일성이 제안해 이뤄졌다. 정치국 결정문은 ▲5월에 예정된 남한만의 단독선거를 비난하고 ▲남한과 북한에서 외국군대의 즉각 철수를 주장한 소련의 제안을 지지하며 ▲이후 남ㆍ북 총선거 실시를 촉구하라는 내용이었다.

 

스탈린은 남ㆍ북 협상이 이뤄지고 있던 4월24일 모스크바에 있던 소련의 실질적인 북한 지도자인 소련 점령군 민정책임자 테레니 슈티코프와 함께 몰로코프 외상, 그의 장인인 즈다노프 이념담당 비서를 그의 별장으로 불렀다.


“평양에서 이뤄지고 있는 남ㆍ북 협상은 잘 진행되었다. 북한 주둔 1개 사단과 사령부는 철수하라. 소련 내에 북한 엘리트교육학교의 규모를 늘려라. 일본의 침공에 대비 1개 폭격기 대대를 보내라. 북한에서 현재 심의중인 ‘임시헌법’에서 ‘임시’를 빼라. 헌법 2조에서 권력조항을 ‘당과 인민에 있다’고 바꿔라. 신앙의 자유는 그대로 두고 토지상한은 5~20 헥타르를 넘지 않도록 하라”는 내용을 김일성에게 지령하라고 슈티코프에게 지시했다.


스탈린은 김구, 김규식이 김일성과 협상 중임을 알고도 이날 밤 정치국이 이 헌법을 승인한다고 결정토록 했다. 북한 단독정부 수립은 남ㆍ북 협상의 성공여부와 관계없이 이미 스탈린과 김일성의 계획에는 포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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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 문학의 특징의 또 하나는 사회주의 조국인 소련을 선두로 하는 제 인민민주주의의 국가와 ......

   .....  굳은 단결과 친선과 화목 ... 국제주의 사상을 그 기본으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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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9월 정권의 체계가 갖추어진 다음 북한문학은 냉전 시대의 전개를 반영하는 정의, 예컨대 “조선 문학의 특징의 또 하나는 사회주의 조국인 소련을 선두로 하는 제 인민민주주의의 국가와 전 세계 근로자 인민과의 굳은 단결과 친선과 화목을 표시하는 국제주의 사상을 그 기본으로 하는 문학”과 같이 소련식 공산주의와 유물사관을 비판 없이 추종하는 외형을 보인다.


동시에 정권 주체 세력들의 입지를 더욱 강화하기 위해 1953년 임화, 김남천, 이태준 등 남로당계 작가의 숙청, 1956년 한효, 안함광 등에 대한 반종파 투쟁을 거쳐 문학의 정치주의적 경향이 가속화되기에 이른다. 이 시기의 북한문학은 한반도의 역사 위에 새로운 정치 체제로 등장한 공산정권과 그 이론을 문학과 조합하는 실험적 단계를 거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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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년 4월 27일, 즉 5·1 節을 며칠 앞두고 김일성은 ‘美·英帝國主義의 새로운 世界戰爭’도발의 준비를 공격하면서 ‘프를레타리아國際主義에 관한 레닌-스탈린的 學說’을 극구 찬양했다. 그리고 이에 대한 ‘忠實性’으로 “朝鮮人民을 교육하는 것을 우리 黨의 제1의 義務로 생각하며 가장 중요한 任務로 인정한다” 註 117  

고 했다. 또한 이와 병행하여 ‘資本主義社會의 환경 속에서’ 또는 ‘外來帝國者들의 援助下에서’ 朝鮮을 독립시켜 보려는 조선의 ‘부르주아民族主義者들의 시도’를 프롤레타리아國際主義의 이데올로기에 의하여 맹렬히 비난했다. 註 118  

 

 그리고 그는 스탈린의 모스크바中心의 帝國主義的 支配體制를 “互相尊重과 兄弟的 協力을 기초로 한 民主陣營 國家간의 관계”라고 규정하면서 이것은 “프롤레타리아國際主義에 관한 레닌-스탈린의 學說의 영향에 의하여 過去의 歷史에서 보지 못했던 國際關係의 형태, 즉 共產主義的 未來의 國際關係의 原型이 형성되고 있다” 註 119  

고 스탈린을 정당화했다. 나아가서 그는 당시의 5·1節을 “平和와 幸福을 위한 투쟁에서 우리들을 항상 鼓舞 激勵하는 우리들의 지도자요 스승이신 스탈린同志에 대한 각국 인민의 끝없는 敬愛를 시위하는 祭典으로 만들라!” 註 120  

고 호소했다.

 

1952년 8·15해방 7주년을 맞이하여 金日成은〈프라우다〉에 기고한 글에서 스탈린에 대한 굴종을 서슴지 않고 공언했다.


…우리 人民의 성공적 解放闘爭에 있어서 제1차적 意義를 가지는 가장 중요한 要因은 兄弟的 쏘베트人民과 또 쓰딸린 同志가 몸소 우리 共和國에 주신 精神的·政治的 援助이다. 쓰딸린 同志는 …우리 人民에게 慈父와 같은 배료를 베푸시었다. 우리 人民은 쓰딸린 同志를 자기의 아버지라고 부르며 구원자라고 부르는 것을 자랑으로 삼고 있다.… 註 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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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db.history.go.kr/item/level.do?itemId=kn&setId=319211&position=0

양호민 北韓政治史硏究 序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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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빨리 정식으로 소련의 가맹공화국의 하나로 들어가면 좋겠다는 것이 일반적인 생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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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 김일성이 세운 제도는 스탈린식 독재체제였습니다. 김일성이 세운 것이 아니라 소련 고문들이 나왔고, 소련태생의 한인 2세들이 나왔습니다.
정권기관으로부터 시작해서 경제, 문화기관에 전부 나왔습니다. 그들이 소련을 모방한 제도를 북한에 세웠습니다.

 

그 시기에는 김일성도 자주적인 생각을 전혀 할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빨리 정식으로 소련의 가맹공화국의 하나로 들어가면 좋겠다는 것이 일반적인 생각이었습니다.


후에는 무슨 주체사상을 항일 빨치산투쟁 할 때부터 생각했다는 소리도 나오지만, 그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고 6·25전쟁까지는 완전히 소련고문들이 와서 당, 정권기관, 경제·문화기관을 전부 지도했다고 보는 것이 옳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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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25 남침계획은 바로 이 소련군 고문단이 직접 초안을 작성한 것이며 그 명칭은 「선제타격 작전계획」이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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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은 이어 그해 5월 북한에 파견된 군사고문단을 전쟁경험이 풍부한 인물로 전원교체했다. 수석 군사고문은 스미르노프소장에서 독소전쟁영웅인 바실리예프중장으로 바뀌었다.


6·25 남침계획은 바로 이 소련군 고문단이 직접 초안을 작성한 것이며 그 명칭은 「선제타격 작전계획」이었다. 김일성은 이 작전계획서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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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화신백화점에는 김일성과 스탈린의 초상화가 나란히 .......

  ....  ‘소련인민의 위대한 수령이시며 조선 인민의 친근한 벗이며 해방의 구원이신 스탈린 대원수 만세!’ ........   ]

 

6월 30일 금요일, 의용군 지원 강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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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으로 오는 도중에도 벽보에는 ‘역적괴수 이승만 체포 처형, 남조선군 전멸’이라는 섬뜩한 내용이 가득하다. 종로거리에 보니 전차에 ‘절세의 애국자이시며 민족적 영웅이신 인민공화국 내각수상 김일성 장군 만세’라는 구호가 붙어 있었다. 화신백화점에는 김일성과 스탈린의 초상화가 나란히 내걸렸다. 오른쪽에는 ‘조선인민의 경애하는 수령이시며 승리와 고무하시는 조선인민위원회위원장 김일성 장군 만세!’라는 문구가, 왼쪽에는 ‘소련인민의 위대한 수령이시며 조선 인민의 친근한 벗이며 해방의 구원이신 스탈린 대원수 만세!’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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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hindonga.donga.com/docs/magazine/shin/2008/06/10/200806100500001/200806100500001_1.html


2008.06.01 통권 585호(p550~567)  
 
[6·25 58주년 특집]

사학자 이현희 교수가 겪은 전란 속 서울
눈 부릅뜬 시체더미, 남녀 포로 나체 연행… 30년보다 긴 3개월

 

 

 


[ .... 거대한 김일성 초상과 스탈린 초상 ......

 ..... 김일성을 원수님 .....  스탈린을 대원수님이라고 ........    ]


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46>  유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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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저기서 인민재판이 시작되고 돌과 죽창으로 사람을 때려죽이고 찔러 죽이는 증오와 원한의 피투성이 보복이 되풀이되었다.


  밤낮으로 폭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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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머니와 이모들은 비행기만 나타났다하면 대낮에도 구석에 포개둔 이불속에 머리만 틀어박고 온몸은 훤히 드러낸 채로 덜덜덜 떠는 데에 똑같았고, 꿩이 그렇다던가,

큰집에선 반대로 옥살이 할아버지가 마당까지 일부러 나와 비행기를 쳐다보며 마치 비행기 조종사가 들을 수 있기라도 하듯이 주먹을 휘두르며  쾅쾅 때려 부셔라! 쾅쾅 때려 부셔라!  소리소리 지르셨다. 사랑하는 문태 숙부가 잡혀가 숱한 고생을 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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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교에 나가면 친공적 교사들의 지휘통솔 하에 학교 운동장을 빙빙 돌며 행군하는 것이 다였다. 그 때마다 노래를 불렀는데 기억나는 것은  장백산 줄기줄기 피어린 자욱  이란 김일성 노래와 학교 교사 정면에 붙여놓은 거대한 김일성 초상과 스탈린 초상이다. 새파랗게 젊은 김일성을 원수님이라 부르는 것도 이상했지만 코쟁이 스탈린을 대원수님이라고 부르라 하는 건 더욱 이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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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2.5.22.  김일성


[ .....  조선인민의 해방의 은인이며 아버지인 위대한 스탈린 대원수를 조선인민은 항상 태양같이 우러러보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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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신문 1952년 5월 22일자는 김일성의 스탈린에 대한 충성심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실감나게 표현하고 있다. 북한은 소련의 위성국가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인류의 구성(救聖)이며 조선인민의 해방의 은인이며 아버지인 위대한 스탈린 대원수를 조선인민은 항상 태양같이 우러러보며 그를 환희와 노래로써 찬양하며, 그의 이름을 행복과 평화의 상징으로서 높이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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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굴특종] 북한 역사 교과서의 몸통은 소련군정

 

2016.03.21 

김용삼 미래한국 편집장 


스티코프 일기에서 발견된 ‘북한 교과서 편찬계획’의 그 증거물


북한의 역사교과서를 소련군정이 목차까지 작성하여 만들도록 한 사실이 밝혀져 충격을 주고 있다. 이 내용은 국사편찬위원회가 지난 2004년 12월 발간한 해외사료총서 제10권인 <쉬띄꼬프일기 1946~1948>을 통해 밝혀졌다.


스티코프
 

쉬띄꼬프(이하 스티코프로 표기)는 소련군 상장(한국군의 중장에 해당)으로서 북한 정권을 탄생시킨 막후 실력자로서 소속은 극동군사령부 예하 제1전선군사령부 군사회의 군사정치위원이었다. 그는 스탈린의 두터운 신임을 받는 정치군인으로서 “소련군이 점령한 지역은 반드시 친소 정부를 수립한다”는 스탈린 전쟁정책의 시행을 위해 연해주군관구가 있는 하바로프스크에서 수시로 모스크바와 평양을 분주히 오가면서 제25군의 민정활동을 감독한 인물이다.


스티코프는 1945년 여름 연해주군관구 군사평의회 위원으로 부임한 이래 1951년 초 주북한 대사에서 물러나기까지 거의 매일 일기를 썼다. 스티코프가 남긴 1946년 12월 26일자 일기에 북한의 역사 교과서 편찬내용은 물론, 목차까지를 작성하여 제시한 사실을 기록으로 남겨놓았다. 스티코프는 ‘교과서 편찬계획’이라는 제목 하에 북한에서 만들 역사 교과서의 성격과 목적 등을 다음과 같이 지시하고 있다.

 

스티코프의 ‘교과서 편찬계획’


“서론.

교과서는 어떤 목적을 지니는가? 누구를 독자로 하는가? 교과서는 무슨 내용을 담고 있는가를 밝혀야 한다. 교과서는 조선역사 교과서나 당사(黨史) 교과서가 아니며, 다음과 같은 내용을 간단하게 서술하고 있다는 것을 책임 있게 밝혀야 한다. 조선의 지리적 역사적 과거, 독립을 위한 조선민족의 투쟁, 일본인들의 지배와 착취, 교과서는 일제 압제로부터 해방 이후 북조선의 정치적 고양기, 민주개혁의 시기를 모두 포함하고 있다.”


이러한 서론 아래 각 장별로 담아야 할 자세한 내용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다. 말하면 북한의 역사 교과서 준거안을 소련군 지도부가 작성하여 넘겨준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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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대학 개교도 스티코프 작품

 

지금까지 소련군정이 북한의 헌법을 제정하고, 남한의 좌익 투쟁에도 깊이 개입했다는 사실은 학자들의 연구결과에 의해 상당 부분까지 밝혀졌는데, 역사 교과서에 담아야 할 기본 내용은 물론 세세한 목차까지를 작성하여 지시한 부분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도 관심을 갖지 않았다.


스티코프가 제시한 북한 역사교과서 준거안의 내용에 따라 북한의 교과서가 집필되었고, 그 핵심인 계급투쟁 사관, 민중사관 등이 남한의 친북세력 및 주사파들에게 전해져 남한의 사관까지를 오염시킨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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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코프는 교과서뿐만 아니라 북한 최고 대학으로 발전한 김일성대학 개교 과정에도 일거수일투족 개입했다. 1946년 9월 1일 개교한 김일성대학은 초대 총장에 김두봉이 취임했고, 김일성은 자기 이름을 딴 대학의 개교 축하식에서 “민주주의적 국가건설에 헌신할 인재를 양성해달라”고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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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로써 스탈린대학도 없고, 모택동대학도 없는데 김일성대학이 존재하게 된다.


흥미로운 것은 김일성대학도 소련군 지도부가 학과목이나 교재, 교칙, 학생들 중 10%에게 장학금 지급, 강사진 구성 등 세세하고 시시콜콜한 것까지를 정해져 지령했다는 점이다. 스티코프 일기에 의하면 1946년 10월 3일 로마넨코가 상관인 스티코프에게 김일성대학에 일반 교과목으로 러시아어, 세계사, 철학, 다원주의, 정치경제학 과목을 개설했다고 보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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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에게 훈시를 주다”


스티코프는 평양에 파견된 레베데프 소장, 로마노프 소장, 후르소프 소장, 그로모프 대좌, 이그나티에프 대좌 등 정치장교들을 지휘하여 북한에 소련을 추종하는 공산 위성국가를 창조해냈다. 그 지휘계통은 민정기구의 총관책임자 스티코프 중장→실무책임자 로마넨코 소장→총무부장 이그나티에프 대령을 통해서 나온 명령과 지시를 김일성이 위수사령부인 평양시 사령부 책임자 무르이진 소령을 통해 건네받아 실행에 옮겼다.

 

스티코프 일기에 의하면 “김일성에게 훈시를 주다”는 기록이 발견된다(1946년 9월 2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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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코프는 김일성에게 훈시를 주는 것뿐만 아니라 김일성이 발표할 연설문 초안도 직접 검토하여 자기 의견을 달아서 내려주었다. 스티코프 일기에 의하면 “11월 1일 김일성의 발표할 연설문 초안을 검토하다”는 기록이 발견된다(1946년 10월 28일자). 이틀 후인 10월 30일자 일기에는 “김일성의 연설문에 논평을 가하고, 내가 수정한 김일성의 연설문 초안을 전달하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김일성의 일거수일투족은 소련군에 의해 조종되고 지시대로 움직였음을 증빙하는 결정적인 증거물인 셈이다.


스티코프는 김일성뿐만 아니라 김두봉을 비롯하여 북조선 천도교청우당 지도부, 북조선 민주여성동맹 지도부 등을 수시로 호출하여 지시를 내렸음을 자신의 일기에 기록해 놓았다. 특히 박헌영은 어떤 일이 벌어질 때마다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소련군정에 의견을 구했다.

 

박헌영은 1946년 12월 25일, 로마넨코를 통해 스티코프에게 “김규식에 대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물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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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소련군정의 지시와 지령에 의해 탄생한 집단이 북한이다. 김일성은 스스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헌법이 스탈린 헌법의 영향을 받은 것이 자랑스럽다고 다음과 같이 연설을 한다.


“조선 인민은 위대한 스탈린 헌법―세계에서 가장 민주적인 헌법―의 영향이 최고인민회의에서 채택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헌법에 반영되고 있다는 것을 자랑스러워하고 있다. 스탈린 헌법은 그 천재적인 기초자가 말하고 있듯이 파시스트의 야만성과 싸우려는 모든 사람들, 특히 오늘날 미제국주의자의 침략에 맞서는 전사들의 최전선에 있는 조선인민에게 정신적인 원조와 실제적인 지지를 주고 있다.”

 

1949년 2월, 김일성은 스탈린에게 조선 인민 680만 명, 그리고 남한 인민 994만 명의 서명이 담긴 감사 편지를 30개의 상자에 담아 모스크바로 보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탄생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해 준 스탈린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는 편지었다. 이 편지함들은 스탈린 사후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 문서국 지하실에 던져졌는데, 그 후 행방은 알려지지 않았다.

 
 

 

 

       1977.1. 중앙일보

 

[ ...... 동구의 .... 뿌리깊은 흐름은  소련으로부터 국가주권을 회복하자는 것 .......


  ..... 동구에는 서구와 미국의 영화·음악·미술이 판치고 ...... 「부다페스트」와「프라하」의 교수들이나 대학생들은 머리부터 다리까지 서구화 .......

  ..... 생활양식도 ... 「모스크바」보다  「파리」나「런던」과 비슷 ............

 

  ...... 동구 공산당들은 그들 자신들의 하부구조라고 하는「프롤레타리아」계급자체의 저항을 받아 지금 재조직하고 있는 중 ............    ]

 


http://news.joins.com/article/1454735

 
공산권 분화 속의 평양정권

불 공산권 전문가「페이토」교수, 본사 주섭일 특파원과 회견
 

 [중앙일보] 입력 1977.01.05 

 
다음은 새해를 맞아 공산권 일반의 상황과 이와 관련된 북괴의 공산권내 입장에 관해 주섭일 본사「파리」주재 특파원이「프랑스」의 공산문제 전문가「프랑솨·페이토」교수와 가진 회견을 간추린 것이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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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특파원=동구의 대소독자노선 추구경향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으로 보는가?


<소의 동구문화 합병 실패>

 

▲페이토 교수=『동구의 장래는 상당히 복잡하다.「폴란드」「헝가리」「체코」동독에서 뿌리깊은 흐름은 소련으로부터 국가주권을 회복하자는 것이다.

「스탈린」사후에 이를 위한 기도가 여러 차례 있었다. 좋은 예로 56년「헝가리」와 68년의「체코」사태다.이미 알다시피 이는 소련군에 의해 분쇄되었다.


이 같은 동구의 기도는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이나「모스크바」의 정책을 근본적으로 뒤흔드는 것이 된다. 동구의 주권회복운동은 소련군의 주둔으로 인해 앞으로도 오랫동안 출구를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이 극단적인 상황에서 동구는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나는 많은 동구 인들과 접촉했는데 최근「폴란드」지식인들과 대화를 나누었다.「폴란드」를 비롯한 대부분의 동구 나라들은 제정「러시아」때부터 독립투쟁을 해 온 전통을 지니고 있으며 결론은 계속 반소투쟁을 하는 길 밖에 없는 것이다. 비록 좌절의 악순환 속에서나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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越南難民(월남난민) 처절한 脫出(탈출)


1978.12.12 동아일보 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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共産(공산)치하를 탈출해오는 이들이「말레이지아」를 목적지로 삼는것은「말레이지아」가 「베트남」에서 가장 가깝고 해안이 길며 경찰의 단속이 비교적 허술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 피난민들은 南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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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보디아의 悲劇(비극) (2) 폴포트治下(치하) 45개월


1979.01.09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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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보디아의 悲劇(비극) >2< 폴포트治下(치하) 45개월 무자비했던政治實驗(정치실험)


 虐殺(학살)·기아·重勞動(중노동)‥‥外交(외교)고립... 77년말과 78년초의베트남의 大攻勢(대공세)때는 진격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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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뼈의 山(산)」…共産(공산) 「폴포트虐政(학정)의 殘骸(잔해)」


1981.04.25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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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차별학살과 기아 질병등으로 7백50만인구중 2백만내지 3백만명이 목숨을 잃은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 사진은 지난79년「베트남」 군에 의해 축출되기까지「폴 포트」정권에 의해 자행된 대량학살의 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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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참한 生活相(생활상)

1981.04.30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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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화와 함께 국민총동원상태하에서 기아생활을 강요당하고 있는 월남인들은 오늘날 해방군이며 구원자들로 여겼던 베트남공산주의자들에 의해 갖은 시달림속에 허덕이고 있다. "공산주의자들이 말하는것은 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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越南(월남) 정치범10萬(만)

1982.05.11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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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신호에서 「베트남의 戰後(전후)지옥상┉」이란 제목의 기고문에서 베트남공산주의자들의 허구에 가득찬 人權(인권)공약과... 공식발표문등을 검토해보면 월남정치범들이 기아와 중노동,사소한 수용소규칙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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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가니스탄 侵攻(침공) 3년 수렁의「蘇聯版(소련판) 베트남戰(전)」


1982.12.27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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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가니스 탄侵攻(침공)3년 수렁의「蘇聯版(소련판) 베트남戰(전)

反蘇(반소)게릴라 抵抗(저항)격화

蘇軍(소군)10萬駐屯(만주둔)불구 國土... 다만 부근일대의 농토는 초토화되어 이곳 농민들만 기아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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理念(이념)의 風化(풍화)…붕괴된 左翼神話(좌익신화)


1985.07.27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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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평화세력이라는 환상을 가졌던 사회주의국가들은 언제까지나「전쟁」과 「기아」로부터 벗어나지 못한다는 實相(실상)이 점차 명확해졌다. 베트남의 캄보디아 침략,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또는 아프리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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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ll, this is out capcha image 문자열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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