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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역에 동원돼 만두 여덟 개를 먹었다.
2018.09.05 조회수 : 50

 

 

 

부역에 동원돼 만두 여덟 개를 먹었다.


       처음 배불리

 

 

 

 


  *   [ ..... 왜 많은 개발도상국들이 독립을 쟁취하고도, 정치·경제적 발전과 안정을 달성할 수 없었는가.


李光耀 선임장관은 『1960~1980년대까지 많은 개발도상국 지도자들을 실패로 몰아간 것은 사회주의 경제체제』라고 결론지었다. 국가개입 경제정책은 자원분배의 효율성을 저해하고 부패를 심화시킴으로써, 開途國(개도국) 경제성장의 발목을 잡았던 것이다.


제3세계의 많은 지도자들은 그들의 뛰어난 능력에도 불구하고, 사회주의 경제모델의 환상에 사로잡혀 경제성장의 결정적인 기회를 놓치는 중대한 실수를 저질렀다. ....... ]

 

월간조선
2000.12.

하버드에 온 李光耀의 특별 강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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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8년에 제가 김일성과 함께 중국에 방문했는데, 그 때가 한창 인민공사를 할 때였습니다. 밥도 공짜로 먹고 이발하는 것도 전부다 공짜로 했습니다.

모택동이 말하기를 경지면적을 1/3로 줄이고, 1/3은 공원으로 만들고, 1/3은 목장으로 만들어도 쌀이 남아돈다고 했습니다. 그 비결은 깊이 갈고 빽빽하게 심는, 심경물식이라고 했습니다.

농업담당 중앙당 비서에게 금년에 얼마나 생산했냐고 물어봤더니 5억톤이라고 했습니다.

 

다음 해에 우리 중앙당으로 중국 고위인사가 찾아왔기에 생활이 어떠냐고 물었더니, “말도 마십시오. 아사자가 너무 많아 내다 파묻을 수가 없어서 집 앞에 그냥 묻고 있습니다. 어떤 큰 부락들은 인구가 1/5로 줄었습니다. 쌀을 1억8천7백만톤 밖에 생산 못했습니다.”


 모두 밭에 나가서 낮잠만 자고, 심지어는 살구도 따서 같이 나눠먹을 바에는 차라리 살구나무를 찍어서 불이나 쬐자고 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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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5.12.28.  저우언라이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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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가 매우 불행하다. 건국 26년인데 6억 인구가 밥도 제대로 못 먹고 있다.

공산당만 노래하고 지도자 찬양만 하는데 이것은 공산당 실패의 한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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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내가 미국에 있을 때 만난 중국 유학생들의 생각은 그렇지 않았다.

놀랍게도 나는 모택동과 4인방을 지지하는 유학생을 단 한 사람도 만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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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혁 10년간 중국은 약 5000억 위안(약 100조 원)의 국내총생산(GDP) 손실을 본 것으로 추산됐다.

이는 중국 건국 이후 30년간 투자한 기초 인프라 건설비의 80%에 이르는 막대한 금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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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만두를 배불리 먹고 싶어 작가가 됐다’고 고백한 적이 있다.


“어린 시절 중국 경제는 매우 곤궁했다. 배고픔과 분리된 유년은 떠오르지도 않는다. 먹는 걸 주 소재로 다룬 이유도 거기에 있다.

 인생에서 처음 배불리 먹은 기억이 열여덟 살 때다. 부역에 동원돼 만두 여덟 개를 먹었다. 뱃가죽이 늘어지도록 먹는 게 소원인 건 당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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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우리끼리 속이고 우리에게 준 땅을 각자 사유하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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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러분들은 인구 10억이 넘는 거대한 중국이 오늘과 같은 변화를 일으킨 것이 전체의 변화에서 시작되었다고 생각하십니까?

 

중국 안희성이라고 하는 작은 성에 한 50여 가구도 안 되는 집에서 처음으로 인민공사를 벗어나서 우리끼리 속이고 우리에게 준 땅을 각자 사유하자. 그래서 거기 난 건 자기 것으로 하자 그리고 공출하는 건 같이 하면 될 것 아니냐.

그 몇 사람이 모여 가지고 했더니 인민공사는 자기가 만들어도 자기 게 아니고 제 땅이 아니니까 그냥 적당히 했는데 네가 나와서 나누면 네가 가져라   밤 새워가며 비가 오면 우산 받고 하고 이렇게 해서 어마어마한 소출을 내니까 공출 다 하고 남는 것 엄청난 생산성을 가지니까 다른 동네는 다 굶주리는데 이 동네만 떵떵거리고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당에서 조사 나왔습니다. 그게 등소평입니다.

그 모델을 보고 이게 살길이구나. 불과 몇 십 호 안 되는 그것이 10억 명을 넘는 오늘의 중국의 소위 사회주의를 하면서도 자본주의 경제를 들여올 수 있는 티핑 포인트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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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등소평이 개혁개방한 것만 알지, 사람들은 왜 그가 그런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그것은 다름 아닌 홍콩의 진실을 더 이상 감출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목숨을 걸고 홍콩으로 도망간 사람들이 몇 달만 있으면 중국 고위 공산당 간부보다 부자가 되어 돌아왔다. 그렇게 되자 아무리 강제수용소에 집어넣어도 소용없었다.

노동자, 농민, 어린 학생만이 아니라 공산당 간부도 도망갔다. 1979년 1월부터 5월까지 15만 명이 홍콩으로 넘어갔다.

 

2012년 중국의 국가주석으로 내정된 습근평(習近平)의 아버지 습중훈(習仲勳)이 당시 광동성 당서기였는데, 그도 처음에는 고리타분한 소릴 했으나 휘황찬란한 자본주의 마천루와 꾀죄죄한 공산주의 어촌을 번갈아 보며 강제수용소에 갇힌 사람들을 찾아가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마침내 그는 홍콩 맞은 편 곧 당시 보안(寶安 현재 심천)을 경제특구로 개방하지 않으면 해결책이 없다고 확신하고 등소평에게 건의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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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단노동제도가 비효율적이었던 원인은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하나는 이른바 `감시 비용'이 높아 농민들의 적극성을 충분히 동원하기 어렵고 `무임승차' 현상이 불가피하다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농업생산의 정보를 가장 잘 알고 있는 농민들이 그 정보를 제대로 이용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본질적으로 이는 농업에서도 시장경제 제도가 계획경제 제도보다 효율적이라는 원론적인 문제에 귀결된다.

 

무슨 일에서나 모두 가장 정확한 정보를 가진 사람이 결정을 하지 못하는 제도하에서 사람들은 자신뿐만 아니라 심지어 주변 사람들과도 전혀 이해 관계가 없는 생산활동에 대해 창의성이나 노력을 발휘할 수 없다.

 예를 들면 개혁 이전에 정부가 옥수수를 많이 심으라고 하면 농민들은 경작지의 토양 조건이 옥수수 재배에 적합하지 않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무조건 따라 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생산노동 자체에 소극적인 태도를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중국 하남성의 한 농촌에서는 1958년에 모택동이 시찰한 적이 있는 한 뙈기의 면화 시험밭이 있었다. 비록 농민들은 생산 경험으로부터 같은 땅에 계속 면화를 심으면 생산량이 크게 감소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모택동이 시찰했던 면화 시험밭에 다른 곡식을 심으면 문책을 당할 것을 우려하여 개혁 이전까지 20년 이상이나 계속 면화만 심어 왔다. 또 면화 생산량이 너무 낮으면 문제가 되기 때문에 해마다 갈수록 많은 인력과 비료 및 농약을 낭비해 가면서 모택동이 시찰했던 면화 시험밭이라는 `간판'을 계속 지켜야 했다.

 


이러한 이치를 자신의 체험으로부터 터득한 중국의 농민들은 자연히 집단노동방식보다 `가정 경영책임제'를 선호하게 된다. 그렇지만 모택동 시대에는 집단노동방식을 이탈하는 그 어떠한 행위도 `자본주의' 방식으로 간주되어 엄격한 처벌을 받았기 때문에 감히 실행할 수 없었다.


그러나 모택동이 사망한 후 중국에서 이데올로기 통제가 약간 풀리자 농민들은 곧 정부의 허락을 받지 않고 `가정 경영책임제'를 실험해 보려고 나서게 되었다.

 1978년 12월에 안휘성 봉양현(鳳陽縣) 소강촌(小崗村)의 18명의 농민들은 처음으로 정부 몰래 집단소유의 토지를 가정별로 나뉘어 경작하는 `가정 경영책임제'를 실험할 것을 결심했다. 이들은 심지어 정부에 발각되어 그 주모자가 감옥에 갈 경우 다른 사람들이 그 가족의 생활을 보장하겠다는 내용의 원시적인 계약서를 작성하여 손도장을 찍기까지 했다.

 

이처럼 모택동 사망 후인 1978년까지도 농민들이 집단노동제도를 이탈한다는 것은 실로 비장한 모험이었다. 현재 이 원시적인 내용의 계약서는 중국 농업개혁의 최초의 역사적 문헌으로 간주되어 북경의 중국역사박물관에 보존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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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동독 전체 인구 1천6백4십만 중에서 3백5십만이 동독을 떠났으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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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스·레닌주의에 의하면 공산주의 사회에는 반대세력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 왜냐하면 그 사회는 하나의 사회주의 국가로서 반대계급이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동독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동독 역사는 늘 사회주의 통일당(SED) 독재에 대한 거절, 반대, 저항의 역사로 점철 되었다. 그것은 동독인들이 서독으로 피난 또는 이주한 숫자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즉, 1945년 10월 동독의 설립에서 1989년11월 베를린장벽 붕괴까지 동독 전체 인구 1천6백4십만 중에서 3백5십만이 동독을 떠났으며, 8백명은 도주의 노력에서 실패 하였다. 이와 같은 동독인들의 탈출은 사회주의 통일당(SED) 독재의 불정당화 및 불안정화에 결정적 기여를 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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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자본주의는 지식의 문제를 해결하는 유일한 제도

 

누가 어떤 재화를 좋아하는지, 생산비용은 얼마나 드는지, 생산가능성은 어떤 상태에 있는지, 누가 어떤 생산기술과 재주, 생산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 등에 관한 지식은 사회 구성원들 각자가 가지고 있다는 의미에서 사회의 각처에 흩어져 존재한다. 하이에크는 이를 지식의 분산(division of knowledge)이라고 부르고 있다.


특히, 이러한 지식의 대부분은 언어로도 표현할 수 없는 암묵적 지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개개인들은 이러한 지식을 기초로 하여 계획을 세우고, 이에 따라 행동을 결정한다.

 

여기에서 제기되는 첫 번째 문제는 개개인들이 서로 다른 지식을 기초로 하여 세운 계획들을 어떻게 조정하느냐 하는 문제이다. 국외자인 국가 계획당국이 이 계획들을 인위적으로 조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인위적으로 조정할 수 있기 위해서는 각처에 흩어져 존재하는 지식을 전부 수집하여 가공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불가능하다. 개개인들이 가지고 있는 지식이 복잡해서가 아니라 계획당국자는 누가 어떤 지식을 가지고 있는지조차 알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특히 개개인들이 가지고 있는 지식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암묵적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이에크는 이 모든 지식을 조정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자유시장 경제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요컨대, 지식의 문제 때문에 계획경제는 비효율적이기는 고사하고 애초부터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이것이 당시 하이에크를 비롯한 오스트리안 학파의 공통된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먹혀들지 않았다. 누구도 그의 주장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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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즘에 대한 이러한 해석은 서방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우리 나라의 좌파지식인들도 나치즘과 같은 파시즘은 자본주의의 필연적인 결과로 해석하고 있다.


그러나 하이에크는 나치즘의 뿌리는 사회주의 이외의 그 어떤 것도 아니고, 또한 나치즘은 집단주의로서의 사회주의가 파시즘과 공산주의의 또 다른 형태로 재현된 결과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는 {경제학과 지식}이라는 논문보다 평이한 문체로 {노예로의 길}에서 자유자본주의의 장점을 설명하고 있다.

 

즉, 그에 의하면 현대적인 사회 경제적 분업의 복잡성 때문에 중앙의 계획당국이 계획을 위해 고려해야 할 요소들이 수없이 많아서 이들을 총괄적으로 파악하기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수많은 경제주체들이 자유롭게 결정되는 가격에 대해 각자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지식에 기초하여 개별적으로 반응하는 것을 허용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는 이어서 자유 시장경제는 중앙 계획당국이 도저히 흉내낼 수 없는 방법으로 수많은 새로운 지식들을 발견하고 확산시켜, 이를 전 사회에 유통시킨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는 이러한 주장을 1945년 {사회에서의 지식의 활용}(이 논문은 {개인주의와 경제질서}에 수록)이라는 논문에서 더욱 더 심화시킨다. 그는 시장경제를 거대한 의사소통 체계로 파악하고 있다.

 


그리고 사회주의자들은 시장경제의 경쟁을 모든 사회악의 근원으로 여기고 있었다. 그러나 하이에크는 자유경쟁을 복권하려고 노력한다.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세계에서는 경쟁은 필요가 없다. 승자와 패자가 누구인지를 모르는 경우에서만 경쟁은 의미가 있다. 그는 경쟁은 몰랐던 사실을 발견하는 발견적 절차라는 것을 규명한 최초의 인물이다. 경쟁은 새로운 지식을 발견하고 잘못된 지식이 무엇인가를 발견하는 절차이다.


시장의 중요성을 오늘날 좌파들이나 우파들이 받아들이고 있다. 그러나 좌파들이 받아들이는 이유는 전혀 다르다. 그들에 의하면 사회주의 계획경제는 일하려는 의욕을 억제하고, 따라서 인센티브를 소멸시키기 때문에 비효율성을 야기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시장이 부분적으로 중요하다는 것이다. 우파에 속하는 사람들마저 이러한 좌파적 시각과 동일한 시각에서 사회주의 계획경제를 반대한다.

 

계획경제는 비효율적 제도가 아니라 실현 불가능한 제도

 

그러나 하이에크의 주장에 따르면, 사회주의 계획경제(뿐만 아니라 부분적인 계획도)는 비효율적이기 때문에 실패한 것이 아니라 - 그것이 개인적 자유를 소멸시키고 전체주의를 야기한다는 이유 이외에도 - 이 점이 특히 중요한 이유인데, 사회주의 계획경제 그 자체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경제과정을 의식적으로, 즉 목적 지향적으로 통제하는 데 필요한 모든 지식을 어떠한 정신도 갖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이 불가능성을 해결하는 것이 자유를 기초로 하는 시장경제의 발견적 절차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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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루아침에 아무 가치가 없는 쓰레기가 되어 버렸습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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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 공산당 민주혁명 이후에도 가치를 여전히 유지한 물건은 놀랍게도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1970-80년대 소련사람들이 중요하게 생각했던 가구, 가전제품, 도서 등은 하루아침에 아무 가치가 없는 쓰레기가 되어 버렸습니다. 새로운 세계에서 이와 같은 것은 쓸모가 없게 되거나 옛날보다 가격이 엄청나게 떨어졌습니다. 예를 들면 1980년대 초 일본제 칼라 텔레비전은 노동자가 5-6개월 정도 벌 수 있는 돈으로 팔렸는데 1990년대 말 들어와서는 훨씬 더 좋은 텔레비전을 보름 정도 벌 수 있는 돈으로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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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rfa.org/korean/commentary/lankov/lankovcu-09222016101122.html

[란코프] 북 체제붕괴 후 잘살기 위해서는
2016-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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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산주의 사회 = 이밥에  고기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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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은 인민들이 모두 흰쌀밥에 고기 국을 먹으로 비단옷을 입고 기와집에서 살게 되면 인류의 이상사회인 공산주의 사회를 건설했다고 말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는 또한 세계에서 평양이 가장 아름다운 도시라고 하면서 평양은 도시 안에 공원이 있는 것이 아니라 공원 안에 도시가 있다고 말하였다.


북한 주민들은 김일성의 이 말을 그대로 믿고 있다. 흰쌀밥에 고기 국을 먹고 비단옷을 입고 기와집에서 사는 것이 그리도 높은 생활수준인가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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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서 사업하는 건 광주리로 물 퍼내기

 

  <  정말 이래도 되는 것인가 ...….
 

  나의 가슴속에 의문의 싹이 트기 시작한 것은 1982년인가 1983년부터였다. 최초에는 조그마한 의심이었다. 그 뒤로 북조선 본국과 在日동포 사이에는 합작사업이 시작되었다. 1984년 9월 合營法(합영법)이 만들어지고, 라면 공장에서부터 중금속 공장에 이르기까지 100개가 넘는 공장이 북조선 각지에 세워졌다.
 

  金日成의 말씀이 있었던 1986년 9월에는 북조선으로부터 合營經濟代表團이 일본에 와서 朝鮮國際合營總會社의 설립 조인식을 가졌다. 자본금은 약 120만 달러로 기억한다. 朝·日이 각각 50%씩 출자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실제는 거의 전액을 일본 측이 내놓았다.

 
  朝鮮國際合營總會社 설립 후의 계획은 피복 가공, 실크 넥타이 제조, 직물 제조, 모피 가공, 프레스 가공, 케미컬 슈즈 제조, 필터 담배 제조, 축산가공, 피아노 제조, 디지털 시계 제조, 녹음기 제조, 컬러 TV 제조였으며 얼마 뒤에는 공장도 건설했다.
 
  그러나 투자에 대한 이익 환원이 전혀 없었다. 공장도 처음 얼마 동안 가동하다가 2년인가 3년 사이에 조업이 중지되고 말았다. 이유는 간단하다. 북조선이란 국가 전체가 관료주의로 병들어 사업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인건비는 저렴하지만 제품을 만들 수 있는 노동자를 만들어 내려면 방대한 시간과 노력을 투입해야 한다.


 
  그런데 노동자를 파견하는 관료들이 리베이트를 요구해 왔다. 그러다 보니 일본에서 생산하는 것보다 가격이 비싸게 되었다. 그리고 인프라 정비도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 電力에서 철도까지 모두가 黨 간부가 그 권리를 독점하고 있어 공장이 잘 될 만하면 옆구리를 치고 들어왔다. 뿐만 아니라 공장의 간부들이 『내 몫도 내놓으라』고 나섰다. 약탈자는 黨만이 아니다. 軍도 덤벼든다.

 
  예산에 대해서도 이해가 없어 돈이 있으면 있는 대로 써버린다. 투자금이 있으면 초장에 몽땅 써버린다. 부품의 수명이나 잉여자금을 축적한다는 것은 발상 자체가 없다. 돈이 있으면 자가용 차를 사고 간부용 휴양시설을 마련한다.

北朝鮮에서 사업을 한다는 것은 광주리로 물 퍼내기다. 在日동포가 투자한 수백억 엔의 돈이 이렇게 해서 간데 온데 없이 사라져 버렸다. >
 

 

 


[북한, 이게 문제지요-27] 김일성은 북한 경제 망친 원조

 

워싱턴-변창섭, 란코프 pyonc@rfa.org

2012-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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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 그렇군요. 앞서 김일성이 북한 경제를 망치고, 북한을 동아시아에서 제일 낙후한 나라로 만든 장본인이라고 하셨는데요. 왜 그럴까요?


란코프: 김일성은 경제정책은 물론 북한체제를 개발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해방이 된 1945년 북한에 들어온 김일성은 북한에 주둔하던 소련군 후원 없이는 권력을 잡을 수도 없었고 유지할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1940년대 말 김일성은 불가피하게 소련고문, 소련전문가들이 시키는 대로 북한 경제를 건설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에 북한 정부기관을 보면 소련 교포 출신 간부들이나 소련고문이 아주 많았습니다.


하지만 세계 역사 경험이 잘 보여주듯이 소련식 국가 사회주의 경제는 세계 어디에서나 장기적인 성장을 초래하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경제제도는 짧은 기간만 노동력 동원과 자원 동원 덕분에 고도 경제성장을 이룩할 수 있지만 10~20년 후에 성장할 수 없게 됩니다. 유감스럽게도 50년대 말 소련과 중국의 영향권에서 벗어난 김일성 정부는 소련식 국가사회주의의 취약성을 고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심화시켰습니다.


변: 김일성 경제체제의 취약점은 무엇이었습니까?


란코프: 한마디로 말하면 효율성이 전혀 없던 소련의 국가사회주의 경제를 도입한 것이었습니다. 사실 소련에서 국가사회주의가 무너진 이유는 일반 노동자들이 새로운 기술을 도입할 이유도 없고 품질관리에 대해서 신경을 쓸 필요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경제가 아주 비효율적이었습니다.

국가사회주의의 경우 결정적인 것은 품질보다 양입니다. 시장경제에서 살아남으려면 공장 지배인은 소비자들이 좋아하는 만들어서 시장에서 잘 팔리도록 해야 합니다. 반대로 국가사회주의 경제에서 지배인은 정부와 공산당의 계획에 따라 필요한 양의 제품을 생산하기만 하면 됩니다. 제품이 좋은지 혹은 나쁜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시장경제에서 세탁기를 만든 공장이 있다고 생각해봅시다. 만일 공장지배인이 세탁을 잘하고 전기를 절약하고 예쁜 세탁기를 만들기 위해서 애를 쓰지 않는다면 시장에서 밀려나 공장이 문을 닫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사회주의 경제는 어떨까요? 세탁기 공장은 당 중앙에서 매년마다 4만대 세탁기를 생산하라는 명령이 오면 무조건 5만대의 세탁기를 생산해야 합니다. 공장지배인은 세탁기의 성능이나 품질은 상관없이 그냥 5만대를 생산하면 된다는 입장입니다.


김일성은 이러한 국가사회주의제도를 소련에서 수입했을 뿐만 아니라 그에 따른 문제점을 오히려 심화시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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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 김일성이 도입한 국가사회주의 경제가 이처럼 북한 경제를 망쳤다고 했는데요. 북한 농업은 어땠습니까?


란코프: 북한 농업도 이와 비슷합니다. 김일성은 소련의 협동농장을 모방했습니다. 그러나 북한 농민들은 소련 농민들 보다 자유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소련 농민들은 자유가 있었습니다. 평균적으로 말하면 북한의 텃밭 면적은 30평에 불과했습니다. 반대로 소련의 텃밭은 보통 수백 평에 달했습니다. 우리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소련중앙 시베리아 마을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마을에서 텃밭은 적어도 300평입니다. 소련농민들은 이처럼 넓은 텃밭에서 야채, 과일 등을 생산했습니다. 또 소련에서 농민들은 소를 한 마리씩 키우고 염소와 양을 키우는 것은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김일성은 이와 같은 개인의 경제활동을 문제로 삼고 결코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소련 농업은 문제가 많긴 많지만 북한 농업보다는 훨씬 자유롭고 좋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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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rfa.org/korean/weekly_program/bd81d55c-c774ac8c-bb38c81cc9c0c694/co-al-04172012133024.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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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귤이 아니라 사과도 제대로 먹을 수 없는데

 

 


간부들이라고 해서 일반 주민에 비해 낫다는 것이지 그들도 굳이 남한과 비교하자면 대망님의 말이 맞습니다.

귤을 사계절 먹을 수 있는 사람은 아마 김정일과 김용순정도 일것입니다. 아마 김용순도 자기가 먹고싶을때 귤을 먹을 수 있을런지는 잘모르지만....

남한에 와서 사계절 과일을 먹을 수 있다는 사실에 무척이나 놀란적이 있었어요..

여기서 노가다 하는게 북한에서 장관하는 것 보다 더 낫다고 생각하는데...


여기서는 아무리 서민이라도 외국에도 마음대로 나가고 하루벌지라도 돈만 좀 있으면 얼마든지 먹고싶은 것을 먹을 수 있으니까... 아마 김용순이도 외국가자면 김정일의 승인이 없으면 절대로 나갈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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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북에서는 약에 쓰려고 해도 구할 수 없는 그 탐스러운 참외들이 이국의 정서를 풍기고 있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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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땅의 참외밭을 보고 감격하다

 

우리 모녀가 ‘가다가 죽으면 죽는 게지!’ 하는 비장한 결심을 품고 산을 내려와 두만강물에 들어선 것은 1997년 8월15일 새벽 2시경이었다. 두만강 감탕물을 꼴깍꼴깍 먹으며 익사의 경계선에서 허우적거리다가 겨우 중국땅에 올랐다.
누가 볼세라 강기슭의 무성한 강냉이밭에 들어간 우리 모녀는 잠깐새에 국경을 넘었다는 것이 꿈만 같아서 ‘이게 중국땅이 옳긴 옳은가?’하고 의심이 다 생겼다.


강냉이 밭을 헤치며 앞서가던 딸애가 “엄마, 여기 참외밭이 있어” 하고 탄성을 질렀다. 서둘러 다가가서 보니 정말 참외밭이었다. 권투장갑만큼이나 큰 노란 참외가 새벽빛을 안고 여기저기서 그윽하게 빛나고 있었다.


“중국땅이 옳구나!”


북에서는 약에 쓰려고 해도 구할 수 없는 그 탐스러운 참외들이 이국의 정서를 풍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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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에는 동네슈퍼에 가도 설탕이 있어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겠지만, 북한에서는 어린이들이 감기에 걸리면 어머니가 ‘귀한 약’으로 한 숟가락씩 뜨거운 물에 정성껏 타먹이는 것이 설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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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에서 묘향산까지 나무가 하나도 없는 거야. 식량 자급자족하겠다며 산을 깎아 다 밭으로 만들었는데 그래 봐야 식량 문제를 해결하지도 못했고 허구헌날 홍수만 나는 거야. 오히려 식량난을 악화시키고 있는 거지. 우리가 지금 해야 할 일은 북한에 나무 심기 운동이라니까.(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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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향민 단체의 부설 연구소에서 지난 90년대에 ‘이북도민의 월남동기 및 월남시기’ 여론조사를 실시한 결과 다음과 같은 통계를 볼 수 있었다.

실향민 1세(직접 월남 당사자) 1030명을 무작위로 뽑아서 “귀하가 월남하게 된 직접적 동기는 무엇인가?”라는 설문에 대하여 대답하기를


ㆍ북한공산통치를 체험하고 공산당이 싫어서 … 50.8%

ㆍ북한에서 반공투쟁을 하다가 피신 또는 탈출하여 … 16.1%

ㆍ공산당에 의해 반동분자(자본가, 지주 종교인 등)로 찍혀서 …15.1%

ㆍ어린 나이였으므로 그저 어른들 손에 이끌려서 … 3.2%

ㆍ기타 10여 가지 이유의 합계 … 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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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5.8.24.


"경원선 철도 끊기며 분단 시작 너무 어이없고 황당하지 않나"


 2009.06.29


신작 '별들 너머 저쪽과 이쪽' 낸 소설가 이호철

 

"남북 분단은 소련군이 1945년 8월 24일 서울~원산 간의 경원선(京元線) 철도를 차단하면서 시작됐다."


'분단시대'의 실향민 작가 이호철씨(78)는 함경남도 원산이 고향이다. 1945년 광복 당시 10대 소년이었던 이씨는 "지난 60여년간 우리를 고통스럽게 한 남북 분단이 이렇게 '철도 차단'에서 시작됐다는 것은, 당사자인 우리로서는 너무 어이없고 황당하지 않은가"라고 회상했다.


"소련군은 이어 8월 25일 서울~의주 간의 경의선(京義線) 운행도 막았고, 미군이 서울에 진주한 9월 6일에는 전화·전보 등 통신과 우편물 교환을 완전 차단했다. 소련은 처음부터 동구권을 먹었듯이 북한을 자국의 패권주의 틀 속에 편입하려고 했다. 미국은 소련과의 전후(戰後) 처리 합의에 따라 그저 먼 산 쳐다보듯 할 수밖에 없었다."

 
이호철씨는 얼마 전 "분단과 6·25전쟁의 원흉은 스탈린"이라고 강조하면서 허구와 역사의 결합을 통해 남북 분단을 새롭게 조명한 신작 장편소설 《별들 너머 저쪽과 이쪽》을 펴냈다. 이씨는 "문학성보다는 내 경험을 바탕으로 젊은 세대에게 6·25와 남북 관계의 실체를 알려주기 위해 현대사 참고서로 사용할 수 있는 책을 썼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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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련군은 북한지역을 점령하자마자 38선을 경계로 하여 남한지역과의 교통·통신을 단절 ........  ]


 [ .... 미군은 ...교통·통신을 회복하고 ...자유로운 왕래와 상거래를 회복할 것을... 제의했으나  소련군은 일절 응하지 않았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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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이 소련군과 분할 점령을 위해 군사분계선으로 38선을 책정한 것은 이론의 여지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미국이 38선을 책정한 사실이 곧 한반도 분단에 대한 미국의 책임으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이는 제2차 세계대전 終戰(종전) 직후의 서독과 오스트리아에서 확인된다. 서독에는 美·英·佛 군대 간의 군사분계선이 있었고, 오스트리아에는 美·英·佛·蘇 군대 간의 군사분계선이 있었으나 그것이 곧바로 국토분단을 초래하지는 않았다.
 


  광복 직후 남한을 점령한 미국은 38선을 순수한 군사분계선으로 유지하려고 했던 데 반하여, 북한을 점령한 소련은 38선을 통치분계선으로 변질시켰다. 소련군은 북한지역을 점령하자마자 38선을 경계로 하여 남한지역과의 교통·통신을 단절하여 남북 주민 간의 자유로운 교통·통신을 금지시켰다.

 

  스탈린은 1945년 9월20일 비밀지령에서 북한에 독자적인 공산정권의 수립을 지시했다. 이에 따라 소련 점령군 사령부는 10월8일부터 10일까지 평양에서 북조선5도인민위원회 대표자대회를 소집하고, 이어 이북5도행정위원회를 수립한 뒤 산하에 10개 행정국을 두었다. 이는 북한에 이미 별개의 정부가 들어선 것이다.

 
  소련은 金日成을 내세워 북한지역에서 1946년 2월에 토지개혁과 중요산업의 국유화를 골자로 하는 이른바 「민주개혁」을 단행했다. 뿐만이 아니다. 미군은 美·蘇공동위원회를 비롯하여 몇 차례 단절된 남북 간의 교통·통신을 회복하고 남북한 자유로운 왕래와 상거래를 회복할 것을 소련군에 제의했으나 소련군은 일절 응하지 않았다.

 

  미국이 남한지역을 식민지化·군사기지化하려 했고, 처음부터 남한지역에 분단정권을 수립하려 했다는 주장도 사실과 다르다. 미국은 처음부터 남한의 전략적 가치를 낮게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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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회주의의 구호를 걸었다면,

       인민들은 우리를 무서워했을 것이며 곁에도 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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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공산주의는 공산국가 소련과 결부되어 폭동, 혁명, 테러와 같은 부정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므로 대중에게 쉽게 접근하기 위해서는 공산당 대신 영국의 노동당(勞動黨)과 같은 온건한 복지정당으로 위장하는 것이 편했다. 그 때문에 김일성은 자신의 조직을 북조선노동당(북로당)으로 바꾸고, 남한에서도 박헌영, 여운형, 백남운의 좌파 3당을 남조선노동당(남로당)으로 통합하게 했던 것이다. 1945년 11월 신의주 학생 사건에서 많은 학생들이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죽고 다치자, 김일성은 현지로 찾아가 유감을 표시하면서,“우리 노동당이라는 것은 다른 게 아니라 민주주의를 하자는 거요. 우리가 민주주의를 하자는 거지, 공산주의를 하자는 것이 아니요”라고 자신을 감추었던 것이다.

 

공산주의를 민주주의로 위장한 김일성의 전술은 성공했다. 그러므로 그는“그때에(해방 직후에) 우리가 사회주의의 구호를 걸었다면, 인민들은 우리를 무서워했을 것이며 곁에도 오지 않았을 것입니다”라고 만족스럽게 회고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에 따라 ‘공산주의 혁명’도 ‘민주적 개혁’으로 둔갑했다. 그리하여 토지개혁의 혁명적 조치로 몰수된 지주들의 토지에 대한 경작권이 농민들에게 분배되었다. 그리고 화폐 개혁의 혁명적 조치로 상인들의 자본이 몰수되었다. 그 결과로 기득권을 가진 식자층과 유산계급은 뿌리가 뽑히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북한 사회에 인재 부족의 재앙을 가져 왔다. 이른바‘민주개혁’으로 불리는 공산주의 혁명으로 얼마나 많은 인재들이 사라졌는가는 김일성대학을 비롯한 대학들의 이공계(理工系) 신입생이 부족한 사실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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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www.sdjs.co.kr/read.php?quarterId=SD201002&num=390
 
2010년 여름호 
[특집] 이승만 시기의 보수세력과 민주제도

[이주영 | 건국대학교 사학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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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그러나 현대는 용어의 혼란시대다. 독재주의자들의 애용어가 ‘민주주의’가 되어 있고 괴뢰정권의 간판이 ‘민족전선’, ‘조국전선’으로 캄푸라치되고 있으며, 공산당 가면인 ‘노동당’과 영국의 ‘노동당’이 이름은 같으면서 본질은 대척적인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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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 민족사회주의란?>

국민신문 1948년 10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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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에서 토지개혁을 하고 나서 농민들은 좋아했을 것 아닙니까?


“아시다시피 북한은 무상몰수 무상분배 원칙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땅을 받은 농민을 제외하고는 다 불만이었지요.

그런데다가 막상 수확을 할 때가 되자 북한정권은 일제하 공출보다 더 많은 비율로 수확물을 빼앗아 갔습니다. 그러면서 농민들의 마음도 돌아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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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개혁에 대한 저항세력은 상당수 북한을 탈출하고 없어진 것이다. 그러나 이후에도 반발세력이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니다. 새로운 반발세력이 생성된 것이다. 토지개혁 이후 무거운 세금을 거두어 갔기 때문이다.


북한은 토지개혁 후 당해연도의 산물에 대하여 농업현물세제를 실시하였다. 처음에는 25%를 징수하도록 하였으나 이 수치는 법령상의 규정일 뿐이었다. 농업현물세뿐만 아니라 애국미, 성출 등 잡세로 인하여 실제로는 40% 정도를 납부해야 했다. 북한의 농민들이 낸 각종의 잡세는 토지개혁 이전과 다를 바가 없었다.

 결국 북한의 토지개혁은 사인지주제에서 국가지주제로 변화하였다고 볼 수 있다. 당시 북한은 도시나 농촌에서 기아가 속출하는 현황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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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북에서는 소련군의 비호와 지원을 등에 업은 김일성 일파가 1946년 2월 임시인민위원회를 조직한 후 공산주의체제 구축에 본격 착수하여 지주와 부농계급의 재산을 몰수하는 토지개혁을 실시하였다.


토지개혁은 대지주, 중농, 자작농, 소작인들이 오랫동안 유지해 온 평온한 마을공동체에 급격한 사회변혁을 가져왔다. 현물세나 토지개혁과 같은 사회변혁은 경제체제 면에서 농민들의 불만을 가져올 수밖에 없었다.

현물세는 이전의 소작제보다도 더 가혹할 정도로 높은 비율이었다. 특히 지주와 부농계층이 겪게 된 재산상의 박탈과 심적 당혹감은 매우 컸다. 당시 북한공산정권은 3할 4부의 현물세를 징수하는 외에, 해방의 ‘은인’인 소련군에게 헌납한다는 명분으로 ‘성충미’와 ‘애국미’의 명목으로 세금을 강제 징수하였다.

 

북한정권은 자신들이 실시한 초기 사회주의정책에 방해가 되는 지식인, 종교인, 지방유지들로 구성된 자치회나 치안대의 지도자들을 민족의 반역자나 반동분자로 몰아 공산정권에 맹종하는 단체조직인 공산청년동맹 적위대들의 폭력으로 강제추방하거나 불법투옥, 학살 그리고 추방자들의 재산을 몰수하는 등 만행을 자행하였다.

또 공산주의사상을 강제로 전파하기 위하여 ‘맑스­레닌’의 우상화교육과 이에 방해가 되는 종교탄압을 실시하였다.


이러한 경제적, 종교적인 탄압을 피하여 자유를 찾아 대한민국으로 월남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게 되었으며, 탈출의 기회를 놓쳤거나 가족사정으로 월남할 수 없었던 반공주의자들은 도피의 세월을 보내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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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6.3.6.  38선 철폐요구 국민대회

 


 [.... 生地獄 38以北의 同胞를 살리자 ....... ]

 [.... 38以北의 言論·集會·結社의 자유를 다오 ....... ]


 [... ‘건국의 장애물인 38선을 철폐하라’....... ]

 

 

  38선철폐요구 국민대회 개최
 
 
게재지명 동아일보
 
게재일자 1946년 03월 06일
 

 

 
38線撤廢要求國民大會가 5일 오전 11시 반 서울운동장에서 개최되었다.

이날 38선철폐요구국민대회에 군중이 들고 나선 기치와 표어는 다음과 같다.

 

38絞首線 撤廢

38以北의 農民의 食糧을 약탈 말라

生地獄 38以北의 同胞를 살리자

自主獨立의 전제조건이다

38以北의 機械없는 공장의 노동자를 살리자

38以北의 言論·集會·結社의 자유를 다오

言論機關은 반성하라 38以北의 진상을 정확히 報道하라

民族의 總意로 38線 撤廢를 요구하자

 


이날 오전 11시 반 대회장에는 남북 각지에서 모인 수천명이 ‘건국의 장애물인 38선을 철폐하라’ 38絞首線을 철폐하라라고 쓴 깃발을 휘날리고 국민의 총의를 무시한 38선의 철폐에 돌진하려는 결의가 움직이는 가운데 대회의 막이 열리었다.


개회사와 국기게양이 끝난 다음 애국가 합창이 성동중학교의 취주악대와 함께 있은 후 대회위원장 李允榮(平壤朝鮮民主黨副黨首)으로부터 “38선의 문제를 해결하기 전 우리의 완전독립은 가망없다. 우리는 이 대회를 기점으로 38선철폐 국민운동을 전국적으로 전개하려 한다”라는 개회사가 있었다.

그 다음 임시정부 외교부장 趙素昻으로부터 李承晩, 金九의 축사를 대독한 후 서북선의 실정보고에 들어가 宋義淳, 崔奎恒, 白凡石 3인의 보고연설에 이어 다음과 같은 決議文 낭독이 있은 후 독립만세 삼창으로서 의의깊은 대회의 막을 닫고 동 오후 2시에 폐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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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決議文

 

1) 朝鮮의 38도선은 外敵이 항복하기 전 聯合軍參謀總長會議에서 작전상의 필요로 획정하였다는 사실에 비추어 보건대 금일의 朝鮮에 있어서는 이미 그 필요성을 인정치 아니한다.

 이 후도 美蘇兩軍이 38선을 경계로 분할 주둔하여 현재와 같은 3천만 민족의 統一團結과 自主國家 건설에 지장이 클 뿐 아니라 국가경제의 파멸을 초래하여 國民生活을 도탄에 빠지게 하며 政治·經濟 文化·交通·通信·居住의 자유를 拘?하는 바 큼으로 우리는 3천만 민족의 이름으로써 聯合軍과 聯合軍總司令官 及 美蘇共同委員會에 대하여 38선의 즉시 철폐를 요구하여 其 목적의 관철을 기하기를 결의함.


1) 우리 동포중에는 □□을 기화로 선량한 동포들을 기만 □□하여 政權의 획득을 꾀하는 賣國奴가 있어서 심지어 光輝있는 祖國을 外夷에게 팔아 먹으려는 □□□ 이땅에서 횡행 활보하니 어찌 통탄치 아니하랴.


 38以北을 바라보건대 진정한 民意를 무시하고 소수인원의 恣意로 된 臨時人民委員會가 있어 입으로 民主主義를 표방하면서 민중을 억압 기만하여 후일 政權의 횡탈을 꾀하려 하니 우리 어찌 만연 방관할 수 있으랴.


이제 우리 3천만 동포는 理論과 표방에 속지 말고 사리와 감정을 떠나서 현실을 엄정 냉정히 관찰하여 정사를 가르고 □□을 판단하여 우리의 추앙 신앙하는 民族의 領導者를 선택치 아니치 못하게 되었으니 여기서 우리는 朝鮮의 血統과 民族的 良心을 가진 3천만 동포의 이름으로 大韓國民代表民主議院을 절대 지지하는 것을 천하에 선명하여 써 內로는 民心의 歸一을 策하며 外로는 이를 萬邦으로 하여금 大韓國民의 完全統一政權으로 승인케 하기를 결의함.

 

 
大韓民國 28년 3월 5일

38線撤廢要求國民大會

 

동아일보 1946년 03월 06일 

 

 

 

 

[ .... 協定된 것도 蘇聯軍司令官의 거부로 성립되지 아니하였으니 蘇聯軍의 心腸은 과연 어디에 있는가.

  .... 38도 以北의 우리 동포는 무한한 모욕과 각종의 학대를 받아 파멸상태에 빠졌다는 보도를 눈물을 흘리면서 ........ ]

 


민주의원 김준연, 38선문제 등 소군정당국 반성 촉구 방송


게재지명 동아일보
게재일자 1946년 03월 16일
날짜 1946년 03월 13일

 

民主議院 金俊淵은 現下의 最緊急한 38선과 농촌문제에 관하여 13일 오후 7시 15분 中央放送局에서 방송하였는데 그 요지는 다음과 같고, 지면관계로 농촌문제는 割愛하고 38선문제만 揭載하여, 美蘇共同委員會를 앞두고 특히 蘇聯軍當局에 반성을 촉구하였다.

 

“去年 8월 15일 이후 우리 3천만 민중은 37년이란 세월을 고통으로 비참한 死線에서 방황하던 日本의 虐政을 벗어나서 하루바삐 자유독립의 완성을 기하였을 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상상도 아니하던 38도선이 가로 막아 누구나 그 理由와 原因如何를 물론하고 놀라지 아니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 민족이 南北으로 갈리어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생활 전면에 차단을 당하여 왕래의 자유가 없음은 물론 通信의 왕복도 전연 不能한 상태에 있어 벌써 반년을 경과하였으니 이와 같은 우리 民族 相互間의 고통과 비애는 과거 屢千年 역사상에 보지 못하였던 일이 아닙니까.

 

우리는 이러한 고난을 받으면서도 美蘇兩軍이 우리의 自主獨立에 협력하기 위하여 우리 땅에 進駐한 것으로 믿고 그들에게 무한한 감사를 드리며 큰 기대를 가졌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과거 京城에서 열린 美蘇共同委員會는 우리 自主獨立의 過渡政權을 수립하는데 협력하는 전제로 38도선 문제를 해결할 것이라고 하는데 대하여 그 회답의 내용과 경과의 발표가 있기를 날로 기다리던 바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略) 協定된 것도 蘇聯軍司令官의 거부로 성립되지 아니하였으니 蘇聯軍의 心腸은 과연 어디에 있는가. 우리는 그 제반행동에 관하여 38도 以北의 우리 동포는 무한한 모욕과 각종의 학대를 받아 파멸상태에 빠졌다는 보도를 눈물을 흘리면서 믿지 아니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蘇聯軍의 과오인가 소수 民族反逆者의 죄악인가.


 우리는 民衆의 총력을 집결하여 蘇聯軍當局의 반성을 요구하는 동시에 民族反逆者를 배격하여야 하겠습니다. 여러분 우리 다 같이 마음과 힘을 모아 死滅에 빠진 38도 以北의 동포를 구해냅시다.

 

美蘇共同委員會가 또다시 금명중에 회담을 개시하는 모양이니 여기에 대하여서도 우리는 그 경과를 주시하여 우리의 自主獨立完成에 협력하는 것이면 마땅히 滿腔의 성의를 드리고 우리도 심혈을 다하여 목적완성에 奮迅 勇往함은 물론이나 만일 38도선의 철폐를 거부하여 우리 민족의 통일을 저해하거나 소위 信託問題 等을 제의하여 우리 民族의 독립을 거부하는 자 있다면 그야말로 우리 3천만 민족의 사활문제이니 우리가 일심협력하여 끝가지 이것을 반대하지 아니하면 안될 결심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우리는 비통한 마음으로 蘇聯軍當局에 대하여 반성을 요구하는 所爲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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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신문은 잇스나 38이남의 소식을 전혀 드를 길이 업는 이북 사람들의 ....... ]


   1946.3.18.월요일. 동아일보.

 " 라듸오"로 듯는 이남의 소식


평양에서 발행되는 신문은 잇스나 38이남의 소식을 전혀 드를 길이 업는 이북 사람들의 심정은 오즉 답답할 뿐이다. 그러나 지난번 , 미소회담에서 방송파장이 협정되면서부터 라듸오만은 잘들리어 , 서울중앙방송국으로부터 보내는 뉴스로서 자위한다고 한다.

 

 

국경 아닌 국경『삼팔선』이북답파기【2】

동아일보 1946년 4월 7일자 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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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황해신문

 

역 매점에서 1원을 내고 신문 두 장을 삿다 자유황해신문(自由黃海新聞)의 14, 15 량일부이였는데 두 면의 소형신문이다 김무정 장군이 토지게혁령 실시에 관하야 지방순회차로 해주에 간 것을 머릿기사로 뽑고 정치사회 량면의 구별 없이 모다 토지개혁령(土地改革令)을 해설한 기사뿐이다. 이날 신문만 그러한지 몰으되 지면에는 민중의 여론이 조금도 반영되어 잇지안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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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dongne.donga.com/2013/04/30/d-story%e2%85%a1-%ec%9d%b4%eb%b6%81%eb%8b%b5%ed%8c%8c%ea%b8%b01/

 

 

 


  *  [.... 절대한 언론자유가 있는 것이다. .......

      .... 출판에 대하여 검열같은 것을 하려 하지도 않는다 ........]

 

  1945.9.12.  매일신보 .


 하지, 기자회견에서 미군 施政方針을 발표

 


11日 오후 2시 40분 존R.하지중장은 아놀드소장과 헤이워드중좌를 대동하고 시내 각 대표신문기자들과의 회견석상에서 제1성을 발하였는데 (略)사령관과의 회담은 2시간 40분에 亘하였으며 (略) 이날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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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이 진주해 온 후인 현재 조선에는 문자 그대로의 절대한 언론자유가 있는 것이다. 미군은 조선사람의 사상과 의사발표에 간섭도 안하고 방해도 안할 것이며 출판에 대하여 검열같은 것을 하려 하지도 않는다. 언론과 신문의 자유는 여러분들을 위하여서 대중의 論을 제기하고 또한 여론을 소소하게 알리는데 그 직능을 다 해야 할 것이다.


이와같이 미군은 언론자유에 대하여 취재를 방해하고 검열을 하려하지는 않으나 그것의 정당한 의미의 치안을 방해하는 것이라면 이런 경우는 별도로 강구하려 한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필요까지는 없으리라고 믿는다. 나는 조선에 온 뒤로 조선의 역사와 조선의 신문사를 통해서 조선이 어떠한 지경에 처해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그런만큼 나는 바라노니 부디 여러분은 이 기회를 조선신문사상의 일대 혁신전환단계로 삼아 주기를 바란다.


미국의 제 신문과 같이 신문의 역할을 다 하는데 있어서는 대중을 지도하고 여론을 일으키는 지대한 역할을 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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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경 아닌 국경『삼팔선』이북답파기 (3)


 동아일보 1946년 4월 8일자 2면.

 

평안반 본사특파원 KK생, 제비처럼 남국이 “그립다”, 컴은 거리에 총성이 은은


평양역에 나렷다 평양、여기가 북조선의 수도인가하는 생각이 화살같이 머릿 속을 스치고 지나간다 개찰구를 나서니 붉은 깃발 붉은 포스타 스타린 수상의 초상 토지개혁의 해설 등이 거리마다 부터있을뿐만아니라 소련부인과 소련어린이들까지 길거리에서 만나게 되였다. 기자는 여기가 제2의 적도(赤都)나 아닌가하고 조선의 지도를 펴보고 싶은 충동을 바덧다.


남북이 갈린지 일년도 못되어 평양의 자태는 너무나 엄청나게 소련식으로 변하고 말앗다 검으침침하고 기름끼 하나 돌지안는 평양 쓸쓸한 거리 정포를 벌리고 안저 잇는 상인들의 얼골에는 회색비치 지텃다. 거리에 다니는 사람들의 발거름은 무거웟고 얼굴은 한없이 우울해보였다


거리를 지나다니면 소련군완장과 군모를 파는 조고마한 점포가 눈에 띠인다 장총을 질머진 채 두 소련군이 그 가개 아페서 완장을 골르고 가격을 흥정하고 있다. 새로 설립된 북조선중앙은행(北朝鮮中央銀行) 아플지나 대동교(大同橋)쪽으로 발거름을 옴겻다 여기도 보안서원이 오고가는 시민을 감시하고 있다

 

3월도 중순이 훨신 넘었건만 날세는 그대로 추웟다.『북쪽손님이 오시드니만 날세까지 돌변 햇는 걸』하고 슬쩍 우서버리는 담화가 기자의 귀청을 울렷다 기후까지 소련식이냐 하고 기자는 혼자 우섯다. 강물도 흐렷다 모란봉 을밀대도 바람 속에 맴도는 것 같앗다 이 강을 오르나리든 검은 석탄배 네댓척이 강 건너 사장에 올라안진 채 동민(冬眠)을 게속하고 있다.


저녁을 먹고 나서 영화구경이라도 가보자고 하니 친구가 반색을 하며 말린다。바로 그때였다 아조 가까운 곳에서 총소리가 낫다 방안에 안잣든 사람들의 얼굴에는 긴장한 비처 돌앗다 잠깐 침묵이 게속되였다. 부억에서 설거질하든 친구의 부인도 놀랫는지 한참동안 그릇소리가 나지 안앗다『헛방 같은데.』하고 등무의 입에서 판결이 나린 다음에야 안심들하였다.등무는『이러케 마음을 조리고서야 어디 살 수가 있어야지』하고 허두를 내노코 자기 집도  삼팔이남으로 이사가겠다는 것이였다。


이곳에서는 여섯시 반만 되면 상점문은 불이나케 다다버리고 시민은 일곱시가 되면 거리에 나다니기를 꺼린다고 한다. 친구의 부인은『살아야 사는 것 같어야지요』하고『이웃집 순자네도 며칠 전에 서울로 이사갓다고』기자 보고 들으라는 것보다 자기 남편의 의견을 슬적 떠보는 것이였다. 친구는 비단 자기네뿐 만아니라 적어도 평양사람의 대부분이 떠날 수 있으면 삼팔 이남으로 가겟다는 사람들뿐이라고 들려주었다 부인은『벌서 간 사람은 얼만데요』라고 이 사□울 증명한다.


 평양의 민심은 말할 수 없는 불안을 품고 이대로 있다가는 이 불안에 눌리워 질식해 죽겟다는 것이 그 친구의 말의 전부였다。기자는 이 불안의 원인이 어데있는가를 물었드니『기자자격이 없구만 그래 육감으로 알지 못해 이제 총소리도 들엇겟지』라고 말문을 내노코는  보안 행정이 너머나 탄압적이라는 것을 비롯하야 이것저것 들려주었다. 그 중에는 십오륙세의 소년들을 모아 무□소년단을 조직하야 밤이면 이집저집에 보내여 탐정을 시켜온다고 한다。그 말을 듯고 기자는 온몸에 소름이 쪽 끼첫다。(게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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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팔선 이북답파기 함경도반 ①


동아일보 1946년 4월 14일자 2면.

 

HH본사 특파원, 누대(累代)살든 땅 버리고, 남으로 이동하는 주민군, 부안의 거리에 압살된 언론의 자유
『삼팔선 답파기의 제2대는 함흥을 기점으로 남으로 오는 피난민 속에 한사람이 되어 그들의 눈물나는 호소와 참상을 보며 들으며 함께 눈물지으며 이 답파기를 쓴다』


해방의 가을도 지낫고 진통의 겨울도 가고 해산의 봄도 왓것만 □다운 소식을 무궁화동산에  전하지 못하는 답답한 심정에 못내 서러워하는 기자는 오래간만에 함경선열차에 □을 실코 해방이후 처음 함경남북과 강원 등 3도의 실정을 듯고 보고 이 암행(暗行)의 답파기를 독자에게 전하려는 것이다


만주방면과 함경북도로부터 밀려오는 전재피난민과 인민위원회의 탄압적 행정에 실증을 느낀 백성들의 남부녀대한 이사보따리는 날이 따스하여옴을 따라 성진(城津)을 기점으로 하로  단한번식 운전되는 이 남행열차를 타려고 몃칠식 각지 정거장 대합실에서 굶주려 떨고 잇는 정경은 참으로 눈물겨운 현실이 아닐 수 없다.

 

소련(蘇聯)군이 기게를 또더갓기 때문에 요지음에야 겨우 조업(操業)을 시작하여 일부의 기게를 돌리고 잇다고 전하는 고주파공장을 뒤로하고 성진을 떠난 함흥행 여객열차는 수 천 명의 고단한 천만가지의 시□을 실고 무연탄 연기를 토하며 힌 갈메기 푸른 물결을 히롱하는 동해를 끼고 남으로 남으로 작정된 시간도 없이 천천히 달리는 동안 좌우의 산천을 도라보매 옛 얼골 새롭거늘 이 강산의 주인으로 여러대 조상의 뼈를 뭇고 한식(寒食) 추석(秋夕)에 성묘하든 자손의 정성도 집어치우고 주택과 가재도구도 버리고 잔뼈 굴거진 정든 고향을 도무지 살 수 없다고 하야 떠나는 사람이 늘어감은 이 어이된 일인가?
또한 이들의 안주의 락토는 과연 어대서 구하게 될 것이며 어떠게 건설되어 갈 것인가?

 

만주에서의 전재피난민은 과거 일본제국주의의 식민정책으로 수농(水農)개척에 무던히 힘써온 보람도 없이 만주인에게 재물을 빼앗기고 가족을 일코 쫏겨서 또는 도망처 그래도 고국이 그리워서라고 할가? 초라한 나그네로 3남에 돌아가거니와 이 고장에 뿌리박켜 살든 사람들조차 무수히 삼십팔도선을 넘으려하니 이 백성들의 안탁가운 사정은 무엇이며 사회의 실정은 과연 어떠한 것인가?

 

이 열차에 편승한 이동사찰대(과거 이동경찰)의 눈을 피하여가며 여러 사람의 입을 통하여 그곳 실정을 들어보건대 작년 8월 15일 일본이 황북하고 그달 하순 소련군이 진주한 이래 과거 좌익(左翼)운동에 관게하였던 실적 잇는 사람들이 소련군을 배경으로 인민위원회를 구성하고 보안대(保安隊)를 편성하여 행정 사법、치안의 모든 권한을 잡고 공산당과 표리일체가 되어 소련 그대로의 공산국가체제의 확입을 위하야 그 세포(細胞)단체인 노동조합과 농민조합 공산청년동맹 여성동맹 등 가지가지의 새로운 방게조직으로 대중을 파악하기에 힘썻으나 소련군이 진주하면서부터 시게 만연필『트렁크』현금이 가두에서 약탈당하고 밤 통행금지시간 중에는 주택 상점 사무소에 침입하야 70여 탄을 발사한다고 자랑하는『따발총』으로 위협하며 재물을 강탈한 우에 부녀자를 □욕하는 범행이 속출함에 이르러 일반의 불안과 비난은 날로 증대하고 원성과 분노는 날로 놉파감에도 불구하고 인민의 리익을 옹호하는 대표기관으로 자처하면서도 인민위원회와 보안대는 폭행을 저지할 방책을 마련하기는 고사하고 오히려 그러한 사실을 엄페하고 붉은 군대는 우리조선을 해방시켜준 은인이므로 무한의 감사를 들여야할 것이라고 피해가측을 꾸짓지를 일수로 하고 18세 이상의 청년으로만 구성된 보안대원의 횡포 또한 자심하여 민심의 리반 되는 거리는 천리라만리라 형용할 수 없게 머러저 가고만 잇는 형편이다.


언론의 자유를 봉쇄당한 현재의 실정으론 정당한 의론도 주장도 불평도 불만도 호소도 애원도 투쟁도 반박도 입을 열어 말할 수 없고 귀를 기우려 드를 수 없게 되였으니 이른바 유구무언이 되고 만세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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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양명문, 소련군의 만행, 전환기의 내막, 조선일보사출판국 편, 조선일보사, 1982, 53~54쪽

 

그러던 중 8월 26일로 기억된다. 이날 마침내 소련군이 평양에 몰려들기 시작했다.이들은 소만국경을 넘어 청진 나진 함흥 원산을 거쳐 들이닥친 대부대와, 또한편으로는 만주의 길림 할빈 봉천 안동을 거쳐 신의주로 해서 평양에 들어온 부대도 있었다.…물론 전쟁에 시달리어 남루하고 거칠어지기도 했겠지만, 우리들의 신경으로는 당해낼 수 없을 만큼 추잡하고 우악스러웠다. 그들은 길을 걸으면서도 노상 해바라기 씨를 연신 씹으며 다녔다. 해바라기씨를 입에 넣자마자 껍질을 뱉어버리는 묘한 기술을 발휘하기도 했다. 소련군대가 지나간 거리바닥은 온통 해바라기껍질이 너저분히 깔리는 것이었다.

 


2.김국후, 평양의 소련군정-기록과 증언으로 본 북한정권 탄생비화, 한울, 2008,139쪽.

 

북한 문화성 제1부상을 지낸 정률(카자흐스탄 알마티, 1991.10.18)과의 인터뷰. 계속해서 정률의 증언을 들어보자.

1946년 봄 소련군정이 흥남비료공장을 몽땅 뜯어 소련으로 보낸 후 흥남시민들이 들고 일어나자 ‘흥남비료공장은 조선인이 아니라 일본인 소유’라며 설득했습니다. 민심이 가라앉지 않자 1947년 뜯어갔던 기계 등의 시설을 다시 흥남으로 보내오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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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6  정치지도자 지지도


[ ..... 이승만 32%, 김구 22%....박헌영 10%, 김일성 3%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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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미군정이 실시한 두 차례의 정당 지지도 조사에서 우파 정당은 43%·40%였던 데 비해, 좌파 정당은 33%·31%에 그쳤다.


정치지도자 지지도를 묻는 조사에서는 이승만 32%, 김구 22%, 김규식 9% 등 우파 쪽이 72%인 반면, 여운형 13%, 박헌영 10%, 김일성 3% 등 좌파 쪽은 28%에 그쳤다.


같은 해 “미국인이 소련인보다 더 심한가”란 질문에는 ‘아니다’(68%)가 ‘그렇다’(16%)를 압도했다(전상인, ‘고개숙인 수정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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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3.28. 금요일 동아일보

 

남쪽 차저 온 북조선동포

매일 평균 천5백명을 돌파

 


봄을 찾어 38선을 넘어 오는 우리 겨레의 피난동포들은 16개소의 검역소에서 검역? 구호를 실시하고 있는데 동두천 방면으로부터 매일 평균 9백여명 청단 방면으로부터 2백여명이 드러오고 있으며 그외의 산간협로를 거처 들어오는 동포도 만호므로 매일 평균 1천 5백명이 남조선으로 드러 오고 있는 형편이다.


검역소의 조사

 

 


1947.7.1. 화요일  동아일보

 

5월에 북쪽에서 온 동포

7만6천6백여명

 

보건후생부 발표에 의하면 지난 5월중 38선을 건너 북조선으로부터 남조선으로 넘어 온 동포들에게 개성을 비롯한 6개 집결지 검역소에서 시행한 검역성적은 다음과 같다.


예방주사인수 35,389

소독인원수 38,786

보통병자수  1,968

전염병자수


합계 76,654

 

 

 


[ ..... 해방 이후 남하한 조선인 총수는 150만에 달하고 있으나 북조선으로 이동한 조선인은 그 1%에 불과 ....... ]

 

방한AP특파원 램버트, 조선 제반상황 보도


조선일보    1947년 10월 21일

 


[東京20日發AP 合同]최근 서울을 방문하였던 AP특파원 램버트는 조선상황에 관하여 如左히 보도하였다.


“최근 조선 피난민 구제사업에 종사하는 남조선 미군정보국 及 남조선인으로부터 입수된 사실로 보면 조선에 피난민 이주상황은 과반 북조선을 시찰한 안나 루이제 스트롱 여사의 보도와는 전연 대조적인 것이며 즉 북조선에 이주하는 조선인은 전시 남방에 강제징용 갔던 북조선인이 아니면 북조선 공산당인 것이다.


 그리고 해방 이후 남하한 조선인 총수는 150만에 달하고 있으나 북조선으로 이동한 조선인은 그 1%에 불과한 것이다. 최근 남하 조선인수는 극히 감소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38線에 있는 소련경비대의 취체가 심해진 까닭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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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북조선이 남조선보다도 큰 언론의 자유가 있다는 것을 의심하고 있으며 북조선인민이 총의로서 미국을 제국주의라고 비난하고 스탈린원사 及 金日成을 숭배하는데 일치하고 있다는 보도에는 놀랄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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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월남자 대열이 형성되어 생지옥 같은 북한의 참상을 낱낱이 폭로함으로써 남한 국민들은 ‘안티 북한’의 지표를 내걸기 시작한 것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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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남이 건국 이정표의 단초

 

실향민 단체의 부설 연구소에서 지난 90년대에 ‘이북도민의 월남동기 및 월남시기’ 여론조사를 실시한 결과 다음과 같은 통계를 볼 수 있었다. 실향민 1세(직접 월남 당사자) 1030명을 무작위로 뽑아서 “귀하가 월남하게 된 직접적 동기는 무엇인가?”라는 설문에 대하여 대답하기를

 

ㆍ북한공산통치를 체험하고 공산당이 싫어서 … 50.8%

ㆍ북한에서 반공투쟁을 하다가 피신 또는 탈출하여 … 16.1%

ㆍ공산당에 의해 반동분자(자본가, 지주 종교인 등)로 찍혀서 …15.1%

ㆍ어린 나이였으므로 그저 어른들 손에 이끌려서 … 3.2%

ㆍ기타 10여 가지 이유의 합계 … 14.8%

 

이 통계표에서 보는 바와 같이 공산북한 체제에 등을 돌리거나 반동으로 쫓겨서 등 적극적인 탈북 동기가 82%에 달했다. 그러면 절대다수 월남자들은 북한에서 무엇을 보고 듣고 체험했기에 고향조차 버렸던 것인가.


그들은 소련군의 노략질과 폭행을 보았다. 가짜 장군 김일성의 독재를 보았고 자유민족진영에 대한 탄압을 보았다. 공산체제의 강화와 토지개혁의 기만성을 보았고, 종교박해를 겪었으며, 정치보위부라는 비밀경찰에 신경을 써야 했고, 공산당 외곽단체 강제 가입 강요에 시달려야 했다. 이승만 김구 등 민족계 지도자에 대한 악의적 성토를 줄곧 들어야 했으며, 인민군의 강화로 남침 준비에 광분하는 낌새를 감득할 수 있었다.


월남자들이 전하는 북한의 실상을 한마디로 ‘생 지옥’같은 세상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의 가정법으로, 만약 월남자들이 발생하지 않았더라면 남한에서의 ‘북한관(觀)’은 어떻게 되었을 것인가.

평양방송이 불어대는 소위 ‘민주개혁’의 성과로 북한은 이상적인 지상낙원처럼 비쳐질 판이었고, 남로당을 비롯한 좌익진영의 선동선전에 현혹되어 남한의 민심도 북한체제를 추종해야 되는 것으로 왜곡될 판이었다. 월남자 대열이 형성되어 생지옥 같은 북한의 참상을 낱낱이 폭로함으로써 남한 국민들은 ‘안티 북한’의 지표를 내걸기 시작한 것이다.


월남자들의 발걸음이야말로 자유대한을 건국하는 이정표의 첫걸음이었다고 말하는 소이가 거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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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금도 가만히 쉴 시간을 주지 않더라 .......

 ... 북한 생활은 군대보다 더 들볶이는 것이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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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에서 살다가 6·25때 월남했다는 그는 "북한에는 언론, 집회, 종교 등 남한에서 누릴 수 있는 자유가 없다"며 "뿐만 아니라 위에서 내려오는 지시에 의해 자아비판, 농민동맹 등을 수시로 해야했다…조금도 가만히 쉴 시간을 주지 않더라"고 회고했다.


이어 "나도 군생활을 10년 했지만 북한 생활은 군대보다 더 들볶이는 것이었다"라면서 "아마 휴전선에 구멍이라도 나면 이북엔 사람들이 한명도 없을 것…다 넘어오지"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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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0. 인민의 얼굴에는 飢餓의 색채가 있고 태도에는 공포가 ........ ]

 


  *   1948.4.  [  南北協商  참가 某黨의 결산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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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북한의 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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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韓人 當路者들은 독립은 못 되었을 망정, 정권의 이양을 받았다고 만족해하는 동시에 傲驕한 태도가 현저한 것


7. 한인 당로자들의 소련과 소련인에 대한 호감은 우리 조상들의 明에 대하였던 그것과 꼭 같은 것

8. 가로와 실내에 遍滿하게 金××과 스××의 사진을 모신 것


9. 전시 기분이 충만하여 투쟁목표를 확정한 교육을 실시하고 있는데, 국제적으로는 미국을 적이라고 규정하고 국내적으로는 ×××박사와 金××씨를 친일파·민족반역자의 수괴로 지정한 것


10. 인민의 얼굴에는 飢餓의 색채가 있고 태도에는 공포가 있는 것

11. 전부가 인간성을 떠나 기계화한 것

12. 자유기분이 결여한 독재적 태도가 처처에 나타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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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南北協商을 비판 : 某黨의 결산서>
 
 
게재지명 조선일보
 
게재일자 1948년 10월 10일
 
 
 

1948년 4월 미소 양군정하에 있어 자율적이란 입장으로 평양에서 개최한 남북정당단체대표자대회(소위 남북협상)는 好不好간에 후일 조선의 독립사상 한 페이지에 기록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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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는 남북협상에서 귀경후 ×월 ×일, 모 당 ××위원회를 통과한 일부이며 익명 외 첨삭이 없음을 부언하여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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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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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방송 이외의 방송을 청취하는데 대한 처벌은 재산몰수 급 6개월 징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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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7.11


[ ...... 유엔의 南北韓同時選擧를 통한 統一案이 발표되자

       共產黨은 선거에 승산이 없기 때문에 소련과 국내의 共產勢力이 맹렬하게 반대 ........   ]

 

美軍政의 韓國政治指導者에 對한 政策硏究 (1945〜1948)

李 仁 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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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美國務省은 10월 9일, 점령군의 철수문제는 統韓 獨立政府樹立問題 解決의 필수적 부분으로 알고 있으며 소련제의에 대해 유엔총회의 주의를 환기시켰다고 回信하였다.139)


그리고 유엔의 미국대표는 10월 17일, 臨時委員團의 감시아래 남북한에서 선거를 실시하여 人口比例로 대표를 선출하고 국회와 정부를 수립해서 이 정부로 하여금 防衛軍을 조직하게 한 다음 占領軍을 철수하게 한다는 決議案을 제출하였으며 총회는 11월 14일 이 안을 採擇하였다.140) 그동안 소련에 대한 美側의 宥和政策으로 인해 북한을 共產化하고 남한마저 赤化하려는 소련의 팽창정책에 守勢만을 지키던 미국은 이제야 유엔을 통한 外交로 信託統治가 아닌 民族自決主義 原則에 입각한 한국의 통일독립을 추진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북한에 16萬의 赤軍을 투입하여 이미 共產政權을 수립해 놓고 있는 소련이 비록 유엔의 決議라 하여도 共產化를 막게 할 自由選擧를 북한에서 거부할것은 國際間 權力政治를 아는 사람이면 추측이 가능하였고, 그것은 통일을 갈망하는 한국민의 마음을 어둡게 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유엔의 南北韓同時選擧를 통한 統一案이 발표되자 共產黨은 선거에 승산이 없기 때문에 소련과 국내의 共產勢力이 맹렬하게 반대한 것은 물론이다. 그동안 信託統治를 반대하며 즉시 독립을 주장해 온 민족진영에서는 이 유엔의 결의를 크게 환영하였으나 韓國獨立黨을 중심으로 하는 各 政黨協議會는 美蘇兩軍의 철퇴를 요구하며 南北政黨의 대표회의를 구성하여 統一政府를 세우라고 주장하였다.141) 이와 같이 金九를 추종하는 韓國獨立黨系列에서는 계속해서 선거를 기피하며 共產黨의 주장과 같이 兩軍撤收와
南北韓政黨代表들의 卓上會議로 정부를 수립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11월 21일, 民族陣營 70개단체들이 이러한 주장은 共產黨의 대변자로 볼 수밖에 없다고 규탄하자 金九는 이 주장을 보류하게 하였다.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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歸國後 李承晚과 政治路線을 같이 하면서도 그의 追從者들과 獨自的 路線을 취하기도 하였던 金九는 유엔選擧案을 반대하는 주장이 규탄을 받게되자 12월 1일 대체로 유엔의 안을 찬성하면서 이승만의 선거를 통한 政府樹立案을 支持하는 談話를 발표하였다.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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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지도자 지지도를 묻는 조사에서는 이승만 32%, 김구 22%, 김규식 9% 등 우파 쪽이 72%인 반면, 여운형 13%, 박헌영 10%, 김일성 3% 등 좌파 쪽은 28%에 그쳤다. 같은 해 “미국인이 소련인보다 더 심한가”란 질문에는 ‘아니다’(68%)가 ‘그렇다’(16%)를 압도했다(전상인, ‘고개숙인 수정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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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第 1次 大統領은 누구인가?

      李承晩 博士 1,916인 29% 弱
      朴憲永 84인 1% 强  ........    ]

 

동아일보 1946년 07월 23일   


한국여론협회, 초대 대통령과 식량정책 등에 대한 여론조사결과

 

韓國與論協會는 (略) 17일 서울시내 鍾路 南大門 鍾路 4정목의 3개소 통행인 6,671인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설문으로 여론조사를 하였다는데 그 結果는 다음과 같다.


(問) 第 1次 大統領은 누구인가?


李承晩 博士 1,916인 29% 弱

金九 主席 702인 11% 弱

金奎植 博士 694인 10% 强

呂運亨 689인 10% 弱

朴憲永 84인 1% 强

其他 110인 2% 弱

모르겠다 2,476인 37% 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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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정 정보보고서는 조봉암이 1946년 9월 신당 창당과 관련된 집회에서 "5퍼센트밖에 지지층을 가지지 못한 공산당이나 극우세력이 정권을 독점하고자 하는 것은 잘못"이라며 "나는 95퍼센트의 중간층을 중핵으로 한 정당을 조직하고자 한다"고 말했다고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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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회주의의 구호를 걸었다면, 인민들은 우리를 무서워했을 것이며 곁에도 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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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공산주의는 공산국가 소련과 결부되어 폭동, 혁명, 테러와 같은 부정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므로 대중에게 쉽게 접근하기 위해서는 공산당 대신 영국의 노동당(勞動黨)과 같은 온건한 복지정당으로 위장하는 것이 편했다. 그 때문에 김일성은 자신의 조직을 북조선노동당(북로당)으로 바꾸고, 남한에서도 박헌영, 여운형, 백남운의 좌파 3당을 남조선노동당(남로당)으로 통합하게 했던 것이다. 1945년 11월 신의주 학생 사건에서 많은 학생들이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죽고 다치자, 김일성은 현지로 찾아가 유감을 표시하면서,“우리 노동당이라는 것은 다른 게 아니라 민주주의를 하자는 거요. 우리가 민주주의를 하자는 거지, 공산주의를 하자는 것이 아니요”라고 자신을 감추었던 것이다.

 

공산주의를 민주주의로 위장한 김일성의 전술은 성공했다. 그러므로 그는“그때에(해방 직후에) 우리가 사회주의의 구호를 걸었다면, 인민들은 우리를 무서워했을 것이며 곁에도 오지 않았을 것입니다”라고 만족스럽게 회고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에 따라 ‘공산주의 혁명’도 ‘민주적 개혁’으로 둔갑했다. 그리하여 토지개혁의 혁명적 조치로 몰수된 지주들의 토지에 대한 경작권이 농민들에게 분배되었다. 그리고 화폐 개혁의 혁명적 조치로 상인들의 자본이 몰수되었다. 그 결과로 기득권을 가진 식자층과 유산계급은 뿌리가 뽑히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북한 사회에 인재 부족의 재앙을 가져 왔다. 이른바‘민주개혁’으로 불리는 공산주의 혁명으로 얼마나 많은 인재들이 사라졌는가는 김일성대학을 비롯한 대학들의 이공계(理工系) 신입생이 부족한 사실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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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www.sdjs.co.kr/read.php?quarterId=SD201002&num=390
 
2010년 여름호 
[특집] 이승만 시기의 보수세력과 민주제도

[이주영 | 건국대학교 사학과 명예교수]

 

 

 

[ ......  ‘조선인민공화국’ .... 이승만을 주석으로 발표 ........

  ......  공산당의 朴憲永도 이승만의 귀국 후 그를 찾아가 당수가 되어 줄 것을 요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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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3·1 운동 직후 수립된 漢城임시정부에서 執權官總裁, 統合임시정부 임시대통령, 상해임시정부 국무총리, 블라디보스톡임시정부 국무총리 등으로 선출된 정통성을 가지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李王家의 후예, 미국과 중국에서의 독립운동, 한국인 최초의 미국 프린스턴대학 정치학박사 등의 화려한 배경을 가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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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5일 일본천황의 항복방송과 동시에 건국준비위원회를 발족시키고 9월 5일에 전국인민대표회의를 열어 ‘조선인민공화국’이라는 정부수립을 선포했던 呂運亨이 9월 14일 발표한 조각에서 김구·허헌·김규식·여운형 등 국내외의 지도적 정치가들을 모두 망라한 중에서도 이승만을 주석으로 발표한 것은, 이승만이 귀국하기 이전에도 그는 국내 정치인들 로부터 가장 높은 위치의 정치인으로 인정받고 있었음을 나타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3)


또한 공산당의 朴憲永도 이승만의 귀국 후 그를 찾아가 당수가 되어 줄 것을 요청한 바 있으며,4) 우익세력의 최대정당이었던 韓民黨도 1945년 9월 16일의 창당대회에서 이승만을 서재필·김구·이시영·문창범·권동진·오세창 등과 함께 당의 영수로 추대하였다. 이외에도 1945년 11월 2일에 좌우익의 모든 정당 및 단체들이 모여 결성한 獨立促成中央協議會 에서도 이승만은 회장으로 선출되었다.5)


1946년 2 월 미 군정하에서 공산당을 제외한 임시정부요인, 한민당, 신한민족당, 국민당, 인민당, 무소속, 기독교, 천주교, 불교 등 모든 정치세력들이 참가한 비상국민회의 최고위원회가 성립되었다. 비상국민회의의 최고정무위원으로 구성된 민주의원은 처음에는 하지중장의 자문기관으로 발족하였으나 곧 정부수립을 준비하는 과도정부적 성격을 띠게 되었다. 이 비상국민회의 최고위원회에서도 이승만 은 민주의원의 의장으로, 김규식은 부의장으로, 그리고 김구는 총무에 선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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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5·10선거로 수립된 제헌국회에서 이승만이 국회의장으로 선출될 때에도 재석 198명 중에서 188표를 얻어 당선된 점이라던가 대통령선거에서도 180표를 얻어 압도적으로 당선된 것들은 당시의 정치인들이 이승만이 대통령이 되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할 정도로 이승만의 집권은 이변이 아니라 정상적인 절차였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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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李承晩 1,024표 .... △朴憲永 62표, △金日成 33표 .........    ]

 

동아일보 1948년 06월 27일   

조선여론협회, 초대대통령 선출 가두여론조사

 

조선 여론협회에서는 23일 서울시내 5개소에서 초대 대통령은 누구를 원하오하는 설문으로 통행인 1천5백명의 여론을 조사한 바 다음과 같은 결과를 얻었다.


△李承晩 1,024표, △金九 568표, △徐載弼 118표, △金奎植 89표, △朴憲永 62표, △金日成 33표, △許憲 30표, △李靑天 26표, △曺奉岩 18표, △申翼熙 12표, △이외 23명 45표, △무효 475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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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주의자들은 그들의 상전인 소련의 지령으로 선거를 반대하고 있다. 그들은 절대적인 공산당의 형식과 지배 이외에는 여하한 형식의 비밀투표에 의한 선거를 원하지 않는다. 왜그러냐 하면 그들은 선거를 행하면 자기의 국가를 공산주의의 일위성국가로 팔아 먹고자 하는 조선인의 수효가 극소수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판명될 것을 잘 알고 있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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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중대한 사실은 공산당과 밑走狗들의 선거에 대한 모든 선전 및 위반 또는 선거를 배척하고 반대하는 자들의 온갖 수단에도 불구하고  남조선내의 전유권자의 90% 이상이 등록을 하였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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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7.12.


 [ .... 북조선을 소련측이 UN위원단에게 공개하기를 거부하는 이유를 나는 이해하기가 곤란하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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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UN총회 석상에서 행한 미측 대표 덜레스씨의 발언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은 것이다.


‘우리는 남조선에서의 미군 또는 미 과거의 업적이나 실패를 감추려고 하지 않는다. 우리는 蘇측이 비판하는 바 많은 남조선미군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남조선을 위원단에게 공개하기를 주저치 않는 바다.

그런데 가장 민주주의인 시책이 질서 정연하게 실시되고 있다는 북조선을 소련측이 UN위원단에게 공개하기를 거부하는 이유를 나는 이해하기가 곤란하다.’

라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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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유엔한국임시위원단 중국대표, 유엔한국임시위원단에 대해 언명
 
 
게재지명 조선일보, 서울신문
 
게재일자 1947년 12월 28일
 
 
 
조선파견 UN위원 중국대표 劉馭萬(유어만) 환영회는 26일 하오 6시부터 국제외교연구소 주최로 天香園에서 성대히 열리었는데 석상 劉씨는 UN위원단에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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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8.4.


[ .....  집집마다 스탈린과 김일성의 사진을 일제시대의 천황사진 모시듯 위하고  ........ 

  .....  요즈음은 금족령이 내려 외출을 못한다고 .........  ]


[ ..... 학생들이 열을 지어 노래를 부르면서 지나가는데 첫째 그 복색이 빈약하기 짝이 없고 그중에는 걸레같은 옷을 .......     ]

 

동아일보 1948년 04월 27일   

신화당당수 文容彩, 북조선시찰담 피력

 

남북협상에 참석하기 위하여 지난 20일에 서울을 출발한 新化黨 당수 文容彩는 38선 부근 남천에 4일동안 강금당하고 있다가 24일 아침에 서울에 돌아왔는데 방문한 기자에게 며칠동안 그가 보고 온 이북의 생생한 소식을 기자에게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였다.


“우리는 이번 남북회담을 기회로 그 회담광경을 구경할겸 이북의 모든 상황을 좀 살펴보려고 갔는데 회담 구경은커녕 38경계선 부근 남천에서 약 나흘동안이나 감금당하고 말았는데 그들 관헌의 소행으로 미루어 남북회담이 환멸의 비애를 느끼고 서울로 돌아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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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우리여관이란 숙소에 들어갔는데 감시하는 보초가 총에다 칼을 꽂고 문밖에도 못나가게 하고 변소에 갈 적에도 보초병이 따라 다니니 산보삼아 거리에 나가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들의 눈을 속여 잠깐 문밖에 나가 보니 거리는 쓸쓸하고 사람하나 볼 수가 없어 옆집 노인에게 그 연고를 물어보니 요즈음은 금족령이 내려 외출을 못한다고 머리를 쩔쩔 흔들면서 기운없이 대답하였다. 다 같은 피가 흐르고 있는 동족끼리 말 한 마디 못하게 외출을 금지하는 이북 관헌들을 나는 다시 한번 새롭게 원망하고 분함을 금치 못하였다.

 

그런데 저녁때쯤 되니 거리에 학생들이 열을 지어 노래를 부르면서 지나가는데 첫째 그 복색이 빈약하기 짝이 없고 그중에는 걸레같은 옷을 감고 있는 학생들이 있어 남조선 학생들은 아직 행복이라는 것을 절실히 느끼었다.


그리고 집집마다 스탈린과 김일성의 사진을 일제시대의 천황사진 모시듯 위하고 있는 것을 보니 일제시대의 재판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났었다.


23일 밤에는 평양 중앙민전에서 누가 왔다기에 그이를 만나 여러가지 이야기하던 끝에 실업자는 없는가 하고 물어보니 실업자가 많다고 대답하기에 어째서 실업자가 없다는 곳에서 그렇게 실업자가 있는가 하고 반문하니 우물쭈물 답변을 못하였다.


그리고 그쪽 신문을 몇 가지 주는데 보니 전지면이 백힌듯이 꼭같은 공산주의 선전이고 변화가 없어 싫증이 나서 그래도 남조선의 신문이 재미있다고 생각하였다. 하여간에 이북은 말 한마디 자유롭게 못하는 가슴이 답답하고 감옥에 얽매여 있는 듯한 곳이라는 감을 주게 한 것은 아마 나 개인의 감상뿐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   1948.4.  [  南北協商  참가 某黨의 결산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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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북한의 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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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韓人 當路者들은 독립은 못 되었을 망정, 정권의 이양을 받았다고 만족해하는 동시에 傲驕한 태도가 현저한 것


7. 한인 당로자들의 소련과 소련인에 대한 호감은 우리 조상들의 明에 대하였던 그것과 꼭 같은 것

8. 가로와 실내에 遍滿하게 金××과 스××의 사진을 모신 것


9. 전시 기분이 충만하여 투쟁목표를 확정한 교육을 실시하고 있는데, 국제적으로는 미국을 적이라고 규정하고 국내적으로는 ×××박사와 金××씨를 친일파·민족반역자의 수괴로 지정한 것


10. 인민의 얼굴에는 飢餓의 색채가 있고 태도에는 공포가 있는 것

11. 전부가 인간성을 떠나 기계화한 것

12. 자유기분이 결여한 독재적 태도가 처처에 나타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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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南北協商을 비판 : 某黨의 결산서>
 
 
게재지명 조선일보
 
게재일자 1948년 10월 10일
 
 
 

1948년 4월 미소 양군정하에 있어 자율적이란 입장으로 평양에서 개최한 남북정당단체대표자대회(소위 남북협상)는 好不好간에 후일 조선의 독립사상 한 페이지에 기록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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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는 남북협상에서 귀경후 ×월 ×일, 모 당 ××위원회를 통과한 일부이며 익명 외 첨삭이 없음을 부언하여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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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9. 5.


  5·10선거 1주년에 즈음한 각계의 여론 동향
 
 

  동아일보
 
  1949년 05월 10일
 
 

 
아시아 대륙에 있어서 침투 확대되고 있는 침략적 공산주의의 확대 번식의 방지를 제창하는 세계 민주주의 정치세력의 여론은 서구를 중심한 북대서양동맹과 동 성질의 극동 공동방위를 목적으로 하는 태평양 인접 민주주의 제국 간의 공동정치목표를 위한 방위동맹 체결 촉구의 소리가 높은데 대한민국정부 수립의 역사적 기반을 이룬 5·10 총선거 1주년을 맞이하고 9일 국내 중요 정당·사회단체에서는 현하 당면한 정치문제에 언급하여 각각 다음과 같은 견해를 표명하고 있다.

 

 國民會

 

1. 38선은 미소의 책임이다. 따라서 그 책임을 이행하지 않고 또 북한에서 蘇軍의 침략공세와 그들의 지령으로 남벌을 計策하는 공산군이 준동하는 한 韓美나 태평양의 군사적 동맹을 체결한 후 철퇴함이 당연하다. 우리는 금번 개성전투 지휘자가 소군임을 지적한다.


2. 한국은 국련 결의에 의하여 합법적으로 성립되었고 또 승인받은 당당한 국가이다. 따라 국련가입은 당연한 귀결임에도 불구하고 소련의 거부권 행사는 실로 부당한 처사로서 이는 그들의 약소국가 침략정책의 表證이라 아니할 수 없다.

우리는 소련의 반성과 한국가입 거부를 취소하기를 희구하는 동시 다수 국가의 의사를 무시하는 비민주주의적 안보거부권 조항을 세계 公論에 의하여 삭제함을 강력히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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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년 총선거 대비, 남북통일의 구현책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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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문


1. 명년에는 남북통일 총선거가 실시될 것으로 보는가

2. 남북통일 총선거가 실시되면 좌우의 비율은 어떻게 될 것으로 보는가

3. 만일 명년에 통일 총선거가 실시되지 못하는 경우에는 월남동포의 특별선거제 문제가 재대두될 것으로 예측되는데 여기 대한 견해 여하

 

 朝民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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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민족진영이 절대 다수를 점령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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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韓獨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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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우익이 다수를 점령할 것으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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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國民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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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애국진영이 절대 우세를 점령할 것은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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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大韓勞農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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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右二·左一쯤으로 낙착되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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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大靑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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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우리가 생각하는 방안으로 통일이 성취된다면 좌익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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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10선거 1주년 기념사


 
5·10선거 1주년의 역사적 기념일에 際하여 李始榮 부통령을 위시한 정부 수뇌층과 재한 외국명사의 의의심장한 기념사의 요지는 각각 다음과 같다.

 

△이북의 참가요망, 부통령 李始榮:

어느덧 역사적 5·10선거의 1주년을 맞이하였다. 회고하면 기쁨과 걱정이 많다. 어느 나라와 어느 주의자들은 자기들의 방침을 고려하여 5·10선거를 절대 배격하였다.


그러나 전통적 대의명분이 있는 우리 동포들은 국제적 公然한 자유선거로 제헌과 정부수립에 일로 매진하여 蘇국가를 除하고 세계적 48개국의 일치승인을 얻어 우리 대한민국이 국제단위의 일원으로서 통일 방면에 적극 추진하고 있으니 이 얼마나 기쁜 일이냐. 2주년 기념식에는 남북이 합석하여 이 기념식이 있어야 할 것을 빌어 마지않는 바이다.

 

△민국기초 확립, 국회사무총장 談:

1947년 유엔총회의 결의와 국내 민주진영의 열렬한 추진으로 거행된 작년에 5·10선거야말로 세기적 대성사이었다. 이것은 오로지 2천만의 애국열에서 나타난 것인데 이로써 성립된 국회는 그동안 민의를 대표하여 헌법, 농지개혁법적 중요법안을 제정하여 대한민국의 기초는 점차 확립되어 가고 있다. 불원 북한에도 총선거를 행하여 현재 100명의 공석을 채우고 평화와 통일이 실현될 것이다.

 

△민주승리를 확신, 국회의장 申翼熙:

5·10선거 당시를 회고하건대 소위 남북협상이니 지명추천이니 하여 여러 가지 비민주적인 말썽이 많았으나 우리는 이를 극복하고 유권자 총수의 9할 3푼까지가 민주주의 국가건설을 위하여 투표하였다. 이것은 민주국가 어느 나라에서도 보기 드문 일이요, 더욱이 파괴분자들의 박해와 위협이 극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전부 전무후무의 격으로 질서정연하게 투표를 감행하였다는 것을 무능력·무조직하다고 비평하던 외국사람들로 하여금 경탄케 하였다. 결국 민주주의의 正經大道는 반드시 통한다는 위대한 교훈을 받았다.


앞으로 우리는 하루빨리 국토를 통일하여 북한 1천만의 대표 100명을 선출하여 대한민국 국회의원 정수를 보충하여야 할 것인데 이것은 우리의 민주주의 진영 즉 민족진영이 총단결로써만 실현될 것이다. 최후의 승리는 진리가 점유하는 것으로 민주주의의 經原的 대원칙은 반드시 실현될 것이요, 우리의 올바른 주장은 반드시 관철될 것을 확신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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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1949년 05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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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에서 살다가 6·25때 월남했다는 그는 "북한에는 언론, 집회, 종교 등 남한에서 누릴 수 있는 자유가 없다"며 "뿐만 아니라 위에서 내려오는 지시에 의해 자아비판, 농민동맹 등을 수시로 해야했다…조금도 가만히 쉴 시간을 주지 않더라"고 회고했다.


이어 "나도 군생활을 10년 했지만 북한 생활은 군대보다 더 들볶이는 것이었다"라면서 "아마 휴전선에 구멍이라도 나면 이북엔 사람들이 한명도 없을 것…다 넘어오지"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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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북한주민의 생활 속엔 자유시간이 없다고 ...... ]

   [ .... "가장 크게 느꼈던 점은 국민 중심으로 돌아간다는 사회라는 겁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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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은 인간다운 삶이 없는 곳이에요. 제가 있었던 15호 수용소 수감자들의 죄명만 해도 "김일성의 목에 혹이 났다"고 말한 사람, 김일성 석고상을 깬 사람, 김일성 초상이 있는 신문으로 장판을 바른 사람, 외국 비디오를 보거나 이웃에게 돌린 사람, 남한 방송을 들은 사람, 말실수 등 정말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죄도 될 수 없는 죄명으로 8년, 10년을 지내거나 또는 그 곳에서 영영 죽게 되는 겁니다"


 김씨는 모든 생활이 당과 조직에 얽매여 있는 북한주민의 생활 속엔 자유시간이 없다고 설명했다. 학습, 총회, 수요강연회, 생활총화 등 일주일 단위로 모든 조직활동이 짜여져 있다. 한 사람 당 직장에서, 당조직에서, 그리고 동네 인민반장에게 3중으로 통제를 당하게 된다.

김씨는 직장생활 외 자유롭게 여가를 보낼 수 있는 남한 사람들은 상상도 못할 생활이라고 털어놓았다. 생활 속 세세로운 사항도 "청바지를 입지 말데 대하여" "두발을 단정하게 할데 대하여" 등의 "∼에 대하여"라는 수많은 교시가 내려와 생활총화를 통해 서로를 지적하면서 통제하는 구조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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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영순씨가 느끼는 '대한민국'은 어떤 모습일까. 김씨가 거론한 '감동'들은 대부분 너무나 당연해 남한 사람들이 느끼지 못하는 생활 속의 작은 부분들이었다.


"가장 크게 느꼈던 점은 국민 중심으로 돌아간다는 사회라는 겁니다. 경찰서에 붙어있는 '최상의 치안서비스를 위해서'라는 말이나 공사장에 붙어있는 '불편을 끼쳐드려 정말 죄송합니다'라는 말을 보고 정말 울었습니다. 모든 것이 체제우선인 북한에서는 생각할 수도 없었던 것이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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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8.25.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흑백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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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월 25일 북한 정권을 수립하기 위한 선거가 실시되었다. 북한 지역 선거는 212 선거구에 227명의 입후보자가 등록했다. 이는 민전 후보에 반발해 일부 선거구에 복수 후보가 나왔기 때문이었다.


선거 방식은 흑백 찬반투표였다. 선거 결과 전체 유권자의 99.97%인 452만 4,942명이 투표했고, 민전 후보에 대한 찬성률은 98.47%였다. 이렇게 선출된 후보들은 북한 지역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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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선거에서 투표율과 찬성율을 보면 제3기 대의원부터 1백% 투표에 1백% 찬성을 선전해오다가 최근 9기, 10기 선거부터는 99.78%, 99.9% 투표, 1백% 찬성을 주장하고 있는데 선거에서 1백% 찬성이란 있을 수 없다. 결국 1백% 찬성이란 북한 헌법에 일반, 직접, 평등, 비밀선거를 규정(제89조)하고 있으나 실제로는 자유의사에 의해 투표 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1~2기 대의원 선거에서는 찬성자는 백함, 반대자는 흑함에 넣는 흑백함식 투표함제를 채택하였으나 1962년 3기 선거이래 단일투표함제로 바뀌었다.

찬성자는 그대로 함에 넣고 반대자는 「×」표를하여 투표함에 넣게 하고 있다. 따라서 감시자는 누가 「×」표를 하는지를 손쉽게 감시할 수 있도록 하여 1백% 찬성투표를 강요하고 있다.


대의원은 인구 3만명당 1인의 비율(제1, 2기는 5만명당이었음)로 선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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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10월 초, 나는 파견 연구원들 그리고 파견 대학생들과 함께 평양을 떠났다. 두만강을 건너자 소련군용 트럭들이 기다리고 있다가 우리를 ‘워로실롭그라드 역’으로 태우고 갔다. 운전이 어찌나 난폭한지 차가 마구 요동을 쳐서 튼튼하지 못한 트렁크들은 박살이 나고 말았다.


역에서 돼지비계가 둥둥 떠 있는 고깃국이 나왔다. 몇 해 만에 처음으로 먹어보는 고깃국이라 기대를 하면서 달려들었는데, 도무지 무슨 맛인지 알 수가 없어 실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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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조선으로 진격해 보니 물건이 산더미 같더라. 전쟁을 일으키기를 백번 잘한 것 같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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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년 헬싱키에서 열린 올림픽에 참가하고 있을 때 북한군 고급 군관이 남조선으로 진격해 보니 물건이 산더미 같더라. 전쟁을 일으키기를 백번 잘한 것 같다고 한 말이 잊히지 않는다.

 지금도 북한은 전쟁 예비물자를 6개월분만 비축해 놓고 있으며 나머지는 '남한 점령지'의 물자를 빼앗아 쓸 계획을 세워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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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0.10.24.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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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내에서 참살을 당한 우리 애국자 수효는 4천명이나 되며 피난해서 살어오는 사람들도 서울에 처음 들어올 때의 전쟁동포들과 비교해 보면 남녀노유를 불문하고 모다 얼굴이 초라하게 야위고 있었으며 의복도 처참하기 짝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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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어린 아애들이 길가에서 국군이 버린 빈 깡통을 줍고 있어 그들에게 물어 본즉 그와 같은 깡통을 처음 본다고 대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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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통분한 사실을 보고 말로서는 형언을 못하고 그저 울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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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0.11.16. 동아일보


 평양과 함흥 (2) 두개의 좌담회

 


평양과 함흥에서 민간유지들과 좌담할 기회를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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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압과 공포의 5개년동안 그들의 대한민국에 대한 동경은 흡사 지상천국에 대한 그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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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배된 토지를 어떻게 재조정하는 것이 좋겠느냐는 질문에 대하여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괴뢰정권의 현물세가 너머도 가혹하였기 때문에 농민들은 오히려 그전 반타작의 소작제도가 좋다고 생각할 정도이니 대한민국의 농지개혁을 크게 환영할 것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민생문제와 아울러 그들이 심각한 안색으로 강조하는 것은 "인민군"의 대부분은 강제로 끌려간 자제들이니 이들 포로에 대하여 관대한 조치가 있기를 원한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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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통치의 장단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하여 그들의 정치는 살인 강도정치에 불과하지만 그 강력한 조직력은 우리에게 많은 참고가 된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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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군 철수 직후의 평양 전경

게재지명 조선일보

 

게재일자 1950년 12월 13일

 


[본사 특파원 全東天 記] 12월 5일 유엔군 및 국군의 전략적 철수로 적의 손에 떨어지기 직전의 최후의 평양은 폭음과 화염 그리고 그 충천하는 흑연 속에서 도강하여 남하하려는 시민들의 아우성으로 뒤덮여 있었다.


일반시민에 대한 피난 권고는 12월 3일에 내려져서 대부분의 시민은 4일까지 피난을 하였으나, 4일 저녁 대동강의 가교가 최후 철수부대의 손으로 끊긴 다음에도 이 가교로 모여드는 남하 피난민의 수는 무수하였는바 그들은 파괴된 가교를 드럼통과 부서진 가교의 木片 등으로 얽어매가지고 건너는 것이었다.

 

이렇게 피난민들이 건너는 동안 하오 3시가 되자 유엔군 전투기들은 모란봉 근처의 중공군 게릴라부대를 기총 소사한 다음, 도강하는 시민들을 중공군 게릴라부대로 오인하고 다시 기총탄을 내려 부어서 도강 중도에 쓰러지는 시민도 있었으나 쓰러지는 사람의 시체를 넘으면서도 도강하는 시민들의 광경은 대한민국의 자유와 평등을 이들 평양시민들이 죽음으로써 찾는 광경이기도 하였고, 괴뢰집단의 행악이 그들에게 얼마나 심독하였는가를 실증하는 광경이기도 하였다.

 

전투기들은 계속하여 시내의 군사시설 비행장 등을 폭격하여 피난민들이 寺洞 근방의 언덕에 올랐을 때는 맹렬한 화염이 평양을 뒤덮었는데 때마침 저녁노을이 화염에 반사하여 그 처절한 평양의 최후는 평양을 떠나는 시민들의 발을 몇 번이고 멈추게 하고 눈물을 뿌리게 하였다.

허나 이렇게 평양을 바라보며 눈물 뿌리는 시민들도 국군과 유엔군의 최후의 승리를 믿어 의심치 않는 것은 지극히 마음 든든한 점이었다. 대동강의 가교가 끊길 때까지 강을 건너지 못한 피난민들은 강서·용강쪽으로 흘러내려갔는데 그들의 대부분은 진남포·광량만을 경유해서 해로로 인천에 상륙할 것을 희망하고 있었다.

 

평양에서 남쪽으로 40리 떨어진 중화에서부터 신막에 이르는 300리 길의 연도는 약 50만으로 추측되는 피난민으로 덮여 있었는데 이들 일렬종대의 피난민의 대군은 하루 60리 내지 70리의 평균속도로 남하하고 있었으며, 이 피난민의 수는 그들이 한 마을 한 시정을 지날수록 늘어만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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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남민·피난민들의 공산체제 경험담

 


게재지명 민주신보

게재일자 1951년 01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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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진 공산 魔風에 견디지 못하여 수백만이 넘는 동족이 우리의 부모형제와 아들 딸들이 남으로 남으로 내려오고 있다. 세계 역사상에 한 민족이 이러한 수난과 이러한 비애를 겪어온 일이 어디 있었던가.

 한 핏줄을 반만년이나 타고 나온 동족에 이렇게 모진 운명의 십자가를 누가 강요했는가. 대한의 온 겨레의 평화롭고 안락한 꿈을 그 어느 누가 깨뜨렸는고…….

이제야 우리 삼천만 동포는 다 봤다. 겉으로는 민족의 행복과 발전을 위한다는 그 毒牙 품은 가면을 온 민족은 뚜렷이 봤다. 허위·약탈·학살·포악이 붉은 무리들이 자랑하던 그 정치의 전부였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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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궁이 극도, 농민 朱씨:무슨 會인지 회의 때마다 놈들은 나보고 하는 말이 中農이라고 합디다. 허기야 답 2,000평 가량하고 田 4,000평 가량 경작을 하니 남한농가로 친다면 그리 옹색한 실림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북한농가는 나보다 더 많이 농사짓는 농가도 살림살이는 남한농민보다 훨씬 곤궁하지요.


현물세라는 것이 말로는 전곡의 2割 3分, 稻作이 2할 7분이라고 하지만 알알이 세고 재고 심지어는 마당가의 호박 몇 포기, 고추 몇 대까지 현물세로 샅샅이 털어가니 실지로는 6할 이상을 빼앗아가고 맙니다.

 

그놈에 2개년계획은 농민이 굶어 죽는지 부어 터지는지 그 따위 것은 조금도 상관치 않고 초과 달성해야 한다고 모두 털어 가지요.

단지 이것뿐이라면 그래도 죽을 끓여 먹어도 제 고향에 박혀 있을려고들 하겠지만, 지방자치세니 국가동원이니 해서 2년에 20일 이상 노력자는 모두가 광산·탄광으로 강제노동으로 끌려가야 하고, 가마니 공출은 노력자 매 인당 20매 이상 바쳐야 하니 노동자·농민을 위한다는 북한은 실지로는 농민을 소나 말 같이 부려먹는 것입니다.

 

그게 다 군인에게 준다는 獸肉費로 耕作地田 1町步에 정육 8斤, 답 1정보에 16근씩 洞里마다 소 5·6頭씩 바쳐야 하고, 무슨 희사니 열성미니 애국미니 하여 바치는게 얼마나 되는지 헤아릴 수 없습니다. 만일 이걸 내 놓기를 꺼려한다면 어디서 잡아가는 줄도 모르게 끌려가는게 공산독재 치하올시다.

그러니 이것저것 다 바치고 나면 빈농가는 설 안에 식량이 떨어지고 그래도 조금 낫다는 중층이라야 3월달 밭갈 머리까지 겨우 죽으로 연명하는 형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품삯벌이라도 하려니 도로경비니, 철도경비니, 세곡경비니 무슨 회합, 무슨 대회 등에 벌이를 할 여가가 없습니다.

 

하나 잘 먹고 잘 산다는 사람은 소위 노동당 간부와 인민위원회 간부들 뿐이지요. 저 같은 사람은 원래가 자작농이었지만 과거에 소작하던 농가도 그 전보다 살기가 더 한 층 어려워졌으니 거기에서 어찌 산단 말입니까.

 

인권을 유린, 노동자 宋씨:나는 과거 5년 동안 북한에서 제철노무자 생활을 해왔다. 나는 과거의 근로자 생활에서 뼈저리게 느낀 것은 북한 괴뢰정권이 표면으로는 노동자, 농민들의 이익을 우선적으로 옹호한다고 말하고 있고 또 그들의 소위 헌법에도 보장되어 있다고 뻔뻔하게 떠들어대면서도 그 실에 있어서는 실질적으로 노동자들의 인권을 유린하고 있다. 첫째 그들은 진보적 노동법의 혜택을 받는다고 하지만 8시간 노동제가 분명히 위반되고 있다. 그들은 항상 생산돌격이니, 목표달성이니 하는 아름다운 구호를 내걸고 8시간 노동시간을 유린하고, 둘째 노동자의 건강을 보호한다는 견지에서 사회보험제 같은 것을 실시하고 있으나 이도 그 실에 있어서는 표면적인 언사에 불과하다.


진정으로 근로자의 이익과 근로자의 모든 자유를 보장해준다면 이 나라 근로자들이 왜 그들의 정책을 반대할 리 있겠는가? 대다수의 노동자, 농민이 공장과 농토까지 버리고 심지어는 조상의 뼈가 묻혀 있는 고향산천까지를 버리고 남하하는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모든 남하한 피난민은 다 나와 같이 헐벗는 한이 있더라도 자유로운 땅을 찾아온 것이리라고 생각하고 있다(평양 거주자 宋榮煥씨).

 

언론을 총탄압, 문화인 李씨:나는 6·25사변 이후 3개월 동안 북한 괴뢰군이 서울에 침략의 마수를 뻗쳤을 때 그곳에 있었다. 나는 순서 없이 그들의 문화정책의 면모를 본대로 말하련다. 첫째 그들의 언론정책을 보라. 아는 자유, 알고 싶은 자유, 알리는 자유가 완전히 속박되어 있다. 그들의 신문을 보면 그야말로 정부나 당국에 아부만을 일삼고 있는 어용신문이 아니면 관보나 기관지에 불과하다. 그뿐 아니라 신문기사 검열 같은 것도 일일이 사전검열을 받아야 하니 과연 이래도 언론자유며 민주정책이라 하겠는가. 그들이 하는 선전은 모두 아름답고 기막힌다. 그러나 현실을 떠난 그 선전인 까닭에 민중들은 처음엔 속지만 나중에는 그 기만성을 누구보다도 잘 알게 된다.


문화정책에 있어서 그들의 기만성이란 더욱 심하다. 물론 우리는 무질서한 것을 자유라고는 생각지는 않는다. 허나 우리는 비판의 자유를 티끌만큼도 그들에게서 향유한 일이 없었으며 그야말로 벙어리의 3개월을 보냈다. 여기에 이제 무슨 문화가 있고 예술이 있고 인생이 있겠는가. 더 말할 여지가 없다. 나는 앞으로 내가 갈 길만을 가려고 단연 남하하였다(서울 거주문화인 李永哲씨)

 

교육은 암담, 교육가 金씨:내가 월남하게 된 동기는 별다른 것이 없습니다. 다만 북한동포의 전부가 가슴속에 가다듬고 있던 심정을 나 한 개인의 행동으로 옮겼을 따름입니다.


5년간 우리가 북한 교육계에서 맛본 鐵帳 내의 교육제도는 세계역사에도 드문 암담한 것이었고, 인간의 정당한 지성과 감정이 응당 향유해야 할 온갖 자유를 압살 당하는 그러한 교육제도였습니다. 그들의 교육정책이 어떠한 것인가에 대해서는 나보다 앞서 월남하여 국군진영에서 싸우고 있거나 전사 혹은 戰傷한 나의 후진 제자들의 눈물겨운 싸움의 길에서 잘 표현되고 있을 것입니다(원산거주 교육가 金素仁씨).

 

내분이 다반사, 관리 崔씨:북한 괴뢰정권의 소위 외무성에 근무하고 있던 나는 이번 남하하게 된 것을 행복하게 생각합니다. 외무국장이었던 李康國이가 많은 인테리겐챠와 함께 도태 당하고, 소위 그들의 성분개조운동으로 내분이 자자하던 시기를 回感하면 진저리가 나고 치가 떨립니다. 소위 남북연석회의 당시에 그들은 많은 관리들을 여관 보이로 변장시켜 정객들의 일거일동을 감시하게 하였던 것입니다.


그들의 목적을 위하여 수단을 가리지 않는 기만과 학살정책으로 인하여 괴뢰정권 내부의 모든 관리들은 상호견제하고 서로 눈치만 보고 있는 것입니다. 거기에서는 친소파가 아닌 분자는 기어이 숙청 당하고야 마는 형편입니다.


독신관리들의 합숙소에는 반드시 정치보위부의 스파이가 개입하여 각자의 일언일동을 감시하고 있습니다(관리, 전 평양외무성 西歐部 근무 崔成極).

 

지긋지긋하오, 부녀 吳某씨:지금 생각하여도 지긋지긋한 90일 공산치하의 서울의 생활……. 겨우 걸어 다니는 어린 자식들도 괴뢰군이라면 지금도 “엄마”하고 품안에 뛰어오며 울음소리를 그치는 것이다.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매일 같은 강제노동에 수수국, 캬배쓰국 한 그릇에 쓰러지는 사람들은 헤아릴 수가 없다. 남편은 반역분자라고 이곳 저곳을 피해 다니고 어린 자식 6명을 데리고 살자니 배급하나 없고, 또한 돈 한 푼 없는데 매일 야밤에 남편을 내놓으라는 놈들의 공갈협박에 1일이 천추 같았다. 저녁마다 애국자를 총살하는 총성, 수많은 괴뢰군의 강도·절도로 하루 한시간의 수면조차 어려웠다(서울 거주, 吳某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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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래세로 파탄, 상인 朴씨:북한에서는 상업을 하려면 등록을 하여야만 상행위를 할 수 있다. 每 등록된 상인들은 매월 20일까지 거래세라는 것을 바쳐야 되고, 其 외에 공채 할당이라던지, 대소 행사비 조달은 전부 상인들의 부담으로 되어 있다. 이러한 세금, 부담금 등으로 상인들은 허리를 펴볼 여유라고 없고 1년 가야 넥타이 한 번 매볼 수 없는 형편이다. 상거래에도 여러 가지 제한이 많아서 도저히 남한에서 보는 것과 같은 상행위의 자유성은 없다. 상업규모에는 별 제한이 없으나, 대규모로 하면 할 수록 손해를 입는 기현상을 나타내고 있는데 그 이유는 크게 하면 그 만큼 모든 부담금도 증가하므로 100만 원의 자본을 가진 상인이나, 10만 원을 가진 상인이나 자기 소득에는 별 차이가 없는 것이다(함북 길주읍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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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꾸 와서 쳐라! 매일 와서 폭격을 해야 한다니까!』

죽음을 싣고 오는 폭격기를 반갑게 기다리는 북한 사람들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까?

 

『도대체 남한에서는 무엇을 하고 있단 말인가? 무섭고 억압된 북한 사정을 상상이나 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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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일본이 패망하고 타의에 의해 같은 민족이 남북으로 갈라지고 해방된 지 5년, 공산 치하 북한에서 공산 교육을 받아야 했다.


『지금까지의 세계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이다. 계급은 있어서 안되며 全세계 인간은 평등해야 하며 부르주아를 타도하고 무산계급의 사회를 이룩해야 한다』는 공산당사를 줄줄 외우도록 공부했었다.


그러나 온 누리가 빨갛고 그 속에서 배운 것이 비록 마르크스 레닌의 유물사관이었다고는 하나, 이론과 현실의 모순성을 직접 보고 느꼈기에 결코 속속들이 붉게 물들 수 없었다. 죽음을 무릅쓴 많은 사람들이 38선을 넘기 시작했다. 북한 사람들은 자유를 갈망하며 남한에 의한 통일을 염원하고 있었다.

 


그런데 6·25 남침으로 공산군은 오히려 남쪽으로 밀고 내려가고 있었다. 사람들은 라디오 앞에 모여 앉아 귀를 기울였다.

『어느 부대 어디까지 진군! 무슨 부대 어느 곳을 점령!』

의기양양한 인민군의 전황을 들으며 애꿎은 라디오만 두들긴다.


『북쪽만 가지고 모자라 남쪽까지 빨갱이를 만들겠단 말인가?』

무더위 속에 라디오를 솜이불 안에 들여놓고 잡음 섞인 남한 방송을 초조한 마음으로 몰래 도청한다.

『어느 부대 어디까지 후퇴. 무슨 부대 무사히 어느 지점까지 철수!』

맥없이 밀려가는 남쪽 뉴스를 들으며 다시금 라디오를 두들긴다.

『도대체 남한에서는 무엇을 하고 있단 말인가? 무섭고 억압된 북한 사정을 상상이나 하는지?』

 


자꾸만 밀려가는 정세에 실망하며 그래도 매일같이 날아와 폭탄을 투하하는 남한 비행기를 후련한 마음으로 올려다 보고 있었다.

『자꾸 와서 쳐라! 매일 와서 폭격을 해야 한다니까!』

죽음을 싣고 오는 폭격기를 반갑게 기다리는 북한 사람들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까? 제트기 편대의 하늘을 찢는 소리, 공중을 선회하며 차례 차례 목표를 향해 급강하, 로켓 포탄의 작렬하는 소리가 고막을 찢는다.

몇 번인가 반복하고 전투기 날아가면 이윽고 고공비행의 폭격기 소리와 함께 점선을 그으며 줄지어 폭탄이 떨어진다. 기분 나쁜 바람과 함께 대지가 진동한다.

 


무섭고도 아름다운 야간 공중 폭격

 

밤은 밤대로 말로만 듣던 조명탄이 캄캄한 밤하늘에 보름달같이 둥글게 수없이 공중에 걸린다. 낮보다 더 밝은 밤에 공중 폭격이 시작된다. 정말 무서웠다.

그러나 꿈많던 소녀 시절이기에 둥근 조명탄이 아름다운 만월같이 터지는 폭탄의 불똥이 무수한 반짝이는 별들처럼 공포 속에 순간의 착각을 일으킨다.

9·28 수복. 마음이 떨린다. 戰勢(전세)가 호전되기만 바라며 차츰 치열해가는 전쟁, 그리고 폭격 속에 국군과 UN군의 전진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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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에 접어들었다. 국군이 입성했다. 태극기를 들고 어른 아이 목청 돋워 만세를 부른다. 탱크 소리 요란하고 줄 잇는 군용트럭 그 양옆을 땀에 젖은 군복에 총부리를 겨누고 北으로 전진한다.


젊은 국군장병들과 UN병사들이 여유 있는 웃음 속에 윙크를 하며 손을 흔든다.
쫓겨가는 인민군, 전진해가는 국군 다 같은 우리네 귀한 아들들인데 그들을 바라보는 모든 사람들의 눈과 생각이 평등하지 않았다. 인민군을 미움의 눈으로 바라보고 국군에겐 힘찬 박수를 보냈다.

 

공산체제를 싫어하고 자유를 갈망하던 5년 간의 억압 속에서의 나온 마음의 발로였다. 겁먹고 쫓기는 인민군, 뒤쫓는 국군. 同族(동족)끼리의 이 가슴 아픈 현실이 UN군의 진격으로 통일로 이어지길 바랐던 희망과 기쁨도 잠시, 북 치고 피리 불며 압록강을 건너 중공군이 물 밀듯 내려오고 있었다. 이제 우리 북한 사람들은 어쩌란 말인가? 전세는 다시 바뀌었다. 추위와 피로에 지친 국군과 UN군이 묵묵히 철수하기 시작했고 인민군은 또다시 총부리를 겨누고….

 

아버지 따라 대동강 다리 건너다

 

찬바람 부는 겨울날 길을 메우며 피난민 대열이 이어졌다.

『우리도 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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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런데도 우리는 비행기가 더 자주 뜨기를, 바다 쪽으로부터 들리는 함포사격이 더 치열해지기를 기다리고 거기 희망을 걸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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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정부에 비판적인 청소년들이 흔히 그랬듯 이북이 사회주의 낙원이란 선전에 호의적이었기 때문에 바뀐 세상에서 새로운 희망을 발견하려고 했다. 나는 전혀 두려움 없이 바뀐 세상을 향해 걸어 나갔다. 나는 빈손이었지만 그 사이에 붉은 깃발까지 준비한 사람도 많았다.


그렇게 북쪽에 호의적인 사람들이 도열한 가운데 인민군이 탱크를 앞세우고 진주해 들어왔다. 말로만 듣던 탱크와 따발총을 그때 처음 보았다. 상상도 못해 본 어마어마한 병력이었다. 꿈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탱크가 마치 양민들의 가슴팍을 밀고 들어오는 것 같은 공포감을 맛보았다.

 

그 후 공포의 나날이 계속됐다. 유엔군이 참전하고 미군 비행기가 서울 상공에 뜨기 시작했다. 굶주림과 공포정치의 무서움을 그 여름의 혹서는 더욱 잔인하게 달구었고 혹서가 누그러질 무렵 서울 상공은 밤낮없이 미군 폭격기 차지였다. 오폭도 잦아 민가 밀집 지역이 불바다가 되기도 하고 위험을 무릅쓰고 식량을 구하러 교외로 빠져나가던 민간인들이 머리 꼭대기까지 하강한 전투기의 무차별 기총소사를 맞고 잔혹하게 살해되는 일도 비일비재였다. 아마 따발총 맞고 죽은 수효보다 기총소사 맞고 희생된 민간인이 더 많을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우리는 비행기가 더 자주 뜨기를, 바다 쪽으로부터 들리는 함포사격이 더 치열해지기를 기다리고 거기 희망을 걸었다. 입 밖에 내지는 못했지만 속으로 열렬하게 미국의 병력이 이기라고 응원한 것은 따발총보다는 비행기가 더 강해 보이니까 이왕이면 강자 편에 붙으려는 비겁한 마음에서였을까. 아니다. 폭격보다 더 무서운 것은 학정(虐政)이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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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념이라기보다는 꽃다운 나이에 6.25를 겪은 우리 세대 대부분의 평범한 노인들 공통의 정서라고 말하는 것이 더 합당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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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완서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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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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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민학교 3학년, 전쟁의 실상

 


  [.... 집단 로동을 하니까 모두 일을 안 하고 건달만 부려 농사들은 전반적으로 패만하였다.


   .... 말 마디나 좀 하고 바른 말을 하여 정당한 의견을 이야기 하는 사람들은 모두 반혁명 분자에다 명칭을 모조리 죽여 버렸는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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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 시작되어 날짜가 흘렀는데 1차 진공 한다면서 많은 인민군 부대들이 끊이지 않고 계속 남쪽으로 가면서 밥을 해달라고 하여 마을 인민들은 상부의 지시에 의해서 무조건 밥을 해주게 되었다. 밥을 안 해주는 집은 반동이라고 하였다.


그 후 많은 시간이 흘렀는데 일시적 후퇴를 하는 시기였다. 다시 돌아오는 그 많은 군인들을 또 밥을 해먹이게 되었다. 한집에 쌀도 한도가 있는 것이지 그렇게 많겠나요? 그때 밥을 해내라 하여 쌀이 떨어졌다고 하면 반동이라고 고함을 치며 총부리를 둘러대고 온 집안을 수색하여 쌀이 없으면 총으로 닭과 돼지를 쏘아 잡아가곤 하였다.

 

이때로부터 인민들은 인민군대를 무서운 사람들로 인정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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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에 몇일이 지났는데 주민들은 먹을 것이 없어서 허덕이고 있을 때 2일 후에는 국방군들이 밥을 갔다 준다는 소식들이 왔다. 사람들은 좋아서 기다리다 그날 9시경에 국방군들이 대형 화물차에다 밥을 싣고 왔는데 밥을 철갑모만한 크기로 뭉쳐서 하얀 백지에다 싼 것을 세 대당 세 개씩 나누어 주어서 먹었는데 왜 이렇게 밥이 맛이 있는지 그 전에 집에서 먹던 밥은 대상도 안 되기 때문에 어른들은 말하기를 곡창지대는 남쪽이기 때문에 맛있다고 하면서 통일이 되면 그곳 남쪽에 가서 살겠다고 하였다.


그 때부터 주민들의 감정은 달라졌다. 인민군대는 총부리를 둘러대고 호통을 치면서 뺏뜨려 먹고 갔는데 인민들이 굶고 있다는 것을 알고 밥까지 만들어서 공급을 해주니까 정말 고마운 국방군들이라고 하였다. 그때 그 밥은 남한에서 만들어서 기차로 실어다가 100리 떨어진 산간지대까지 공급하여 주었으니 어떻게 많은 밥을 지어 날라 왔는지 정말 상상하기가 어려웠다.


 전쟁이 끝난 후 이 전투 실전을 그 누구에게도 말을 못하고 60평생을 살아왔고 이런 말만 하면 선전을 한 것으로 취급하여 없애 치우기 때문에 그랬다.

 


그 후부터 사회주의를 건설한다고 개인들의 토지를 다 뺏어가지고 공동체로 만들어 집단 로동을 하니까 모두 일을 안 하고 건달만 부려 농사들은 전반적으로 패만하였다.


그러면서 모든 선전들을 남조선에서 1950년 6월 25일 일요일을 계기로 전국이 다 휴식하는 짬을 리용하여 불의의 전쟁을 일으켜 수다한 사람들을 죽였다고 교육을 하였기 때문에 지금까지 북한에 있는 사람들은 그렇게 알고 있다.

 전쟁에서 많은 사람들이 죽었지만 말 마디나 좀 하고 바른 말을 하여 정당한 의견을 이야기 하는 사람들은 모두 반혁명 분자에다 명칭을 모조리 죽여 버렸는데 수십만명에 달했다.

 

그리고 머리 제일 나쁘고 못살았다는 사람을 간부로 등용시켜 일을 시킴으로 하여 반항이 없고 하라는 대로 할 수 있게 만들어 놓았다.

그 다음부터는 가족주의가 커지면서 지방주의가 되고 지방주의가 커지면 반란이 일어난다고 모든 가족이나 친척, 친구, 직장생활에서 형님, 동생, 오빠, 아저씨라는 말을 못하게 만들어 모든 사람들 호상간에는 동무라고 부르라 명령을 내렸고 김일성만 동지라고 부르게 만들었다.


아저씨 형님 소리만 들으면 집단 회의를 열고 집단 공격도문 비판을 해도 안 들으면 무서운 징벌과 6개월 무보수 로동까지 시키다. 이것이 바로 김일성을 우상화하기 위한 수단이였다. 금방 중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에 들어오면 20대들이 40대, 50대들을 동무라고 불러 나이차이 없이 같은 동기 동창으로 만들어 놓았고 심지여는 며누리가 시아버지를 보고 시아버지동무 라고 부르게 되었던 것이지요.

 

곳곳마다 이런 현상들이 벌어져서 많은 사람들을 웃기군 하였지요. 그 후 10년 이상 되여서 부터는 자기 나이와 아래 나이 되는 사람들에게는 동무라고 부르고 자기 이상의 나이든 사람들에게는 동지라 부르게 하여 19세 난 아이들도 60세 어른에게도 또한 자기 아버지와 같은 분들에게도 꼭꼭 동지라고 불렀지요. 김일성도 동지라 하기 때문에 그 누구도 말을 못했지요.


 그리고 악수도 서양식이라 하여 악수를 못하게 했고 조건은 손에는 무서운 균들이 득실득실하기 때문에 그 병균들이 있다 하여 병의 근원이 된다고까지 만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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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공군 포로... 3분의 2가 중공으로의 송환을 거부, 자유중국(대만)으로 갔습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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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동안 정전회담중 여러가지가 있었습니다만 중요한것은 포로교환 문제였습니다. 자료를 보면 미군포로가 5,178명, 전사자가 33,629명, 부상자가 103,284명입니다.


한국군 포로는 8,321명 밖에 안되요. 우리가 수용했던 인민군포로가 75,823명인데 한국군포로가 8,321명밖에 안된다는건 말이 안돼요. 우리는 정직하게 포로를 다 보냈는데, 저들은 8천3백여명만 보내고 나머지(6만여 명으로 추정)는 아오지탄광으로 보내어 불법으로 강제노동을 시킨겁니다.

 

중국측 자료를 보면 모택동이 중공군포로 21,371명중 공산중국에 돌아가지 않겠다는 포로가 1만5천여명 즉 3분의 2가 중공으로의 송환을 거부, 자유중국(대만)으로 갔습니다. 돌아간 3분의 1은 적에게 투항했다 하여 叛徒반도라며 갖은 학대를 받고 살았답니다.


포로 3분의 2가 돌아오지 않은데 화가난 모택동이 엉뚱하게도 김일성에게 한국군포로들을 송환하지 말라고 분풀이를 한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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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택동이 한국군 포로 보내지 말라, 김일성에 지시 >


“...중국인 전쟁포로 2만1천3백74명 가운데 3분의 2는 공산중국으로 돌아갈 것을 거절, 그 대다수가 대만으로 갔다. 본토로 간 3분의 1은 (적에게) 투항했다는 이유로 叛逆者(반역자)의 딱지가 붙어 모택동정권이 끝날 때까지 모진 취급을 당했다.


또 한 가지, 모택동은 한민족의 불행에 잔혹한 공헌을 했다. 거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모택동은 휴전당시 북한에 불법 억류된 6만 명 이상의 한국군 포로들을 최악의 운명으로 몰아넣는 결정에 손을 빌은 것이다. 한국군 포로를 보내지 말도록 김일성에게 지시한 것이다.(이때 김일성은 인민군의 지휘권을 중공군사령관 彭德懷(팽덕회)에게 이양하고 있었다)


한국군 포로는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고 도망을 방지하기 위해 북한에서도 가장 후진 벽촌으로 분산수용했다. 생존자가 있다면 지금도 이런곳에 그대로 수용돼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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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동독 폭동 사태

 


 배경 


동독 정부가 건축 노동자의 노르마(공산국가에서 노동자에게 부과하는 작업 기준량)를 인상하자 이에 반대하여 일어난 파업이 반정부 운동으로까지 확대된 것이다.

 

 경과 


 폭동 사태가 일어나기 6일 전인 6월 11일 동독 정부는 독일 통일의 길을 트기 위하여 종래의 강압적인 사회주의화 정책을 완화하는 새로운 조치를 발표하였으나, 근본적으로 소련군의 점령과 공산당의 지배에 불만을 품고 있던 동베를린 시민들은 6월 17일 봉기하여 공산당 본부와 기타 기관을 습격하였다.


이 의거는 동베를린뿐만 아니라 동독 전역로 파급되었으나 소련군 전차부대의 출동으로 진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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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6월 16일 베를린 大建設場 두 곳에서 建設勞動者들이 파업에 돌입하고 다음날 그들은 노동조건의 개선, 자유선거, 정부의 교체 등을 요구하면서 정부청사로 향해 대중적 항의시위에 들어감.

1953년 6월 17일에 대중적 항의시위가 동독 곳곳에 요원의 불길처럼 번지고 당과 국가 지도부는 사태를 수습하는데 무력함을 露呈함.

그러자 소련 점령군부대가 개입, 인민봉기를 流血鎭壓하기에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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小農과 中農은 抑壓과 높은 强制供出로 괴롭힘을 당함. 農器具 分配 時 農機械貸與所에 의해 불이익을 당함. 그 후 수만 명의 농민들은 서방으로 移住.


이는 1953년 6월 17일 인민봉기 時 농촌에서도 민심이 험악하게 되는 결과를 낳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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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동독이 수립되면서 동독은 헌법에 "독일은 분리할 수 없는 공화국이며, 독일 국적은 하나만 있을 뿐이다."라고 밝히면서 하나의 독일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1953년 스탈린이 사망하고 동독의 경제 사정이 계속 악화되는 가운데 6월 17일 동베를린에서 인민 봉기가 일어나자. 동독 정부는 1953년 9월 제16차 당 대회에서 `독일에 두 개의 국가가 존재한다'는 것을 선언하고, 서독에 국제법적으로 동독을 인정할 것을 촉구했다.


 이는 동독이 기존에 주장해 오던 일 국가 개념에서 탈피한 것으로 서독에 비해 힘의 열세를 인식한 동독의 기존노선 전환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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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6년 헝가리 의거

 


1956년 헝가리 의거(헝가리어: 1956-os forradalom)는 1956년 10월 23일 수도 부다페스트에서 자유를 갈구하는 시민들의 함성으로 시작됐다.

 

[편집] 혁명 과정

 

학생·노동자·시민은 공산당 독재와 공포 정치에 반대해 도나우 강변의 바므 광장에서 반(反)정부집회를 열었다.


복수정당제에 의한 총선거, 헝가리 주재 소련군의 철수, 표현과 사상의 자유, 정치범의 석방 등 16개 항목을 요구하며 억압적인 체제에 억눌려왔던 불만을 한꺼번에 폭발시켰다.

 시민들은 헝가리 국기와 건물 옥상 등에서 나부끼는 붉은 별의 공산당 마크를 떼어내고 스탈린 동상을 파괴하는 등 반정부 자세를 선명하게 드러냈다.

 

저널리스트인 오베르소프스키도 다음날인 10월 24일 ‘이가샤그(진실)’라는 제목의 일간지를 발행해 봉기를 한층 고무시켰다. 그는 신문발행으로 나중에 사형이 언도되어 형장으로 끌려갔다가 밤이 깊어 총살에 실패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처형이 연기됐는데, 그날 니키타 흐루쇼프 소비에트 연방 수상이 봉기 관련자의 사형에 대한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의 항의서한을 읽고는 카다르 야노시 헝가리 사회주의 노동당 제1서기에게 적당히 처리하도록 지시함으로써 살아났다.

 

정세는 시민의 개혁 요구에 유리한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공산당은 10월 24일 개혁파 인사 임레 너지를 수상으로 지명했다. 너지는 정치범 석방, 비밀경찰 폐지, 소련군의 부다페스트 철수를 발표하고 헝가리의 바르샤바 조약기구 탈퇴와 중립화를 선언했다.


소련은 이 움직임을‘소련 지배권으로부터의 이탈’로 판단하고 11월 4일 헝가리에 탱크 1,000대와 병사 15만 명을 투입해 너지 정권을 힘으로 무너뜨렸다.

 

 

 

나는 자유세계를 선택했다.


경향신문  1957.2.24.

 

나는 자유세계를 선택했다.
항가리 의거에 참가했던 북한학생수기
소 탱크와 밤새우며 혈투
공산주의 흉악상 이제 알았다


편집주= 본 기사는 작년 10월 항가리 혁명에 참가했던 북한 학생과의  회견기사로 AP통신 비엔나 특파원 에릭크 웨이하 기자가 합동통신의 요청으로 특별히 기고한다. 두 학생의 이름만은 북한에 남아있는 가족들에 대한 보복을 고려하여 가명으로 내달라는 부탁이므로 본명을 싣지 않기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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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 성임 양군은 혁명 발발 당시 항가리에서 수학중이던 근 4백명의 북한 학생들과 함께 있었으나 소련을 반대하는 혁명전투에 얼마나 많은 한국 청년이 참가했는가는 잘 알 수 없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부다페스트로부터의 보도는 수많은 북한과 파란 유학생 및 소련 학생의  일부까지 소련군과 용감히  싸웠다고 전하고 있다. 이렇기 때문에 북한 괴뢰정권은 이 이상 북한출신 학생의 반공산주의적 오염을 막기 위해 유학생들을 소환하였던 것이다. 또한 그렇기 때문에 모스크바 대학에서 수학중인 대부분의 항가리 유학생이 추방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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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군의 반격  때 혁명군에 가담


나는 1954년 8월에 공학을 전공하기 위하여 교환학생으로 항가리에 왔지요. 그 당시 항가리의 여러 대학에는 약 4백명의 북한학생이 재학중이었읍니다. 내 고향은 함경북도입니다.


혁명이 일어날 때 나는 부다페스트의 학생숙사에 있었읍니다. 나는 혁명에 곧 참가하지는 않았읍니다. 그러나 소련군이 11월 4일 반공혁명을 진압하려 총공격을 개시했을 때 나는  분연 혁명군에 참가하여 소련 침략군의 전차와 싸우기로 작정했읍니다. 11월 어느날 밤 - 정확한 날짜는 잊었읍니다만 부다페스트의 공장이 많은 제 11지구에 있는 모리츠 쉬그몬드 광장으로 뛰어 나갔읍니다.


그 때 부다페스트 를 방문중인 소포본 대학생으로 같은 숙소에  머물렀던 두 항가리 청년과 뛰어 나갔읍니다.  밤새도록 우리는 소련 전차와 싸우고 싸웠읍니다. 나는 한국전쟁 당시 3년간이나 북한 공산군병사로 있었기 때문에 반전무기를 다루는 법을 항가리 청년 동지들에게  가르쳐 주면서 싸웠읍니다. 동이 트자 나는  그 전투지역을 떠나야 했읍니다. 나는 한국인이므로 외국인이라는 것이 쉽사리 드러날 것이고 그렇게 되면 나중에 처형당할 것이 뻔하였기  때문입니다.

 

항가리 학생에 무기사용 교수


그러나 나는 항가리 학생동지들에게 무기조종법을 계속해서 알으켜 주었읍니다. 나는 내가 왜 항가리인들과 같이 전투에 참가했는가 하는 질문을 받았읍니다. 그럴 때마다 나의 대답은 간단하였읍니다.


나는 한국에서 태어나서 서구라파에 올 때까지 사뭇 한국에서 살아 왔읍니다. 그래서 나는 서방국가의 생활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몰랐읍니다. 나는 소련의 제도가  이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제도라는 말을 노상 들어 왔읍니다. 그런데 항가리 학생들과 여러가지 문제에 관하여 토론하였을 때 그들은 자기들이 서방세계에 가장 인접해 있기 때문에 서방세계의 생활이 공산국가의 생활보다 훨씬 낫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고 말했읍니다.

 

공산주의의  부정 알았다


나는 차츰 공산주의라는 것이 정당한 것이 못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읍니다. 나의 이번 결심을 재촉한 또 하나의  요인은 약소 공산국가들은 소련과의 관계에 있어서 특히 대외 무역에 있어 평등하지 못하다는 것을 깨닫는 데 있었읍니다. 소련은 한푼의 댓가도 지불하지 않고 막대한 물품을 손에 넣고 있었읍니다.


나는 마침내 지난 12월에 항가리를 탈출하기로 결심하였읍니다.그리고 12월 19일에 오지리에 도착하였읍니다. 탈출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읍니다. 우리는 항가리 군인의 후원을 받았읍니다. 그들은 넘을 수 있는 국경의 어느 지점을 가리켜 주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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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7.2.3. 동아일보.


자유대한의 품안으로

항국의거에 참가한 세 북한출신학생

 

항가리에서의 반공의거에 참가하여 과감한 투쟁을 감행하다가 오스트리아로 망명한 북한출신의 한국청년 3명이  우리정부가 알선하는 여권과 여비의 발급을 받고 머지 않아 그립던 자유고국의 땅으로 돌아오게 되었다한다.


2일 조외무부장관이 말한 바에 의하면 최근 불란서 주재 공사관의 보고에 의하면 북한에서 소위 유학을 목적으로 항가리에 가 있던 한국인 학생중 많은 청년이 항가리 반공의거에 솔선 가담하였던 것으로 그중 3명의 젊은 남학생이 오스트리아에 망명 현재 당지에서 정치적보호를 받고 있는데 방금 우리 불란서 주재공사관을 통하여 여권의 발급수속이 진행중이며 본국에서 조치가  끝나는대로 여비도 동시에 마련하여 줄  것이라 한다.

 

 

 

'헝가리 학도의용군' 결성으로 훈장 받은 이만섭과 유재건

“소련의 헝가리 침공에 피끓어 부다페스트 가겠다고 했지요”

 


1956년 10월 23일 헝가리 부다페스트의 대학생들은 거리로 뛰쳐나갔다. ‘언론자유보장’ ‘소련군 철수’ ‘헝가리·소련 불평등조약 철폐’ 등을 외쳤다.

시위대는 스탈린 동상을 끌어내려 트럭에 매달고 다녔다. 일부 헝가리 군인도 합류하면서 시위는 무장봉기 양상으로 발전했다.

 

제로 수상은 헝가리 주둔 소련군에 개입을 요청했고 대규모 유혈사태로 이어졌다. 남녀노소 모든 시민이 참여한 무장 시위대는 소련군과 맞서 싸웠고 노동자들은 총파업을 선언한다. 사태가 악화되자 제로 수상이 사임하고 새로 나기가 수상에 임명된다. 소련군은 일단 부다페스트 외곽으로 물러난다. 

 

10월 30일, 헝가리에서 철수하겠다던 소련군이 돌연 약속을 뒤집고 방향을 바꾼다. 11월 1일 새로 취임한 나기 수상은 소련군의 병력 이동에 항의하며 전격적으로 바르샤바 조약기구의 탈퇴를 선언한다.

소련은 이에 즉각 헝가리 접경 지역에 있던 15만명 이상의 소련군(전차 3000대 포함)을 헝가리에 추가로 투입시킨다. 11월 3일까지 헝가리 주둔 소련군은 5개 사단에서 15개 사단으로 불어난다.


11월 4일 모든 도로망을 장악한 소련군은 탱크를 앞세워 부다페스트를 공격하기 시작한다. 부다페스트 시내의 어느 집 문에 ‘소련군은 물러가라’는 구호가 나붙어 있었다. 탱크는 기관포로 그 구호를 박살냈다. 그리곤 대포를 발사해 그 집을 날려버렸다.

헝가리 시민군은 자유를 외치다 소련군의 전차 앞에서 무참하게 죽어갔다.


소련군의 헝가리 침공은 자유세계에 충격을 주었다. 한국의 지식인도 소련의 만행에 전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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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만섭은 어리둥절해 하는 후배들에게 짧은 연설을 했다.

 

“6·25 때 인민군은 소련제 탱크를 앞세워 남한을 쳐들어왔다. 평화롭게 쉬고 있던 일요일에 그들은 침략했다.

지금 소련군이 탱크를 앞세워 헝가리를 침공했다. 자유를 외치는 헝가리 시민이 지금 소련제 탱크에 맞서고 있다. 우리가 이렇게 한가롭게 앉아 있을 수 없다.

의용군을 조직해 헝가리로 가 소련군과 맞서 싸워야 한다. 의용군에 자원할 사람은 손을 들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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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헝가리행(行)이 무산되긴 했지만 연세대 학생들의 ‘헝가리 자유수호 학도의용군’ 결성은 신문에 크게 보도되어 당시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헝가리 사태는 6ㆍ25 전쟁을 경험하고 북한과 대치 중인 한국으로서는 남의 일이 아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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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 의원은 지난 8월 25일 주한 헝가리 대사관저에서 헝가리 정부가 주는 ‘헝가리공화국 십자중훈장’을 받았다. 헝가리 정부가 외교관계와 관련해 양국 우호 증진에 혁혁한 공을 세운 외국인에게 수여하는 훈장이다.


유 의원에 앞서 헝가리 정부로부터 훈장을 받은 사람이 있다. 이만섭 전 국회의장이다. 2002년 3월 당시 이만섭 국회의장은 헝가리를 방문해 같은 이유로 최고 영예훈장인 ‘헝가리공화국 십자대훈장’을 받은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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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8

 

[ ...... 시장으로 가니 천당에 온 느낌이었다. 고기와 먹거리가 넘쳤다 ..........    ]

 

        1958  소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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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남한 방송을 듣고 벽에는 남한 말씨를 적어 놓고 연습했다. 옷차림도 중류부인으로 행세하라면서 모시 치마저고리에 흰 고무신을 신고 서울 시민증을 휴대토록 했다.


어느 날 평양을 출발, 원산에 도착했다가 밤 12시에 강원도 해안 보리밭에 상륙했다. 보리밭에서 옷을 갈아입고 큰길로 나오자 15세쯤 처녀가 소를 몰고 그냥 지나갔다. 낡은 군모에 와이셔츠 입고 손목시계 찬 청년도 무심코 지나갔다. 2시간을 걸어 버스정류장에 이르러 서울행 버스를 타고 보니 모시 치마저고리 차림은 한명도 없었다. 기관원이 쓰고 다닌다는 ‘검은 안경’은 엿장수도 쓰고 다녔다.


버스 안에서 라디오방송이 흘러나오니 놀랄 지경이었다. 버스에서 내려 시장으로 가니 천당에 온 느낌이었다. 고기와 먹거리가 넘쳤다. 새로 옷을 사고 파라솔과 핸드백도 사고 미장원 가서 머리도 다시 손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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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econotalking.kr/xe/index.php?document_srl=103642

여간첩 소정자의 전향수기책, 내가 반역자냐

경제풍월  |  경제풍월
승인 2013.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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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때를 맞춰 북한의 김일성은 그해 9월8일 건국10주년 기념대회에서 귀환동포를 적극적으로 환영하도록 지시를 내렸다. 당시 북한은 전후복구사업에 많은 노동력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특히 일본에서 기술을 익힌 노동자의 귀환을 기대했다. 그러나 표면상으로는 인도주의를 내세워 조국에 귀환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선전공세를 폈다.

 

북한의 당시 속셈은 이를 계기로 자신들의 발전상을 일본에 선전하고 국제사회에 진출하는 발판으로 삼으려던 것이었다. 재일 한인들에 대해서는 북한은 세금을 내지않는 지상낙원이라고 꾀었다. 북한에 귀환하는 사람에게는 의식주를 해결해주는 것은 물론 직장을 제공하고 아동들은 즉시 취학시키며 정착금으로 성인은 1인당 2만원,14세 이하의 아동에게는 1만원씩을 지급한다고 했다. 당시 북한이 선전과 일본인 협력자 매수 등에 들인 비용은 2조원에 가까웠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같은 북한의 계략에 속아 북한에 송환된 북송자 숫자는 59년부터 82년사이 9만3천3백44명에 이른다. 북송사업은 한때 성공한듯 보였다. 59년 2천9백42명을 시발로,60년 4만9천36명,61년 2만2천8백1명으로 피크에 올랐었으나 이후 숫자가 격감했다. 68년부터 70년 사이에는 일시 중단된 적도 있었으며 그 이후는 몇백명ㆍ몇십명 단위였다. 니가타(신석)항에서 눈물을 뿌리고 떠난 북송자들은 그후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다.

 

일본에 남은 가족들에게 『헌것이라도 좋으니 의복이나 재봉틀,또는 라면을…』이라며 궁핍한 생활상을 편지속에 전해 오는 것이 고작이었다.

 

북한이 이들 북송자들을 인질로 잡고 조총련계 사업가들로부터 막대한 자금을 거둬가고 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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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청진항에 내리면서 북송교포들은 남루한 옷차림의 북한주민들과 경직된 분위기에 직감적으로 ‘속았다’는 것을 느끼게 됐고 먼저 온 교포들의 비아냥대는 소리에 눈앞이 캄캄해졌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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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은 우리에게 희망이 아니라 악몽이었다

 

1963년 당시 우리 가족이 만경봉호에 오를 때의 모습과 청진항에 내릴 때 모습을 찍은 사진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조국에 간다고 그렇게 좋아하시던 할아버님의 얼굴이 청진항에 도착하면서 험하게 굳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북송을 반대했던 자식들로부터 원망을 들었지만 아무런 말씀을 할 수 없었다. 자식도 자식이었지만 빠찡꼬에서 근무했던 많은 조선사람들을 설득해 북한으로 데려왔는데, 북한 당국은 그들을 모두 지방의 탄광, 광산, 농촌 등으로 보내버렸으니 “다시 일본으로 보내달라”는 그들의 항의 때문에 우리 조부모님들은 할말을 잃으셨다.

 

청진항에 내리면서 북송교포들은 남루한 옷차림의 북한주민들과 경직된 분위기에 직감적으로 ‘속았다’는 것을 느끼게 됐고 먼저 온 교포들의 비아냥대는 소리에 눈앞이 캄캄해졌다. 이러한 소식이 점차 일본으로 전해지면서 북송교포들의 숫자는 점점 줄어들어 1967년 11월까지 155차에 걸쳐 8만 8611명의 교포들을 북송함으로써 대규모의 북송작업은 일단락 되었다.

그러나 이후에도 조총련은 상공인들을 상대로 ‘애국지원사업’을 독려하면서 끈질기게 교포들을 설득하여, 모든 공장설비를 가지고 북한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이 70년대 초까지 이어졌다. 따라서 북한으로 북송한 재일교포는 총 9만 3000명에 이르렀다.

 

재일 교포들을 대거 북한으로 받아들인 김일성은 남한은 물론 국제사회에서 북한의 정통성과 인도주의적인 이미지를 확고히 구축함으로써 큰 성과를 보게 됐다. 또한 이들과 함께 흘러 들어온 막대한 자본과 기술은 당시 북한경제에 큰 보탬이 됐다. 하지만 1970년대 들어 김일성 독재체제가 강화되고 김정일이 ‘유일사상체계 확립의 10대 원칙’을 발표하면서 재일 교포들은 더 이상 북한정권에게 환영할만한 대상이 되지 못했다.

 

우선 북한주민들에게 일본에 대한 환상이 전파되고 이로 인해 자본주의 싹이 자라는 것을 가장 경계했고, 일부 재일 교포들이 폭력조직을 결성되면서 사회기강이 흐트러지자 무자비한 탄압이 시작됐다. 특히 1960년대 중순경 함경남도에 위치한 검덕광산을 찾은 김일성 앞에 느닷없이 한 일본인 처(妻)가 나타나 “제발 일본에 다시 보내달라”고 요청한 사건은 김일성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고 한다.


이어 평양에서 벌어진 일본인 처들의 고향방문을 요구하는 북한 최초의 데모는 북한정권을 놀라게 했고 이때부터 재일 북송교포들에 대한 대대적인 사상검열이 시작됐다.

 

1970년대 초에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던 버릇 때문에 함부로 말하는 재일교포들과 생활이 사회주의적이지 못한 사람들이 주로 숙청대상이 됐지만, 70년대 후반 들어서는 조총련 의장 한덕수의 반대파들이 대거 숙청돼 수용소로 끌려갔다.


유명한 오페라가수 김영길을 비롯해 조총련 부의장 김병식, 조총련 교육부장 한학수, 교토본부위원장 윤덕우 등 거물급 총련계 북송교포들이 재판도 받지 않고 국가안전보위부에 의해 행방불명됐고 가족들은 함경남도 요덕군 정치범 수용소로 압송됐다.

 

평양에 주로 거주했던 조총련계 간부출신들은 1970년대 들어 하나 둘 행방불명되었다. 총련 간부 출신들에 대한 숙청은, 당사자는 물론 가족들도 이해할 수 없는 ‘반혁명분자’, ‘간첩’의 오명을 씌웠고, 죄를 지었다는 당사자 대부분은 수용소에서 처형됐거나 영양실조로 죽었다.


요덕군에 위치한 15호 관리소(정치범 수용소)만 해도 약 5,000명 가량의 북송교포가 끌려와 있었는데 이 가운데 1/3정도는 조총련 고위간부 출신 가족들 이였다. 이들 대부분은 자신들이 무슨 죄를 지었는지 조차 알지 못했고, 북조선에 속아서 온 것만 해도 억울한데 수용소에까지 들어왔으니 그 참담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조국은 우리를 동포가 아니라 돈줄로 보았다

 

요덕수용소에 수감됐던 조총련 간부 출신의 가족들은 1985년 김정일의 특별지시에 의해 대거 석방됐다. 독재자의 선의(善意)가 아니라 당시 일본과의 수교문제가 있었고, 방문단으로 북한에 왔던 많은 사람들이 가족을 만나지 못한 것을 항의하자 조총련이 김정일에게 보고서를 전달해 결단을 내렸다는 소문이 있다.

이유야 어찌됐든 죽은 줄만 알았던 요덕수용소에 수감됐던 많은 북송교포들은 대거 석방됐지만 죄를 지었다는 당사자들 대부분(이들은 평양시 승호리 교화소에 수감됨)은 단 한 명도 살아 나오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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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이후 재일 교포들의 북한방문이 시작되자 북송 교포들의 지위가 향상되기 시작했다. 애국사업이니, 충성사업이니 하면서 조총련계 상공인들이 북송된 가족의 체면을 살리기 위해 공장과 기술, 자본을 투자하기 시작했고 이때부터 재일교포들과 합작, 합영회사를 만드는 사업이 활발하게 진행됐다. 평양의 대부분 현대식 공장들은 재일교포들의 투자에 의해 만들어졌다.


친척들에 의해 공장이 세워졌지만 북한의 가족은 그 공장의 책임자가 아니라 항상 부(副)사장, 부직장장 등 두 번째 자리밖에 주지 않았다. 수익금은 제멋대로 국가가 통제하고 간부들의 횡포로 뇌물이 관행처럼 돼, 북의 가족을 위해 울며 겨자 먹기로 돈을 퍼주면서 유지되는 일부 공장을 제외하면 대부분은 망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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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인류가 북송 재일교포 문제에 관심을 돌려야 한다


사람은 인생의 어느 한순간에 중대한 결정을 해야할 때가 있다. 한번의 결정 때문에 인생이 달라질 수 있다면 엄청난 고민과 검증이 필요할 것이다. 검증도 안된 미지의 땅에 자신의 운명을 맡긴다는 것은 사실 상상할 수 없는 모험이다. 하지만 북한으로 건너간 10만 재일 교포들은 그들의 북송을 모험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보나마나 지상낙원이요 자신들의 꿈을 실현할 조국으로 생각했다. 철저하게 조작된 ‘사기극’에 10만 명의 운명은 한번의 잘못된 결정으로 처참하게 망가지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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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총련은 자신들이 보낸 10만 명의 북송교포들 가운데 상당수가 정치범으로 투옥돼 행방불명된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철저하게 외면했고 김정일 정권의 수족이 돼 북한인민들을 기만하고 있다. 일본에 남은 가족들도 북한의 가족들 때문에 피맺힌 한을 풀지 못하고 있다. 김정일의 ‘인질정책’이 가장 큰 성공을 거둔 곳이 바로 재일교포 사회라고 말할 수 있다.

 

최근 일본인 납치자 문제가 일본열도를 들끓게 하고 있지만 그것은 김정일이 재일교포를 상대로 저지른 학살과 만행, 금품갈취에 비하면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 작은 문제다. 피납자와 가족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사실이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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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6년까지 동독 주민 약 172만 명이 동독 고향을 등지고 떠남. 그 후 동독은 서방 이주자의 수를 줄이기 위해 새 여권법을 制定. 共和國 脫出(Republikflucht)은 범죄행위로 간주됨


- 1960년에 이르기까지 - 특히 농업생산협동조합(LPG) 강제 가입을 면하기 위해 서방으로 탈출하는 농민들의 수가 증가함에 따라 - 서방으로 移住하게 된 동독 주민들의 수가 계속 증가함


o 西베를린 주민등록 담당 관서에 신고를 한 소련점령지구에서 탈출한 난민의 수는 1960년 9월 한 달 동안에만 20, 968명에 달함

 

- 독일민주공화국이 수립된 이후 1961년까지 약 300만의 동독 주민이 동독을 떠나 서방으로 이주함. 서방으로 이주한 동독 주민들 가운데 양호하게 교육 훈련 받은 자들이 많아 이러한 두뇌 유출와 양질의 노동력 유출 현상은 동독 경제력에 큰 타격을 주는 것은 물론 독일민주공화국의 존립에 대한 위협으로 작용함.


그리하여 1961년 8월 13일 동독 공산당 정권은 人口流出로 인한 國家의 人的 經濟的 出血을 國境 閉鎖를 통해서만 억제할 있다고 생각, 베를린 障壁의 構築에 들어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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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0  [ ...... 동조자는 30%뿐이고 70%가 반감을 품고 있으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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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에 끝난 중앙당 집중지도 (반혁명분자 색출을 위한 불량출신성분자파악) 보고서가 비밀리에 반탐정원에게만 알려졌는데 북한주민중 진정한 노동당, 김일성 동조자는 30%뿐이고 70%가 반감을 품고 있으며 이중 40%가 기회분자로 나타났다.


당황한 노동당은 출신성분불량자를 포섭하는 정책개조사업을 벌였다.

그내용을 보면 월남자로 처리된 행방불명자를 미군폭격등에 죽은것으로 뒤늦게 밝혀졌다고 증인까지 날조해 유족에게 통보, 당지지세력으로 포섭하는등의 방법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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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0


[ ...... 퍽 놀란 것은 많은 시민이 나일론을 입고 신고 ...... 북한 인민들은 여기다 내 놓으면 거지나 다름 없는 옷차림 뿐 ..........


   ..... 다섯시만 지나면 그놈의 '회'(모임)에 끌려 다니던 지긋지긋한 ...........    ]

 

월남장교가 본 남한 정낙현 중위의 40일간  메모


동아일보  1960.9.16.

 

월남장교가 본 남한
정낙현 중위의 40일간 메모(완)
무한의 자유 부러워
이북 동포는 모두 거지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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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시내에서 퍽 놀란 것은 많은 시민이 나일론을 입고 신고 있다는  사실이었읍니다. 저렇게 비싼 물건을 대부분의 시민이 사용하고 있다니 모를 일이고나 이렇게 생각했었는데 알고 보니 아주 싼 물건이었읍니다. 이북에도 나일론은 있지만 값이 비싸 도저히 입을 수 없읍니다.


재일교포들이 나일론으로 휘감고 쭉쭉 뽑고 이북에 나타났을 때 그들은 그쪽에  살고 있는 북한 인민들을 복고 이상히 여겼다는 것은 쉽게 알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북한 인민들은 여기다 내 놓으면 거지나 다름 없는 옷차림 뿐입니다. 어떤 교포는 평양 역전에 있는 커다란 백화점을 사자고 그랬는데 이 소리를 듯고 점원들은  모두 폭소했읍니다. 어떤 자는 잘 팔리는 국수집에 가서 그집과 아울러 운영권을 팔라고 하다 조소를  당하기도 했읍니다. 이 사람들은 도무지 실정을 하나도 모르고 온 사람들이었읍니다. 이북에서 개인사업을 전혀 할 수 없다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었읍니다. 정말 한심하지요. 전부가 속아서 넘어간거나 다름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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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고향과는 정치제도만 다르지 이곳의 산이나 들이나 뭐하나 다를게 없읍니다. 사람들도 다 한가지입니다. 다만 그곳 사람들의 얼굴에 비하여 이곳은 아주  명랑하고 서로 믿고 의지하며 살아가는 것이 다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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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곳은 돈을 가져도 물건이 없어서 못사지만 돈만 있으면 무엇이든지 살 수 있는  풍부한 상품을 가진 곳이 곧 이곳입니다.

오후 다섯시가 넘으면 그때부터는 내 시간입니다. 조용한 숙소에 누어서 어린 시절부터 내가 자라온 여러 고비를 되살려 보며 이게 정말 생시인가 꿈인가 한번 꼬집어 보고 만족하며 그리고는 꿈결에서 현실의 나를 발견합니다. 이때마다 이북에 있을 때 다섯시만 지나면 그놈의 '회'(모임)에 끌려 다니던 지긋지긋한 기억이 솟아 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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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0


[ ...... 넥타이까지 맬 수 있도록 잘살게 된다 .... 남한에는 거지와 실업자만 있다 ..........


  ...... 데모 영화 ... 시민마다 모두 넥타이를 매고 대학생들도 신사복을 .... 순경조차 데모대가 밀려가자 점잖게 물러서는 ..........    ]

 


북송교포들  뼈저린  후회


경향신문  1961.11.29.

 

북송된 교포들  뼈저린  후회
털출해 온 축구선수 채씨가  폭로
거의 월남을 기도
4.19 영화 보고 남한을 동경

 

최근 북한을 탈출해 온 한 청년은 60년 8월까지는 북한 인민들이 넥타이까지 맬 수 있도록 잘살게 된다하면서 인민을 혹사해 온 괴뢰들의 감언이설은 완전히 거짓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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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씨는 북한에서는 자기의 사고능력까지 말살당하고 개인의 비밀조차 가질 수 없는 곳이라고 지적하고  이러한 자유의 학살지역을 증오해서 북한을 탈출해 온 것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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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 직후 북한에서는 남한의 데모 영화를 2,3일 마다 상영하고 '남한인민들이 북조선을 동경해서 궐기했다'고 선전했으나 2개월이 채 못되어 갑자기 영화상영을 중지했다고 한다.


그 이유는  남한에는 거지와 실업자만 있다고  들어 온 북한 동포들이 데모 영화를 보고 화면에 나오는 시민마다 모두 넥타이를 매고 대학생들도 신사복을 입고 순경조차 데모대가 밀려가자 점잖게 물러서는 것을 보고 전연 허위선전을 들어왔다고 깨달은 것을 괴뢰당국이 눈치챘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 .... 공포와 강제만이 꽉 차 있었습니다 ........ ]

 [ .... 「우리 고향엔 먹을 게 없어 아이들이 아우성이오」 ........   ]

 

  1961년 9월 평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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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9월5일, 林錫珍은 평양 순안공항에 도착했다.


『비행기에서 내리자 마자 북한 사회가 잘못돼 있는 곳이란 걸 직감했습니다. 그 순간부터 저는 생각의 고통을 안고 살아야 했지요』


서독에서 우편물로 받아 본 화려한 화보 속의 밝고 명랑한 북한은 어디에도 없었다. 우중충하고 잿빛 감도는 건물들, 색깔이라곤 새빨간 광목에 쓰여진 金日成에 대한 충성 구호들뿐, 보이는 사람들은 창백하고 공포에 질린 얼굴들이었다.


『20세기 초 유럽의 유명 作家인 아서 케슬러나 앙드레 지드가 사회주의를 주창하다 1930년대에 모스크바에 한 번 가 보고는 그 환상에서 깨어났지요. 그로부터 30년 뒤에 제가 꼭 그렇게 느낀 겁니다. 당시 朴대통령에게 「1970년대에 접어들면 북한은 분명히 위기국면으로 들어설 겁니다. 남한이 북한을 추월하게 됩니다」라고 말씀드렸습니다』

 

朴正熙는 『왜 그렇게 생각하시오』라고 물었다.

『그 사회는 백성들의 지지를 받아 선 인민민주주의가 아닙니다. 공포와 강제만이 꽉 차 있었습니다. 이조시대 탐관오리보다 더한 사람들이 당간부였습니다.』

朴正熙 대통령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고 한다. 마치 자신도 그렇게 짐작하고 있었다는 듯이.

 

林錫珍은 평양 모란봉 초대소에 도착해 勅使(칙사) 대접을 받으며 3주 동안 북한의 여러 곳을 돌아 다닐 수 있었다. 벤츠 승용차에 감시하는 안내원과 동승하여 정해진 시간표대로 방문하기는 했지만 순간순간 드러나는 빈틈을 林錫珍은 놓치지 않고 발견하곤 분석했다.

 

『청진에서 기차를 기다리고 있을 때였습니다. 초라한 驛舍였는데 기차가 연착하는 바람에 기약없이 플랫폼에서 서 있어야 했어요. 감시하던 안내인도 화장실을 갔는지 보이지 않았습니다. 마침 주민들이 기차를 타러 나왔다가 제 곁에서 이야기하는 걸 엿듣게 됐지요.


한 사람이 「우리 고향엔 먹을 게 없어 아이들이 아우성이오」라고 하니 옆 사람이 「그럼 밀가루 과자나 주지」라고 했어요. 그러자 한 숨을 푹 쉬던 주민은 「그것도 있어야 주지요」 하는 겁니다.


기차 안에서도 주민들은 제가 입고 있던 독일제 양복과 구두를 신기한 듯 쳐다보곤 했습니다. 안내인이 허용하는 북한 사회만 보던 나에게 이런 쥐구멍 같은 틈을 통해 흘러 나오는 북한의 내면은 충격 이상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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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chogabje.com/board/view.asp?C_IDX=11849&C_CC=BB

[자료집] 동백림 對南공작단 사건의 내막

『내무덤에 침을 뱉어라』중 동백림 사건 부분 全文

趙甲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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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5개년계획이 완수하면 .... 배급제도도 폐지하겠다 .........    ]


[ ......  7개년계획기간중에는 북한인민들은  쌀밥에 고기국을 먹으며 비단옷 입고  기와집에 ...........    ]

 


경향신문  1963.8.24.


해방 18년 북한은 어떻게 변했나? (7)  경제[하]


선전에 그친 계획
생산목표달성을 고지점령 운운
전학생 노동자로 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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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개년계획 (61 - 67년)

 

7개년계획의 기본지표는 이미 조성된 중공업의 기지를 더 정비하고 그것을 효과적으로 이용하며 이에 기초하여 경공업과 농촌경제를 발전시키며 주민생활을 획기적으로 개선하는데 있다고  하였다.


과거의 1차 5개년계획이 완수하면 북한인민들의 의식주문제는 기본적으로 해결되고 배급제도도 폐지하겠다고 호언하던 그들이 5개년계획이 완수된 후에 배급제도는 더 강화되었고 인민생활의 향상이란 그다지 진척되지 못하고 노동혹사만 강화되었을 뿐이다.

 

그러므로 7개년계획을 발표할 때에도 7개년계획기간중에는 북한인민들은 쌀밥에 고기국을 먹으며 비단옷 입고  기와집에 살 수 있다는 선전을 늘어 놓고 5개년계획기간중의 노동착취를 훨씬 능가하는 착취제도를 일층 강화하고 각급학교마저 대대적인 개편으로써 학생들로 하여금  노동하고 배우며 배우며 일하라는 노동정신을 고취시키고 학교명칭을 기술학교 고등기술학교로 만들어 대학에 진학하자면 고등기술학교를 졸업한 후 2년의 노동기간을 통하여 추천제로  대학에 진학할 수 있는 제도까지 마련하고 전학생을 노동자로 전변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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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7년부터 착수한 5개년 계획


1957년부터 착수한 5개년 계획은 사회주의 경제의 공업기반 구축과 주민의 의·식·주 문제를 기본적으로 해결하는데 목표를 두었다. 이 계 획은 전후복구 3개년 계획과 마찬가지로 중국·소련 및 기타 공산국의 지원에 힘입어 계획기간을 2년 앞당겨 조기달성하였다고 발표되었다.

 

 

 

        1962

 

[ ..... 정말 이런데도 있는가고  머리가 다 이상해질 지경입니다 .......     ]

 

1962.4.15. 경향신문

 

꿈은 깨어지고   전조총련간부 오귀성 기 (완)


식당에도 자유로이 못가
일본에 둔 남편 그리워 울고만 ....
평양에서 온 편지


발신자 북한 (이하 불상)

수신자 우인
일자 불상

 

지난번 편지에서 거짓말을 해서 미안해.나쁘게 쓰면 가질 않아서  할 수 없이  거짓을 썻네. 용서해주게.거짓이란 일본에서 조선을 선전하는 것과는 정반대란 말이다. 노임은 싸지 물가는 비싸지 인민과는 언제나 충돌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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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일본에서 들은 얘기와는 전혀 딴판이네. 또 일상생활에서 조금치라도 일본이 좋다는 얘기를 하면 반동적이라고 몰아세운다. 그리고 교육으로는 자본주의 사회란 자본가가 채찍을 휘둘러 일을 시키고 임금을 싸게 준다고 가르쳐서 학생들도 일본의 생활수준이 아주 낮을 거라고 우리에게 말하는거야.

 

이런 형편이라 우리가 일본서는 노동자가 텔리비전 라디오 기타 전기기구를 가지고 있다고 말하면 믿으려 하기는커녕 거짓말이라고 대든다네. 정말 외국의 사정엔  깜깜해.  쌀값이 싸다고 했지만 쌀은 배급제이다. 식당에도 자유롭게 갈 수 없고, 일본서 온 이국자(북송자)들은 모두 울고 있네.

 


발신자 평안북도 이 모녀
수신자 지인 K   일자 1960년 5월 15일


실례를 무릅쓰고 위험을 각오하면서 K님에게 저의 사정을 알립니다.

저는 조선총련의 일방적인 선전에 홀려 사랑하는 남편을 일본에 남겨두고 지난 3월 13일 귀국(북송)했읍니다. 만일 이 편지가 검열을 받아 저의 생명에 위험이 온다고 하더라도 각오는 되어 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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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지금 와서야 비로소  당신네들이 반대한 이유를 알게 되었읍니다. 북한에 와서 깜짝 놀란 일은 일본에서 들은 것과 현실이 너무나도 동떨어진 것과  일상생활품 특히 일상 먹는 야채 한가지 볼 수 없는 상태였어요. 이 세상에 정말 이런데도 있는가고 머리가 다 이상해질 지경입니다.


저는  인간으로서는 이와같은 생활을 이이상 계속할 수 없다고 단념하고  최후의 각오를 하고 있읍니다. 이런 마당에 죽음도 두렵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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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년 등소평은 ... '흰고양이든 검은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좋은 고양이다.'라는 말을 하였다. .......


등소평은 78년 중국의 운명을 주도한 후에 다시 '백묘흑묘론'으로써 중국의 경제건설을 지휘하였다. 은퇴한 후에도 등소평은 유명한 화가에게 <쌍묘도(雙猫圖)>를 그려 달라고 부탁하여 그것을 집에 걸어두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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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 시민은 60년대 초까지 먹어 보고 잊어버렸던 생선 맛을 새 장마당이 생긴 90년대 후반에 와서야 비로서 다시 찾게 됐다. 60년대 후반부터 평양시민들에게 동해의 냉동 수산물을 공급한다던 방침은 70년대에 들어서자 여러 가지 이유로 유야무야 되었다.


80년대에 와서야 평양시민 수산물 공급 방침이 서장과 서창, 두 수산물 직매점을 통한 배정 체계로 줄어든 상태에서 겨우 실현 되었다. 그것도 냉동품에 불과했지만 그러한 물고기 맛을 보는 혜택을 지닌 시민 대표조차도 간부들이기가 일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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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신혼생활을 하던 나는 안해(아내)가 밤일을 하면 아침밥을 내가 하였는데 정량대로 밥을 한 다음 안해의 두끼 분 밥을 푸고 나의 점심밥 변또(도시락)를 싸고 나면 나의 아침 밥이 반 그릇도 못되었다.


그것을 다 먹고 난 다음 냠냠해서 변또밥까지 다 먹어 버리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런 날에는 빈 변또를 들고 출근할 수도 없고 또 집에 가자니 안해가 알 것 같아서 그 빈 변또 보자기를 집밖에 감춰놓고 출근하였다. 그런 날은 물론 점심을 굶었다.

 

700이라는 배급 기준량을 타먹는 사람이 이러할진대 그 절반의 기준량을 받는 노인들이나 가정부인들의 고통이 어떠하리라는 것은 두말 할 것 없다.

그러한 적은 모자라는 배급량도 70년대에 와서는 절약한다고 보름에 2일분을 잘랐고, 80년대에는 다시 기준량을 더 줄여 700이 600도 못되게 만들었다. 90년대에는 배급날짜가 되어도 배급을 안 주기 시작하였다.

 


이리하여 북한식 사회주의는 배고픈 사회주의로부터 아사식 사회주의로 구걸식 사회주의로 전변되었다. 이것도 성과라면 당연히 김일성의 주체농법의 성과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그러한 배급제도하에서 자기가 먹고싶은 것을 먹을 선택권이 없는 것은 물론이다.


그러므로 대다수의 북한인들은 게걸증이 들어 항상 먹었으면 한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모든 북한인민들은 항상 식전이다. 마치 먹을 것을 찾아 북한의 골목들을 누비고 있는 갈비뼈가 앙상한 북한의 개들과 같이 식욕의 포로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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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8.1.19.  김신조 일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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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겁을 집어먹은 禹 씨 형제들에게 “너, 우리가 어떤 사람들 같아?”라고 물었다. “군인 같은데요”라고 하자 공비들 중 한 명이 “우린 혁명당이야”라며 참깨 섞인 엿과 오징어를 주고 말을 붙였다.

  
   “너, 쌀밥 일 년에 얼마나 먹어봤어?”
  
   “밥은 하루에 세 번 먹잖아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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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www.newdaily.co.kr/news/article.html?no=188673

경찰이 맨몸으로 무장한 공비에 수갑을 채우다!
46년 전 오늘, 무장공비는 청와대로!

조갑제 조갑제닷컴대표 | 최종편집 2014.01.20

 

 


         1968

 

[ ...... 서울은 판잣집일뿐더러 농촌농가의 항아리는 거미줄이 쳐져 기아에 .........


  ...... 농가에 내려가서 밥을 훔쳐 먹을때  따뜻한 이밥이 언제나 있었고  항아리에는 곡식이 가득 ........

  ...... 화전민이라는 농민들이 북한에서는 신사같은 옷을 ...........    ]

 


김일성의 기만알았다  자수공비 조응택 회견


[중앙일보] 입력 1968.12.14

 

무장공비잔당 가운데 지난7일 아군작전부대에 자수해온 북괴군124군소속 중위 조응택(24)은 14일상오 기자회견에서 『김일성이 동족을 학살하라고 살인마 되기를 강요, 민족의 분노를 느껴 자유대한으로의 자수를 결심했다』고 말했다. 조는 북괴124군3기지 1중대1소대3분대소속 소환으로 지난11월초 울진지역에 침투한 60명조와 함께 상륙했다가 지난달 1월11일과 15일·27일 3차례에 걸쳐 아군합동작전부대와 교전, 15명조중 9명이 죽고 단독분리되어 헤매오다 아군작전부대에 자수해온 최초의 공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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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자수동기는


답=김일성선전으로는 남한의 생활상이 말이 아니라고 했다. 서울은 판잣집일뿐더러 농촌농가의 항아리는 거미줄이 쳐져 기아에 허덕이고 있다고 들었다.


그나마 침투된후 배가고파 농가에 내려가서 밥을 훔쳐 먹을때 따뜻한 이밥이 언제나 있었고 항아리에는 곡식이 가득했다. 또 화전민이라는 농민들이 북한에서는 신사같은 옷을 입고 있어 완전히 생각이 달라졌다. 김신조가 직접투항을 권고하는 방송을 듣고 자수를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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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공비들의 양민학살을 어떻게 생각하나


답=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학살하라는것이 지령이었다. 동족을 무차별 살상하니 민족의 분노를 일으키는 일이다. 직접 가담하지는 않았으나 나는 죄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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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자유대한의 느낌은


답=자동차가 너무 많아 전차까지 철수될 정도니 듣던 것과는 딴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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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ews.joins.com/article/1182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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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슬픈 遺産(유산) 『보리고개』 안녕  

     1967.04.06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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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모두 논밭 늘리고 營農改善(영농개선)에 앞장 서 한치의 땅도 效用(효용)있게

     해마다 봄이 오면 밀어 닥쳤던 춘궁기


 .... 절량농가들은 초근목피로 연명해온 역사도 있어 실로 보리고개는 뼈저리게 고달픈 것이었다. 그러나 이 보리고개를 스스로의 노력으로 극복, 아무리 높은 보리고개라 하더라도 눈 한번 깜박하지 않는 마을들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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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선의 1967년 8월 29일 일기를 살펴보자.

 

"16차 전원에서 김영주 동지가 제안한 '당의 유일사상체계확립의 10대 원칙'이 채택된 뒤 전국 곳곳에 김일성 수상 동지의 동상이 건립되고 있다. … 중략 …


유일사상이란 말 자체가 얼마나 사회주의로부터 벗어나 있는가. 굳이 따지자면 한낱 정책노선에 지나지 않는 것을 일러 사상, 그것도 유일이라는 이름으로 당 전체에 확립하려는 모습은 아무래도 납득하기 어렵다. 개인 숭배의 극한적 형태가 아닌가. … 중략 …


 혈연으로 후계자를 정하려는 움직임이 드러나고 있는 오늘을 도대체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 (231페이지)

 


이어서 한달 후 그는 "공화국 도시와 농촌 곳곳에서 지난 10여년 동안 인민들을 위해 출판되어온 모든 서양 문학들을 반복고주의와 반수정주의라는 구호아래 단속해가는 공화국의 현실이 믿어지지 않았다"라고 쓰여 있다.


성혜랑의 수기 <등나무집>에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나온다. 수기에서 성혜랑은 "전쟁때 나는 미국 비행기가 손바닥만한 도시에 하루에 수백 개의 폭탄을 던진 때도 이런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공포를 느껴본 일이 없었다"라고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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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dailynk.com/korean/keys/2001/19/04.php

Review: 아름다운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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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이 좋았던 시절은 1960년대였던 것 같다. 물론 1960년대 천리마운동을 할 때도 먹을 것이 여유 있는 형편은 아니었다. 그때도 늘 뭔가 먹고 싶었다.

남한에 와서 지내는 것처럼 북한에서 물질적으로 풍족했던 시기는 한 번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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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년에 경제에서 중대한 ‘개혁’이 실시된다. 개별 국유기업에 자본주의 적 이윤원리를 도입하고 독립채산제를 실시하는 것이 이 개혁의 주요 내용인 데 이 개혁은 코시킨이 주도한 것이어서 코시킨 개혁이라고도 불린다.


그런데 경제에서 자본주의적 원리를 도입하는 것은 이미 후르시쵸프 당시에 논의가 진행 중이었다. 1962년 쏘련 경제학자 리베르만은 당 기관지인 ≪프라우다≫에 “계획, 이윤 및 상여금”이라는 논문을 발표하는데 경제의 지방분권화와 이윤제도의 도입을 주장한 것이었다.12) 중앙의 계획은 산출목표에만 한정하고 투입요소는 개별기업이 결정하고 또 가격개혁을 시도하는 것을 중심내용으로 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리베르만의 주장이 채택된 것이 1965년의 경제개혁이었고 따라서 리베르만 방식이라고도 불린다.


이러한 경제개혁에 따라 1967년 도매가격이 일제히 인상된다. 이는 기존에 생산비용에 산입되지 않았던 각 기업의 고정기금(기계, 설비, 건물 등)의 사용료를 국가가 개별기업의 이윤에서 징수하는 것을 기초로 이루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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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에 들어서자 소련과 동유럽의 국가에서 경제성장 속도가 감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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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소련에서는 1962년 9월 사회주의 경제의 효율성 향상 수단으로서 이윤개념 이용을 제창한 리베르만(Evsey Grigorevich Liberman)의 논문 「계획, 이윤  및 프리미엄」이 공산당 기관지 『프라우다』에 게재되었으며, 소련과 동유럽 국가들에서 경제개혁에 관한 논의가 활발해지기 시작하였다.

 

1963년 사회주의 국가에서 최초로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한 체코슬로바키아에서는 1965년 1월에 당 중앙위원회에 의해 개혁안이 승인되었다. 1967년에 시행된 새로운 경제시스템 개혁의 주요 내용은 ①지시형 계획화와 할당배급 폐지, ②국가의 경제계획을 시장 메커니즘으로 보완, ③국가의 경제계획은 거시경제적 발전방안만을 대상으로 함, ④국가는 간접적인 경제 규제도구를 사용하여 경제를 조율하며 장기적으로는 재정 정책, 단기적으로는 통화정책, 가격정책 실시, ⑤경제부문별로 존재하던 정부 부서는 폐지하고 기업은 시장에서 자주성을 가지고 활동, ⑥대외무역의 국가독점폐지와 분권화, ⑦경쟁 촉진을 위해 경제를 서서히 세계시장에 개방, ⑧일반종업원 대표를 관리기구에 참여시켜(노동자 평의회 도입) 기업 민주화를 추진 하는 것 등이었다.


1968년 1월에는 개혁파인 두브체크(Alexander Dubcek)가 서기장에 취임하면서 프라하의 봄이라고 불리는 정치 민주화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소련과 동유럽의 지도자들은 체코슬로바키아의 개혁이 자국의 국민들에게도 전파될 것을 두려워하여 1968년 8월 20일 군사 침공을 개시하였다. 두브체크는 다음해 4월 서기장에서 해임되어 정치  실권이 없는 연방의회 의장으로 좌천되었으며, 대신 후사크(Gustav Husak)가 서기장으로 취임하여 소련의 지시에 따라 정상화라고 칭해진 구체제로의 복귀작업을 실시 하였다.

 

헝가리는 1968년 경제개혁을 실시하여 기업에 대한 의무 생산․관리지표를 폐지하고 제한적인 시장모델에 기한 사회주의 경제를 구축하려 하였다. 하지만 1970년에 들어서면서 오일쇼크에 의해 헝가리 경제는 곤란에 직면하였다. 경제개혁을 추진하던 니에르시(Rezs Nyers)가 소련 등의 압력에 의해 정치국원에서 해임되고 헝가리의 경제개혁은 후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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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유럽 주요국의 경제체제 환과정*1)
-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헝가리를 심으로

김민제

 

 


1968.1.5. 슬로바키아의 개혁주의자 알렉산데르 둡체크가 집권

1968.8.21. 바르샤바 조약군의 침공

 


프라하의 봄 (체코어: Pražské jaro, 슬로바키아어: Pražská jar)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소비에트 연방이 간섭하던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일어난 민주화 시기를 일컫는다.


이 시기는 1968년 1월 5일에 슬로바키아의 개혁주의자 알렉산데르 둡체크가 집권하면서 시작되었으며, 8월 21일 소비에트 연방과 바르샤바 조약 회원국의 동맹국이 체코슬로바키아를 침공하여 개혁을 중단시키면서 막을 내렸다.


프라하의 봄 당시 둡체크는 경제와 민주화면에서 부분적인 분권화를 실시하여 시민의 자유를 좀 더 보장하는 개혁을 시도하였다. 이 가운데는 보도, 표현, 이동의 자유 제한을 완화하는 것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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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탈리아와 프랑스의 공산당과 마찬가지로, 핀란드 공산당도 바르샤바 조약군의 침공을 비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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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4.

 

4월에 둡체크는 자유화 행동 계획을 내놓았는데, 경제면에서는 소비재 생산을 강조하고, 다당제 체제의 가능성을 열어두며, 보도의 자유, 언론의 자유, 이동의 자유를 증진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 계획은 “공산주의는 착취 계급의 지배에서 노동 인민을 해방하는 것만 의미하는 것이 아니며, 어떠한 부르주아 민주주의 체제보다도 개인의 풍족한 삶을 위해 더 많은 것을 제공해야 한다”는 시각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이 계획에서는 비밀 경찰의 권력을 제한하였으며,  체코슬로바키아 사회주의 공화국을 두 개의 동등한 나라(체코와 슬로바키아)로 연방화하도록 규정하였다 .

또 외교 정책면에서 서방 국가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동시에 소비에트 연방과 다른 공산주의 국가들과 협력하는 내용도 있었다.


행동 계획에서는 10년간 과도기를 통해 민주적인 선거가 가능해질 것이며, 새로운 형태의 민주주의가 현 체제를 대체할 것이라고 언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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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동 계획에서는 개혁이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의 지도를 받으며 진행되야 한다고 규정하였으나, 대중의 압력으로 즉각 개혁이 실시되었다.


급진적인 요소가 더욱 커졌는데, 언론에서는 (1968년 6월 26일 검열 제도 공식 폐지 이후) 反소비에트 논쟁이 등장하기도 하였으며, 민주주의자들이 개별 정당을 이루기 시작했으며, 독립적인 신생 정치 조직이 생겼다.

 당내 보수주의자들은 억압 조치를 요구하였으나, 둡체크는 온건책을 권하며 체코슬로바키아의 지도력을 재차 강조하였다.


4월에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 전체 회의에서, 둡체크는 “인간의 얼굴을 한 공산주의”라는 정치 계획을 발표하였다.


5월에 그는 제40차 당 회의가 9월 9일 회기 초에 소집될 것이라고 발표하였다. 회의에서 행동 계획은 당 강령에 포함되었으며, 연방화 법안 초안이 마련되고, 새 중앙 위원회를 선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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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8.21.

 

체코의 소식은 가슴 아프기만 하다.

21일 프라하 방송은 "우리가 국가를 연주하면 우리의 마지막 방송임을 기억하라"고 말한 1분후 체코 국가를 연주하였다.체코 국민이 아니더라도  울고 싶은 심정이 된다.


관영 통신 체데카는 21일의 최후통신에서 "프라하.21일.체데카.이제 방금 체데카의 자유로운 뉴스활동이 종막을 내리고 있다.앞으로 보도가 있다면 우리의 자유의사가 아니다"라고 전하고 소식을 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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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에 게재된 한 사진에는 이런 설명도 붙어 있다.

"체코 청년들이 피로 얼룩진 국기를 펼쳐 들고 행진하고 있다.구기를 붉게 적신 피는 소련 탕크에 깔려 죽은 한 여인의 피라고 한다."


또 다른 한 사진에는 소련 탕크 앞에 연좌데모식으로 앉아 있는 체코 소년들의 모습이 보이고 "불법침입한 소련 전차 앞을 가로 막는 체코 소년들'이라고 설명되어 있다.


소련인의 표정은 어떠한가.모스크바의 한 청년은 '프라하....왜 프라하를...'하면서 탄식을 하더라고 보도되었고 프라하에 진격한 젊은 한 군인은 체코 공산당중앙위원회 앞에서 자살하였다고 방송되었다.그들의 상관이 말한 것과 프라하의 실정이 너무도 거리가 먼데 충격을 받은 때문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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餘滴(여적) 1968.08.24 경향신문 1면  정치 기사(가십)

 

 


       *


[ ..... 미국과의 교류가 활발해진 1960년대 말부터 소련사람들 가운데 소련정치제도에 대해서 의심이 깊어졌습니다. 외국과의 격차가 세월이 갈수록 넓어 졌습니다. 또 교육수준이 높아지고 있는데 수많은 소련 사람들은 자기의견 자기 견해를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자유를 희망했습니다. 이 체제하에서는 이와 같은 자유를 가질 수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60년대 말부터 소련에서 이러한 경향이 나타났습니다. 지식인부터 이러한 생각이 확산, 세월이 갈수록 전사회로 확산했습니다.


70년대 말부터 사회주의, 공산주의를 믿는 사람들이 거의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나이가 조금 많은 사람들은 사회주의를 유지 한다 하도라도 개혁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젊은 사람들은 사회주의가 희망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  ]


란코프의 소련이야기

[2007-01-15]
 

 

 


모두 61명 사망

대점령군항쟁


[빈=AFP.합동] 점령군에 항거하다 죽은 체코인의 수는 23일 현재 61명으로 늘어났다고 프라하 방송이 보도했다.

 

 


소의 체코 무력침공규탄

--- 자유시민의 함성 곳곳에 메아리

전국서 400만 참가

 

"붉은 마수 응징하라


체코의 자유화를 무력으로 짓밟은 소련등 적색 '바르샤바'동맹군의 만행을 규탄하는 범국민궐기대회가 24일 상오 10시 서울을 비롯 부산 인천 광주 등 전국 각지에서 일제히 열렸다.


서울서는 시민, 학생과 이북 5도민, 한국경제인연합회원, 예총 및 향군 등 10여 만명이 궐기했고 대구의 10만명을 포함 이날 궐기대회서는 전국 곳곳에서 4백만의 시민이 무력 침공군을 규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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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1.16.


1월16일 「벤체슬라스」광장에서 「프라하」대학철학과학생 「얀·팔라치」군(22)이 焚身(분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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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죽기 전에도 저항의 상징이었으며 다음과 같은 그의 마지막 편지는 모든 사람들이 익히 알고 있다.

 

"조국은 바야흐로 절망에 직면해 있다.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항거를 행동으로 표시하고 국민들을 일깨우기 위해 단호한 결심을 했다.


우리의 요망은 첫째, 검열제도의 즉각적인 철폐, 둘째 소련 점령군이 발행하는 신문의 일종인 즈프레비 지의 배포금지다.


만일 우리의 요망사항이 닷새안에 이루어지지 않고 -- 또 국민들이 파업 등의 수단으로 충분한 협력을 표시하지 않는다면 또 다른 횃불이 타 오를 것이다.


횃불 제1호로부터"

 

그의 요구는 구체적이고 온건한 것들이었기에 이루어질 수 있을 것으로 그는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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自由(자유)를 熱望(열망)한 抵抗(저항)의 횃불 체코反蘇運動(반소운동)의旗手기수) 얀 팔라치군 분신 5주년

 1974.01.31.  동아일보  4면 

 

 


1969.01.22


체코6萬(만)시민 反蘇(반소)데모 1969.01.22 경향신문1면

 

 


 40萬學生集結(만학생집결) 프라그 超緊張(초긴장)

 1969.01.25 동아일보1면


 40萬學生集結(만학생집결) 프라그 超緊張(초긴장) 팔라치葬禮(장례) 反蘇抗爭(반소항쟁)막바지... 한「얀·팔라치」군의 葬事(장사)때 있을지도 모를 反蘇(반소)데모에 대비하기 위해 二十四日(이십사일) 全...

 


팔라치愛人(애인)도 焚身(분신)

1969.01.25 경향신문1면


【프라하=UPI·동양】소련의「체코」침공에 항의하여 지난16일 분신자살한「체코슬로바키아」대학생「팔라치」군의 애인인「에바·베드나리코바」(18)양이 21일 분신자살... 

 


七(칠)번째燒身(소신) 두브체크 鎭靜(진정)호소

1969.01.25 동아일보1면

 

 

비상속 팔라치 장례

경향신문 1969.1.27. 기사(뉴스)


비상속 팔라치 장례

프라하 전시 조종 -- 촛불행렬 수십만


[프라하=AP.동화] 소련군에 점령당한 조국의 가냘픈 자유의 불길이 꺼져 버리지 않도록 분신자살로써 21세의 청춘을 불살라 버린 철학도 얀 팔라치 군의 장례식은 25일 만일의 사태에 대비, 전군경에 비상대기령이 내린 긴장된 분위기 속에서 비교적 질서정연하게 칼 대학에서 엄숙히 거행되었으며 비통에 잠긴 수십만의 체코인들은 부슬비 내리는 거리로 쏟아져 나와 팔라치 군에게 마지막 경의를 표했다.

 

장례대열이 구시가광장을 지날 때 소련군의 체코 침공을 알렸던 프라하 교회의 종들은 일제히 조종을 구슬프게 울렸으며 연도에는 손에 촛불을 든 남녀노소의 수 많은 시민이 도열해 팔라치 군에게 말 없는 조의를 표했다.

 

팔라치 군의 어머니 팔라코바 여사가 관에 매달려 울면서 뒤따랐고 그녀의 남은 아들 이리 군과 팔라치 군의 약혼녀도 관을 붙들고 있었다.
거대한 체코기를 든 학생과 가운을 입은 칼 대학 철학과 교수들이 영구에 뒤따랐고 전외상 이리하예크, 체코 작가동맹 위원장 에두아르드 골드스투에커, 전 교육상 블라디미르 카드레치 등 세 개혁파 지도자도 장례 행진 속에 끼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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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의 팔라치 焚身(분신)

1969.08.26 경향신문2면


제2의 팔라치 焚身(분신) "무릎 꿇고 사느니 고개 들고 죽겠다"


【브르노(체코)=UPI동양】「체코슬로바키아」의 19세 청년 1명이 "무릎 꿇고 사느니 고개를 들고 죽기 위해" 분신자살했다고 이청년의 친구들이 25... 

 

 

 

자유를 열망한 저항의 햇불

체코 반소운동의 기수 얀 팔라치 군 분신 5주년


동아일보  1974.1.31. 기사(뉴스)

 

자유를 열망한 저항의 횃불

체코 반소운동의 기수 얀 팔라치 군 분신 5주년

검거 선풍속 지하활동 계속

메카가 된 묘지엔 순례대열

비밀경찰서 유해 파내 없애도 여전

 


[런던타임즈=본사특약독점게재] 철학도 얀 팔라치 군이 자기몸에 스스로 불을 붙혀 프라그의 한 병원에서 21세의 젊은 나이로 숨을 거둔지 만 5년이 흘렀다.

그는 죽기 전에도 저항의 상징이었으며 다음과 같은 그의 마지막 편지는 모든 사람들이 익히 알고 있다.


"조국은 바야흐로 절망에 직면해 있다.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항거를 행동으로 표시하고 국민들을 일깨우기 위해 단호한 결심을 했다.

우리의 요망은 첫째, 검열제도의 즉각적인 철폐, 둘째 소련 점령군이 발행하는 신문의 일종인 즈프레비 지의 배포금지다.

만일 우리의 요망사항이 닷새안에 이루어지지 않고 -- 또 국민들이 파업 등의 수단으로 충분한 협력을 표시하지 않는다면 또 다른 횃불이 타 오를 것이다. 


횃불 제1호로부터"


그의 요구는 구체적이고 온건한 것들이었기에 이루어질 수 있을 것으로 그는 믿었다.


팔라치 군이 분신자살한 다음날 20만명의 시민들이 프라그의 거리를 메웠고 다른 지방 도시에서도 수만명의 국민들이 가두시위를 벌였다. 긴장과 존엄 그리고 단호한 결의 이것이 1969년 1월의 체코슬로바키아의 분위기였다.


노동자와 학생, 그리고 노소를 막론한 일반국민들은 물론 , 그 때까지만 해도 사회주의의 유지를 위해 스스로 투쟁하고 있다고 자부하고 있던 사람들까지도 팔라치군의 죽음에 대해 공공연하게 공동의 책임의식을 가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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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라치 군이 스스로 죽음의 길을 택한 것은 경애하는 지도자 들이 소련인들과 비굴한 타협을 일삼고 국민 자신들도 스스로 자신과 안일하게 타협하는데 대해 항거하려는 열망에서 결심한 것이었다.그는 나라가 위기에 직면했을 때 정치인들에게 더 이상 기대할 수가 없을 경우 국민들 스스로가 자기 일을 알아서 처리하여 늦기 전에 단호한 행동을  해야 된다는 것을 각자가 이해하기를 바랐다.그러나 이같은 그의 말에 담긴 참뜻을 모든 사람들이 다 납득하기는 어려웠다.

 

많은 사람들이 단식투쟁을 통해 또는 집단적으로 그의 뜻을 따랐고 노동자와 학생들이 긴밀한 협조를 이루어 훌륭한 본보기를 보였지만 한달 남짓한 시간이 흐르자 일부에서 주저하는 빛이 였보이기 시작했다.


팔라치 군의 감명 깊은 장례식이 거행된 만 1개월 뒤 제2의 햇불인 19세의 얀자익 군이 불속에서 숨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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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무덤은 메카가 되었다. 그의 묘지 순례는 당국으로부터 가해지는 강력한 회유와 협박을 물리칠 수 있는 정신적인 힘을 주었기 때문이다. 만약 팔라치 군의 희생이 없었더라면 오늘날 권력에 굽히지 않고 투쟁하는 사람들도 협력하라는 유혹에 쉽사리 넘어 갔을 것으로 모두들 믿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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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벨벳 혁명으로 둡체크는 바츨라프 하벨 행정부의 연방 의회 의장이 되었다.

한 외무부 대변인은 프라하의 봄과 고르바초프의 개혁의 차이점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자, "19년의 세월."이라고 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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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1.23. 푸에블로호 납치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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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중반, 그러니까 푸에플로호 사건이 있기 전까지 북조선의 사회주의 체제는 최대의 한계점에 도달하였고 그 시점 이후 급속히 강하하기 시작했다.

그래도 그때는 고기 당과류 술 등의 식료품과, 질이 낮기는 했지만 양말 속내의 솜옷 칫솔 등 최소한의 생활필수품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의 북조선에는 아무것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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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8  김일성


[ ..... 640만 명의 어린이들에게 겨울옷을 입히기 위하여 ... 무려 1억 4,1000만원의 자금을 ........

 ..... 우리나라 모든 로동자, 사무원들의 한달 로임 ........     ]

 

[ ...... 1956년 ... 상품유통 규모는 ... 임금의 50%도 흡수할 수 없게끔 계획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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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경우 화폐 임금인상이 실제로 노동자들의 소비생활을 향상시키는 데 사용되었는가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북한은 중공업 우선정책과 군수산업 부문에 재원을 집중투입함으로써 인민들의 소비생활에 필요한 물품의 공급이 크게 악화되었다.  1956년 자료이기는 하지만, 노동자지구의 상품유통 규모는 해당 기업소의 노동자, 사무원들 임금의 50%도 흡수할 수 없게끔 계획되었으며, 심지어 신창탄광이나 대안전기공장 내 직장상점에서 보유하고 있는 상품을 다 판매하더라도 노임의 37%밖에 흡수 할 수 없을 정도였다.  이러한 사정은 7개년 계획의 차질과 ‘경제 국방 병진노선’을 추진하던 1960년대에는 개선되었을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따라서 북한주민의 실제적인 생활향상은 화폐임금 훨씬 못 미치는 수준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추정은 1968년에 행한 김일성의 다음과 같은 연설에서도 뒷받침되고 있다.


 
“우리 당은 이번에 모든 어린이들에게 겨울옷을 해 입힐 데 대한 조치를 취하였는데 이것은 우리 인민들에 대한 당의 두터운 배려입니다. 내 생각에는 세계에 많은 나라가 있지만 우리나라에서와 같이 이처럼 어린이들과 인민들에게 배려하는 나라는 있는것 같지 않습니다.


 640만 명의 어린이들에게 겨울옷을 입히기 위하여 국가에서는 무려 1억 4,1000만원의 자금을 지출하고 있습니다. 이 돈은 우리나라 모든 로동자, 사무원들의 한달 로임과 맞먹습니다. … 털어놓고 말하여 당에서 이와 같이 두텁고도 세심한 배려를 돌리지 않는다면 모든 어린이들에게 겨울옷을 해 입힐 수 없습니다.”

[김일성, "교통운수문제와 로력의 긴장성을 푸는 것은 우리나라 인민경제의 절박한 요구" 사회주의 경제관리문제에 대하여 제3권 (평양: 조선로동당출판사, 1970) pp. 402~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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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벌써 70년대부터 소련이 곧 무너질 것이라는 느낌을 갖고 있었습니다 ...........  


  ....... 1970년대 들어와 누구든지 생각하게 되는 보편적인 사고방식이 되었습니다 ..........    ]

 


[란코프] 소련 붕괴의 원인

 

란코프 ∙ 한국 국민대 교수

2014-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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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상 제 자신 뿐만 아니라, 저의 친구들은 벌써 70년대부터 소련이 곧 무너질 것이라는 느낌을 갖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생각했던 이유는 기본적으로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경기침체였고, 또 하나는 사회적인 분위기였는데 이는 소련 사람들이 느끼는 사회주의에 대한 깊은 실망감이었습니다.

 

경제문제는 따로 설명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60년대까지 대규모 노동 및 자원의 동원을 통해 잘 성장했던 소련 경제가 70년대 들어와 극복하기 어려운 만성적인 침체에 접어들었습니다. 객관적으로 말하면, 그 당시 소련 사람들의 생활은 많이 나빠지지 않았습니다. 물론 당시 소련은 북한과 비교하면 너무나도 잘 사는 나라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제생활은 좋아지지 않았고, 소비생활은 사실상 점차 열악해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회주의에 대한 실망은 소련이 망하게 된 아주 중요한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소련에서 농민들은 원래부터 공산주의를 싫어했지만, 도시 시민들 대부분은 6~70년대까지 소련 공산주의 체제를 대체로 지지했습니다. 물론 그들은 사회의 모순이나 경제적인 어려움, 부정부패와 정치테러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이러한 문제점은 과도기에 있어 불가피한 문제라고 생각했습니다. 당시에 소련 지식인이나 노동자들의 희망은 과도기를 마친 소련이 서양 자본주의 국가보다 훨씬 더 아름다운 사회를 건설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갈수록 이와 같은 희망은 점차 식어갔습니다. 처음에 10년이나 20년 정도 걸릴 줄 알았던 과도기는 끝나지 않았습니다. 물론 1960~70년대 소련은 비교적 잘 사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그래도 미국이나 일본과 같은 나라들을 능가하는 수준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때까지 소련 사람들이 필요악으로 받아들였던 여러 가지 사회문제는 심각한 짜증을 야기하였습니다.


제일 중요한 문제는 소련 사람들이 자신의 생활을 서양 나라들의 주민생활과 많이 비교하기 시작했다는 점입니다. 소련 사람들은 미국에서 평범한 사람이라고 해도 소련의 공산당 간부보다 좋은 집에서 살고, 좋은 차를 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마음만 먹으면 해외로 갈 수도 있고, 대통령을 비롯한 모든 정치인들에 대해 비판할 수도 있고, 부르고 싶은 노래를 아무 때나 부를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당시 소련에서는 이러한 일들이 모두 불가능했습니다. 물질적인 생활도 있었고, 개인의 자유도 김일성 시대의 북한보다는 많았지만, 미국이나 영국과 비교하면 거의 없다고 할 수 있었습니다.

 

사실상 이와 같은 불만이 50년대 말부터 시작되었다고 말할 수 있지만, 1970년대 들어와 누구든지 생각하게 되는 보편적인 사고방식이 되었습니다. 평범한 사람들뿐만 아니라 간부들까지 사회주의 체제에서 경제발전과 사회의 진보를 이루기 어렵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소련 정부가 했던 약속을 별로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정부가 약속을 많이 하고는 있지만, 전혀 지킬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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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rfa.org/korean/commentary/lankov/cu-al-10232014113331.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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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에 들어와 소련의 소비생활은 다시 어려워졌다. 그 근본이유는 사회주의 경제의 비효율성이었지만 세월이 갈수록 수요-공급 사이의 불균형은 심해졌다.


1947년 배급제를 폐지했을 때의 고정된 물가는 시장경제에서도 나타날 수 있는 물가와 대체로 일치했지만 시간이 갈수록 시중에 나도는 현금이 많아졌다. 대중의 정치적 지지를 의식한 정부는 월급을 계속 올렸지만 국가가 고정시켜 놓은 물가는 올리지 않았다. 그래서 국영상점의 진열대는 텅텅 비어갔다.

 

1970년대 우리 가족은 큰 상점 근처에 살았는데, 필자가 해마다 소비자의 선택이 좁아지는 것을 지금까지 생생히 기억한다. 1972-73년 이 상점 진열대에는 치즈 5종류가 있었는데, 1977-78년에는 1-2종류, 1980년 이후에는 한 종류라도 있으면 운이 좋다고 생각했다. 지역에 따라 큰 차이도 있었다. 지방에서도 쉽게 구입할 수 있었던 육류는 1960년대 말부터 어려워졌고, 가게 앞에 선 긴 줄은 그 시대의 상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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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dailynk.com/korean/read.php?cataId=nk04700&num=12395

배급제... 모스크바로 가던 '소시지 기차'
[란코프 칼럼] 구소련도 배급제 부끄러워 했다
2005-10-02

 

 

 


        1970  중국

 

[ ...... 일요일은 없고 휴일이라곤 1년에 3일뿐 .........

  ...... 저녁을 먹고 나면 .... 생산계획을 토의하고 모택동사상강좌를 .........


   ..... 벼농사도 지었으나 쌀밥은 한톨도 먹어보지 못했으며 주식은 옥수수, 수수, 좁쌀과 감자 .......

   ..... 봄철과 가을철에 남루한 의류 한벌씩  사고 나면 빈털터리 ...........   ]

 


야만인생활 25년 - 중공서 돌아온 일인가족이 폭로


매일경제  1970.8.19

 

외계단절 잡곡으로 연명
쉰다는 명절도 모사상 고취로 들볶고
1년 혹사댓가가 누더기 한벌


중세농노를 방불케 하는 중공치하의 인민공사내의 생활실태가 최근 귀국한 전일본개척민에 의하여 밝혀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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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림노파일가가 있던 곳은 흑룡강성 방정현의 보흥공사라는 30가구를 수용한 소규모의 집단농장, 수소폭탄을  실험하고 동방홍 인공위성을 궤도에 올리는 등 군사면에서의 발전과는  멀리 전기도 경운기도 없는 반원시적 농업집단이라고 했다.


이곳 남녀농군들에게 있어 시간관념은 태양. 날이 새면 농장에 나가  일하다가 해가 져 곡물과 잡초의 분간을 할 수 없을만큼 캄캄해진 다음에야 집으로 돌아온다.  저녁을 먹고 나면 고단한 몸을 쉬지도 못하고  야회에 나가 내일의  생산계획을 토의하고 모택동사상강좌를 받아야 한다.


일요일은 없고 휴일이라곤 1년에 3일뿐 정초와 단오절  추석에 하루씩 쉬는 것뿐인데 쉬는 날은 모택동사상 고취와 생산책임량 증대를 위한 행사 등으로 가만히 버려두지 않으므로 실제로 쉬는 날이란 하루도 없는 것이다.


벼농사도 지었으나 쌀밥은 한톨도 먹어보지 못했으며 주식은 옥수수, 수수, 좁쌀과 감자. 1년의 농사가 끝나면 각기의 생산량에서 공출책임량과 배급용식량을 빼고 남은 것을 현금으로 환산하여 받게 되는데 봄철과 가을철에 남루한 의류 한벌씩  사고 나면 빈털터리.


병에 걸리면 죽는 날을 기다릴 수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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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초 이래 생활 형편이 계속해서 급전직하로 나빠지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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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벌써 농촌은 물자 고갈로 입을 것, 신을 것이 없었다”고 회고하고 있는 1970년대 중반, 성혜랑은 조카 김정남의 교육을 위해 ‘가정교사’로 김정일 관저 생활을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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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산모가 쌀밥은 구경도 못해 젖이 안나온다 .......

  ...... 두부 생선 등은 볼 수도 없으며 돈은 소용도 없으니  헌옷 가지를 보내 달라 ........   ]

 

후회에 찬 비참한 나날  북송일인처들 편지로 참상 폭로


매일경제 1974.5.6.

 

산모가 쌀밥 구경도 못해
43세에 이미 백발돼버려
돈도 소용없으니 헌옷 보내달라

 

한국인 남편을 따라  북송선을 타고 북괴에 간 일본 여인들의 참상이 드디어 일본사회에서 처음으로 공개되어 뒤늦게 충격을 던지고 있어 내외에 큰 관심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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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통의 편지내용을 간추려 보면  산모가 쌀밥은 구경도 못해 젖이 안나온다. 본국서 보내준 조미료를 받고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43세에 이미 백발이 되어 버렸다.  두부 생선 등은 볼 수도 없으며 돈은 소용도 없으니  헌옷 가지를 보내 달라.  보내줬다는 사카란 5kg이 없으니 웬일이냐 .  4살짜리 꼬마는 아침부터 밤까지 책만 보는데 그것도 그림책 같은 것이 아니고 공산주의 서적들 뿐이다. 지금 청년돌격대에서 일하고 있다. 하루 빨리 고향에 돌아갈 수 있게 되기를 빈다는 애절한 호소로  넘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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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조선의 경제가 침체하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 초부터이고 인민생활이 눈에 뜨이게 어려워지기 시작한 것이 1970년대 말부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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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4


[ ...... 산모가 쌀밥은 구경도 못해 젖이 안나온다 .......

  ...... 두부 생선 등은 볼 수도 없으며 돈은 소용도 없으니  헌옷 가지를 보내 달라 ........   ]

 

후회에 찬 비참한 나날  북송일인처들 편지로 참상 폭로


매일경제 1974.5.6.

 

산모가 쌀밥 구경도 못해
43세에 이미 백발돼버려
돈도 소용없으니 헌옷 보내달라

 

한국인 남편을 따라  북송선을 타고 북괴에 간 일본 여인들의 참상이 드디어 일본사회에서 처음으로 공개되어 뒤늦게 충격을 던지고 있어 내외에 큰 관심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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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통의 편지내용을 간추려 보면  산모가 쌀밥은 구경도 못해 젖이 안나온다. 본국서 보내준 조미료를 받고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43세에 이미 백발이 되어 버렸다.  두부 생선 등은 볼 수도 없으며 돈은 소용도 없으니  헌옷 가지를 보내 달라.  보내줬다는 사카란 5kg이 없으니 웬일이냐 .  4살짜리 꼬마는 아침부터 밤까지 책만 보는데 그것도 그림책 같은 것이 아니고 공산주의 서적들 뿐이다. 지금 청년돌격대에서 일하고 있다. 하루 빨리 고향에 돌아갈 수 있게 되기를 빈다는 애절한 호소로  넘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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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에 식량난이 시작된 것은 1970년대 말부터로, 그 때부터 단 한 번도 국가가 배급량의 100%를 공급한 적이 없습니다.


국가가 주민을 먹여 살리지 못하니 국경 지역 사람들은 「중국에서는 개도 쌀밥을 먹고 돼지도 옥수수를 먹는데 우리는 사람으로 태어나 개돼지만도 못하다. 이렇게 기다리다 굶어 죽느니 차라리 뛰쳐나가자」 해서 脫北 행렬이 시작된 겁니다』


 
  尹씨는 북한 식량난은 홍수나 천재지변으로 생긴 것이 아니라 1970년대부터 20여 년 북한 경제가 하향곡선을 그린 것이 곪아서 한꺼번에 터진 것이라는 인식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1974년 말 金正日은 그 해 인민경제 계획 수행이 어렵게 되자 「수령님의 전사가 할 일은 수령님께서 제일 걱정하는 경제문제를 풀어드리는 것」이라면서 「70일 전투」를 조직하여 밀어붙였습니다.


자재나 원료, 자원 등 아무 준비도 없는 상황에서 국가의 가용자원을 총동원하여 「70일 전투」를 벌인 결과 그 해 계획은 겨우 달성했지만, 다음해부터 그 여파가 심각하게 제기됐습니다. 국력이 쇠진한 상태에서 일시에 자원과 자재, 원료를 대량 투입함으로써 결과적으로 국가 경제를 혹사시킨 것이죠.


 「70일 전투」의 여파로 1975년부터 경제가 하강곡선을 긋기 시작해 골병이 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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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통계에는 별로 흥미를 갖지 않았으나, 북한경제가 계속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하고 있다는 사실에는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북한당국은 김정일의 지시에 따라 김일성에게 허위사실을 보고하고 외부에도 각종 통계를 왜곡시켜 발표해왔다.


 그러나 문서정리실에 남겨진 정확한 통계로는 김정일이 후계자로 떠오른 무렵인 1975년부터 이미 북한경제가 하강곡선을 그리기 시작했으며, 특히 김정일이 실권을 완전히 장악하게 된 1986년 이후부터 급격히 악화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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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1971년에 함경남도에서 태어났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어린 시절은 나의 가장 행복한 시절이었다. 막내 외아들이라 하여 아버지와 어머니의 굄을 독차지하고 자랐다. 위로 누이가 셋 있었지만 부모님은 표나게 나를 싸고도셨고, 아버지의 사랑은 더욱 유별나셨다. 그러나 행복한 내 어린 날마저도 배고픔의 기억 속에 젖어 있다.

 

매일 주식으로 먹는 것은 감자였다. 밥상에 앉으면 속에서 물냄새부터 올라왔다. 감자에 물릴 대로 물린 뱃속은 늘 뭔가 다른 것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또래들과 과수원에 사과를 몰래 따러갔다. 그러나 과수원 할아버지는 마치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우리를 잡고 말았다.

 나는 할아버지에게 실토했다. 나의 첫마디가 “감자가 너무 먹기 싫어요”였다. 그 말은 얼마나 오랫동안 내 머리 속을 맴돌고 있었을까.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먹을 것은 과수원의 사과밖에 없었다. 그래서 사과를 먹으려고 왔다고 했다.

사실은 훔치러 간 것이었지만 철없는 나이였기에 훔친다는 것에 죄책감이 들지는 않았다. 달콤한 사과를 씹어 목구멍으로 삼키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과수원 할아버지는 한동안 우리를 말없이 지켜보셨다. 아마 우리가 애처로웠던 것 같다. 할아버지는 잠시 후에 나타났다. 한 명에게 5개씩 사과를 쥐어주었다. 우리는 팔을 쭉 펴들고 사과를 받았다. 할아버지는 실컷 먹고 또 과수원에서 놀다가라고 했다. 우리는 사과의 단물을 빨아먹었다. 마냥 신이 났다. 해지는 줄도 모르고 과수원을 누비며 뛰어 놀았다.


해질 무렵, 할아버지는 그물주머니에 사과를 채워주었다. 우리는 사과가 든 주머니를 들고 뜀뛰기를 하며 마을로 들어섰다. 어둑한 저쪽에 누가 나를 향해 오고 있었다. 어머니였다. 나는 어머니의 엄한 눈길을 보자 그만 굳어지고 말았다.


어머니는 자초지종을 듣고서도 용서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내가 도둑질을 했다고 생각했다. 8살이라 매를 8대 맞았다. 종아리에 굵은 뱀이 서고 검붉은 피가 나왔다. 밤에 잠을 자다 깼다. 눈물투성이로 흐느끼다 잠들었는데 다시 깬 것이었다.

 

잠결에도 매를 맞은 다리가 쓰려 왔다. 살며시 눈을 뜨니 어머니가 솜에 빨간약을 묻혀가지고 바르고 계셨다. 옆에서는 아버지가 걱정스러운 듯 지켜보고 있었다. 나는 계속 잠든 척하면서 귀를 기울였다.

어머니는 “어린 것이 얼마나 감자 먹기가 싫었으면 과수원에 갔겠어요. 허지만 바늘 도적이 소도적 된다는 말이 있잖아요. 정말 마음을 먹고 오늘은 매를 때렸어요”라고 하시는 것이었다.

목이 메어 도저히 누워 있을 수 없었다. 나는 일어나 꿇어앉았다. “어머니, 다시는 과수원에 가지 않을래요”라고 말하면서 엉엉 울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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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월남자 가족-남조선 출신이라는 이유로 평양에서 회령으로 쫓겨간 것은 76년 9월쯤이었다.

평양과 회령의 생활은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났다. 평양에선 식량배급의 80∼90%가 입쌀이었고 라면도 먹을 수 있었다. 그러나 회령에서의 첫배급은 강냉이를 이삭채로 주었다. 서글픈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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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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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과대한 군사비지출 및 김일성 우상화를 위한 해외 선전비지출로 경제사정은 극히 악화됐다.


 간장·된장 등 생활필수품이 배급제로 됐고 인민학교에서 70노인까지 외화벌이 목적으로 약초·박하재배 및 뱀·개구리를 채집토록 강요당하고 있다. 노동자는 하루 6백g의 곡식을 배급받고 있는데 한달 간에 4일분은 전쟁비축미로 공제하고 있으며 직장 결근 때는 6백g 전부를, 지각했을 때는 2백g 을 공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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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1978년도까지만 하여도 북한 주민들의 집에는 텔레비같은 가전기구가 거의 없었다. 한다하는 간부들의 집에도 없는 것을 재일 동포들은 가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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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8.10.4.

 

[ ......  체격이 건장한 국군들의 씩씩한 모습에 놀랐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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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괴가 땅굴을 판 사실을 알고 있는가?


[답] 지휘관들이 "땅굴은 청와대까지 파놓았다"  "남조선해방을 위한 전투준비가 완료됐다"고 말해 땅굴을 판 사실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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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순후의 소감은 ?


[답] 북한이야말로 암흑이요 , 생지옥이란 것을 알았다.

지난 1일 국군의날 행사를 보고 체격이 건장한 국군들의 씩씩한 모습에 놀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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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9  귀순  전철우

 

  [ .... 저도, 제 조카도 저희 아버지보다 작아요 ........

    .... 사회가 진화할수록 ... 키가 작아지고  머리는 커진다는 거예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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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호 남한 젊은이들이 대개 부모 세대보다 키가 큰 반면 북한 젊은이들은 부모 세대보다 작더군요.

 

전철우 저도, 제 조카도 저희 아버지보다 작아요. 학생들은 모내기, 추수는 물론 도로 청소 같은 온갖 잡일에 다 동원됩니다. 밥도 많이 못 먹고 무거운 짐을 지고 밤늦게까지 일하면 정말 배가 고픕니다.


 한 가지 재밌는 건요, 제가 어릴 때 ‘사회가 진화할수록 사람 키가 작아진다’고 배웠어요. 사회가 진화할수록 사람들이 걷지는 않고 생각만 많이 하니까 자연스레 키가 작아지고 머리는 커진다는 거예요. 그래서 저도 그걸 철석같이 믿었습니다.


그러다 동독에 유학 가서 깜짝 놀랐죠. 북한보다 훨씬 발전했는데 국민들 키랑 덩치는 엄청 크잖아요. 그때 알았죠, 다 거짓말이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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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11월, 전철우 귀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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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등소평이 개혁개방한 것만 알지, 사람들은 왜 그가 그런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그것은 다름 아닌 홍콩의 진실을 더 이상 감출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목숨을 걸고 홍콩으로 도망간 사람들이 몇 달만 있으면 중국 고위 공산당 간부보다 부자가 되어 돌아왔다. 그렇게 되자 아무리 강제수용소에 집어넣어도 소용없었다.

노동자, 농민, 어린 학생만이 아니라 공산당 간부도 도망갔다. 1979년 1월부터 5월까지 15만 명이 홍콩으로 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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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8.12.18.  중국 공산당 제11기 중앙위원회 3차 전체회의

 

[ ....... 쥐를 잡는데 흰 고양이든 검은 고양이든 상관없다 ........    ]


[ ...... 마오쩌둥이 늘 강조 .... 문화대혁명 당시 크게 유행했던 자본주의 사상은 뿌리째 뽑아야 한다는 '잡초론' ..........    ]

 

중국의 개혁. 개방 - 중국 경제개혁의 총설계사 덩샤오핑


2007-0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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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들도 잘 아시다시피 덩샤오핑은 마오쩌둥 등과 함께 대장정을 한 중국 공산당의 원로입니다. 덩샤오핑은 1950년대 중반부터 중국 대외정책과 국내정치 면에서 중요한 정책 결정자 역할을 해왔습니다. 그러나 그는 경제를 중요시 하는 실용주의 노선을 주장하다가 마오쩌둥과 갈등을 빚어 두 차례나 실각하기도 했습니다.

1933년 장시성 당서기직에서 물러난 것이 첫 번째였고, 1966년 대약진운동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실용주의 노선을 주장하다가 마오쩌둥과 갈등을 빚어 해직된 것이 두 번째 실각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1977년 다시 복권되자마자 이듬해인 1978년 12월 베이징에서 열린 중국공산당 제 11기 3중전회의에서 유명한 '흑묘백묘론'을 외치며 다시 개혁.개방을 주장하고 나선 것입니다.


덩샤오핑  지금 결심해야 하는 이 일 (경제개혁)은 전쟁 외에 시종일관 이 일을 관철해야 하고 전쟁이 일어나면 전쟁이 끝난 후에 돌아와 계속해야 하고 새로 시작해야 합니다. 모든 것이 이 일을 중심으로 해야 하며 어떤 관여도 받아서는 안 됩니다.

 

덩샤오핑은 앞서 두 차례 실각 경험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마오쩌둥의 뒤를 이은 화궈펑 주석과 맞서 경제개혁을 주장했다는 것은 그에게 얼마나 확고한 의지가 있었는가를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덩샤오핑을 '중국 경제개혁의 총설계사'라고 말할 수 있는 또 다른 이유는 오랫동안 중국의 지도이념이었던 마오쩌둥의 사상을 종결하고, 경제중심의 '흑묘백묘론‘을 새로운 지도 이념으로 정착시킨 데 있습니다.


비록 마오쩌둥이 사망했다고 할지라도 그 때까지만 해도 중국인민들 사이에서는 마오쩌둥은 신과도 같은 존재였습니다. 따라서 마오쩌둥이 늘 강조했던 혁명과 정치투쟁, 특히 문화대혁명 당시 크게 유행했던 자본주의 사상은 뿌리째 뽑아야 한다는 '잡초론'은 중국인민들의 생활 깊숙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마오쩌둥의 영향력이 아직 크게 남아있는 당시 상황에서, 덩샤오핑은 탁월한 지도력과 현실적인 정책을 통해 사회적인 혼란 없이 빠르게 개혁. 개방 정책으로 전환하는 데 성공한 것입니다.

 

당시 덩샤오핑이 내세웠던 '흑묘백묘론'이란 그의 고향인 쓰촨성의 속담에서 나온 말인데 쥐를 잡는데 흰 고양이든 검은 고양이든 상관없다는 말입니다. 즉 덩샤오핑은 경제를 발전시키는 데는 사회주의든 자본주의든 상관없다며 중국 특색의 개혁. 개방 이론을 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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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은 1978년 12월 중국공산당 제 11기 3중전회의에서 결정된 덩샤오핑의 '흑묘백묘론‘을 발판으로 본격적인 개혁. 개방의 길로 들어섰고, 지금까지 중국의 개혁. 개방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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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rfa.org/korean/weekly_program/china/dung_xiaoping-20070104.html

 

 

 


주간 기획 “중국 경제 개혁과 교훈” - 개혁의 배경


2005-0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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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 중국인 우리는 당시 고등학생이었는데 덩샤오핑이 다시 집권하자 베이징에서는 큰 환영 행사가 있었던 기억이 납니다. 76년 이전 적어도 두 번 이상 권력에서 밀려났었던 덩샤오핑은 중국 경제를 어떻게 이끌어갈 지 아는 자오쯔양과 후야오방 같은 인물을 등용해 개혁 정책을 주도해 나갔습니다. 그 결과 베이징 주민들의 생활수준도 80년대 들어 크게 좋아졌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마침내 지난 1977년 복권돼 정치 일선에 나선 덩샤오핑은 중국의 경제발전을 방해하는 모든 제도나 방법을 과감히 개혁해 나갔습니다. 그 방향은 간단히 말해서 공산주의식 계획 경제를 축소하고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도입하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나오는 그의 유명한 말이 바로 ‘흑묘백묘론’입니다.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된다는 말로 공산주의든 자본주의든 경제만 발전하면 된다, 다시 말해 어떤 방식으로라도 중국 사람들이 보다 잘 먹고 잘 살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또 그는 ‘선부론’이라고 해서 일부 중국 사람들, 해안에 면한 상하이 등 대도시 사람들이 먼저 부자가 되는 것을 인정하고 내륙의 가난한 사람들이 이를 따라 배우게 해야 한다는 주장을 내놓기도 했습니다. 중국 사람들 사이에 부자와 가난한 사람의 격차가 좀 생기더라도 이는 어쩔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덩샤오핑의 개혁 사상의 핵심은 ‘실사구시’였습니다. 그는 모두가 가난해지는 것은 사회주의가 아니라고 말하면서 무기 생산에 주력한 중공업 우선 정책과 문화대혁명으로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중국의 경제 살리기를 지상 목표로 설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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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rfa.org/korean/in_focus/chinese_economy-20050418.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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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03.29  동아일보 3면

 
人民日報(인민일보) 社說  通(사설 통)해 毛(모),  鄧小平(등소평)을 直接非難(직접비난)

 


人民日報(인민일보) 사설은 "黨主席 毛澤東(당주석 모택동)이 최근  이사람(鄧小平(등소평))은 계급투쟁의 意義(의의)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으며 아직도 「白猫黒貓論(백묘흑묘론)」을 주장함으로써  제국주의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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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12.25.   [ ......  ‘우리 식대로 살아나가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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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가운데 북한 특유의 사회주의 건설노선과 방식을 상징하는 ‘우리 식대로 살아나가자!’는 구호가 21세기 북한을 향도하는 전략적 구호로 다시금 제기돼 시선을 끌었다.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및 내각 기관지 민주조선은 최근호(2.28)에 게재한 장문의 논설에서 희망찬 21세기 사회주의 붉은기 진군길에 들어선 오늘 우리 당은 '우리 식대로 살아나가자!'라는 전략적 구호를 변함 없이 높이 들고 나갈 것을 중요하게 강조하고 있다고 역설했다. 민주조선은 이것이 김정일 위원장의 생각이자 의도임을 밝히고 김 위원장의 발언을 적시했다.


우리는 새 세기에도 모든 것을 우리 식대로 해나가야 합니다. '우리 식대로 살아나가자!' 이것은 우리가 새 세기에도 변함 없이 높이 들고 나가야 할 전략적 구호입니다.

민주조선은 우리 식은 곧 주체 식이며 이보다 더 좋은 투쟁방식, 투쟁구호는 없다고 지적하면서 ‘나에게서 그 어떤 변화도 바라지 말라!’는 김 위원장의 언급을 환기시켰다.

 

북한에 “우리 식대로∼” 구호가 처음 등장한 것은 20여년 전의 일. 김 위원장은 1978년 12월 25일 당중앙위원회 조직지도부·선전선동부 책임일꾼협의회에서 연설을 통해 ‘우리 식대로 살아나가자!’는 구호를 제시했다. 중국이 개혁·개방 노선을 결정한 중공당 제11기 3차 중앙위원회 전체회의(11기 3중전회)가 1978년 12월 18일부터 23일까지 열렸고 바로 그 이틀 뒤인 25일 김정일 위원장의 입에서 ‘우리 식대로∼’ 구호가 나왔다는 것은 구호의 의미와 맥락이 어디에 닿아있는지를 설명해준다.


‘우리 식대로∼’는 그로부터 10여년 뒤 소련의 해체와 동구 사회주의 붕괴라는 20세기 말 ‘사회주의 대지진’의 와중에 새로이 부활해 널리 고창됐다. 사회주의 붕괴라는 역 도미노현상의 파고가 사회주의 동방초소(북한)에 밀어닥칠 것을 우려한 본능적인 방어의 작동이라고 할까. 그로부터 다시 10여년 뒤, 21세기의 문을 여는 길목에서 ‘우리 식대로∼’는 마치 10년 주기의 경기법칙처럼 어김없이 소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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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7

 

[ ...... 동구의 .... 뿌리깊은 흐름은  소련으로부터 국가주권을 회복하자는 것 .......


  ..... 동구에는 서구와 미국의 영화·음악·미술이 판치고 ...... 「부다페스트」와「프라하」의 교수들이나 대학생들은 머리부터 다리까지 서구화 ......

  ..... 생활양식도 ... 「모스크바」보다  「파리」나「런던」과 비슷 ............

 

  ...... 동구 공산당들은 그들 자신들의 하부구조라고 하는「프롤레타리아」계급자체의 저항을 받아 지금 재조직하고 있는 중 ............    ]

 


http://news.joins.com/article/1454735

 
공산권 분화 속의 평양정권

불 공산권 전문가「페이토」교수, 본사 주섭일 특파원과 회견
 

 [중앙일보] 입력 1977.01.05 

 
다음은 새해를 맞아 공산권 일반의 상황과 이와 관련된 북괴의 공산권내 입장에 관해 주섭일 본사「파리」주재 특파원이「프랑스」의 공산문제 전문가「프랑솨·페이토」교수와 가진 회견을 간추린 것이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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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특파원=동구의 대소독자노선 추구경향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으로 보는가?


<소의 동구문화 합병 실패>

 

▲페이토 교수=『동구의 장래는 상당히 복잡하다.「폴란드」「헝가리」「체코」동독에서 뿌리깊은 흐름은 소련으로부터 국가주권을 회복하자는 것이다.

「스탈린」사후에 이를 위한 기도가 여러 차례 있었다. 좋은 예로 56년「헝가리」와 68년의「체코」사태다.이미 알다시피 이는 소련군에 의해 분쇄되었다.


이 같은 동구의 기도는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이나「모스크바」의 정책을 근본적으로 뒤흔드는 것이 된다. 동구의 주권회복운동은 소련군의 주둔으로 인해 앞으로도 오랫동안 출구를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이 극단적인 상황에서 동구는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나는 많은 동구 인들과 접촉했는데 최근「폴란드」지식인들과 대화를 나누었다.「폴란드」를 비롯한 대부분의 동구 나라들은 제정「러시아」때부터 독립투쟁을 해 온 전통을 지니고 있으며 결론은 계속 반소투쟁을 하는 길 밖에 없는 것이다. 비록 좌절의 악순환 속에서나마 말이다.

 

반소투쟁에 있어 몇 가지 주목할 현상이 나타났다. 먼저 소련의 문화합병은 실패했다는 점이다. 동구에는 서구와 미국의 영화·음악·미술이 판치고 있다.


다음은「마르크스-레닌」주의의 세뇌를 지적할 수 있다.「부다페스트」와「프라하」의 교수들이나 대학생들은 머리부터 다리까지 서구화하여 있었다. 마지막으로 생활양식도「바르샤바」「부다페스트」「프라하」등「베를린」등은「모스크바」보다「파리」나「런던」과 비슷한 소비「패턴」을 보이고 있다. 그러니까 소련의 동구위성 화 노력은 30여 년이 지난 오늘날 내면적으로는 전혀 이루지 못했다.


「폴란드」는 지식인보다 종교계의 소리가 크다. 그러나 가장 흥미 있는 새로운 현상은 노동계급의 움직임이다. 동구 공산당들은 그들 자신들의 하부구조라고 하는「프롤레타리아」계급자체의 저항을 받아 지금 재조직하고 있는 중이다.「바르샤바」의 공산정권은 노동자들의「데모」와 파업 때문에 식량 값 인상을 비롯한 중대한 경제조치를 포기하기까지 했다. 이 같은 사회현상은 앞으로 동구뿐만 아니라 소련내부에까지도 꾸준히 일어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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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0.8.


[ ......  「그다니스크」항도의 노동파업은 ..... ⓛ언론출판의 자유 ②자유노조 결성권 보장 ③정치범석방 ④국제노동 협정 준수 등 16개항의 새로운 요구조건을 제시 .........    ]

 

 
「폴란드」노동자 파업 | 반체제 운동으로 확대
 

 [중앙일보] 입력 1980.08.18

 
【바르샤바17일 로이터·AP합동】 「폴란드」 최대 「레닌」조선소를 중심으로 4일째 계속되고 있는 「그다니스크」항도의 노동파업은 17일「그다니스크」시 주변 21개 기업체 노동자들이 공장파업위원회(MKS)를 조직, ⓛ언론출판의 자유 ②자유노조 결성권 보장 ③정치범석방 ④국제노동 협정 준수 등 16개항의 새로운 요구조건을 제시, 유례 없는 힘의 과시로 공산정권에 정면도전하는 정치사태로 악화됨으로써 공산 「폴란드」는 2O년 노동폭동이래 최악의 위기에 직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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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주째 계속되는「폴란드」전국의 노동파업에 호응, 지난14일 「레닌」조선소를 점령함으로써 발단된 「폴란드」북단「그다니스크」시의 노동파업은 「기에레크」 공산당정부의 유화책에도 아랑곳없이 계속 악화되어 이 날 MKS가 21개 공장지도자의 이름으로 된 성명을 반체제자위안(KOR)을 통해 발표함으로써 정치대결로 변모된 가운데 공산정면에 대한 도전으로 확대되었다.

 

이번 「폴란드」 파업 소요는 지난 7월초 정부가 지난 수년간 공급부족 상태였던 고기값의 대폭 인상을 발표하자 「우르수스」「트럭」공장노동자들이 파업에 돌입하면서 시작, 대규모 파업이 「루블린」·「브로츨라프」·「루기」·「바르샤바」및 그 밖의 도시로 계속 번져나갔으며 당국은 대부분의 경우 파업소요의 확산을 막기 위해 임금인상 및 그 밖의 요구들을 들어주었으나 지난14일「그다니스크」·「레닌」 조선소와 수많은 공장노동자들의 파업으로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되었고 더욱이 파업노동자들이 반체제 운동단체들과 손잡음으로써 반정부적 색채를 띰으로써「기에레크」당 제1서기가 이끄는 현정권은 최악의 위기를 맞게되었다.   .


http://news.joins.com/article/1544099

 

 

 

[ ..... 국가 전체가 느슨한 집단 수용소 같다 .......

 ..... “향후 10년 안에 유럽의 공산권은 붕괴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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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80년대 초부터 사회주의 공산권을 직접 접하면서 이 체제의 붕괴는 역사적인 필연임을 감지하였습니다. 인민들의 형편없는 의식주 사정, 획일적인 통제로 창의성이 완전 결여된 분위기 등이 국가 전체가 느슨한 집단 수용소 같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1979년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공산권 경제분야를 공부하고 싶다고 하자, 담당교수는 한참 쳐다 보더니 저에게 “향후 10년 안에 유럽의 공산권은 붕괴된다. 쓸모없는 학문이니 시간 낭비하지 말라”고 응답해 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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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초 버클리대학의 동유럽 전공 학생들을 데리고 폴란드에 왔던 노만 데이비스 교수의 회고도 같은 선상에 서있다. 공산주의자에 대한 인상을 과제로 주었는데, 학생들의 가장 큰 불만은 공산주의자를 도대체 만날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당시 부수상과의 대화를 주선했는데, 그 역시 자신은 실용주의자이지 공산주의자가 아니라고 답했다는 것이다. 결국 학생들은 공산국가에 와서 공산주의자들을 하나도 못만나고 갔다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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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북한 인민들이 인간 아닌 짐승 같은 생활을 ........


  ...... 전쟁비축미라는 구실로 1백g씩을 떼고 6백g씩을 .....그나마도 강냉이등 잡곡7에 쌀3의 비율로 .........

  ...... 간장 된장이 모자라 소금으로 음식의 간을 .............    ]

 

경향신문 1980.7.12.

 

귀순한 북한주민 이영우씨 회견

당추방경고에 자유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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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순 직전까지 개성시 판문군 일용품수매사업소에서 당세포비서 겸 공급지도원으로 일해 왔다는 이씨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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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순한후에는 북의 선전이 모두 전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군초소에 도착해서부터 지금까지 모든게 북에서 듣던 것과는 정반대라는 것을 깨달았다.

 

북한주민들의 최근 생활 실태 = 내가 남한에 와서 가장 먼저 느낀것은 북한 인민들이 인간 아닌 짐승 같은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먼저 식량 사정을 보면 1일 배급량이 노무자와 사무원에 대해 7백g씩인데 그나마 전쟁비축미라는 구실로 1백g씩을 떼고 6백g씩을 주고 있으며 노동력이 없는 노인이나 어린이들에 대해서는 3백g밖에 주지 않는다.


그나마도 강냉이등 잡곡7에 쌀3의 비율로 주고 있어 강냉이를 삶아 먹고 사는데 그것도 비축미를 떼기 때문에 하루 한두끼는 죽으로 끼니를 때우고 있다.

 

간장 된장이 모자라 소금으로 음식의 간을 맞추어 먹으며 육류는 돼지고기를 김일성 생일인 4월 15일과 김정일의 생일인 2월 16일 , 그리고 1월 1일에 한해 가구당 5백g씩 배급하고 있어 평소에는 고기 구경도 할 수없는 실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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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북괴의 전쟁준비실태 = 내가 이곳에 와서 제일 먼저 느낀것은 남북한이 상호내왕을 한다면 북한은 당장 패하고 말것이라고 느꼈다.


김일성은 전쟁으로 조국통일한다고 갖은 노력을 다하고 있다. 그실례로 모든 주요공장이나 기업소는 이미 오래전에 갱속으로 들어 갔고 인민으로부터 하루 1백g씩 빼앗은 식량을 각군별로 식량창고를 만들어 비축하고 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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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들의 대남인식 및 전쟁관 = 김일성의 선전대로 남조선인민들은 헐벗고 굶주리며 7백만명의 실업자가 득실거리는 것으로 믿고 있다.

모든 기술이 뒤떨어져 자체 생산품은 하나도 없고 모두 미국에만 의존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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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순소감 및 하고 싶은 말 = 남한이 이렇게 발전되고 행복한 세상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여기가 바로 지상의 낙원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북한보다는 반세기는 앞서 있다고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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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7.14.  경향신문

                김광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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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 따르면 북한주민들은 식구가 많든 적든 간에 가구당 방한칸을 쓰기 때문에 식구가 많은 가정은 큰 고통을 겪고 있으며 의복도 연간 한벌 정도밖에 배급을 받지 못하는 실정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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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0.1.   김일성


[ ..... 1,920딸라'나 된다 ....... 생활수준이 매우 높은 단계'에 올라섰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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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한에서 주민들의 삶을 평가하는 경우는 김일성의 연설이나 노작, 당대회의 보고문이나 신문의 사설과 논평 등에서이다.


북한의 김일성 주석이 발표했던 신년사와 김일성 주석 사후의 신년공동사설을 조사해보면 생활수준에 대해 가장 자신있게 언급했던 것은 1980년이었던 것 같다. 1980년 새해 신년사에서 김일성 주석은 '우리나라의 인구 한사람당 국민소득을 딸라로 환산하면 1,920딸라'나 된다며 '인민들의 생활수준이 매우 높은 단계'에 올라섰다고 강조했다.

 

북한 인민들의 생활은 80년대 초부터 급격히 하락하기 시작했는데 그와 비슷하게 80년 이후로 신년사와 신년공동사설에서는 '인민들의 생활수준'이라는 표현은 사라지고 '물질문화생활'이나 '인민생활' 등의 표현만 나타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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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1

 

[ ...... 한국 ... 1인당gnp  1천6백7달러 .... 북한 ... 1인당gnp 7백50달러 ........


  .... 수출 ... 한국은  2백13억달러로  북한의 13억달러보다  16배 .........  

 ..... 한국 ... 93%가 공산품 .... 북한은 59%가 석탄 철광석 연 아연 등 1차산품 .........      ]

 


수치로  비교해 본 실력  남북한격차 갈수록  벌어져

경향신문  1983.6.22

 

수치로  비교해 본 실력 
남북한격차 갈수록  벌어져

gnp 4.6(남) 대 1(북)
70년대 중반부터 한국이 단연 앞서 ... 발전도 2배격차
중공업분야도 반전 ... 거의 3배차

북한군사비 gnp 24% ... 야욕 못버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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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한은 치열한 경제적경쟁을 벌였으나  70년대 중반기부터 남북한간에는 경제적격차가  현저하게 벌어지기 시작했다. 국민총생산 규모(81년말 현재)는 한국이 gnp 6백22억달러 ,1인당 gnp  1천6백 7달러 수준인데 비해 북한은 gnp 1백36억달러, 1인당 gnp 7백50달러로 추계됨으로써  북한은 한국에 비해  gnp규모면에서 22%, 1인당gnp면에서 47%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와같은 경제총량규모의 현저한 격차는  한국경제가 60년대 이후 고속성장을 지속했고  특히 73-74년, 78-79년의 세계적불황에도 불구하고  이에  적절히 대처해온 반면  북한은 최근 투자율이 30% 이상의 고율인데도 불구하고  자본의  낭비와 비효율적인 투자계획으로 인해 경제가 침체의 국면에 빠져 들었기 때문인 것으로 북한전문가들은 분석하고 있다.

 

그러나 gnp에 대한 군사비부담률은  81년에 한국이 6.3% 수준인데 비해  북한은 23.8%로  군사력증강에 혈안이 되고 있음을 엿볼수 있다.


수출면에서는 81년 한해 동안 한국은 2백13억달러로  북한의 13억달러보다 16배나 되고 있다.  수출주종품목도  한국이 수출품목의 93%가 공산품인데 반해  북한은 59%가 석탄 철광석 연 아연 등 1차산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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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86년 ... 북한 주민의 소득이 2천 4백달러 .......

         남한 주민의 소득은 1천3백달러에 불과하다고 .......    ]

 

[ ...... 북한당국은 배급제가 전혀 없다고 주장 .......

 .....  외국인들은 배급제가 엄연히 있는 것은 물론 거의 모든 물건이 배급 된다고 .........     ]

 


1989.4.13.  경향신문

 

평양축전 비식료품 수입
외신이본 북한경제 실상

 

[ 평양=로이터연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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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나아가 북한당국은 배급제가 전혀 없다고 주장하고 있는 반면  북한에 머물고 있는 외국인들은 배급제가 엄연히 있는 것은 물론 거의 모든 물건이 배급 된다고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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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한의 경제수준차가 통일에 장애요인이 되고 있지  않느냐는 질문에 대해 이명소 부장은 지난 86년을 기준으로 할 때 북한 주민의 소득이 2천 4백달러나 되는 반면 남한 주민의 소득은 1천3백달러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우리는 우리고유의 경영체재를 갖고 있기 때문에 외국에서 어떤 경영기법을 숭입할 필요가 없다'면서  "지난 40여년간 경제계획에서 실패한 것은 하나도 없다"고 주장했다.

 

 

 

[ ..... 88년 기준 .... 한국은 3천6백 달러로 30위 .......  

 ..... 중국(3백30) 인도(3백40) 등은 하위권을 ........     ]

 

한국 1인 GNP 30위

매일경제 1990.7.17.


한국 1인 GNP 30위
88년 3천600불 ... 국방비율 최고수준
인구증가율 1% 이하

세계은행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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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은이 16일 발표한  '세계개발보고 1990'에  따르면 .... 1인당 GNP는 88년 기준으로 스위스가 2만7천5백 달러로 가장 많고  그 다음이 일본 2만1천20달러,..... 한국은 3천6백 달러로 30위를 차지했다.

..... 중국(3백30) 인도(3백40) 등은 하위권을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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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0년대 초부터는 조선에서 새로 만든 제품의 품질이 1970년대 초에 만든 것보다 더 떨어지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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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초부터 북조선에서 경제가 침체하고 인민들의 생활이 눈에 뜨이게 어려워지기 시작했습니다. 당시에 인민들 속에서는 수령님은 인민을 위해 열심히 일하는데 중간층의 간부들이 일을 잘 못해서 그런다는 소문이 크게 나돌았습니다.

그때부터 경제와 인민생활이 떨어지는 것은 중간층의 간부들이 잘못 때문이라는 이른바 중간층 간부 책임론이 떠돌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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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한 인민들의 생활은 80년대 초부터 급격히 하락하기 시작했는데 그와 비슷하게 80년 이후로 신년사와 신년공동사설에서는 '인민들의 생활수준'이라는 표현은 사라지고 '물질문화생활'이나 '인민생활' 등의 표현만 나타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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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한 적은 모자라는 배급량도 70년대에 와서는 절약한다고 보름에 2일분을 잘랐고, 80년대에는 다시 기준량을 더 줄여 700이 600도 못되게 만들었다. 90년대에는 배급날짜가 되어도 배급을 안 주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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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2.  김일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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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사회주의경제건설의 10대전망목표를 점령하기 위하여 먼저 식량문제를 보다 원만히 해결하는데 큰 힘을 넣고 있습니다.


우리는 쌀은 곧 사회주의이며 공산주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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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웅평 대위 진술 민족에 남침위기 알리러 왔다


경향신문 1983.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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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위는 자기가 북한에서 조종사로 근무하면서 81년 리비아 수단 이집트등 중동지역에 파견되었다가 귀국한 동료들로부터 외국비행사들은 승용차 TV 냉장고 등을 소유하고 잘사는데 북한비행사들은 난로용 화목을 직접 채취하고 78년부터는 간식 기호품공급이 점점 적어 지더니 나중에는 담배 술까지 제한받는 등 먹는 것까지 걱정해야 하는 막다른 골목에 다다라 이같은 북한실정에 불만을 갖기 시작했다고 밝힌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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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위는 본사와 특별대담을 하는 자리에서 "활기찬 서울을 보고 깜작 놀랐다"고 밝혔다. 활기찬 서울이 바로 자유의 모습이요 자유의 댓가이기도 하다.

뿐만 아니라 이대위는 빽이 있어야 북한에서는 출세도 한다고 털어 놓았고 도둑이 많아 북한 주민들은 빨래를 마음대로 널어 놓지도 못하며 북한의 경찰격인 안전원도 컬러TV를 사고 싶어서 은행을 턴 일도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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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씨는 15일밤 MBC TV서 방영한 특집방송에서 이곳 생활의 소감을 밝히고  특히 백화점에 쌓여 있는 전자제품을 보고 "이것들이 모두 국산제품이 틀림없느냐"고 놀라면서 "국산품이면 조선말(한글)로 크게 딱지를 붙여서 알아 볼수 있게 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씨는 또 공군사관학교에 들러 역대 공사교장들의 사진을 진열해둔것을 보고 "북한에서는 김일성 부자외의 다른 사람 사진진열은 상상할수도 없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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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씨는 MBC TV 기자와 함께 서울 밤거리를 돌아 보고 대포집에서 시민들과 함께 대화를 나누면서 "일과가 끝난 후 휴식을 취하는 서울사람들의 생활을 보니까 사람이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 보다"하는 생각이 들었다면서 "북한서는 3간짜리 집에도 전기를 다 켜지 못하게 하는 판인데 이곳에 와 보니 낭비가 너무 많다"고 말하고 되도록 절약해서 국력을 기르는 데 이용했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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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아일보  1983.5.18.


리웅평  북한 탈출 수기

< 25 >  모의전투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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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나 됐을까 싶은 전사가 찬바람이 쌩쌩 부는 활주로 끝 내 비행기 밑에서 일하다가 나에게 기체를 인도할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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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무는 동장갑 한개 없나"

 나는 겨우 이말 밖에는 못했다.그는 물끄러미 나를 올려다 보더니 힘없이 대꾸했다.

"줄게 뭐야요. 목테(머플러)조차 없고 솜신이 헤어져도 그것조차 갈아주지 않는 걸요 -- "

그러고 보니 그는 목에 때가 더럽게 낀 수건을 두르고 있었고 신발은 앞이 터져 발싸개가 삐주룩이 나와 있었다. 발은 동상에 걸린게 틀림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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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4.8.4.  金正日―申相玉·崔銀姬 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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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가. 이게 사회주의 한 30년 해보니까 역시 인민들 먹이고 살리고 하는 것은 서방세계로 뻗쳐 나가지 않으면 도저히 할 수 없다. 엄연히 서방세계보다 떨어져 있는데 지금. 그래 사람들이 지금 이거 의식문제가, 이거 아주 사상 문제가 아주 중요한데 이거 우리 지금 극복하기 위해서 동구라파 나라들이 지금 저 애먹죠.


이번에 호요방이 만나고 와서 그래요. 우리나라 나왔을 때 당신네 왜 개방, 저 관광업 안하냐, 관광업 하면 돈 많이 번다.

이래서 내 이해해서 우리 관광업 이제 하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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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남북대결이다. 인민들의 의식주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우리가 남조선한테 진다. 이게 사람들이라는 게 배(腹)는 타협할 수 없는 게 아닌가. 배에 들어오는 뭐가 있어야 먹고 봐야 잘 일할 수 있는 사람도 있는 거지 먹지 못하는 사람이 일할 생각이 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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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정일이 신상옥.최은희와 대화한 육성 녹음테입 공개]

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5/1959987_6157.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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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4.9.  북한 수해물자 지원

 

[ ...... 이건 돼지 사료로라면 몰라도 .......

   …. 이 옷감이라는 것도 보세요. 잘라서 방걸레로 쓴다면 모를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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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4년 9월 남한에서 수재로 인해 1백90명이 사망하고 20만 명의 수재민이 발생했다. 이런 가운데 북한이 9월 8일 쌀 5만섬을 비롯한 구호물품을 제공하겠다고 제의해 왔다. 당시 <노동신문>은 구호활동을 ‘분단 40년 역사 이래 최고의 위업’이라며 대서특필하며 북한 체제의 우월성을 강조했다.


하지만 남한에 도착한 쌀은 쌀이라고 하기엔 질(質)이 상당히 떨어지는 것이었다. 언제 수확한 것인지 색은 변색된 데다가 묵은 냄새까지 풍겨 밥을 지어 먹는다는게 사실상 불가능한 수준이었다. 북한에서 보내온 쌀을 비롯한 구호물품은 북한의 의도와는 정반대로 남한 사회의 우월성을 상징하는 증거로 활용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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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돼지 사료로라면 몰라도 사람이 밥해 먹기에는 도정도 엉망이고 품질 자체가 저질이에요.

…이 옷감이라는 것도 보세요. 잘라서 방걸레로 쓴다면 모를까 이런 천으로 어디 샤쓰를 만들어 입겠어요, 바지를 짓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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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수해물자 "최고품"자랑


[중앙일보] 입력 1985.03.09

 

관광시켜준 사찰주지는 노동당원|귀환어부 회견 1문1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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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들과 만나보았는가.


▲숙소인 여관 종업원들과 접촉했을 뿐이다.

한 지도원이 우리 선원이 입고 있던 캐시밀론 반코트를 보고 남한에서는 이런 것을 마음대로 사 입을 수 있느냐고 물었다.

작년에 보낸 수재물자는 자기들 물건 중 최고품이라고 자랑하면서 남한 관리들이 물건이 탐이나 중간에 다 빼돌렸을 것이라고 악선전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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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article.joins.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1983201&ct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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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향신문  1985.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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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도연변에는 옥수수밭이 펼쳐져 있었는데 북한측 안내원은 "저것이 모두 고기"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 저 옥수수는 사료로 쓰기 때문에 결국 고기나 마찬가지"라고  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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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5  [ .... ‘식의주’라고 고쳐 쓰도록 하였다”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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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에서는 의식주(衣食住)라 하지 않고 식의주(食衣住)라 부른다. 관용어로 굳어진 의식주를 굳이 식의주로 바꾼 것은 먹는 문제(食)가 입는 문제(衣)보다 앞선다는 이유에서다.


북한이 의식주를 식의주로 바꿔 부르기 시작한 것은 84년경으로 전해진다. 당시 김일성은 먹는 문제가 입는 문제에 우선함을 지적하면서 "의식주는 마땅히 식의주로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에 따라 모든 출판물과 공용 문건에서 의식주라는 단어는 사라지고 대신 식의주가 쓰이기 시작했다.


김일성의 연설 담화 보고 서한 등 각종 문헌을 모은 "김일성저작집" 제39권(1993)에는 그가 의식주를 식의주로 고쳐 쓰게 한 이유를 설명한 대목이 나온다.


김일성은 85년 10월 정무원(현 내각) 책임일꾼들과 한 담화에서 "사람들이 살아나가는데서 먹는 문제가 제일 중요하다. 옷이나 집 같은 것은 부족하여도 좀 참을 수 있지만 배고픈 것과는 타협할 수 없다. 나는 사람들의 생활에서 먹는 문제가 중요하기 때문에 의식주라는 말을 식의주라고 고쳐 쓰도록 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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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5   안병직

 

[ ..... 동구권에서 일본으로 유학 온 사람들 ... 수준이 형편없는 거야. .......     ]

 


내일 발족 ‘뉴라이트’ 이끄는 안병직 서울대 명예교수


“치열한 사상戰… 다시 피가 끓는다”

“우리의 뛰어난 외부문화 흡수능력 좌파 민족주의자들이 과소 평가해”


 

26일 발족하는 뉴라이트재단 발기인대표 안병직(安秉直·70) 서울대 명예교수의 첫 마디는 “다시 피가 끓는다”였다. 2001년 정년퇴직 후 후쿠이(福井)대 대학원교수로 일본에 있던 2004년 말 한국언론에서 보도되기 시작한 ‘뉴라이트’운동에 관한 기사를 보고서 ‘드디어 나올 것이 나왔구나!’라며 무릎을 쳤다. 한때 좌파경제학의 대부로까지 불리다가 1984년 남들보다 10여년 일찍 우파로 ‘전향’을 했던 그이기에 감회가 남달랐다. 지금도 좌파 진영에 많은 제자들이 있다.

 

“1965년 서울대 전임교수가 되고서도 계속 학생운동에 관여를 했어요. 마르크스, 레닌, 모택동을 읽고 학생들에게 전해주는 게 일이었지. ‘적어도 일제시대까지 한국사회는 식민지 반(半)봉건사회가 아닐까’라는 생각을 선도적으로 주창했고 좌파성향 학생들에게 호소력을 얻었지요. 사실 그것은 모택동 이론에서 빌려온 것이었어요. 그때 우리들(좌파 운동가들)은 1970년대 말이면 한국자본주의는 붕괴할 것으로 생각했지. 박통(朴統·박정희대통령)이 죽었을 때 우리는 역시 우리 생각이 옳았다고 확신했지요.”

 

그런데요?


“전통(全統·전두환대통령)이 누구야? 박통보다 훨씬 모자란 사람이잖아. 그런데 한국경제가 죽기는커녕 더 발전하는 거야. 그때부터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지.”


그의 전향 계기는?


“85년 일본 동경대의 강의요청이 있어 1년간 머물 기회가 있었는데 그 때 소련이나 중국 그리고 동구권에서 일본으로 유학 온 사람들을 많이 만나볼 수 있었어요. 그 사람들 수준이 형편없는 거야. 사회주의로는 안 되겠다는 결심을 굳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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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chosun.com/culture/news/200604/200604240683.html

이한우 기자  2006.0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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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이 많은 사람들은 일제 시대보다 더 못한 세상이라고 한탄한다.
.......  ]

 


경향신문 1986.1.14.

 

"수재물자 보내고 일주일 강냉이죽 먹었다"

귀순 임종철 하사가 털어 놓은 북의 오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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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한 상호교환방문때 북한기자가 찍은 한강주변 판자집을 보여 주면서 이처럼 거지가 득시글 거린다고 선전하기도 했다.

인민군 하전사들은 "쌍방 접촉으로는 조국통일이 이뤄질 수 없다.대화가 진행되는 기간이라도 수령님이 명령만 하면 전쟁을 일으켜 조국을 통일해야 한다"고 말한다.


북한 주민의 생활참상 = 북한주민은 날이 갈수록 생활이 어려워지고 있다. 우선 전주민을 대상으로 쌀배급량을 한끼당 무조건 50g씩 공제하기 때문에 식량부족 현상이 심각하다.

한가구에 한달에 무우 10kg, 배추 10kg, 된장, 간장, 소금이외에는 별다른 부식 없이 살아야 한다. 영화나 화보 같은데는 일부러 얼굴이 크고 둥근 사람을 나오게 해서 살찐 것처럼 보이도록 하고 있다.


보통 노동자가 한달에 받는 월급이 50 - 70원이며 그나마 그나마 돈이 있어도 물건을 살 수 없다. 아직도 목탄차와 소달구지가 많다. 평양시내에는  외국인들이 많이 다니는 중심가를 제외하고는 목탄차가 외곽으로 다닌다.


50대 이상의 나이 많은 사람들은 일제 시대보다 더 못한 세상이라고 한탄한다.


한국에 수재물자를 보낸 뒤에는 전주민과 군인들이 일주일씩 강냉이죽을 먹었다. 그래도 북한 주민들은 남한동포들을 도왔다는 자부심을 갖고 생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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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6

 

[ ....... 10년안에  남녀고등학교 3년생의 평균신장을  1백65㎝(㎝)와  1백60㎝(㎝)로 ........   ]

 


北韓(북한) 키크기運動(운동) 전개


1986.06.07  동아일보

 

【서울內外(내외)】北韓(북한)은 앞으로 10년안에 남녀고등학교 3년생의 평균신장을 1백65㎝(㎝)와 1백60㎝(㎝)로 각각 만든다는 목표 아래 최근 국민학교부터 이른바 「키크기운동을 대대적으로 벌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같은 북한에서의 키크기운동은 각 시군읍면 등에 조직돼 있는  사로청이 당에서 하달한 세부계획에 따라 주관실시하고 있는데 이 계획에 따르면 국민 중 고등학생 시절에는 연간 5 -6 cm, rm  그 이후에는 2 - 4cm를  목표로 하고 있다고 지난달 23일자 로동청년지가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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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

 

北韓(북한)  키크기운동 실시   다시마로 「成長米(성장미)」 제조보급


1984.11.28  동아일보


북한은 최근 북한청소년들의 왜소화현상이 더욱 심화, 커다란 사회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점을 감안, 각급 학교에 이른바 「키크기운동」이란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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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9  귀순  전철우

 

  [ .... 저도, 제 조카도 저희 아버지보다 작아요 ........

    .... 사회가 진화할수록 ... 키가 작아지고  머리는 커진다는 거예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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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호 남한 젊은이들이 대개 부모 세대보다 키가 큰 반면 북한 젊은이들은 부모 세대보다 작더군요.

 

전철우 저도, 제 조카도 저희 아버지보다 작아요. 학생들은 모내기, 추수는 물론 도로 청소 같은 온갖 잡일에 다 동원됩니다. 밥도 많이 못 먹고 무거운 짐을 지고 밤늦게까지 일하면 정말 배가 고픕니다.


 한 가지 재밌는 건요, 제가 어릴 때 ‘사회가 진화할수록 사람 키가 작아진다’고 배웠어요. 사회가 진화할수록 사람들이 걷지는 않고 생각만 많이 하니까 자연스레 키가 작아지고 머리는 커진다는 거예요. 그래서 저도 그걸 철석같이 믿었습니다.


그러다 동독에 유학 가서 깜짝 놀랐죠. 북한보다 훨씬 발전했는데 국민들 키랑 덩치는 엄청 크잖아요. 그때 알았죠, 다 거짓말이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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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11월, 전철우 귀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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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년 8월31일 다시는 밟지 못할 평양을 떠나 모스크바를 경유하여 9월4일 프라하에 도착하였다.

처음보는 외국의 환경은 생김새만큼이나 달라 도시의 건물이 색다르고 고풍스러웠고 지나가는 사람들은 밝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낙원이라는 상상도 하기 어려운 것들이 현실에 존재하고 있었다.


그러한 환경을 접하면서 비교할 수 없는 차이와 더불어 뇌리속에서는 어느 날인가는 그렇게 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웬지 갖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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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하에서의 생활은 모든 유학생들에게 적어도 1년반이상 생활한 사람이라면 평양의 영웅에 대한 실망과 배신감을 느끼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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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5년부터 이미 북한경제가 하강곡선을 그리기 시작 .......

  ..... 1986년 이후부터 급격히 악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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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통계에는 별로 흥미를 갖지 않았으나, 북한경제가 계속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하고 있다는 사실에는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북한당국은 김정일의 지시에 따라 김일성에게 허위사실을 보고하고 외부에도 각종 통계를 왜곡시켜 발표해왔다.


 그러나 문서정리실에 남겨진 정확한 통계로는 김정일이 후계자로 떠오른 무렵인 1975년부터 이미 북한경제가 하강곡선을 그리기 시작했으며, 특히 김정일이 실권을 완전히 장악하게 된 1986년 이후부터 급격히 악화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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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무시무시한 생지옥 남조선으로 간다면 차라리 물에 빠져 죽겠다" .......  ]

 

[ .....  "공화국 북반부와 남반부를 대비하여 볼 때 거꾸로 되어 있는 것 같다" ...... ]

[ ...... "남조선에서는 간장 된장을 마음대로 만들어 먹을 수 있다니 지금까지 헛살아 왔다" ........  ]

 

1987.2.11. 경향신문


김만철씨 일가  남쪽여로 25일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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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시무시한 생지옥 남조선으로 간다면 차라리 물에 빠져 죽겠다"던 처남이 한국의 참모습을 보고 의아해 하는 광경이나 김씨가 "공화국 북반부와 남반부를 대비하여 볼 때 거꾸로 되어 있는 것 같다"고 상봉한 누님에게 실토한 것은 북괴가 얼마나 주민들을 기만하고 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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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씨의 13살난 막내 아들은 또 "남조선에 거지들이 득시글거리고 미제가 착취하며 , 그래서 통일이 되어야 한다"고 학교에서 배운 것을 줄줄이 외어 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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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남조선에서는 간장 된장을 마음대로 만들어 먹을 수 있다니 지금까지 헛살아 왔다"는 말은 북한주민의 생활상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보인다.

또 "이렇게 좋은 옷은 처음 입어봤다"  "좋은 옷 입어 보고 비행기도 타 보았으니  이젠 더 이상 소원이 없다"  "생각했던 것보다 너무너무 좋다"  "마치 큰 잔치를 벌이고 있는 기분"이라는 말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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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함경도의 향토음식이라는 함흥냉면과 아바이 순대도 저쪽 북녁에서는 사라진 지 오래여서 ........ ]

 


  1987.2.13 


 
[귀순용사 임종철씨가 토로한 북한 실정]


● 앵커: 네, 김만철 씨의 막내아들 광호 군이 어저께 기자들에게 들려준 얘기를 듣고 작년에 중부선선에서 월남했던 귀순용사 임종철 씨가 북한의 실정을 털어 놓았습니다.

 

● 김광호군: 여기서는 거지가 욱실욱실 거리고 부잣집 아이들이 공부하면 거지아이들이 깡통차고 구경한다.

● 임종철(귀순용사): 북한의 모든 학교에 가면 그런 커다란 그림이 제가 학교 다닐 때 그 그림을 많이 봤는데 바로 창문 옆에는 신문팔이, 껌팔이 거지들이 모여서 줄을 서 있는데 부잣집 아이들을 창문으로 내다보면서 부러워하는 그런 그림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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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광호군: 놀잇감 한 번도 못 가져봤고 이곳 백화점에서 실컷 만져봤다.

● 임종철(귀순용사): 아바이 놀음이라는 것은 김일성이 어릴 때 만경대 고향집에서 일본 놈들을 족치는 군사놀음을 아바이 놀음이라고 합니다.

북한의 어린이들의 군사놀이를 많이 하고 있고 놀잇감을 볼 수가 없습니다.

 

● 김광호군: 밀에다 물을 타서 끓여서 먹는 것이 밀죽.

● 임종철(귀순용사): 밀죽이라는 것은 밀쌀을 망에다 갈아서 거기다 물을 부어서 죽을 끓여 먹는 것을 말합니다.

저희도 북한에 있을 때 밀죽과 깡냉이죽을 많이 먹었는데 친척이 왔다 가면 쌀이 모자르고. 평상시에도 모자르기 때문에 죽을 많이 끓여 먹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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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2.20. 경향신문


"성분 나쁘면 사람축에 못낀다"

김만철씨 일가 회견내용 .... 동토의 삶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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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봉례씨(김씨부인)=북조선에서는 15일에 한번씩 배급을 받습니다.

한살까지는 1백g을, 세살부터 어린이 유치원생 그리고 노인들은 3백g을 받습니다.

그러나 이틀분은 전쟁준비를 위해 전량미로 떼내 북조선인민들은 실제 13일분을 받는 것입니다.

배급식량은 쌀이 30%이며 강냉이등 잡곡류가 70%이기 때문에 13일치 식량을 15일동안 먹으려면 죽으로 끓여 먹어야 합니다.

 

또 부식물이 전혀 없고 배추의 배급량이 적어 식구가 많은 우리집으로서는 김치를 제대로 먹을 수가 없었읍니다.

간장 된장의 배급은 거의 없어 상점에 가서 사지만 줄 서 있다가 떨어지면 먹지를 못합니다.

 

그리고 간식은 아이들이 입밖에도 내지 못하며 설날과 2월 16일 김정일 생일 ,4월 15일 수령탄생일, 9월 9일 공화국설립일, 10월 10일 당창설일등 1년에 5번 아이들을 위한 사탕과 고기 5백g을 줍니다.

어떤 때는 1년에 1번 정도 간식이나 고기맛을 보며 살아온 적도 있습니다.

 

광숙이는 죽도 배불리 먹지 못한채 4년전부터 영양실조로 다리가 이렇게 됐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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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7.4.26 


[김만철씨 일가족 새마을 향토 야시장 나들이]

 

● 앵커: 김만철씨 일가족이 오늘 낮 새마을 향토 야시장에 나들이를 했습니다.

● 기자: 산뜻한 봄차림을 한 김만철 씨 일가족은 오늘 오후 새마을 운동 중앙본부에서 벌이고 있는 새마을 향토 야시장을 찾아 따뜻한 남쪽나라 고향의 맛과 정취를 만끽했습니다.

지난 40여년 동안 잊고 살았던 고향의 맛과 멋이 각 고향별로 마련된 향토음식점과 토산품 판매장에서 풍겨나와 아련한 기억을 더듬게 해주었습니다.

 

● 김만철: 야, 이거 나 오늘 너무 먹어서 배 터지겠는데....

● 기자: 특히 이북5도관에서는 두고 온 가족 소식을 김씨로부터 전해 듣고자 하는 안타까움들도 눈에 띄었습니다.

함경도의 향토음식이라는 함흥냉면과 아바이 순대도 저쪽 북녁에서는 사라진 지 오래여서 오늘 이렇게 따뜻한 남쪽 나라에 나와서야 처음 맛을 볼 수 있었습니다.


● 기자: 거기서 이런 음식, 요새도 맛볼 수 있습니??

● 김만철씨 부인: 아...우리는 이런 거 없어요. 먹어볼 수도 없어요.

있다는 게 강냉이...

● 김만철: 이북에서는 이 순대를 어쩌다 한 번 씩 먹을 때가 있죠.

근데 뭘 넣는가..

찹쌀같은게 없으니까..좁쌀도 없고, 강냉이쌀을 여기다 넣어요.


우수국산품 상설전시관을 찾아서는 조국의 기술수준이 세계적임을 새삼 깨닫게 됐고 생활필수품 하나하나가 신기하기만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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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북한에서는  이밥(쌀밥)을 실컷 먹어보는 것이  소원이었다』 .......  ]

 

김일성 생일선물

[중앙일보] 입력 1987.0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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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생활소감을 한마디만 더하라면 나는 서울사람들이 너무도 북한의 실상을 모른다는 점을 말하고싶다.

서울시민들은 내가 『북한에서는 이밥(쌀밥)을 실컷 먹어보는 것이 소원이었다』고 말하면 대부분 『설마 그럴 리가?』 하는 눈으로 쳐다보곤 했다. 그럴때면 안타깝기 그지 없다.

 

이 얘기 또한 믿기지 않을는지 모르지만 나는 서울의 호텔에서 첫날밤을 맞았을때 수세식화장실 사용법을 몰라 당황했었다.

북한의 주택은 공동주택이다. 방2칸, 부엌1칸씩을 하모니카처럼 엮어놓았다. 인민반 (30가구)마다 설치된 화장실은 겨우 2칸. 물론 재래식이다. 30가구 1백50여명이 사용하는 화장실이 2칸뿐이니 어려운 점이 한두가지 아니다.

 

목욕탕 사정도 한심하기 이를데없다.
청진시내에는 각구역별(인구5만∼10만) 로 공동목욕탕이란 것이 있다.
그러나 연료사정 때문에 대부분 개점휴업상태다. 1주일에 한번(일요일) 문을 여는데 그날이면 목욕탕은 콩나물시루가 된다. 이 때문에 주민들은 목욕탕사용을 아예 포기하고 집에서 가마솥에 물을 끓여 몸을 씻는다.

 

생필품 공급사정도 엉망이다. 세탁비누의 공급량은 연간 5장. 6개월도 채못돼 바닥이 난다. 주민들은 아직도 명태·정어리기름등에 가성소다를 섞고 이를 끓여 비누를 만들어 쓴다. 이때문에 주민들의 옷에는 항상 쾌쾌한 비린내가 배어있다.


그러나 당간부들은 사겅이 다르다. 북한에는 「8·9호제품생산기업소」가 있다. 당간부들에게 특별공급하는 식품·피복·생필품등을 전문생산하는 공장을 말한다. 또 이 기업소 노동자만을 특별검진하는 「8·9호검진대」란 것도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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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article.joins.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2095935&ctg=

 

 


[ ...... 조밥에 된장이라면  차라리 현재의 죽보다 낫겠다 ........  ]

 

"정치 바로하라" 편지

[중앙일보] 입력 1987.0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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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밖에 가까운 연간에 이밥(쌀밥)에 고깃국을 먹이고 고래 등같은 기와집에서 살게하겠다는 말이 25년도 넘었는데 인민들은 먹을것조차 없어 굶주리고 있는 사실을 아느냐. 당간부들은「옛날 혁명시절에는 조밥에 된장을 찍어먹고도 강고하게 혁명을 했는데, 왜 일들을 열심히 하지않느냐」고 하지만 조밥에 된장이라면 차라리 현재의 죽보다 낫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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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만철) 북한에는 우상화 작업이 심화돼 김일성·김정일 두사람에게「해와 달이 닳아 없어질때까지 대를 이어 충성하겠다」는 노래가 있을 지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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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집올 때 가져온 삼면경이 깨진 뒤 손거울조차 없이 지냈다 .......  ]

 

「혈육의 정」은 뜨거웠다.

[중앙일보] 입력 1987.0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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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만철씨의 처 최봉례씨는 작년에 홍수 난 이후 북한에서는 배급이 잘 안돼 사료를 사다 나누어 먹은 적이 있다고 생활의 어려움을 폭로.

전기 제품이라곤 전기 다리미밖에 없고 TV·냉장고·라디오도 없이 지냈으며 라디오 방송은 중앙에서 달아준 스피커를 통해서만 들을 수 있을 뿐이었다고.

거울을 볼 시간 없이 주민들은 매일 쫓기고 그나마 거울이 귀해 최씨는 시집올 때 가져온 삼면경이 깨진 뒤 손거울조차 없이 지냈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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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article.joins.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2086011&ct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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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 오길 잘했다"‥‥환한미소


 [중앙일보] 입력 1987.02.10


김만철씨 일가는 놀라움과 신기함, 자유를 찾은 기쁨속에서 서울생활 첫날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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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에 밥말아 먹기도>


◇아침식사=9일 상오9시 김치와 생선·육류등으로 자유세계에서의 첫 아침식사를 밝은 분위기 속에서 담소하며 즐겼다. 대부분 그릇을 깨끗이 비웠으나 김씨의 부인 최봉례씨는 『기름진 음식을 먹었더니 느끼하다』 며 반정도를 남겼다.

특히 나이어린 광호군과 광숙양은 국대신 물에다 밥을 말아 순식간에 그릇을 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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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량난 혹은 경제위기로서의 '고난의 행군'은 1987년부터 이미 지역적으로 시작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때부터 벌써 함경북도, 양강도에서는 미공급(국가 배급 중단)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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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88년에 보위부 경비대원으로 입대했다.

나는 북한이 제일 행복한 나라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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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0~40%로 돌아가면 잘 돌아가는 거지요 ........  ]

 

     198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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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9월, 나는 북조선 창건 40돌 기념 행사에 참가한 부르키나파소의 대통령을 대동하고 북조선 최대의 기계공장이며, 외국인들에게 공개하는 ‘시범 공장’인 대안중기계련합기업소를 참관한 적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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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이 대통령이 간 다음에 마다가스카르의 대통령이 오기로 되어 있는데, 대통령들이 다녀가는 3시간 동안 차질없이 기계를 돌리려고 거의 10일간이나 생산을 못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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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흔하다는 석탄도 제대로 공급받지 못해서 보일러가 돌아가지 않는 판인데....”

지배인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아니, 그렇다면 월 평균 공장 가동률이 절반도 못 된다는 소리가 아닙니까?”

“30~40%로 돌아가면 잘 돌아가는 거지요. 외교관들이 부럽습니다. 무슨 걱정이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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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rfchosun.org/program_read.php?n=881

고영환  제25부 북조선의 전시용 공장들, 다섯 번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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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평양의 인민문화궁전에서는 정무원 총리의 참석하에 경제 침체의 원인을 밝히고 그 대책을 세우기 위한 정무원협의회가 열린 적이 있었다.

 

그때 여러 가지 안들이 토론되었는데, 특히 새 학기를 앞두고 학생들에게 학용품, 그 중에서도 만년필과 학습장의 공급이 극히 부족하다는 문제로 논쟁이 벌어졌다. 첫 번째 비판의 대상은 만경대 영예군인 만년필공장의 지배인이었다.

 

“당신, 왜 그 작은 만년필 하나 제대로 생산하지 못해서 ‘나라의 왕’들에게 공급해 주지 못하는가? 수령님의 교시 관철에서 절대성, 무조건성이 없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 아닌가?”

 

그러자 그 지배인은, “제가 물론 그러한 정신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강선제강소에서는 얼마되지도 않는 강재를 공급해 주지 않습니다. 오죽하면 지배인인 제가 자재 인수원이 되어 제강소에 가서 강재를 달라고 애걸복걸했겠습니까. 강재만 공급해 주십시오. 그러면 해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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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리가 부드럽게 타일렀다. 그러자 제강소 지배인이 항변을 했다.

 

“총리 동지, 우리 공장은 온 공화국을 대상으로 자재를 공급하고 있습니다. 특히 제2경제위원회에는 우선적으로 강재를 공급해야 합니다. 제2경제위원회에 공급하는 강재가 조금이라도 질이 떨어지거나 공급이 모자라게 되면 저는 군사재판에 회부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철광산에서는 정광을 제대로 공급해 주지도 않습니다. 조금 들어오는 정광으로는 제2경제위원회의 수요를 감당하기도 힘이 듭니다. 그러니 국가 계획에 잡히지 않은 일반 강재의 공급은 어림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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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산 지배인이 변명을 했다.


“우리는 온 힘을 다 바쳐 일을 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도 할 수 없는 일이 있습니다. 광산이 어디 우리들만 일한다고 되는 곳인 줄 아십니까?

갱을 파고 들어가려고 해도 림산사업소에서 갱목을 계획대로 공급해 주질 않습니다. 거기에다가 만포다이아공장에서는 우리가 필요한 량의 다이아를 공급해 주지도 않습니다. 그나마 재생 다이아는 1개월도 못 가서 터집니다. 설상가상으로 화물차의 부속품도 부족하고 디젤유도 자꾸 제한 공급해서 자동차마저 제대로 뛰지 못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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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자 림산 지배인이 말했다.


“우리만큼 힘들게 일하는 데도 없을 겁니다. 우선 사람이 모자라서 순천비날론공장, 사리원카리비료공장, 광복거리 건설장, 이 세 군데에 목재를 공급하기도 힘든 실정입니다.

우리에게도 역시 연료 문제가 심각합니다. 림업부를 통해서 나무를 베는 기계에 소요되는 디젤유를 해결해 달라고 부탁을 했었습니다. 그런데도 지난해의 50% 수준밖에는 줄 수 없다는 겁니다. 절약해서 쓰라는 것인데, 물론 국가 사정은 압니다. 그러나 손으로 나무를 베니까 계획의 30%도 달성을 못합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어떤 때에는 광복거리 건설장에 보낼 나무를 사업소 로동자, 사무원들이 총동원되어 24시간 철야 작업을 해서 간신히 철도역까지 수송해 놓아도 화물 렬차가 오지를 않습니다. 철도부 탓인데, 욕은 우리가 먹습니다. 이번 회의에서 이런 것도 시정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설명을 듣고 난 총리는 이번에는 철도부장에게, 어떻게 된 일이냐고 질책을 했다.


“우리 철도부처럼 고생하는 곳도 없을 겁니다. 오죽하면 수령님께서 철도부를 군사체제로 만들고 군복을 입히라고 하셨겠습니까.

우선 철도 레루가 문제입니다. 나무 침목은 수명이 다 되었는데 철도부용으로 돌려지는 통나무가 없습니다. 그래서 세멘트 침목으로 하려고 하는데 건재공업부에서 세멘트를 공급해 주질 않습니다. 그러니 사고가 자주 납니다.

 설상가상으로 빈 빵통들이 모자랍니다. 철도부나 기관구, 중심 역들은 빵통들이 없어서 쩔쩔매는데 공장, 기업소, 화물역에는 그것들이 가득합니다. 자기 개인만 생각하고 또 제 쓸 것들이 아니어서 그런지 보관도 제대로 안하니 6개월만 처박혀 있으면 폐물이 됩니다. 이 문제도 경종을 울려 주셨으면 합니다.

또 한 가지, 디젤 기관차들이 기름이 없어 운행이 중단되고 있습니다. 철도부에 우선 기름을 할당해 줄 것을 제기합니다.”

 

결국은 어느 누구에게도 책임을 지울 형편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뚜렷한 대책을 세울 수도 없었다. 그야말로 악순환의 련속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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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오락가락 책임을 회피하는 바람에 근본적인 대책을 세울 수 없게 되자, 총리는 맥빠진 소리로 “모두 다 맨발로 락동강을 건너는 정신으로 자력갱생, 간고분투 하자!”라는 일반적인 호소를 한 후 회의를 끝마쳤다.

 

‘결국 본질적인 문제는 제쳐두고 옆으로만 돌아다녔군!’

이 회의 소식을 전해 들은 외교부 관리들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씁쓸한 심정을 이렇게 토로하였다.

 

전반적으로 북조선의 경제는 모두 제동이 걸려 있다. 어느 한 고리에 박혀 있는 제동을 푼다고 해서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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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영환  북조선의 전시용 공장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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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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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컨데 중국은 오늘날 생활수준이 60년대의 우리나라 수준이라는 것이, 요사이 중국을 여행하고 돌아 온 한국인들의 거의 공통된 견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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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여름 월간지 ´샘이 깊은 물´
전두환씨를 변호한다
조갑제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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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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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구권의 사람들은 거리로 뛰어나와 ‘Hand in Hand’를 불렀다. 서울올림픽의 주제가는 그들의 혁명가였다. 누군가 이 노래를 부르면 삽시간에 사람들이 거리로 뛰쳐나왔던 것이다.


어떻게 그렇게 한꺼번에 몰려나올 수 있었느냐고 물으니까, 바츨라브 하벨은 간단하게 대답했다. ‘우리는 서울을 보았기 때문’이라고. 그는 민주화된 뒤 체코의 초대 대통령이 되었던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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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sdjs.co.kr/read.php?quarterId=SD200904&num=335

2009년 겨울호
 
[특집] 경제발전과 민주화를 달성한 대한민국, 무엇이 문제인가?
[김주성 | 한국교원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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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9  [ .... 임수경씨를 ... 환영했던 평양 대학생들은 1주일간 강제로 살찌우기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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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989년 북한 평양학생축전에 참석한 ‘통일의 꽃’ 임수경(당시 한국외국어대 불어과 4년) 씨를 열렬하게 환영했던 평양 대학생들은 1주일간 강제로 살찌우기를 한 상태였던 것으로 밝혀졌다고 동아일보가 10일 보도했다.


신문에 따르면, 김형직사범대 교수를 지내다 1991년 탈북한 김현식(73) 미국 예일대 초빙교수는 8일 워싱턴에서 열린 ‘연우포럼 국제연대’ 행사에서 강연을 통해 “임 씨를 만났던 김형직대의 내 제자들은 1주일간 ‘강제비육(强制肥育·강제로 살찌우기)’에 처해졌다”고 밝혔다.

‘준수한 인물’을 기준으로 선발된 학생들은 영양 부족 상태를 감추기 위한 고육책으로 당시 평양시내 국제호텔로 보내져 1주일간 고기와 빵 사과 우유를 배가 터질 만큼 먹어야 했다는 것.


학생들은 또 임 씨가 입장할 때는 작은 박수를, 단상에 서면 큰 박수를, 김일성 부자에게 긍정적인 발언을 하면 환호를 곁들인 박수를 치기로 사전에 연습했다고 김 교수는 증언했다고 신문은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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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저도, 제 조카도 저희 아버지보다 작아요 .......

    .... 사회가 진화할수록 ... 키가 작아지고  머리는 커진다는 거예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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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호 남한 젊은이들이 대개 부모 세대보다 키가 큰 반면 북한 젊은이들은 부모 세대보다 작더군요.

 

전철우 저도, 제 조카도 저희 아버지보다 작아요. 학생들은 모내기, 추수는 물론 도로 청소 같은 온갖 잡일에 다 동원됩니다. 밥도 많이 못 먹고 무거운 짐을 지고 밤늦게까지 일하면 정말 배가 고픕니다.

 한 가지 재밌는 건요, 제가 어릴 때 ‘사회가 진화할수록 사람 키가 작아진다’고 배웠어요. 사회가 진화할수록 사람들이 걷지는 않고 생각만 많이 하니까 자연스레 키가 작아지고 머리는 커진다는 거예요. 그래서 저도 그걸 철석같이 믿었습니다.

그러다 동독에 유학 가서 깜짝 놀랐죠. 북한보다 훨씬 발전했는데 국민들 키랑 덩치는 엄청 크잖아요. 그때 알았죠, 다 거짓말이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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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11월, 전철우 귀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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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동독 역사는 늘 사회주의 통일당(SED) 독재에 대한 거절, 반대, 저항의 역사로 점철 되었다. 그것은 동독인들이 서독으로 피난 또는 이주한 숫자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즉, 1945년 10월 동독의 설립에서 1989년11월 베를린장벽 붕괴까지 동독 전체 인구 1천6백4십만 중에서 3백5십만이 동독을 떠났으며, 8백명은 도주의 노력에서 실패 하였다.


이와 같은 동독인들의 탈출은 사회주의통일당(SED) 독재의 불정당화 및 불안정화에 결정적 기여를 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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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8년에 동독의 노동자의 소득수준은 구매력을 고려하여 말한다면 서독의 그것의 31%에 불과하였고, 동독의 가계는 서독의 순가계소득의 47%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화폐통합후 첫 2년반동안에 동독의 소득은 서독의 그것에 현저히 접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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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인들은 자동차를 사랑한다. 서독에 벤츠, BMW, 포르쉐, 아우디,폭스바겐이 있다면 동독에서는 트래비 601이 있었다.

 나중에 80년대에 폭스바겐이 폴로의 40마력 엔진을 장착하게 되기는 하지만, 인공수지 차체와 19마력 이기통 엔진을 가진 트래비는 말 그대로 환경 오염의 주범이었다.


동독에서 약 9,000 마르크에 팔렸다. 평균 1,000 마르크의 임금수준이었던 동독에서 힘들게 살 수 있는 가격이었다. 하지만 이 차는 주문에서 배달까지 10년 이상이 걸리기 때문에 보통 새 차 가격의 두 배를 주고 중고를 구입하는 것이 상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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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탁기는 3,000 마르크, TV는 4,500 마르크에서
6,000 마르크로 아주 소수의 사람들만 가질 수 있는 사치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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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화망도 부분적으로는 전쟁 직후의 것이었다. 물론 1차 대전 직후라는 말이다. 장벽이 무너졌을 당시 약 10%의 가구만이 전화를 사용하고 있었다.


분단 시절 동서독 사이에는 단지 800개의 전화회선만이 연결되어 있었다. 공식적인 휴대전화와 케이블 TV는 존재하지 않았고 3,500개 지역이 외부 세계와 전화로 연결되어 있지 않았다. 새로 전화를 연결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20년까지 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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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독 시절 정년 연금자의 사회보장 역시 만족할 만한 것이 아니었다.


노인들이 차별당한 것은 아니었지만, 노인들은 자유 독일 노조연맹하에 조직되어 있던 통일된 사회부양체제의 부담이었다. 1989년에 연금자들은 평균 450 동독 마르크로 생활을 헤쳐 나가야만 했다. 국가 안전부의 직원이나 국민 군대의 장교처럼 특히, 많은 수입을 가지고 있던 당 간부들은 추가 부양과 특별 부양의 혜택을 누렸고, 학술, 문화, 교육, 의료 부문의 중역들은 소위 ‘지적 연금(Intelligenzrente)’을 받았다.


서독과는 다른 구매 형태를 근거로 삼고 동독의 사회정책이 무엇보다 식품, 의복, 집세 같은 생필품의 국가 원조에 있었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동독 연금 생활자의 구매력은 서독 연금 생활자에 비해 약 두세 배 이하 수준이었다. 서독
인들이 사용하던 수명이 긴 고가 산업제품들을 함께 계산하게 되면 이 차이는 더 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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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독의 가난은 ‘집단적(kollektiv)’이고, 국가적으로 조직된 낮은 수준의 가난이었으며 80년대에 계속적으로 하락하였다. 모든 사회주의 불법 국가들에서와 마찬가지로 ‘가진자(Haves)’와 ‘못가진자(Have nots)’의 차이는 자유사회질서에서보다 현격히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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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대 초에 동독의 국가 지도부는 주택 부족을 해결할 조치를 취하기로 결정하였고, 시멘트로 미리 만들어 놓은 건축 부품들을 결합하는 형태
인 조립식 건축으로 주거 공간을 만들기 시작하였다. 전쟁으로 인해 파괴돼 거의 사람이 살 수 없는 부분들을 포함하는 많은 고건물들의 재개발은 그 후 10년도 더 지난 후에야 시작되었다.


1970년까지는 주택 할당에 6년에서 8년이 걸렸다. 장벽 붕괴 시점에는 200만 명 이상의 주민이 철거해야 마땅한 집에서 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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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독일 통일 20년의 성과 _ Walter Klitz

 

 


 [ ......  Roads and railroads had to be virtually rebuilt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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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third problem was that the inadequate infrastructure also became a problem for many potential investors. Telephone service was improved only very slowly. Many investors also complained about energy shortages, as many East German power stations were shut down for safety and other reasons.

 Roads and railroads had to be virtually rebuilt because they had been so badly maintain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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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conomic history of the German reunification
From Wikip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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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동독 주민은 동독의 停滯(Stagnation)를 점차 切感하게 됨. 동독 시스템은 경제적으로 제 살을 갉아먹으면서 존립하고 존속.


 사회복지정책(Sozialpolitik) 차원에서는 서독과 비교해 볼 때 물질적 기본욕구만이 겨우 충족되고 있었을 따름이고 生態的 次元(環境政策 次元)에서는 工業的 自然掠奪 經濟(濫獲)의 徵表가 增幅하고 文化政策 차원에서는 인간의 로봇化(人造人間化)가 속행되고 억압이 지배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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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90년 구동독 주민의 평균 기대수명은 남성 69.5세(서독 72.2세), 여성 76.7세(서독 79.3세)로 서독보다 3년 낮았으나 2007년 동독이 6년 높아져 남성 75.8세(서독 77.5세), 여성 82.3세(서독 동일)로 동서독 지역의 평균수명이 비슷하게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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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남북한 건강수준 격차
한국보건사회연구원, 보건·복지 Issue & Focus 제131호

 


1991  대한민국

평균수명  남67.66 여75.67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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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계청이 26일 발표한 ‘91년 생명표’에 따르면 한국인의 평균수명은 71.57살로 지난 50년대말의 52.39살, 83년의 67.94살에 비해 크게 높아진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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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11.27  한겨레

 

 

 

[....  von "Industriemuseen" gesprochen .......


  .....das Bruttoinlandsprodukt (BIP) pro Einwohner bei 27,1 % des westdeutschen Wertes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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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e Arbeit wurde dadurch erschwert, dass die DDR am Tag der Wahrungsunion praktisch bankrott war und selbst Vorzeigekombinate nicht auf dem Stand der Technik waren (polemisch wurde von "Industriemuseen" gesprochen). So ging damals ein großer Teil der Investitionen in die Reparatur dieser veralteten Anlagen.


Die Produktivitat der DDR-Industrie war auf einem sehr niedrigen Stand, so lag das Bruttoinlandsprodukt (BIP) pro Einwohner bei 27,1 % des westdeutschen Wertes.


Aus ideologischen Grunden herrschte in den Volkseigenen Betrieben ein Personaluberhang von ca. 15 %, und nach Aufhebung der staatlich kontrollierten Planwirtschaft standen viele Betriebe vor dem Kollaps.

 Dazu kam ein Einbrechen der Nachfrage nach DDR-Produkt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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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10월 동독 산업의 민영화는 대략적으로 6,000억 서독 마르크의 매출을 낼 것으로 추정되었다.


하지만 민영화된 기업이 처음 추정치보다 훨씬 낮은 가격으로 매각되거나 대대적인 재단장을 거친 후에야 거래되었기 때문에 실제로는 2,000억 마르크 손실을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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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4%는 주택의 바닥이 무너져 내릴 지경이라 여기에 최우선적으로 돈을 ........     ]


1990.9.2. 동아일보


동베를린 시민 집단장에 큰관심

40년간 개량 안해 낡고 우중충

 

보다 쾌적한 주거생활. 동베를린시민 대부분이 최근 들어 갖게 된 가장 절박한 욕구중의 하나다.

자유화 이후 특히 경제 통합 이후 실질적인 구매능력을 갖추게 되면서  많은 동베를린 시민들이 주택을 보수하고 실내를 새롭게 꾸미는 일에 가장 큰 관심을 표시하고 있다.

특히 허술한 욕실 등 위생시설과 낡아 빠진 난방시설의 현대화가 무엇보다도 시급한 일이라고 동베를린 시민들은 지적한다.

 

주거환경에 대한 동베를린 시민들의 새로운 욕구는 최근 서독의 한 시장조사기구가 실시한 설문조사를 통해서도 확인된다.

조사에 따르면 동베를린시민의 38%가 주택의 각종 내부시설을 새롭게 하는데 가장 큰 관심을 갖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와 함께 28%의 시민은 문과 창문, 16%는 다락벽 현관의 보수가 가장 시급하다고 지적했으며 14%는 주택의 바닥이 무너져 내릴 지경이라 여기에 최우선적으로 돈을 쓰겠다고 말해 주택의 현실을 쉽게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주택의 보수 , 주거환경개선에 대한 욕구가 이처럼 높은 것은 40여년간의 사회주의체재하에서 주택개량사업이 전혀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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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벽 붕괴 시점에는 200만 명 이상의 주민이 철거해야 마땅한 집에서 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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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독을 가로질러 가는 동안 철로변의 풍경들이 초라 하고 우중충하여 평소에 생각하고 있던 것보다도 서독과의 격차가 더욱 심하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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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병기 , 개정판 | 깊은 밤 그 가야금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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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독을 여행할때는 들판이나 집들이 윤기가 흘렀는데 동독은 한마디로 우중충 하다.

사람들의 표정도 달랐다. 게르만 민족 특유의 고자세는 있어도 서독인들은 표정이 밝고 자신감이 넘치는데 동독인들은 표정이 어둡고 어딘가 실의에 빠진 사람들 같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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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鐵의 장막’ 걷고보니 공해가 산더미


동유럽 심각한 환경오염에 시달려… 폴란드 경우 하천 95%가 식수에 부적합


여연정 편집위원보   1990.05.06.

 

외부 세게로부터 오염되지 않은 것으로 간주되던 동유럽국가들에 민주화바람이 불면서 상당 지역이 이미 오래전부터 악화일로의 환경오염문제를 앓고 있음이 밝혀져 서방세계에 충격을 주고 있다.


지난 20년간 동유럽국가들은 중공업과 각종 수송수단의 폭증에 따라 대기권과 상수원, 각종 농수산물 등이 급격하게 황폐돼왔음에도, 공산세계가 지닌 가장 ‘불결한 비밀’로 가리워왔던 것이다.


개발도상국가들보다도 훨씬 중증인 동유럽공해의 근원적 원인은 무엇보다 소련이 스탈린 체제 이래 동유럽국가에 유황이 다량 함유된 갈탄을 연료로 한 중화학공업을 적극 장려해온 데에 있다. 소련은 자국에서 생산되는 원유와 위성국에서 생산되는 중기계를 교환해 온 것이다. 그 결과 동유럽 일원의 공장들은 매년 2천6백만톤의 아황산가스를 내뿜고, 이는 또 산성비를 유발하는 악순환을 거듭해왔다. 그밖에도 일산화탄소와 이산화탄소로 인한 대기오염을 비롯, 각종 산업폐기물로 인한 폐해는 치명적 수준에 이르렀다.


핵누출 위험 상존


소련의 지원을 받아 동유럽에 건설된 20여개의 핵발전소들도 안전장치조차 제대로 갖추지 않아 소련의 체르노빌 원전참사와 같은 핵누출위험이 상존하고 잇는 형편이다.

서방 환경보호론자들은 폴란드 · 동독 · 리투아니아 등지에서 산업쓰레기를 인근 바다에 마구 쏟아내버려 발트 해가 ‘스레기처리장’이 되고 있다고 우려한다.


동유럽국가의 오염정도는 산업형태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다. 오염수준도 생활의 질을 저하시키는 정도가 아니다. 질병과 기형현상이 다반사이고 사람의 수명을 단축시킬 정도의 심각한 상태이다. 동유럽에서도 최악의 공해국가인 폴란드의 경우 총인구 3천8백만명 중 3분의1이 ‘생태학적 재해’지역에 거주하고 있으며 95%의 하천이 식수에 부적합한 상태이고 12만5천에이커의 산림이 산성비로 파괴돼버렸다. 폴란드 남부의 한 산업지역은 대기오염으로 주민들의 평균수명이 타지역에 비해 4년이나 짧은 것으로 나타났다.


체코도 이와 비슷해 식수의 50%가 토양부식으로 오염된 상태이며 수도 프라하 시민들 상당수가 스모그현상으로 인한 만성두통 · 천식 등에 시달리고 있다.


독일의 경우는 통일과 관련된 산적한 문제와 더불어 쓰레기더미가 문자 그대로 ‘태산’처럼 쌓여 처리문제에 골치를 앓고 있다. 베를린장벽이 가로놓였던 지난 수년간 동독은 서베를린과 교묘한 협조관계를 이루어 서독 등 서방국가가 자국에 연간 40만톤의 쇄석과 4만톤의 유독폐기물을 버리는 대가로 75년부터 89년까지 78억달러를 받아왔다.

 

동유럽 지도층이 오래전부터 환경오염의 심각성을 인식했으면서도 아예 그것을 외면해온 사실도 속속 드러나고 있다. 임산부의 조산율과 사산율이 높아 문제가 되고 있는 폴란드 공업지대 카토비체의 한 병원장은 “지난 20년간 당국에 계속 이야기를 해왔지만 그들은 언제나 연구중이란 말로 따돌렸다. 그러나 계속 환자를 받아야 했던 우리들을 속일 수는 없었다”고 말한다. 동유럽 당국자들은 국민건강에 대한 산업폐해 경고를 ‘체제의 도전’으로 간주해왔던 것이다.

 

동유럽 경제재건의 큰 장애


이처럼 공산권에서 오염문제가 방치돼온 가장 주된 원인은 개인의 권리와 요구를 무시해버리는 생산 위주의 계획경제에 있다고 볼 수 있다. 더욱이 상의하달의 일방적 명령전달체계하에서 밑으로부터 되받아 올라오는 경우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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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sisapress.com/journal/articlePrint/108038

 

 

 


[ ..... 함흥 ... 성천강의 물은  공장폐수로 먹물 같고  .......

  ..... 먼바다까지 펴져  연안 40㎞안에선  물고기구경조차 할 수 없다 ..........    ]

 

[ ...... 압록강물도 3급수 이하 ..... 두만강 역시 .... 공업용수로도 쓰기 어려운 5급수이하로 ........     ]

 

  1996.4.1.


「남북한 환경구상」 발표계기로 본 북 실태

 

◎공장·광산지대/매연·폐수 넘쳐 환경오염 극심/함흥관통 성천강 “먹물”… 물고기 씨말라/두만강도 5급수… 공업용수로도 부적합

 

『우리 공화국은 공해없는 나라이며 공원속의 도시,인민의 지상낙원입니다』

지난 86년 최고인민회의 제7기5차회의에서 부주석 이종옥은 북한이 이렇게 환경이 좋은 나라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그러나 실제는 이와는 정반대이다.공장이나 광산이 있는 지역은 예외없이 매연과 폐수로 환경오염이 심각한 상황이며 다락논개간·벌목등에 의한 산림의 황폐화도 우려할만한 단계에 접어든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김영삼 대통령이 지난달 21일 밝힌 「환경복지구상」에서 남북한이 한반도 환경공동체형성을 위해 공동노력을 기울려야한다고 강조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산림 황폐화도 심각


사실 북한지역은 일제때부터 흥남비료공장등 중화학공장과 탄광 및 금광등의 개발이 이뤄져 환경오염과 파괴가 일찍부터 있었다.생활수준이 낮고 자동차보유가 적은데다 인구과밀대도시가 없어 이른바 사람들에 의한 환경오염은 아직 우리보다 덜한 편이나 공장이나 광산지역의 오염과 환경파괴는 우려할만한 수준에 이르고 있다는 것이 북한환경을 관찰해온 국내전문가들의 공통된 지적이다.

한국환경기술개발원의 정회성 연구원은 『대부분의 북한 공장이나 광산들은 공해방지시설을 갖추지 못하고 있는데다 극심한 경제난과 기술부족등의 이유로 공해가 방치되고 있어 공장·광산지역=오염지역』이라고 지적했다.


북한의 대표적인 오염지역은 함흥으로 흥남비료공장,2·8비날론공장외에 합성수지공장,염료공장,제약공장,화약공장,모방직 및 제사공장등이 있어 공해가 아주 심각하다.이곳의 화약공장에서 경비소대장을 하다 지난 94년에 귀순한 여만철씨는 해안순찰을 하다보면 함흥시내를 끼고 흘러내리는 성천강의 물은 공장폐수로 먹물 같고 이렇게 오염된 물이 먼바다까지 펴져 연안 40㎞안에선 물고기구경조차 할 수 없다고 전했다.


○청진 대표적 공해도시


김책제철소,청진제강소,청진철도공장,청진공작기계공장등이 있는 청진시도 대표적인 공해도시로 꼽힌다.또 석유정제시설이 있는 나진,문천제련소가있는 문천,성진제강소가 있는 성진,황해제철소,송림제철소가 자리한 송림,강서제강소,남포제련소가 있는 남포,천내시멘트공장이 있는 강원도 천내군,순천비날론기업소와 상원시멘트기업소가 있는 지역도 한결같이 공해가 심각한 지역이다.

대부분의 공장들은 공해방지시설을 갖추지 못하고 있으며 도시지역엔 분뇨나 하수정화시설이 제대로 돼있지않아 대기·하천오염이 심각한 편이다.

청진의 경우 김책제철소와 청진화학섬유공장에서 나오는 매연·석탄연기·이황화탄소등의 유해가스 때문에 주민들이 호흡기질환으로 고생하고 있고 원산에선 문평제련소,원산화학공장등에서 나오는 아황산가스와 수은연기로 인해 상당수의 주민들의 이가 빠지고 기관지염에 시달리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북한내 대부분의 강들도 심하게 오염돼있다.강과 하천의 오염은 주로 공장폐수와 광산폐수 때문이다.특히 도시지역을 흐르는 강들은 분뇨및 하수처리시설의 미비,야산 개간에 따른 토사유출등으로 수질이 갈수록 악화되고 있다.평양의 상수원인 대동강의 경우 서해갑문 건설이후 남포지역의 공장폐수가 역류하면서 부영양화가 심화돼 하류지역엔 숭어가 자취를 감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압록강물도 3급수 이하로 오염돼있고 두만강 역시 상류지역을 빼곤 식수는 물론 공업용수로도 쓰기 어려운 5급수이하로 더러워졌다.이러한 강의 오염은 해양오염을 가속화시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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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19960401018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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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군의 무장화, 전국토의 요새화 등의 4대 군사노선은 바로 환경자원의 소모와 환경파괴를 의미한다. 또한 계획량 달성에 모든 정책적 기조가 주어짐에 따라 환경을 고려한 기술개발, 경제운영 등은 고려될 여지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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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m.ecomedia.co.kr/news/newsview.php?ncode=179507117976923

북한, 환경오염실태와 남북한 환경교류협력
편집국 eco@ecomedia.co.kr | 2007-09-17

 

 

                       

[ ....... 귀가 먹먹할 정도의 요란한 시동음과 함께, 뿌연 배기가스가 시야를 .........    ]

 

2013-02-09    

   
과거 동독의 작은 추억...트라비!
 
      
[앵커멘트]


과거 동독의 상징 하면 우선 베를린 장벽이 떠오르는데요.

그에 못지않게 유명한 것이 바로 트라비라고 하는 꼬마 자동차입니다. 배기가스가 너무 심해 도로에서는 이미 운행금지령을 받았는데요. 지금은 베를린을 찾는 관광객들에게 특별한 재미를 안겨주는 관광 상품이 되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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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포트]


귀가 먹먹할 정도의 요란한 시동음과 함께, 뿌연 배기가스가 시야를 가립니다.

작고 요란한 데다, 친환경과는 거리가 먼 트라반트.

그러나 매일 수십 명의 관광객이 비좁은 트라반트에 몸을 쑤셔 넣습니다.

 '트라비 사파리'는 관광객이 직접 트라반트를 몰고 한 시간 동안 베를린의 명소들을 돌아보는 투어입니다.

요금은 일인당 79유로, 우리 돈 약 12만원 정도 합니다.

 

하지만 편안한 자동차 여행을 생각했다면 오산입니다.

트라반트는 요즘 차에 비해 매우 작은 데다, 최고 시속은 112km에 불과합니다.

그럼에도 매년 3만 명의 관광객이 베를린과 드레스덴에서 '트라비 사파리'를 즐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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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트라비'라는 애칭으로 불리는 트라반트는 과거 동독에서 생산된 유일한 차입니다.

1957년부터 1991년 베를린 장벽이 붕괴될 때까지 약 300만 대가 생산됐고 다른 공산권 국가에도 수출됐습니다.

 

당시엔 이 차를 사려면 꽤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차를 주문하고 나서 인도받기까지 길게는 무려 12년이 걸렸고, 이는 공산주의 생산체제를 비판할 때 단골로 인용되곤 했습니다.

 

독일이 통일된 지 20년이 지난 지금 트라비는 베를린장벽 못지않게 동독의 대표적인 상징물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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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터뷰:악셀 플라이셔, 관광 안내원]

 "트라비는 이제 몇 대밖에 남아있지 않죠. 원래는 운행 금지인데 저희는 특별 허가를 받고 베를린에서 마지막 트라비를 운행하고 있죠."

 

트라비가 도로에서 쫓겨난 이유는 극심한 매연 때문입니다.

독일 정부의 엄격한 환경기준에 전혀 부합하지 않습니다.

매연을 참아가며 관광을 마친 사람들. 얼굴엔 미소가 가득합니다.

 

 [인터뷰:엘레인 보이드, 아일랜드 출신 관광객]

 "정말 즐거웠어요. 도시와 유적지를 보는 것도 좋았고, 사람들이 손을 흔들어주니까 더 좋았어요."

파리에서 온 예술가도 무척 만족한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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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어를 마친 운전자들에겐 트라비 운전 면허증이 기념품으로 주어져, 즐거운 추억을 더합니다.


http://www.ytn.co.kr/_pn/0413_201302061702236211

 

 


[ ...... 하루아침에 아무 가치가 없는 쓰레기가 되어 버렸습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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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 공산당 민주혁명 이후에도 가치를 여전히 유지한 물건은 놀랍게도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1970-80년대 소련사람들이 중요하게 생각했던 가구, 가전제품, 도서 등은 하루아침에 아무 가치가 없는 쓰레기가 되어 버렸습니다. 새로운 세계에서 이와 같은 것은 쓸모가 없게 되거나 옛날보다 가격이 엄청나게 떨어졌습니다. 예를 들면 1980년대 초 일본제 칼라 텔레비전은 노동자가 5-6개월 정도 벌 수 있는 돈으로 팔렸는데 1990년대 말 들어와서는 훨씬 더 좋은 텔레비전을 보름 정도 벌 수 있는 돈으로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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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rfa.org/korean/commentary/lankov/lankovcu-09222016101122.html

[란코프] 북 체제붕괴 후 잘살기 위해서는
2016-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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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1980년대말부터 시작된 뙈기밭바람에 더구나 산림이 없어져갔다.


그때부터 북한에서는 식량난이 시작되여 식량배급이 몇 달씩 밀리고 게다가 배급량도 그 무슨 "애국미"요,"절약미"요 하면서 줄어들었고 사람들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각종 생필품-옷,신발,내의,비누 등이 결정적으로 부족하게 되어 식량과 물물거래형식으로 거래되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되자 농촌지역주민들은 너도나도 뙈기밭을 개간하게 되었으며 개울뚝이나 언덕받이 등은 이미 개간되고 그 다음으로 산기슭을 개간하는데 이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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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식량난 혹은 경제위기로서의 '고난의 행군'은 1987년부터 이미  .......

    .... 벌써 함경북도, 양강도에서는 미공급(국가 배급 중단)이 시작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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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북한 경제는 90년대에 왜 파탄 상황을 맞이했나?

 

답: 조선 경제의 파탄 동기로 나는 '13차(제13차세계청년학생축전)'를 들 수 밖에 없다. 식량난 혹은 경제위기로서의 '고난의 행군'은 1987년부터 이미 지역적으로 시작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때부터 벌써 함경북도, 양강도에서는 미공급(국가 배급 중단)이 시작되었다. 경제 이상 현상의 현저한 징후는 당시 13차 준비 기간부터 드러나기 시작했다. 88서울 올림픽에 대항한 '13차'의 평양 유치는 경제적으로는 절대 무리하나 북남 대결상 필요한 정치행사였다.


동서 화해 협력의 추세를 막아 보려는, 일개 소국으로는 너무나 힘겹고 무리한 모험이었다. 하기에 이 행사준비는 사로청(현 김일성주의청년동맹)을 내세워 당중앙이 배후 조종하면서 국가의 계획 경제를 파괴하면서도 강행 추진됐다.


그 결과 함경북도나 양강도에서 무책임한 미공급이 이미 묵인 방치되기 시작했다.


미공급구역을 축소시키는데 성공하지 못하자 그 전선은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남하를 지속하여 1991년 드디어 평양에 입성하였다.


'미공급'이란 전국 근로자들의 로동에 대한 보수(식량과 임금 등)를 미불(지급하지 못함)하여 국가가 인민에게 진 빚을 의미한다. 달리 말하면 사회주의국가 경제윤리의 타락을 의미한다.

 


미공급 사태는 국가윤리의 타락

 

법의 최고 수준에 있는 경제윤리를 일탈한 국가적 상황은 걷잡을수 없는 관료집단의 전면적 부정 부패를 촉진시켰다. 물리적으로는 전력주파수가 허용치 이하로 떨어져도, 철도운행의 도착 지연 현상이 만성화되어도 고칠수 없는, 현상으로 접수 되기 시작했다.


심지어 공화국 창건 이래 처음으로 갓 입대한 인민군 군인들 속에 영양실조자들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군(수)품 보장에 대한 군부의 강한 반발이 일면서 이 기회는 군 총참모부로 하여금 직접적 경제활동 참여를 유발시켰다.

 

이처럼 당과 근로단체, 군부 등 특권기관들의 경제 침해 현상이 극도에 달한 결과 계획경제는 무능력하고 약체화된 부실기구로 전락되였다.

계획위원회와 자재공급위원회, 건설위원회, 인민봉사위원회가 다 유명무실 해졌다. 사회주의국가의 경제주체는 사실상 소멸된 셈이였다. 비개혁적인 경제제도는 현실에 존재하는 모든 경제활동을 위법시하는 경제적 질곡으로 전락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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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런 식으로 가다가는 얼마 지나지 않아 완전히 멎어버리게 될 것이라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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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은 북한으로서는 아마도 마지막의 호화로운 행사로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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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잘 아는 부총리들은 내가 국제비서이고 또 이론전문가로서 융통성이 있어 자신들을 일러바칠 만한 위인이 아니라고 보았던지, 함께 출장을 갈 때면 자주 안타까운 심정을 토로했다.

그들은 은밀한 얘기를 털어놓으면서 북한경제가 이런 식으로 가다가는 얼마 지나지 않아 완전히 멎어버리게 될 것이라고 단언하기까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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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hwangsamo.org/board/thesis/view/275

황장엽  나는 역사의 진리를 보았다.[제110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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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0.1.

 

[ ...... 작은 키는 지난 착취사회의 잔재로 된다 ..........    ]

 

동아일보  1990.2.5.


김일성 구상 키크기운동 적극 전개

"작은 키는 착취사회 잔재"


ㅇ  북한은 청소년들의 왜소화현상을 타개키 위해 키크기운동을 전개하고 있다고   지난달 31일 모스크바 방송이 보도했다.

모스크바 방송은 주평양 타스통신 기자의 보도를 인용, 이 키크기운동은 김일성의 구상에서 비롯됐으며 북한에서는 나라와 민족의 장래와  관련된 문제로 취급되고 있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해서 평양체육대학의 한 관계자는 키크기운동을 위해서는 멀리 뛰기 철봉 등을 적극 보급해야 한다고 지적하고  불완전한 육체적 발전과 작은 키는 지난 착취사회의 잔재로 된다는 점을 강조했다고 이 방송은 전했다.

 

 


        1990


[ ......  농촌지역에서 「허리띠졸라매기운동」 「하루두끼먹기운동」이라는 플래카드를 보았다 ........  ]

 

주민統制(통제)—유화外交(외교)의 內外(내외)「두얼굴」


1991.04.01  동아일보20면


지난해 가을 北韓(북한)을 방문했던 한 在日(재일)동포는 농촌지역에서「허리띠졸라매기운동」「하루두끼먹기운동」이라는 플래카드를 보았다고 전했으며 식량부족에 견디다 못한 군인들이 협동농장을 습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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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韓(북한) 食糧難(식량난) 심각하다


1991.02.11  경향신문6면


北韓(북한) 食糧難(식량난) 심각하다 최근 자료로 본 실태
작년흉작에 생산 12%줄어 쌀·잡곡 1對(대)9로 혼합┉
두끼먹기 운동까지
계단식 경지 洪水(홍수)로 폐허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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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5월5일  "인민대중중심의 우리 식 사회주의는 필승불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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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식 사회주의는 김정일이 1991년 5월5일 당중앙위원회 책임일꾼들에게 행한 "인민대중중심의 우리 식 사회주의는 필승불패이다"라는 담화에서 이론적으로 체계화한 모습으로 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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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태학(가명, 2003년 입국) 씨는 “실지 주민들이 1년이 가도 고기를 먹어보는 것은 힘들다”고 말했습니다. 신 씨는 북한 경제상황이 그나마 나았던 90년대 초반 때도 “명절 때나 고기를 먹어봤다”고 말했습니다.


[인터뷰1.신태학] “그렇게 못 먹는다. 90년대 이때도 지금보다 좀 낫다고 하는 때인데요, 그때도 돼지고기는 따로 못 먹고요, 혹간 가다가 명절에 세대당 한 킬로(그램)씩 줄 때가 있거든요. 우리집 같은 경우에는 식구 4명이니까 한 킬로 가지고 4명이서 쪼개면 몇 그램씩 되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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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12월말, 소련이 무너지고 러시아가 독립하는 대사건이 있었다.  그렇건만 약속한 1992년 1월 말이 오자 정씨는 다시 일본으로 가 하바로프스크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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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창 추운 계절인데도 북한 열차에는 유리가 끼워져 있지 않은 창이 많았다. 일반 객실의 의자는 전부 나무였다. 기찻길 주변에는 사회주의를 옹호하는 구호만 만발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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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


[ ...... 일제시대의 3730.8km ..... 2011년 현재 5298km로 약 1.4배 확대 ..........

 ...... 노선 대부분인  97.1%가 단선구간 ..........    ]

 

[ ..... '푸른군기1호'가  43년이 지난  2004년까지 운행 ........ 
  ...... 일제 때 쓰던 증기기관차가 운행 ..........

  ...... 레일은 마모가 심하고, 침목은 부식되거나 아예 흔적을 찾아볼 수 없는 상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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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도노반도, 열차도, 신호시설도. 극도의 경제난으로 개·보수가 거의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으며, 정비를 한다 하더라도 임시방편의 조잡한 수준에 그치고 있다.


2004년 11월 18일 <로동신문>은 이러한 현실을 자랑스럽게 전하고 있다. 동유럽 국가의 열차 제조 기술을 도입하여 자체의 힘으로 1961년 8월 생산된 '푸른군기1호'가 43년이 지난 2004년까지 운행되고 있다는 내용이다. 일반적으로 생산 이후 15~20년을 운행하고 퇴역하는 남한에 비하면, 두 배 이상의 시간을 아주 곱게(?) 이용하고 있는 셈이다. 아직도 일제 때 쓰던 증기기관차가 운행되고 있는 곳이 있어 일본 철도 마니아들이 이를 보기 위해 방문하기도 한다는 소식은 내 감정을 복잡하게 만든다.


철도의 총연장도 일제시대의 3730.8km에서 60년 이상이 흐른 2011년 현재 5298km로 약 1.4배 확대에 지나지 않았고, 노선 대부분인 97.1%가 단선구간이다. 복선 구간은 전체 노선의 약 3%에 불과하다.


보수 정비도 적시에 이루어지지 못했기 때문에 열차의 수송 효율은 그만큼 기대하기 어렵다. 일부 구간을 제외하고는 시속 40km를 유지하기 힘들 정도이며, 특히 산악지대는 시속 15km도 버거울 정도이다. 그 이상의 속력은 바로 탈선 사고로 이어진다. 보수와 정비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레일은 마모가 심하고, 침목은 부식되거나 아예 흔적을 찾아볼 수 없는 상태이기 때문에 탈선 사고, 추락사고, 접촉사고 등 열차 안전사고가 비일비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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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의선은 원래 복선이었는데, 지금은 단선으로 ......


 ...... 한쪽 노선을 뜯어다가 다른 철도건설에 사용 ........

 ..... 그만큼 이동물량이 많지 않기 때문이라고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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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생각에는 북한 경제 붕괴가 밖으로 드러난 것이 인프라의 붕괴가 아닐까 싶습니다. 즉, 항만이나 철도, 도로, 전기, 수도, 체신 등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이지요.

 

김희상 : 북한을 다녀온 분들 말을 들으면 제6공화국 때 이미 북한체제의 기본 인프라는 거의 망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전해들은 바에 따르면 중국에서 송아지 700마리를 황해도까지 몰고 가는데 그 길이 감히 ‘도로’라고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손광주 : 북한이 만든 도로 일부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철도 등은 일제 때 건설된 것입니다. 특히 철도는 일찍부터 전기철도로 개조했는데, 전기 공급이 뒷받침되지 않다 보니 수송에 문제가 발생하게 됩니다. 즉 수송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으니까 원자재 이동이 불가능해지고, 원자재를 공급받지 못하니 생산 공정이 중단되는 등 경제순환 자체가 어려워지게 된 것이지요. 이런 현상을 감안하면 북한 경제는 대략 1980년대부터 생산-재생산 구조가 붕괴되기 시작한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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란코프 : 소련의 경우도 인프라 문제는 매우 심각한 수준이었습니다. 인프라 붕괴 현상은 단지 북한뿐 아니라 소련과 중국 등 공산주의 국가의 공통된 현상이었지요. 구소련의 교통구조 역시 2차 대전 이전, 즉 공산혁명 이전에 건설된 철도망을 중심으로 이뤄져 있었습니다. 포장도로가 발달하지 못해 자동차도로는 그리 많지 않았고, 개인 전화도 1970년대까지 대도시에서만 사용되었습니다.


 지금의 북한 철도는 일제의 ‘기술역사박물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증기기관차까지 있을 정도니까요. 유럽과 소련의 여행사에서는 특별한 북한 패키지 관광 상품을 판매하고 있는데, 주요 고객은 철도역사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입니다. 북한의 오래된 철도를 보여 주고 그 역사를 설명하는 관광 상품이지요. 인프라 붕괴는 공산주의 국가 모두에 해당하는 문제입니다. 물론 북한이 가장 심한 상황이지만 말입니다.

 

안병직 : 제가 입수한 자료에 의하면 경의선은 원래 복선이었는데, 지금은 단선으로 되었다고 합니다. 물자가 부족하다보니 한쪽 노선을 뜯어다가 다른 철도건설에 사용한 것이지요. 바꾸어 말하면 북한의 인프라가 유지되지 않는 것은 그만큼 이동물량이 많지 않기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동물량이 늘어나면 인프라 정비는 필수적인데, 물동량이 많지 않으니 인프라 역시 퇴보할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이렇게 생각하면 북한 경제는 본래부터 생산이 활발하게 이뤄지지 않았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김영호 : 저는 북한의 정치체제가 갖는 이념적 특성이 상당히 부정적 요인으로 작용했다고 봅니다. 통계자료에 따르면 구소련의 경우 전체 도로 포장길이가 미국의 한 州의 그것에도 미치지 못한다고 합니다. 공산주의 사회는 통제사회이기 때문에 정보, 통신산업 자체가 발전할 수 없습니다. 21세기 정보화의 흐름을 공산주의 사회가 정치이념상 받아들인다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제철소와 같은 굴뚝산업은 어느 정도 수준까지 발전시킬 수 있을지 몰라도 정보화 산업으로의 진행은 통제된 공산주의 사회에서 그 자체가 불가능한 일입니다. 결국 정보화 시대를 이끌어갈 산업발전, 국가발전은 민주주의 국가에서만 가능할 뿐, 전체주의 국가체제로는 새로운 시대에 적응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소련의 붕괴나 북한의 실패 과정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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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겨울호   <시대정신> 

[특집] 대담 : 북한의 해체과정과 붕괴에 대한 대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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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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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마다 1명씩 배정된 안내원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함께 행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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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들은 자본주의를 원하지 않는다면서도 남한 경제에 대해선 부러워하는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실제로 자기들은 미화 50달러면 자식 하나를 결혼시킬 수 있는 돈이라는 말까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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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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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난민 면접자 1,694명 가운데 1992년 이전에 배급이 중단되었다고 응답한 숫자는 14.5%, 1993년 14.4%, 1994년 34.9%, 1995년 30.4%, 1996년 5.8%로 1996년 이후의 누적율은 100%다.


실제 어느 '무산할머니'의 진술에 의하면 자신이 근무하던 광산촌에 식량배급이 정상적으로 배급되지 않은 연도가 1992년부터라고 증언하고 있으며 '하루 두 끼 먹기운동'도 1992년부터 시작되었다.


또 배급망의 비가동으로 식량과 생활필수품 등을 조달하기 위한 장사와 장마당이 본격화된 시점도 1993년과 1994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점도 식량난이 이미 1990년부터 시작되었다는 점을 간접적으로 입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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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은 「식량 위기」라는 용어가 북한에서 공식적으로 통용되지 않고 있던 시기였다. 하지만 1992년 초부터 평양시를 제외한 북한의 거의 모든 지역에서 배급소들은 문을 닫았다. 함흥 경공업대학을 비롯한 거의 모든 대학에서 대학생들을 칡뿌리 채취에 동원했다. 대학 기숙사에서는 옥수수 가루에 칡뿌리 가루를 섞은 국수를 공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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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쌀 혼합비율이  89년 들어 10%로 낮아지고  한 두달 밀리더니만  90년엔 석달씩 지체 .........


 ...... .93년 12월엔 김일성이가 직접 텔레비전에 나와 하루 두끼만 먹고 죽을 쑤어먹자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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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님이 탈출했을 때 나는 청진에 있었는 데 이미 이 때 일반인들에 대한 배급량이 줄고 군인들마저 잘 먹지 못해 영양실조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그런대로 곡물배급은 되는데 부식이 형편 없었어요.훈련도 심하고 중노동을 하는데 육류섭취를 제대로 못하니 그렇게 될 수 밖에 없지요』

『내가 탈출할 당시에도 15일치 배급에서 이틀분이 공제되기 시작했었지.하루 7백g이 정량인 데 5백80g밖에 안나왔거든.그나마 배급시기가 하루 이틀 밀리더니 보름씩 늦어지더라구』

 

 『그 때만해도 괜찮은 편이었어요.종전까지 30%였던 쌀 혼합비율이 89년 들어 10%로 낮아지고 한 두달 밀리더니만 90년엔 석달씩 지체됐고 93년 2월엔 양강도와 강원도 등지에서는 배급이 아예 중단되는 때도 있었습니다』


작은 만철씨는 북한물정을 잘 아는 사회안전부 대위 출신답게 식량배급제의 문제점까지 짚어나간다.


『동해안 쪽에는 냉해로 흉작이 들어 실제 1개 협동농장의 생산량이 3∼4t에 불과한데도 이곳에 나와있는 3대혁명소조원들이 어떻게 보고한 줄 압니까.불켜서(늘려서) 5∼6t 된다고 보고하는데,탈곡하고 보관하고 운반하면서 이놈저놈이 빼가는 바람에 1∼2t 밖에 안남게 되지요.그런데 계획에는 5∼6t으로 잡아놓고 배급하니 어떻게 되겠어요.배급체계가 마비될 수 밖에』


이 때쯤 점심식사를 하는데 큰 만철씨가 밥 한그릇을 추가 주문한다.

『북한에서는 쌀밥을 곡상(고봉)으로 주면 제일 좋아하지.나는 여기서도 밥을 많이 주면 아직도 기분이 좋아.만철씨는 어때?』

『나는 된장국 같은 것에 쌀밥 한 그릇이면 족해요.북한에선 얼마나 먹고 싶은 것이었습니까.북한의 식량난은 정말 최악의 상태입니다.허리띠 졸라매기,한끼 절약운동이 공공연하게 벌어지고 있어요.93년 12월엔 김일성이가 직접 텔레비전에 나와 하루 두끼만 먹고 죽을 쑤어먹자고 얘기하기도 했습니다.직장에서는 쌀을 구하러 가겠다고 하면 아무나 허가가 납니다.못먹으면 일 못하니까 쌀 사오라고 여행허가증을 떼줍니다』

『그래요,내가 있었을 때는 어림 없었지』


○북 군인들 영양실조


『다른 것도 변한게 많습니다.청소년들의 행태를 보면 머리는 길게 기르고 미니 스커트가 등장했어요.남한노래를 많이 부르고 디스코 춤도 춥니다』『내가 있을 때는 미니 스커트는 구경조차 못했는데…』 7년간의 시차이지만 세대차를 느낀다고 할 정도로 북한의 사회풍조가 빠른 속도로 바뀌고 있다는 사실에 김씨는 계속 놀란다.


『이런 것들은 김정일의 승인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입니다.김정일이 인민들을 다독거리기 위해 이만큼 개방한 것으로 보아야 하지요.지금 북한 주민들의 견해는 우리가 중국처럼 개방해야 잘 살 수 있고 식량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려면 땅의 사적소유제가 이뤄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씨는 주민들이 개방에 눈뜨기 시작한 것은 남한방송을 많이 듣기 때문이라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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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4. 김일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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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량 배급 안 준다는 것은 낭설

 

-이제 북한 내부 문제로 질문의 방향을 돌리고자 합니다. 현재 중국 연변 쪽에 가보면 ‘북의 식량 사정이 말이 아니다’ ‘평양만 제외하고 나머지 주민들은 쌀 한 톨 배급 못 받았다’ 심지어 ‘누구는 굶주려서 자살했다’ 하는 얘기들을 많이 들을 수 있는데 식량난은 실제로 어느 정도입니까.

 

“식량난이라니오. 우리는 기본적으로 먹는 문제는 해결했습니다. 일하는 사람, 은퇴한 사람 등 처지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배급은 정확하게 되고 있는 것으로 압니다.

과거 우리 못사는 조선 사람들의 꿈이 이밥에 고깃국에 기와집에서 비단옷 입고 사는 것 아니었습니까. 그 꿈을 이루려고 계속 노력해왔고 상당히 좋아졌습니다.


 배급이 없다는 것은 낭설입니다. 혹시 의심스러우면 문 선생이 여행하다 사전에 예고하지 말고 아무 시골집이나 식사시간에 문을 두드려 물어보시오. 또 시골길 걷다가 아무 행인에게나 물어보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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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4

 

[ ...... 고등어는 25년만에, 김은 30년만에 먹어본다 .........    ]


[ ...... "배고픔과 처형이 북한체제를 유지하는 통치의 수단이 되고 있다" ...........   ]

 

30년전 월북한 서울대생 / 탈출 5일만에 잡히자 자살 (현장 북한탈출 1)


1994.04.09

 

*지난 2월 용정서 "돌아가지 않겠다" 혀깨물어/ "굶주림-처형만이 통치수단/ 남조선가서 증언하려 도망" 한국 기업인집 은신

 

서울대 문리대 중문과 2학년에 재학 중 월북했던 북한 탈출자 박영세씨(51)는 탈출 5일만에 한줌의 재가 되어 북한으로 다시 돌아갔다. 30년만에 탈출해 북한의 폭압과 굶주림을 같은 민족에게 고발하겠다는 그의 꿈은 끝내 중국의 한 어둡고 음산한 수용소안에서 좌절되고 만 것이다.

 

그가 연변 조선족자치주 주도인 연길에서 20㎞쯤 떨어진 용정앞길에 나타난 것은 지난 2월16일 새벽. 북한의 변경지역인 함북 회령에 살던 박씨는 이틀전인 2월14일 아침 부인이 직장에 출근한 뒤 집을 떠나 두만강을 건너 낮에는 산속에 숨고 밤에만 걸어 이곳까지 온 것이다.


그는 조선족 택시운전사에게 갖고 있던 낡은 구소련제 시계 두개중 한개를 주고 "남조선사람에게 데려가 달라"고 부탁했다. 여름옷 겹겹 껴입어 연길시내에 사는 한 기업인집에 도착한 그는 월북하기 전 어머니와 함께 서울대교복을 입고 찍은 낡은 사진과 북한공민증을 내보이며 도움을 요청했다. 그에게 도움을 준 기업인은 "집안으로 들어서는 그는 금방 쓰러질 것 같았다"고 말했다. 겨울철인데도 찌들고 냄새나는 여름옷을 겹겹이 껴입고 있었다. 그는 급히 차려준 두그릇의 밥을 정신 없이 먹으며 고등어는 25년만에, 김은 30년만에 먹어본다고 했다.

 

지식인의 한사람으로 남한에 가서 세상에 북한과 같은 나라도 있다는 것을 알리고 싶어 아내와 1남2녀를 두고 도망했다는게 그가 털어놓은 탈출동기다. 그는 "배고픔과 처형이 북한체제를 유지하는 통치의 수단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한다. 민자당 김덕룡의원의 경복고, 서울대 문리대 2년 후배라는 그는 "김선배의 학생회장 선거운동을 도와준 기억이 난다"며 "동창들 이름을 다 잊어버렸다"고 했다. 그는 그를 도와준 기업인 가족들과 탈출성공을 기념해 기념사진도 찍었다. 월북아버지 찾아 입북 그러나 18일 새벽 기업인집에서 50m쯤 떨어진 곳에 숨어있다 중국공안경찰에 체포됐다. 그 기업인도 한때 연행됐다가 풀려났다.

 

그는 용정 모화산근방의 용정간수소(미결수 수용소)에 연행된후 조사를 받던중 북한으로의 송환을 거부하고 혀를 깨물어 자살했다. 그의 사체는 화장돼 북한에 송환됐다.

 

64년5월 대학 2학년때 월북한 아버지를 찾아 어머니와 함께 일본을 거쳐 북한으로 들어간 그는 곧바로 김일성을 면담했고 김일성대학 영문학부에 편입해 학교를 다닐정도로 환대를 받았다고 한다. 수리조합의 말단직에서 근무하던 그의 부친은 의거 입북 한 아들 덕에 중앙부서로 리를 옮겼다.

박씨의 평탄했던 북한생활은 72년 그의 출신성분이 문제가 되어 평양의 중앙부서에서 함북의 남포탄광으로 발령을 받으면서 끝이 났다. 그때부터 막장의 탄부나 서무과직원등 광원신세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의 아버지는 74년에, 어머니는 75년에 사망했다.


 북한 탈출자는 91년부터 눈에 띄게 증가해 한-중 국교가 수립된 92년과 93년에는 매년 수백명단위로 늘어났다. 북경의 한국대사관을 찾아가 공식적으로 망명을 신청한 북한 탈출자는 현재 1백여명. 동북 3성의 조선족과 한국기업인들은 전체 탈출규모를 1천명정도로 추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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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ews.chosun.com/svc/content_view/content_view.html?contid=199404097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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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한군의 입대절차에 따르면 만14세가 되면 징집대상자로 등록된 후 16세때 시군 인민병원과 도 인민병원에서 2차례에 걸쳐 징병신체검사를 받도록 되어 있으며, 신체검사 합격기준은 키 150㎝, 체중 48㎏, 시력 0.8이었으나 식량난으로 청소년들의 체격이 왜소화되자 1994년 8월부터 키 148㎝, 체중 43㎏, 시력 0.4로 하향조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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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집단농장 때에 1.5t 내지 2t 정도나던 옥수수 밭이 개인농화 했을 때 6t 내지 7t 정도였다. 약 500%의 증수인것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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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왜 북한에서는 식량난으로 인구 일곱 명 당 한 명 꼴로 굶어죽은 대 참사가 벌어졌는가?


식량난의 많은 원인 중에서 근본원인은 공산식 집단농이다. 자유세계에서는 집단농의 폐해가 얼마나 심각한지 잘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따라서 북한에 비료를 보내주고 슈퍼종자를 보내주면 식량난이 해결되지 않겠는가 하는 환상을 가지는 것이다.

북한에 살던 필자 역시 과학원 연구소의 책상머리에서는 집단농의 심각한 폐해를 실감 있게 느낄 수 없었다. 그것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은 현장체험에서였다.

 

직접 연구한 확신 있는 종자를 가지고 농민들을 직접 도와주어야겠다는 충성심으로 집단농장(협동농장이라고 함)에 6년간 나가 보았다. 역시 체험이 중요했다. 식량난의 근본원인은 아무리 일해도 내 것이 될 수 없는 공산식 시스템이었다.

그 폐해가 얼마인지는 말이 필요 없이 과학자로서 시험을 통해 검증해보았다. 농민 한 사람이 다루는 옥수수밭 1정보(3000평)를 단위로 비교를 해보니 집단농장 때에 1.5t 내지 2t 정도나던 옥수수 밭이 개인농화 했을 때 6t 내지 7t 정도였다. 약 500%의 증수인것이다.

 

새 품종을 만들려면 10여 년 동안 연구하여 기존 품종보다 2% 내지 3%만 증수해도 대단한 발견으로 ‘발명증’을 받는다. 따라서 500%의 증수 효과를 본다면 새 품종연구가 더 필요 없는 것이다.

이 사실을‘인민에게 이밥에 고기국 먹이시려고 한평생 바치시는 어버이수령님’께 중앙당 제1호 편지로 보고하였다. 그러나 이 제의는 반동사상으로서 필자는 탈북할 수밖에 없었다.

 

북한식량난의 근본적 해결책은 자명하다. 그것은 개인농화를 실시한 등소평 식 농업개혁이다. 이러한 근본적 해결책이 없는 그 어떤 대북지원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일뿐이다. 더욱 나쁜 것은 그것이 권력유지를 위해 개인농화를 하지 않는 악의 세력을 도와주는 결과가 된다는 것이다.

 

이미 북한주민들은 10년간 배급 없이 자체적으로 살아가고 있다. 외부세계가 그토록 바라고 있는 시장경제를 하고 있는 것이다. 국가배급이 끊긴 상황에서 살아 있는 비결은 바로 ‘주민경제(지하경제)’ 때문이다. 구체적으로는 ‘개인 뙈기밭 농사’와 ‘개인장사’가 그것이다.


90년대 중반 이후의 북한식량난의 긍정적 결과가 있다면 통행의 자유를 얻게 되었고 한편 자체 생산 활동 즉 ‘주민경제’를 확고히 형성시킨 것이다. 김정일 정권이 어쩔 수 없이 변화하지 않으면 안 되도록 결정적 영향을 줄 수 있는 것은‘주민경제’의 활성화이다. 이와 반대로 만약 그동안 끊겼던 식량배급이 시작되도록 대북지원이 이뤄진다면 이것은 곧 ‘주민경제’의 말살을 의미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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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futurekorea.co.kr/news/articleView.html?idxno=5275

김정일정권을 해부한다. ⑧ 북한식량난의 근본원인

미래한국l승인2004.0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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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전에 논두렁은 경지면적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콩 심어 먹어도 된다. 이렇게 하니까 논두렁 콩들이 얼마나 잘됐습니까. 사람의 키를 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어떤 집에서는 1년 내내 비지를 해 먹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서관희 농업비서가 잘했다고 그랬는데 그런데 그것도 그만두라, 이렇게 했습니다.


그것도 자본주의 요소라고 해서 폐지시켰습니다. 또 사회보장 받는 사람들이 강에 나가서 물고기 잡고, 해변 가에 가서 조개 갖다 팔고 그랬는데... (나는 그런 시간이 없어서 잘 관심을 못 뒀지만) 우리 집 사람이 얘기하는 것 들어보면 이제는 시장에 없는 것이 없다, 아주 살맛 나게 됐다, 그랬는데 그것도 자본주의다 해서 다 없애지 않았습니까.


나는 계속 주장했었습니다. 도급제 좀 실시합시다. 그러면 김정일은“그런말 하지 말어” 이런 인간이었습니다. 그게 무슨 통이 큰 행동입니까. 그보다 더 통이 조그만 놈이 세상에 어디 있겠습니까. 천하 쩨쩨한 인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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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글자 한자가 대문짝만한 구호가 나붙었는데 그것은 < 농장포전은 나의 포전이다 > 라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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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발전의 동력은 사람들의 사적 이해관계라고 하여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일찍이 저 유명한 아담 스미스가 지적한 바와 같이 사람들은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스스로 생산하고 교환하고 소비한다. 그러나 사회주의는 사람들의 사적 이해관계를 부정하고 공적인 이해관계를 내세운다.

공적 이해관계는 외상과도 같이 믿기 어려울 뿐더러 많은 경우에는 집권자의 이해관계에 그치고 사막의 강물처럼 아래에까지는 미치지 못한다. 결국 사회주의경제는 사람들의 이해관계를 떠난 무동력 경제가 되고 만다.

 

자본주의 경제가 사람들의 이해관계라는 동력에 의해 자동적으로 굴러가는 자동차와 같다면 사회주의 경제는 권력이라는 힘에 의하여 피동적으로 끌려가는 달구지와 같다. 자동차는 빠르고 달구지는 느리거니 한반도에서 남북한 경제의 현격한 차이는 이것을 잘 보여주는 예가 된다.

 

최근년간(1996년) 북한의 포전(圃田)들에 글자 한자가 대문짝만한 구호가 나붙었는데 그것은 <농장포전은 나의 포전이다>라는 것이다.

어째서 공유제를 하면서도 공유제를 의미하는 <우리의 포전>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고 하지도 않는 사유제를 의미하는 <나의 포전>이라는 문구를 썼을까? 북한 당국자들도 이제는 집단주의가 개인주의보다는 농민들에게 먹혀 들어가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일 것이다.

 

농업집단화로 농업경리와 농민의 이해관계를 분리시켜 놓고는 일이 잘되지 않으니 자본주의 사전 속의 말을 훔쳐다가 농업경리와 농민의 이해관계를 연결시키려는 옅은 수를 쓴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빈 말공부가 아니라 제도적인 조치가 필요한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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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7  [ ..... 나서 자라 처음으로 귤, 수박, 참외, 땅콩,과자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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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우리는 처음으로 중국 땅에서 훈춘 장마당에 갔습니다.
 


장마당에는 없는 것이 없었고 처음 보는 과일과 먹을 음식으로 굉장했습니다. 저는 감탄이 절로 나왔습니다. <아, 이것이 사람 사는 세상이구나.…> 그런데 갑자기 저의 12살 막내아들이 <뱀이다.> 하고 놀라서 소리치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달려 가보니 누렇고 거무스레한 뱀처럼 둘둘 말려있는 순대를 보고서 아들이 지기도 모르는 사이 비명을 지른 것입니다 저는 아이들을 데리고 그 자리를 피했습니다.

김 아바이는 귤, 참치, 수박, 땅콩, 과자, 돼지고기 등 갖가지 식료품을 샀습니다.

 

우리는 마을버스를 타고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아이들은 나서 자라 처음으로 귤, 수박, 참외, 땅콩,과자를 맛있게 먹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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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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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땅에 들어서니 보고, 듣는 것 모두가 놀랄 정도로 새 세상이었습니다. 조선이 제일이라고 생각했는데 놀라운 중국의 현실과 생활을 체험하게 되면서 우리가 김정일에게 너무도 속고 살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중국조선족 마을엔 어디를 가나 교회가 세워져 있었고 교회에서는 우리의 생명을 보호하고 생활을 보장해주었습니다. 교회의 집사인 김아바이는 우리들을 자기 집에서 며칠 동안이나 보호해주었습니다.


그때 김 집사의 집 마당에는 볏단이 하늘높이 쌓여 있었고 강냉이도 마대자루에 담겨 있었습니다. 또 탈곡하지 않은 곡식도 마당 한켠에 수북이 쌓여 있었습니다. 새 자전거도 자물쇠를 잠그지 않은 채 마당에 그냥 내놓고 있었습니다.


“낟알을 이렇게 마당에 방치하면 도적이 훔쳐가지 않습니까?” 그러자 김 집사는 “어느 집이나 다 이만큼씩은 있소. 도적질해가라고 해도 안 가져가. 수매시켜야겠는데 창고가 찼다고 해서 걱정이야. 중국이 개혁개방하고 농민들에게 땅을 도급으로 가족단위로 나누어주니까 이렇게 낟알이 쌓여서 처치곤 난이야. 빨리 팔아야겠는데...”

 

저는 또 물었습니다. “지금의 개인농사가 무엇이 좋고 집단농사는 무엇이 좋았습니까?”


그러자 김아바이는 “중국에서는 집단농장을 인민공사라고 하는데 좋은 것은 하나도 없지. 일나오라, 이리가라, 저리가라, 회의 많고 비판도 많고 쌀도 배급으로 주는 지긋지긋한 게 무엇이 좋겠나. 한마디로 수용소이고 감옥이지.

개인농사가 좋은 점은 노력한 것만큼 또 땀 흘린 것만큼 대가와 보상이 차례지니 좋고 제가 알아서 일하고 또 쉬는 자유가 있어 좋고 자기의 땅, 소, 자기의 낟알이 있으니 든든하거든. 한해 농사로 4~5년은 먹을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가? 걱정이라면 낟알이 팔리지 않는 거지. 이 낟알을 빨리 팔아야겠는데 나도 조선에 친척이 있는데 그들이 와서 가져가라는데 오기가 너무 힘든 모양이야.”라고 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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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깃덩어리 기름덩어리들이 뒤굴뒤굴 굴러다니는데  개가 안 먹더라고요 ........     ]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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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소 왔소?‘하고 물어보시더라고요.

 ”예“하고 얘기하는데 목이 꽉~ 매었어요. 조선말 하는 사람을 만났다는 그런 마음 또는 이제는 살았다 그런 안도감과...하여튼 만감이 교차하며 눈물이 확 나더라고요. 집으로 들어오라 그랬어요. 할머니께서 목욕물 덥혀줘서 목욕하고, 한잠 푹 잤어요.

 

자고 나니까 할머니가 밥을 했는데, 그때 잊혀지지 않는 기억이 있습니다. 달걀을 아마 그 할머니가 8알인가 10알인가 삶았어요. 제 마음에는 몇 년 동안 달걀을 못 먹어 봤기 때문에 그걸 다 먹고 싶은 거예요. 그런데 하나밖에 못 먹었어요.

 그때 하나 먹고 수저를 놓으면서 상당히 아쉬웠어요. 하나 더 먹고파. 그런데 너무 부끄러웠습니다. ’못 먹는 곳에서 와서 저렇게 게걸스럽게 여자가 먹는구나!‘ 이런걸 보여주기가 너무 부끄러워서 못 먹고 외소했던 점 그것이 아직도 내 가슴에 박혀있습니다.

 

그 때 또 하나의 충격은 그 집에 들어갈 때 토방에 철 그릇에 밥덩이하고 고깃덩어리가 있었어요. 그때 그걸 보면서 ‘아! 얼마나 음식이 많이 남았으면’ 변할까봐 밖에 내놓은 줄 알았거든요. 하루, 이틀 그 집에서 자며 알아보니까 그것이 개밥이더라고요. 개를 줄려고 밖에 내놓은 것이었어요. 고깃덩어리 기름덩어리들이 뒤굴뒤굴 굴러다니는데 개가 안 먹더라고요.

 

그 때 그런 모습을 보면서 저런 밥을 북한에서는 누가 먹을까? 아마 당 비서나 먹겠지? 그런 생각을 했었어요. 어쩌면 당 비서도 하루 세끼는 먹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당 비서는 중국의 개보다도 못하다는 생각을 했었어요.


그 때 너무 충격을 받았기 때문에 후에 그 집 사람들이 얘기를 하는데 제가 한 열흘 동안 아무 말도 안하드레요. 하루세끼 먹고 자고 그 다음에 한국 라디오만 듣고 계속 그랬더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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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 온 후 혹시 붙들려 북한으로 다시 끌려가지 않기 위해 용정시 주변 산골마을 농가에서 일을 도와주며 살았다.


그 집에서는 사냥개 네 마리가 있었다. 그 집에 처음 도착 했을때 개가 쌀밥 누릉지를 먹고 생선고기 국물을 먹는 것을 보고 가족 생각하며 많이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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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 김정일은 매년 이밥에 고깃국을 먹게 해주겠다고 공약을 하곤 했는데, 그 약속도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파키스탄이라는 나라는 잘사는 나라도 아닌데 개가 쌀밥을 먹고 다니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개만도 못한 존재인가라는 생각을 했다고 합니다. ......


이 외교관은 북한에 돌아가서 파키스탄에서 개가 쌀밥을 먹는다는 이야기를 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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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8  [ .... '감자는 곧 쌀이고, 쌀은 곧 사회주의'라는 새 가르침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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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일 장군님께서 '감자는 곧 쌀이고, 쌀은 곧 사회주의'라는 새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순간 장내가 술렁였다. "김일성 수령님의 '이밥(흰쌀밥)에 고깃국' 구상과 어긋난다"는 것이었다. 강사는 이런 반응을 짐작했다는 듯 준비된 말을 꺼냈다.


 "장군님께서 '감자는 암 방지에 대단히 효과적이다. 서양사람들도 감자를 주식으로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청중 속에서 "배고파 죽어가는 판에 웬 암 걱정이냐" "언제는 서양 쪽은 쳐다보지도 말라더니…"라는 반응이 나왔다고 류경원 기자는 전했다. 북 주민은 '감자가 쌀'이라는 구호가 나온 배경을 빤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코드 안 맞는 이명박 정권으로부터 식량지원을 받기 싫다는 '반리명박 깜빠니야(캠페인)' 차원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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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자가 이밥보다 건강에 좋다'는 장군님이 고혈압, 당뇨, 고지혈증같이 '너무 잘 먹어서 생기는 병'을 앓고 있다는 사실 역시 알 만한 주민들은 다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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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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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초부터 북한의 김정일이 쌀밥타령이다. 1월 9일자 노동신문은 김정일이 “수령님은 인민들이 흰 쌀밥에 고깃국을 먹으며 비단옷을 입고 기와집에서 살게 해야 한다고 했는데 우리는 이 유훈을 관철하지 못하고 있다”고 말한 것으로 보도했다. 김정일은 또 “아직 우리 인민들이 강냉이밥을 먹고 있는 것이 제일 가슴 아프다는 말을 했다”고 지난 1일 노동신문이 전했다.

 

김일성의 ‘이밥에 고깃국’ 얘기는 지금으로부터 60년도 더 이전에 나온 말이다. 그는 해방 직후 평양에서 가진 첫 군중대회에서 “공산주의란 이밥(쌀밥)에 기와집을 지어주는 것”이라고 외쳤다. 1958년 1월 경공업 부문 열성자회의에서는 “조선의 농민들은 기와집에서 이밥에 고깃국을 먹으면 부자라고 했다”며 “이는 우리 농촌에서 머지않은 앞날에 실현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다 1962년 1월 1일 신년사에서 김일성은 “이밥에 고깃국을 먹고 비단옷을 입으며 고래 등 같은 기와집에서 살게 해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그 약속은 60여 년이 지난 오늘까지 대를 이어 지켜지지 않고 있다.


지켜지지 않은 것이 아니라 체제와 제도상 지켜질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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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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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은 이 같은 풍조를 막기 위해 국경경비를 강화하는 한편, 중국에서 강제 송환된 탈북자들을 강연회에 내보내 '중국에서 인신매매단에 걸리면 노예보다 못한 생활을 하게 된다'고 선전하고 있으나, 북한 주민들이 이를 믿지 않고 있다고 대북사업가들은 말했다.


북한의 무산 혜산 회령 등지를 드나드는 한 사업가는 "북한의 선전에 대해 주민들은 "노예로 팔려가도 밥은 먹지 않겠느냐"며 "중국이 그렇게 나쁜 곳이면 그 많은 탈북자들이 왜 돌아오지 않느냐"고 반문한다고 전했다.


 주민들은 또 '중국에선 강아지도 이밥(흰 쌀밥) 먹는다더라'며, '이밥에 소고기국을 먹이라는 김일성 수령의 유훈을 못 지켰다'는 김정일의 말을 조롱하고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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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개성을 관광하고 온 한 일본인이 말했다.

"개성시내에선 집에서 연기가 올라가는 것을 보지 못했다. 한 늙은이가 자전거에 나무토막 하나를 소중히 싣고 가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식당에도 온기가 없었고 밥도 식어 있었다. 국물만 따뜻했다. 개성에서 溫氣가 있는 곳은 한국에서 올라간 관광버스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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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자들이 한국에 와서 놀라는 것이 있습니다. 탈북자들이 일정한 적응교육을 받고 집을 얻어서 하룻밤을 묵으면 그 다음날 아침에는 반드시 초인종을 누르는 사람이 나타납니다. 문을 열고 나가보면 어김없이 신문을 구독하라는 권유를 하기 위해서 찾아온 사람입니다. 석 달에서 길게는 일 년까지 공짜로 신문을 넣어주는 일도 있습니다.


이 때 탈북자들은 놀란다고 합니다. 신문을 공짜로 넣어주는 것도 놀라운 일이지만, 한국에서는 집집마다 신문을 한두 개씩 본다는 것이 더 놀랍고, 그 신문이 30페이지, 40페이지, 많을 때에는 60페이지까지 두껍게 발간되는 것을 보고 더 놀란다고 합니다. 잘 아시겠지만 북한에서는 당 간부만 신문을 보고 일반 사람들은 신문을 볼 수 없고 아침에 직장에 나가면 당 간부가 그날 읽은 노동신문으로 교육을 하곤 합니다.

 

아파트에 들어간 탈북자들은 또 주차장에 승용차가 많은 데 놀란다고 합니다. 한 가구에 평균 2대의 승용차를 굴리기 때문에 아파트마다 주차장이 모자라서 야단입니다. 북한에는 아파트에 아예 주차공간이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탈북자들은 돈을 벌면 맨 먼저 승용차를 사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면 “나는 북한의 부총리급 이상이다”라고 자랑을 하곤 합니다. 북한에서는 아마 사적으로 승용차를 가질 수 있는 사람은 부총리급 이상인 모양입니다.


북한은 정보, 사람, 돈의 이동을 통제하는 사회입니다. 움직임이 거의 없는 사회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한국은 반대로 움직임이 너무 강해서 사고가 자주 일어나고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KTX 고속전철이라는 것이 3년 전부터 개통되었습니다. 이 기차를 타면 서울에서 대전까지는 50분, 서울에서 대구까지는 1시간 40분밖에 걸리지 않습니다. 차를 타고 잠을 자다가는 대구에서 내려야 할 사람이 부산까지 갈 위험이 있습니다. 그래서 마음 놓고 잠도 제대로 잘 수 없을 정도로 빠릅니다.


북한에서 만약 평양에서 기차를 타고 청진으로 가려면 일주일 쯤 걸리지 않습니까? 기차가 가다가 서다가 고장나기도 하고, 또 다른 기차로 갈아타야 하는 줄 알고 있습니다.


최근 아일랜드 공영방송 기자가 북한 취재를 해서 보도를 했는데, 이 기자도 북한에서 가장 놀라운 것은 많은 사람들이 걸어다니고 있고 보따리를 들고 다니고 또는 짐을 지고 다니는 모습을 보고 이상하게 생각했다고 합니다. 특히 군인들도 차를 타지 않고 걸어다니면서 지나가는 차를 세워서 같이 타고 가는 것을 보고 고개를 갸우뚱했다는 보도가 있었습니다.


움직임이 없는 사회는 죽은 사회입니다. 자유라는 것은 본질적으로 움직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것이 자유입니다. 미국여행을 하고 온 탈북자들은 김정일도 갈 수 없는 미국에 다녀왔다고 자랑을 합니다. 노예생활을 하던 북한 주민이 자유를 얻으면 그 순간부터 그는 김정일보다 더 높아지고 더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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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키스탄에서 북한 대사관에 근무했던 한 외교관이 한국으로 탈북한 적이 있습니다만, 이 사람을 만났더니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파키스탄에서는 개를 놓아 키운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아무 집에서나 밥을 준다는 것입니다. 하얀 쌀밥을 양푼에 담아서 밖에 내어놓으면 지나가는 개가 먹고 가곤 한다는 것입니다.


1990년대 같으면 북한에서는 수백만 명이 굶어 죽어가고 있을 때인데, 이 북한 외교관은 파키스탄의 개가 쌀밥을 먹는 것을 보고 기분이 이상해졌다고 합니다. 김일성, 김정일은 매년 이밥에 고깃국을 먹게 해주겠다고 공약을 하곤 했는데, 그 약속도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파키스탄이라는 나라는 잘사는 나라도 아닌데 개가 쌀밥을 먹고 다니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개만도 못한 존재인가라는 생각을 했다고 합니다.


더 희극적인 것은 이 외교관은 북한에 돌아가서 파키스탄에서 개가 쌀밥을 먹는다는 이야기를 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그런 이야기를 하면 불평분자로 몰려서 수용소로 사라질까 겁이 났기 때문이겠죠. 파키스탄의 개는 쌀밥을 먹는다고 말할 자유조차 없는 북한에 가서 살겠다는 의리가 있는 친북좌익 세력들은 또 한국에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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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미국이 김정일이를 그냥 두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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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 모 국가에서 있었던 일이다. 이 국가를 방문한 북한의 한 엘리트인사는 해외교포들을 만나 대화하는 과정에서 불쑥 "왜 미국이 김정일이를 그냥 두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고 이 자리에 있던 해외교포가 전했다.


이 인사는 "외국이긴 하지만 그런 얘기를 하다 단속이라도 당하면 어쩌려고 그러느냐"고 다른 참석자들이 주의를 주자 "조선에서도 우리끼리 모이면 김정일 욕도 하고 다들 이런 얘기들을 한다. 김일성 때는 그래도 먹고는 살았는데, 지금은 당이 먹는 문제도 해결해주지 못하니까 인심도 각박해지고 당을 욕한다"고 태연스럽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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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정일 한 놈만 죽으면 모두가 행복해진다”는 말이 북한 전역에서 회자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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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파의 늪’은 한번 빠지면 좀처럼 헤어나오기 힘들다. 좌파 정책은 중산층을 몰락시켜 빈곤층으로 내몬다. 그렇게 생겨난 빈곤층은 ‘평등한 세상’이라는 좌파 구호에 솔깃해 한다. 좌파정책은 빈부격차를 확대하고, 확대된 빈부격차는 다시 좌파 정권의 자양분이 된다. 그래서 좌파는 계속 정권을 재창출하지만 나라는 골병이 든다. 남미(南美) 여러 나라에서 되풀이 돼 온 악순환 구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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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건국한 중국과 1947년 독립한 인도는 처음엔 사회주의 노선을 선택했다. 그 길은 빈곤에서 빈곤으로 이어지는 미로였다.

중국은 1989년부터 시장 시스템을 도입했다. 인도는 1991년에 자유주의 개혁에 시동을 걸었다. 지금 중국과 인도는 각각 10%, 8%의 고속성장을 하며 세계 경제지도를 다시 그리고 있다.

그러나 두 나라가 좌파의 미몽(迷夢)에서 깨어나 ‘우향우(右向右)’를 하기까지는 40년의 세월이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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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9.9. [ .... 자유시장에 대한 신뢰가 가장 높은 나라는 중국(74%)이었으며 .......

              .... 미국 역시 71%로 인도(70%)와 함께 자유시장을 선호하는 것으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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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메릴랜드대 국제정책태도프로그램(PIPA) 연구팀과 캐나다의 글로버스캔이 최근 한국과 미국 등 세계 20개국 시민을 상대로 금융위기 1년 여론조사를 실시한 결과 응답자의 61%가 ‘자유기업 시스템과 자유시장경제’가 미래의 토대가 되어야 한다는 점에 동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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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설적으로 자유시장에 대한 신뢰가 가장 높은 나라는 중국(74%)이었으며 필리핀(73%)이 뒤를 이었다. 금융위기의 단초를 제공한 미국 역시 71%로 인도(70%)와 함께 자유시장을 선호하는 것으로 분석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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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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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쏘련 사람가운데서 사회주의로 돌아가자는 사람은 없습니다 ......  ]


 [.... 70년대 말부터 사회주의, 공산주의를 믿는 사람들이 거의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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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 경험을 보면, 사회주의가 무너진 후에 생활이 많이 좋아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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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본주의 민주주의에로의 과도과정, 사회주의 이행과정은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닙니다.

(개혁개방이후)사회주의시대보다 더 잘 사는 계층이 생겼을 뿐 아니라. 더 어렵게 사는 계층도 생겼습니다. 특히 고령층은 사회주의가 무너졌을 때부터, 약 5년 사이에 제일 어려웠습니다. 98년까지. 그 후에는 많이 좋아졌습니다.

 

그래도 쏘련 사람가운데서 사회주의로 돌아가자는 사람은 없습니다. 분위기는 북한의 고난의 행군과 비슷했습니다. 물론 물질적으로는 북한 보다 많이 낳았습니다. 굶어죽은 사람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90년대 말에 들어와서 부터는 많이 안정되었습니다.


지금 구 쏘련에서 옛날 사회주의 체제로 돌아가고자 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사회주의체제의 복구를 주장하는 정당은 있습니다. 러시아 공산당을 비롯한 정당이 바로 그것입니다. 하지만 선거 때 지지율은 10프로에 불과합니다. 바꾸어 말하면 90프로 사람들은 사회주의 복구를 원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지금 러시아 푸틴대통령은 얼마 전에 “쏘련에 대해서 유감스럽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쏘련시대로 돌아가고 싶은 사람은 진짜 머리가 없는 사람이다”고 말했습니다.

 

이 세상에 지상낙원은 북한의 선전 체제 속에만 있는 것입니다. 90년과 비교해 보면 개인 승용차 숫자는 거의 5배로 늘었습니다. 또한 지금 모스크바를 비롯한 대 도시들에서 대규모주택건설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정치의 자유와 경제가 많이 좋아 졌습니다 . 시장에 가면 고양이 뿔 내놓고 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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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을 무너지게한 동력  [란코프의 소련이야기 제4회]  
 

 
소련과 북한은 큰 차이가 있습니다. 북한에서는 국가가 사회주의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있지만 사람들은 사실상 15년 전부터 아마 90년대 초부터 자본주의 경제 장마당을 중심으로 하는 시장경제에 빠졌습니다.

 

잘 아시는 바와 같이 북한에서 탈북, 장사하지 않은 사람들은 굶어죽었습니다. 사실상 북한에서 장사를 하지 않으면 살 수 없습니다. 소련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소련은 대 부분 사람들이 70년대 말 아마 80년대 말까지 장사를 안했습니다.


옛날 북한처럼 장사를 수치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이렇게 생각하지 않은 사람들도 있었는데 대부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소련의 변화는 위에서 시작했습니다. 소련사람들은 60년대 말 까지 대부분, 체제를 지지했습니다. 공산주의 사상 공산당이 했던 약속을 믿었습니다. 자기나라가 누구나 행복하게, 풍요롭게, 살 수 있는 사회를 건설할 줄 알았습니다.


물론 미국을 비롯한 서양의 나라들보다 잘 못산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또는 소련사람들이 정치의 자유에 대해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하지만 1960년대 말까지 소련사람들은 자기들의 나라 잘못을 옛날 봉건주의 유산 때문에 그렇다고 생각했습니다.

 미국과의 교류가 활발해진 1960년대 말부터 소련사람들 가운데 소련정치제도에 대해서 의심이 깊어졌습니다. 외국과의 격차가 세월이 갈수록 넓어졌습니다. 또 교육수준이 높아지고 있는데 수많은 소련 사람들은 자기의견 자기 견해를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자유를 희망했습니다. 이 체제하에서는 이와 같은 자유를 가질 수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60년대 말부터 소련에서 이러한 경향이 나타났습니다. 지식인부터 이러한 생각이 확산, 세월이 갈수록 전사회로 확산했습니다. 70년대 말부터 사회주의, 공산주의를 믿는 사람들이 거의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나이가 조금 많은 사람들은 사회주의를 유지 한다 하도라도 개혁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젊은 사람들은 사회주의가 희망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이 요구하는 것은 자유민주주의 자본주의 시장경제였습니다. 완전한 자본주의를 기대하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았지만, 압도적으로 사회주의와 자본주의를 동시에 원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진짜 공산당 체제를 지지하는 사람은 70년대에 헤아릴 수 없었지만 85년경에 고르바쵸프가 등장 그는 이와 같은 사상을 대표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고르바쵸프는 농민출신이지만 60년대 모스크바 종합대학을 다녔고, 공산독재에 대한 실망도 컸습니다.


당시 공산당간부들은 평범한 주민들보다 공산주의에 해한 실망이 더 컸습니다. 사실은 사정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소련이 미국보다 격차가 어느 정도인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미국이나 서독사람들이 누리는 정치적 자유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80년대 중엽, 85년 이후 고르바쵸프 정치를 지지하지 않는 사람이 거의 없었습니다. 고급 간부들로부터 시민들이 다 지지했습니다. 고르바쵸프 총 비서는 처음에 자본주의로 이행할 생각은 없었고, 사회주의 개량 사회주의 개방이 목적이었습니다.


서양경제성과, 정치적 자유에 대한 보도를 지양했습니다. 사실대로 보도했습니다. 옛날처럼 공산당을 무서워하지 않고 사실을 사람들에게 알려 주었습니다. 이와 같은 보도를 보는 사람들은 실망하기도 했습니다. 그들의 요구는 개혁보다 급진적 개혁을, 완전한 자본주의 체제를 요구했습니다. 빠른 속도로 경제는 어려워지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때 장사가 시작했다. 87년 88년, 90년대 초부터는 장사가 성행했습니다. 결국 91년에 소련체제가 무너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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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03.01


[김순덕 칼럼] ‘별놈의 진보’ 그 잠꼬대
 

 

이스라엘에 관심 없는 사람도 키부츠는 대충 안다. 똑같이 일하고 똑같이 먹는다는 공동체 말이다. 그중 가장 오랜 97년의 역사를 지닌 ‘데가니아’가 지난주 주민 85%의 찬성으로 시장경제를 선언했다. 이스라엘 영자지 하아레츠는 ‘암울한 현실이 유토피아를 눌렀다’고 했다.

 

세계화와 좌파 경제는 안 맞는다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쓴다는 이상(理想)은 아름답다. 그래서 카를 마르크스는 공산주의를 역사의 종착지로 설파했고, 진보적 지식인이라는 놈 촘스키도 1950년대 잠깐 살았던 키부츠를 고매한 연대(連帶)사회로 칭송했다.

 

그 이상향이 1980년대 중반부터 이스라엘 경제 침체 속에 흔들리고 있다. 40%가 파산했고 30%는 빈곤선 이하다. 현재 인구의 2.6%가 사는 268개의 키부츠 중에 개인적 자유와 경쟁보다 사회적 책임과 평등이라는 좌파 이상을 고수하는 곳은 많아야 40개일 정도다.


‘진화’하는 키부츠는 능력대로 일하고 일한 만큼 가져가는 시장경제를 받아들였다. 데가니아도 1년 전 시장경제를 시범 도입했더니 별안간 수입이 늘고 복지지출이 줄었다. 빈둥거리던 사람들까지 일을 찾았다. “일과 보상을 연결시키니 모두에게 이익이더라”고 이 나라 노동당원이 슬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고 했다.

 


소련이 무너지고 중국이 시장경제로 돌아선 지금도 좌파는 “방법이 잘못됐지 방향은 옳다”고 강변한다. 대통령은 2004년 탄핵사건 뒤 “합리적 보수, 따뜻한 보수, 별놈의 보수를 다 갖다 놔도 보수는 바꾸지 말자, 이거다”라며 진보를 그 대척점에 놨다. 이 말이 맞는다 치자. 거기에 교조적 진보, 유연한 진보, 별놈의 진보를 다 갖다 놔도 진보는 시대를 잘못 만났다.

 

‘평등의 한계: 키부츠의 통찰’이라는 지난해 논문에서 미 스탠퍼드대 랜 아브라미츠키 교수는 “생산성 높은 사람일수록 키부츠를 떠났다”고 했다. 상품과 자본 인력이 세계시장을 넘나드는 세계화 속의 자유 사회에선 어떤 이데올로기도 개인의 발목을 잡을 수 없다.

 

세계화와 함께 몰아닥친 기술정보화는 개인의 창의와 기업의 혁신에 놀랄 만한 부가가치를 안겨 주고 있다. 1990년대 초까지도 독일과 일본에 추월당할 것을 걱정했던 미국 경제가 기술정보산업과 맞물려 눈부시게 성장한 것도 이 덕분이다. 요즘 유럽 경제의 회복 역시 집단논리와 시장규제에 억눌려 온 기업들이 알게 모르게 미국식 유연성을 도입했기 때문이라고 영국의 이코노미스트지는 분석했다.

 

영국은 1980년 영국병으로 고사(枯死)하기 직전에야 좌파 경제를 물리쳤고, 인도 역시 1990년대 경제 파탄을 맞고서야 시장을 받아들였다. 인도 출신의 미 컬럼비아대 교수 자그디시 바그와티는 “영국에서 좌파경제학을 공부했던 나와 만모한 싱(1990년대 인도 재무장관·현 총리)이 1950, 60년대 시장을 못 믿고 정부 간섭을 제도화했다가 개혁하느라 고생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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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donga.com/fbin/moeum?n=column$i_64&a=v&l=9&id=2007030102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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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9.

 

[ ..... 카스트로.... 쿠바의 공산주의 경제모델은 자국에서조차 더 이상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다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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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남은 것은 북한과 쿠바. 하지만 쿠바마저도 북한을 버리고() 앞선 국가들의 전철을 밟고 있다. 피델 카스트로 병환으로 권좌를 물려받은 라울 카스트로 국가평의회 의장은 집권 이후 꾸준한 경제개혁을 통해 사실상의 자본주의 경제모델로의 편입을 모색하고 있는 중이다.


이런 가운데 피델 카스트로 전(前) 국가평의회 의장은 최근 미국의 '애틀란틱'지와의 인터뷰에서 쿠바의 공산주의 경제모델은 자국에서조차 더 이상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그는 쿠바의 경제모델이 다른 나라에 전파할만한 것이냐는 해당 기자의 질문에 쿠바의 모델은 우리에게조차도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고도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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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모든 문제는 독재권력에 의한 폐쇄성에 있다. 그 폐쇄성은 또한 독재권력을 유지시키기 위한 가장 강력한 수단이다. 북한의 독재권력과 폐쇄성은 결국 한 마음 두 몸이다. 분리할 수가 없다.


따라서 외부의 지원도 독재권력과 폐쇄성을 유지하는 범위 안에서만 허용된다. 북한의 개혁개방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자들은 개혁개방의 의미 자체를 모르거나 알고서도 북한의 독재체제를 유지시켜 주기 위해 아름다운 말을 골라 쓰는 음흉한 인간이다.

 

외출할 때마다 오색구름이 떠오르고, 손을 치켜들 때마다 수만 명이 발을 동동 구르며 환호하고, 골프채를 휘둘렀다 하면 홀인원하거나 이글하거나 버디하고, 눈살을 찌푸릴 때마다 식량과 달러가 배떼기로 굴러오고, 헛기침할 때마다 대포나 총을 맞아 피를 토하며 죽는 자가 멀찍이 떨어진 바다나 가까운 바닷가에서 속출하는데, 이 자폐증 환자가 어떻게 독재권력이 거의 통제할 수 없는 시장경제를 받아들인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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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의 가장 큰 경쟁력은 오렌지족의 불법폭력시위 실력이 아니고 대기업의 경쟁력이다. 이 대기업이 바로 오렌지족의 부모다.


오렌지족들이 권력을 잡은 이후, 오렌지족 권력과 한 통속이 된 오렌지족 노조와 오렌지족 지식인들이 자해공갈단을 구성하면서, 한국의 대기업이 받은 20년 수모와 무수한 도산과 국제 위신 추락과 경쟁력 하락을 생각해 보라. 그와 더불어 중소기업의 가중된 고통을 생각해 보라.

 

좀이 누렇게 쓴 19세기의 자폐자해경제 찬양 경제교과서를 펼쳐놓고 거기에 한국의 대기업을 끼어 맞추는 것에 신바람을 낸 결과는?

잘하면 잘할수록 수모를 당하고 못하면 못할수록 천문학적인 공적자금을 두둑이 받고 밉보이면 시장에서 사라지고 곱보이면 국민기업이 되어 국민의 혈세로 생명을 유지하고, 이게 바로 자해공갈단이 한 짓이 아니고 무언가. 이게 바로 자해경제가 아니고 무언가.  

 

 자폐경제는 처절히 망할 수밖에 없고 자해경제는 시름시름 망할 수밖에 없다. 나랑 너랑  함께 잘사는 시장이 한쪽에서는 탄생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되살아나고 커질 때, 법질서 안의 자유민주가 무질서의 민중민주를 엄히 다스릴 때 비로소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입각한 한민족 공동체가 탄생할 것이다.

 

자폐증 환자가 최고 권력자의 자리에서 쫓겨날 때에, 오렌지족 자해공갈단이 콩밥에 감지덕지할 때에 중국의 기적을 능가하는 21세기의 새로운 기적이 한반도에서 한 번 더 일어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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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이 아니라 소비자 즉 대중이 시장을 좌우하고 또 시장은 나아가 생산을 좌우하는 것이 시장경제라면 그것이 대중적인 경제가 아니겠는가. 그래서 시장경제는 민주주의적인 경제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북한에서는 상품 앞에서 구매자들이 절대로 평등하지 않다. 거기서는 권력이 있는 자와 없는 자가 차별시 되는데 누구는 사도 누구는 구경만 할 수 있을 뿐 돈이 있고 사고 싶어도 못 산다. 이러한 구매의 불평등을 초래한다.


국가가 사라고 지령하는 물건만을 살수 있는 공급제도 하에서 주민들을 주는 대로 먹는 우리 속의 짐승처럼 주는 대로 사서 쓰는 <우리 속의 사람>으로 세상에서 가장 가련한 소비자로 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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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04 -- 1910    이승만  '독립정신'

 

[ .....  자유를 존중하는 것은 나라를 세우는 근본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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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9세의 李承晩, "첫째, 우리는 세계에 대해 개방해야 한다"


李承晩이 1904년 獄中에서 썼다가 출옥한 뒤 출판했던 '독립정신'을 읽어보면 그는 20代 후반에 이미 정신적으로 대통령 자리에 올랐다는 느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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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정신’ 에는 ‘요약과 결론’에 해당하는 ‘後錄’이 있다. 여기서 뽑은 말들을 소개한다. 이 글이 104년 전 29세의 조선 청년에 의하여 쓰여졌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읽어보자.


첫째, 우리는 세계에 대해 개방해야 한다.


1. 우리는 세계와 반드시 교류해야 한다. 2. 通商(통상)은 서로에게 이익이 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3. 오늘날 通商은 나라를 부강하게 하는 근본이다. 4. 외국인들이 우리나라에 오는 것은 우리를 해치려는 것이 아니라 서로에게 이롭게 하기 위한 것이다. 5. 외국인들을 원수같이 여기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둘째, 새로운 文物을 자신과 집안과 나라를 보전하는 근본으로 삼아야 한다.


1. 외국인들이 들어오는 것을 막을 수 없다. 2. 경쟁하는 마음이 없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 3. 외국인의 압제에 대해선 싸워야 한다. 외국인에게 뭇매를 맞은 한국인이 그 외국인을 죽이고 경찰에 자수한 일은 칭찬할 것이 못 되지만 그 의지는 본받을 만하다. 4. 동양의 옛날 책보다는 새로운 학문에 대한 책들을 공부해야 한다. 무엇보다 먼저 국제법, 통상조약, 우리나라 역사와 지리에 대해 공부해야 한다. 5. 과거의 제도 중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던 것조차도 버리고 바꿀 수 있다는 각오를 가지고 사람과 가정과 나라가 모두 새롭게 됨으로써 우리나라가 영국과 미국과 같이 되도록 한마음으로 힘쓰면 일본을 염려할 필요가 없다. 6. 물건을 만드는 것이 무엇보다 긴급하다. 7. 신학문을, 한글로 번역하여 한문을 모르는 사람도 배울 수 있도록 해야 한다. 8. 공부하는 것은 잘 살기 위한 투자이다. 9. 유학을 간 사람은 나라를 위해 시급한 것부터 공부하여야 한다. 귀국할 형편이 못 되더라도 뿌리치고 반드시 귀국하여 어두운 세상에 등불이 되어야 한다.


셋째, 외교를 잘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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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째, 나라의 주권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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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째, 도덕적 의무를 소중히 여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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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째, 자유를 소중히 여겨야 한다.


 1. 자유를 자기 목숨처럼 여기며 남에게 의지하지 말아야 한다. 2. 다른 사람의 권리 또한 존중해야 한다. 우리 집 종이나 다른 사람들의 하인, 또는 부녀자들과 아이들까지 모두 존중해야 한다. 3. 개화되지 못한 사람들에게 자유를 주어서 폐단이 있더라도 윗사람들이 어느 정도 손해를 보는 것이 옳다.


3. 부디 깊이 생각하고, 고집부리지 말고, 모든 사람들이 힘껏 일하고 공부하여 성공할 수 있도록 자유의 길을 열어놓아야 한다. 그렇게 하면 사람들에게 스스로 활력이 생기고, 관습이 빠르게 변하여 나라 전체에도 활력이 생겨서 몇 십년 후에 부유하고 강력한 나라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자유를 존중하는 것은 나라를 세우는 근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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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korea318.com/client/board/view.asp?sEtpnum=7342&sEtpTp=BA01&cPage=11
 
"자유를 존중하는 것은 나라를 세우는 근본이다” 
哲人통치자 李承晩이 선물한 자유가 국가경쟁력의 源泉이다. 
 
 趙甲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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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인간이 고안해낸 가장 유익한 선거는 복수정당 복수후보에 의하여 투표경쟁을 통해 가장 많은 표를 얻은 사람을 주민의 대표자로 뽑는 제도입니다. 이런 선거제도를 통해 무소속 후보자도 나올 수 있고 일정한 요건을 갖추면 누구나 정당을 설립할 수도 있습니다.


또한 모든 후보자는 정견을 발표하고 정책을 제시하여 유권자들에게 득표경쟁을 할 수 있도록 제도적 보장을 마련했습니다. 유권자는 각 후보의 정견과 정책, 도덕성, 인품 등을 고려하여 자기의 마음에 든 사람을 고를 수 있도록 하였는데 이것이 한국을 비롯한 서구민주주의 사회에서 실시하는 일반적인 선거의 현실이요 실상입니다.

 

그렇다면 북한의 사정은 어떨까요. 말할 필요도 없이 주권재민은 커녕 기본적인 선거조차 이뤄지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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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북조선에서 선거는 대개 최고인민회의의 대의원을 비롯한 각급 인민회의 대의원을 선출할 때 실시됩니다. 북조선의 모든 정치과정은 철저히 조선노동당의 통제 하에 이루어지기 때문에 선거가 ‘민의를 수렴하는 통로’로 기능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조선이 선거를 실시하는 이유는 이른바 ‘민주주의적 중앙집권제(민주집중제)라는 이름아래 정치과정이 주권재민의 사상을 반영하고 민주주의 원리와 제도에 따라 운영되고 있는 것처럼 대내외에 떠들기 위한 것입니다.

 

북조선에서는 선거법에 따라 각 선거구 별로 복수 입후보를 허용하고 있으나, 실제로는 단일후보에 대한 찬반을 묻는 형식으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후보선출 방법은 각 직장, 사회단체, 주민회의 등에서 선출할 수 있다고 규정되어 있으나, 사실은 중앙당 조직지도부에서 선거 수개월 전에 후보자로 적합한 인물을 내사에 명부를 작성합니다.


대의원의 선거 진행절차는 선고 공고 전에는 중앙당에서 각 도당에 후보자 선정 지표를 하달하고 이를 기초로 각 도당에서 선거구별로 후보자를 선정해 중앙당에 제출하며, 중앙당에서 최종심사해 후보자를 확정합니다. 결국 중앙당에서 후보자를 결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선거 공고 후 선거 60일 전에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에서 선거를 공고하고 중앙선거위원회를 조직합니다. (선거법 11·18·19조) 그리고 선거 공고 10일 이내에 도(직할시)와 시군선거위원회를 조직합니다. (선거법 23조) 선거 40일 전에 선거구를 조직(선거법 17조)하며, 선거 공고 5일 후와 선거 3일 전 사이에 후보자 추천 및 등록이 완료됩니다.


선거 15일 전에 선거인 명부가 작성되며(선거법 28조), 선거 3일 전에 후보자 공시가 이루어집니다. (선거법 47조) 한편, 투표율과 찬성률을 보면 제3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부터 100% 투표에 100% 찬성을 선전해오다가 9기와 10기 선거부터는 99.78%, 99.9% 투표, 100% 찬성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100% 찬성이란 북조선 헌법에 일반·직접·평등·비밀선거를 규정(제89조)하고 있으나 실제로는 자유의사에 의해 투표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100%에 가까운 수치는 북조선 체제에 대한 주민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선전하고자 하는 것이지만, 역설적으로 혹심한 주민들의 정치적 무권리 상태를 반증하고 있습니다.

 

북조선에서는 우리가 생각하기 힘든 방법으로 투표를 하고 있는데 1·2기 대의원 선거에서는 찬성자를 흰색 함, 반대자는 검은색 함에 넣는 흑백 투표함 제도를 채택했으나, 1962년 3기 선거 이래 단일 투표함제로 바뀌었습니다. 찬성자는 그대로 함에 놓고 반대자는 X표시를 하여 투표함에 넣게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감시자는 누가 X 표시를 하는지 손쉽게 판별할 수 있도록 하여 사실상 100%찬성투표를 유도하고 있습니다. 반대의사가 있더라도 반대할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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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쟁이 국가가 되어 남자 군인의 키가 평균 162cm밖에 안 된단다. 군화는 평균 250mm라고 한다. 이 지구상에서 청년들이 아버지 세대보다 키가 작은 유일한 나라라고 한다.


두만강에는 탈출하다가 죽은 시체가 둥둥 떠다닌다. 이것을 한국의 TV에서 직접 찍어서 전국에 수십 번 방영했다. 한창 재롱을 떨고 장난치며 뛰어 놀 아이들마저 학교도 못 가고 꽃제비가 되어 만주 벌판에서 도둑고양이처럼 살고 있는 것도 한국 TV에서 다 보여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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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한 173 c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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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은 참신한 인상을 주었다. 그들은 중국인·일본인과 닮지 않은 반면에 그 두 민족보다 훨씬 잘 생겼다. 한국인의 체격은 일본인보다 훨씬 좋다.…성인 남자의 평균 신장은 163.4cm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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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숍 여사의 글이 100년 전에 쓰인 것을 감안하면, 한국 남성의 평균 키는 100년 동안 약 10cm 증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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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최근 북한의 군입대 허용 키가 1m 45cm까지 내려갔다며, 북한의 군대는 육체적, 기술적, 사상적으로 허물어져 가고 있다고 진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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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한민국  ]

 


일인당육류소비 43kg : 자동차 1대당 인구 2.5명 , 해외여행 1900만명.

 


2007년  국민소득  2만 45달러 

2005년  연간 해외여행 1천만명 돌파 

2006년  자동차  3명당 1대 , 가구당  0.87 대 , 1600 만대

2006년  한국인 평균수명 79.1세.OECD 평균 넘었다

 

2007년  국제특허출원 세계 4위 ( 미국·일본·독일 다음 )

2007년  대학 진학률 83.8%로  세계 최고 수준 ( 해외 주요국 대학 진학률 50% 안팎 )

2008년  대한민국 수출 4000억 달러 달성.

 

2010년  대한민국 수출 7위 ( 이탈리아, 벨기에 추월 )

2011년  무역 1조 달러

2011년   ITU  정보통신기술 발전지수 '세계 1등'

 

2012년  삼성전자  글로벌 휴대폰 판매 1위  

2013년  삼성  글로벌 브랜드 파워 1위


2015년  출국자수  1900만 , 일본 추월

 

 

[....일인당 평균 육류 섭취량은 2002년 33.4kg ......]

[....한국인의 일인당 생선 소비량은 66.9㎏으로 일본을 앞섰다 ......]

 

 

 
    *

[.... 2006년 이종석 통일부 장관은 북한의 1인당 GDP가 400$ 정도 된다고 추정했다. ......   ]

 

 

 

  *  소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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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parison between USSR and US economies (1989)

according to 1990 CIA World Factbook

 


 USSR   US

GNP (PPP adjusted, 1989) US$2.6595 trillion  US$5.2333 trillion

Population (July 1990) 290,938,469  250,410,000

GNP per capita (PPP adjusted) US$ 9,211  US$ 21,082

Labour force (1989) 152,300,000  125,557,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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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1989 many roads were not all-weather roads but rather were unimproved and unstable in bad weather, especially during thaws and rains. Except for 25,000 kilometers of all-weather surfaces, all rural roads in the European and Central Asian parts of the country, as well as all roads in Siberia and the Far East, were little better than dirt trac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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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viet Union

Passenger Transportation

 

In the mid-1980s, buses were the primary means of passenger transportation, accounting for almost 44 percent of traffic on all transportation systems in 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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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the 1980s, private automobiles were rare compared with most Western nations. In 1985 the Soviet Union had 11.7 million automobiles. Some Western authorities believed that about one-third of them were owned by the CPSU or the govern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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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tween 1971 and 1986, average life expectancy fluctuated and actually decreased in some years before stabilizing at about seventy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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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cording to the European Comparison Program, administered by the U.N, the size of the Soviet Economy was 36% of that in the United States in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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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기준으로 러시아에서 자동차는 1550만대에 불과했습니다. 2006년에 자동차 수는 3500만대에 달했으니 10년동안 2배정도 성장한 것입니다. 2014년 현재 러시아에는 5000만대의 자동차가 있습니다.


모스크바에서 80년대 말에 1000명당 60대의 자동차가 있었지만 2013년 기준으로 310대로 증가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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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란코프] 시장경제와 계획경제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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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주의는  망했습니다.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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